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수요일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가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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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화요일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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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천사 축일입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천사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명을 지녔습니다.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라는 뜻을 지닙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탄이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을 일으켰을 때, ‘누가 감히 하느님처럼 구느냐?’라고 호통을 친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악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거둔 지도자로 소개됩니다. 교회는 미카엘 대천사를 악마의 유혹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임종하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보호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구약 성경의 토빗기에 나옵니다. 청년 토비야를 먼 곳까지 안전하게 안내하여 아버지의 심부름을 완수하게 하고, 아내 사라를 맞이하게 도와주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대천사는 임무를 다 마치고 토비야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교회는 라파엘 대천사를, 이 세상의 삶을 잘 마치고 영원한 천국으로 무사하게 순례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주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권세’, ‘하느님께서 당신을 권세 있는 분으로 드러내셨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다니엘에게 나타나 환시를 보여 주었으며, 무엇보다 즈가리야에게 나타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그리고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해 주었습니다. 가브리엘인 저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원해서 정한 세례명은 아니지만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을 좋아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얀 옷을 입고, 날개를 달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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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란 말은 그들의 정체나 본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맡고있는 직무와 사명을 뜻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의 일에 협조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될 때 우리도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수호하는 천사들이 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사는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천사가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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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월요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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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의 크기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으니 겸손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잘 받아들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은 밀떡 안에 계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나이 들며 더욱 포용력이 향상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전의 단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도 벗어나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단점을 내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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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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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일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마태오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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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28절)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아버지의 요청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맏아들은 자신의 싫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접어두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하였다.
오늘 비유에서 우선 ‘오늘’이라는 말로 사전에 어떠한 예정이 없었더라도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주목해본다. 맏아들에게는 아버지가 갑자기 포도원 일을 시키니 못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 중에서 가장 우선이 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즉 의미 부여와 가치 부여의 문제 그리고 인생의 우선순위의 문제를 결정하게 만드는 대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오늘’이라는 말에는 최종적으로 건네시는 하느님의 명령과 사명의 종말론적 시급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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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 “예. 제가 아버 지의 뜻을 실천하였습니다.”라고 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장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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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은 머리로 변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계명을 지키며 변하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담배를 끊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는 원래 담배를 안 피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피울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원래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색하게 됩니다. 실수로 피워도 곧 영원히 피우지 않게 될 것을 압니다.
유다인들이 열에 하나 계명을 지키면, ‘나 하느님 자녀 맞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녀는 ‘어 이상하다? 앞으론 죄 안 짓겠지!’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걷는 것이 이상했을까요, 물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을까요? ‘당연히 걸어야 하는데 왜 빠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두세 발 걸은 것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이기에 죄짓는 게 이상한 거지!”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곧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물 위를 당연히 걸을 수 있는 존재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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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토요일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루가 9,43ㄴ-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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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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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금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가 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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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자체가 법입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킵니다. 그 현존을 연습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현존 연습을 하며 모든 시간이 기도와 찬미와 사랑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구를 두고 살아갑니까? 자아라는 뱀일 수도 있고, 사랑의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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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목요일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가 9,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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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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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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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수요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시었다.(루가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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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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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일요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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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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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목요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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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수요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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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화요일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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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고통에 어머니가 되기 위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아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려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교회라는 새로운 자녀를 낳는 데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마리아들도 십자가 아래 있었지만 성모님 고통만이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당신 고통을 합칠 줄 아는 어머니의 공로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어머니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무슨 고통인지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아기를 낳는 것도 동시에 포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알 때야만 창조의 도구가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고통이 교회를 낳는 창조사업을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고통임을 아셨습니다.
모님께서 고통을 거부하셨다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 밑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은 들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고통은 내가 유익하고 의미 있어 잘 받아들일 때만 나에게 그 의미를 주고 창조의 계기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께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 있게 여겨서 그것을 교회를 낳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앞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당연히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주시는 의미 있는 고통임을 믿는 것입니다. 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열매를 선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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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 월요일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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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워 와서 우리 자신을 매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것입니다. 지금 불만 가득한 나의 자아를 죽이는 나만의 도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자아를 매달면 이제 자아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가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도구들이 모두 십자가가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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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일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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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토요일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루가 6,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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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먹히는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조금 힘든 운동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면 더 좋습니다. 꽃에서 열매가 되는 중간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가 열매가 되어 누군가에게 계속 먹힌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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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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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금요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가 6,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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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목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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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작가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때, 형님·동생하며 막역하게 지냈던 명배우 안성기 사도 요한 선생님께서 하셨던 조사(弔辭) 가운데 일부입니다.
⟪최 베드로, 인호 형님이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아우야,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 줄 알겠냐?” 그 당연하고도 쉬운 질문에 저는 무슨 다른 뜻이 있을까,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지요. “그야 말로 원수를, 적을, 나쁜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일까? 아냐, 그런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어. 안 보면 그만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야. 그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자식, 자기 부모들이지. 이들을 열심히 사랑하라는 말이지.”⟫(최인호 유고집 ‘눈물’, 여백 참조)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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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수요일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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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화요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1,1-16.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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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이라고 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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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월요일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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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토요일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루가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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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은 구원의 완성과 그 기쁨을 노래하는 복음입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신 주님을 맞이할 넉넉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애써 가꾸어야 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스며든 시간적 배경도 끝자락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것은 추수할 때의 행동이지요. 대개 성경 안에서, 추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과도기가 아니라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예전의 약속이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추수’라는 이미지가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완성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부족해 보이고, 아직 멀었다 싶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자고 성공하였으며, 그래서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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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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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두 선장의 목소리는 항상 반대되기 때문에 한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목소리는 죽습니다. 모세의 목소리를 따르면 파라오의 목소리는 죽고, 파라오의 목소리를 따르면 모세를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내 생각과 항상 반대됩니다.
그 목소리를 따르는 과정에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선택하든 둘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분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지만, 파라오의 명에는 엄청난 노예살이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르면 한 번만 던지면 됩니다.
결과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자아를 따른 사람은 ‘자책’을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것밖에 못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게 심해지면 자해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랐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9월 2일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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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춘향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 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려면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이집트’의 문화와 역사를 의미합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신약성서의 세계보다는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인들에게 불로초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버렸고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깨달음과 진리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길가메시가 추구한 것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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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일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루가 4,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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