되새기고 싶은 글들

2019년 12월 1일

Margaret K 2019. 12. 2. 20:46


12월 31일 화요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8)


  성체가 하느님이라면 그 성체를 영하는 사람도 하느님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하느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하느님이 되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이 하시는 행동이 됩니다. 자주 “나는 하느님입니다!”를 고백합시다. 조금씩 저급한 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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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요한 복음서의 서문을 읽었습니다공관 복음서는 구약에 예언되시는 분이방인의 구원자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요한 복음은 차원이 다르게 이야기합니다독수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듯이시간과 공간의 유한함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합니다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말씀은 빛이었다고 합니다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합니다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눈이 먼 사람은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틀에서는 말씀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영적인 눈을 뜨는 사람은 말씀을 볼 수 있고그 말씀이 진리이며진리가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거라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성체성사로 자라나며교회의 가르침으로 어른이 되고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꿈을 함께 해야 합니다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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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이 말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실 ‘사랑’은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은 허무한 인간 존재 속에 숨어 있는
‘영원성의 씨앗’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사랑 실천’은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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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월요일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루가 2,36-40)


  미국에서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봤더니 79%가 천국에 가실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갈 확률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87%가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들 마더 데레사보다 잘 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고 성전에서 남들처럼 할례를 받기 위해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는 여인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커지셔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작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남편과 7년을 살다가 사별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자신의 낮은 처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밖에 의탁할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오직 자신을 작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구원자로 보이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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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하나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뢰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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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일요일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마태오 2,13-15.19-23)


 재물명예권력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그런데도 우리가 오늘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마리아요셉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무엇일까요맞습니다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비가 오는데키 큰 사람하고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해결 방법의 하나는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이렇듯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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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요셉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로 알아들었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가는 일도, 또 이집트에서의 피난 생활도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과 기도로 그 고난을 견디었을 것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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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마태 2,13)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헤로데의 메시아 아기 살해 계획을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밤이었을텐데도 천사는 "날이 밝는 대로..."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간에 "지금 당장"이라는 조건이 붙은 듯합니다. 그만큼 긴박하다는 뜻이겠지요.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마태2,14)

요셉은 즉각 행동을 개시합니다. 밤은 길 떠나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갓난아기와 산모까지 보호하며 움직여야 했지요. 하지만 요셉은 기꺼이 순종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5).

요셉의 순종은 성자의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과거 예언자를 통해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마리아는 요셉을 통해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요셉을 따릅니다. 순종의 뿌리에는 상호적 믿음과 존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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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토요일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3-18)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거지가 다가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거지를 바라보면서 “형제여, 내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금전이 없으니 용서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라고 불러준 것이 나에게는 금전을 준 것 보다 더 기쁩니다.”라며 기뻐했습니다. 한 번을 만나도 평생 만난 인연보다 더 친밀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쏟는 것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허사가 되지 않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무엇이 관계의 친밀도를 높이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 친밀한 관계일까요? 아무래도 이해타산 없이 하늘이 맺어준 관계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보통 가족 간에는 이해타산이 없기 때문에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가족이니까요!”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장 동료들에 대해 왜 만나느냐고 물어보면 “먹고 살아야하니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관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를 어떠한 목적으로 보며 만나는 이해타산적인 만남입니다. 위 이야기의 톨스토이처럼 이웃을 형제로 바라보는 ‘나와 너’의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너’와의 관계가 완전해지려면 상대를 ‘형제’로 만들어준 초월자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초월자를 부버는 ‘영원한 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명으로 여기기에 누구를 만나든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순교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였기에 예수님과 매우 친밀도가 높은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면 될 수 있는 한 보상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도록 섭리하셨다면 그 아기들을 그냥 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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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된 지도자들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희생당한 아기들, 오늘날도 불의한 정치로 인해 세계 도처에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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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기쁨의 축제인성탄 8부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8부 축제를 시작하면서 탄생의 기쁨을 기념하는 축제에 이어곧바로 죽음의 고통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그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을오늘은 죄 없이 죽은 아기들의 죽음을기쁨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우리는 아기 예수의 지상탄생의 기쁨과 동시에예수님의 죽음과 꼭 닮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천상탄생의 기쁨을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순교한훗날 예수님께서 꼭 닮게 될 무죄한 어린이들의 천상탄생의 기쁨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발생한 무죄한 아기들의 이 죽음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일입니다비록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못했지만분명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 첫 순교자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순교는 삼중의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곧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요그 어머니들의 순교요동시에 마리아의 순교입니다곧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아픔마저 끌어안으셨던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순교입니다또한 마리아는 또 다시 십자가의 아들의 순교와 함께 또 다시 순교를 당할 것입니다.

사실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그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아기들의 고통과 죽음은 그들에게는 한 순간이고 고통의 끝이었겠지만그들을 잃은 어머니들에게는 그쳐지지 않는 애끊는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입니다더구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지고 아팠을 것입니다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죄 없이 죽은 모든 아기들의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할 수만 있다면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많은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이토록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던 마리아는 때가 되면또 다시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가는 당신 아들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이토록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이것은 참으로 진정한 사랑의 순교일 것입니다아기 예수도 훗날그렇게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사랑으로 순교를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하잖게 여기지 않으십니다그들이 싸우기도 전에 승리하도록 하시고곧바로 거룩한 삶을 누리도록 하십니다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죽은 죄 없는 아기들을 맨 먼저 그리스도를 증언한 첫 순교자들로 삼으십니다.

그리하여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은 아기들과 그 아기들의 어머니들과 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인류 구원에 동참시키십니다그래서 오늘은 슬픔을 넘어서하느님의 구속신비를 드러내는 기쁨의 축일이 됩니다.

한편마태오 복음사가는 헤로데가 자행한 이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을 두고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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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금요일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2-8)


 베드로를 따라 무덤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주님의 몸이 안치된 곳에 수건과 아마포가 있는 것을 보고, 그분의 몸을 누가 꺼내 가지 않았던 것을 알고 믿습니다. 요한 복음서와 서간들 안에 수집된 그의 증언은 모두 스승님께서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설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안봉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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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을 쌌던 수건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면 피 묻은 수건을 그렇게 잘 개켜놓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로 부활의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볼 수 있는 눈이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성령을 볼 수 있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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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 사도에게 있어 평생에 걸친 화두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틈만 나면 사랑을 외쳤습니다. 노인이 되어서도 입만 열면 “서로 사랑하라!”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회 기초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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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시작과 마침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셨습니다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그렇습니다아마포는 놓여있었고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또한이렇게 잘 단정된 수의와 수건은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한 경비병들의 거짓 증언에 대한 반대 물증이 됩니다여기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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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또 요한 1서를 쓴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5,13).”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2-3).”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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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의 믿음은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특별한 차원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다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사랑연민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이 필요하다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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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목요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오 10,17-22)


사람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해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고 마침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사실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이는 바로 나보다 잘난 꼴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가득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59-60)하고 외쳤습니다.

 성 에드워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은 양순함”(마태10,16)으로, 강한 것을 부드러움으로 이깁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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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 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고 하신다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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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수요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8)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진 아주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낸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큰 외로움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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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목동들은 어떻게 이 성탄의 기쁨에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들만이 하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하늘은 모든 사람이 원하면 바라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목동들만 하늘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는 땅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욕구’를 말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땅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하늘의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나더라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해줄 새로운 다윗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탄만으로는 기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사용법이 있습니다. 그 사용법에 따라 성탄이 기쁠 수도 있고 금방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기예수님 사용법을 성체성사를 통해 연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이나 성체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성체로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성체성사를 영하면서 기쁘지 않다면 성탄도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기쁘지 않은 이유는 성체를 영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또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언가 들어주셔야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 안에 담긴 사랑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 위의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거처로 삼으시기 위해 오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칩니다.

      우리도 성체를 보며 더 이상 청할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야 성탄도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만 있으면 기쁠 수 있듯, 우리는 성체만 있다면 그 기쁨을 다른 어떤 것에도 빼앗길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유일한 보물이 함께 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은 요술 방망이처럼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며 내 옆에 계십니다. 대신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믿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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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태생의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으로서 신비가이자 대 영성가였던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권고를 올 성탄 기도주제이자 묵상거리로 삼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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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빛이 누구만을 선택적으로 비추지 않듯이, 참빛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인종과 국가, 성별, 심지어 종교까지 주님의 빛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말씀께서 사람 사이에 들어오시기 위해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같아지고 싶으셔서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떠안고 들어오셨지요.

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약함을 몸소 겪는 것,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몸소 가난을 겪으며 사는 것 사이에는 많은 층위가 존재합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실존을 바닥까지 떠안으신 그분께는 인간의 약함과 한계, 가난이 남의 일이 아니라 더 절절하고 애끓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비와 용서에 당신 목숨을 거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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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화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가 1,67-79)

 

 받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내어주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는 내어줄 생각을 하지도 않고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밀떡과 포도주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성체성혈은 당연하게 받아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십일조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서 오시는 예수님만 기다리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지도 않고 성체성혈만 달라고 보체는 격입니다.

      새로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볼 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받아 모실 때, ‘나는 무엇을 드려야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을 만날 때 부담스러워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면 그때 만나라고 충고합니다. 그만큼 내가 그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온전한 계약의 관계로 보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하면 상대를 이용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상대의 행복만을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도 그래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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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브라만교불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탄생과 문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문명과 문명이 만나면서 서로의 종교는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다른 종교의 교리와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워지기도 합니다. ‘창조지혜선과 악윤회영지구원심판천국연옥지옥부활깨달음의 개념이 종교의 틀에 들어왔습니다.

화이트 헤드는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라는 책에서 세계종교 가운데 보편성을 지향하는 불교와 기독교를 가장 합리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그에 따르면 불교와 기독교는 붓다와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불교는 인간의 구원을 인간과 우주 만물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통해 도달하는 반면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활동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 달성하려고 합니다그래서 붓다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리를 준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다윗은 하느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이야기합니다자신은 화려한 궁에 살면서 하느님은 장막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뜻을 전하고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낸다고 하십니다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 갔습니다성전은 파괴되었고낯선 곳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준 것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준 예언자였습니다예언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다시는 고통도눈물도 없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2019년 12월 24일입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오늘은 이 질문으로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요?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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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월요일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루가 1,57-66)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그러나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의 이 모습에 우리는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늘 부족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늘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견해와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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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일요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마태오 . 1,18-24)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가문과 족보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두에 두고(1,1-17) 이어서 바로 오늘의 본문을 배치합니다.(1,18-24)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히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던 요셉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법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과, 반대로 고통과 위험, 굴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열망, 그 견고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김혜순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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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토요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가 1,39-45)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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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 교회는 마리아의 위대성과 복되심의 이유에 대해서 눈여겨봅니다. 우리도 꼭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셨고 직접 출산하셔서 복되시기도 하지만, 더 복되신 이유는 예수님을 낳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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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분!"

이 만남으로 그들도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금 남아 있었던 불안이 말씀히 사라지고 자기들의 임신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임을 서로에게서 확인하며 함께 행복 충만하였을 겁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듯

그 복됨과 행복을 아는 사람만이 그렇게 ㅁ라할 수 있는 거기 때문이고

그 복됨과 행복을 아는 것은 자신도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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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금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사람은 본래 모기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웃을 볼 때 이용하려고만 하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힘으로 사랑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그 사랑을 배운 첫 번째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 뜻을 향한 ‘아멘!’이 세상에 구원을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분이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세상에 구원을 불러올 수 있도록 하느님 뜻에 항상 마음이 열려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맺어진 관계는 싸우더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사랑은 곧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야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겐 이용당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임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고 소명입니다. 하느님 뜻이라고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지만 내 힘으로 하는 모든 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고 남을 이용하는 행위가 됩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관계라고 믿으면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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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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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무턱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우리도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긴 후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그리고 맡기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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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긴 성전 성소에서 전해졌지만우리 주님의 탄생예고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에서 전해집니다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또한 천사의 인사말대로마리아는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그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제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이영근신부-




12월 19일 목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1,5-25)


사라, 레베카와 같은 많은 거룩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사랑한 라헬도 아이를 낳지 못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역시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습니다. 

이 모든 예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커다란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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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희망하는 것을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는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벙어리가 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발 자아와 대화 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대화가 생각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어린이들은 우울증이 없을까요? 부모를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믿으니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하니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는 사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는 자녀들이 생각이 다시 많아지고 그것은 부모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춘기를 기쁘게 보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새로운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춘기는 지속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입니다. 새로운 부모인 하느님을 믿어 그분의 소명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기쁨은 벙어리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을 때에만 오는 상급입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벙어리가 되는 길은 하느님께 수다쟁이가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 하느님과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와의 대화가 끊깁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울함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자아와 굳이 오랜 시간 대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벙어리가 되어야만 말씀이 믿어집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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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백성과 함께 즐기는 마음으로 여민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민락의 의미는 백성과 함께 즐기자.’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용기를 주었습니다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초는 자신을 태울 때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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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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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두 쌍의 부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던 차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주 특별한 아들을 갖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우리는 먼저 아이 못 낳는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여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만납니다. 자손의 수가 곧 재산이고 힘이던 시대에 생산자 역할에서 소외된 여성의 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지요. 그 기다림이 주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어 가련했던 그 손으로 아기를 안게 되지요.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그녀들이 누린 이 기쁨과 환희가 곧 성탄의 전조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당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억압과 괴롭힘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할 미래의 판관인 이 아기가 바로 삼손이지요. 사랑과 배신 등 극적인 요소가 듬뿍 담긴 삼손 이야기는 세간에서도 쉽게 회자될만큼 유명합니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판관 13,24).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15).
복음에서도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잉태를 전하는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꼭 생물학적으로 출산의 능력을 받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성체를 영하는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서 성탄이 이루어집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에게서 탄생하신 말씀께서는 나의 미소와 격려, 사랑과 배려, 용서와 동행의 발걸음으로 육화됩니다. 거기서 흘러나온 구원의 파장은 개인과 이웃, 친지와 지인의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구원에 작은 빛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간절히 아기를 기다리는 마노아의 아내이고 엘리사벳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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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수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오 1,18-24)


 얼음을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보관할 수 없고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보관하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그릇이란 요셉처럼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놓인 것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된 하느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말구유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당신께 합당한 사람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구유가 어떤 요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말구유만큼 아기가 놓이기에 비천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인간에게 머물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본성이 겸손이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이 되기 전에 이웃을 험담하거나 판단하는 마음부터 버립시다.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분을 맞이하는데 내가 타인의 잘못을 꼬집는 사람이라면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의로운 사람만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는 말구유와 같은 처지의 죄인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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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그러나 꿈에 천사를 만났고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날은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그날은 만들어지는 겁니다이제 곧 성탄입니다내가 성탄을 향해 가야만 성탄은 나의 성탄이 될 겁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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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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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라는 말은,
요셉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임무를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실 때,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루카 1,27).
이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없고 요셉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요셉의 이야기는 없고 마리아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을(같은 이야기를) 두 복음서 저자가 각각 다른 각도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왜 요셉에게는 잉태 후에 알려 주셨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잉태 전에 미리 요셉에게 알려 주셨더라도, ‘예고 - 번민 - 응답’이라는
구조 자체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고, 일의 결과도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요셉이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을
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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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느님께서
다윗의 자손
요셉을 받아들이듯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받아들여야
깨닫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맞아들여야
서로를 알게되는
삶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와같이 
받아들임과
맞아들임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도
맞아들임에서
시작합니다.

맞아들임이
맡기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시작은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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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 예례미아서는 의로운 싹에 대해 얘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요셉의 의로움이 처음에는 인간적인 의로움이었지만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만나면서

한 민족을 구하는 의로움을 넘어 온 인류를 구원하는 싹이 된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12월 17일 화요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오 1,1-17)


세상에서 어떠한 법칙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법칙을 만든 창조자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개미집이나 벌집을 보더라도 각자의 시스템대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벌들도 각자의 역할이 있고 벌집의 모양도 6각형이 수없이 쌓여진 형태입니다. 누군가 잘 만들어진 벌집을 보면서 저절로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규칙이 있으면 창조자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자연법칙의 총합인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자동차를 타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을 운전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얼핏 보면 참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누가 책을 쓸 때 가장 앞에 의미 없는 이야기부터 꺼낼까요? 누구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제일 앞에 놓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긴 족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의 계획 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그들은 또 다른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고 그 족보상 새로운 다윗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며 유다인들을 설득하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칙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메시아가 아닐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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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이 번듯해야 행세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의 조상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첩의 자식을 드러냄으로서 구박과 멸시 속에 살아가야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내 부모, 혹은 윗대의 조상에서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러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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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서 끝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첫 번째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시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에서 시작해서 아담을 거쳐서 하느님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족보는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는 길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족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고, 생명의 책은 아닙니다.
구원받을 사람들, 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책은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기록하는 현재와 미래의 책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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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족보에서 육에 근거하는 인간 제도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겸손을 만납니다. 어느 족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족보 안에서도 그리 정당하거나 반듯할 것 없는 인간사가 얽히고섥힌 가문의 민낯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사가가 족보에 숨김 없이 이름은 넣은 다섯 여인들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치우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후손 없이 남편을 잃은 뒤, 가문의 대를 잇고자 창녀로 꾸며 시아버지의 아들들을 낳은 타마르(창세 38장 참조),
예리코를 살피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기와 온 집안의 목숨을 구한 이방인 창녀 라합(여호 2장, 6장 참조),
과부가 된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조언으로 보아즈의 발치를 들치고 누운 룻(룻 3-4장 참조),
자신의 미모를 탐한 다윗 때문에 남편 우리야를 잃고 다윗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된 밧 세바(2사무 11장 참조),
의롭고 충직한 약혼자 요셉 덕분에 혼인 전 잉태라는 인간적으로 변명할 길 없는 처지에서 목숨을 구하고 신비를 지켜낸 마리아(마태 1,18-25 참조).

특별히 복음사가가 족보에 숨김 없이 이름은 넣은 다섯 여인들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치우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후손 없이 남편을 잃은 뒤, 가문의 대를 잇고자 창녀로 꾸며 시아버지의 아들들을 낳은 타마르(창세 38장 참조),
예리코를 살피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기와 온 집안의 목숨을 구한 이방인 창녀 라합(여호 2장, 6장 참조),
과부가 된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조언으로 보아즈의 발치를 들치고 누운 룻(룻 3-4장 참조),
자신의 미모를 탐한 다윗 때문에 남편 우리야를 잃고 다윗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된 밧 세바(2사무 11장 참조),
의롭고 충직한 약혼자 요셉 덕분에 혼인 전 잉태라는 인간적으로 변명할 길 없는 처지에서 목숨을 구하고 신비를 지켜낸 마리아(마태 1,18-25 참조).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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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은 인간의 족보 얘기는 아예 없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있고

요한 복음도 족보 얘기는 없고 ,한 청ㅁ.부터 계셨던 말씀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족보를 전하는데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시작하는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요셉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유치한 아전인수인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아주 못되게 해석하면 마태오 사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족보에 가두려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고

루캌 사가는 이런 마태오의 민족주의적인 해석에 

못마땅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얘기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얘기 이고

그래서 이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얘시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12월 16일 월요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 21,23-27)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하기 때문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효봉 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판사였는데 어떤 사람의 판결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판사직을 사임하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벗어던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느님도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면 진실과 다른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서 절대 나가지 않도록 먼저 주의해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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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모르실 수 없으니, 혹 모른다고 하시면 거짓말이 될 겁니다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용서, 치유와 기적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씀, 실행된 말씀"이십니다. 굳이 언명체계를 통해 답하시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언으로 답을 하신 겁니다. 사실 그 답은 묻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상태였을 겁니다.


제1독서에는 발라암이라는 이방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을 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민수 24,5)
그런데 그는 저주를 내리라는 모압 임금 발락의 채근(採根)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보내며 도리어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민수 24,4)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방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별"은 모압을 물리친 다윗 임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까지도 암시합니다. 먼먼 구약시대 초기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방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신 것이지요.

발라암도 모압 임금도 참 당황스러웠겠지요. 발라암을 부른 모압 임금은 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되려 적에게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고, 발라암 역시 부탁받은 바를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발라암은 후일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만(민수 31,8) 적어도 그는 제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전한 성경 속 인물로 남습니다. 그로써 그의 예언자적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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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일요일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2-11)


지행합일(知行合一). 앎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번역된다. 그런데 명나라 때 왕양명은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일치돼 있다’라고 풀이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은 ‘앎’은 참다운 앎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왕양명이 지행합일을 말한 것은 결국 우리의 실천이 많은 지식이나 완벽한 앎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시 주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앎이 이뤄진 이후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종신토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양명은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것에 있어서 고도로 예민한 양지(良知)가 있으므로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선한 일을 할 자격이 되는지, 혹은 내 마음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여기에는 많은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조건들이 외적으로 다 갖춰진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완벽한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것이란 결국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음성과 확신에 찬 신적인 인간의 모습뿐이었다. 말과 행위, 앎과 실천이 하나 된 하느님의 얼굴이다.

-서강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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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권력명예라는 을 벗어버리고 나눔희생사랑이라는 새로운 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재형신부-




12월 14일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17,10-13)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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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힘든 시기에 호렙산으로 갔습니다호렙산은 모세가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호렙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산입니다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두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하느님은 불기둥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은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은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은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엘리야는 침묵 속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했고새로운 임무를 받았습니다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지혜를 주십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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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금요일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오 11,16-19)


사람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감기와 가난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냄새만 맡아도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사람과 하늘에서 온 분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변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못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알아보기 싫어서입니다.

      인간에게 참 아버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파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목청이 터져라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알아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인간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의 향기가 나기 때문에 증언이 없더라도 못 알아볼 수 없습니다. 냄새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냄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향기라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큰 사랑을 보고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타인의 죄를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대신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할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심지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어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아주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향기는 하느님만이 풍기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냄새를 먼저 맡아봅시다. 저는 저 자신을 이기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 한 끼만 먹으며 4시간만 잤습니다. 그렇게 살이 20kg이상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나를 이길 수 없구나.’

      그때의 이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알아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내 자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이 나의 냄새입니다. 나의 냄새가 인간의 냄새였습니다. 인간의 냄새를 알게 되니 하늘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지만 하늘의 냄새를 풍기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나라의 향기가 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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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목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11,11-15)


어리석은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발로 차고화를 낸다고 합니다돌부리를 발로 차니 더 아프고화를 내니 부주의했던 자신이 한심해 보입니다지혜로운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합니다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합니다돌을 치우니 운동도 되고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보람이 있습니다같은 상황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됩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카인이 아벨을 죽인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교만과 열등감이 있습니다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교만은 타인의 소중함을 보지 않습니다열등감은 자신의 소중함을 보지 못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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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멍에는 주인이 소를 부리기 위해 목에 짊어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멍에를 두른다는 것은 그분의 노예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 자아의 욕구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노예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멍에를 메야합니다. 멍에는 자아의 돈에 대한 욕심, 육체를 만족시키려는 욕심,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묶어놓는 오랏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에 자신의 욕구를 통제시킬 때 비로소 ‘자아숭배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세고 난폭해서 금방 원숭이의 왕이 됩니다. 돌원숭이에 불과했던 손오공은 자신이 타고 날아다니는 근두운과 무적의 무기인 여의봉을 가지게 되어 점점 더 무서운 것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을 하게 되는데 석가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석가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벌을 받아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갇히게 됩니다. 그에게 그런 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이 육체의 본성대로 나가려고 할 때 삼장법사가 기도로 그 금고아를 줄입니다. 그러면 손오공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게 되고 비로소 정신을 차려 본래의 소명으로 돌아와 요괴를 무찌릅니다. 그렇게 서유기는 손오공이 악의 존재인 돌원숭이로 태어났지만 자기 본성을 죽이고 신의 소명을 따를 때 참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자’란 뜻의 ‘제천대성’이 된 이유는 구름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를지를 안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힘은 끊임없이 산 밑으로 자신을 가둬 인생이 공포영화가 되게 만듭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즉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욕구를 죽이는 멍에인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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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이미 젖은 자는 비가 와도 다시 젖지 않는다.’

누구나 그리움외로움열등감은 있을 겁니다누구나 시기질투욕심 때문에 괴로워할 겁니다우리는 모두 어쩌면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입니다나그네의 발걸음은 힘들기 마련입니다나그네는 어딘가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습니다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 안에 쉴 때까지 내 영혼은 지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영성가도 번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을 것입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이굶주린 이아픈 이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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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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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한다고 합니다그러니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멍에란 또바리나 바지게처럼머리에 얹어 짐을 받혀주거나등에 메어 짐을 질 수 있게 하여 짐을 편하고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말하며또한 소나 말 등의 동물에게 쟁기를 채우거나써레나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목과 등에 감아 거는 기구입니다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그것은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이토록멍에는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동행합니다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곧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그러니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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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내 멍에’, ‘내 짐’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표현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은 결코 멍에나 짐이 아닙니다.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예로 들어서 생각하면,
이 계명은 증오심, 원한, 복수심, 또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 죄의식 같은
멍에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또 다른 멍에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가르침은, ‘교만’이라는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낮춤’을, 또는 ‘겸손’을 멍에나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이니까 어쩔 수 없이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낮춤’과 ‘겸손’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만’이라는 멍에 위에
‘위선’이라는 멍에를 더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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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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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바라는 이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이사 40,31).

이 지상의 순례길을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무게를 온전히 다 벗어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진정 무엇에 기대고 누구에게 바라느냐에 따라 영혼의 내성과 복원력에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넘어져도 일어날 힘, 무너져도 추스를 힘, 깨져도 회복할 힘... 도전과 공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무성해진 도전과 공격에도 꿋꿋이 설 수 있는 힘, 다시 싱싱하게 날아오를 힘은 평소 우리 영혼이 그분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서 나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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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화요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태오 18,12)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이 루카복음에도 나오는데 그 쓰임새가 다릅니다. 루카복음의 99마리 양은 결국 버려져야 할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복음에서는 99마리의 양을 ‘광야’에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99마리의 양을 ‘산’에 둡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99마리 양을 주님께로 이끌었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양이라도 더 찾아내 꼭 데려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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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양"(마태 18,12).

황량하고 물 없는 광야, 굶주린 맹수들, 어둠과 적막, 천재지변, 강도떼... 주인의 보호에서 벗어난 양에게 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다들 제 탐욕을 채우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볼 뿐이지요. 목자의 품에서는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기다릴 건 잡아먹히거나 다치거나 굶어죽거나 그중 하나의 결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양이 얼마나 애타게 목자를 기다리겠습니까! 방향성을 잃은 까닭에 스스로는 더 이상 목자와 양 떼를 찾을 힘이 없으니, 오직 하나 남은 희망이라면 목자가 자기를 찾아주는 것 뿐입니다. 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한 양의 심정에 머무릅니다. 오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희원(希願)이 이러해야 하지요.

"그가 양을 찾게 되면 ...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


목자의 기쁨과 양의 기쁨에 함께 머무릅니다. 두 존재의 기쁨은 하나입니다. 찾은 이와 찾아진 존재가 하나 되어 누리는 기쁨으로 두 존재 모두 위로를 받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은 당신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사람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주시리라"(영성체송).

이상하지요? 의로움의 화관이라면 적어도 일생동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 이에게 수여되어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고작 한 일이라고는 당신이 오시길 애타게 기다린 것 밖에 없는 사람에게 주신다니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곧 믿음입니다(로마 3,28 참조). 그리고 믿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이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리라 믿고 희망하듯이,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애타게 기다린 이는 이미 의롭습니다. 의로운 행위 이전에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으니 오시는 주님께서 그에게 합당한 "의로움의 화관"을 씌워주시는 겁니다.

묵상을 맺으며 오늘 제1독서에 나타난 주님과 우리 관계의 표상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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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월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세상의 악은 하느님을 멀리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자세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첫 여인인 그녀는 천사가 그녀에게 전한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하는 첫 여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우리 앞에, 우리 마음의 눈앞에 있습니다. 

-안봉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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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정직한 사람을 도울 수밖에 없다. 정직한 사람은 신이 만든 것 중에 최상의 작품이기 때문이다(세르반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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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가 안 좋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안 좋으면 망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만 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부정적인 믿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더욱 안 좋아집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죄의 영향 때문입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면 자아의 부정적인 생각을 받아들여 항상 더 낮고 어두운 곳으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자아의 목소리를 발로 밟고 하늘의 목소리만 경청하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의 믿음에 역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 아닌 분에게 태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절대 불가합니다. 자녀를 알려면 부모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죄가 있는데 자녀가 성인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모기에서 모기 외에 다른 동물이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서는 인간밖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면 이미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이어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은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느님이 자신들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원죄이고 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만은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당신을 높여줄 것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어두움에 물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주 하느님을 찾을수록 하늘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나의 능력을 높여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여러분을 더욱 높이 올려줄 사람만 가까이 하세요.”라고 충고합니다. 우리에게 그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파견하신 사람들입니다. 죄에서 멀어지려면 자신을 높여줄 하늘에 계신 분만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항상 불가능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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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었던 죄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하지만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여인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저 여인이 저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여인도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비록 자신이 먹으라고 권했을지라도 남자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여인은 남자를 더욱 신뢰했을 것입니다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를 용서했을 것입니다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못하고우리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길가에 피어도비와 바람을 맞아도 무엇을 탓하지 않습니다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우리 안에 있는 많은 문제는 자신을 받아들이고인정하고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면 풀릴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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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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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 없다"고 해 주시니,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잉태하고 품고 출산해 키우는 소명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함께 기뻐해도 좋습니다. 아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한껏 기뻐하십시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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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오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감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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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신 것은,
단순히 성모님의 ‘몸’을 무결점의 상태로 만들어 주신 일이 아니라,
성모님의 영혼을 천지창조 때의 순수한 상태 그대로 만들어 주신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신앙생활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완벽하게’ 깨끗해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통해서 세상으로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노동의 고통,
인생의 허무함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창세 3,16-19),
간단하게 ‘생로병사의 고통’이라고 줄여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다는 말은,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다는 뜻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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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일요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3,1-12)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옳고 바르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신앙생활에 매진하여 깊이 의식화되고 습관이 된 신자일수록 회개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들이 문제이지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지적질’이고 제일 어려운 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끝없는 변명으로 죄를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회개에 따르는 그 은총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첫 설교 말씀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인 것을 보면 ‘회개는 하느님 나라의 출입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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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러 오신 것이 무엇일까요? 무기입니다. 죄와 싸울 무기입니다. 죄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다면 그 죄와 싸워 이겨야 다시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이길 수 있는 무기를 청해야합니다.

      하느님께 무기를 청하는 시간을 ‘기도’라 하고 그 기도로 오는 무기를 ‘성령’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할 장소를 ‘광야’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와 싸울 마음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무기를 가지고 인간을 만나러 오셔도 인간은 그분께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 하느님께서 오시기 전에 죄와 싸우게 만들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람들을 광야로 나오라고 외쳤던 ‘요한 세례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면 누구든 싸움을 시작해야합니다.

1300년대 중반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사태 때 무언가 대책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성찰은 둘째 치고 그 원인을 ‘고양이’에게 돌렸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고양이를 악마로 취급하여 고양이를 없애야 흑사병이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유럽에서 고양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고양이를 다 잡아 죽이니 쥐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쥐는 더 구석구석까지 병을 퍼뜨렸습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탓이나 남 탓을 할 때는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죄에서 결코 헤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먼저 죄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그 죄와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무기를 주시는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인간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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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금요일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은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오 9,27-31)


김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겨 주셨습니다. ‘얼굴 잘생긴 것보다는 몸 건강한 것이 더 좋고몸 건강한 것보다는 덕이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보고듣는 것입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그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시작됩니다기도로서 자라납니다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집니다성체성사로 하나가 됩니다사랑으로 열매 맺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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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목요일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태오7,21,24-27)


사람을 심판하면 믿으나 마나다

-전삼용신부-


강사 김창옥씨의 강의 중에 어떤 부부가 감자 때문에 이혼한 사연이 나옵니다.

      어느 날, 이혼재판소에 한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판사가 물었어요. 왜 이혼을 하려고 하냐고. 그랬더니 ‘감자’때문에 이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먹는 감자요?”

      “네!”

      어리둥절한 판사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감자를 삶아서 내왔습니다. 그리곤 감자에 찍어 먹으라고 설탕을 줬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누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냐? 소금 가져와 소금.” 했습니다.

      아내가 그냥 설탕 찍어먹으라고 했지만 남편은 소금 가져오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아내는 짜증난 목소리로 투덜거렸습니다.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렇게 소금 찍어먹고 싶으면 당신이 가서 가져와! 손가락 하나를 까딱 안 해요. 이놈의 집안은.”

      그러자 남편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래, 장모도 감자에 설탕 찍어먹더라. 감자에 설탕 찍어먹는 집안. 에휴.”

      남편의 말에 아내가 화가 많이 나 소리쳤습니다.

      “뭐? 집안? 당신 집안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뭐가 그렇게 잘났기에 지랄이야!”

      “뭐? 지랄? 에잇!”

      남편이 아내의 뺨을 치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째려보자 남편이 소리쳤습니다.

      “뭐, 어쩌라고? 어쩌고 싶은데? 어?”

      아내가 차가운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이. 혼. 해.”

      “뭐, 이혼? 감자가 이혼할 이유냐? 이게?”

      남편이 당황했지만, 아내는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나, 생각한지 오래됐어.”

      그렇게 두 분이 재판소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아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판사님께 물었습니다.

      “판사님, 판사님께서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좋은 교육 받으시고 판사 되셨잖아요? 판사님 댁에서는 감자에 설탕 찍어먹나요, 소금 찍어먹나요?”

      당황한 판사가 몇 초 후에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감자에 신김치를 올려먹습니다.”

      과연 이 부부는 감자 때문에 이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서로를 심판하는 버릇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혼하게 된 것입니다. 배우자를 평가하고 그 배우자가 자란 집안까지 심판하니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이 있습니다. 그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면 오늘 복음의 비유말씀처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은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을 배우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아무도 심판이 되지 않을 때 다른 덕도 쌓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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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들려 주신 주옥같은 가르침들도 우리가 믿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야 비로소 우리 삶의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굳건히 지탱해 주는 반석이 있으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이사 26,3).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4).
그렇습니다. 그분이 바로 반석이십니다. 들은 바를 믿고, 믿은 바를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단단하고 견고한 반석, 주님 위에 세워집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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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수요일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29-37)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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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가르치고 고쳐주시는 일 못지않게 당장 뱃속도 채워주고 싶어 하십니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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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은 오천 명 먹인 얘기가 아닌
사천 명 먹인 얘기인데 대림시기인 오늘의 전례가
이 얘기를 뽑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얘기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배고픈 군중의 문제를 꺼내어 그 많은 사람을
먹이는 잔치가 시작되지만 사천 명 기적 얘기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굶주린 백성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것으로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잔치가 다 손님의 요구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에 의해 열리는 것이지만 주님의 잔치는 특히 더 주님께서
친히 베푸실 때까지 내가 잔치를 베풀어달라고 요구하거나 보채거나
할 필요가 없고, 내가 찾아 먹거나 구해 먹거나 훔쳐 먹는 짓은
더더욱 하지 말고 사랑의 주님을 믿고 기다리면 된다는 뜻일 겁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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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화요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루가 10,21-24)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철부지는 자신의 이익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철부지 어린이가 부모의 유산을 먼저 챙기려 하겠습니까? 철부지는 철부지라 욕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 내용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철부지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온 당신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이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표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다음 내용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만이 강도만나 쓰러져있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사제와 레위인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고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 지라도 복음을 믿는 철부지 어린이인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쇼핑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휠체어를 탄 청년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는 두 다리가 없고 얼굴도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청년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저 사람 좀 봐."

      어머니는 아이에게 장애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흉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청년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와, 정말 멋진 모자네요."

      철부지 아이들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부유하게 하거나 높이지 않습니다. 오직 똑똑한 어른들만이 그렇게 합니다. 철부지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먼저 봅니다.

      자신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고 이웃의 행복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철부지라 부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똑똑한 악마가 될 것인지, 철부지 하느님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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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아직 많이 미숙하고 부족한 제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철부지"(루카 10,21)라 표현하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가 철부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주님을 알면 평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툼, 경쟁, 폭력, 억압에 무능해집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시어 구원된 세상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공 논리가 아닌 십자가 논리가 주도하는 나라,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가느라 앞다투어 사랑하고 희생하는 나라, 그래서 약육강식의 위계가 자취를 감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초라한 마굿간, 구유 안에 누운 한 아기에게서 봅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견고한 성 안에서가 아니라 가난과 약함의 현장 한가운데서 발견합니다. 이렇듯 가장 연약한 모습에서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한"(루카 10,24)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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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월요일 

주님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오8,5-11)


일본 제1위 납세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자신의 제자인 미야모토 마유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만나는 사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모든 이들에게 ‘이 사람에게 온갖 좋은 일이 눈사태처럼 일어납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라도 좋으니 중얼거려보세요. 하루에 100명씩, 1,000일 동안 실행해보는 겁니다.”

      마유미씨는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실천하자.’란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로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는 쉽게 이런 말이 나왔지만 불편한 사람,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그 말을 계속하다보니 싫은 마음이 점차 사라지거나 상대가 싫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그 말을 계속하다보니 자신이 기분이 좋고 감사하는 마음이 끓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자신이 행복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1,000일이 지났을 때 사이토 히토리가 말했습니다.

      “마유미씨 얼굴이 좋아졌어요. 운을 부르는 얼굴이 되었네요. 다른 사라의 행복을 빌면 얼굴에도 그 마음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이제 당신이 두 번 다시 불행해질 일은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을 책으로 쓴 ‘돈을 부르는 말버릇’의 저자 미야모토 마유미는 몇 년 뒤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의 통로가 되어야합니다. 부자가 되려면 돈의 통로가 되어야합니다. 저수지는 썩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총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통로가 되어주셨습니다. 통로가 되어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고 이 법칙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을 보시고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작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어떤 통로로 만드느냐에 의해 측정됩니다.

믿음이 있다면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백인 대장의 굳건한 믿음세리의 겸손한 기도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나눔을 생각합니다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성탄 선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주 하느님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당신 얼굴을 비추소서저희가 구원되리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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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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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백인대장이 대답합니다. 놀라운 겸손과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분 말씀의 효력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을 통해 발설된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강생하시려는 성자께 바치는 지상 피조물의 응답을 듣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땅과 공기와 햇살과 모든 피조물의 겸손어린 합창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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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대장의 얘기를 대림시기 첫번째 얘기로 교회 전례가 뽑은 것은 백인 대장이 대림시가를 보내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의 개방성과 사랑의 열정에서 우리의 모범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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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대장은 주님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하고 대답한다여기서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이로 여김으로써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준다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만일에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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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일요일 대림 1주일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24,37-44)


.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작은 심판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목소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의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원칙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 원칙이란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원칙을 깨고 누군가 미워지는데도 용서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배를 만들지 못해 결국 물속에 잠기고 맙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사랑을 지켜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될 방주를 만들어야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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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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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첫날 복음은 우리에게 종말을 상기시킵니다. 깨어 있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다는 건 잠들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잠시의 휴식이랄 수 있는 육신의 잠은 정지와 멈춤, 죽음의 상태로 보이지만, 그 안에 휴식과 생성, 회복 등 긍정적 움직임도 함께 지니고 있지요.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아가의 신부가 고백하는 신비로운 이 상태가 곧 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깨어 있음을 가리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몸은 휴식하고 있어도 영혼은 오시는 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기척, 향기의 미세한 변화도 포착할만큼 민감히 열린 상태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무지로 인해 영혼이 더 섬세하고 영롱하게 벼리어집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분을 언제라도 맞이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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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있고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지금까지의 모든 의 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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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음과
준비라는
기다림은
가장 좋으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주님의 탄생입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의
만남이 됩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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