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토요일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 고린토 12,10)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4)
6월 21일 금요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6,21)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나의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지금 내 마음이 어디 있지?" 하고 물으면 답이 금방 나올 겁니다. 내 마음이 온통 하느님께 가 있으면 내 보물은 하느님이고, 내 마음이 재물에 가 있으면 그게 내 보물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이 땅에 속하는지 하늘에 속하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6월 2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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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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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네”
6월 19일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1-6.16-18)
6월 18일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 결국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6월 17일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오 5,38-42)
나를 보아야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나를 제3자로 보아야 나를 잊던지 편들던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화를 내는 나가 나라고 생각하던가, 기쁜 나가 나라고 생각하면 나는 나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빠져있다면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나의 뺨을 맞는 것보다 친구가 맞았다면 나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맞는 것이 아니라 뱀이 맞았다면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멸시와 고통을 청했던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미워하는 이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나를 봉헌하는 시간이 기도이기에 기도가 아니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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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물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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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럭셔리한 감방과는 거리가 먼, 단 하루도 견뎌내기 힘든 감옥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입에 대기 민망할 정도의 감옥에서, 극도의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던 바오로 사도가, 감옥 밖 교우들에게 건넨 권고의 메시지의 핵심 주제는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피 4장 4~6절)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 과정에서 환난과 재난과 역경이 다가올 때 마다, 그 모든 시련들을 더할 나위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멸시와 박해를 자신의 삶 안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건으로 여겼습니다. 고통과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는 가장 큰 영예로 여겼습니다.
-양승국신부-
6월 16일 일요일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요한 16,12-15)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이고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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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야지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이 행복을 불러옵니다(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
6월 15일 토요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5,33-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신을 믿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세 번씩이나 배신합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나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나 ‘아니요’라고 결정하는 것이 진짜 나입니다. 나머지 모든 생각은 다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악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악의 노예가 되고 악이 됩니다.
-전삼용신부-
6월 14일 금요일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마태오 5,27-32)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제자 카이흔이 하루는 신에게 “신이시여!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신이 사제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은 자기를 세상에서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튿날부터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학자와 정치가와 예술가를 방문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들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내 생각에는 ... ”이라고 시작하며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제야 신이 왜 자신에게 가장 지혜가 있다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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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할 운명입니다. 어떤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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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은 당연히 평생을 보내는 방법과 같다(애니 딜러드).
6월 13일 목요일
6월 12일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다." (마태5,17-19)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겸손의 첫 번째 단계는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의 두 번째 단계는 십계명은 물론 작은 규율까지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평일 미사까지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피정, 교육에 기꺼이 참여하고, 단체 활동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도 있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걸어갔던 겸손의 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6월 11일 화요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마태오 10,7-13)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박사는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 환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 주간만 나의 처방을 따른다면 당신은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처방이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를 궁리해서 그걸 실천하면 됩니다.”
사랑은 부메랑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주는 만큼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돌아올 것을 위해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부활이 없었으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기쁘려면 기쁘게 해 주어야하고 사랑받으려면 사랑해야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제자가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음식을 청했을 때 모욕 받고 매 맞으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6월 10일 월요일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순간, 숨이 떨어져가는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남겨질 교회와 양떼인 우리를 걱정하십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감당하기도 힘겨우실텐데, 자신에게 휘몰아쳐오는 광풍과도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일말의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이 떠나신 후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십니다. -양승국신부-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6월 8일 토요일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 22)
6월 7일 금요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나를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을 주님께서아십니다.” 하고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9)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바라보고, 양들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어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이성근 신부-
6월 6일 목요일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1)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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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21절)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며, 같은 뜻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의지적인 것이듯 하나를 이루는 것도 의지적인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축복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또 그들끼리도 한 몸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 된 모습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인 관계에 참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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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게 기도하기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요한 비안네는 말합니다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 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오리게네스).이고,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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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
하나가 된다는 건 모두 획일적으로 똑같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하나가 되자고 타인에게 자기와 같아지라고 요구할 순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은 똑같아서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을 사랑하고 품고 포용하는 데서 일어나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고 성부께 청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실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오상선신부-
6월 5일 수요일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
자기 고집은 고립이거나 공동체 이탈입니다.
공동체에 속하지도 공동체와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공동체에서 이탈치 않고 속하면서 공동체와 하나를 이루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안에서 살기에 세상의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6월 4일 화요일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7,9)
니체 자신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인류의 지성에 큰 발판이 되었습니다. 선과 악, 거짓과 진실,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지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유를 소개했습니다. 존재와 현상, 이상과 현실, 원인과 결과라는 인식의 틀을 넘어서는 사유를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양자역학의 현상, 빛은 물질이며 파동이라는 물리현상의 발견, 태양계, 은하계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유는 니체가 우리에게 마련해준 발판의 도움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낙타처럼 짐을 지고, 사자처럼 짐을 쟁취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에서 이방인들에게 진리를 향한 발판이 되어주신 분이 있다면 사도행전과 서간에서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사유를 보여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달릴 길을 다 달렸고, 사람들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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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행전 20장 19~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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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와 복음 부분은 특히 더 여러 면에서 깊게 연결되어 있어서 번갈아 살피며 함께 묵상하려 합니다.
우선 둘 다 비장한 대화체로, 엄밀히 말하면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그 대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이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듣도록 당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면,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고난의 여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전한 고별사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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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의 시작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진실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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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겨울이 없다면 산뜻한 봄날의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역경의 겨울을 치른 자가 번영의 새봄을 즐기게 된다(맥클라인).
6월 3일 월요일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어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내가 고독할 때 나는 가장 고독하지 않다.”고 말했고, 도오로우는 “나는 일찍이 고독만큼 사이가 좋은 벗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으며, 펄 벅은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라고 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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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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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여정은 내게 닥쳐온 고갯길에 드디어 간신히 올라섰다고 여기는 순간, 또 다른 내리막길과 절벽과 더 높은 산봉우리와 급류 치는 천길 물속을 마주하게 되는 역동적인 실재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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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 관련하여 떠오르는 말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석가모니가 얘기한 것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초기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것으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석가모니가 하늘 위, 하늘 아래에 나 홀로 존귀하다고 한 말씀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석가모니께서 자기만 혼자 존귀하거나
잘났다는 뜻으로 얘기했을 리 없기에 저는 ‘나’라는 존재는 그 존귀함이
누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나는 나로서 존귀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말씀도 무소의 외뿔처럼
절대고독 속에서 홀로 가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두 말을 합쳐 저는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지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해야 한다.
6월 2일 일요일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가 24,47)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가 24, 48)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그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가 24,50-5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6월 1일 토요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만약 누군가가 나를 조건 없이 믿고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믿으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사랑은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김효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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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전부를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친구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조건 없이 믿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관료인 원료범은 운명을 고치는 책이라는 ‘개운서’를 지었고 이 안에 요범사훈(了凡四訓)을 남겼습니다. 이를 사행습인운(思行習人運)라고 하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바로 생각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의 전환이 바로 내 열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절대 어제를 후회하지 마라. 인생은 오늘의 내 안에 있고 내일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L. 론허바드).
5월 31일 금요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42)
순교성인들을 보십시오. 우리들은 죽음의 위험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죽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도 신앙을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는 곳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활동에 동참하는 특별한 일이 되면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5월 30일 목요일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20)
우리가 성숙한다는 것은 바로 “조금만 있으면”이란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의미를 알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고, 기쁜 일이 있어도 들뜨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영원의 관점으로 보게 되어 이 세상 작은 변화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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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그분의 죽음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위로의 말씀은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7.19절)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 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요한 2,19 참조)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뜻이 죽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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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완전히 습득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겸손한 척하는 법을 배웠다.” -벤저민 플랭클린-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5월 28일 화요일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8)
5월 27일 월요일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요한15,26─16,4ㄱ)
5월 26일 일요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인간은 모두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자로 태어납니다. 이를 ‘원죄’라 합니다. 그래서 감히 죄와 싸워 이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승리의 호르몬과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싸워 마침내 승리하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이제 다시 힘을 얻어 죄와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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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신앙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달으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교 실세(實勢)로부터 단죄(斷罪)되고 십자가에 처형(處刑)되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교회가 출현(出現)한 사실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죽은 예수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 그들 설교의 중심이었고, 교회출현의 핵심(核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믿음 때문에 유대교 회당(會堂)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로마정권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신앙인의 관계에 대해서 명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초기신앙인들이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으며 기록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성령은...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초기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回想)하고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며 하는 말입니다. 신앙인들 안에 일어난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새로움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그 시대 방식으로 표현하고 실천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그 숨결은 사람을 살리는 노력들 안에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을 살리는 섬김의 모습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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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기 때문에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고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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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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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목요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9-10)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 11)
기쁘게 사는 사람은 “바빠 죽겠어요.”, “힘들어 죽겠어요.”라는 식의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많은 일들이 제게 주어진 것을 보니, 쓸모가 있나 봐요.”라는 식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기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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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런 규칙의 틀 속에는 나를 제어하는 예수님의 계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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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웟 22일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1-8 )
세기적인 과학자 뉴턴이 말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많던 지식을 망각해버렸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안타깝게 묻습니다.
“지금 와서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뉴턴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내 구세주라는 사실이다. 이것 외에 더 무슨 지식이 필요 하느냐?”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이고 내가 가지라는 사실만 안다면 기도를 꾸준히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하는지 모르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방법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유익한 일도 할 수 없고 지옥에 살게 됨을 삶으로 체험하는 길뿐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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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은 흔들면 계속 흙탕물이 됩니다. 그냥 보기만 하면 흙은 가라앉고 맑은 물이 비로소 보이기 마련입니다. 격렬하게 논쟁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도 침묵 중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면 비로소 해결책이 보이곤 합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필요할 수가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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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의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한꺼번에 인사를/해서는 안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눈을 맞추며/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백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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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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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31ㄱ)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 평화로운 마음을 상대의 마음과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평화롭지 못하면 나를 먼저 평화롭게 하기 위해 상대의 마음보다는 자신 위주의 말을 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평화롭다면 그때야 비로소 상대의 감정을 먼저 느끼고 배려하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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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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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요한 14,21)
‘사랑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참조)이기에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 그 성령을 받습니다.
-전삼용신부-
5월 19일 일요일
제 이메일에는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하면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19)
-장재봉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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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가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기록된 다른 복음서들 안에 있는 주제(主題)들을 정리하여 명상(瞑想)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상합니다. 그 시대 그리스도신앙 공동체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비롯된 성찬을 이미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요한복음서」저자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새삼 하기 보다는 신앙공동체들이 이미 거행하고 있는 성찬이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이야기였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의 몫입니다. 이 복음서는 종이 하는 일을 몸소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신앙인도 종과 같이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알립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은 후,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말할 때는 그분이 하신 일이 하느님을 보여주었다는 뜻입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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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토요일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 7~11)
창조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비워야합니다. 나를 비우는 방법은 나를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미사 때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다는 상징입니다. 봉헌이란 하느님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느님 것이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며, 당신이 아버지를 당신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당신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겼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전삼용신부-
5월 17일 금요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여기에서 “가장 가까우신”이라는 말은 본래 희랍어로 직역하면 “품을 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향해야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를 향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보아야 내가 보입니다. 계량기를 보면 내가 소비하는 전기와 나의 삶이 보이듯, 하느님을 보면 내 삶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라사 성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여러분이 덕에 나아갔는지 알고 싶거든 한 가지 아는 법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자기를 그 중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서 남에게도 선과 이익을 끼치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제18장 7항)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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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이웃들과 평화롭게 융화하면서 살면 안 되는가.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별을 딛고 사는 동승객인데, 궁극의 진리를 찾기 위해 각자가 어떤 길을 가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존재의 신비는 너무나도 심원해 답에 이르는 길이 없거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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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목요일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 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가 당신을 배반할 것인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당신과 빵을 나눈다는 말은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신은 가족처럼 받아들였지만 그 사람은 당신을 원수처럼 대했습니다. 그 받아들임이 곧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리옷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단 가운데 머문다고 반드시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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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거시적인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골목길이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들의 갈망을 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은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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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를 제 2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주님처럼 오상을 받을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완전한 복음실천과 완전한 일치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오상을 받은 것 때문이라면 프란치스코 말고도
오상 받은 성인이 더 있잖아요?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아무리 최초로 오상을 받았을지라도
그것 때문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주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바로 그것 때문에 제 2의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렇게 말을 만들어봅니다.
< 내가 없으면 나는 네가 된다.>
그러니 주님의 종일지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종이 실천을 하면
오늘 주님 말씀처럼 행복할 터인데 그것은
내가 없으면 주님의 종도 주님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5월 15일 수요일
5월 14일 화요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 11)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한 40년쯤 전에 저희 수도회 한 총장님이 교황님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서 작은 형제들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그 총장님이
주저하지 않고 ‘저희는 땜장이입니다.’고 답했다 -김찬선신부-
5월 13일 월요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문’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 푸른 풀밭이 있고 생명이 흘러넘칩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도 문입니다. 각자가 믿는 대로 각자의 세상을 만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창조한 세상 안에서 살게 됩니다. 내가 창조한 세상이 천국이라면 나를 믿는 사람들은 나와 만날 때 천국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지옥이라면 나를 믿는 사람들은 나와 만나서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5월 11일 토요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8)
내가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싶은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고 싶은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삶의 방향을 동시에 결정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5월 10일 금요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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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신 의미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서 ‘목소리’로 살아가십니다. 그리고 매순간 “나처럼 살고 있니?”라고 물으십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너는 나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았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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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암아"(요한 6,57)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듯, 예수님을 먹는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말미암는다는 말은 원천이고 원동력을 뜻하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아버지 때문에/덕분에 사시듯이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덕분에 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이유, 삶의 이유가 됩니다. 벗님이 자식 때문에/덕분에 살고, 부부가 서로 때문에/덕분에 살듯이, 참으로 사랑 안에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이유요 원동력이 됩니다
경에서 빛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야기하고, 시편 저자 역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09,105)경에서 빛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야기하고, 시편 저자 역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09,105).-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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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일은 자신을 축복하는 일과 같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을 어떻게 사는가가 아닐까요? 즉,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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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4-51)
성당에 와서 미사를 하면서도 이것저것 부족한 듯이 청하고 있다면 성체성혈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분 앞에서 또 무엇이 부족하여 다른 것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해서라도 그것에 감사하고 그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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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말씀을 읽고 다가오신 말씀에 머무르는 자체는 이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현존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현존을 알아보고 깨닫는 눈은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열린다는 걸 그 내시가 고백한 셈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러니 예수님 곁에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이미 아버지의 손길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엮인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 채듯 데려가시는 통에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사도 8,39)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시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기 위해 쓰신 도구(필리포스)가 사라졌어도 말씀을 통해 기쁜 소식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기쁘게 제 갈 길을 갔다는 표현에서 그가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섰음이 느껴집니다.-오상선신부-
5월 8일 수요일
this is the will of my Father,
that everyone who sees the Son and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and I shall raise him on the last day
좋은 사람과 함께 하면 축제, 나쁜 사람과 함께 하면 수행(고바야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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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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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화요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모든 욕구는 소유하지 못해서 생겨나는데,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내가 사랑이 됩니다. 사랑이 되었다면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글 중에서)
5월 4일 토요일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16-21)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이틀 있는데, 내가 태어난 날과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된 날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이 태어난 이유를 찾는 것은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의 존재 이유는 누군가에 의해 특별한 의도로 만들어졌을 때 갖게 되는 것입니다.
휴대 전화의 존재 이유를 원숭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들어진 것의 의미는 만든 이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휴대 전화는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주인을 만날 때 비로소 그것이 만들어진 이후로 가장 중요한 날을 맞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가려고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릅니다. 날은 어두워졌고 거센 바람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는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서 참삶의 의미를 모른 채 하루하루를 견뎌 가는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명확한 이유를 몰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창조주이신 주님을 알려 주시고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명확히 일러 주십니다. 하느님을 창조주요 참주인으로 만나게 되는 날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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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주님의 부재." 이는 하느님과 걷는 영적 삶에서 언제든지 밀고 들어올 수 있는 불청객입니다. 어떻게든 헤쳐 나가보려고 안간힘 쓰며 노를 젓고 배의 중심을 잡아보건만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바람은 더 드세어지고 호수는 뒤집힙니다. 배는 나뭇잎처럼, 종이조각처럼 이리저리 쓸려다닐 뿐 보호막이 되지 못합니다. 물이 차오르지만 퍼낼 힘도 없습니다.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
"어느새". 이 단어는 철저히 제자들의 주도권이 배제된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제자들은 몰랐다는 말이니까요. 어둠 속에서 동요하는 영혼에게 주님께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실 때, 믿고 그분을 맞아들이려는 의향만으로도 이미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보려고 안간힘 쓸 때는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뒤로 밀려나 버렸는데, 주님 현존을 갈망하고 팔을 뻗는 것만으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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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금요일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6-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 6~7)
매순간 그분 안에 새겨진 지도를 보아야 그분이 제시하는 길을 갈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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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10)
아버지와 아드님은 하나이십니다. 또 이어서 말씀하실 성령과도 함께 한 분이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지하고 아둔한 우리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조금씩 열어보이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오한 신비를 향해 제대로 알아듣든 미처 다 못 알아듣든, 마치 안개 속을 더듬듯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5월 2일 목요일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 3,31-36)
하늘의 법은 가난과 절제와 겸손입니다. 반면 세상의 법은 돈과 명예와 쾌락입니다. 우리가 어떤 법을 택하는지에 따라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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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상처는 서로 함께 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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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이나 코칭을 할 때, 가장 큰 주의사항은 답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생기는 많은 갈등과 다툼은 잘 들어주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잘 들어주는 데에서 사랑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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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헤라클레스가 길을 가다 괴물의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괴물을 두들겨 쓰러뜨린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3~4배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더 센 힘으로 때려 눕혔는데 이번에는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자 헤라클레스는 아테네 여신을 찾아갔습니다. 아테네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괴물의 이름은 ‘다툼’인데 때릴게 아니라 못 본 척 놔두면 저절로 작아져 힘을 못 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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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수요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한 3,16-21)
세례로 새로 태어난 우리는 이제 온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이신 분께로 나아갑니다. 빛으로 나아간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진다는 뜻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빛이셨고 그 이전까지 우리가 닮으려 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빛을 받아 보여준 달과 같은 역할을 하던 분들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의 눈을 진흙으로 만들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부들은 이 내용을 세례성사로 해석합니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파견 받습니다.
누군가를 바라만 봐도 닮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빛이시고 빛을 볼 눈을 지녔는데 예수님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면 아직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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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이른 아침", "감옥"과 "성전"은 각각 어둠과 빛을 상징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밤",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들은 자기 안위를 위해 멀리 도망가거나 숨어버리지 않습니다. 어둠을 피하려 또다른 어둠을 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와 섭니다. 또다시 투옥과 박해, 위험이 닥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들이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4월 14일 일요일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루카 22,26)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그 종이를 주워오도록 한 다음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남아 있는 향기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부처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자 이번엔 길가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새끼줄을 주워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이 “그것은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줄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원래는 깨끗하였지만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지만,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찾아 들게 마련이다.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는 것이고, 새끼줄은 생선을 만나 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사람도 이처럼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의해 물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요?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빨리 불쌍한 이웃들을 만나 사랑을 전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선 나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면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도 나의 향기를 맡고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선 그분으로 내가 흘러야합니다.
에제키엘 47장에 보면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난다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우리 메마른 땅에 들어와 우리를 다시 생명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해처럼 꽉 막혀있던 우리도 이젠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른쪽 옆구리가 터지며 우리 물을 이웃에게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웃이 우리가 뿌리는 물로 살아납니다. 그러면 그들도 흐르게 됩니다.
내 겉옷을 벗어 그분께서 들어오실 길 위에 깝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도 뚫리게 되어 성령이 흐르는 성전을 친구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4월 13일 토요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 53)
앙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들춰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 원하는 일을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파수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등대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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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미 마음 적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결정을 내렸습니다. 마음에서 올라오는 질투와 시기심, 화 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감정을 덮어버리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드는 것처럼 보이면 로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이유를 찾아냅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핑계들은 다 맞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속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을 속이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 – 생각 – 말, 이 셋 중 가장 솔직한 것이 무엇일까요?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일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고 말은 입으로 합니다. 인간은 ‘심장 – 머리 –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에게서 심장이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그러니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나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이 감정이 생각을 거치면 퇴색되고 말과 행동으로 나오면 전혀 다르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말과 행동, 혹은 생각만 바라보면 나를 아주 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가장 솔직한 것은 마음입니다. 나의 시선을 말이나 생각에 두기보다는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 욕구에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솔직할 수 있고 자기 합리화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4월 12일 금요일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 38)
술주정뱅이는 술이 깨고 나면 술 마신 것에 대한 후회라도 하지만, 자신은 죄의식도 없이 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더 한심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아는 아우스딩 성인이십니다. 성인이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 때, 수사학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정뱅이를 통해서 큰 뉘우침을 얻었고, 이 뉘우침이 그가 회심해서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삶을 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조명연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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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되신 최인호 씨는 투병 중에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성체가 고픕니다.’ 신부님께서는 고인의 간절함을 보았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성체’를 영해 드렸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과연 나는 그토록 간절하게 성체를 모시고 싶어 했을까?’ 늘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지낸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질문이 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와 존재의 이야기입니다. 아! 정말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내가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고집과 나의 편견과 나의 자존심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깨달음은 더 채우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내가 버릴 때, 나의 마음을 비울 때 그때 깨달음은 바람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자존심, 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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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이 “있는 나”라고 하시며 하느님이심을 자처하셨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계신 듯 말씀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맡겨드리고 아버지 눈에 비친 당신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을 하느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여겨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 안에 들어와 그 사람을 차지하면 그 사람은 신이 됩니다. 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 일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시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망치로 훼손한 조각가가 있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보며 자신의 못난 실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가 나서 피에타 상을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스스로는 대단한 조각가라 생각했을 수 있지만 더 완전한 사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처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이런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는 사람이 더 겸손합니다. 하느님의 눈에 비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이렇게 서로를 사랑으로 마주보며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내 안에 모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또 내가 상대의 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이 삼위일체의 신비로 살아본다면 커다란 발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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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영명축일 미사 때 축하객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며
물과 포도주를 섞는 예절을 제가 소리 내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라고 소리 내어 기도한 겁니다.ㅍ
오늘 사람들은 주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려 하면서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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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목요일
나를 영광스렵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8, 54)
예수님을 ‘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은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말을 쓸 때 그 나가 신앙을 갖기 이전에 썼던 ‘나’의 의미라면 아직은 죄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나’가 되시기 위해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에 요한 23세 교황은 ‘나’라는 주어를 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나’라고 하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인칭 주어의 대상을 바꾸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의 나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나를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상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꾸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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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모든 사람은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4월 9일 화요일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4월 8일 월요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빛은 바로 보게 합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알면 아버지도 알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시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면 저절로 세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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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일요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라는 스님이 불상을 태운 일화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당나라 시기 유명한 고승인 단하천연(丹霞天然)이 낙양 동편에 있는 혜림사에서 하룻밤 묵을 때 벌어진 일이다. 때는 겨울이고 눈까지 내려 추위에 떨던 단하는 결국 불당의 목불(木佛)을 쪼개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것으로 언 몸을 녹이며 날을 새웠다.
다음날 사찰 전체에 난리가 났다. 성스러운 불상을 태워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절의 주지가 단하에게 왜 불상을 태웠냐고 따져 물었다. 단하는 천연덕스럽게 이 절의 불상이 유명하다 하니 부처님의 ‘사리’를 얻을까 해서 태웠다는 것이다. 목불에서 사리가 나올 리는 없는 법, 주지는 나무 불상에 어찌 사리가 있겠느냐며 화를 냈다.
이에 단하는 “사리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나무토막”일 뿐이라며 오히려 주지를 힐난했다. 나무토막에 불과한 불상이 추위에 떠는 중생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한 사람, 오늘 독서에서의 바오로다.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멋진 성전을 짓는 일도, 교회의 교리를 수호하는 일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우선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들이 버려져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교회에 남겨주신 유일한 유언이기 때문이다.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불상을 애지중지하는 것보다 그것을 태워 추위에 떠는 중생을 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불심이다.
-서강휘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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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말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8,32).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단죄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인과응보가 요구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악순환(惡循環)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서공석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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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토요일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7, 41)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해야 한다"(요한 7,51)
말을 논리적으로 하는 이들을 조심하라
이 세상에서 가장 사기를 잘 치는 사기꾼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기꾼: 하느님, 인간에게 10억 년이 하느님에게는 1초라면 서요?
하나님: 물론이지!
사기꾼: 그럼 인간의 10억 원이 하느님에게는 1원이겠네요?
하나님: 당연하지!
사기꾼: 하느님, 그럼 저에게 1원만 적선해 주실래요?
하나님: 오냐, 알았다. 1초만 기다려라!!
사기꾼: 헉~~!!!
사기를 치려면 좀 논리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논리로도 하느님을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논리적인 신학자가 묵주기도만 하는 성당 할머니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어떠한 논리도 믿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것이 곧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성경해석이나 신학적 논리에 속아 넘어갈 확률이 큽니다. 신앙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인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논리적일수록 오히려 진리에서 멀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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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4월 5일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 28~29)
4월 4일 목요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 36)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한 5,34)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죄는 인간이라 여기면서 하느님처럼 살려는 이들이 짓게 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인간이라 여기면서도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느님이라 믿었으면 그런 행동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믿음이 없으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려고 했던 이들이 사제들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성적으로는 그렇지 못한데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살려다보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낮과 밤은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낮에는 하느님의 자녀로, 밤에는 죄인으로 산 것입니다.
자신이 좋은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죄는 짓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아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4월 3일 수요일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한 5, 30)
내 몸이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늘 궁금했던 어떤 학자가 연구를 했습니다. 자신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바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다섯 사람의 평균값이 곧 자신의 모습이라고 발표를 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 뇌의 특징을 들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자기 자신과 동일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이나 습관을 결정하는데 ‘진짜 자신’의 주관은 1/6밖에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주변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가까이 할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내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우리의 모습도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나의 행동이나 습관은 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며,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 세상 전체가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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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화요일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4월 1일 월요일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3월 31일 일요일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가 15, 22)
우리가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살 때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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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복음사가는 집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굳이 분리하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버지 집 역시 같은 의미, 곧 "제자리"를 의미합니다. 작은 아들은 욕망의 탐닉과 자기파괴적 삶을 멈추고 "제자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
아들의 돌아오는 발걸음은 굶주림과 불안에 지쳐 무겁지만 그를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노구임에도 재빠릅니다. 행여 괜한 자존심으로 작은아들 맘이 변할까 조급하기까지 하지요. ~~
아버지의 입맞춤은 흡사 마술과 같습니다. 사랑의 마술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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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토요일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3월 29일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3월 28일 목요일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예레 7,24)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예레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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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고, 경상도냐 전라도냐, 남자냐 여자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 사용자냐 노동자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종교가 뭐냐... 이렇게 니편내편으로 갈라 어디에 속해야만 마음이 안정되나 봅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사람을 회개자냐 아니냐로만 구분하였었지요. 우리는 하느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네요. 사도 바오로도 제발 아폴로파니 바오로파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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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고,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책 ‘햄릿’에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찰리 채플린).
3워 27일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이 가야할 겸손의 3단계
첫 번째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첫 번째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연구하고, 지키려했던 계명입니다. 이렇게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율법에 얽매여서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 못한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입니다. 본당에서 실시하는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시간과 재물의 십일조를 충실하게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신앙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위한 사랑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내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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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 18) 얼핏 유다인들을 안심시키는 말씀인 듯 들리지만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가히 혁명적인 뜻이 됩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우리를 골고타의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가 그분께서 모진 십자가형 끝에 숨을 거두며 하신 말씀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더 큰 사랑이 없을 만큼 가장 큰 사랑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신 그 순간이 곧 모든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와 합하여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랑의 극치인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율법은 완결되었고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으로 세세한 율법 조항들을 묶어 진정 자유롭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을 친히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마태 5,19)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수덕적 차원과 가르치고 행하고 베푸는 실천적 차원을 동시에 언급하십니다. 율법, 계명은 지키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나와 이웃에게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가치임을 알려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교회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3월 26일 화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오 5, 19)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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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만들이란 것들이 제가 교만하기에
사람들이 제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제가 용서해야 한다면 대단한 용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괜찮다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3월 24일 일요일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가 13,8)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동시에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명명된 하느님 자녀의 품위는 어떤 상황에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 갖춰집니다. 하느님 자녀의 품격을 지니고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란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뜻이라 살피게 됩니다. 즉 더 사랑하려 하지 않고 선을 행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잘 지낸다고 자만하는 마음이 곧 죄임을 밝혀주고 계시니까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이 곧 죄임을 명심하라는 경고이니까요.
-장재봉 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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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 안자가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배의 사공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노를 저어갔습니다. 안자가 물었습니다.
“나도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사공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연습만 하면 곧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사람은 배를 본적이 없더라도 바로 노를 저을 수 있습니다.”
안자가 사공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노 젓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어 빨리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자는 배가 뒤집어져도 당황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
두려움은 우리가 무언가 배우고 도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엉덩방아 찧는 것이 두려웠다면 어떻게 스케이트를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내가 다치거나 죽거나 손해볼까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보호기능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래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안에는 죽어야 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을 죽이면 두려움이 사라져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
.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포도나무는 다 열매를 맺는데 무화과나무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열매는 무엇일까요? 포도원지기가 원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위해 포도원지기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포도 재배인’으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포도 재배인이 왜 무화과나무에 집착하실까요? 이 무화과나무는 왜 포도밭에 달랑 한 그루만 심겨져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포도나무와 다르다고 믿고 있는 나무입니다. 본성은 자신이 무엇이라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 믿으면 늑대가 되고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되며 자신이 예수라 믿으면 제2의 예수가 됩니다. 무화과나무는 그래서 자신이 특별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크게는 자신들만 선택받았다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기도 하겠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3월 23일 토요일
모자라면 모자란 그 자체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관계의 잎사귀는 넓어진다(칼 융).
3월 22일 금요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42)
“성인이 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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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형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지만, 은전 스무 닢에 팔려갔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작인들은 욕심과 교만 때문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였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이 욕심 때문에 양심을 속입니다. 욕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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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께 깊은 회개의 눈물을 분향처럼 올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존재 가득 새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버려진 돌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드시는 하느님께서 요셉을 버림받은 형제, 이민족의 노예에서 민족의 구원자로, 예수님을 가장 치욕스런 형이 집행된 사형수에서 다시 살아난 하느님의 아들로 일으켜 세우셨듯이, 볼 수록, 또 알 수록 비천하고 수치스런 우리 죄악의 부끄러운 지점을 선과 생명의 출발점으로 바꿔주시기를 믿고 또 바랍니다.
그것은 은총, 사랑, 능력, 선, 아무튼 하느님께서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다시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고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돌려드림과 나눔, 이것이 소작을 잘 내는 것입니다.
3월 21일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죽은 이들 가운데에서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31)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불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에 눈이 멀면 하느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불의한 재물을 쌓아놓지 말고,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래야 나중에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그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일 것입니다(루카 16,9-12 참조). -염철호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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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시련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시련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절대로!”(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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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8)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태 20,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약속은 당신 오른쪽 자리, 왼쪽 자리가 아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복음환호송) 우리는 자리나 통치, 군림, 세도를 위해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 그것도 참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 빛을 받아 그 빛과 하나 되어 빛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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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태조 이성계가 농담으로 무학대사보고 돼지같이 보인다고 하니
무학대사는 껄껄 웃으며 임금님은 부처같이 보인다고 했다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시안견유시豕眼見惟豕 불안견유불의佛眼見惟佛矣.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답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눈을 가지면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주님으로 보일 거고,
그래서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주님으로 여기며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3월 19일 화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오 1,20)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로마 4,18)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못합니다. 자신도 큰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로운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 내가 내심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려서라도 나의 불의를 극복하고 정당한 사람이 되려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탓이오!”를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에 대해 내 심장을 치려고 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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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사유화하지 않고
진리도 사유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고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최고의 사랑으로 진리에 의합함으로
신적인 의로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셉은
이 신적인 의로움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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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앙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좋은 일을 많이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조차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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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
3월 18일 월요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힘들 때 포기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힘들 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비움’을 이야기 합니다.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으면 사람이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옹 선사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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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간직한 죄인으로서,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보려 죽음같은 자기 비움(버림)의 강을 건넌 이는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용서와 자비라는 보화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용서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임을 체득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하느님과의 친밀감은 덤입니다.
-오상선 신부 묵상글 중에서-
3월 17일 일요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그분처럼 변화할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 시련을 통해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으로 고대하면서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변화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은 우리가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계기입니다.
-한민택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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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아브람이 목격한 하느님 현존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불가능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강력한 촉매제이며, 지켜내야 할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혼란과 절망, 환멸과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일을 지켜내는 것,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의 자세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후 조용하고 담담하게 수난을 기다리는 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 우리의 몸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제2독서, 필리 3,21) 조금씩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수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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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게 된 과정(過程)을 알립니다. 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말은「구약성서」에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본, 그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교감(交感)을 하며 사셨던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이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것은 초기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그분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하느남의 나라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믿음,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삶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삶의 공간이 하느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빌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의 선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서공석신부 묵상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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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긍정적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세상에 내려왔지만 인간은 그분을 무시하고 침 뱉고 십자가를 지우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가 어떻게 부정적 현실 앞에서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지를 보여줍니다. ~~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빛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들은 모세를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
성체 앞에서 일정 시간만 머물러 있으면 먼저 내가 변화되고 그 다음엔 나에 딸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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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토요일
화나는 나를 볼 때 이미 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기도를 통해 내 자신을 들어 높이면 제3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보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하느님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합니다. ~~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나를 하늘로 들어 높여 태양까지 가야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불타고 있다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같은 사랑을 뿌려주는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높이 올라가면 분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랑은 나를 높이 들어 올릴 때만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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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정점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하는 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 말씀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참조)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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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기도를 할 때 가장 훌륭한 청원기도는 하느님 자신을 주십사고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원수가 은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이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3월 15일 금요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오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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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자기 죄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죄가 크기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열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는 이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이 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약한 베드로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유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용서 받은 것은 죄가 작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것은 배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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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그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의로운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의를 화를 통해 정당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의로움과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의로움은 빚이 없다는 뜻입니다. 빚이 없으니 당당하게 누구 앞에나 설 수 있는 마음이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
예물은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어야지 그 예물을 통해 무언가 얻어내려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
화는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 불의한 사람이고 혹시 의롭게 되었더라도 이는 모두 주님 덕이니 같은 처지끼리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웃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로 예물을 바치는 것은 의롭지 않은 제물이니 바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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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스코의 말씀,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교사에게 있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참 스승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급여를 받으니 의무감에 교단에 서는 월급쟁이가 되는가는, 바로 이 마음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
돈보스코께서 강조하신 그 마음은, 다름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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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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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한계를 확장시킵니다. 살인만, 간음만, 도둑질만 하지 않는 것으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요구에 섬세하게 응해야 하고, 최소한의 악을 피하며 살기보다 최대한의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이니까요.
"아, 그래 나의 말 한마디, 냉정한 눈빛 하나가 저 벗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좀 고쳐 먹으라고. 제발 돌아서라고. 제발 회개하라고. 그게 진정 네가 살길이라고. 그게 진정 네가 의인이 되는 길이라고.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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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12)
잔잔한 호수라야 하늘을 비출 수 있듯 평안한 마음이라야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3월 13일 수요일
이 세대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루카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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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낮을 갇히고 나서야 요나는 참회와 동시에 찬양의 기도를 주님께 바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시니 큰 물이 저를 에워싸고 당신의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제 위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를 구렁에서 저를 건져 올리셨습니다.”(요나서 2장 3~7절)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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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은 필요한 조건이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부자 역시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탁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충분한 조건입니다. 가난한 사람, 보통의 사람도 하느님께 맡기고 의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놓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저승의 배 속에서 제가 부르짖었더니,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하느님께서는 요나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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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를 대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핑계는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눈가리개입니다. 핑계는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를 지속하기 위한 자기합리화 수단입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면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합니다. 그래야 교정을 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을 저지르고 가장 먼저 했던 행위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고 말하는 핑계였습니다. 이 핑계는 “앞으로 이런 상황이면 또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이 한 번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는데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플라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왜 변명을 안 하십니까?”
그때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그들의 비난을 종결시키는 것은 나의 변명이 아니라 나의 행위이다."
핑계를 대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핑계를 대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자신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고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핑계는 자기를 못 보게 가리는 눈가리개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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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나서를 읽으면서 전에 한 번도 유의하여 읽은 적이 없는,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이 구절의 ‘사십 일’과 우리가 지금 지내는 사순절이 겹치면서
니네베 사람들과 제가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은 요나보다 큰 분이시고 주님과 비교하면 요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를 했는데
저는 요나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신 주님 말씀을 듣고도 이 사순시기, 곧
사십 일 안에 어떡해서든 회개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선의지 없음, 회개의 의지 없음, 하늘 두려움 모름, 악행의 지속 의지,
이 네 가지 중 혹시 내게 해당되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3월 12일 화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10)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 13)
3월 11일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40)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내가 하느님 처럼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되고
이윳울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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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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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녀에게 한없는 사랑을 줍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까워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집트의 신화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 두 질문에 모두 “예!”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인생에서 기쁜 일을 찾았습니까?”
“그리고 그 기쁜 일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나비는 꿀을 먹기 위해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들을 수정시켜줍니다. 그것들이 열매 맺게 도와주었대도 나비는 그 좋은 일을 한 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자신에게 꿀처럼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이태석 신부님의 유언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톤즈에서 여러 해 지내면서 톤즈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제가 그들에게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감사할 줄 알았고 부족한 가운데 나눌 줄 알았습니다. 톤즈 사람들과 아이들은 저를 사제로서 교육자로서 믿어줬고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톤즈의 친구들에게 감사하면서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삼용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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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경로는 사랑이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어지간히 고단한 삶 속에서도 행복하다(김규항).
3월 10일 일요일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13)
성경에서 사십이라는 수는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뒤 하늘이 열려 밤낮으로 비가 내리며 땅을 씻어 냈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창세 7,12.17 참조), 산봉우리들이 드러난 뒤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려고 기다린 기간도 사십 일이었습니다(창세 8,6 참조). 모세가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려고 산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탈출 24,18 참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한 것이 사십 년이었습니다(탈출 16,35; 민수 14,34 참조). 이렇게 보면 사십이라는 수는 정화의 시기, 기다림과 준비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철호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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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分知足’(안분지족).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지족(知足)에서 족(足)은 구(口)와 지(止)가 합쳐져서 생긴 글자다. 그래서 지족은 지지(知止), 즉 멈출 바를 아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만족은 탐욕과는 다르게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이 ‘멈춤’이다.
탐욕은 멈출 바를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여유가 없다. 탐욕은 인간이 갖기 쉬운 하나의 맹목이다. 맹목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탐욕 하는가를 물으면 특별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것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내연기관과 같다. 그러한 엔진은 연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탐욕 역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다면 멈추지 않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장자(莊子)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기심(機心), 즉 기계적 마음이라고 부른 것이나 유가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참다운 선(善)에 이르는 것의 시작으로 ‘멈출 바를 아는 것’(知止)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명나라 때 일부 유학자들은 이 멈춤의 순간을 기(幾)라고 불렀다. 일종의 전환점이다. 그들은 이 기를 우주의 운행원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까지 칭송했다. 지나간 과거의 악습, 혹은 기계적 생활에서 마음을 내는 일이 바로 멈춤이다. 물론 이 멈춤은 멈춰 서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멈춤은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시작이고 그래서 첫 마음이 되는 것이다.
-서강휘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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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에서 탈피하여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자고 부르짖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 점에 있어서 양보도, 타협도 하지 않아서 그 시대 실세(實勢)로부터 죽임 당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하느님을 당신 삶의 근본으로 생각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재물도, 권세도, 명예도 당신 삶의 보람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근본이신 하느님이 그분을 죽음의 허무에서 살리셨다는 것이 그분의 부활입니다. -서공석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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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영원으로 가는 통로일 뿐이라고 외칩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세상이 꿈임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통해 증명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이 세상을 목적지가 아닌 여행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여행자는 그 나라의 환경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좋은 경험으로 즐깁니다. ~~
사탄은 우리 머릿속에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어 생각이라는 매개체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생각은 사탄이 나를 얽어매는 포승줄입니다. 생각을 많이 해서는 절대 이 세상의 허구성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더 집착하게 됩니다.
생각을 끊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광야’로 나아가야합니다. 광야는 생각할 거리가 극도로 제한된 장소입니다 ~~
기도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끊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
광야는 교회이고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내 생각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한 편으로는 “내 생각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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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오로 사도는 ‘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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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꿈을 이루는 것을 막는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토머스 브래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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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토요일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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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기도 중에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늘나라 가장 높은 곳에 비어있는 멋진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저 의자가 누구의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누구냐고 묻자 천사는 “당신의 스승인 프란치스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제자가 프란치스코의 겸손을 시험하고 싶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세상에 분명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세상에서 선생님이 제일 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라네.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누구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셔야 하는지 아십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사람이 세관일을 하고 있는 레위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왜 겸손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의 이름에 해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레위란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사제의 일을 맡기신 지파의 이름입니다. 레위는 이름 자체로는 사제의 일을 해야 하는데 누가 봐도 죄인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사제여야 하는 것을 아는데 죄만 짓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압니다.
이태리 어느 시골에 마리오와 안셀모라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마리오는 위대한 설교가가 될 꿈을 안고 수도원에 들어와 사제가 되었습니다. 반면 안셀모는 같은 수도원의 평수사로 살았습니다. 마리오는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셀모는 친구를 축하해주며 “항상 너의 사제직을 위해 기도할게.”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마리오는 교회의 저명한 설교가가 되었고 안셀모는 수도원의 굳은 일을 하며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마리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안셀모가 떠올라 기도를 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셀모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마리오는 안셀모의 시신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도원 원장이 마리오에게 물었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가?”
“아닙니다. 안셀모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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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가?”
제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내놓았으나 스승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스승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스승은 계속 말합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 두 사람의 가슴은 아주 멀어져서 마침내는 서로에게 죽은 가슴이 된다. 죽은 가슴에겐 아무리 소리쳐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더 큰소리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조명연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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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부르제, ‘정오의 악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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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금요일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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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은 인간이 하느님께 통회와 청원의 마음을 담아 취하는 겸손의 표현이고 또 다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3월 7일 목요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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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11,26;30,19-21).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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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 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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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을 많이 하려는 사람은 내 주장이 강한 사람입니다.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나보다는 타인에게 더 집중해야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은 돈을 좋아하면서도 돈만 아는 사람을 비판합니다.
이상하게도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 나도 살고 이웃도 살게 됩니다. 더 생명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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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십자가가 사실 내게 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임을 은총으로 깨닫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을 겁니다.
과거는 주님의 자비에, 미래는 주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어느 성인의 충고처럼, 딱 지금 이 순간 여기 내 자리에서 주어진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단순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믿고 희망할 때만 가능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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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재의 수요일
오늘은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던 우리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눈만을 신경 쓰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사순 시기의 시작입니다.(염철호 요한 신부)
악과 맞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고,
악과 맞서는 것도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요.
이것이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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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다는 것은 아픈 곳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아픈 곳이 많아져도 잘 견디고 다스린다는 거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 모든 생을 사랑하고 아픔에서조차 무언가를 배우며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거다(한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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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화요일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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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며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되게 될 것입니다. 곧 아무리 값지고 좋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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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부모를 위해 살고 커서는 나를 위해 살며 신앙을 가지면 하느님을 위해 삽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해주셨으니 이 생을 헛되이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이제 이 생을 헛되게 만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습하는 시기가 사순절이고 그래서 사순절 동안에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권유합니다.
육체적인 즐거움이 없는 것은 어쩌면 육체적인 즐거움을 끊지 못해서이고 돈이 부족한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일 수 있으며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이는 애정에 너무 집착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더 풍부해지기 위해 버리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많은 사람은 기분 좋게 흥분된 상태를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흥분된 상태 안에는 평화로움이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평화로움에 기반을 둡니다.” -틱낫한 스님. -
3월 4일 월요일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코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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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국을 희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좋아하면 이미 지옥을 선택한 것입니다. 욕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은 세상 기쁨을 끊을 때 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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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조욱현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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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가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나누지 않고서는
기쁠 수 없고
주지 않고서는
주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곳은
우리의 재물이 아니라
삶의 구원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너무
커져버리게 한
욕심을 반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작아지는 것입니다.
-한상우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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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족함은 바로 "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에 빈 곳이 곧 하느님의 자리인데 인간적 능력과 의지, 재물로 꽉꽉 들어차서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움, 없음"이 없는 존재에게는 하느님께 내드릴 자리가 없습니다.--
비우고 버리고 나누는 것이 흔히 생각하듯 상실이나 실패, 낭비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이고 영원한 생명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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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 하신다. 모든 인연들에 연연하지 말고 .....
3월 3일 일요일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됩니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냅니다. (집회서 27,4~6)
뱀은 물을 먹어 독을 만들고,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든다는 말인데
같은 물을 먹어도 뱀은 남을 해치는 독을 만들고
소는 남을 살리는 젖을 만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어떤 존재냐에 따라 나오는 것이 다르니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존재가 뱀과 같은 존재에서 소와 같은 존재로 바뀌지 않으면
좋은 말, 남을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주님의 영을 지니지 않고 육의 영을 지닌 육의 사람/세속적인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좋은 강의 많이 들어도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비 복음적이고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이 얘기하는 회개는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회원은 복음의 강력한 힘에 자극받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내적 변화에 의해 자신
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야 한다. 복음은 이것을 회개라 한다.”
3월 1일 금요일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15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16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집회 6.14~16)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5절)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아담이 하느님께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그리고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창세 3,13)라고 핑계를 대는 것에서 나온 법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인 것 같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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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를 대하는 혼인유대관계 안의 남녀라면, "성실한 친구"(집회 6,14.15)처럼 서로에게 "든든한 피난처, 보물, 지고한 가치, 생명을 살리는 명약"(집회 6,14-16)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나열한 "성실한 친구"를 일컫는 표상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자기들의 주님께 붙여드리고 고백한 명칭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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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목요일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오늘 화답송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우리는 말로 상처를 주고, 손으로 물건을 훔치고,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곤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나의 손과 발 그리고 입과 눈의 문제가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바로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의식과 정신의 문제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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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고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달려가는 방향을 멸망의 길에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은 갈라진 틈새와 같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핑핑 돌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우리 눈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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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일정한 염도로 각 재료의 고유한 맛을 유지시킵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한다는 것은 우선 나의 내면부터 부패하지 않도록 정화하고 소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신선도와 맛이 유지되면 타인을 오염시키거나 넘어뜨리지 않겠지요. 또 다행히 그 타인도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있어 공동체 내부 관계가 이 상태에 이르면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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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 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 위에 머무르리라.”(집회서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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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수요일
“(그를)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40)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바로 앞 구절에서,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라고 하시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셨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를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 입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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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우리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모든 이에게 너그러운 자 되어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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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그러니까 지혜의 아들, 지혜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지혜가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단련시키고 시험하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지혜를 신뢰할 때까지 단련시키고 시험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혜가 그를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단련시키고 시험하겠다는 말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단련과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그러니까 됐다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단련을 멈추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비해 지혜의 아들은 꽃길을 가게 하겠다는 자를 믿지 않고
가시밭길로 인도하여 자신을 단련시키는 분을 지혜의 스승으로 삼는데
지혜가 처음에 자기 아들, 자기 제자를 가시밭길로 데려가 걷게 할 때
그가 그것을 단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련으로만 생각했다면
스승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을 거고
지혜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고 얘기하듯
주님이 바로 지혜 자체이시고 우리의 참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지혜이시고 참 스승이신 주님은 우리를 꽃길로 꾀지 않고,
처음부터 가시밭길, 십자가 길을 당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이것을 시련으로만 생각하고 단련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떨어져나갈 것이고 그것을 믿는 사람만 따라나설 것입니다.
2월 26일 화요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집회선 2,1)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직책이나, 우리의 업적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을 보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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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 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커지셔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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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각오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선을 기대하며,
더 지혜로운 사람은 늘 최악을 각오하고
더 어리석은 사람은 늘 최선을 기대하지요.
기대는 좋은 결과만 받아들이려는 것이고,
각오는 최악의 결과를 포함하여 뭐든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뭐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활짝 열어놓을 때
그리로 하느님까지 들어오십니다.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 자신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문을 열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찬선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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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월요일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 24)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누가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이를, 심연과 지혜를 헤아릴 수 있으랴?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고 명철한 지각도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었다.”(집회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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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망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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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하지요. 바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과 사명감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보다는 주님과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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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고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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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일요일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1사무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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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비'입니다. 1독서는 다윗이 원수같은 사울에게 베푸는 자비를 전해주고, 2독서는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살리는 영도 주시어 당신의 모습을 닮게 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합니다. 복음 또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예수님의 요청을 전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으라고 해주신 많은 요구들 앞에서 답답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아하!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런 분이시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상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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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금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남이 나에게 관대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대로 나도 남에 게 해 준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어느 개신교 대학생이 연옥교리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묻더랍니다. 이에 김남수 주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천당과 지옥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천당은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지나가야 할 만큼 힘든 곳이라 제가 그곳에 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옥은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에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로 평생 장가 한 번 못 가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위해서 꼭 연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자 주교님 곁에 계시던 목사님이 주교님께 살짝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 그 연옥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배광하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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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말씀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어 세상을 비춰야 하는 말씀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자(養子)로 삼아서 그 범인을 참으로 회개시킨 사람도 있다. 본능적인 복수심이 치솟을 때, "미움에 사랑으로, 저주에 축복으로, 박해에 기도로 응답하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과의 싸움을 매일의 삶 속에서 열심히 해야 한다.
-유영봉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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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강론 중 ‘자비’에 관한 아름다운 강론이 있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혀로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찬양하며 조화롭게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노래합니다. 혀로 우리는 날마다 다른 사람들과 말하면서 자비를 베풀거나 조언합니다. 그런 우리가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이 내 앞에 있는 동안 내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시편 39,2)
그대 앞에 뻔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대를 모욕하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을 합니다. 잠자코 있으십시오. “나는 말하였네. ‘내 혀로 죄짓지 않도록 내 길을 지키리라.’ ”(시편 39,2)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그가 말하게 두십시오. 그대는 조용히 듣고 있으십시오. 두 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진리를 말하거나 아니면 거짓을 말합니다. 그가 진리를 말한다면, 당신이 그 이유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는 자비입니다. 그대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는 동안, 그대를 아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행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그대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욕을 당해도 화내지 않을 때, 그 사람 때문에 슬픔을 느낄 때, 그대의 고통을 잊고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 그대는 성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비입니다.
그대를 위해 주님께서 길이 되셨습니다. “거만한 자들이 길 주위에 장애물을 놓았고 길 주위에 덫을 놓았습니다.”(시편 140,6) 그대가 덫에 걸리지 않도록 자비가 길이 되어 줍니다. (CBCK,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1권, p337-340 참조)유청신부-
2월 23일 토요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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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선입견(先入見)이고 다른 하나는 편견(偏見)입니다. 이 두 마리의 개가 살 수 있는 집은 아집(我執)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분명 다른 말이지만 듣기에는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습니다. 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가는 것이 있다면 편견과 선입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막 셋을 지어서 살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맞는 베드로 사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변모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는 것은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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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장차 있을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던 중에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마르 9,7)
이 구름에 대해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구름은 빗물이 되어 우리를 적시거나 비바람을 쏟는 검은 구름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음성에서 비롯하는 믿음의 이슬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빛나는 구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토록, 우리도 변화의 힘을 입었습니다. 이미 그 힘을 입었기에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시나이 산을 덮고서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었습니다.”(탈출 24,15-16)
그렇게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리아를 덮었을 때처럼, 우리를 덮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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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이 배경들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시나이산에서 나타나신 발현사화(출애 24장)와 비슷한 게 많다. 엿새(출애 24,16: 이레 째 되는 날), 높은 산(출애 24,15), 동반자가 셋(출애 24,1.9), 구름에서의 소리(출애 24,16) 같은 것으로 예수께서 이미 초월자라는 것이다. 또한 묵시문학적인 것도 보인다. 즉 모습이 변한다든지(다니 12,3; 1고린 15,42-56), 옷이 빛나고 희다든지, 즉 하느님(다니 7,9)과 천사들(마르 16,5; 사도 1,10)이 흰옷을 입고 있으며,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도 빛나는 옷을 입으리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종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깨달았다.
-조욱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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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표선에 가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사진작가 김영갑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지요. 그는 수의근을 제어하는 신경세포가 소멸되어서 근육이 굳는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걸려서 6년간 투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도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김영갑 작가가 보여준 지금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그의 열정에 감탄을 하고 용기를 얻습니다.
-조명언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22일 금요일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생각하느냐?”(마태 16,1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의 병렬구문에서보다도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밝혀주고 알려주신 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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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우리는 어제에 이어 또 다시 이 질문과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성 프란치스코는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십니다."고 늘 고백했습니다. 저 또한 이렇게 응답합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의 형님이시고 스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각자의 영혼에 맞게 개별적으로 친히 알려 주신 이는 행복합니다. 그 앎이란 곧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벗님의 언어로 벗님의 믿음을 고백해 보십시오.
-오상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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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축일의 이름부터 잘 알아야 합니다.
성 베드로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으니 베드로 성인에 대한 축일 같지만
시몬 베드로 성인의 축일은 6월 29일 따로 있으니 개인의 축일이 아니라
사도좌에 대한 축일이며 그러나 첫 번째 사도좌에 앉은 분이
베드로 사도기에 베드로 사도가 왜 어떻게 사도좌에 처음 앉게 되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사도좌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앉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좌란 이 사람이 앉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이 앉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도좌가 어떤 자리인지 그것을 보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사도좌는 우선 이 세상의 권좌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왕좌는 자기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자리요 권력의 자리지만
사도좌는 주님의 교회를 다스릴 청지기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우리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모든 주님의 교회와 공동체를 다스릴 청지기좌의 의미를 봐야 합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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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목요일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장소이다. 이 지방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이곳은 ‘바알신’의 예배 중심지였고, 희랍의 자연신 ‘판’의 탄생지이며 산으로 올라가면 세계의 지배자로 자처한 로마황제의 신성을 상징하는 흰 대리석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서 물으신다. 베싸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알아보시고 계시다.
-조욱현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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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사탄의 기준은
사람의 파괴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파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파괴하는 행위자가 사탄인 이유도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파괴이기 때문에 사탄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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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주님의 계명이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행위는 사탄의 짓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방해하는 사랑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사랑의 행위여도 사탄의 짓일 수 있습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20일 수요일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오늘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넘어,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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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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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이것은 인간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당신의 탓이라는 것을 자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의 탓이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다 하느님 탓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부모가 그렇게 태어나게 하고 그렇게 키웠기 때문에
자식의 모든 잘못을 다 자기 탓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인간에게 자유와 자유의지를 줬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건데
하느님은 자유의지를 죄짓는 데 쓰지 않고 사랑하는 데 쓰기를 바라셨지만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죄짓는 것에 쓴 것은 분명 인간의 탓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있기에 사랑도 하고 자유가 있기에 죄도 짓습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순종도 하고 자유의지가 있기에 거부도 합니다.
그러니 이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사랑도 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종도 하라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19일 화요일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빵 한 개’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값진 빵입니다. 이 “한 개의 빵”만 있으면 넉넉한, 우리 공동체가 다 먹고도 남을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요 ‘말씀의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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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자신을 내려놓고 빵이 되는 실천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빵은 여전히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생활안에서 사랑으로 존재하십니다.
삶과 빵은 분리될 수 없듯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한상우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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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창세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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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죽은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들에게 경고하게 해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영근 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17일 일요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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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소유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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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불행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고, ‘불행’은 행복을 찾아가는 출발일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생각하지 않지만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은 늘 행복을 갈망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집착’이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삶은 불행해지고, 참혹한 불행 속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실과 양심을 의연하게 지키는 이라면 이미 그는 행복의 빛 안에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맨얼굴은 이렇게 우리의 일반적 통념을 완벽하게 반전시키며 발생합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이며 불행인지, 그 본질적 개념을 명쾌한 반전 속에 가르쳐줍니다.
‘행복’은 불행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고, ‘불행’은 행복을 찾아가는 출발일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생각하지 않지만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은 늘 행복을 갈망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집착’이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삶은 불행해지고, 참혹한 불행 속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실과 양심을 의연하게 지키는 이라면 이미 그는 행복의 빛 안에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맨얼굴은 이렇게 우리의 일반적 통념을 완벽하게 반전시키며 발생합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이며 불행인지, 그 본질적 개념을 명쾌한 반전 속에 가르쳐줍니다.
-김혜윤수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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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만나 맛좋고 향 좋은 포도주로 익어가는 과정이라면, 삶에서 겪는 시련은 우리가 잘 ‘익어가도록’ 하는 ‘효소’일 것입니다.
-한민택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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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은 현실의 그 무엇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과 일치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호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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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방송가인 오프라 윈프리는 “당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면 영원히 만족스럽 게 가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지훈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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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텅비어 있는 가난한 마음에 하느님을 담는 것이 행복입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진정 행복합니다.
-한상우신부 묵상 글 중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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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7,5-7)
“참 행복”을 가져오는 “가난한”이란 말은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생명, 건강, 돈, 그 어떤 종류이든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임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루카 6,17)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차지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신뢰를 둔 사람”은 이미 자신을 하느님의 다스림과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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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토요일
‘너희는 어디에 있느냐?’ (창세 3,9)
“저 군중이 가엾구나.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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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서야 자기들이 하느님께 죄 지었음을 알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쳐 숨습니다.
우리도 자주 그러하듯 죄를 짓는 순간에는 내가 탐하는 그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뭔 짓을 했는지 보게 되지요.
예를 들어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것을 본 순간엔 욕심 때문에
그것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을 훔친 다음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보게 되는데 아담과 하와도 이미 저지른
죄를 어떻게 수습을 할까 하다가 일단 도망쳐 숨고 맙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더 큰 죄를 짓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 짓고 숨었는데 다윗은 죄 짓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으니 그래서 숨길 수 없으니 하느님 앞에 죄를 들고 나아가
자기의 죄를 히솝의 채로 씻어달라고 빌었지요.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내 자유의지로 죄를 진 것이 아니라고, ‘쟤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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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책 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하루에 다섯 장이라도 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진정성이 있습니까? 약속 시간 전에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조금 늦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는 것과 “10분 늦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는 것 중 어떤 말에 더 믿음이 갑니까? 애인이 “나 예뻐?”라고 물을 때, “응. 예뻐.”라고 대답하는 것과 “당연히 예쁘지. 눈 크지, 코 오뚝하지, 입술도 얼마나 매력적인데.”라고 대답하는 것 중에서 어떤 말이 더 진정성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진정성이 느껴지고 믿음이 생기는 말은 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도 그런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우리 가족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주님! 열심히 살게요.”라는 기도 내용에서 과연 진정성과 믿음이 느껴지십니까? 우리의 진정성이 담긴 믿음은 이러한 구체성도 함께 해야 합니다.
2월 15일 금요일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 그것은 소통하지 않고, 통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곧 ‘귀먹고 말더듬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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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시작은 귀와 입이 열리는 열림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열리는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기쁜 순간입니다.
-한상우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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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어가 <열림>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뱀이 하와에게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꾀니
꾐에 넘어간 하와의 눈이 말대로 열리긴 열렸는데
그 열린 눈으로 자기의 수치스러움을 보게 됩니다.
이에 비해 복음의 귀먹어 말을 더듬는 이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명령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말을 듣느냐 그리고 누구의 말을 따르느냐에 따라
이처럼 열리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하와와 아담에게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뱀의 꾀는 말을 듣자 지금까지 누리던 천상세계,
곧 에덴의 낙원/하느님 나라를 포기하고 자기들의 세계로 숨어버립니다.
오늘 귀머거리 말더듬이의 귀와 혀가 열린 것은
귀와 혀가 열린 것이 아니라 실은 관계가 열린 것이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자 관계가 열린 것인데
주님께서 열어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13일 수요일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0)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창세 2,16)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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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단죄와 심판의 잣대를 사람 밖에서 찾으려 했다면, 예수님은 그 원인이 사람 안에 있음을 통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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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코 7,20~22)
우리가 어리석음은 죄라기보다는 약점 또는 부족함 중의 하나이고,
나태/게으름도 죄라기보다는 허점이나 부족함 중의 하나인 것 같은데
그 자체로도 죄일 뿐 아니라 다른 죄를 낳는 뿌리 죄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음이나 게으름은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것일 뿐
남을 크게 해치거나 적극적으로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죄가 아니고 뿌리 죄는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불교에서도,
그리고 오늘 마르코복음에서도 어리석음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그런 약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 인생의 중요한 것에
불성실하고 깨어있지 못하는 그래서 인생을 치명적으로 그르치게 만드는
뿌리 죄라는 것인데, 이것을 깨닫고 깊이 반성하는 우리이고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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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성현과 신학자들이 악의 원인에 대해 고심했 왔지만, 악의 존재는 그리 간단하고 만만한 주제가 아니어서 오죽하면 '악은 신비'라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창세기 첫 장에서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고 했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 태초인 한처음에 이미 어둠이 하느님의 영과 함께 존재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둠이 활성화되어 사람 밖으로 표출되면 그것이 이웃과 세상을 오염시키고 상처 입히고 파괴하는 죄악이 됩니다. "악은 선의 부재, 결핍"이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도 함께 기억해 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마르 7,15)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이나 동물, 사물, 특정 현상이나 날들의 불결하고 속됨이 인간을 불결하고 속되게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도"라는 부사를 써서 강하게 부정하시기까지 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모든 피조물은 창조 질서와 조화 안에서 모두 소중하며 저마다 고귀한 존재 이유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마르 7,19)
마음속과 뱃속! 우리 안에 있으면서도 아주 다른 실재입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하나는 보이지 않고... 하나는 육의 바탕이 되고 하나는 영의 바탕이 되는 장소입니다. 요나 이야기가 언뜻 떠오릅니다. 요나 이야기에서 물고기의 '뱃속'이 요나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나의 '마음속' 생각이 그를 죽음의 위기로 내 몰았습니다. 마음속이 밝아지면 생명을 얻습니다. 이때 비로소 "영은 생명"(요한 6,63)을 가져다 줍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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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모든 악은 인간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인간 마음 안에 악의 원천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악의 원천은 뱀과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로부터 나오는 나쁜 욕구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든 악행은 다 자아의 욕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세 욕구가 ‘세속-육신-마귀’인데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저 모든 것들은 이 세 욕구에 다 포함됩니다.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는 방법은 자아의 욕구들이 올라오지 않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정결해지려면 자아가 ‘욕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욕구는 이미 우리 안에 넣어져있기 때문에, 그 욕구를 발로 밟고 다른 욕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의 가장 상징적인 모습이 바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물속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에 오염된다는 뜻입니다. 그 자아의 욕구가 원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태어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자아의 욕구와 반대되는 욕구를 받아들여야하는데 그 욕구를 우리는 ‘신성(神性)’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신데 사랑도 욕구입니다. 자아의 욕구와 반대되는 욕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아의 욕구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그도 자아의 욕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니 다시 자아의 욕구에 빠져듭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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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어두운 생각과 악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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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12일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2월 11일 월요일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대로 되었다."(창세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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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환자들이 모두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아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보다 "사람들"(마르 6,54)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부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눕혀", "데려다 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복음의 다른 치유 기적사화들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좀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이 직접 팔을 뻗어 "옷자락 술"(마르 6,56)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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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은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마르 6,54-56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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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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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선물을 줍니다.
선물로 내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줍니다.
그 선물이 받아들여지면 그 선물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 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가장 귀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도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두 농부는 무 농사를 졌고 모두 좋은 무를 생산했습니다.
한 농부는 이 모든 것이 원님 덕분이라며 가장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농부는 그 무가 원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며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큰 무를 선물로 받은 원님은 감동하여 그 농부에게만 답례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찾으려하지 않을 뿐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10일 일요일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죄인이라는 고백
-서강휘 신부-
가톨릭 신문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03771¶ms=page%3D1%26acid%3D647
“학문을 하면 날마다 늘어나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줄어든다.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무위에 이른다.”(為學日益,為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為) 노자 도덕경 48장의 내용이다. 여기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말한다. 지식의 축적은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객관적인 기준을 찾아 인생을 설계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할수록 지식이 쌓이는(益) 것과 비례하게 번잡함과 난해함도 함께 증가(益)한다. 반면에 도를 행하는 사람, 즉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그 행위를 반복할수록 고집이나 집착이 점점 사라지고(損) 그에 비례해 수고로움이나 의심도 함께 줄어든다(損).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계획과 기준을 내려놓는 것이 되므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위’,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무위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한다.’(無為而無不為) 즉 그는 하느님의 일과 자기의 일이 하나가 돼 ‘스스로는 하는 일이 없지만(無為)’ 그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일이 된다.(無不為) 내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가의 차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이사야와 바오로, 베드로가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 ‘칠삭둥이’, ‘죄인’ 등으로 표현하며 자신이 무능력하거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죄 많은 인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반해 위대한 인물들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서강휘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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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변화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변화의 힘은 회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만남에서 오며, 회개는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 곧 은총과 사랑의 체험의 수락이 변화와 회개를 불러오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그렇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그렇고,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체험했음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코린 15,9)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처럼,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곧 체험이 회개와 변화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니 회개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 그 은총을 수락할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1코린 15,10)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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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훌륭한 사람, 훌륭하지 않은 사람으로 정해져 태어나지 않습니다.
훌륭해지려면 누구에게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데 그 연습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도 이미 훌륭한 사람을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되는데 거쳐야 하는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고 말한 베드로의 자존심을 버린 순종이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란 예수님의 응답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젊은 목수의 말을 듣고 창피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밤새 실패했기 때문에 한 번 더 실패하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힘을 우리는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실패는 자존감을 낮춥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오랜 실패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자존감이 낮은 선수였다면 수천 번 넘어지고 허리까지 다쳤을 때
“난 여기까지.”라며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실패를 주저하지 않게 만드는 자존감이 곧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요, 하느님의 아들딸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믿음에서 오는 자존감만 있다면 실패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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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라는 말을 성경에서 들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말도 있습니다. ‘구하여라. 찾을 때까지 구하여라. 찾았다면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기면 또 다른 기쁨이 있을 것이다.’ 신앙인에게 어떤 말씀이 더 감명을 줄까요? 여러분은 어떤 말씀이 더 깊이 다가오시는지요?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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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 이라고 부르지만 능력을 만난 다음에는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야고보서 1장21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의 말씀을 받아들인 여러분 안에 구원의 기쁨이 넘쳐 나길 기도합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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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으면 그 고통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틱낫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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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토요일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6,31)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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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과 관상의 조화는 하늘 나라의 일꾼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입니다.
잠시 현장을 떠나 영육의 원기를 회복하려는 예수님 일행을 쫒아 군중이 달립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마르 6,33)
그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많은 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헉헉대며 뜁니다. 뜀박질은 어린 시절에나 하던 놀이였을 법한데 나이도 체면도 내려놓고 그저 달립니다. 일행이 탄 배를 놓칠세라 절절한 눈빛으로 좇으며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마음에는 희망과 바람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가르침과 치유, 위로가 절실했습니다. 그 염원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들은 배를 타고 떠났던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군중들의 이러한 절실함에서 모든 것을 이미 누리고 살면서 절실하지 않은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니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십니다. 제자들의 쉼과 회복을 위한 계획을 잠시 미루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 겁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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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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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상에 외딴 곳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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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진 전갈을 발견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이 수행자는 전갈을 손으로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 전갈이 자신을 살려준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손가락을 물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갈은 다시 물에 빠졌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수행자가 전갈을 더 이상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다시 전갈을 손으로 꺼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물리고 말았습니다. 수행자는 아픈 손가락을 꾹 참고서 다시 꺼내서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도 모르는 이 전갈을 왜 구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이 수행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갈은 물려는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오.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저의 본성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갈에게 계속 물려도 계속 살려야 했습니다.”
상대의 본성을 인정하는 이 모습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명언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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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몽테뉴-
2월 8일 금요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복음: 마르코 6,14-29
카인은 언제 죄를 지었을까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일까요, 아니면 아벨을 살해한 순간일까요? 성경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 화가 나 있었다고 전합니다. 아벨의 제물만 기꺼이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기 이전부터 그는 죄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주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일은 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농사짓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고, 농사를 짓는 일은 자신의 소유를 늘리는 일입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했던 것이고, 땅을 일구는 일은 죄를 지은 다음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은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의 상태를 나타내고, 카인은 죄를 지은 이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아벨은 동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카인은 곡식을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동물의 수준으로 사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지위를 일깨워주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동물처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동물의 밥통인 말구유 위에 놓이신 것과 같습니다. 동물로 태어나든 인간으로 태어나든 그것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동물적 본성을 귀한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이 아담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원죄를 지으면 자신만 알아 농사를 지어 소유하는 데에만 정신을 쏟게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직업에서 이미 원죄를 지은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카인은 원죄를 지닌 일을 하기에 어떤 제물을 바쳐도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실 수 없고, 아벨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에 어떤 제물을 바쳐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카인은 처음부터 죄인이었고 다만 그 죄가 시간이 흐르면서 커진 것뿐입니다. 인간은 행위로 죄를 짓기 이전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원죄를 설명하며 인간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닙니다. 본성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 본성대로 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이 죄의 굴레를 끊어주지 않으면 인간은 그 죄의 속박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카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헤로데에게 목이 잘리는 요한은 아벨과 같은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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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는 생혼(生魂)이 있고, 동물에게는 각혼(覺魂), 사람에게는 영혼(靈魂)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은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에 영혼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 식물이 가지고 있는 삶의 본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생명은 단순히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혼이라는 에너지가 물질을 통제한다는 말입니다.~~
참된 이데아(낙원)는 몸을 떠난 영혼만이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몸의 아름다움과 몸의 신비는 죄악시되기도 했습니다. 마녀사냥, 종교재판, 노예제도, 식민지에서의 폭력은 몸을 부정하고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인식에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영혼이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구유에 아기 예수님의 몸이 되어 오신 것 역시 몸과 영혼은 하나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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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 때 저절로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베네딕도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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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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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목요일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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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그 자리가 사실은 꽃자리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욕심과 교만이 있다면 그 자리는 가시방석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친절과 온유가 있다면, 나눔과 희생이 있다면 그 자리가 꽃자리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들었던 것처럼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꽃자리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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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어느 고등학교에 성공한 졸업생이 방문했습니다.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에 학창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하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내 과목 중에서 무엇이 좋았는가?”라고 묻자, “글쎄요...”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복도를 지나고 있는 저를 부른 뒤에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대신 묶어주셨습니다. 이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학창시절, 존경하는 선생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뛰어난 언변으로 잘 가르치셨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눈높이를 낮춰서 대화를 많이 나눴던 분들이었습니다.
-조명언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6일 수요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믿음은 내가 알고 있거나 나의 이상인 그분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아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혹해하시지 않도록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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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난 널 잘 알아!”라며 바라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판단을 많이 하면 불안해지고 외톨이가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나자렛 사람들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판단이 저절로 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자신과 싸워야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 수 없듯,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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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란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절)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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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연중 제4주일에 들은 루카 버전과 달리 마르코는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의 설교와 반응에 대해 조금 다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군중들의 반응이 어떻게 적대감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면,
마르코는 그들이 지닌 믿음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으면 하느님조차 기적을 이루실 수 없는데, 어찌 그리 믿음이 없는지 참으로 안타까워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 줍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5일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 4, 14)
탈무드는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때 3가지를 주면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자신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면 바른 인격일 것입니다.둘째는 술입니다.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좋게 하고, 술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바른 인격일 것입니다. 셋째는 분노입니다.화가 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또 어떤 경우에 화를 내거나 분노를 표출하는지, 이런 것들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돈과 술은 가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노여움은 내면 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분노와 노여움을 잘 조절하는 사람, 지혜롭게 대응하는 사람이 바른 인격자 일 것입니다.
오늘은 중용 23장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2월 4일 월요일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곧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이영근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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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다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이 아닌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파라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우리 목적지가 되어야합니다.
그 목적지는 죄를 이기는 인간이 아닌 죄와 무관한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새 죄의 종살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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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3가지를 늘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전하는 말이 사실과 진실에 입각한 말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전하는 말이 나와 가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말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전하는 말이 나와 가족들에게 꼭 전해야 할 만큼 중요한 말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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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1월 27일 일요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걸어서 성지순례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고 있는데 그 앞으로 마차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물었습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습니까?”
마차를 끌고 가던 남자는 “한 30분 정도면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다 왔구나.’라는 안도감이 생기면서, 조금 편하고 싶은 마음에 “혹시 마차에 저를 태워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음씨 좋게 생긴 남자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이제 마차에 탄 그는 풍광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분이 지났음에도 예루살렘에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멀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부는 “한 1시간쯤 가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까 30분이면 간다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물으니, 마부의 대답에 이 순례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거든요.
“저는 예루살렘 반대편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면 더 고생을 할 뿐입니다. 그만큼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만 제대로 알면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지만, 이 방향을 알지 못하면 목적지와 정반대로도 갈 수 있습니다.
-조명언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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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바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뻐야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합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이는 반드시 기뻐야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기뻐야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뻐야
그 안에 기쁜 소식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기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26일 토요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 5)
1월 25일 금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성 바오로 사도가. 박해했던 이유는 예수님은 틀렸고,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에만 맞춰 살았기 때문입니다.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놓지 못하는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내 자신이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점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에는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등도 소유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조명언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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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믿으면 그 믿는 것에 목숨을 내어던질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었다는 것은, 열정이 어떻게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지 잘 보여 줍니다. 사랑은 눈멀게 합니다. 눈이 멀지 않았다면 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믿는 것을 위해서는 앞뒤 안 가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차갑거나 뜨거운 것을 좋아하시지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묵시 3,16 참조). 사람이 미지근해지는 이유는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말처럼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어야 믿음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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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피 1장 23절)
오늘 하루, 바오로 사도의 그 사무치는 회심, 그 힘겨웠던 전도 여행길,
초대 교회의 기틀을 놓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과 헌신에
깊이 감사하는 날이어야겠습니다.
그분의 그 큰 인내와 노고 덕분으로 인해
오늘 우리 교회가 서있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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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반여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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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났습니다. 오늘 저는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한 마리아 도미니카 마잘레로 성녀. -
1월 24일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코 3,11)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이유가 밝혀질 것입니다. 그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때’ 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모습이 올바르게 밝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곧 신앙의 눈이 열릴 때라야,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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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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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한 나의 탓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시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가지 않으시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너무 가까워지다 보면 오히려 서로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면
그 사람에게 어떠한 좋은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사랑은 오히려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와 함께 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일으켜 주려고 혼자라도 그 옆에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영원히 만나지 않는 기찻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공간을 가지고 계셨듯이, 우리 모두도 ‘하느님 외에는’ 내어 주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 공간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그 대상으로부터 감정을 독립시켜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당신의 감정을 지키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마련하도록 하신
‘배’가 바로 그 상징입니다.
나의 감정이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진 온유한 마음인지 항상 민감하게 살펴야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나의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멀어져서 더 수련하고 다시 다가가는 편이 낫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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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들은 예수님 앞에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죄로부터 멀어진 삶,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 앞에 기쁘게 나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분명히 칭찬하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기쁨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조명언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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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수요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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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고, 굽어진 허리를 세우게 하는 사랑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무 뒤로 숨은 것은 주눅 들었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신 안에서 “너는 죄를 지었어!”라고 말하는 자아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아는 하도 잔인해서 율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또 자신의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타인을 율법으로 얽매이게 해서 심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당신께서 다 덮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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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진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진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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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고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고 있는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나 자신을 성찰해 보자.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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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전반부가 성공과 성취를 향해 뛰는 시기라면, 인생의 후반부는 의미와 사명을 찾는 시기이다(밥 버포드).
1월 22일 화요일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마르 2,24)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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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죄를 이겨 누구도 통제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면
참으로 율법의 주인이 되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믿음으로 죄를 이기게 되었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내가 죄인일 때 나는 율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그러면 또 누군가를 율법으로 가두는 사람이 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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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사실을 놓고도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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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은 문제를 삼은 것은 그들이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구실로 삼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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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즉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즉 법률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즉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가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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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우선입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습니다. 차가 문제입니까? 사람이 문제입니까? 법이 먼저입니까? 사람이 먼저입니까?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이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기를 좋아하신 예수님이 꿈꾸신 하늘 나라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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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은 주님이 주인인 날입니다. 주인님과 함께 이웃사랑을 하는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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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강한 사람인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가 부자인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누가 존귀한 사람인가? 자신의 동료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1월 21일 월요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입니다.
오늘 제가 새로워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 집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 나라, 이 땅이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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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 1, 8)
프란치스코도 자주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 흘리며 탄원했는데
예수님이 아니라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한 걸로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고통에서 순종하는 법,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배우신 것이고
주님을 본 받아야 할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론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배워야 하듯
고통에서 순종하는 것도 고통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관상 기도를 많이 했어도
막상 고통이 닥치니 온 존재가 흔들리고 그때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그런 관상 기도는 헛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편안할 때가 아니라
고통 중에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래서 고통 중에서 순종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관상법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1월20일 일요일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가나 동네의 한 잔치 집에서 물을 술로 변하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다른「복음서」들은 이 이야기를 보도하지 않습니다.「요한복음서」는 그것이 예수님이 일으킨 첫 번 표징(標徵)이었으며, 이 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그 사랑 안에서 해방과 기쁨을 맛보고, 이웃에게도 그 사랑을 나눕니다. -서공석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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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하는 모든 순종의 행위가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 흘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포도주가 피가 되는 주님께 참영광을 드릴 십자가 수난의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는데, 이로써 교회는 새로 태어나고 순결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오늘 복음의 포도주가 순결해지기 위한 “정결례” 용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동이가 여섯 개인 이유는, 창조 여섯째 날,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듯, 오늘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낳고 새 이름으로 부르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과 그 백성과의 혼인 관계를 이야기하며, 교회가 메시아의 “영광”을 보게 되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고 예언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신랑의 피 흘림,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을 통하여 탄생되고 순결하게 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상징하는 구원의 신비를 종합한 표징입니다.(전삼용 요셉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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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맥락
요한복음의 본론은 크게 전반부(1,19-12,50) ‘표징의 책’과 후반부(13,1-21,25) ‘영광의 책’으로 구성되며, 공생활의 첫 장면인 카나에서의 사건은 마지막 장면인 예수님의 십자가상 이야기와 병행됩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으로부터 “여인”으로 호칭되고 있고(2,4; 19,26), ‘예수님의 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며(2,4; 19,28), 물에 대한 상징이 묘사되기 때문입니다.(2,7; 19,34) 특별히 마지막 십자가 사건 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음은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징과 명확히 연계된 구도를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님과 이에 대한 강한 믿음을 드러내신 어머니
인류는 이 사건을 ‘표징’으로 진정한 새 신랑(예수 그리스도)의 포도주(피)로 맺어질 새 계약의 시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김혜윤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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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독에 물을 채워라.” 혼인잔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 말과 함께 표징으로 바뀝니다. 특별히 “정결례에 쓰 는 물독”은 표징의 의미를 아주 잘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정결례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내려 오는 대표적인 조상들의 관습입니다. 이 물독에 새롭게 물 을 채운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것이고, 이 시대는 종말을 향한, 구원의 완성을 향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물을 채우도록 하는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셈입니다. 예 수님은 좋은 포도주 같은 기쁨을 선사하는 분으로, 구원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분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 니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이것 을 예수님께 알리는 것도, 그리고 일꾼들에게 예수님의 말 을 따르도록 당부하는 것도 모두 마리아의 몫입니다. 특 히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정적인 답변에도 불구하고 무엇인 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묘사됩니 다. 마리아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활동에 함께 하는 분으로, 예수님의 광을 드러내는 탁월한 조력자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요한 2,1) 마리아는 단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신 분만이 아니 라 그분의 활동에서도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합니다.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을 걱정하고, 예수님께 청하고, 예수님께서 표징을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하며, 표징을 통해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돕는 분이 바로 성모님입니다. 표징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 지 알려주는 이 사건은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라는 복음서의 초대입니다. -허규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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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지도자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어린 아들 둘에게
“너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게.”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남을 도와주다가 학교도 안 가고, 남의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자신은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아들은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고
다른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내어주려는 사람에게 더 주시고, 가르치려는 사람에게 더 알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술을 주실 수 있는 당신 아드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당신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청하는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남을 도와주려다가 자신도 성공한 대표적인 성인입니다.
기차역에서 “목마르다.”는 행려자의 한 마디에 부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직을 때려치우고
가난한 이에게로 향했습니다.
-전삼용 신부 묵상 글 중에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과목 시험문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내포하는 영적의미를 서술하라” 였습니다.
한 학생의 답입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이 학생은 영국최고의 시인이 된 바이런입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19일 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7)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랑의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입니다. 곧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의 방식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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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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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라는 책에서 “여러분은 사람입니까, 하느님입니까?”를 질문하고
“여러분은 하느님입니다. 만약 사람이라고 대답하셨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라 믿었으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고 믿으니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만이 바칠 수 있는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 믿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느님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오히려 교만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인데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인데도 인간이라고 계속 믿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느님과 같음에도 굳이 또 ‘하느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니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면 하느님처럼 살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행의 함양으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하였고, 아담 스미스는 경쟁과 사유화를 독려함으로써 오히려 자율적 성장이 가능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해 공동선과 인간의 존엄이 보장된다고 말합니다.
1월 18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5)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이제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요 안배입니까?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병이 나아 걸어가라" 하면 이해하겠는데 "죄를 용서받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수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육신의 병 치유가 아닙니다. 그분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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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외양상 아주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접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네 명의 구성원과 중증 중풍 병자 한 명해서, 총 5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공동체입니다.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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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고 싶다면 그만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딱 그것만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다른 것들도 다 주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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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살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먹이사슬에 의한 생존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강한 생명이 약한 생명을 먹이로 생존합니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먹이사슬이 유지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태계라고 합니다. 자연은 ‘빈익빈 부익부’의 관계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먹이사슬이 깨지고, 생태계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에 의한 생태계의 파괴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것은 죄입니다.
두 번째는 공생입니다. 악어와 악어새는 공생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악어는 악어새에게 먹이를 주고, 악어새는 악어의 이를 청소해 줍니다. 꽃과 벌도 그렇습니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이 번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자연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공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기생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역사와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머물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함께 나눈다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아픈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조재형신부 묵상글 중에서-
1월 17일 목요일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르1,41).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보면(레위 13,45-46 참조),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스승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스승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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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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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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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낳고자 하는 열망, 하고자 하는 원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도와주려는 이웃들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병이 깨끗하게 낳기를 바라는 나병환자의 열망이 있었습니다. 연못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일어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소경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죄인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원의와 열망, 갈망과 희망이 있었기에 ‘낙원’은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열었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병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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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실패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실패를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는가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수없이 넘어져 온 몸의 뼈가 뒤틀려도 더 멀리 보면서 참아냈을 것입니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 고통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16일 수요일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당신께서 빛이심을 드러내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아버지 성부와 친교와 유대를 이루시며,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 자신의 악습이나 결함이 고쳐지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 응답하게 되면 우리가 고쳐지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마귀의 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비교하여,
베드로는 사랑의 고백을 했고 마귀는 공포로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 그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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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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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일이 유독 많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오늘날에도 계속해야 하는 제자들인 우리로서는 늘 당혹스럽고 어찌해야 할지 잘 몰라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요.
실제로 영육간의 질병과 고통을 겪고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처럼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최선을 다해 힘이 되어주고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마르 1,35)하는 것입니다.
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도 또 갖가지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이들도 모두 '사람들이'(마르 1, 30. 32)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이 없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치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11월 14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5)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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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실이 자신의 말과 다르면 솔직히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는 말의 권위가 아니라 행동의 권위이고
자리의 권위가 아니라 완덕의 권위이고 특히 사랑의 권위입니다.
더러운 영들도 주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복종하는데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는지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갓 들어온 수련자에게도 순종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아주 미성숙하고 매우 교만한 사람은 누가 얘기해도 안듣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않으니 더러운 영보다도 악한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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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인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치유행적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기적입니다. 그것도 안식일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첫 행적부터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사고를 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다음, 이어서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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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람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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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는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언행일치에서 흘러나옵니다.
가르침의 진실성과 진정성에서 흘러나옵니다.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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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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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녀에게 해 주는 사랑에 자녀가 감사를 느낄 때만 그 사랑이 자녀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만이 권위 있는 사랑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상담가인 무엔거의 ‘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란 책에
이런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대의 선량함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어야 한다.”
관계는 항상 상호간의 감사에 바탕을 두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뜻을 들어주지 않을 때 “넌 이기적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이기적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이럴 때 예수님은 그것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분과 함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참다운 권위는 하느님 한 분에게만 흔들리는 권위입니다.
사랑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끊어버리십시오.
그래야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착하지만 단호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참다운 권위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14일 월요일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말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교회는 오늘부터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히브리서>를 듣게 됩니다.
이 연중시기 첫날에 버림과 따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버리며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참된 순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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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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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쓴 조던 피터슨의 조언 중 하나
예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와 머무셨습니다.
이렇듯 누군가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가기 싫은 곳으로 가야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하지만
그 전에 항상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이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공동체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1월 13일 일요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 22)
오늘은 주님세례축일입니다.
곧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일입니다.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서의 탄생인 첫 번째 탄일이 그의 어머니께서 성령을 입은 날이라면,
이제 이 두 번째 탄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입은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예수님의 진짜 탄생일인 셈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새 탄생’이요,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입니다.
오늘은 바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 생일입니다.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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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공현 축일(우리의 세례축일)
오늘은 주님의 공현축일에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였던’(마태 2,11)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세례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공적으로 선포하는 날이다......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주님의 세례축일은 그래서 제2의 공현 축일이며 이제는 예수님의 세례의 사명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하겠다.-조욱현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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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효과의 법칙이 있다. 우리는 수면에 떠 있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가라앉는다. 그러나 가라앉으려고 하면 오히려 떠오른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반대의 효과를 만나게 된다. 이것을 역효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결국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우리는 수면에 떠 있을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누군들 물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유영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부단한 발버둥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 혹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스스로 기약(期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라고 불렀다. 나머지는 ‘배워서 알거나’(學而知之者), ‘발버둥을 치고 노력해서 아는 사람’(困而知之者)이다. 그러나 공자는 중요한 것은 나면서부터 알든, 배워서 혹은 억지로 노력해서 알든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린 일화를 보면 예수님의 자연스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나면서부터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움은 노력의 자연스러움이다. 이 자연스러움이란 매시 매초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하느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비움이며 겸손이다. 자기를 비워야 하느님 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한 번의 깨달음으로 진리를 알았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치 못한 사람들이다. 개량한복을 입고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때론 머리 깎고 승복 입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를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아니면 끝없이 답을 찾아가는 삶에서 도망친 자들이다. 그들이 진리를 한 번 마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붙잡은 진리는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왕양명이라는 사람은 그런 진리를 ‘광경’이라고 불렀다. 헛된 그림자, 혹은 찰나에 사라지는 풍경일 뿐이라는 의미다. 참다운 진리를 안 사람은 하나의 광경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요”라고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여긴 것은 다시 한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부족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가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오늘, 우리의 노력이 예수님의 겸손과 닮아 있길 희망해 본다. 우리의 구원 혹은 그분의 자녀가 됨은 우리의 겸손한 노력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은 아니지만 겸손한 노력을 통해 도달되는 지점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다. 그것은 선물이며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은 머물지 않는 희망찬 노력이어야 한다.-서강휘신부묵상 글 중에서 -
1월 12일 토요일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작아져야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작아진다는 건 비워낸다는 것입니다.
성탄은 작아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순간 작은 성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의 길이 작아지는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보다도 더 작아지십니다. -한상우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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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요한 5,14) 어떻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의 논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만 그분을 알 수 있고, 그분의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라 살다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을 알게 된 사람은 복됩니다. 그 뜻에 따라 청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1요한 5,16 참조) -오상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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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지만
사랑이 우리에게 오신 거라고 바꿔 말해도 되겠지요.
그러기에 내게도 주님이 오시어 탄생하셨다면
내 안에 사랑이 있어야 실제로 탄생하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
아이처럼 부모님만 있으면 그만인 행복을 추구해야 세상의 덫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까?
주님만을 바라고 있다면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그분을 만나는 시간인 '기도시간’일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는 것이 제일 행복이라고 여기면,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이것저것 청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기도로 만족합니다.
그 안에 그분께 청해야 할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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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분명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세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하여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불의가 사라지고,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고, 모두가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11일 금요일
1월 10일 목요일
"오늘 이 셩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 4,21)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를 ,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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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이 자신 먼저 밝히고 그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처럼,
난로가 자신 먼저 덥히고 주위를 덥혀주는 것처럼
자신 안에서 성령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면 누구도 변화를 줄 수 없게 된다
‘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도 갈다 보면 어느새 바늘이 된다
‘마부작침’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시를 잘 쓰고, 그 시대를 정확히 이해하며 자기 문장을 펼친 시인 이태백이 스승을 찾아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뚜렷한 답이 없어, 중도에 그만두고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집으로 가던 중 이태백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 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할머니가 쇠로 만든 도끼를 바위 위에다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히 여긴 이태백이 “할머니 도끼를 왜 갈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바늘 만들려고 그래.”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태백이 어이없다는 듯이 “어떻게 그렇게 큰 도끼가 얇은 바늘이 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가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도끼도 바늘이 된다네!”라고 대답합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합니다.
그 힘은 내가 매일 ‘꾸준히’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의해 측정됩니다.-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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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4가지 선한 마음 -맹자-
측은지심.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실 때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입니다.
수오지심. 잘못한 것을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갖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사양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고 하는 자는 꼴 째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로 오신 것이 겸손입니다.
시비지심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굳이 배우지 않았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합니다. 동물에게 본능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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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요한1서 4,20)
저의 사랑 경험에서 인간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김찬선신부 묵상글 중에서-
1월 9일 수요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 4,11-18)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45-52)
사람이 되신 하느님도 에너지를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면,
흙에서 온 우리들이야 이 세상의 어두운 유혹 위에 서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시간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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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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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잔뜩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면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화사한 표정을 짓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 이미 맛본 진한 하느님 체험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8일 화요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 6,34-44)
"여러분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동량을 해보셨습니까?
예, 그렇다면 그 사람과 눈을 마주쳐 보셨습니까?
손을 어루만져 주셨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
내가 하느님을 잘 모른다면 그게 성경공부 부족이나 신앙 부족이 아니라 사랑 부족 때문이랍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싶고 만나뵙고 싶다면 지금부터 더 열심히 사랑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마더 데레사
1월 7일 월요일
구유는 치워 놓았지만, 우리는 아직 <성탄시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탄시기>는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예수님 성탄 대축일부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까지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시기이고, <둘째 시기>는 1월2일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을 정점으로 하여 주님 세례 축일까지로, 주님께서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시기입니다. 이 두 시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빛으로 오신 주님’ 입니다.
오늘은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후 월요일 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큰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이영근 신부 묵상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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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대피정을 마친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늘 나라 선포의 행업을 전해주면서,
첫 일성(一聲)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였습니다.
작고 낮은 도시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잔뜩 부풀린 사람들, 자칭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서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방인의 땅으로 불리며 무시당하던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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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그분에게서 다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서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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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무엇입니까?”
“일상日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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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은 아무 곳에나 피어나지만,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느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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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는 '전쟁책임 고백서'를 집필하며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경건한 삶을 사는 것도 필요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구유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길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6일 일요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마태 2, 11)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감사하는 것이 모든 전례의 핵심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어차피 목표가 정해지면 직행을 타는 사람이고,
약한 사람은 언제든 중도에 내릴 수 있는 완행을 타는 사람입니다.
완행을 탄 사람은 기차가 설 때마다 내려서 돌아가야 하느냐, 아니면 계속 가야하느냐
갈등을 하지만 직행을 탄 사람에겐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갈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인과 소인의 차이인 것입니다.
오늘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신다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신다는 뜻이 더 큽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반영억신부 묵상 글 중에서-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열려있는 자라야 그 별을 바라보고, 그 별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허황한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는 길’입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프란치스칸 들은 주님께서 공적으로 알려진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프란치스칸 선교 주일로 지내는데
이 선교주일에 우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함으로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우리의 선교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3회원들에게 이런 보편 성소를 강조하는
선교 특강이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필요하면 저를 불러달라고 자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압니까?
빛의 자녀입니까?
프란치스코는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람들에게 낳아주라고 합니다.
-김찬선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5일 토요일
어제의 예수님의 말씀 "와서 보아라"
오늘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1월 4일 금요일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첫 말씀 "무엇을 찾느냐?"
두번째 말씀 "와서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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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12제자들의 성격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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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이 오기 전만 해도 내 인생을 온통 회색빛에다 혹독한 겨울이었는데,
그 사랑이 내게로 온 이후 내 인생은 순식간에 화사한 봄날,
향기로운 꽃길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이 내게로 오기 전에 나는 어둡고 긴 터널 한 가운데 있었는데,
그래서 내 인생에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 사랑이 내게로 온 이후 나는 한 마리 나비처럼 자유로워졌습니다.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워졌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나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대단해보였던 세상도 명예도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난 이후 목숨처럼 중시 여겼던 재물도 인간적 사랑도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3일 목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세례자 요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어린 양’이란 말에는 이미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예언자 예레미아도 그리스도의 입이 되어 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습니다.”(예레 11,19)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2일 수요일
가끔 우리는 누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고 명령을 하면
간섭하는 소리처럼 들리고 자유를 빼앗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애당초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 나에게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내 안의 그 본성이 에덴동산의 뱀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도 되나, 안 해야 하나?’를 끊임없이 오가며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명령은 그 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해방의 계명이 됩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교만이기에,
주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겸손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묻습니다.
-전삼용신부 묵상 글 중에서-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1월 1일 화요일
하느님께서는 2019년이라는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시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아오스딩 성인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 -시편24,4 -
우리 모두는 자기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하는 일을 하는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놀랍게도 ‘하느님의 어머니’인 셈인 것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 첫 번째가 되셨습니다. 하여, 우리도 ‘그리스도를 담은 신비의 그릇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인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이영근신부 묵상 글 중에서-
자신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임경신 작가는 이런 말을 했지요.
“가만히 웅크리는 시간은 필요하다. 만약 혼자 조용히 풀어내는 힘이 없으면 마음의 연륜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다.”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도와 줄 사람만을 찾지 마시고 버터플라이 허그로 스스로를 안아주고 위로해보십시오. 이제까지 겪지 못했던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봅시다. -조명언신부 -
어머니의 자격
한 순간도 그분의 현존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성모님처럼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았습니다.
자신들에게 큰 보화를 줄 분이 오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자께서 한 인간 안에 잉태되어 ‘계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켜줄 수 있는 모성애가 있어야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분의 현존을 잊고 내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잘해줘 봐야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주님의 현존을 잊지 않기 위해 손에 묵주를 쥐고 다녔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축구를 할 때도 심지어 술집에 가도 묵주를 쥐고 있었습니다.
묵주 때문에 조금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주님의 현존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해를 시작한다면 우리 성탄 때 만났던 그리스도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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