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오 13,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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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목요일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마태오 13,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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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를 ‘그물’로 비유하신 이유는 하늘나라가 바로 힘이나 속력이 아닌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더는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런 물고기는 놓아주십니다. 그 좋은 예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 나쁜 물고기 가리지 않고 당신 안에 모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은 놓아버리십니다. 사람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우리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 방향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육신-마귀의 이전 욕구를 끊어야 합니다. 두 상반된 욕구를 동시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내 이전 욕구를 버리고 하느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내가 변화하게 됩니다.
나의 변화는 하느님 뜻인 그분의 방향성에 나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전에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워야 합니다. 이 욕구의 변화가 곧 방향의 변화이고, 그 방향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머무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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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수요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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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 가는 마르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아드님이시자 부활과 생명이신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우리를 더 깊고 굳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허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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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까지 감사할 수 없다면 아직은 잘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죽음 앞에서까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믿음일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려면 주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삶의 밭에서도 감사의 보물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삶의 밭에는 항상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밭을 적극적으로 일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돌밭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밭을 열심히 갈다 보면 반드시 그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보물이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믿음이 있어야만 발견이 됩니다. 반드시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눈에 보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역사를 초월해 계시고 그래서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은 다 은총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모든 상황에서 감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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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화요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마태오 13,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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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월요일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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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일요일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마태오 13,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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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토요일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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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금요일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태 1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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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목요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마태오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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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월요일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마태 12,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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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일요일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마태오 13,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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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명’의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그 중간에 끼인 것이 바깥에 감싼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엔 작고 볼품없지만, 밭에 심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어 쉬게 합니다. 이는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포용력을 잃어 하와를 배척합니다. 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가라지까지 끝까지 당신 밭에 두십니다. 예수님도 유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배운 이들의 것입니다. 나무가 새를 가리지 않듯, 하늘 나라 백성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내어줍니다. 에제키엘서를 알았던 유다인들은 그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에 달려있습니다. 포용력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라지입니다. 끝까지 고집부린 그 사람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장통입니다.
칼 융은 “모든 정신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고통이란 포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교만에 대한 욕구가 깎여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성장통을 즐겨 받을 줄 알아야 가라지가 아닌 밀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과 멸시’를 청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밀은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성장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통에 대해 내가 선택한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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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토요일
그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니.(마태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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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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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금요일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오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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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수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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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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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월요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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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일요일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태 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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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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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10,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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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금요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오 10,1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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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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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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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화요일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오 9,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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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처지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나는 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 대해 불평하고 그런 하와를 만들어준 하느님께 불평했을 때 그는 죄에서 돌아설 마음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면서 변화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그 자리에 계속 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자신들은 마귀의 힘을 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라도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담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와의 탓도, 주님의 탓도 아님을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반성입니다. 불평하며 동시에 반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불평은 변하지 않으려는 책임회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이렇게 하라고 권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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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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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오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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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허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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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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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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