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토요일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오 4,18-22)
버림으로
따르게 되고
따라가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을 만났을
성 안드레아 사도의
기쁜 축일입니다.
얼마나 주님이
좋았으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갔겠습니까.
따라가는 이 여정이
살아계시는 주님을
깨닫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이 여정안에서
얼마나 좋은
믿음인지를
보게됩니다.
믿음의 관계는
따르는 관계입니다.
따름은 치열한
우리의 현장에서
언제나 시작됩니다.
함께 하면서
깨닫게 되고
함께 하면서
빛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빛나고 아름다운 삶은
주님의 사랑 받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합니다.
주님 사랑이 온통
우리 삶을
물들여 갑니다.
살과 피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삶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운 관계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따름으로 깨닫는
고귀하고 충만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드리는
한 해였습니다.
아름다움은
따를수록 충만한
사랑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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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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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금요일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에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루가 21,29-33)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을 통해 세상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보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믿음을 두면 늘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것들은 진짜 믿음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대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디에 믿음을 두느냐에 따라서 나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서 벗어나, 기쁘고 행복하게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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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에 “내가 하느님이오.”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잃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 안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진리가 그것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니 우리 모두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 기득권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던 이들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예수님은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라 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파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아버지도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이면 자녀도 하느님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니 자신도 걷겠다고 나선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나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아직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믿어야하느냐면 믿는 만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져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만큼만 크고 아버지를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이 됩니다.
금붕어가 어항에 있으면 손가락만큼 자라고 강에 풀어놓으면 사람 크기만큼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이 자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하느님이라 말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 믿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이미 하느님임을 믿었다면 하느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는 오히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 않는 데서 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예수님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모셨다면 우리 모두는 성전입니다. 성전이 허물어지는 이유는 하느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신데,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유일한 진리는 당신을 모시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잃으면 심판 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각오하며 이 믿음을 지키고 전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양식이 되셨습니다. 성체는 하느님입니다. 밀떡 안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성체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그 성체가 하느님이 되는 것이나, 그 하느님이 되신 성체가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매번 모시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자랑스럽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그래야 하느님으로 새로 태어나는 걸음마라도 시작하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잃으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그러면 성전은 허물어집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가 머물지 않는 집은 성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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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설교의 핵심은 정확한 종말 예상 날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오늘이 그날이라고 여기고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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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거든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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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고
신명기 말씀처럼 늘 우리 가까이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이지만
그 주님을 모셔들일 때 내 안에도 계시게 되는 것이기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때가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 때이며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가 하느님 나라가 내게 오는 때인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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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목요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가 21,20-28)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큰 재난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머리를 들고 하늘의 표징을 보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땅을 보며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심판 때문에 두려워 까무러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들과 땅을 보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는 하느님의 표징이 나타나고 땅에는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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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수요일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가 21,12-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위해 인내해야 할까요? 망망대해에서 인내를 가지고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을 찾으면 이미 육지에 다다른 것처럼 당장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나 북극성이 아닌 다른 움직이는 별들을 향해 항해한다면 제자리만 빙빙 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더욱 불안해집니다.
북극성을 찾았다는 증거는 ‘지금 당장의 감사와 행복한 감정’입니다. 오직 북극성 하나만이 정북향을 알려줍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그 별을 찾은 것만으로 평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별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들리는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분은 처음부터 계셨고 영원히 계실 하느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으로 세상 풍파 속에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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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사가는 교회가 당하는 박해를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어두운 차원으로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좋은 기회로 여겼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 법정은 주님을 증언할 강론대였습니다. 감옥은 선교활동을 확장시키는 멋진 장소였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자신들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텃밭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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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들이
기적의 순간들임을
뒤늦게야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이며
주님의 영역입니다.
-한상우신부-
11월 26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가 21,5-11)
우리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완전히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침기도를 통해 오늘 하루 일어날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도로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으로 깨어있을 때 나는 어떠한 시련에서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성전이 됩니다. 이것이 깨어 기도하는 삶이고 그런 사람들만이 인내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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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대략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행성과의 충돌, 강력한 화산 폭발, 빙하기, 해빙기는 지구의 생명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생명은 그런 멸종의 순간에도 살아남았고,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감각으로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또 다른 격변의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다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생명은 어머니인 지구에서 살아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겁니다. 지금의 삶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깨달음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바라는 걸 남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남에게도 권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도 역사의 이어달리기에 함께하는 겁니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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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 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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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재림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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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21,1-4)
믿음은 봉헌에 의해 측정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을 전부 주셨는데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것은 자신의 힘으로 챙겨야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소득의 십분의 일도 바치기 어렵습니다.
과부가 가진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시고 그냥 계시지 않으실 것을 안 것입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굶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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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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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다 드립니다. 이것마저도..."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생명줄까지 내놓는 것이 의탁입니다.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생명까지 내려놓는 진심어린 결행에는 이천 년 전 예수님을 감동시킨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무게 중심을 그분께 완전히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 내 삶의 무게는 그분께 넘어갑니다. 그 다음은 그분이 하실 겁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가톨릭 성가 221)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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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생각게 합니다.
그는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먹을 것이 없을 때 단식하는 것보다
먹을 것이 있을 때 단식하기 어려운 것처럼
가진 것 많은 부자가 내려놓고 봉헌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요.v
그러나 오늘 주님에게서 받는 더 중요한 가르침과 격려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물량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신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더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헌금보다 사랑이라는 겁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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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일요일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루가23,35-43)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이때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에 대해 묻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놀랍고 새로운 모습은 특별히 구유와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연약하고 나약하며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아기로 오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고 모욕을 당하며 온몸에 상처를 입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구세주를 고백합니다.
-한민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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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 1,15-20은 예 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창조론적으로 노래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 찬가를 이끄는 12-14절에서 바오로는 “빛의 나라”와 “어둠의 권세”를 대비시키는데, 그에게 있어서 그 빛의 나라는 곧 “아드님의 나라(!)”입니 다. 그리고 뒤따르는 그리스도 찬가는 아드님의 권능에 대 해 노래합니다. 그 권능의 마지막 목적지는 ‘평화’와 ‘화해’ 입니다.
-최승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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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사람보다는 부족한 듯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더 느끼게 됩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왜 완벽한 모습의 하느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향해 따끔한 채찍을 휘두르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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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이 말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일까요? 메시아임을 십자가에서 이미 증명하고 있는데도 그는 자신을 구원해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겠다고 빈정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천만 원만 준다면 부모로 인정해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죄수 하나는 위 사람을 꾸짖으며 이렇게 청합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왜 하느님이 두려울까요? 이미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해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셔야 할 것을 다 해주셨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자체가 그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린 분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며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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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시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주님의 통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살도 붙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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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더 낮아지시고
더 작아지시는
임금님이십니다.
삶의 완성이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생명이란
말씀과 함께
묵묵히 걸어가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구원은 이와같이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신비롭게
펼쳐지는 가득한
사랑의 기억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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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토요일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40)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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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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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금요일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루가 19,45-48)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감사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는 기도하는 집이 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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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목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사람은 스스로 변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다만 닮고 싶은 사람이 그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종을 만들 때 거푸집 먼저 만들고 쇠를 녹인 물을 그 거푸집 속에 쏟습니다. 그러면 그 거푸집만한 종이 탄생됩니다. 부모가 딱 그 거푸집의 역할을 합니다. 자녀는 어떤 모양으로 성장하고 싶은가에 따라 부모를 결정합니다. 자녀가 크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커져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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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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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이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종처럼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치 종이 주인의 뜻을 실행하듯이 주님의 뜻을 실행하겠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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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우리에게 봉헌의
참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참된 봉헌의
길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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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수요일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루가 19,1-28)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을 선하신 분으로 보고 자신을 나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야합니다.
아담도 죄를 짓고는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아담으로부터 생명나무로의 접근을 막은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면 그리스도의 뜻대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아를 주인으로 선택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의향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체도 무익하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자아는 뱀입니다. 대화할 상대도 아니고 친해지거나 그의 말을 따라줄 상대도 아닙니다. 자아를 뱀으로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눈이 열려 성체가 나를 변화시키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악으로 보일수록 주님은 선으로 보입니다. 선한 종은 자신을 악하게 보는 종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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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해숭심(山海崇深)’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은 모든 이을 품어 주고, 깊은 바다는 모든 이를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글이 있습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하셨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 배우자를 사랑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대해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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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화요일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1-10)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구원이 시작이다
사람은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변하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닮고 싶은 대상입니다.
자캐오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자신을 영원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줄 하느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캐오는 돈을 좋아하는 자신의 욕구를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욕구를 선택한 것입니다
영원한 삶은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싫어서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을 때 시작됩니다.
나로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이 고통임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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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4).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기도자는 저 뜬구름 같은 이상 안에서, 거룩해 보이는 타인의 영성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실존이 뿌리 박힌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손 내미신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한 "죄인의 집에 들어와 묵으십니다"(루카 19,7 참조). 이제 기도자는 자기 안의 내밀한 골방에 그분을 모셔들여 그분과 함께 머무릅니다.
기도자는 말씀하시는 주님을 마치 온 존재가 귀가 된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그분 말씀을 듣기 위해 온 몸의 세포를 다 집중해서 귀 기울이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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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 월요일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루가 18,35-43)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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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여러분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냐고 물으면 웃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하느님은 과일 몇 개 먹었다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모진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옷을 만들어 입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한 것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믿음을 줍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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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은 건 눈 먼 이의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에 예수님은 발목이 잡히십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눈의 빛을 얻습니다. 즉시 시력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18,43)고 하지요. 이미 본질을 향해 영혼의 눈이 열려 있던 그가 육신의 눈마저 뜨게 되니 남은 것은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일뿐입니다.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유로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를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3).
내 바람을 불편해하고 거슬려하는 이들에게 매이지 말고 (금방 호의를 베풀다가 일순간 돌아서 방해하는 그들에게는 사실 내 문제가 자기 일처럼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꿋꿋하고 굳건히 외쳐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바람과 일관된 추구와 하느님 자비의 개입은 결국 모두를 선으로 변화시킬 겁니다.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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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이 치유를 받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름을 얘기하는데 이 얘기를 전하는 다른 두 복음,
그러니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하느님을 찬양하며'가 빠져있고
그저 예수님을 따랐다는 얘기만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루카복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치유받은 것만으로는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치유도 받고 그로 인해 하느님도 만나야지 구원받은 거라는 얘기지요.
치유받는 것과 구원받은 것은 실로 큰 차이입니다.
치유는 어떤 한 부분이 정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은 존재의 한 부분이 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가 정상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도 이런 맥락에서 전존재적인 구원을 자주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유언에서 나병환자를 만나고 난 뒤의 변화를 얘기할 때 전에 역겨웠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하고,
권고 15번에서 평화의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마음과 몸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이 진정 평화의 사람들입니다."고 얘기하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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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우리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비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제대로 보게 되고
제대로 사랑하게
제대로 따르게
됩니다.
주님께
우리자신의
볼 수 없는 부분을
청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한상우신부-
11월 17일 일요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가 21,5-19)
호연지기(浩然之氣)
-서강휘신부-
호연지기(浩然之氣). 천지간에 넓게 퍼진 올바른 기운이라는 뜻이다. 시작은 작은 샘물처럼 미약하다. 그러나 7월의 장마처럼 일순간 거대한 홍수를 일으키고는 어느새 말라버리는 그런 물줄기는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의 샘은 땅 속 깊은 물골에서 길러져 멈추지 않는 것.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지만 그것이 냇가를 이루고 강을 이뤄 마지막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생명의 위대함이다.
호연지기는 그래서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매시매초 자신 안의 하느님께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은총의 기적이다. 맹자는 이를 하늘로부터 받은 ‘의로움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쌓아가는(집의(集義))’ 행위를 통해 몸에 익숙해지는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그 사람은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부동심(不動心)이다. 누가 뭐라 하든 제 멋대로 하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제 몸으로 살아내서 스스로 욕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결같은 마음, 일심(一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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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1)
하느님이 동기(動機)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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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더 건전하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요? 미움은 나의 고통의 탓을 상대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의 탓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당신의 탓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 당신 탓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미워할 마음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쳐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할 용기가 있어야 미움 받을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려는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움 받을 용기를 포기하게 되면 정말 미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얻으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 할 줄 알아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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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영성체송).
"그날"이 오기 전에도, 또 "그날"이 온 뒤에도 이 고백이 일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지금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합니까? 십자가와 고통을 껴안은 채로 하느님 때문에 행복합니까? 그럼 "그날"은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날이 아니라, 이제껏 간직하고 누린 그 행복이 영원으로 연장되는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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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때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종말의 때가 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는 지금이 바로 종말의 때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인격적인 종말은 가족 친지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 안에서 임종하는 것이고,
이런 죽음이 선종이고 성사적인 종말이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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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의
여정이 인내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의 길이
바로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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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토요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루가 18,1-8)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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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잠시 이 "올바른 판결"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꼭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한계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이는 죄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운 한계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좋은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궂은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고 나서는 욥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욥 2,10)느냐고 고백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던 어느날 이런 기도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운이고 고통이고 실패고 징벌같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라 좋은 것밖에는 내어놓으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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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 "불의한 사람에게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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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 삶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11월 15일 금요일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가 17,26-37)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지만 소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 땅을 탈출하자 소돔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하는 롯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안에 롯과 같은 분을 반드시 모시고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면 나는 죽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인 내가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 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하느님의 기쁨이 샘솟는 것을 보면 절대 나를 그렇게 만드는 롯을 내어 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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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숨이 보장된 듯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며 일상을 누리던 중에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두 사건의 예를 드십니다. 둘 다 성경에 등장하는 재앙의 날, 징벌의 날이지요. 노아 때는 '물'로, 롯 때는 '불과 유황'으로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무지하고 무심한 가운데 악행 속에서 준비 없이 그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지요.
"내려가지 말고 ...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오상선신부-
11월 14일 목요일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가 17,20-25)
콜베 신부 때문에 생명을 건진 ‘가죠프니체크’는 독일의 패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교황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로마 14,17 참조)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 씻어주셨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의로움은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마음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은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나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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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걱정과 근심이 생길 때, 원망과 분노가 생길 때면 이렇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던가?
내가 언제 춤을 추었던가?
내가 언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가?
내가 언제 나와 이야기를 했던가?
노래하고 춤추지 않으면,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과 대화하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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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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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마태오복음 18장 19-20절에서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면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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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수요일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가 17,11-19)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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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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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는 비록 한때 부정하다고 세상에서 내쫒긴 이였지만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길 줄 아는 이였습니다. 치유를 물리적 변화로 치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라고 꿰뚫어 볼 줄 알았으니까요. 여기까지 깨달은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 발 앞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룩함을 얻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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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통과 지혜의 관계, 곧 고통이 지혜롭게 한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고통과 감사의 관계, 곧 고통이 감사하게 한다는 점을 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사람이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최악의 상황을 통과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가진 건강이나 부나 평화가
당연한 사람은 오히려 감사할 수 없습니다.
애원이 나올 때가 감사 할 수 있을 때입니다.
애원이 나올때가 최악일 때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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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은 청할 줄만 알고 감사드리는 것은 잊었다는 점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처럼, 청할 때에는 정말로 간절하게 청하지만,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드리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초보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의 두 번째 잘못은,
‘몸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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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구원으로
찬미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감사와 영광을
먼져 올려드리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한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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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화요일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가 17,7-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의인을 “종”이라고 부르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도, 대가를 바랄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남을 섬기는 겸손한 종처럼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염철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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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회사의 책임자인데 여러분 밑의 직원이 출근해서 일한다고 사장이 직원에게 눈물 흘리면서 감사를 표시하겠습니까? 사장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복종해야 할 종입니다. 많은 일이 내게만 많이 주어진다고 불평불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더 많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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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은 다른 이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그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서로의 탓으로 판단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먼저 이웃을 판단하게 만드는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이웃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용서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주인의 몫이지 종의 몫이 아닙니다. 종이 잘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뽑아 주었기 때문에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종으로써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도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임을 믿는다면 순종하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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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강제노동도 아니고 중노동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사제가 사제로서 하는 일들과 수도자가 수도자로서 하는 일들도
결코 강제노동이 아니고 중노동도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기쁜 일’입니다.
사랑과 기쁨 없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사랑과 기쁨으로 하는 기도와 묵상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깊이 빠져드는 일이고, 전혀 힘들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지부터 묵상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려야 하고,
기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 기쁨’은 기뻐하려고 노력할 때 찾아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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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노력하자.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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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지혜는 고통 너머에서 하느님을 보고
더 나아가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사랑까지 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혜를 지닌 사람은 용광로 속의 금처럼 불로 단련을 받아
하느님께 맞갖은 아들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라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은총과 자비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오늘 지혜서는 얘기합니다.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지혜를 얻기 힘들고,
영적인 지혜는 더더욱 얻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 지혜롭게 하는 고통이여!'라고 고백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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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월요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1-6)
어느 날입니다. 황폐해진 땅을 보았습니다. 새도 날아오지 않고, 사람도 떠난 땅입니다. 매일 그 땅에 나무의 씨를 심었습니다. 원망은 걷어내고, 사랑을 심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자 황폐했던 땅은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새와 나비가 찾아왔습니다. 마을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사랑하면 그 상처에서 향기로운 꽃이 핍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타인의 아픔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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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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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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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고,
형제애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이고 의무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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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회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회개는 용서를
용서는 믿음을
더하게 합니다.
용서와 믿음을
먹고 사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용서와 믿음은
서로를
깨어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용서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용서와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용서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에
갇혀 있는 우리를
풀어주어 다시
깨끗하게 해줍니다.
위령성월은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며
생생한 용서로
이끌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없다면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향하는 믿음의
시간 되십시오.
용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한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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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보처럼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지
남의 죄에 대해 내가 흥분하고 분노하는지 어리석다고 자조하면서도
남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도 죄짓게 되는 죄의 연대성이 있고,
불가피성도 있습니다.
정녕코 남을 죄짓게 할 생각이 없는데도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무심코 뱉은 말인데 그것이 그에게 상처가 되어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나
껌을 딱딱 씹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남을 화내게 하는 것이 그런 거지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시잖아요?
곧 남 때문에 죄짓는 내가 아니라 남이 어떠하든 사랑하는 내가 되는,
그런 압도적이고 주도적인 사랑의 내가 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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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일요일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27-38)
따라서 먼 미래를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 지금을 사는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진해서 자기를 죽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타인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활을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살고 있다면 부활신앙이 있는 것이고, 부활신앙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닙니다. 매일 자신을 죽이고 있어야합니다.
끝까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신앙의 깊은 맛을
나눌 수 없습니다.
신앙은 부르심 받은
소명을 필요로합니다.
우리모두의 소명은
기도와 사랑
봉사와 희망입니다.
11월 9일 토요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3-22)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
천사는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예,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제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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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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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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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유명한 성전 현시 대목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 47,9.12).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물을 되살리고 생동하게 합니다. 이 생명의 원천은 성전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벌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요한 19, 34 참조)가 온 인류와 세상에 생명을 주리라는 예언적 환시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2,19).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당신 생명의 처분권을 유다인들 손에 넘기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파스카를 의미합니다.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 없고, 새로운 생명은 죽음을 건너야 얻으니까요. 이 의미를 유다인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요한 2,22) 깨달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우리의 파스카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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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금요일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루가 16 1-8)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인내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전해 주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르지만, 여러분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다. 여러분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겠습니다.’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향한다면 이는 신앙인이 이미 시작했던 삶입니다. 공유의 삶을 살았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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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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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에 나오는 집사의 모습을 심판에 대비하는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표현은 세속적이지만, 어떻든 대책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안 믿고 있다가 심판을 의식하고서, 믿고 회개하게 된 사람들은
신속하게 회개하고 보속하는데, 처음부터 하느님을 믿었다는 너희는
왜 이렇게 회개하고 보속하는 것이 굼뜨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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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청지기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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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마음만
바꾸면 언제나
소통의 길은 보입니다.
약은 집사는
자기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한 현실을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모색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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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예수님은 그 집사에게 "불의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셨습니다. 주인에게 칭찬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불의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지요.
사실 가장 손해를 입은 이는 주인입니다. 빚 진 이들은 갚아야 할 빚이 줄었고 집사는 직업을 잃지 않으면서 칭찬까지 받았으니 저마다 필요한 이득을 본 셈입니다. 그러니 이 거래에서 주인만 바보가 된 듯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나는 괜찮다. 너희만 좋으면 나는 어찌되어도 상관 없다"는 그분의 관대함입니다. 비록 자기가 살기 위해 사람들의 짐을 덜어준 의도와 지향이 불순했고, 그래서 불의하다는 수식어를 벗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당신 재산의 손실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입은 도움이 더 중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성소를 당당히 피력합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로마 15,16).
하느님께서는 자청해 나서서 새로운 길을 박해했던 사울을 괘씸하게 여겨 그를 무너뜨리시는 대신, 그 신념과 열정이라는 자질을 쓰시고자 그의 방향을 돌려놓으셨지요. 인간적으로 출중한 그의 능력과 스펙에 신념과 열정까지 더해지니, 새로운 길은 신학적 기반까지 형성하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당장의 박해나 눈 앞의 손해를 인내하시면서 길고 먼 안목으로 세상 자녀들의 영리한 거래까지 허용하고 쓰시는 분이십니다. 여럿을 살리기 위해 누구 하나는 손해를 봐야 한다면, 심지어 죽어야 한다면 그게 당신이어도 상관없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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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목요일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루가 15,1-10)
오늘 복음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나 잃어버린 은전과 같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주인이 찾으러오지 않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잃어버린 은전도 마찬가지로 주인이 찾아주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게 됩니다.
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주인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 집에 모시고는 싶어 하지만 오시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그대로 둡니다. 광야에 둔다는 말씀은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목자가 양들을 포기하면 그 양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은 은전 아홉 닢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포기하십니다. 그들이 결국 그분을 바라지 않아 그러기를 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셔서 그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아버지 집으로 향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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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그들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자들이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천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1코린 13,1-3).
그래서 사랑 없이 율법만 잘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실천을 제대로 하려면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회개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 때에 ‘회개한 사람의 과거’는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 과거를 심판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 때에 과거의 모든 일이 다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까지, 아주 작은 일들까지.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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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중의 가난은 형제에 대한 가난입니다.
형제를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욕심을 버리는 가난 말입니다.
그가 최선이기를 바라지 말고,
최선이 아닌 그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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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수요일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5-33)
소유욕을 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소유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봉헌하는 제단은 십자가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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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연이어 봉독된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상의 초대장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 지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직 초대에는 크게 망설입니다. 그 이유는? 소명에 응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는 자신의 부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모릅니다.” 그는 형제들과 절대 만나지 않았으며, 자식들마저 모른체 했습니다. 하느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해 가족을 칼처럼 끊어버린 것입니다. 성전 봉사를 이유로 가족에 대한 모든 의무를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말씀의 진의(眞意)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불효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형제자매들과 등지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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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예수회에서 나오는 회지를 여러 권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내용 가운데 여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의 체험담이 있었는데요. 비슷한 느낌의 체험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냐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알고, 완벽해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누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김기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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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가 아닌데도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의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사는 동안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예수님 없이도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찾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물론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쪽 세상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보면,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임종 직전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자성사를 집전할 때마다, 또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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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라는 말을 덧붙이신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박해 때에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였고, 평화를 누리는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신의 뜻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다. 완성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도 우선 충분한 열성을 쌓아 두어야 한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집회 2,1) 이런 다짐이 없다면 어떻게 목적지에 닿겠는가?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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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위해
버려야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리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버림으로
얻게되는
내적자유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신앙의 이 여정을
제대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십니다.
내것이라 착각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미련과 집착또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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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가장 가까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루카 14,26)해야 합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루카 14,27)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소유를 다 "(루카
14,33)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 조건을 말씀하시면서는 두 개의 비유를 곁들이십니다. 탑을 세우기 전 미리 앉아서 공사 경비를 꼼꼼이 계산하는 사람의 비유, 그리고 제 나라에 쳐들어
오는 임금과 싸울지 말지를 미리 앉아서 가늠해 보고 결정하는 임금에 대한 비유입니다.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루카 14,28)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루카
14,31)
예수님의 뒤를 따름, 그분의 제자가 됨, 그분을 닮아가는 길에도 역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하신 세 가지 조건이 바로 사전 준비 작업이 될 것입니다.
결국 제자 됨의 준비조건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11월 5일 화요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15-24)
이 세상에서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다면 저 세상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채울 것입니다.
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마음을 가집시다. 마음이 없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은 마음만 있다면 주님께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미사에 참여할 방법을 마련해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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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집에 처음 초대된 이들과 나중에 불려온 이들의 차이는 명백합니다. 처음 초대된 이들은 응답을 거부했고, 나중의 이들은 각자의 사연과 처지가 어떠했건 그 긴박하고 엉성한 초대에 응했습니다. 처음의 이들은 제 힘으로 충만했고 나중 이들은 허술한 자기 실존을 안고 충만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6).
"아무나"인 우리에게 남은 과제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비천하고 볼품없는 "아무나"라는 사실을 아직 인식하지 못 할 수도 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너희는 그 "아무나"인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보면 우리 중 대개는 내외적으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몰골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서 평화를 누리려면 비천한 나와 비천한 너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겸손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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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월요일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4)
가장 완전한 자선은 자신처럼 다른 사람도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선입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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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이 죄인이라 금 밖으로 밀어낸 이들, 부자들이 가난하고 미천하다 하여 거리를 두는 이들, 우리가 여러 이유로 함께하기를 거부하는 난민, 미혼모, 소수자, 이주민, 전과자, 정신질환자 들은 모두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자비의 대상입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우리에게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감싸고 있는 영혼들이라는 말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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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일요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1-10)
예전에는 책을 볼 때 중요하거나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긋곤 했습니다. 그것도 한 가지 색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로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렇게 밑줄을 그어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책 읽는 기분도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방법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는 밑줄 그은 부분만을 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옆에 노트를 함께 준비합니다. 이 노트에 밑줄을 그어야 할 중요하고 좋은 구절을 직접 적고, 또 이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저만의 생각을 적어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자캐오의 집에 묵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면서 투덜거리지요 자신이 세운 사랑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사랑의 확장은 무한대로 펼쳐집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어떨까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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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모어 회사에서 외판 사원들 가운데 어느 외판사원은 남들보다 두세 곱절씩 성적이 좋았습니다. 매년 한 번씩 외판 성적이 좋은 사원을 불러서 공로를 치하해 주고 보너스도 주었는데 그 외판사원은 내리 3년 동안 일등을 했습니다. 사장이 그를 불러 좋은 성적을 올리는 성공의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외판사원이 사장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장님,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저는 상품을 팔기 위해 남의 집에 갈 때에는 그 집 문 앞에 서서 제가 결혼했을 때 그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생각해보며 기쁜 얼굴로 그 집 초인종을 누릅니다.”
사람은 그 본성상 기쁘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만약 기쁘게 내어주고 있다면 분명 하느님의 본성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줌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셔 기쁘게 재산을 내어주는 자캐오의 모습은 예수님을 잉태하여 당신을 기쁘게 내어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도 내어주는 기쁨을 배우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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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지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말로는 회개했다고 하면서 행동은 세상의 뜻과 세상의 욕망을 따라간다면 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게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낸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셋째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회개의 삶을 산다면,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천국을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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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스코는 당시 교육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십시오. 왜냐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자체로 아주 좋은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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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라는 이름의 뜻을 말씀 드렸었는데 기억 하시나요? ‘즈카르야’(Zechariah)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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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지금 자캐오는 “횡령을 한 적이 없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으로 횡령을 한 기억은 없지만 양심이 편하지 않은 상태”로,
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서(관례대로 행동하면서),
특별한 죄의식 없이 했던 일들이지만,
양심은 편하지 않은 상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은 없는데 양심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기억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양심이 불편하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죄를 짓고서도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마음 편하게 잘 살겠지만,
자캐오의 경우에는 양심이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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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앞날이 구만리여서 그저 사는 데 급급하지만
나이를 먹게 되면 앞날은 백 리도 안 되고 죽을 날이 가깝기에
늘 죽음을 앞에 두고 살게 되고 죽음 앞에서 죄를 보게 되지요.
그리고 이때 신앙인은 죽음 앞에서 하느님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 앞에 중요한 문제랄까 과제가 놓이게 됩니다.
곧 나의 죄를 볼 것인가, 하느님의 자비를 볼 것인가?
신앙인이라면 둘 다 봐야지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보지만 자비는 보지 못하고 죄만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시라고 얘기하고,
독서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이유가 바로 하느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김찬선신부-
11월 2일 토요일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레 오녀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 25~30)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3, 6)
.어제 기념한 모든 성인 대축일이 천상 교회의 성인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도움을 청하고, 우리도 그들처럼 거룩하게 살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는 날이었다면, 위령의 날인 오늘은 연옥 교회를 위하여 기억하며,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는 죽은 모든 이가 하루빨리 하느님께 올라가서 성인들 반열에 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염철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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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책감을 느껴 서로 상대를 심판하며 자기 합리화 했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내가 받는 고통보다 타인에게 내가 주는 고통을 더 아파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고통을 더 많이 받고 상처 더 받은 사람이 더 큰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고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필수요소입니다. 어떤 인간도 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고통 없이 하느님 자녀의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충실한 신앙인이라면 고통의 길을 걷고 있어야합니다. 만약 나를 성장시키는 고통을 이 세상에서 충분히 체험하지 못했다면 죽어서 연옥에서라도 다 채워야합니다.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이웃을 아프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부터 연옥을 거치는 것입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연옥영혼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곧 연옥생활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연옥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얼마나 큰 고행과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감히 바로 천당에 갈 생각을 못하고 당연히 연옥을 거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충실한 사람일수록 같은 고통을 당함으로써 연옥을 거치는 모든 이들의 고통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동병상련 때문에 연옥영혼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옥영혼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그래서 이 지상에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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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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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없이 슬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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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죽음과 죽은 이를 생각하는 자체는 실상 산 이들에게 더욱 큰 유익이 됩니다.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고 살 날을 의탁하며 겸손되이 자기의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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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금요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1-12ㄴ)
저는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노래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성가를 좋아합니다. 저는 성가를 부르면서 저의 행복선언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오 하느님은 불변이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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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너희는 행복하다”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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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성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입니다.
우리는 그 한 번의 작은 선행 덕분에 지옥으로 가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요한 15,13)만 사랑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작은 사랑도 사랑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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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목요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 13,31-35)
10월 30일 수요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가 13,22-30)
10월 29일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다.(루가 13,18-21)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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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들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너무 작고 미약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자칫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들에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작고 흔하고, 그래서 가치가 적어 보이는 사물들입니다. 게다가 저 혼자서는 별 효력을 내지도 못하지요. 씨는 땅과 온도와 수분과 햇빛이 있어야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됩니다. 누룩도 무언가에 합해져서 온도와 수분이 주어져야 발효를 시킵니다. 혼자서는 그저 무생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거대하고 어마어마하고 휘황찬란한 영광의 대국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도 않지요.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말씀"처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에게 열려 있는 보물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구원은 희망하는 이들의 것이니, 지금 눈 앞에 구원이란 이름으로 선명하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먼저 자신이 희망하고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망상이나 신기루일 공산이 크지요. 우리는 희망함으로써 구원을 선취해, 구원 상태를 미리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희망한다면 기쁘고 충만하고 행복해도 됩니다. 그 자체가 구원의 표지니까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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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희망이 절망인데
그 절망적인 것 안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들, 곧 신앙인의 희망이라고 로마서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과 연결시키면 씨앗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아주 작고
그 작은 것 안에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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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월요일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우리의 부르심 역시 근본적으로 주님의 복음 전파를 위한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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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다가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구처럼 다가온다고 합니다.
-조재형신부-
10월 27일 일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참 제자가 되는 길에서 넘어야 할 유혹 중 하나는 마치 내가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열심히 기도를 올려 하느님 앞에 설 자격이나 권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며, 율법만으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그는 겉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왜곡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 또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참 제자 됨의 길에서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은 시련과 실패,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시련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시련 안에서 견디어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을 인정하도록, 하느님의 은총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겸손의 덕을 다져줍니다.
-한민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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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십시오
예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소개한 내용의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교황님 말씀의 요지는 “항상 완벽하고 엄격한 그리스도인들 을 조심하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황님 말씀의 요지가 어쩌면 오늘 복음의 내용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아 닌가 싶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했고, 율법과 계 명에 엄격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 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엄격한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평신도든, 사제든, 주교든, 스스로를 ‘완벽’ 하게 보이게 하는 엄격한 그리스도인들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조심하십시오. 거기에는 하느님의 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 봐야 할 교황님의 말 씀이라고 봅니다.
-방기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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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위선자 바리사이를 넘어, 반듯한 바리사이와 통회하는 세리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법과 사회질 서를 지키고, 도덕적 상식과 양심을 따라서 사회에 헌신하는 반듯한 바리사이가 되어야 하고, 동시에 통회 하는 세리처럼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통회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창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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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어떤 혜택을 받아 내겠다는 민속(民俗) 종교들의 발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비는 이들의 마음, 혹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이가 생각하던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려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이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인간이 자기 소원을 성취 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가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키거나,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서 나 한 사람 잘 되고, 나 한 사람 잘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자기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비는’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視線)으로 보려 합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잘 한 일에 만족하고 하느님 앞에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자만자족 현상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우열(優劣)을 논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이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모두 불쌍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 혹은 열등감은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착각입니다. 나만 바라보기에 생긴 착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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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은 내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따라서 봉헌 없는 하느님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하느님께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 무언가 얻어내려는 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도 이웃을 이용하여 무언가 챙기려는 속셈입니다.
회개는 봉헌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참다운 봉헌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 봉헌했어야 할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참다운 봉헌은 나의 생명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교만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했다면 봉헌하고 있을 것이고 봉헌은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봉헌은 주님이 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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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도 잘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이나 자비는 필요치도 않고,
그래서 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않으며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습니다.
-김찬선신부-
10월 26일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13,1-9)
10월 25일 금요일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가12,54-59)
마음을 열어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를 내어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을 통해서 앎이 깊어지고, 신앙생활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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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미래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만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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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표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의지를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찾는 것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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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자신의 회개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 안 되고, 회개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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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좋으신 하느님의 이치는 내려가라고, 비우라고, 나누라고, 대신 죽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이지요. 은총으로 우리 안에 작용하는 이성과 사랑의 법이 우리를 그리로 끌어당깁니다.
그 앞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이에게, 아예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는 이에게 예수님께서 안타깝고 애처로워 한 마디 하십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좋고 선한 법과 죄의 법 사이의 승부는 사실 이미 판가름 났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로마 7,24) 있느냐고 처절하게 질문을 던지고는, 곧바로 이렇게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어쩌면 질문과 답 사이의 여백이 길어지면 우리가 너무 괴롭고 비참할까봐 서두르는 듯 보일 정도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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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다는 것은 은총받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주는 분이 있어서 받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주시는 하느님이 계셔서 받는 것인데
하느님이 구원을 주시되 무상으로 주시기에 은총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요즘 계속 읽는 로마서에서 이것을 줄곧 강조합니다.
우리의 공로나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구원을 주시기에 이것을 믿기만 하면 은총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한자어로 추측推測이란 것이 바로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 아닙니까?
조선 후기 우리의 철학자 최한기(1803-1879)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기능은 본 것을 미루어(推) 보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測),
들은 것을 미루어 듣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익숙한 것을 미루어 익숙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있는 것을 미루어 없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니,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이 미루고(推) 헤아리는(測) 것 가운데 한가지일 따름이다”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렇게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을 봅니다.
첼라노가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들이 그에게는 선이었다."라고 프란치스코에 대해 얘기하듯
우리는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을 있게 한 '이성과 원인'을
보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선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2첼라노 165번 참조).
그러므로 우리 자신만으로는 비참하기에 탄식을 하지만
은총으로 구원받는 우리는 복되기에 찬탄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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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49-53)
성경 안에서 일반적으로 불은 더러움을 태워서 정화시키는 것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킵니다.또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분열과 불화가 마지막 때를 특징짓는 사건이 되고, 각각의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사건이 됩니다.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언제나 도전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을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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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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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는 양을 한 마리라도 잃으면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양을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루카 15,4).
목자의 기쁨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양이 자기 발로 스스로 목자를 떠났다면,
또 목자를 다시 만난 뒤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목자는 양을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 때문에 크게 슬퍼할 것입니다.
그때의 그 슬픔도 사랑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에도,
먼 고장에서 방종한 생활을 할 때에도,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일 때에도,
마침내 제정신이 들어서 뉘우치고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에도,
작은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한 일들은 모두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한 일들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부터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버려 둔 것은 무관심도 아니고 무능력도 아닙니다.
아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준 ‘사랑’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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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 39-48)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모든 사람을 집사에 비유하신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집사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자기 집 종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줌으로써 주인에게 상을 받습니다.
-이성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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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종은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의 사랑을 받는 종이고,
오늘의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하게 완수하는 종입니다.
둘을 종합하면 종은 사랑과 일의 종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에 대한 정확한 가르침입니다.
심리학에서도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사랑과 일이라고 하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형태의 만족이 있는데
사랑의 충만으로서 만족과 일의 보람으로서 만족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더할 수 없는 충만을 느끼게 되지요
일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일의 노예든 1독서 로마서가 얘기하는 죄의 노예든 노예가 되면
행복할 수 없으니 아무리 내가 종일지라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분께 순종하는 종, 충실한 종이 되면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집사로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종합하면 우리는 종인데
어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행복한 종이라면
오늘은 겸손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행복한 종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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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월요일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13-21)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돈 없이 살아라.”가 아니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단도 필요에 따라 ‘돈’을 사용했습니다. 당시의 사도단에는 사도단의 ‘공금’을 보관하는 ‘돈주머니’가 있었고(요한 12,6; 13,29), 그 돈으로 뭔가 필요한 것을 사거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요한 13,29). 사도단의 ‘돈주머니’의 담당자는 배반자 유다였습니다(요한 1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돈주머니를 맡기셨는지, 그 자신이 스스로 맡았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또 그가 돈 때문에 배반을 한 것인지, 배반하기로 결심하면서 돈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는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돈주머니를 맡고 있었다는 것은, ‘배반’과 ‘돈’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그 공금을 자기 마음대로 횡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12,6).>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하느님께(교회에) 바치면서 그것을 ‘성덕 쌓는 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돈을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갈 수 있다면,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은 갈 수 없는 나라이고, 그런 나라는 결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 실천은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크기는 돈의 액수로는 측정할 수 없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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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 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고 말씀하셨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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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이 슬픈 이유는 모으고 쌓고 누려온 그의 삶에 하느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분은 곁에 계셨지만 그가 그분을 외면하고 자기 능력과 자기 힘과 자기 재산을 믿었던 것이지요. "나"에게 그토록 집중해 살았건만 정작 "내" 목숨도, "내" 재산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허무함...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누가 하느님 앞의 부유한 사람일까요? 또 무엇이 하느님 앞에서도 재화로 인정받을까요?
"아브라함은 ...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로마 4,20).
여기서 "오히려"라는 말씀이 한층 더 깊숙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자손이 없을 때도, 겨우 얻은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주님께 대한 신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요. 그는 희망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희망했고, 약속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믿었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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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일요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전교란 누군가를 계몽시키는 따위의 수혜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이 복음화되는 행위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은 우선 나에게 내려진 복음에 대한 진지한 묵상을 전제로 한다. 모든 민족으로 멀리 전파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나와 맺어진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기쁨이며 전달받는 이도 자신의 삶 안에서의 구체적 기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끝까지라는 말이 주는 압박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기쁨보다는 저 멀리라는 위압감에 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멀리라는 말은 거리상의 개념이 아니고 나의 기쁨이 확산될 수 있는 가능 범위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민의 구원은 익명의 만민이 아니라 만민 각자에 해당되는 ‘나의’ 구원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너의’ 구원을 전제로 가능한 일이다. 만민은 각각의 나와 너가 합쳐진 말이지 지정되지 않은 이념적 숫자가 아니다. 이사야의 ‘야곱의 집안아,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는 독려는 종말적 구원의 때를 위한 너와 나의 결심과 각오에서 시작됨을 알린다.
그래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통치에 나를 내맡긴다는 것이고, 모든 것을 당신 명령대로 하겠다는 자발적 고백이다. ‘이제 나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당신이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인 것이다.
-서강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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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토요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8-12)
“똑똑한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해서 능력 있는 팀이 구성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요인은 각 구성원의 평균적인 사회 지각 능력. 즉, 인성이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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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에 칼을(마태 10,4) 주시고 불을 지르러 오셨다(루카 12,49). 그러나 그분은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가는 아니셨다. 그 대신 그분은 각자의 내면에서 혁명을 일으키신다. 그것은 세상의 혁명처럼 요란하고 폭력적이지 않다. 아침 안개처럼 고요와 평화 속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와 단 둘이 만나 삶을 바꾸게 부드럽고 다정하게 초대하신다. 나를 광야로 꾀어내신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 2,16. 이제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주리라(공동번역).)” 성령께서는 이렇게 나를 부르시고 이끄신다
-이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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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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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금요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루가 10,1-9)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성가 ‘엠마우스’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주여, 천년도 당신 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좋기도 좋을시고’와 같은 성가를 만드신 원선오 신부님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신부님의 삶은 ‘엠마오’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일본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아프리카 케냐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더 어렵고 힘든 수단으로 갔습니다. 30대에는 일본에, 40대에는 한국에, 50대의 나이에는 아프리카에서 지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신부님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엠마오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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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사가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방황하던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얼마나 각별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여인들의 복음서’라고까지 칭합니다.
-양승국신부-
10월 17일 목요일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 11,47-54)
모임에서 구심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이 깊은 물처럼 기쁨과 평화가 샘솟습니다. 장자가 이야기했듯이 마음을 ‘빈배’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야유와 조롱이 있어도 영적 성장의 발판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칭찬과 존경을 겸손과 온유함으로 녹여내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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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무책임에서 책임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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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수요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2-46)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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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월요일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루가 11,37-41)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일’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복잡했던 정결 예식을 뜻합니다(마르 7,3-4).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정결 예식을 위한 물을 드렸을 텐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깨끗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정결 예식을 무시하셨을 것입니다.
“겉과 속을(몸과 마음을) 모두 깨끗하게 씻어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몸만 깨끗이 씻는다고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은 정성을 다해서 겉과 속을 모두 똑같이
깨끗이 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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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때문에 하느님 눈을 피해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와 달리 다윗은 죄가 탄로나자 배 째라는 듯 뻔뻔하게
오히려 그 죄를 가지고 주님께 가서는 그 죄를 씻어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용서까지 봐야 합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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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토요일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가치에 더 집중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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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이웃의 형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갖는 행복보다 되는 행복이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같은 아들을 ‘가지려 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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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금요일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 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15-26)
주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하는 영적 자세는 신앙의 확고함이나 철저함보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하느님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은 마음으로는 하느님도 이웃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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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영원한 마귀가 있습니다. 바로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는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망을 자아냅니다. 마귀는 이 자아를 통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내가 돈과 육체의 욕망과 교만한 마음과 싸우고 있어야만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 나라를 모시고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가 멈추면 구원도 멈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죄를 물리치는 힘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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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배는 12척이고, 적의 배는 수백 척입니다. 당연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습니다. 장군의 뛰어난 전략을 믿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려는 부하들의 용기를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셨고, 제자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未得先愁失(미득선수실) 當歡已作飛(당환이작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얻기도 전에 먼저 잃을 것을 근심하고, 기쁜 일을 만나서도 슬픈 마음 일어나네.”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몸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이것은 뉴턴의 물리학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빛이 상황에 따라서 파동과 입자로 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하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 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희망, 믿음, 온유함과 친절로 가득하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건강하지 못해도, 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와 희망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불행은 절망과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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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 26)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우리의 정화는 시작됩니다.
주님이 없는 비움과 정화는 또 다른 자기만족과 또 다른 교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우게 하시는 분도 채우게 하시는 분도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점점 깊어지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으로 예수님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의지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의 주체는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정화또한 정화시키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믿음은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크기는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채움의크기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믿음을 다시 세우는 정화의 날 되십시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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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
말을 못해 고통받던 한 형제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모함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표징을 요구하며 그분을 시험하려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분통이 터질 일인데 예수님은 차분하고 당당히 그들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려 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상을 지으실 때 손가락으로 작품들을 만드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시편 8,4 참조). 말 못하는 이에게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도 악의 사슬에 묶여 있던 창조 때의 본성을 되찾아 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 덕분이지요.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예수님의 모든 구마와 치유는 이 명령을 깔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재창조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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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목요일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10월 9일 수요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가 11,1-4)
운동을 하다보면 잘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잘 안 풀린다고 더 힘을 주면 더 안 됩니다. 그때 프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본에 충실하세요!”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면 언제나 초보자입니다. 프로가 되려면 기본기를 보통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해야 합니다. 그 지루한 과정을 통해 기본기가 탄탄할 때 훌륭한 프로선수가 됩니다.
축구 프로 선수가 가장 많이 연습하는 것을 무엇일까요?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기본인 슈팅과 패스입니다. 다만 초보처럼 슈팅하거나 패스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처럼 슈팅하고 패스합니다. 초보자는 그 기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프로는 같은 것이라도 훨씬 쉽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프로는 어려운 것을 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기본을 프로답게 해 내는 사람입니다.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높이는 뿌리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라도 저런 기도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쉬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프로가 알려주신 신앙의 기본기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프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압니다. 그것만 열심히 연습하면 최고에 오를 수 있음을 압니다. 그것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당신처럼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기를 알려주신 것이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 신앙의 정도에 따라 각자의 해석이 다릅니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기도의 수준에 맞게 주님의 기도를 이해하고, 초보 신앙인은 또 그렇게 이해합니다. 초보 신앙인은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당신처럼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많은 프로다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공생활동안 가르치신 모든 내용이 다 주님의 기도의 해설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가르침과 비유들이 주님의 기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를 프로처럼 할 수 있을 때 프로 신앙인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기본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올바른 성장이 가능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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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중 하나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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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기도도 주님의 기도도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를 향해 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언젠가 탄식도 바람도 청원도 거대한 침묵 안에 녹아들어, 말이 필요 없는 기도, 존재의 기도로 이어지겠지요. 그때는 우리와 그분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알고 내가 그분을 알기에 사랑 안에 녹아들어 둘로 가를 수 없는 상태, 내가 기도가 되고 기도가 내가 되는 신비로 들어갈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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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화요일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느냐보다는 자신을 닮으려는 사람을 제일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먹을 것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분주히 일했습니다. 마르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 옆에만 꼭 붙어서 그분의 말씀만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식모를 원한 것이 아니라 순결한 신부를 원하셨습니다. 일 잘 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으려는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았고 마르타는 몰랐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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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일입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하는 일, 내가 보내는 시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선택하면 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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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언제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따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갈림 없는 마음으로 쫒는 길이어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리 중요해 보이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경의 아름다운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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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얼핏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마르타를 염려하시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몫을 사랑해야 타인의 몫도 존중하는 법인데 지금 마르타는 마리아의 몫을 중단, 보류, 대체 가능한 것으로 경시함으로써 동시에 제 몫에 대해서도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으니까요. 마르타가 마리아를 그녀의 몫에서 끌어내어 다른 몫, 자기의 몫을 지우려 한 의도에 살짝 아쉬움이 드는 것은, 마르타의 몫은 지금 그녀에게 부여된 최적의 은사이고, 마리아의 몫은 마리아에게 최적의 은사임에도 마르타가 지금 그걸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관상을, 마르타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어느 한 쪽만 완벽하게 실행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봉쇄 담장 안의 관상수도자나 사막의 은수자도 노동과 활동 없이 기도생활을 이어갈 수 없고, 활동의 최전선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들도 기도 없이 그 소명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관상)와 활동의 몫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공통의 의무입니다. 기도에 더 전념할 때가 있고, 기도에서 쌓인 사랑의 힘을 활동 안에서 내어 놓아야할 때가 있지요. 기도와 활동은 대립 가치도 별개의 가치도 아닌, 그리스도인 삶에서 둘 다 자연스럽게, 때 맞춰 드러나야 하는 요소들입니다. 저마다 리듬이 다를 뿐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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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월요일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가 10,25-37)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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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안다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묶여있는 율법학자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물을 때 드디어 신약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 찾지 말고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사랑을 계명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을 ‘소명’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명은 의무입니다. 사랑은 나의 주체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키니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지배당하고 사랑에 흔들려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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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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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마리아인은 ... 그를 보고서는 ... 그에게 다가가"(루카 10,33-34).
먼저 예수님은 유다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서 민족적 순혈주의를 제거해 버리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피의 순수성이나 신분적 자격 요건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 다가가는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하느님께서 마음에 일으켜 주신 "가엾은 마음"(루카 10,33)에 순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인은 다친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단지 그가 상처 입고 죽어간다는 사실,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정성과 시간, 재산을 들여 그를 돌봅니다.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의 방향성까지도 강도 만난 이에게로 향하게 만듭니다. 방만 빌려주면 되는 여관 주인에게 관심과 돌봄, 헌신의 몫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 역시 "이웃"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지요.
-오상선신부-
10월 6일 일요일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5-10)
신앙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인간적으로 막다른 처지에 다다랐을 때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진정 밤이 깊고 어두워야 별이 초롱초롱하고
인간의 불이 꺼져야 하늘의 별빛이 빛나듯
인간적 절망의 순간에 하느님의 희망은 보이기 시작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비로소 진정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무화과 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져라 하더라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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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토요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가 10,17-24)
하늘로 오르려고만 하면 땅이 주는 에너지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면 저절로 높이 올라갑니다. 목적지향적 삶은 그래서 힘이 빠지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의미지향적 삶은 항상 현재 하는 일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업적은 사라지지만 의미는 영원히 남습니다. 의미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의 결과도 그래서 의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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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은 화이부동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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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목요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다(루가 10,1-12)
이룩하는 평화는 내가 만드는 평화이고 깨지기 쉬운 평화이며,
받는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고 깨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하게 될 것임을 마지막으로 전하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전해야하는 복음의 내용이 지옥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살면서 단 한 명에게라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사랑의 소명을 실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 없이 살아간다면 아직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10월 2일 수요일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마태 18,1-5.10)
9월30일 월요일
우리가 매일 읽는 복음서도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주제가 조금씩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전체적인 구성이 비슷하기에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같은 관점에서 보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대상이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세상의 종이 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은 권력, 명예, 성공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루카 복음도 대상은 이방인지만,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목동들이 경배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돌아온 아들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과 말씀을 역사적으로 기록해서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 복음은 그러한 사건과 말씀을 해석해서 그 영적 의미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며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서의 탄생 부분을 생략하고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나 니고데모의 이야기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등은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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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강력한 유혹을 잘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집중 또 집중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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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 직장, 관계들 속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또 작아지는 것이 예수님,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길이라면, 힘이 들더라도 욕심을 낼만한 일이지요. 그럴 자격도 없는 우리의 몸값을 당신 목숨으로 치르러, 섬기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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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토요일
9월 27일 금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가 9,18-22)
요즈음 우리가 보고 있는 루카복음은 참된 신앙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임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 어니스트는 온화하고 사랑 가득한 얼굴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 그 마을에서 나온다는 전설을 듣고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그렇게도 바라던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품을 지니게 된 어니스트를 보며 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임을 알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줄거리입니다. 바라보면 닮아 갑니다. 좋아하는 것만을 오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좋아해서 오래 바라보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들의 얼굴은 매우 사납습니다.그러나 초식 동물의 얼굴은 무섭지 않고 온화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이 변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그리스도로 바라볼 때만 나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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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목요일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가 9, 7-9)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벌레는 잎을 보지만 나비는 꽃을 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에 따라 가려지고 왜곡됩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도 돈이고 물도 돈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예수님도 그런 분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많은 사람들과 헤로데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의 시선은 내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왜곡되고 그렇게 내가 바라보는 하느님도 왜곡됩니다.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욕구를 버려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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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하까 1,5.7).
두 차례나 등장하는 이 말씀은 지금도 유효한, 불안과 절망으로 흔들리는 인간 실존을 관통하는 권고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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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수요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시었다. (루가 9,1-6)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심을 구하자.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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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2).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는 이들은 이 지상의 삶이 완전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정도야 다르겠지만 크게 부족함 없이 살더라도 질병이나 천재지변, 사고, 죽음 등 인간에게 위협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실존적 불안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동경이 싹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악의 권세를 크게 현실적 불안과 절망, 그리고 물리적 질병이라고 보신 듯합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해 새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영혼의 온전함을 되살리고, 질병을 치유해 육신의 온전함을 회복하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당신의 일을 제자들과 나누어 더 많은 이들이 "되살이"를 체험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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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19-21)
.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하셨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는 겸손한 종이셨고, 또한 당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 가족 공동체에 들어가는 데 가장 완벽한 모범은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은 먹는 것이기도 하고 내어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는 것도 양식이고 전하는 것도 양식입니다. 말씀을 먹는 것과 말씀은 전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듣지 않으면 전할 수 없고, 전해야 하는데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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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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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월요일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루가 8,16-18)
9월 22일 일요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13)
무화과는 한자로 없을 무(無), 꽃 화(花), 실과 과(果)를 씁니다. 즉, 꽃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꽃 없이 열매를 만드는 나무는 없지요. 이 무화과나무 역시 꽃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은 꽃들을 꽃 주머니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꽃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꽃들이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다른 나무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내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점을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면서 쉽게 판단하고 때로는 나와 맞지 않는다면서 단죄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안에 보이지 않는 꽃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내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어서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인은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영리하게 대처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을 돕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이 맡긴 재물을 가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칭찬받은 이유였지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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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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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목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36-50)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 주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믿었다면 서로에게 핑계를 대는 죄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가 멈추려면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완전히 용서받으면 감사의 눈물로 보속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라야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죄인인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줍니다. 예수님은 이 행위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비유말씀을 가만히 보면 죄의 용서는 예수님께서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그 여인은 이미 죄를 용서받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의 확증을 듣지 않았더라도 그 여인은 죄를 용서받았음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자비를 믿어야합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같은 자세로 고해소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또 그런 마음으로 고해를 보아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누가 감사한 마음으로 또 죄를 찾아 나설 수 있겠습니까? 바리사이와 같이 무언가를 해야 주님께 용서받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죄인인 여자와 같이 이미 용서받았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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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수요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장 나쁜 노예근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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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튜디어스가 비행기 일등석, 퍼스트클래스의 승객들만의 행동과 습관을 발견하여 낸 책의 내용
- 펜을 빌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 전기와 역사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자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 대화를 이어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경청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쓰는 말들은 주로, “그래서 어떻게 됐지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등의 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를 끄집어내기 위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 승무원에게 고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아내를 극진히 모신다고 합니다
자아는 실현시킬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이 주장을 한 이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삼구와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요한의 세례의 목적입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는 신앙인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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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뤟 17일 화요일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루가 7,11-17)
9월 16일 월요일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거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루가 7,6-7)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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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내가 실제로 하느님을 대할 모습과 같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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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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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는 병든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는 백인대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병행구인 마태복음 (8,5-13)에서 백인 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한 것과 달리, 오늘 우리가 만나는 루카복음에서는 중개인 역할을 할 사람을 보내어 청을 드립니다. 누구의 기억이 더 정확한가의 문제라기보다, 아마 복음사가가 더 의미를 두려는 부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 듯합니다.
백인대장은 오로지 "말씀"을 원합니다. 그 "말씀"이 비록 현장에서 직접 대면해 발설되지 않아도 효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습니다. 군대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그로서는 명령, 곧 말의 힘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 들은 말은 물론이거니와 위임된 말이라도 복종이 곧 생명이고, 불복종은 곧 죽음이니까요.
오늘 복음은 백성에게 직접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 모습에서 시작해, "그저 말씀만" 원하는 백인대장의 겸허한 간청으로 이어지다가, 소리가 동반된 "말씀"이 아닌, 말씀이신 분의 의지가 완성한 치유로 마무리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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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일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1-32)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루카 15,18).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에 신뢰와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헤픈 사랑에 대한 기억일까요. 어쩌면 그는 이미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는 100퍼센트 맞을 자신은 없더라도 그 아버지가 자기를 품팔이꾼으로라도 다시 거둬주시리라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비록 죄는 지었을망정 그는 아버지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고 있습니다.
큰 아들이 잔치 바깥 어둠 속에 머무를지, 실망과 혼돈을 거쳐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앎을 수용하고 낯을 바꾸어 환대의 잔치판에 더덩실 춤추며 뛰어들지 비유의 결말은 열려 있습니다. 분명한 건 그가 자기의 의로움, 자기가 우상화한 아버지의 의로움이 진실과 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옳으셔야 한다.(내 생각과 같으셔야 한다.)
하느님은 항상 정의로우셔야 한다.(내 의견과 같으셔야 한다.)
혹시 이처럼 아버지를 내 틀 안에 가두고 있다면 나는 또 다른 우상숭배자일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께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며 손가락질하고 궁시렁대며 큰아들의 혼돈 속에서 긴긴 나날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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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토요일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9월 13일 금요일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5-21)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지상의 유산이 아니라 불멸의 유산입니다.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입니다.
자비만이 죽은 사람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의 거처로 인도합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9월 12일 목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27-38)
오늘 독서에서 바로오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학도 잘못 공부하면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자신의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교만은 사랑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다운 가치는 하느님뿐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은 겸손과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넘지 못하는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대전’을 끝마쳐갈 무렵 하느님을 체험하고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신학대전이
‘지푸라기’와 같은 쓰레기였다며 바로 집필을 멈추고 미완성으로 남겨놓게 된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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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9월 11일 수요일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26)
데이브 아스프리는
성공은 이 자아의 욕구와 싸워 그 욕구를 이길 수 있을 때 오는 행복의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성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이겨 행복해져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합니다.
“평화와 평온을 얻기 위해 명상과 호흡법을 수행하는 이들 대부분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답했다. 큰 변화를 불러오는 이들은 자신의 평화와 행복을 최우선시하고 있었다. 결국 얼마나 더 영리해지고 빨라질 수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행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참조: ‘최강의 인생; 들어가며’, 데이브 아스프리, 비지니스북]
인생 성공의 비결은 자아의 욕구를 이기는데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가 세속-육신-마귀, 삼구입니다. 삼구를 이기는 방법은 성사생활을 포함하는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님만이 삼구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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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 행복 선언’은 세속에서 말하는 ‘행복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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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화요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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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긍정심리학자들이 장기적인 행복에 미치는 외부 세계의 영향은 10%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장기적인 행복의 80%는 우리의 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 굶주림, 슬픔, 미움을 당함…. 이를 통해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스트레스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혼자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기에 하느님의 손길에 의탁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9월 9일 월요일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6,6-11)
“착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십시오. 악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손을 뻗어라.’ 성한 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손이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주 손을 뻗으십시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으십시오. 이웃을 돕고, 과부를 보호하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이가 해를 입지 않도록 빼내주기 위해 손을 뻗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고침받습니다. 예로보암은 우상을 숭배했다가 손이 굳었지만, 하느님께 간청하자 다시 펴졌습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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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국제기구 수장을 처음 맡은 사람은 반기문 UN 총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빨리 가장 유력한 UN 총장이 있었는데, 당시 세계보건기구(WHO) 총장을 맡고 있었던 이종욱 사무총장이 있었습니다. 2006년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거의 확실하게 UN 사무총장에도 당선되었을 인물입니다.
그는 23년간 세계 보건기구에서 활동하면서 서태평양 지역의 소아마비 발생률을 현저하게 줄이는 백신을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덕에 “백신의 황제”라는 칭호까지 얻게 됩니다.
2003년 WHO 사무총장으로 당선되며 자신이 숭고한 사상이 있어서 이곳에 들어왔던 것이 아니고 그저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서였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숭고한 사상대신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옳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행동하는 것입니다.
일 년 중 150일 출장 30만 km의 비행을 하였는데,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습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전의 총장들과는 다르게 항상 이코노미 이등석 좌석을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성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지 결정하는 데까지만 사용되었습니다.
[참조: ‘Man of action’, EBS 지식채널, 유튜브]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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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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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일요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 9,17-18)
‘미워하라’는 말은 ‘봉헌하라’는 뜻입니다. 봉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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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네 번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스무 번이나 하셨다고 밝힙니다. 이야말로 주님을 아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된 구원자임에 감격할 때에만 비로소 당신을 제대로 따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장재봉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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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화법(話法)에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뜻이고,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라는 혈연(血緣)과 자기 자신(自身)에게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었고, 초기신앙인들도 그런 정신으로 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가 10, 29-37)를 우리는 압니다. 길에서 강도(强盜)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본, 사제(司祭)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사제로서 또 레위로서 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진 인연들을 잠시 잊고,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 곧 강도 맞은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미 가진 인연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연에 몰두합니다. 과거의 인연에만 집착하면, 인간으로서 성숙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기 앞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例話)는 우리가 소중히 생각해야 할 인연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명과의 인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행동하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미 가진 인연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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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의 한 교회에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란 푯말을 붙인 상자를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안에 그 같은 물품들을 넣게 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통”을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통”도 만들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행복에 빠져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도 내어주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들에 내 것을 넣으면 죄가 사라지고 광야라는 곳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40일을 버티셨습니다. 이 능력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난과 고독과 지루함, 겉보기는 고통스럽겠지만 친해지면 평화로워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적게 가질수록 가진 것에 더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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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도 성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자기 뜻/자기 의지대로 따를 수가 없고,
자기 힘만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고,
공자가 얘기하듯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가 되면 곧
내 욕구가 가는대로 마음이 따라가도 법을 어기지 않는 경지가 되면
나의 뜻이 욕심에 휘둘리지도 않고 두려움에 휘둘리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의 끝에
형제들을 위해 기도한 바를 다시 깊이 묵상해봅니다.
“전능하시고....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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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금요일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루가 5,33-39)
역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의로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명예, 권력, 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나의 가식과 위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지금 상처받고 있는 이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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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 5,1-11)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골로사이서 1,9~14)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만났을 때 그랬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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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데’는 물고기가 많은 곳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곳으로,
즉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는 인생보다 차원이 높은 새로운 인생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 말씀은,
“지금보다 더 차원 높은 새로운 인생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됩니다.
시몬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설교를 여러 번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스승님’에서 ‘주님’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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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데로 나아가 고기를 잡는 사이, 본인 자신의 깊은 데를 보아 버린 것 같습니다. 두서없이 죄인이라 고백하는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외침은 진솔한 자기 인식과 경외심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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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내가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많은 사람은 웃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나만 웃고 많은 사람은 울 수 있도록 사십시오.”-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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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잘 고치는 의사이신 분’이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이 ‘해 질 무렵에’ 온 것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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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화요일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가 4,31-37)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악령에 물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악령에 물든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령에 물든 사람은 어쩌면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 안의 거짓된 자아는 나를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저주스러워라, 저주스러워라! 얼마나 숱한 층층대를 밟아 지옥의 밑바닥까지 끌려갔던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진리에 허덕이며 맘 조리고 애태우면서,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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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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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 말은 마귀 들린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마귀가 한 말입니다.
자기가 사로잡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마귀가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마귀에게 자유의지를 빼앗긴 사람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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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일요일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1.7-14)
잔치에서는 윗자리가 좋고, 남에게 베풀 때는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우리 세상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십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가 좋고, 남에게 베풀 때는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우리 세상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根性)에서 해방된 자유(自由)를 가르쳤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한 번 깨달아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무릅쓰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자유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많은 실패를 겪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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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을 “나는 하느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몽당연필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를 가져다가 좋으실 대로 쓰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고 맡겨 드리는 그 겸손의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 켐피스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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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이 말씀은, 세속에서의 처세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겸손해져라.”,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라는 가르침을 비유로 풀어서 설명해 주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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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범은 겸손이라는 것이다. 겸손을 통해서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 하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윗자리로’(10절) 불러올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내가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손에 우리를 모두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모델이시다.
제1독서의 ‘지혜’의 가르침도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20).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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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높임을 받을 때도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로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8월 31일 토요일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오 25,14-30)
종은 딱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는 종과 그렇지 못한 종입니다. 재능을 진정으로 발휘하고 싶거든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재능을 땅에 묻어놓는 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쁘게 자비로울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자비롭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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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금요일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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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의 도착이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이 예상한 그 시간에
신랑이 도착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슬기로움’은 “내 삶의 기준을 주님에게 맞추는 태도”이고,
‘어리석음’은 “내 삶의 기준을 내 마음대로 정하는 태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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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목요일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 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마르코 6,17~29)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헤로데가 두려워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군중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론만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론의 움직임을 살펴보다가 적당한 때에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도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는 것을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손님들 앞에서 경솔하게 함부로 헛된 약속과 맹세를 한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딸에게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라고 말하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마르 6,23).
그런데 그가 ‘내 왕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왕국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고,
헤로데는 사실은 로마황제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손님들은 그런 사정을 환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헤로데가 딸에게 약속하는 말을 듣고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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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의 길은 날마다 덜어가는 길입니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성철스님-
8월 28일 수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7-32)
어느 날 하느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준 희귀한 선물을 잘 유지하였느냐?
너희의 얼굴을 내보이라.
기쁨과 희망이 잘 보존돼 있느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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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북의 마크 주커버그는 한 가지 옷만 입습니다. 그리고 왜 다른 옷은 없느냐는 비아냥거림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는 그 사람보다 더 부자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옷이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은 돈이 많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아주지 않으면 분노를 터뜨립니다.
내 양심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남들이 비난을 하던 비웃던 조롱을 하던 멸시를 하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항상 양심의 거울을 나의 앞에 놓고 그 거울을 통해 나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그래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때에는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아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남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내면에 썩어가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내 냉장고의 음식이 썩어 가는데 누구의 냉장고를 신경 쓸 수 있겠습니까?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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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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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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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님은 나와 함께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함께 같이 아니 있었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중에서)
8월 27일 화요일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마태오 23,23-26)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신앙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마태 7,21).
8월 26일 월요일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오 23,13-22)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이나 차례로 당할 화를 지적하신다. ‘불행하여라!’는 말씀은 진노일 뿐 아니라 비애가 곁들여 있는 말씀으로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고 하느님의 뜻에 완고하게 눈을 감고 자기 편한대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자에 대한 서글픈 사랑의 심정에서 나오는 분노이다.
-조욱현신부-
8월 25일 일요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2-30)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신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정말로 좁다는 말이라기보다 너희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에 더 가깝다.
-서강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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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는 자에게 매를 든다.” 그렇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주님의 견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절망과 좌절 속에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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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 사사건건 따지는 한 젊은이에게 한 어르신이 자네, 명석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를 아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명석함이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 이라네.” @@@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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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경쟁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 일은 ‘정원제’가 아니라 ‘자격제’이기 때문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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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토요일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45-51)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하느님과 같아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잘못이 있음을 하느님께서 안다면 꾸중을 듣고 작아져야합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립니다. 그러면 높아질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는 이 모습이 곧 하느님과 맞서려는 모습입니다. 잘못을 감춤으로써 자신이 높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뭐지? 하느님의 백성이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어떻게 아셨지?’
그래서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아마도 나타나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거짓이 없어야 이스라엘 백성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던 그 나무 밑에서 그 생각을 더 굳게 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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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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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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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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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비교는 행복의 끝이자 불만의 시작이다.’ (덴마크 철학자로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쇠렌 키르케고르)+++++++++++++++++++
.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일을 시키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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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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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어른이 되어서, 또는 늙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짧은 기간 동안만 신앙생활을 한 사람 사이에도 은총의 차별은 없습니다.
다 똑같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나라에서 누리는 생명과 행복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은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남들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은총을 받는 복된 일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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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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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오늘 하루도 공칠까 불안과 절망으로 떨며 기다린 이들의 마음의 노고까지 헤아리는 자애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공정성이고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더 가지려는 욕망이 좌절되자 그 욕망을 공정성으로 포장해 항변합니다.
제1독서는 판관 기드온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자리 다툼을 보여줍니다
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과 세상에 유익을 주는 올리브, 무화과, 포도의 생산 주체들은 자기를 다른 존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은혜와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며 오롯이 소명에 충실하길 원할 뿐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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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화요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오 19,23-30 )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 많이 춤추지 못하고 더 노래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 더 행복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1코린 15,31)고 말합니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매일 밤 맞는 잠을 죽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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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재물만을 가지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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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물이 하나도 없더라도,
그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될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부자들은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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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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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주님의 용사라고 부르며 나타나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얘기하며 아주 기를 북돋습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고통은 있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오히려 고통이 더 많고 더 큽니다.
성인들을 보면 알 수 있고 성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고통만 있지 않고 당신도 함께 있다고 하시고 그러니 우리도
고통과만 있지 말고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으라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엄마가 자녀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고통을 없애줄 수 없고
다만 자녀의 고통에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알기 전과 비교할 때 천양지차입니다.
오늘 기드온은 하느님의 두려움 없는 용사가 되기 전에 그 하느님 체험을
하는데 우리도 하느님의 용기 있는 전사가 되기 위해 먼저 하느님 체험을
해야 함을 깨닫기도 하고 정성껏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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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9일 월요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16-22)
“No Pain, No Gain”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면 열심히 달려야합니다. 노를 저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2-13)
무하마드 알리에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알리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시죠?”
알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세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세기 시작한다는 것일까요? 고통이 와서 그만하고 싶을 때부터 세는 것입니다. 힘이 들 때부터 진짜 운동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상을 받고 싶다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시간보다 10분 더 성체 앞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묵주기도보다 1단만 더 하도록 해 봅시다. 내가 읽은 성경보다 1절만 더 읽으려고 해 봅시다. 이런 ‘조금 더’들이 쌓이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그만큼 더 쌓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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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때,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제일 윗자리에 두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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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은 ‘옷' 중에서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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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 두 계명을 다시 하나로 압축한 것이 ‘황금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말은,
“부족한 것이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낍니다.” 라는 뜻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를 “공허감을 느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있고,
재산이 많아서 물질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있고,
그런데도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느낌, 허전한 느낌...
그는 그 공허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채워 넣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영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영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공허감에서 해방되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그 젊은이의 ‘부족한 점’은 사랑 실천이 부족한 것과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문제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면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엇이 슬펐던 것일까?
그는 분명히 많은 재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버려야 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해서
계속 그 공허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슬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한 셈이 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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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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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에게는 재물이 포기할 수 없는 우상이 된 것입니다. 완전함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우상!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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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고통은 선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선행 그 자체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선행을 한다는 걸
그리고 또 알아야 합니다.
선행이 우리에게 선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래서 행복해지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주거나 인간의 선행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김찬선신부-
8월 17일 토요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19,13-15)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인데, 어린이들은 사적인 욕구가 적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어서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린이처럼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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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금요일
“나무로 만들면 나막신이라고 하지. 고무로 만들면 고무신, 털로 만들면 털신이라고 해. 그렇다면 사랑으로 만든 신은 무엇일까?”
아내가 답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편은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당신이야.”
8월 7일 수요일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드님까지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자아를 죽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찾은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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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6일 화요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17,1-9)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 아빌라의 데레사는 “사람을 만날 때 즐겁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만날 때 힘이 들면 만나도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힘이 듭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인 것입니다. 자녀가 나이든 부모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만남이 남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힘이 든다면 계속 만나야합니다. 그래야 나도 발전이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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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좀처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에만 생각합니다”(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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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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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서 특별히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 살아가면서 스스로 찾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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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으실 영광 받으신 모습이다. 이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수난의 때가 되어도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게 해주시려는 배려이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나타나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대화의 내용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시는 신비와 십자가 위에서의 고귀한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곁에 나타난 것은 그분이 바로 예언자들의 주님이심을 제자들이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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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 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4,13-21)
‘공이 잘 안 맞는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그럼 공이 더 안 맞게 됩니다. 뭘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공이 라켓의 어느 부분에 떨어지는지만 그냥 관찰해보세요. 그럼 공이 저절로 라켓의 한가운데에 맞게 됩니다. 공이 라켓에 맞는 순간 낮게 날아오는지, 높게 날아오는지, 평행하게 날아오는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합니다. 뭔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오로지 공이 어떻게 날아오는지만 관찰하세요. 공을 잘 쳐야겠다는 생각을 멈춰야 해요. 생각이 시야를 가리는 겁니다.’”
[참조: ‘왓칭 2: 텅 빈 공간이 부리는 요술’, 김상운, 정신세계사]
강론을 쓰건, 강의를 하건 반드시 먼저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주님이 보입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강론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감사와 찬미만 남는 곳이 ‘외딴 곳’이고 그 외딴 곳에 머물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또한 그런 고요함 가운데로 초대할 수 있고 하늘의 양식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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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금요일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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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시야의 한계가 세상의 한계인줄 안다.’ 쇼펜하우어
어떤 모임에서 한 분이 좋은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거 제가 해봤는데 별로 효과가 없어요.”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효과 없다면서 단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자신의 행동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가장 큰 효과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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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타나셔도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성소에 대한 갈등을 느끼던 중 기차 역에 쓰러져 “목마르다!”라고 말을 하는 한 행려자를 보고 그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그 순간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처럼 말하려고 수만 번의 옹알이를 하고 걷기 위해 수천 번을 넘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되려는 노력은 어떤 것이 되어야할까요? 바로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고 그렇게 대하는 노력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나도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을 때 이미 예수님으로 새로 태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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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목요일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마태오 13,47-53)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으로 천국을 살아가야 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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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닾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탈출 40, 34)
구름기등의 인도를 친히 받는 사람이라면 굳이 모세가 필요치 않을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주님 친히 알려주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로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데 다른 사람이 필요치 않았다는 말일까요?
실제를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식별이 필요할 때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실베스텔에게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식별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코의 인식 안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이심이 분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인도하신다고 생각한 것이지오
기도의 사람이란 시간적으로 기도를 많이하고
염경기도나 청원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와 대념을 많이 하고 그 신비를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이 하느님과 자주 대면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겁니다.
모세는 만남의 천막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
거기서 구름 속의 하느님과 자주 대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알고 옳게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도 옳게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김찬선신부-
7월 31일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그런데, 가만! 방금 들었던 '하늘 나라 - 보물' 비유 공식에 비추어 본다면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와 같다'고 해야 할 듯한데, 그게 아니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좋은 진주"가 아니라 "상인"에 비유하신 겁니다.
하늘 나라는 보물이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라면, 우리는 그 보물의 발견자이고 좋은 진주가 됩니다.
모세가 주님 앞에 머무를 때는 너울을 벗었다고 합니다. 주님과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 맨 영혼의 민낯을 숨김없이 드러내어도 괜찮은 사이기에 그랬을 겁니다. 주님과 모세는 서로에게 활짝 열려 있는 사이입니다. 서로를 찾고 대화하고 사귀는 사이입니다. 이는 조물주와 피조물이 맺는 최고 경지의 친밀감이 아닐까 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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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찾고 별견하는 것은 상인의 몫으로 나타납니다.
즉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 상인은 하늘 나라로 가라지의 비유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포기한 그가 가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육화와 그분의 생명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화와 생명의 내어주심으로
예수님께서 얻고자 하셨던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구원,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다시금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김명겸신부-
7월 30일 화요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마태오 13,36-43)
밀과 가라지가 싹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 서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밀알이 되도록 항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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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는 가르치는 이에게는 의도적인 정답이 있지만, 듣는 이 입장에서는 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빈번히 대두되는 두 가지 양상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밀과 가라지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보는 해석, 그리고 인간 안에 공존하는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을 가리키는 해석입니다. 둘 다 말씀을 만나는 이에게 의미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의 일과에도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리듬이 존재합니다. 백성들 틈에서 그들을 이끌고 가르치고 조정할 때와, 만남의 천막에 머물러 주님과 마주하는 시간이 공존합니다. 지상의 삶을 사는 한 인간으로서 이만큼 주님과 직접 내밀한 관계를 누렸던 이는 없었다고 성경이 증언할 정도로(신명 34,10 참조) 모세와 하느님 사이는 각별했습니다.
-오상선신부-
7월 27일 토요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오 13,24-30)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밀이고, 태어날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가라지입니다. 밀은 사랑할 줄 알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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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금요일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태 13,18-23)
성경을 읽으며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돌밭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비록 육체적이어서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지만 적어도 성경을 깨닫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라 그 기쁨으로 돌을 부수어가면 됩니다. 이들이 지속시키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읽어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는다고 기쁨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해석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기쁨을 잃게 만드는 것이 육체의 욕망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기쁨이 지속됩니다. 아직은 말씀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육체의 기쁨이 더 크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돌밭과 같습니다.
가난이 기쁘게 보이면 비로소 말씀이 우리 안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쁨을 주는 것은 말씀이고 그 기쁨을 빼앗는 것은 삼구(교만 – 육욕 – 소유욕)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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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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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금방 알아듣는다고 해서
남들보다 하늘나라에 더 쉽게, 더 빠르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좋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천을 해야 들어갑니다(마태 7,21).
신앙생활은,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머리가 좋거나 나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실하게 실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을,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
즉 ‘삶’이 아니라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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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지닌 것이며 지금의 상태,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많은 결실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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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씨를 왜 이렇게 뿌리실까 ?
저 같으면 씨를 가시덤불이나 돌밭에 뿌리지 않을 것이고
길바닥에는 더더욱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저는 멍청한 농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무 데나 씨를 뿌리는 분이시고
당신의 귀중한 말씀의 씨를 낭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본래 낭비가 많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하느님은
우리 눈에 주지 말아야 할 놈에게도 벌이 아니라 사랑을 주시고,
주실 뿐 아니라 퍼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말씀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근심걱정 때문에 말라죽게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제는 기도를 합니다.
근심걱정만 하던 사람이 이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근심걱정만 하던 사람이 이제 근심걱정꺼리를 하느님 앞에 풀어놓습니다.
숨 막히게 하는 저 근심걱정꺼리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그것들 치우시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열매 맺는 땅이 되게 하십니다.
마구 그리고 계속 씨 뿌리시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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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가 있어야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서신 것도 이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닐까요? -조명연신부-
7월 25일 목요일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20,20-28)
사람에게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이것이 십자가이고 그리스도께서 마시려는 잔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과 같아지려하였습니다. 불순종을 통해 높아지려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타인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일 줄 아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인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이 진리이시고 옳으신 분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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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
7월 24일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마태오 13,1-9);
예수회의 안소니 드 멜로 신부는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70세가 된 오늘은 오직 하나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청합니다.”
나의 가장 내적인 곳에는 ‘욕구’가 있습니다. 가장 외적인 곳은 ‘말과 행동’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을 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욕구에서 말과 행동이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본성에 관련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변하고 싶다면 행동을 변화시키려하지 말고 욕구를 변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 행동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켜야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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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 씨를 뿌렸는데,
나중에 보니 어떤 땅은 길이 되어 있었고, 어떤 땅은 돌밭이 되어 있었고,
어떤 땅은 가시덤불이 되어 있었다.
길, 돌밭, 가시덤불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고,
좋은 땅으로 유지된 곳에서만 많은 열매를 맺었다.”
농부가 씨를 아무렇게나 뿌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면서 정성을 다해서 좋은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그랬는데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좋은 땅이 길, 돌밭, 가시덤불로 변했습니다.
처음에 세상을 만드실 때,
하느님께서는 ‘좋은 세상’과 ‘좋은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랬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고, 카인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라고 만드신 것은 아닌데, 하느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인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에도 ‘좋은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배반자가 되라고 유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유다 자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연결해서 생각할 일은 아니고,
‘나의’ 선택에 관한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나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직접 뽑으신 왕입니다(1사무 9,17).
왕으로 뽑힐 때만 해도 사울은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나중에 당신이 하신 일을 후회하셨습니다.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11).”
‘후회’는 ‘전지전능’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가 그럴 줄 몰랐다.” 라는 뜻의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울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사용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사울은 ‘좋은 땅’에서 ‘돌밭’으로 전락한 경우입니다.
젊은 시절의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비들과 후궁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1열왕 11,3).
< 태어날 때부터 성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성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면서 자기 스스로 악의 길로 걸어가기 때문에 악인이 됩니다.
좋은 땅도 방치하면 황무지로 변하고, 나쁜 땅도 잘 개간하면 옥토가 됩니다.
성인이 거의 다 되었다가 추락하는 경우도 있고,
악인으로 살다가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만하지도 말아야 하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송영진신부-
7월 23일 화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뜻’은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뜻에 갇혀 살아갑니다. 내가 육체의 뜻을 선택했다면 그 육체로부터 오는 ‘땅’에 갇혀 살아가고, 내가 하늘의 뜻을 택했다면 ‘하늘’에 살게 됩니다. 육체는 지옥의 본성이고 영은 하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살게 되느냐, 사탄의 본성 안에서 살게 되느냐는 내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선택했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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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폐5,8).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5,1).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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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하느님께서 왜 이 사람을 내게 보내셨는지,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실지 의식치 않을 때는
늘 그가 제 마음에 들고 내 뜻대로 하는 사람이기를 바랐지요.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랑이 강렬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그를
늘 의식하고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않고 그에게 맞추며 그의 뜻을 따릅니다.
사랑의 의지,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의 의지가 있어야
아버지의 뜻을 언제나 실천하는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오늘 이 새벽입니다.
-김찬선신부-
7월 22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그분이 자신 앞에 서 계심을 알게 됩니다.
-염철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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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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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 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조욱현신부-
7월 20일 토요일
그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니.(마태 12,14-21)
7월 17일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오 11,25-27)
‘교만’이 물을 물로, 산을 산으로 못 보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항상 ‘어린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이란 것이 아직 어린이의 눈을 흐리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전문가들이라 자처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사제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드님을 못 알아보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의 가장 큰 지혜는 어린이와 같이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이가 지니고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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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반영억신부-
7월 16일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마태 11, 20-24)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믿음을 부어주어도 믿음이 담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저주받은 도시들처럼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내 안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전에 그 믿음을 담을 그릇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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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파라오 같은 사람을 만나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 때 더 강해지나 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참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신앙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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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사람은 결국은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부탁하는 것도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주님께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강한 사람입니다.
-조명연신부-
7월 14일 일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5-37)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누군가의 이웃이 되고, 벗이 되어 주는 것은 귀와 머리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는 말씀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실제로 육화되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자비를 베푸는 것는 사랑이며 자비이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분을 대신하면서 결국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 아타나시우스 교부는 신화(神化 Deificatio)를 이야기하며 "사람의 하느님됨"의 진리를 엿보게 해주었습니다.
-오상선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비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그것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서간을 빌려 이야기 한다면(2.14-17 참조) ‘실천없는 자비는 죽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영적 물질적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이 자비를 살아있도록 만듭니다. 자비는 보기 위해서 눈을 가지고 있고, 듣기 위해 귀를 가졌으며 일으켜 세워 주기위해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함으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실천하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무엇인지 아시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1.14).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7월 12일 금요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오 10,16-23 )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나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놓고 나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의 마이크가 되어드리면 됩니다. 마이크로 말하는 이가 두려울 수는 있어도, 마이크가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자신의 저서에서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떻게 버티어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도관들이 윽박지르며 온갖 욕설을 쏟아낼 때도 내 머리엔 시와 이미지가 물밀 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난 자유롭고 행복했지요. 어떤 죄수들은 철조망을 뚫고 탈출하려 했지만, 내겐 어떤 철조망도 없었거든요.”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10년간의 경험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하여 그 기억을 바탕으로 ‘수용소의 군도’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과 나중에 이것을 통해 쓰게 될 자신의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나로부터 탈출하여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만을 바라게 될 때 지금의 고통으로부터도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업적도 남기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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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목요일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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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삶이 복음의 참된 기쁨입니다.-한상우신부-
불교 용어 중에서 탐진치(貪瞋癡)라는 말이 있습니다.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라는 세 가지 번뇌를 일컫는 말로, 곧 욕심 부리지 말고, 화내지 말고,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번뇌가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화내지 말고,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작은 실천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7월 10일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돈이 많으면서도 굶어 죽는 이들이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처지가 그럴 수 있겠습니다. 기적의 힘을 지니고도 믿지 못하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먼저 생각하니 그 믿음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실제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우리가 어렵고,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울 때 도래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과 진정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이다(M. 스캇 펙).
7월 8일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오 9,18-26)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비롭습니다. 인간이 이웃에게 자비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자비를 받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말과 생각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대로 행동해주십니다. 죽은 이를 위해 곡을 하는 군중들을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죄가 사람을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죠?”라고 물으면 신자분들은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이 숨겨놓은 과일을 먹었다고 해서 호적에서 파버리는 부모님이 계신가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쫓겨난 실제적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숨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판단해놓은 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반면 자아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는 이의 특징은 이웃도 심판하고 하느님도 무서운 분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보며 아드님까지 우리를 위해 죽이신 하느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아야합니다. 그 자비를 깨달았다면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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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목요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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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게 쓰레기를 주고서는 차를 타고서 재빨리 도망을 칩니다. 이때 쓰레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쓰레기를 하나하나 꺼내서 분석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럴수록 화가 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끝입니다. 남의 말이 쓰레기라고 생각되면 그냥 버리십시오. 분석하지 마세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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