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0년 1월

Margaret K 2020. 1. 1. 21:39


2월 25일 화요일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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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9절의 아담아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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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말씀에서 “첫째가 되려면”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라는 뜻입니다(마태 18,3; 마르 10,15).
따라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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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월요일

그 뒤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예수께서 대답하셨다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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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여기서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망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그는 믿음과 동시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겸손으로 도움을 청합니다이는 마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저를 더 더 더 믿으십니다그러니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그 믿음으로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주님의 믿음에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의탁함을 말해줍니다이는 주님의 믿음에 대한 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벙어리귀머거리 영아내가 너에게 명령한다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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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치유되고
기도로 소통됩니다.

치유와 소통은
언제나 한결같이
주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예수님 
활동의 중심또한
기도였습니다.

깨어있는 삶이
믿음이며
기도입니다.

믿음은
삶의 본질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삶의 본질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기도는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되찾아줍니다.

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소통하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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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일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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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전례>는 완전한 사랑’ 곧 완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1독서>인 <레위기>에서는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고 하시고, <복음>인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하십니다. ‘완덕에 대한 이러한 말씀은 <루카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먼저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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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은, ‘사회악’입니다.
우리는 사회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그렇지만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으니까,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 구현’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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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과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나’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를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나를 극복하는 힘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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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보았습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서운할 때도 있지만 안 하는 것보다 행복하고 후회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이라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사랑은 바로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편견 없는 사랑이고 그 사랑의 깊이도 주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키엣 대주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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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끈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더라도 조심히 풀어나갈 때 소중하고 기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끈은 자르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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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렁이를 죽이려고 한 번 발로 밟았는데 죽지 않고 꿈틀거린다면 그냥 포기하고 지나갈까요? 죽을 때까지 밟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때문에 아파하는 지렁이를 보면 죄책감이 더 들기 때문입니다. 혹은 ‘어, 이게 안 죽네?’라며 안 죽는 것을 반항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밟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려 했는데 죽지 않으면 더 미워져서 끝장을 내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죽어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선이 죽고 악이 승리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내가 죽을 때 드러납니다. 선이 드러나면 악도 함께 밝혀지게 됩니다. 어쩌면 죽으려하지 않는 내가 선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악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억울함을 제일 많이 겪은 사람은 요셉일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느낄 때,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의탁하십시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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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지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왔습니다그러나 겉옷 자락을 자른 후에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24,7) 다윗은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시기 질투욕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다윗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으십시오.”(로마12,17)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3)“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3,9)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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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토요일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너는 행복하다 ...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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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리스도께서 예언자셨다고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사람은 예언자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라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니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성체자격시험을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 먼저 “성체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성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대로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성체를 영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저는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만약 “예!”하면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자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면 그 믿음에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나도 하느님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합니다. 이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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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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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시는데, 첫번째는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인 삶,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번째 조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이해한 듯 합니다.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 2장 20절)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셔야만 하는 길인 동시에 명백한 죽음이 예고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을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악한 자들을 참아내되, 그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교부)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대가 그분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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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그렇습니다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일입니다그런데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그것이 참된 것이고자신이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결국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느냐보다무엇을 채웠느냐에 달려기 때문입니다그것은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그러기에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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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아이다.

이 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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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목요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8,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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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빛, 밤이 없는 낮,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들은 이유는 이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고백하지만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생각은 삶의 이치에도, 하느님의 뜻에도, 구원의 신비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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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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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수요일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마라.”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마르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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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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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눈이 먼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온 이웃을 보았습니다그 사람들은 눈이 먼 사람의 고통을 보았습니다눈이 먼 사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눈이 먼 사람과 함께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을 가진 이웃을 보았고눈이 먼 사람의 눈을 치유해 주셨습니다표징은 욕망과 시기가 만나면 결코 드러나지 못합니다표징은 사랑과 사랑이 만나면 드러납니다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사랑의 눈을 가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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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를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 주신 것처럼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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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화요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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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에 더욱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빵들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빵은 한 개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빵들’과 ‘빵 한 개’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인 빵들을 챙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 안에 빵 한 개가 남아 있던 것일까요? 도대체 그 빵은 무엇일까요?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먹는 빵이었다면 제자들이 “빵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빵이 한 개밖에 없다.’ 하고 서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빵 한 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두고 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께서 바로 누룩 없는 빵 곧 파스카 음식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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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저는 빵 일곱 개를 교회의 7성사로 보고 싶습니다. 7성사는 분명 우리 자신의 옛 본성을 죽이고 하느님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힘입니다. 그리고 7성사의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이상의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히 하느님 자녀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이러저러한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진전이 없을 것입니다. 행동은 바뀌었겠지만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참다운 하느님 백성은 믿음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성체성혈로 자신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은 1년 뒤에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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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 8,17)
그들에게 거듭 질문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가르침을 주실 수는 있으나 깨달음은 그들 몫입니다. 완고함은 나쁜 맘을 지어먹고 타인을 해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악행은 아니어도, 자기 틀을 고수하여 진리를 거부하고 선의 흐름을 막는 악이 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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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마르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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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좋은 의도만 있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표징이 부족한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표징자체이십니다. 표징자체이신 분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다 키워놓았더니 아이가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것을 증명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 우리 양식이 되게 해 주신 생명의 양식 앞에서 “당신이 아버지인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운전할 때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목적지를 표시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수많은 표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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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일요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17-37)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집회서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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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자유는 책임이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복제품과 같은 기계가 아니라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되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뜻대로 자유를 남용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가치인 계명을 우리는 양심에 새기고 그 법에 의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은 ‘사랑’입니다. 

-키엣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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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유럽의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데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됩니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과정을 정리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아렌트는 처음에 아이히만이 냉철한 게르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보이는 그냥 평범한 인물인 것에 놀랐습니다.

      재판 때 15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는 단 하나의 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책임을 지는 위치가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하급 공무원으로서 출세를 위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수행한 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 붙였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그 시스템 안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부제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나 아렌트가 본 그의 가장 큰 죄는 바로 ‘악한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도 사람은 항상 어떤 시스템 안에 속해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악한 시스템인지 선한 시스템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선원이 한 배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이 꺼리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왜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사형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 배가 해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시스템은 과연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자칫 아돌피 아이히만처럼 심판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독일의 정체를 몰라서 그 지경이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 자아의 정체를 모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악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이제 주님의 목소리만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 시스템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시스템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늑대라는 본성과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익히지 않은 살코기를 좋아하며, 네 발로 걷고, 옷은 찢어버립니다. 이 욕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연습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자신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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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합니다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입니다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합니다우리 마음이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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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은 율법주의나 전통적인 관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엄격한 것 같지만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은총에 의해 그를 실현할 수 있는 힘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로마 8,2-4 참조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

즉 그분의 가르침은 하고자 하는 본성적 능력만이 아니라 원의 그 자체와 원의의 활동까지도 도와준다.”(성 아우구스티누스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in PL 44,359)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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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토요일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르코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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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사흘”입니다.

진정으로 빵의 은총을 얻고 참생명을 누리려면 ‘사흘’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정신이 없으면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신다 하여도 참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비로소 빵의 은총에 더하여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찬 은총 또한 누릴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일곱 광주리의 은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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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빵 7개로 광야에 나온 백성 4천 명을 먹이고도 7광주리나 남은 기적을 보여줍니다. 

누가 봐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탈출기에서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으로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7은 창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광야로 나온 당신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가나안이라는 안식으로 이끄십니다.


 이 과정에서 광야에 나온 백성의 자격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대책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사흘 동안이나 광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 없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당신 백성으로 창조되지도 않았을 것이란 말도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들입니다. 생계걱정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이 생계걱정이 우리가 참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데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 모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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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시선을 보았습니다하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일로 대하는 제자들의 시선입니다사람들을 일로 여기는 제자들은 먼저 걱정이 앞섭니다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일로 여기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 만나면 놀라운 표징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만나니 놀라운 표징으로 나타났습니다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나눔의 삶이셨습니다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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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지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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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그러니 그들은 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에게는 이미 그 이 있습니다곧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관상의 눈입니다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이제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말씀을 나누는 일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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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금요일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르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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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손을 얹는 행위는 축복을 주는 예식과도 같은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얹는 대신 당신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셨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열려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성령’과 관련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령의 상징으로,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물, 기름부음, 불, 구름과 빛, 안수, 손가락, 비둘기, 숨 등을 들고 있습니다(694-701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병자를 치유하셨지만 어쨌든 그 힘은 당신 몸에서 나오는 성령의 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당신 죽음을 통해 나오시는 힘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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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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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하신 것이다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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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목요일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어서 돌아가 보아라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마르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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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페니키아의 여인은 아픈 딸이 있었습니다그녀는 지혜와 재물과 권력이 없었습니다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라는 연줄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 보아라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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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아멘.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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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수요일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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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수준은 자신의 나쁜 생각을 어느 정도나 통제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따라서 마음만 통제할 수 있다면 생각도 통제되고 그러면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으로 다양하게 말씀하시지만, 이 모든 것은 세속-육신-마귀의 삼구로 통합됩니다. 그리고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는 단 하나인 ‘자아(ego)’라는 원천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통제하려면 자아를 통제하면 됩니다.

      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대화했던 뱀을 자아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와 고통이 들어온 것은 하와가 뱀을 뱀으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도 어쩌면 우리 자아를 좋은 것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아는 오직 믿음의 발로 밟아야 통제됩니다. 저는 최대한 자주 “저는 죽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입니다!”라는 기도를 반복합니다. 이 기도 안에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는 말을 제 나름대로 짧게 만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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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코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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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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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의 삶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바른 것은 이야기하지만 그른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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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는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산의 정상에는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고그 아래에는 주님의 기도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앞날을 생각하며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주님의 눈물 성당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화려한 황금색의 사원이 보입니다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걸 기념하는 사원입니다그 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바위라고 합니다유대인들은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전 무너져 내린 성전의 벽이 남아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가톨릭은 그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이라고 합니다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라고 합니다같은 장소에 유일신을 믿는 3대 종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었고지금은 한 지붕 세 가족이 평화의 도시에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솔로몬의 성전도예수님의 무덤도무함마드의 승천도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겁니다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일까요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그것만이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향해 나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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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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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월요일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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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 청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신 것 같지만 안 들어주시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안 들어주셨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 자비와 만나면 더 부정적으로 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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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옷자락 술’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면서,
옷자락 술에 사람들이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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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다니며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6,55).
그들의 앎이 매우 역동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연민을 가졌던 지방 곳곳의 병든 이웃들에게 지금 누구보다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부치고 발 벗고 나서서 구원이 필요한 이와 구원자의 만남, 접촉을 주선합니다.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 청하였다"(마르 6,56).
그들은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래서 알아본 그분께 직접 청을 드립니다. 자기 이익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병들고 아프고 고통 겪는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주님께 간청을 드리는 겁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결과가 참 아름답지요! 그들의 관심과 수고로운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제 일처럼 감응하며 희생을 바친 그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알아본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이들로 해서 예수님의 현존이 더욱 빛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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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병자들이 치유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병과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몸 차원, 마음 차원, 정신 차원, 영혼 차원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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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일요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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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사명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빛의 밝힘으로 세상이 의미를 가지며, 어둠을 넘어 서로의 정체를 깨닫게 해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는 말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향력을 보이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향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다. 소금은 음식의 참맛을 낼 뿐 아니라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맛과 빛으로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영향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영향력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신학자 한스 큉은 “사제들이 교회를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면, 신자들은 세상을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파견된 모든 분야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야 ‘참행복 선언’이 완성되며 세상의 복음화가 이뤄진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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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소하고 외딴 길을 갈 때, 저 멀리 불빛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면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고마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고 등경 위에 올려진 빛이기에 모두에게 가시적으로 공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16절) 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요구는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어줌을 통해서 가능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9-10절)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10절)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변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산위의 고을이나 등경 위의 빛처럼 드러내 보이는 이들일 뿐입니다.

-김혜윤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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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질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의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감정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해 낼 수 있을까?’,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발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이젠 나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이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나오는 행동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때 드러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 그 전에는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즈카르야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고 말한 것은 의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습니다.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했더니 성모님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믿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세상에 빛을 전해 주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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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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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토요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마르 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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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한재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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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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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열왕기가 시작되고 다윗에 이어 왕이 된 솔로몬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청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솔로몬은 다른 것을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듣는 마음이란 열린 마음입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만 있으면 열린 마음으로 좋은 얘기를 다 들을 것이고,
그렇게 잘 들어주면 좋은 얘기를 해준 사람들은 나의 우군이 될 것이며
그들이 해준 얘기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해준 얘기가 다 좋은 얘기이냐 그것인데
좋은 얘기인지 나쁜 얘기인지, 옳은 얘기인지 그른 얘기인지
분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한 다음 이어서
분별력을 주십사 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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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마르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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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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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겁니다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목적을 알았다면 충직하게 걸어가는 겁니다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고열반의 길입니다.


진복팔단(眞福八端)에 대한 해석을 읽었습니다성지순례에서 진복팔단 성당을 다녀왔기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야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보았듯이진복팔단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사다리와 같다고 합니다사다리는 아래부터 밟고 올라가야합니다첫 번째 칸은 비움입니다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사다리를 오를 수 없습니다두 번째 칸은 회개입니다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다리를 오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칸은 온유함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원망하는 사람은 사다리를 더 이상 오르지 못합니다가난한 사람우는 사람온유한 사람은 이제 더 높은 칸으로 오르게 됩니다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기꺼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게 됩니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옳은 일을 하고정의를 위해 헌신합니다햇빛이 공평하게 비추듯이비가 공정하게 내리듯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입니다참된 평화를 얻은 사람은 박해와 시련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받아들입니다이것이 진복팔단의 사다리입니다사도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하느님께로 나아갔습니다순교자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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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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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8).
이 말씀 안에 다윗의 정체성과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무수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 안에 성군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부족한 이의 이 "사랑"을 귀하고 애틋이 보아 주신 하느님 덕분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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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간음죄를 덮으려고 살인죄를 지었고

헤로데는 잘못을 들춰내는 요한을 죽였지요

사실 죄를 덮으려는 것은 이 둘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공통적인 거지요

죄는 씽어서 버리든 치워서 버리든 버려야 하는 것인데

덮어버니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남는 거지요


그래서 다윗과 에로데는 덮으려고 했덕 것까지는 같지만

다윗의 끝는 회개이고 그 헤로데의 끝은 여전히 죄인 것이 차이입니다.


시작은 같은데 결말이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느님 앞에 서 있고, 헤로데는 인간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다윗은 죄를 뉘우치고 씨서주십사고

청원기도를 할 뿐 아니라 씻어주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바침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재물이 없는 가난과 욕심이 없는 것도 가난이지만 실은

죄와 근심 걱정을 다 취워버리고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순결과 가난은 이렇게 통하고 일치합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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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목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마르코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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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도저히 그 명령을 따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명령을 철저히 따랐고,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금은 부자 청년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더욱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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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실 때 힘을 넣어 주셨던 ‘지팡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라는 무기를 주시며 파견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치 빛처럼 어둠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까요? 악착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인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쳐 이겨야 합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무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잃느냐면 재물에 집착할 때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혹은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일 때도 잃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 욕구이고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성령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막대기도 있었지만 ‘매끄러운 돌 다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7,40 참조). 막대기는 분명 지팡이, 즉 성령님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꺼지는 경우는 육의 욕망에 넘어갈 때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지팡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육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통제력도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조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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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여행을 떠날 때에는 보따리가 큽니다그런데 자주 여행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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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지요진정이 말씀의 지팡이의 권능에만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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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경우 선교하러 가라, 복음 선포를 하러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고 들러붙어 앉아 있고,
고통이 조금만 닥치거나 누구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게 되면 같이 살 수
없으니 떠나겠다고, 공동체를 바꿔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지요.

그런데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그중에서도 떠남과 머묾에 있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다 할 것입니다.


 ‘빈손’으로 떠난 사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인도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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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제 이 세상 삶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길이 끝나면 천국의 나그네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나그네 길은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걸어온 나라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시므온처럼 두려움 없이 평안히 떠나는 것이
이제 마지막 길의 관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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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수요일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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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내 마음대로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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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곧 자신들의 고정관념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결국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리하여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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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로 표기하고 있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내적인 것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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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의 크기가
자아의 크기입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갇힌
우리들의 무지를
깨우십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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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인구 조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행정인데 왜 그것이 죄가 될까요? 이스라엘은 왕정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신정 체제, 곧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는 독특한 혼합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사제의 역할이 중요했지요.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 현존과 그분 능력에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백성의 수는 곧 병력이니, 이스라엘의 힘은 더 이상 이 백성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백성의 수와 전술과 전투 능력에 달리게 되지요.

놀라기를 거부하고 계산과 예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은 변두리로 밀려나 버립니다. 적정한 오차 범위 안에서 기쁠 일도 실망할 일도 없는 데이터 의존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다윗의 죄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대해 하느님께 경탄과 경외 드리기를 멈추고 그분을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 시편 139,14).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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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코 . 5,21-43)

 

환자가 의사에게 치료법을 말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고쳐달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회당장은 치료 방법을 이야기하지요. 즉, 아이에게 손을 얹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이가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회당장의 믿음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그를 따라나섰던 것이지요. 하지만 집에 가는 도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바로 이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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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규정에 따르면그녀는 피 흘리는 부정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만지게 되면 그 사람마저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그러니그녀는 감히 이러한 금기를 깨어버릴 만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곧 군중에 섞여들만큼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만큼 믿음이 굳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리아의 에프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열하던 여인의 숨은 상처와 고통을 통하여 당신의 치유능력이 선포되었으니숨어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은 영광 받으소서눈에 보이는 한 여인을 통하여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게 되었습니다아드님의 치유능력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신성이 드러났고하혈하던 여인의 치유로써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여인은 주님을 선포하였고주님과 더불어 여인도 영예로워졌습니다여인은 신성의 증인이었고주님은 여인이 지닌 믿음의 증인이셨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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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와 그의 딸이 그 뒤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수명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고,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장수를 누리든지 누리지 못하든지 간에 의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병을 고친 다음에는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저쪽 세상에 새 인생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절망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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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마르 5,25).
하혈은 이스라엘에서 부정한 현상입니다. 게다가 열둘은 완전한 숫자이니, 그녀는 이 병과 함께 공동체에서 움츠러들며 소외로 지쳐갔을 것입니다. 그녀로선 밀쳐대는 군중 가운데 섞여 있다는 자체가 큰 모험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입니다.


"저분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그런 그녀가 감히 이스라엘의 남성 예언자에게 손을 대려고 다가갑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예수님은 그녀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영혼과 육신에 생기를 되찾아 주십니다. 믿음을 칭찬하심으로써 삶의 의욕과 더불어 미래의 생명까지 북돋아 주십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이번에는 예수님이 열두 살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이 기적에는 딸의 죽음 앞에서 심장이 무너나고 존재가 부서지는 고통을 믿음 한 조각 부여잡고 견딘 회당장의 공로도 한몫 했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앞서 치유받은 여인의 투병 기간과 같은, 완전한 숫자 열둘입니다. 그네들의 생명은 오늘의 이 놀라운 기적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을까요? 소녀는 살아온 세월에, 아버지 믿음과 예수님의 손길이 더해져 더 싱싱하고 푸르른 생명을 선사받았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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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르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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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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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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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나왔습니다그것은 큰 은총입니다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질투분노적개심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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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일요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40)


교회에서 말하는 가난은 외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입니다. 부자라도 지금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구’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들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욕구이고 그 욕구에 동의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까지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그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 자신의 욕구와 싸우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봉헌이고 자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도와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런 자선이나 봉헌은 의미가 없습니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필요해서 봉헌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소유욕을 줄이라는 뜻으로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봉헌은 그 욕구를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드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당신을 떠나시려 할 때 성모님은 붙잡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밑에서까지 “주님의 뜻대로!”를 외치십니다.

      이 아드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이미 오늘 성전에서 예수님을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내어주신 봉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서 그만큼 고통스러운 이유는 평소에 온전히 주님께 봉헌해드리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봉헌의 연습이 잘 된 사람은 무엇을 잃어도 “주님 뜻대로!”를 외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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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머리에서 가슴까지가슴에서 발까지의 긴 여행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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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나타내고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냅니다.”(암브로시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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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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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예수님의 봉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봉헌이었지만,
십자가에서 그 봉헌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봉헌의 절정에, 또는 완성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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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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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토요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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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욕을 듣는다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화가 치민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면 배가 위험에 빠지고, 그대 마음도 위험에 빠져 일렁입니다. 욕을 들으면 그대는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즐기면서 복수를 했다면 그대는 파선한 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대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대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깨우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우고,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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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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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회개와 믿음입니다다윗은 비록 잘못을 하였지만 회개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다윗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용서하십니다아무리 큰 잘못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시면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워하고겁을 먹었습니다삶의 시련과 고통 앞에서 무기력해 졌습니다.

 

한 학생이 했던 묵상이 생각납니다풍랑에 겁을 먹던 제자들을 묵상하면서 그 학생은 자신도 예수님 옆에 누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편안해지고겁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쩌면 다른 것들을 더욱 신뢰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자존심욕심재물명예와 같은 것들을 따라가면우리는 언제나 삶의 풍랑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주님과 함께주님 곁에 있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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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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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그러니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믿음이 곧 평화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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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내어맡김의 
이야기입니다.

바람과 호수에서
우리를 이끌어
고요와 믿음을
체험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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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의 죄가 탄로났을 때 다윗은 자기가 죽인 우리야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실토하고
죄를 짓고 난 뒤에 지었다고 얘기되는 시편 51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그래서 이제는 죄를 숨기지 않고 앞에 들고 당신께 가오니
자기 죄를 히솝의 채로 깨끗이 그리고 눈같이 해달라고 하며
"당신의 눈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소서."라고 애원합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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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금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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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인 까닭입니다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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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식물의 성장 과정을 인간들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먼지처럼 아주 작은 씨앗 안에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비유입니다.
그 생명력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 앞에서 겨자씨보다 작은 존재이고,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놀라운 생명력이 숨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오로 사도입니다(1코린 15,8-9).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라고 말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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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목요일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마르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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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것을 비추는 등불처럼 신앙인들에게 이웃과 세상의 참된 모범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강조되고는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등불이 빛으로 주위를 비춘다는 사실에만 치우쳐, 그 등불 자체가 빛을 낸다는 고유한 성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등불은 그 자체로 빛납니다. 
빛은 빛을 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비추지요. 

.세상의 잣대를 따르기보다, 각자의 고유하고 소중한 모습을 제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 나가는 길, 그것이 신앙이고,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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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읽은 것의 10%, 들은 것의 20%, 본 것의 30%를 기억합니다. 보면서 들은 것은 50%를 기억합니다. 들은 것의 20%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남에게 말하며 가르치면 80%를 기억하고, 행동하며 말하며 가르치면 90%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가르치면 무엇이 좋을까요? 더 많이 알게 됩니다. 많이 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기 때문에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땅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씀의 씨가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누군가가 따먹어야합니다. 바로 이웃이 따먹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아 나의 삶을 바꾸어놓은 진리가 있다면 그 열매를 이웃에게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나에게서 맺은 말씀의 열매를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30배 맺히던 것이 60배, 100배가 맺게 되겠지만, 전하지 않으면 다시 세상 욕심과 육체의 욕망, 혹은 교만에 사로잡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으로 전락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완전하지 못할 때도 제자들을 계속 파견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워야합니다. 배우기만 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혼자 수련을 한다고 해도 깨달음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르치면 어렴풋하게 알던 것을 명확히 알게 되고 또 모르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 알려주십니다. 더 가지려면 더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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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길이 더러워집니다물이 됩니다눈 속에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겠는지요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봄이 옵니다눈이 녹으면 날이 따뜻해지고 곧 봄이 온다는 아이의 생각이 놀라웠습니다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따뜻하게 보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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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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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수요일

“자들어보아라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코. 4,1-20)


어찌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과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버린 말씀의 씨앗은 온갖 역경에 내던져진 가엾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씨앗에게는 크나큰 상처일 수 있겠지요.교회의 역사 속에 열매 맺지 못한 말씀의 씨앗도 있었지만, 말씀은 끊이지 않고 우리 신앙인의 삶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말씀은 길과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 뿌려졌고, 그런 말씀의 아픔들이 있었기에 어딘가에 열매를 맺는 말씀의 기쁨들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아픔 속에 아파하는 이들 덕택에 오늘의 신앙이 따사로운 햇살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씨앗 옆에 숨 막혀 죽어 가는 씨앗들이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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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용서받지 못하게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 들을 귀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열두 사도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끄십니다. 지식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교만을 죽여야 하고, 돌밭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육체와 싸워야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비유의 해석은 다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식은 원했지만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 스승으로부터 배울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리스도로 보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로 보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성체로 보이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생명의 물을 주시는 바위가 그리스도로 보였습니다(1코린 10,1-4 참조). 탈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신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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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보면 돌밭이나 길이나 가시덤불은 바뀌기는 힘든 것이다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돌밭이 기름진 땅이 될 수도 있고길도 사람이 지나가지만 않으면 풍요로운 밭이 될 수 있으며가시덤불도 걷어 내면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지 않으셨을 것이다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그래서 세상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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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허물어져 가는 당신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쳐달라고 하셨을 때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에 있는 성당 셋을 고쳐드렸는데
주님께서 고치기를 더 원하신 것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쪼개진 당신 공동체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었고,
흩어진 당신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가라는 것이었듯이
다윗에게도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집안이 성전이 되길 원하셨고,
다윗의 후손 중의 하나가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을 거라고 하십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저에게는 코린토 전서의 다음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궤가 이동 성전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이동 성전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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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화요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코 3, 33-35)


 마르코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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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코 복음 3장 33~35절)

 이 단락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백성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가 되어 한 가족을 이루게 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예수님을 중심으로해서 그분 주변에 둘러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영적 가족인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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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달이 누님이었습니다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자매요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 입니다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이나 지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악령이 들렸다(마르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주변 사람들도 기적을 믿었지만 그런 능력을 어디서 받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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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하시고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아버지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하십니다다시 말하면그들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함께 있되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실행하는 이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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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자매가 되는 것이다또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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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월요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마르 3,22-30)


 ‘예쁘게 말을 하니 좋은 사람들이 왔다.’의 저자 심희정씨는 ‘독설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옳고 그름이 명확했고 해야 하는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녀가 20년째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도 말을 예쁘게 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시도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웃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 보아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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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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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이라고 말합니다그러니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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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일요일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오 4,12-23)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선택하신 이유는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그 연민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사람답게 살기 바라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의 처지를 살피는 것에 지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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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들어줄 뿐이고,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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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안에는 자신이 옳고 자신이 최고라고 속삭이는 존재가 있습니다. 자아입니다. 자아를 믿게 되면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자아의 정체가 뱀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덜 믿는 사람일수록 진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자신을 어둠으로 보는 사람이 빛을 보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자신을 빛으로 보는 눈을 잃어야 참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입니다. 빛이시요 진리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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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라는 것은 삶의 태도를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여러분도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회개한다면 반드시 구원의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 “예수님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성경에서 회개했던 사람들의 실례를 잠깐 보겠습니다.

     아론은 미르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모습을 보며 모세에게 나의 주인님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저지른 죄의 값을 우리에게 지우지 마십시오미르암을살이 반은 뭉그러진 채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 저렇게 놓아두지 마십시오.(민수 12,10-12) 하고 애원합니다.

     다윗은 나탄이 꾸짖자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오.(2신명12.13)하고 고백하였습니다욥은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기42,1-6) 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구원은 당신의 것입니다.(요나 2,10)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번째 울 때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4,72)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느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죄인 중에 첫째가는 죄인(1티모1,16)으로 고백합니다이밖에도 방탕했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루카15,21) 세리 자캐오는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 먹인 것에 대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들은 많은 허물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하느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으로그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을 깨닫고 새 삶을 살았던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매일 매 순간 거듭나는 새로운 삶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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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토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5-40)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기 절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선한 행실로 빛을 내는 것이니, 정의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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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는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매일 죽을 수는 없지만 매일 죽는 것처럼 살 수는 있습니다. 만약 연습을 잘 한 사람이라면 죽음이 크게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시험이 두렵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을 시험 준비하는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결국 우리 삶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잠이 드는 순간과 같다고 말합니다. 묘비에도 “아무개가 열심히 살다 편히 잠들다.”라는 식으로 써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죽는 연습을 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잠이 드는 순간과 같다고 말합니다. 묘비에도 “아무개가 열심히 살다 편히 잠들다.”라는 식으로 써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죽는 연습을 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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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코 3,13-19)


 부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열혈당원 시몬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성질 급한 요한다혈질 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아니면 모르셨을까요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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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에 관해서 말할 때에, 그들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만 강조하고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기준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두 사도의 직업 같은 것을 먼저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열정, 사랑, 헌신 등을 보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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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쫓아다니는 사울 임금을 해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 24,7)

"어쨌든!"

조건이나 자질, 성품이나 의도가 어떻게 되어 있든지 간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독서의 문맥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로 정당화한 복수보다 하느님과 그의 관계를 우선하겠다는 다윗의 마음가짐이 표현된 말이지요.

얼핏 보면 사울 임금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존중 같지만, 그 깊이에는 사울을 선택하셔서 기름부으신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사울이 어떤 인간이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를 만드시고 택하신 하느님의 그 기대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왕 다윗의 겸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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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코 3,7-12)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1코린 1―2장;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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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의 핵심은 성변화입니다성변화의 핵심은 감사입니다예수님께서는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많이 가진 사람도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느님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감사의 제사로 채우리다.” 감사하는 마음으로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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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마르코복음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뿐만 아니라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사실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말합니다.

대체 왜 일까그것은 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아직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그때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십자가에서야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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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이 하느님의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모든 선이 나온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가난했던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시기에 대한
그의 독특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시기는 그저 인간적인 악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무신론적인 시기이거나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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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그들은 말문이 막혔다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마르3,1-6)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리고 믿는 대로 보이게 된다. 사랑에 조언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결국 자기 맘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확증편향’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증하려는 편협한 시각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시각으로 보기에 어떤 보이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의 믿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옳은 판단을 해도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기 이전에 나의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내가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다른 모든 것도 옳고 그름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성찰해보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이웃의 병이 치유되어 행복해지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옳다고 믿고 사셨던 것을 옳다고 믿고 살겠다는 마음을 굳혀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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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봉사의 손이요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진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자기를 위해서 움켜진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살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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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가운데 서라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그러니 우리는 분명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이제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손을 뻗어라.”(마르 3,5)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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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힘의 세기가 문제가 아닙니다죽이고 죽는 문제가 아닙니다세상의 것이 강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세상의 것이 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이 승리한다는 신앙입니다손이 오그라든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환자가 손을 펴는 문제가 아닙니다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라는 신앙입니다십자가의 순간에도 선을 행하는 신앙입니다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워 찾아다니는 신앙입니다.
-조재형신부-




1월 21일 화요일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이 지음받았을 때의 본성이자 욕구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장 참조).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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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모르고 율법만 지키려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하면 그 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법이 생긴 목적과 반대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칼이 인간을 해치는 용도로 쓰이게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사용할 때 그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합니다. 왜 율법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부터 율법은 존재했습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왜 생긴 것일까요? 그 율법을 어기면 결과적으로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그 죄책감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괜히 여자를 만들어주셔서 그 여자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율법을 잘 지켰다면 이웃을 심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존재하게 된 목적은 이웃을 심판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였습니다.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율법을 역이용하여 이웃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지켜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그 율법을 지켜서 주님께서 칭찬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켜야만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목적을 잃은 칼이 얼마나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기억해야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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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그것은 현대판 율법주의일 것이다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그것이 주일을 잘 사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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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마르2,18-22)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로 증명됩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청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보물인 성령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은총이고 새 부대는 그 은총의 가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것으로 감동하여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 부대는 성령 받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큰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紅海)’를 건너는 사건입니다(1코린 10,2 참조).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에서 부모의 피를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감사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모의 살과 피임을 믿을 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씁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은총, 혹은 성사의 은총이 하느님의 목숨 값임을 알아야 성사생활을 통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성체성혈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 값인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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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과 계명이 오래된 포도주였다면 십자가와 희생이 새 포도주입니다성전과 교계제도가 오래된 부대였다면 시대의 어둠을 넘어죽음을 넘어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한 사도들의 삶이 새 포도주의 삶이었고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가 새 부대였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삶이 새 포도주의 삶이었고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가 새 부대였습니다정결청빈순명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최상의 포도주입니다믿음희망사랑은 가장 안전한 새로운 부대입니다이것이 복음 삼덕이고이것이 향주 삼덕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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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기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그리고 사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사랑 실천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생명력과 생기와 활기가 생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그리고 사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사랑 실천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생명력과 생기와 활기가 생깁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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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잔치 안에서 한창 신랑이신 하느님과 사랑 중에 있는 영혼에게 인위적 비움이나 고행 같은 수단은 불필요합니다. 이미 목적지에 가 닿았으니,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이동 수단을 다시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혼인 잔치에서 그분과 나누는 희열이 곧 정화이고, 누리는 사랑이 곧 곧 비움입니다.
사람들 이목과 제도에 편승해 습관이 되어버린 단식은, 하느님께 날마다 새롭게 드려야 할 뜨거운 헌신과 열렬한 사랑을 배제한 요식행위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굶는 행위를 사랑처럼 합리화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의례와 규칙이 이 합리화를 돕기도 하지요. 사랑 없는 단식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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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무엘기는 기름 부음 받아 왕이 된 사울이
하느님 눈 밖에 나게 되는 사건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말렉을 치되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을 챙긴 것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왜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전쟁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악을 부스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하고 말씀하셨던 거지요.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죄악과의 싸움뿐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이웃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내야 하고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전쟁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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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일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34)


우리는 흔히 세례자 요한에게서 겸손을 배우려 합 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억지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자신을 자리매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려는 태도 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사 명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서의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 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올바로 자리매김합니다. 요 한은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 모시고, 그분과의 관 계에서 자신을 어디에 놓을지를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할 때, 하느 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 을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허상에 매달리 게 됩니다. 허상은 착각을 낳고 착각은 욕심을 낳게 됩니다. 허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허상에 기초 한 자기 파악은 하느님과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더 높고 화려해 보이는 자리를 탐하게 합니다. 잘못된 자기 파악이 잘못된 자리매김을 낳 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올 바른 관계가 깨어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의 관계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파악하고 자리매김하는 사람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 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올바른 삶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에 게서, 올바로 자신을 파악하고 자신을 자리매김하 는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기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 는 살고 있습니다

-송창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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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세계적인 인권사회운동을 펼쳤던 펄 벅(1892~1973)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치른 값이 얼마인데요. 나는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 지금 이 나이를 누리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매일매일 번제물로 우리 대신 봉헌되시는 어린양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주님의 일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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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 시골마을에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커브가 5개나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커브를 틀었고 이제 곧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길 한 가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경적을 울렸고 아이들은 재빨리 길가로 피했습니다. 한 아이만이 신발이 벗겨진 채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피하던지 절벽으로 차를 몰아붙이던지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을 하였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비탈에 차를 세워둔 버스 기사는 황급히 뛰어내려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탓했습니다. 운전 실력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이라며 심지어는 고발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버스 기사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죽는 편이 낫습니까? 저 운전기사는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흑흑!”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을 받은 분이셔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받은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라고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씻겨야 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일까요? 새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버려야 하는 인간의 옛 본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알게 되면 기어 다니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고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옛 본성에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믿음을 주어 옛 본성을 정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벗겨버리는 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느님의 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옛 본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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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읽고 있습니다종교윤리철학영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가 있었고현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현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했습니다들의 고민과 성찰은 종교가 되었고윤리가 되었고철학이 되었고영성이 되었습니다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인터넷의 시대에도 현자들의 고민과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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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은 아니고, 죄로 인한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어도 인간 세상의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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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고 소개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은 단순히 희생제물로 바쳐질 어린양이 아니라,하느님을 인간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중개자요 인간의 죄를 제거함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십니다. 

-고인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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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신앙은 관계의 예술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예술 작품의 작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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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면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굳이 행동으로 자신을 하느님처럼 높이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지 못하니 이런저런 행동으로 하느님 자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집중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주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은 무시하시고 죄만 짓는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되는 것이지 단순한 율법준수에 의해 구원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로마 3,20)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믿음의 공로 외에 더 요구되는 행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바로 죽은 아기들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또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행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에서 나오는 이기적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경고합니다.

실천은 믿음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지 선행을 해야만 구원받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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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바오로는 마치 그리스도께서하느님의 모습에서 종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듯이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 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에페 4,24)을 말합니다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사랑을 나누는 행위요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이처럼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흔히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먼저 우리를 부르시고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먼저’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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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를 수 있게 하셨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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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사람 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자기만 믿게 되고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각이 곧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난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탄’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육체적 즐거움과 명예만을 생각하게 시스템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입니다. 원죄는 뱀 때문에 비롯된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은 원죄로 인해 생긴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 때문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05항 참조)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과 화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뱀인 것을 모르면 독이 든 것을 모르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 책에서 자아를 뱀과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죄의 영향이 인간 안에 있어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인간의 생각을 미혹한다고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3)

      이런 의미로 뱀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이 사탄일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하와를 사탄과 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조심하지 않고 그 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도 사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뱀과 같은 자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생존욕구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도 있고 그것이 있어야 하느님 뜻과 자신의 뜻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교만이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는 길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뱀의 머리를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밟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성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이 말씀을 성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뱀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410항)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아는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 창세기에서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또한 “발꿈치를 바라보리라.”, “발꿈치를 보며 입을 벌리리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뱀에게 물리실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뱀을 십자가에 매달고 발로 밟아 이기셔서 죄에 떨어진 적이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1항 참조).

      우리는 생각을 미혹하는 우리 안의 뱀과 싸워 이겨야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 뱀에 물려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마치 뱀처럼 매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항)라고 가르칩니다. “자아 포기”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나가야 하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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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5)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시며 말씀하신 후,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왜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율법의 정결례에 따르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손을 대야지만 치료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씀만으로도 고쳐 주셨고, 어떤 경우에는 환자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 치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식으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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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사람은 너무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이 알리고 퍼뜨렸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순종하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더 깊이 감동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체로 영하고 그분과 한 몸이기 때문에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을 늑대라고 믿는 이상 인간처럼 두 발로 걸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믿는 본성 속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유태인들이 큰 성과를 올리며 사는 이유는 자신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다가 있을 때 바다를 가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 위를 걸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인간이란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뗏목을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그런 식으론 베드로의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베드로 교회에 속하려면 먼저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어야합니다.

      ​하느님만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소유하고 먹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자신을 하느님처럼 만드는 이런저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자아에 사로잡힙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어야 물 위를 걷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받은 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은 치유 받았지만 자신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가 마음까지 치유 받고 믿을 줄 알았다면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어야 부족한 것이 없어지고 부족한 것이 없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보답하려 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 아타나시오의 말을 빌려 “그분은(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가르치며,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빌려 “하느님의 외아들은 ...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항)라고 가르칩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요한 10,35)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고 교리서가 가르치는데 내가 하느님이라 믿는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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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지금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제가 걸어가는 길이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새봄처럼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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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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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의탁입니다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동시에당신의 치유의 능력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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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하셨다그러자 나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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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코 1,29-39)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일 아침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찾은 것처럼, 우리 또한 하루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꿈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때 매일 새로운 에너지와 생명력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삶의 여행을 지도 없이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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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마귀의 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비교하여베드로는 사랑의 고백을 했고 마귀는 공포로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그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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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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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은 손으로 만져서 판단하게 됩니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길쭉한 줄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엉덩이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둥근 바구니 같다고 하였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만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선입견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과거의 행위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기도 합니다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겠습니다안개가 걷히면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습니다편견선입견이념외모과거라는 안개를 걷어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분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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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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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그곳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는데그 일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한 다음이어서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곧 인간이 악마의 뀀으로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악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기에이제 구세주께서는 악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써 하늘나라의 실현을 보여주십니다.

먼저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이처럼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이로써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모습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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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것은,
그 가르침에서 어떤 ‘강한 힘’, 또는 어떤 ‘강한 권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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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배를 버리고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로 갔다고 한다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분의 오심을 예상하고 있었다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던 것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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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월요일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4-20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을 학자들은 ‘급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종말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재촉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곧바로’, ‘즉시’라는 표현들이 넘쳐 납니다.제자들도 급하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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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독서는 <1사무엘>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각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복음서의 특색을 잘 나타내줍니다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입니다이는 마태오복음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루카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2,49)입니다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첫 발설의 말씀은 무엇을 찾느냐와서 보라(1,38-39)입니다이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바람인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하는 바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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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지만 그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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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일요일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 3,13-17)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그 아들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져도 말 한마디 없이 죽어 가는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대신 죄를 짊어지는 희생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죄를 짊어지우는 일만큼은 줄여야겠습니다. 
의로움은 특정한 상황에서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으로 실현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자신을 비워 내고, 내어 주고, 참아 주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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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의 태도는 요한 자신의 놀라움만이 아니었다그것은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초기교회 신자들의 놀라움이기도 하다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지였다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죄가 없으신’(요한 8,46) 당신과 죄 많은’ 인간들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심이었다.

또한 세례를 받으시는 행위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1베드 2,24)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의 죄를 모두 없애기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와 같다. “보라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세례자 요한은 위엄 있게 말하였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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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에 대한 질문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례란 죄를 씻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씻을 죄 없으신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으니 질문이 없을 수 없었지요.

세례를 받으신 첫 번째 이유는 세례의 물을 축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육화의 의미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에 대한 질문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례란 죄를 씻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씻을 죄 없으신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으니 질문이 없을 수 없었지요.

세례를 받으신 첫 번째 이유는 세례의 물을 축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육화의 의미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벽돌이 거룩하기에 성전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셨기에 성전이듯이
거룩한 주님께서 요르단강에 들어가시므로 그 물이 모든 사람의 죄를
씻어주는 성수가 되는 것이고, 성수가 되도록 요르단강에 들어가신 겁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례 때 성령을 주님께 보내어
주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심을 공현하시고,
그리고 성자께서는 이제부터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텐데 우리도 당신처럼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라고 모범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은 물과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주님처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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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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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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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께 대해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내용이기에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얘기가 중심이지만
자신이 그분과 관계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얘기도 하고 있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점을 보는 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까 하는 문제인데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갖고 확고하게 갖는 것이 다른 어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중요하고 그래서 정체성만 올바로 또 확고하게
갖고 있다면 다른 것은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준
생활양식을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천상 성부의 딸과 여종들이 되셨고, 거룩한 복음의 완전함을 따라 사는
것을 택함으로써 성령의 정배들이 되셨기에 나는...여러분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보살핌과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을 바라고 약속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매들이 하느님의 딸과 여종이라고 하며 아울러
성령의 정배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하지 않는 점이 특별합니다.
그리스도의 정배인 것도 좋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가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1월 10일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시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이 나병을 고쳐 줄 수 있음을 다른 예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스캔들을 제공하는 행동을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의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함부로 다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역시 사랑을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직접 당신의 손을 대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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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다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입니다오늘 제독서에서 우리는 그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내가 여러분에게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피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피는 가시관을 쓰시고채찍으로 맞으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피는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던 피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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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예수님의 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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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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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목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4-22)


  아이가 자신의 노력으로만 두 발로 걷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두 발로 걸을 수 없습니다. 늑대에게 키워졌으면 두 발로 걸을 수 없을뿐더러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면 부모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준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불효이고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조차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은총이 넘쳤는데 그 이유는 그분 안에 성령의 은총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하시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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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용기를 내어라나다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45-52)


 “나다!”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신앙이 본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나다!”라는 예수님 한 말씀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체로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의 이웃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만나시는데 우리는 왜 이리 부족함을 느낄까요.호수의 맞바람을 이겨 내며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애를 씁니다. 
땀이 납니다. 
그만둘까 고민도 해 봅니다. 
바람이 멎거나, 아니면 바람을 이겨 낼 초인적 힘이 주어지거나. 
이러한 잡다한 생각들로 노 젓는 일이 더욱 힘겨워집니다.자기 삶에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껴진다면, 넋을 잃고 헤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줄곧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고수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을 예수님께 투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예수님을 보기보다 영광 속의 멋진 예수님을 그려 나갔던 제자들은 늘 넋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부족한 마음은 채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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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복음사가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의 놀라고 두려운 반응을 부각시키며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란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과거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 지방 도시의 시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한 노인이 수배 인물 장발장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그는 벽장 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한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재판정에서 판사의 언도가 내려지려는 순간 장발장은 일어서며 당당히 소리칩니다.

‘내가 장발장이요!’

      장발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뻔한 노인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모두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집착이 없어야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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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치고배고픈 사람들을 보셨습니다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다른 제자들도 보았지만 측은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축복하셨습니다관심을 가지고 나누었더니 배고픈 사람이 다 먹고도 넉넉하게 남았습니다기적과 표징은 관심과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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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마치<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마치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사실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그리고 평화롭습니다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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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8절에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본 뒤에는 욥기의 이 구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저절로 바람이 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멎게 하셨습니다.)
이 일도 예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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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있다면 그 자체로 사랑이 없다는 표시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좋고 싫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좋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애에 갇힙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문 걸어 잠그듯 싫어하는 사람이 내 사랑 안에 들어올까 
두려워 사랑의 문을 잠그기 때문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을 하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1월 7일 화요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 6,34-44) 


 기분은 전염됩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겐 좋은 일만 생기게 됩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긍정적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기적을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이고 기분이 나쁜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셨다면 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의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기분이 나빠서 평상시 부정적인 생각에 너무 물들어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더 데레사처럼 모든 가난한 사람들로 천국을 채우고 싶은 만큼 기분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분이 좋으려면 끊임없이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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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배고픔’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걱정하기 전에 이미 ‘빵의 기적’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괜한 걱정’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분명히 제자들도 배가 고팠을 텐데,
그들은 자신들의 배고픔이 아니라 사람들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나의 배고픔을 생각하기 전에 남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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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월요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마태오4,12-17.23-25)


 복음을 전할 때 말이 아니라 행동이 먼저여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심판받습니다. 그래서 교리와 성경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루에 한 사람에게라도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하지 않으면 평생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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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와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설교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기를 꺼리는 유다인들을 주 대상층으로 삼고 있기에, ‘하느님’ 대신 ‘하늘’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분이 건네시는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일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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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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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
이 말씀 이후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서 대목(이사 8,23-9,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으신 곳은 어둠의 땅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입니다. 그곳 주민들은 가난과 무지, 우상숭배와 절망 속에서 당시 제도와 질서에 희망을 갖기 어려운 처지를 살고 있었습니다.

"병자, 허약한 이들,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 중풍 병자..."(마태 4,23-24)
예수님의 손길이 미치는 이들입니다. 당장의 치유와 정상 생활과 사람 대접이 시급했던 이들, 구원이 절박한 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번듯한 신분이나 풍요로운 재력, 높은 학식을 뽐내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이 지금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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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고통 없이 만족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겁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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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일요일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1-12)


 목숨 걸어야 할 이유를 찾은 이들이 가장 행복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이들이 보는 것은 온통 두려움의 그림자뿐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던 헬렌 켈러는 “태양을 향해 걷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태양을 향해 걷는 이들은 걱정과 두려움과 절망의 그림자를 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드러내보이심을 발견한 이들이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목숨을 걸 목표가 생겼는데 죽음의 공포 따위가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존재의 이유만을 목숨을 걸고 찾는 이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곧 죽어야 하는 이유, 즉 삶의 소명을 전해 받는 시간입니다.

      나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읍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죽어도 되는 이유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만남만큼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목숨을 걸 소명을 찾읍시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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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반영억신부-



1월 4일 토요일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신앙은 그리고 종교는 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꿈입니다그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그 꿈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그 꿈은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께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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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 오직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38)라고 물으신다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내가 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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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요한 1,35).
요한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현존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임을 먼저 들었고, 드디어 보았고, 그래서 믿게 되었으며, 결국 증언하지요(요한 1,32 참조).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보았소"라고 하지 않고 "만났소"라고 말합니다. "만남" 안에는 시각적 "봄"과 전 존재적 "머무름"이 녹아 있습니다. "봄"이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만남"을 거쳐 마침내 "하나됨"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은 인간적 "봄"이 신적인 "봄"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봄"이 인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봄", 그 시선에 합해지면, 듣고 묻고 따르고 느끼고 하는 개별적 행위들은 그 안에 자연스레 융합됩니다. 결국 "봄"은 "만남"이 되고 "머무름"이 되어 종래에는 "사랑"이 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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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금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 1,29-34)


희생 재물로 오신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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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알코올 치료 재단인 AA는 ‘신’의 존재를 믿도록 유도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나눔에는 신과 영성이란 단어가 끊임없이 언급됩니다. 믿어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공동체에 머물러 있을 때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탈출이 불가능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자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부모의 사랑을 봅니다. 그러면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고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 수천 번 넘어져도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들 하느님의 사랑, 즉 성령을 보아야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머무시는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선물임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당신 사랑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베드로 위에 시작된 교회 공동체에서 성령을 받아야만 그 믿음을 유지하고 처음엔 비틀거리겠지만 언젠가는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교회는 물 위를 걸으려고 시도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 믿음을 보아야합니다. 교회는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시도한 베드로 위에 세워졌고 성체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교회에서 이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보지 못하면 진정한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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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출애 12,1-13).

어린 양이란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보듯이어린 양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을 의미합니다(이사야 53)따라서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미 오래된 메시아 대망사상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보듯이어린 양이란 말에는 이미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곧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고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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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보았습니다. 이 "봄"이 그를 앎으로, 확신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그는 증언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요한이 전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안에 깊이 새겨진 구원의 표지입니다. 무죄한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민족을 재앙에서 건져낸 파스카의 표상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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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일 목요일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인간으로 아무리 큰 역사를 이루어내더라도 하느님 역사의 가장 작은 부분만 못합니다. 자신을 가치 있는 역사로 만들어주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도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등 뒤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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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피리를 부는 이입니다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습니다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화살표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사실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사실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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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명확한 자기인식에 근거한 겸손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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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일 수요일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카 2,16-21)


  어떤 신자분은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사처럼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여 1년에 30명 이상을 선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찬미하는 예수님을 통해 또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하는 삶이 성모 마리아의 삶이고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평생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사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먼저 찬미하고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을 닮는 길은 온 삶이 “찬미 예수님!”으로 집중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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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fe i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Life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성서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소중하게 여기는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광야에서 40년 동안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폭풍우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법을 배웠고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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