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루가13,1-9)
If you do not repent,
you will all perish as they d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머리에 종기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곧 낫겠거니 생각하며 사나흘은 아픈 것도 그냥 참았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베개를 베고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습니다. 결국에는 병원에 가서 의사의 손으로 종기를 짰습니다. 고름이 나올 때는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병원에 다녀온 뒤 이틀이 지나자 아픈 곳은 빠르게 나았습니다. 그때 ‘병원에 가서 종기를 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종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아픔이 있었지만,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면 종기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더 나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짜내지 않으면 그만큼 우리 영혼 전체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비록 부끄럽고, 두렵고, 어려울지라도 그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우리의 영혼에서 그것을 도려낼 때 비로소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은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말씀입니다. 그러하기에 비유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우리 삶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이야 풍경이 움직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풍경은 고정된 것이고 다만 전철이 빠르게 움직여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움직이는 것은 제가 타고 있는 전철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삶도 그렇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외부에서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서 그랬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나’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바른 시선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이 오히려 진리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무고해 보이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빌라도가 죽인 갈릴래아 사람들, 또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어서 그런 죽음을 겪게 되었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큰 죄인이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하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회개의 삶은 바로 제대로 바라보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대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잘못된 길에서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늘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저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지었어.’, ‘저런 사람은 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왜 하느님께서는 저런 사람을 가만히 두는 거야?’ 등등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주인은 잘라 버리라고 하지만, 포도 재배인은 자신의 노력을 기울일 삼 년의 시간을 청합니다. 이 정성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잘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사랑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잘못된 판단으로 주님 사랑은 보지 못하고 내 욕심만을 채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많은 아이가 무서워하는 것을 꼽는다면 아마 어둠일 것입니다. 이 무서워하는 어둠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느 저자가 그 극복 방법을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어둠이 두렵다는 아이에게 “어둡구나. 지금, 이 어둠은 무슨 색이지?”라고 물어보며 시작합니다. 아이는 “검은색이요.”라고 말하겠지요.
“검은색이구나. 검은색을 띤 것들은 또 뭐가 있을까?”
그러면 “아빠 차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아빠 차는 검은색인데 무섭지 않네. 또 뭐가 있지?”, “머리카락이요.” 등등…. 이러면서 검은색의 다른 주변 물건들을 나열하게 합니다.
이를 저자는 ‘주의 돌리기’ 기법이라고 말합니다. 주의를 돌리면서 처음 가졌던 감정이 사라지게 하고 줄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감정을 우리는 모두 꽉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때 이 주위 돌리기 기법을 사용해보면 어떨까요? 더욱 더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목적대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창조자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요행이나 예외규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믿지 못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만 특별하여 예외규정이나 요행을 따르려는 마음인 ‘교만’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십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는 교만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적게 던, 많게 던 매를 맞습니다.
‘교만’은 성경에서 ‘도시’나 성곽의 ‘탑’으로 상징됩니다. 바벨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탑이 허물어져야 교만이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숫자 ‘18’은 ‘힘을 잃게 만드는 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13장에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루카 13,11)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병마”의 희랍어는 “병(힘이 빠진)의 영”입니다. ‘18’년은 분명 참 능력이요 힘인 성령을 잃게 만드는 마이너스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자아가 품어내는 병의 영에 사로잡히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 영과 육체의 에너지는 서로 반대됩니다.
저는 ‘18’을 ‘6+6+6’으로 봅니다. ‘6’은 동물의 본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인 것입니다. 제물이란 이 삼구(三仇)를 죽여 그 피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되지 않으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완성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어떤 누구도 사랑의 계명으로 파견될 수 없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인데, 교만이 죽어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에 하느님 자녀로의 소명으로 파견될 수가 있습니다. 꽃이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힐 수 없듯, 삼구를 죽이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길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엔 ‘호크 아이’와 ‘블랙 위도우’가 서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주 절반의 생명을 날려버린 ‘타노스’를 이기는 방법은 6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다 모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의 인피니티 스톤은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절벽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희생만이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언 맨이 타노스의 손에 있는 인피니티 스톤이 박힌 장갑을 빼앗아 타노스를 칩니다. 그러면 타노스가 죽지만 자신도 죽을 것을 압니다. 자신이 죽어야 모든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아이언 맨은 자신이 죽고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이런 설정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 그래서 뭔지 모를 이 법칙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은 이것에 감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어떠한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첫 행위가 봉헌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삶은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물에 피가 섞이게 하는 것’이 회개의 행위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제물’이란 ‘나의 죽음을 위한 봉헌’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제물 봉헌과 선교 소명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봉헌이 없으면 선교의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봉헌으로 나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도 손쉽게 오를 낮은 산도 힘들어서 오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기들과 놀러 가서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특별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끝까지 남아 누구보다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버텨 2시간 자고 산을 오르는데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났습니다. 더 오르면 토할 것 같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좋은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이든 그것을 이루려면 자기를 포기하는 제물 봉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입니다. 오류가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자신만 특별하다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포도밭의 한 무화과나무’처럼 잘리게 될 것입니다. 자아를 죽여 그 피를 선악과와 섞어 주님께 봉헌해야만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를 뱀으로 보고 그 피를 선악과에 섞어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로 이어져야 하고 그 십일조에 반드시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할 줄 안다면 열매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피가 섞인 제물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봉헌해야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될 준비가 됩니다. 주님은 뱀과 같은 방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 ‘십일조’를 자신을 죽이는 회개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피가 빠져나간 만큼 주님의 뜻이 머물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삶을 살면서 ‘변곡점’을 한두 번은 맞이하게 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신앙인이 아니었던 방송인이 우연한 기회에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을 알기 전에는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10년 정도 했는데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왜 항상 얼굴이 어둡고, 화난 사람 같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고자 했지만, 어두운 면을 보면서 본인도 정서가 메말라갔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었고 ‘울지만 톤즈와 부활’을 제작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친구들도, 가족들도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얼굴이 행복해 보입니다.’
저의 사제생활에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25년 전입니다. 주교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사목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인정해주신 주교님께 감사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차분하게 준비하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별회를 핑계로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했습니다. 1달 정도 지났는데 주교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저의 근황을 들으셨는지 저의 생활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미국 가는 일은 없던 일로 하셨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 한 것도 아니었기에 주교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저의 부덕함을 인정하면서도 주교님께 저의 생활을 알린 분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성당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번 성경책을 펼쳤는데 같은 말씀이 나왔습니다. 욥기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린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세상을 떠날 때도 빈 몸으로 가는 것을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교님 덕분에 제게는 좋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기에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지만 아무리 늦어도 10시 이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10잔을 마실 수 있다면 5잔만 마시려고 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일찍 자리를 마치니 교우들도 좋아했습니다. 특히 자매님들이 좋아하였습니다. 과하게 마시지 않고, 일찍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5시에 일어나다가 요즘에는 4시에 일어납니다. 일찍 일어나니 새벽에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본당에서도 새벽에 강론을 준비하고, 본당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평일미사에 오지 못하였던 분들이 강론을 읽으면서 묵상할 수 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이곳 뉴욕에서도 변함없이 새벽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에도 강론을 올리고 있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 견책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기쁨과 행복도 오지만 아픔과 시련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쁨과 행복에 감사드릴 겁니다. 아픔과 시련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길 겁니다. 천국에 계시는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어떤 시련과 아픔이 찾아와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 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5절)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 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 코 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 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을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복음 13장 7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 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한편,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십니다,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고,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축복의 때를 놓치지마라
-반영억신부-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마음이 흔들비쭉이다.’,‘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가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가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요, 땀입니다. 그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3,1-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항상 회개하는 삶으로 그에 맞갖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주인은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7절).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앴지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는 이 나무는 남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 무엇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 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어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한상우신부-
회개는
실천이다.
올바른 사랑을
빛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알고있다.
모든 회개는
하느님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의
역사는
다름아닌
회개의 역사였다.
회개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다.
사랑과 회개는
함께 존재한다.
회개의 숨결이
참된 기도의
숨결이다.
회개를 색채로
표현한다면
아마 겸허한
가을의
색채일듯
하다.
포도 나무에겐
포도열매가
열려야하듯
우리에게는
회개의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우리 삶의
빈자리는
회개의
자리이다.
회개로
채워져야한다.
우리 삶의
중심을
잡아주고
모두를 살게하는
회개다.
회개로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안에서
맺는 회개의
열매이다.
사람속에서
맺는 회개이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회개이다.
회개를 따라가는
생명의 길이다.
가장 아름다운 빛
가장 잘 익은
열매가 바로
회개의 빛이다.
나와 너의
회개가
모두를 살게하는
하느님 사랑임을.
우리의 모습
우리의 열매는
실천하는
은총의
회개뿐임을.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루카 13,3)
"더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3,5)
이스라엘 백성은 천재지변이나 사고, 병고 등이 하느님 진노의 결과라 여겼습니다. 이런 변을 당한 이들이 부정하거나 죄를 지어서 받는 벌이라 믿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편견에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5)
사고는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햇빛과 비가 허락되듯이, 고통도 마찬가지지요. 차이가 있다면 비극적 사고에서 의미를 끌어올리느냐 무너지느냐에 달려 있을 겁니다.
"멸망"
무조건 자신이 옳고 완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사고나 불운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이런 고통을 겪는 건 부당하다고 여겨 분노의 대상을 찾다 찾다 결국 신에게 증오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무너진 육신과 재산의 손실에 더해 영혼까지 휘청거리지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멸망"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면 끊임없이 회개라는 이들, 즉 스스로 용서받은 죄인임을 인식하는 이들은 고통이 닥쳐올 때 자신을 더 삼가고 살핍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심을 잘 알기에 괜한 분노로 힘을 빼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겪는 고난의 원인을 숙고하고 의미를 찾아나갑니다. 회개한 이들은 외적으로는 타격을 입을망정 영혼은 더 큰 생명력으로 더욱 단단해집니다.
"그럼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는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이 청합니다. 자신이 거름을 주며 돌보겠다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청하면서까지 만류하지요. 그에게서 멸망할 위기에 처한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희생과 사랑의 노력이 나무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리라는 낙관, 그리고 신뢰의 마음을 동시에 봅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성장과 완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에페 4,15)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겉으로 불완전하고 지지부진하고 결점투성이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목표를 지닙니다. 구성원 각자가 지닌 부족함과 불결함, 죄악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에페 4,13) 다다를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저마다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고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아무리 추상같은 진리도 사랑으로 전할 때 진정성이 전달됩니다. 진리는 단호해도 따듯하고, 단순해도 포용적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면에서 자라나"
성장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육의 생명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라며 변화해 가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의 일치와 성숙"(에페 4,13 참조)이 곧 회개의 열매인 성장입니다. 저마다 받은 은총과 역량에 따라 성장의 속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끊임없이 쇄신하고 변화하는 회개로 불리움받았습니다.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비록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같은 존재일망정 이 희망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으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둘레의 땅을 허물고 거름을 채워 주십니다. "살아남아라!"(에제 16,6)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자라나고 있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루카 13,8)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 년의 유예를 청하십니다. 그렇다면, 딱 일 년이 지났는데 성과가 없으면 뽑혀 버릴까요? 아마도 우리가 회개하여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이 유예는 매년 갱신될 것이고, 어쩌면 마지막 날까지 반복될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열매에 앞서 우리 존재를 더 염려하시고 연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앞당깁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가 아무리 커도 마냥 회개를 미룰 수 없는 이유입니다. 회개하는 이에게는 그 어떤 고통도 멸망의 빌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변화하는 거름이 될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뱡향 전환, 돌아섬, 회개는 무엇인지 주님께 여쭙고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만함을 나누시려고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로 거름을 주며 더 애타게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개인의 성숙과 공동체의 성장
-김찬선신부-
어제 에페소 교회가 영적인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이기를 당부한 바오로
사도가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경지까지 성장하게 되기를 바라며
여러 가지 당부를 하는데 제가 보기에 이 성장 또는 성숙에는 개인의
차원과 공동체 차원, 곧 개인의 성숙과 공동체의 성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성숙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까지 다다르는 것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이유와 목표에 현세 구복도 있겠지만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그 목표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의 전통적인 표현들이 있는데,
"Imitatio Christi" "Ater Chriti"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제2의 그리스도 또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이고 프란치스코가 바로 이런 존재로서 우리의 모범이라고 얘기하지요.
그렇지요,
우리 신앙인 가운데서도 자신의 성숙이 인간적인 성숙 정도에 그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목표와 지향을 가지지 않는 분들이 많은데
신앙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자기 성숙의 목표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에페소서에는 그것이 명확히 나와 있지 않고
그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라고 얘기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
곧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숙에는 어떻게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랑은 사랑을 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겠지만
이 의지와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마다'는 각자에게 은사가 은총으로 주어졌다는 뜻이며
그래서 은총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자기를 위한 것일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총과 은사를 받아 성숙해진 사람은 그 사랑이 그리스도만큼
성장하여 이제는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자기가 받은 은사를 활용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은사를 받아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교사 등이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도 받고
은사도 받은 것이라고 하고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고 합니다.
사실 미성숙한 아이는 자기밖에 모르기에 사랑을 받으려고만 할 것이고,
사랑을 하더라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타인이나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려는 사랑은 할 수 없는 존재지요.
이 지점에서 저를 성찰합니다.
요즘이 저희에게는 인사를 앞둔 시점인데 지난 3년 공동체 안에서
큰 책임을 지지 않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도 계속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 유혹처럼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정도 했으면 됐어!'라는 생각이 뱀의 대가리처럼 올라오는 것을
바로 눌러버리고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저를 내어주자고
다시 저를 추스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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