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수염이 무척이나 긴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밖에 내놓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수염을 이불 밖에 내놓았는지, 또 이불 속에 넣고 잤는지 한 번도 신경 썼던 적이 없었던 할아버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자에게 오늘밤에 자보고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날 밤, 할아버지는 한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수염을 꺼내 놓아도, 또 이불 속에 넣어보아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잔 것일까?’
남의 목소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경을 쓰면 쓸수록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 해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혹시 남의 말에 신경 쓰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남의 말보다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행동할 수 있는 2019년이 되시길 바랍니다.
빛을 맞이하는 자세
-전삼용신부-
한 처음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생명이고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 안엔
반대로 죽음과 어둠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이 죽음인데도 어둠을 좋아하도록 학습돼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와도 숨어버립니다. 변화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 학습된 무기력을 ‘원죄’라 부릅니다.
이 원죄가 우리를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지를 바닷가재를 통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영역다툼을 합니다.
자신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싸움은 형식적인 선에서 멈춥니다.
싸워서 둘 다 치명상을 입으면 제3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닷가재에게는 딱딱한 껍질을 벗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 안전하게 숨어있을 바위 밑을 좋아합니다.
그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대부분은 몸집이나 집게의 크기,
혹은 분비물의 양 등에 의해 큰 싸움 없이 서열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서는 서열이 정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힘이 비슷할 때입니다.
그때는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끊어버리도록 싸웁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가재 속에서는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이 더 분비되고
패하면 옥토파민 호르몬 비율이 더 높아집니다.
세로토닌 호르몬이 더 많은 가재는 서열이 높아져 암가재들을 모조리 차지하지만
옥토파민이 높아진 가재들은 싸워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작은 가재들 앞에서도
고개를 숙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연애하다 실패했을 때 누구도 만날 자신감이 없어져
무기력해지는 인간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우두머리와 가장 대등했던 가재가 자신이었고
다시 싸워 운만 있으면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가재가 자신인데도
그 패배감 때문에 가장 못난 가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 이런 상황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습니다.
패배자 가재에게 세로토닌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되는 약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 호르몬이 주입된 패배자 가재는 다시 어깨를 펴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참조: ‘12가지 인생의 법칙 –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조던 피터슨]
마크 트웨인 “우리가 뭘 몰라서 곤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다면 곤경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착각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기도와묵상] 유리와 거울 /오상선. ofm .신부
유리는 앞이 잘 보입니다.
상대방의 모습도, 불평할 만한 현실의 모습도 잘 보입니다.
그러나 거울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모습만 보입니다.
똑같은 유리인데도 뒤에 수은이 발라졌기 때문에
거울에는 내 모습만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그리스도인인데도 미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불평할 상황만 보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만 보입니다.
자신의 허물이 보이고 약점이 보이며 죄스런 모습만 보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느님께 사랑 받는 모습,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한 몸에 입은 모습,
하느님의 축복을 통째로 받은 모습만 보입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인가?
그런데도 하느님은 이런 나를 왜 이리 사랑해주신단 말인가?
왜 이리 은혜를 베풀어주신단 말인가?”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감사만 합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하느님을 더 의지하며 가까이 하고
하느님을 더 사랑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유리 신자입니까?
아니면 거울 신자입니까?
-12월 30일 일요일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 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벗님, 벗님은 그런 가정, 그런 공동체를 꿈꾸십니까?
-오상선신부 -
http://altaban.egloos.com/223308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복음 2장 51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삶 전체, 당신의 미래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극도의 자기 낮춤이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지만,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순종하신 예수님,
그 놀랍고 감동적인 덕행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있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복음 22장 42절)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복음 22장 42절)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12월 29일 토요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법칙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인데 피그말리온이란 조각가가 이상적인 여인상을
상아 조각으로 만들고 그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는데
아프로디테 신이 그 조각상을 진짜 여인이 되게 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돕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의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그토록 구세주를 뵙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시메온처럼 주님만을 뵈옵는 기쁨만을 원할 줄 알며,
그것만을 간절히 원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주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메온 예언자입니다.
이런 잘 준비된 영적 노인 시메온에게 마침내 주님께서 풍성한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유머 감각을 좀 더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난 체질상 유머와는 무관한 사람이야.’ 라고 포기하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깔깔 유머 백과’ 한권씩 사서 들고 다니면서,
이웃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마술사로 변신해야겠습니다.
12월 28일 금요일
나의 행위가 구원에 어떤 도움이 된다고 믿으면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탁월한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고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 샘 월튼 –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와 존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바탕으로
정치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정치는 참으로 사랑의 탁월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조화입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생명이 없습니다.
12월 27일 목요일
“모든 성경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복음서인데,
복음서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요한 복음입니다.
만일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댈 수 없었다면,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모시지 않았다면,
스승님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오리게네스)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틀린 사람이 없고 단지 나와 다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비교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내, 남편, 부모, 자녀, 그리고 나의 이웃들과도 얼마나 많은 비교를 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남과 비교합니다. 비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의 2행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조명언신부 묵상글 중에서-
개인과 단체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기초
“성공과 실패를 통해 매 순간 각자의 길을 만들어가며 상대방은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12월 26일 수요일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도 말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까닭은 선택한 것과 포기한 것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좋은 것이야 있겠지만, 선택에 대한 후회로 마음의 평화를 잃을 만큼 가치 있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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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뺀 긍정은 망상이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정말 구원을 받을까요?
우리는 어쩌면 믿음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나의 일상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망상입니다.
다 잘 되기 위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노력을 우리는 한 마디로 ‘십자가’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십자가를 뺀 긍정은 믿음이 아니라 망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매일매일의 삶을 철저하게 바꾸어놓습니다.
우리는 믿고 살아가는 것인지,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12월 25일 화요일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신음하는 모든 인류에게 빛이 되어 그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준 사건이 예수 성탄의 의미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그 빛을 못 알아볼 뿐만 아니라 맞아들이지도 않는다고 요한은 안타까워하네요(요한 10.11)
내가 이 성탄에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났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 안에 있는 그 짙은 어둠이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나는 빛으로 오신 하느님을 만난 겁니다. 반면, 아직도 나의 죄에 대한 무게와 세상 근심걱정의 어둠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면 아직 그분을 못만난게지요.
- 오상성신부 묵상 글 중에서 http://www.ofmkorea.org/ofmhomily/17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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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실재가 아니고 빛만이 실재입니다.
빛이 있으면 밝음이고 없으면 어둠입니다.
그러니까 어둠은 실재가 아니고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고
그러니 빛이 나타나면 저절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어둠속에 있다면 우리에게 지금 빛이 없다는 것이고
빛이 없다면 우리 신앙인에게는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눈으로 볼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빛이신 분이 오늘 성탄으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믿는데 어찌 빛이 없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나뭇잎 사이로 숨듯
우리가 빛 안에 있지 않고 그럼으로써 죄의 어둠 속에 숨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 죄를 지엇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숨기려던 죄가 하느님께 발각됐을 때 우리아에게 죄를 지엇다 하지 않고
하느님게 죄를 지엇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갔듯이
그리고 히솝의 채로 자기 죄를 깨끗이 씻어달라고 하듯 하느님께 나아가야지요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보통 한 번의 죄로 그치지 않고
죄를 숨기려다 하느님과의 단절의 죄를 덧 짓습니다.
빛마중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http://www.ofmkorea.org/ofmhomily/178619
12월 24일 월요일
아이는 부모의 기대 범위 안에서 자란다
-전삼용신부-
김새해 작가가 ‘생각의 선택이 운명을 만든다’라는 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책 속에 있는 이러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의사가 침묵을 지킨 다음 산모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죽는 게 낫겠어요.”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이 다 부러져 있었고 손발이 다 꺾여 있었으며
머리통은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온 몸의 뼈가 다 부서진 상태로 태어난 것입니다.
누구도 이 아이를 건드리거나 안으면 안 되었습니다. 의사는 덧붙였습니다.
“이 아이는 달걀처럼 뼈가 부서지는 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골 성형 부전증’이란 쉽게 뼈가 부서지는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아기.
그러나 부모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의 뼈는 2백 번이 넘게 부러져 수도 없이 수술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되풀이하다보니 키가 90cm에서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속닥거렸습니다.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해? 의사 말을 듣지. 쟤는 죽었어야 해!”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은 굉장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심리 치료사를 하고 있고, 동기부여 명강사이고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마다
“저는 사는 게 즐거워요!”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좋은 생각만 하기로 결심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은 누구에게서 왔을까요?
부모님이 먼저 그렇게 생각해 주었기에 자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버리기로 했는데 자녀가 어떻게 긍정적일 수 있었겠습니까?
부모는 아기를 포기하라는 의사의 말에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아이는 분명히 세상에 나온 좋은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런 부모의 생각이 자녀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생각의 변화가 자신도 변화시키고, 자녀도 변화시키고,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도 변화되게 만든 것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말이 되니까.
행동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습관이 되니까.
습관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운명이 되니까.”
텍사스 레인저스의 명포수였던 짐 선버그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가 은퇴한 후 강사로 활약할 당시 자신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자신을 믿어주었던 아버지 때문이었다고 말해줍니다.
그가 어느 날 교도소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한 복역자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버그씨, 당신과 반대로 내 아버지는 늘 내가 못난 놈이고,
뭐하나 잘하는 것 없는데다 언젠가는 철창신세가 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죠.
그래서 나 역시 내 아버지의 꿈을 이뤄드렸죠.”
12월 23일 일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주신 우리들의 생활 양식 회개하는 이들 중에서-
내 뜻과 내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당연하게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을 잉태치 않고 주님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묵상하며 오시는 주님을 밎이할 준비를 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글 중에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시는 성탄.
행복한 사람?, 박복한 사람?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행복이 내게 있다.
12월 21일 금요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12월 20일 목요일
우리는 우리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분을 절실하게 원합니까?
그래야만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12월 18일 화요일
동방박사는 하늘의 별을 보고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동방박사는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해서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사막을 건너는 길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더운 태양이 있었고, 무서운 강도가 있었고, 사나운 동물도 있었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12월 17일 월요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오 1,1-17)
오늘 주님의 족보를 보면 주님의 조상답지 않은 조상이 더 많습니다.
우상 숭배한 왕들이 많고 이스라엘의 족보인데 이방여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은 이 부끄러운 조상들을 족보에서 빼거나 숨기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이스라엘과 마태오 복음사가가 주님의 족보를 인간의 족보라고 생각했다면
우리가 잘못하면 족보에서 빼버린다고 하듯 이들을 족보에서 뺐을 겁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오명의 역사도 하느님의 역사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밤 또한 낮과 같고 어둡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족보 영성 -김찬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http://www.ofmkorea.org/ofmhomily/176671
12월 14일 금요일
철부지 아이와 하늘 아이
주님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철부지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늘 아이 또는 하늘스런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지혜란 사리분별을 잘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아 彼我 곧 나와 남의 분간을 잘 하고,
피차 彼此 곧 이것과 저것을 잘 고려하고 배려하며
사리 事理 곧 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겁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12월 13일 목요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상처를 마주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 파울로 코엘뇨 –
예수님은 오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돼지가 더 행복할까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할까요?
종교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라고 가르치지만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일단 돈이 없어 배를 곯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면 이 세상 누구도 부러워하지 못할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어떤 수준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사람인지,
즉 돼지인지 소크라테스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노래하는 대로
당신이 이루신 업적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받는 것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에 대한
매우 강한 신뢰심을 나타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더 확고하게 하셨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인간은 부족하고 나약하므로 자기의 힘으로는 정화되기 힘들게 됩니다. 우리는 하얀 칠판 위에 검은 점을 보면 칠판의 하얀 면을 보기보다는 작은 검은 점을 보게 됩니다. 그 검은 점을 없애려고 하면 우리는 거기에 묻히게 됩니다. 소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결국 소는 나를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의 고삐를 놓아버리면 소는 자기의 길을 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분노와 상처를 놓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놓아드리면 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정화되고 바른길을 가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성 암브로시오 교부께서는 마니피캇에 대해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찬가’라고 강조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복음 1장 46~48절)
마리아는 노래 서두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1장 48~49절)
마리아는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영광과 위대함이 모두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 마리아는 자신보다 작은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자기보다 더 작아지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 앞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자신의 작고 비천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기는커녕, 바로 그 작고 비천함이야말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자리요, 복된 자리임을 알아듣고 어찌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마리아의 관상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의 진원지였습니다.
하느님이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은 자신보다 작아진 하느님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보는 눈이 바로 나보다 작아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관상입니다. 사실, 진정 자신이 누군가의 앞에서 그렇게 작아져 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서 그토록 작아진 하느님을 알아 볼 것입니다. 진정 사랑해 본 이라면, 곧 사랑한 이 앞에서 작은 자가 되어 본 이라면, 자신 앞에 사랑으로 작아진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12월 12일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28-30)
멍에는 일을 시키기 위해 소에게 주인이 메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묵상 글 중에서-
12월 11일 화요일
진화는 더 고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화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도 각자 환경에 적응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명은 더 고등한 것도, 더 미약한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명이 하늘, 땅, 물속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까지 함께한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경이로움을 표해야 합니다. 중력이 있어서 모든 별이 함께 우주에 존재하듯이, 우리는 사랑과 신뢰와 믿음으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물이 썩으면 그 물속에서 생명이 살기 힘듭니다. 대기가 오염되면 생명이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이 죽어가면 우리 또한 관계가 틀어지고, 우리의 삶도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글 중에서-
12월 9일 일요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로 가려면 광야를 건너야합니다. 바라본다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비로소 하늘에 속하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12월 8일 토요일
오늘 복음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려운 절차가 아닙니다.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그 회개의 결심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진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짝인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배우자와도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배우자와 관계가 단절된 하와는 동물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렸습니다. 자연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에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만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다면 함께 살던 배우자와도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와도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12월 7일 금요일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 29)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오늘의 화답송 :시편 27, 13)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 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 이었답니다.
12월 6일 목요일
오늘의 명언: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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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만 만나는 것은 자기 성장을 위해 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참아내기 힘든 사람을 만나며 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할 때 관계를 위한 근력이 강해집니다.
근육은 참아낼 때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근력이 의지입니다.
12월 3일 월요일
코칭을 공부할 때, 상대방의 짧은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은 나쁜 질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코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지지하기 위해서는 긴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는 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많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좀 더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12월 1일 토요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당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묵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가 21,34)
우리는 흔히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근심하나요?>라고 얘기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고 근심은 세상을 향하는 거지요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29일 목요일
하느님과 관계가 좋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좋습니다. 사람과 다른 생물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좋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관계가 좋았을 때는 하와와 관계가 좋았습니다. 함께 사는 동물들과 관계가 좋았습니다.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자연과의 관계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면서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함께 하는 여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하와는 함께 살던 동물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연은 사람이 땀을 흘려 노동을 해야만 소출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24일 토요일
창세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졌다.(1,26-27; 5,1-3 참조)’고 전하는데, 우리 안 에 있는 이 ‘하느님의 모상성(模像性)’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존엄(尊嚴)의 근간(根幹)이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성경을 찾게 됩니다. 많은 영성의 대가들이 성경을 영성생활의 교본으로 제시하였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 책이 성경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진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게끔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느 님의 선물입니다.
11월 22일 목요일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41-44)
"당신 사랑 까닭에 평화 안에서 견디는 이들이 복되다" 고 하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사랑으로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월 21일 수요일
소와 사자’의 이야기. 소는 여물을 좋아하고, 사자는 고기를 좋아합니다. 소는 자기의 생각으로 사자에게 여물을 주었습니다. 여물이 맛이 있고, 몸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소를 사랑하기에 맛이 없는 여물을 먹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소는 사자도 여물을 좋아 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전해 준 것입니다. 소가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사자의 마음을 보았다면 사자는 여물 대신에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는 자신이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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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 모두는 오늘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20일 화요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 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곳에서, 마치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알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로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의 묵상 글 중에서-
11월 19일 월요일
잠심은 ‘내가 아는 것이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잠심은 나의 욕망, 나의 분노, 나의 시기와 질투를 내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의 감정을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비워진 나의 마음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원뿔은 3차원의 도형입니다. 이것을 정면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고, 위에서 보면 원으로 보입니다. 정면에서 보는 사람은 위에서 보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보는 사람도 정면에서 보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자리를 버리고 상대방의 자리에서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일치란 타협과 수용으로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타협과 수용은 결국 쉽고 편한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일치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의 편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현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상대방의 처지에서 나 자신을 맞추는 것이 일치의 시작입니다. 신앙 안에서 일치란 대상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은 일치가 아니라 강요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의 묵상 글중에서-
남에게 충고를 하고 싶은 욕망을 느낄 때 상대방에게 단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단점을 가진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법이다.(찰스 칼렙 콜튼)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보는 일, 빛을 보는 일입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처럼,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해줍니다. 그는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섭니다. 육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입어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묵상 글 중에서-
11월 16일 금요일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떼 사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디안 나바호족-
행위로는 그 사람의 본성을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심판은 ‘본성’으로 측정됩니다. 본성은 ‘욕구’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욕구의 본성이면 하늘나라에서 살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야하는데 여전히 꽃이 아닌 나뭇잎을 먹기를 원한다면
그 애벌레는 나비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비가 사는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하늘의 것을 욕망해야합니다.
하늘의 욕망이란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하나의 욕구이기에 본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은 행위와 관련이 없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15일 목요일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에게 한 제자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탈레스는 “자신을 아는 일이다.”라고 대답했지요. 곧바로 제자는 “그럼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탈레스는 “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신을 믿는 것이지 참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참 하느님을 참 하느님이 계신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 있는 곳에 계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11월 12일 월요일
“그리스도인이 성숙되지 못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을 자신의 생활 밖으로 쫓아내기 때문이다. 주님을 핵심에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門)이자 통로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봐,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치는 사람과 “아, 너 여기 있었구나”라고 가볍게 감탄하는 사람이다.
일방적인 바른말은 폭력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11월 7일 수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 33)
변화되기 이전에 가졌던 본성이 바로 자기 소유인 것입니다. 내 소유가 비워져야 주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전삼용 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6일 화요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비 2,5)
자신을 낮추는 것은 비천해지고 비루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라는 것이 저의 필리비서 묵상의 결론입니다.
그런대 우리가 이런 마음을 지니지 않으면
우리를 아래로 떨러지게 곧 추락케 하십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의 모습대로 그리고 비슷하게 만드신 저희를 낙원에 두셨으니 바로 당신 자신 때문에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그런데 저희는 저희의 탓으로 추락했다이다."(미인준 회칙 23장)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 http://www.ofmkorea.org/ofmhomily/163904 )
11월 4일 일요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구약의 모세는 이 지령을 가슴에 품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민족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들은 그 지령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뜻대로만 살고 싶어서 하느님까지도 ‘황금송아지’로 만든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을 소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는 주인이 되고 싶다는 의도입니다.
내 뜻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명은 내 안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계명에 집중해야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예배를 봉헌하러 갑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처지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히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지령은 예배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배로 봉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령은 외면한 채 미사만 보러온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명이 우리를 그분 나라에 들여보내 주는 것이지 외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제 그분의 계명을 알았다면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세가 이 계명을 가슴에 품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듯이
우리도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잊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3일 토요일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쫓다 보면 어느새 행복은 더욱 멀어진다. 행복한 삶은 대부분 매우 단순하다. 사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방 한 칸만 있으면 된다.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하나면 족하고,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라도 많다. 사람됨으로는 자족할 줄 알아야 하고, 일을 할 때에는 부족함을 알아야 하며, 학문을 익힐 때는 절대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일을 억지로 몰아가지 말고 단순할수록 좋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이 그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역시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이다.(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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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교만하고 싶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교만해지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마치 잡초처럼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 나를 망쳐버립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자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자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경험 많은 수도자는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자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자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소련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고 했습니다.
비계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기게 돼 있습니다.
끊임없이 낮아지는 연습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교만 때문에 망가집니다.
깨어짐의 영성은 수도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자신만 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2일 금요일
연옥은 있다
개신교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무더러 명령하여 뽑혀져 바다에 심기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누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서 산과 사물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런 부족함을 지닌 인간들이 우리 모습이기에 연옥이란 곳은
오히려 과거의 모든 양심의 가책과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부족한
모든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곳이기에 벌 받는 곳이 아니라 은총의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용서받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41-45)
성인들은 연옥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1일 목요일
교회는 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낼까?
성인들을 위해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우리도 모두 성인이 되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모든 성인을 축하하는 날이기보다는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되기로 결심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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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인 저나 여러분이 프란치스코만큼 성인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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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영성과 은사를 할 수 있는 만큼 살려고 하는 것이
프란치스칸이고 그 의지가 있는 사람만 프란치스칸 자격이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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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이룬 사람이 성인이지만
이루려는 사람도 성인입니다.
적어도 이루려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말입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10월 30일 화요일
정신과 의사 정혜선 씨는 모든 사람을 “당신이 옳다!”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말합니다.
30년 동안 정치인, 법조인, 경제인, 대통령 후보들, 고문 피해자, 세월호 피해자 등
약 12,000명의 환자와 만나본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 무슨 일 있어?”라는 관심,
그리고 “그렇구나, 그럼 나라도 안 들어가겠다!”는 식의 ‘공감’으로
대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10월 26일 금요일
온 세계의 사람과 기업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빌게이츠).
빌 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입니다. 그는 부자에도 3가지 부류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입니다. 기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투자를 통해서 부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부를 이웃들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자선사업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부를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요트를 사고, 비싼 차를 사고, 궁궐 같은 집을 사는 사람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같은 부자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내와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조재형신부의 묵상글 중에서-
10월 25일 목요일
인생은 BDC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인생은 Birth(탄생)과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10월 24일 수요일
오바마는 모든 사람은 다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프면
자신도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할 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카인처럼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나는 내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이고, 내 자매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나라를 위해 일하게 만들 나의 유일한 믿음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오바마가 그 순간에 어떤 뜻을 느꼈던 이유는 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소명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민감하게 묻는 순간이 가장 깨어있는 순간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았기 때문에
어떤 순간이 오면 그 뜻을 명확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묵상 글 중에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라는 아름다운 시를 남겨 주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신 기적을 표현한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묵상 글 중에서-
10월 23일 화요일
때때로 남을 위한 변명은 해도 좋지만 그러나 결코 자신을 위한 변명은 하지 말라(푸블리우스 시루스).
10월 21일 일요일
선교는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사랑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하는 선교는 복음화란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주님을 전하는데 이렇게 두 차원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전교보다는 복음화입니다.
그 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에 대해 자랑할 때 부모님이 계신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이렇게나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자신이 복음화가 먼저 되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자신이 먼저 사랑이 되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종교보다는 사랑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어야합니다.
종교인이 아니라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글 중에서-
10월 19일 금요일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해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찬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하느님을 증언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우주 만물을 바라보며 창조 때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영과 함께 머무는 시간도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평범함에서 하느님을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묵상 글 중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함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파스칼)
10월 17일 수요일
우리들 삶 안에 적지 않은 규정들이 싰습니다.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0월 16일 화요일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 41)
오늘 뉴스에 보니 노키아 핸드폰을 17년 간 사용하고 한 달 용돈 11만원으로 살며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 씨가 자신의 전 재산 8천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영화 한 편 출연하는데 100억 이상씩 받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산이 자신 것이 아니며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있으면 사치스럽게 살고 또 그렇게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하려는 일부 사람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삶입니다.
과연 누가 세상을 즐기며 사는 것일까요?
집착이 없어야 즐길 수 있습니다.
떠나보낼 줄 알아야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0월 15일 월요일
악한 것에는 죄의 악, 곧 죄로 인해 발생한 악도 있지만 선이 없는 악도 있습니다.
내안에 선이 없으면 악하다는 뜻입니다.
제가볼때 우리 3회원들은 다들 선하고 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선을 못보고 악을 더 많이 보는 분들도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선이 없는 이유가 더 많은 선과 더 나은 선을 바라고 요구하기에 선이 없는 것입니다.
기대가 높고 요구가 많으면 악도 많아지는 법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10월 14일 일요일
오늘의 청년은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고칩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말도 선하지 않게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다는 말씀입니다. -서공석신부님 묵상글 중에서-
신앙인의 목표는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물의 노예가 되어 진정한 자유, 참 행복을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부자 청년의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10,29) 재물로부터 떠나 자유로워지고 가난한 이와 나누는 가난한 사람이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기경호신부 묵상글 중에서-
10월 13일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도 밭에 묻힌 보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과연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주님께서 알려주신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십일조’인데도 그것 조차도 내지 못하면 진정 그 뒤에 따라오는 삶을 맛볼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돈인지 천국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돈을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바늘귀 앞에서 망설이는 낙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면 가진 것을 모두 잃는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글 중에서-
자신의 환경을 행복의 삶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누구 탓으로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작은 것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절망적인 미래가 아닌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조명환신부 묵상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10월 12일 금요일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 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15-26)
성 프란치스코는 오늘 복음 부분과 연관 지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탄은 인간이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주 하느님께 향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한 주위를 배회하면서 어떤 보상이나 도움을 구실로 인간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주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기억에서 질식시키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세상일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하여 인간의 인간의 마음을 눈멀게 하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으로 충만하면 어둠이 없듯이
하느님을 믿으면 악령이 힘을 쓰지 못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성령 충만하여 마음의 빈자리가 없겠지요
-김찬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10월 11일 목요일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유일한 축복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에 우리 자아를 죽이는 것 만을 기뻐하십니다.
욕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자아의 욕구가 일지 않으면
참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세속적인 욕구를 증가시키려는 기도를 이젠 그만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오직 믿음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원하고 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성령님’뿐입니다.
성령님의 가치를 아는 이만이 성령님만을 청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님 묵상 글 중에서-
10월 1일 월요일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 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9월 15일 토요일
베드로는 현세에서 힘이 있어야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을 끝맺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김창선 선교사 묵상 글 중에서-
「신약성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시작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서공석신부 묵상 글중에서-
9월 14일 금요일
배철현 교수의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신의 위대한 질문, 부르스 립튼과 스티브 베어멘이 공동 저술한 자발적 진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제카리야 시친의 시간이 멈추는 날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장, 발전, 정복의 패러다임에서 나눔, 사랑, 가치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려하는 책들입니다. 시간이 되시면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게는 두 번 읽어도 좋은 책이었습니다.
-조재형신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9월 12일 수요일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9월 10일 월요일
아인슈타인이 과학적으로 증명한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불가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철학적인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며, 인연이 풀리면 존재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모든 인연이 풀려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9월 4일 화요일
수행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지관(止觀)에 있다.
지(止)란
올라오는 생각이나 잡념 번뇌,
욕심과 집착을 멈추고 비우는 일이고,
관(觀)이란
가만히 비추어 보는 일이다.
마음을 비우고 다만 바라보라.
생각을 멈추고 다만 알아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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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든지 관계없이 똑 같이 인간에 대한 가치 를 아는 만치 품격이 높아진다.
아는 만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나 자신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게 된다.
8월 28일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8월 18일 토요일
토마스 헤이즐릿은 “단순한 성격은 심오한 사색의 자연스러운 결과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목적은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함은 힘든 노력의 결과입니다.
결국 복잡한 생각을 하다보면 그런 생각들이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러면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의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7월 30일 월요일
악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마치 수레바퀴 뒤에 자국이 따르듯이 죄와 괴로움이 따른다(법구경)
7월 28일 토요일
좋아해야 닮게 됩니다.
7월 26일 목요일
꿈을 날짜와 함께 적어놓으면 그것은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그것은 계획이 되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되는 것이다.
– 드레그 S.레잇 –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은
예외 없이 자신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7월 6일 금요일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면 그것 자체가 자신은 의인의 자리에 서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는 판단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7월 5일 목요일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6월 24일 일요일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언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까?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이라고 글 쓰는 판에 썼을 때였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부정할 때에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6월 19일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6월 15일 금요일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 자기생각만 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즐겨 들어줄 때도 자신이 좋으니 들어주는 것이지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관심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대의 이야기에 수긍해주고,
그 관심사를 질문을 통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유도하며
그런 관심사에 관한 나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말하면서 공감을 이끌어내고
간혹 위트 있는 말로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좀 아니다싶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면 상대는 나를 좋아해주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세상적인 대화법의 목적은 상대의 애정을 얻기 위함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이 다입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내가 상대의 애정을 얻기 위해 상대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애정이란 것이 냄비와 같아서 금방 뜨거웠다가 금방 식었다가 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감정입니다.
그 허무한 바람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6월 11일 화요일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빗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비비언 그린).
빛은 비록 더러운 곳을 통과해도 더러워지지 않는다(성 아우구스티노).
5월 6일 일요일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파스칼은 하느님을 ‘철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은 인간 마음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곧 나의 가장 깊은 내심에 현존하는 분, 그럼으로 인해 그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분을 이룬 것입니다.
4월 29일 일요일
특히 수도자들에게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성사를 볼 때
자주 하느님을 사랑치 못했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했음을
아주 따끔하게 충고할 때가 있고
그때 그분들은 깜짝 놀라 되묻습니다.
사랑치 못했다고 겸손하게 죄를 고백했는데
왜 교만하다고 하느냐고?
사랑하지 않은 죄를 고백할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 사랑안에 머물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하지요
사실 사랑하지 않은 죄가 크지 않고
사랑을 받지 않은 죄가 훨씬 더 큼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완전충전이 되면
사랑은 사실 저절로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머물지 못함은 어떤 기술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못해서이고
하느님 사랑보다 쉬운 사랑이나 다른 사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사랑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사랑안에 머무를때 우리 또한 다른이들의 포도나무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스스로가 메마른 가지 체험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단절되어 외로움, 불안, 절망, 괴로움, 고통으로 영혼이 메말라 죽어갈 때
그분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 참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가지처럼 메마른 이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존재 깊은 곳에서 사람이 흘러나와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똑 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형제 앞에서 사랑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뒤에서 말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참된 사랑에 대한 부언)
-고 도미니코 OFM 묵상글 중에서_
4월 7일 토요일
모든 피조물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의 선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반영억신부 묵상글 중에서-
4월 1일 부활절 일요일
-전삼용신부 묵상글 중에-
죽음과 부활은, 마치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된 것처럼
존재와 삶과 그 가치에 커다란 변화를 주게 됩니다.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죽어야만 변화된 삶으로의 다시 태어남, 즉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성령님이 오셔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임으로써 얻게 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부활은 어쩌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죽은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죽음은 내가 그 은총을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끝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꺾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의 부활은 평생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축하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은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반드시 오게 돼 있습니다.
살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이웃을 위해 죽어야만합니다.
예수님 부활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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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형제 자매님들의 하루하루가
사랑과 기쁨의 선물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3월 12일 월요일
고톹이 있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고통 중에 나를 찾아온 사랑이 사랑 중에 가장 빛나고
고통 중에 나를 찾아온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뜨겁습니다.
그 사랑은 용광로의 불이 최고를 달아오르면 쇳덩이를 다 녹여
쇳물로 만들어버리듯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만들고 행복으로 만듭니다.
똑 같은 세상인데 한 순간에 이렇게 만드실 수 있는 하느님을 만날 때
그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그것이 새 하늘과 새땅인 것입니다.
사순절의 한 가운데서 저는 지금 최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매일 저의 기도 안에서 기억하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이분들에게 그리고 제게도 이런 새로운 세상이 열리길 기도하며 봉헌합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18일 일요일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까지 사랑하라!”
어떤 사람에게 조우라는 충성된 노예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에게 많은 일을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주인은
조우와 함께 또 다른 노예를 사기 위해 노예 시장에 갔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유달리 늙고 힘없는 한 노예가 끼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힘이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는데 조우가 병든 노예를 사자고 주장해서
주인은 조우의 말대로 그 노예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병든 노예는 집에 와서도 별로 일을 하지 못했지만 조우는 그를 열심히 간호하고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인은 조우에게 일도 못하는 그 노예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극진히 돌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 노예는 나의 원수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팔아
지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느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분이 세상 떠날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2월 12일 월요일
불교의 절에 가보면 십우도(十牛圖)라고 한 소년이 소를 잡으러가는 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한 사람이 참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우선은 자아가 자신인 줄 알고 자아를 찾아 잘 길들이지만 결국 자아가 사라지는 게 제일 좋은 것이고 그렇게 자신까지 사라지고 그러면 자신은 공(空)이 되고 신적 존재가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러면 그 신적 존재는 이 해탈의 경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그 사람을 세상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렇게 십우도가 끝납니다. 그렇게 자신이 비워지고 사랑의 법으로 채워진 이는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심판 받지 않습니다. 심판 받을 자신이 없고 자신 안에는 누구도 심판 할 수 없는 하느님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적인 심판에 상관없이 사랑의 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시는 이유입니다. 타인의 이성적인 판단에 얽매이며 살아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참 자유는 사랑의 법으로 살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평범한 것들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세계가 놀라워질 것입니다.”
(Look for beauty in ordinary things and your world will become amazing.)
2월 6일 화요일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으려는 마음 때문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자기합리화는 나에게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외부의 탓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과 서로의 탓을 하게 된 것처럼,
핑계나 책임회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 자아가 일으키는 죄가 많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으려는 마음 때문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자기합리화는 나에게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외부의 탓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과 서로의 탓을 하게 된 것처럼,
핑계나 책임회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 자아가 일으키는 죄가 많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전삼용 복음 묵상 글 중에서-
2월 4일 일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 34).
이것이 마르코 복음의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은 군중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자아포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함구령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신비는 오직 십자가상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p. 61-62).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도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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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수요일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권능 곧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선물인 말씀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맺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자기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기 위한 열매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가 됩니다. 곧 우리는 내 형제 내 본당 내 나라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거름이 되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 형제, 내 공동체, 내 나라가 바로 나의 소명입니다.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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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화요일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 이루는 진정한 가족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곧 그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행하는 이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그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뜻을 지니신 하느님이 이루시며 우리는 그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에 앞서 주님께 올바른 믿음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 그리고 지각과 깨달음을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늘 생각하고, 갈망하며, 모든 것에서 주님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없이는 주님의 뜻을 실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글 중에서-
재미있는 것이 오늘 마르꼬 복음입니다. 다른 공관복음 마태복음이나 루카복음과는 달리 마르꼬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닌 예수님의 세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세례를 통해 비로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됨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혈연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비결을 보여줍니다. 장소나 거리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입니다. 굳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의 ‘인사이더insider’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모습이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미쳤다하여 붙잡으러 나섰던 가족들이 집 문앞에 서서 연락을 취한 것 같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시다는 전갈에 예수님의 반응이 그 장면과 더불어 깊은 묵상감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 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 보시며 이르시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수철신부 복음 묵상 글 중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게 곧 자기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임을 알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틱닛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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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은 빠른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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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일요일
신앙은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한 결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교우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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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토요일
나와 너의 생각은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못 견디는 것은 언제나 성급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와 다르면 무서운 판단의 잣대를 어김없이 들이댑니다.
더불어 사는 일이란 나의 삶의 방식만 고집하지 않는 다양성에 있습니다.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고 서로의 아픔과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겸손한 신앙의 관계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한상우신부 묵상 글 중에서 -
‘함께 지낸다.’는 말이 ‘물들어가는 것이요 섞이는 것’ 제자들이 복음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복음으로 물들어가고 섞여지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 진정, 우리는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앙드레 루프는 말합니다.
“수도승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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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움 안에는 이 ‘두려움’이란 것이 숨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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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금요일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기’ 위함이요, 그것은 당신과 함께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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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목요일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대체 왜 일까?
이상하게도,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심지어는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아직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어, 여전히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아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이유가 밝혀잘 것입니다. 그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때’ 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모습이 올바르게 밝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곧 신앙의 눈이 열릴 때라야,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부수고서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상의 자기 자신을 허물어지고, 찢어지고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아드님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여기 수도원에 혹은 성당에 몰려와 있다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군중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를 못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십자가에서 매달려 찢어져 피 흘리지 않는다면, 그저 자신의 치유만을 위해 몰려와 있는 군중처럼, 혹은 믿음 없이 그냥 아는 바를 입술로 고백만 하고 있는 악령들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참되게 믿지 않고 외치기만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십자가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할 일입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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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기를 보면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자기에게서 돌아서셨기 때문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면 하느님도 자기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사울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 요나탄이 사울에게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승리를 다윗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그러니까 공동체에 주신 거라는 점입니다.
요나탄은 분명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승리는 주님의 승리이고 공동선을 위해서 주신 겁니다.
우리는 모든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한 사람의 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주님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영적 권고 8)
-김찬선 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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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월요일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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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좋다고 하여 가난하지 않은 것이 죄인 양 모든 사람에게
가난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중학교 때 청소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게으름 피우는 친구들을 나무랐습니다.
저는 그 때 자신이 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단식하면 되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심리 근저에는 자신들이 단식하기 때문에
더 올바르게 산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아무리 좋아도 강요하지 맙시다.
내가 강요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그것으로 충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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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금요일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낙원까지 안내한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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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목요일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 자신이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스승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곧 스승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스승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올바른 자기이해와 자기수용은 자기 사랑의 기본입니다. 이는 생명의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요
-기경호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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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수요일
사무엘의 외침,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는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짧지만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가 아니라, 이런 저런 지향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습니다
-양승국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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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매번 틀렸다.
지금껏 살아오며 나 자신, 타인, 사회, 문화, 세계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잘못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틀린 점을 조금씩 덜어
매일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게 내 삶이 개선된 이유다
(마크 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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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 10가지 : 프란치스코 교황
1. 험담하지 마십시오.(Don't gossip.)
2. 음식을 남기지 마십시오.(Finish your meals.)
3. 타인을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Make time for others.)
4. 검소하게 사십시오.(Choose the 'more humble' purchase.)
5.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 하십시오.(Meet the poor 'in the flesh'.)
6.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Stop judging others.)
7. 생각이 다른 사람과 벗이 되십시오. (Befriend those who disagree.)
8. 헌신하십시오. 결혼 같은 일들에 (Make a commitments such as marriage)
9. 주님을 자주 만나 대화하십시오.(Make it a habit to 'ask the Lord'.)
10. 기쁘게 사십시오.(Be happy.)
♡♡♡♡♡♡♡♡
2018 년 1월 3일 수요일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 1서 3, 6)
요한 23세 교황님의 ‘영혼의 일기’를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신학생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에 걸쳐 매주 한번 씩 꼭꼭 고해성사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고백하나이다. 저는 제 일생동안 매주 고해성사에 충실해 왔습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는 언제나 성화의 길에 있어서는 확고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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