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 39-48)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두 부류의 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없을 때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이 올 때까지 늘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자신을 그 집의 ‘주인’으로 착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 행세를 하려던 이는 도리어 쫓겨나고, 주인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고 종으로서의 위치에 충실한 이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맡게 됩니다.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과 같게 된 것입니다. 이 비유에 비추어 볼 때 ‘깨어 있다.’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처음 주임 신부로 발령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발령받은 본당에 도착하여 성체 조배를 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본당 신부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저로서는 착한 목자가 될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이런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루카야, 네가 이 공동체의 목자더냐?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성당의 목자다. 너는 목자가 되기에 앞서 먼저 나의 어린양이 되어 주려무나. 양이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듯이 그저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무나.’
저는 이 메시지에 위로와 용기를 얻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주어지는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을 제 사목의 등불로 삼고 지내다 보니 어리숙하고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본당 신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하느님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는 우리를 지나친 책임감에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렇게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부족한 것이 하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그의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1년 동안 알 수 없는 소리만 지르다가 4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말년에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모파상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모두 아무것도 갖지 못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갖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까? 알면서도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을 구별하시기 위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올 주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불충실한 종들은 자기 임무를 소홀히 했으므로 큰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죄는 몰라서 저지른 죄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따라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을 행하는 실수를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부와 명예가 남지 않습니다. 남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을 강조하셨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것은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준 것이 바로 사랑이었고, 많이 맡긴 것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받은 만큼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것을 요구하시며, 우리에게 계속해서 청구하시는 주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파상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심리학자 데니얼 네틀의 연구 결과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10년 후 행복을 예측하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를 조사했습니다.
나이, 건강, 가족 관계, 돈, 지위, 친구 등등 여러 가지 요소를 비교했지요. 이를 통해 미래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소들이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미래의 행복을 예측하는 데는 정확도가 너무 낮았습니다. 정확도가 높은 것은 딱 하나뿐이었습니다.
‘현재의 행복 지수.’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에 미래의 행복이 좌우되었습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미래에도 행복하고,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바로 지금의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을 희생해야 미래가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지는 ‘깨어있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제의 복음은 주님께서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처럼 올 테니까 깨어 맞아들일 준비 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식탁에 앉아 그 종들에게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찾아야만 하는 것은 삶의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는 ‘나를 창조해주신 분’의 뜻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은 창조자의 뜻을 찾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야 사막 위의 펭귄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지 않습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그 창조자의 창조 목적이 들어있고 그 목적을 찾아 그대로 살아갈 때 창조자의 에너지를 받게 됩니다. 창조자가 자신을 창조한 모습대로 사는 이에게 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양식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창조된 목적을 찾지 않게 만들어 창조된 이로부터 오는 삶의 활력을 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양식이 있는 땅으로 가는 방법은 자신을 창조해 준 분의 뜻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펭귄이 남극을 발견했다고 해서 항상 먹이가 풍부할까요? 오늘 복음은 당신 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남극도 항상 먹이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먹이가 넘치는 때가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주님의 모든 재산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언제건 그것으로 음식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주인이 종에게 재산을 맡긴다는 말은 당신의 전부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전해주려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방법은 하느님을 전해주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2011)은 열정은 넘치지만, 실력은 엉망인 방송국 PD 베키의 이야기입니다. 일하던 직장에서 잘리고 어렵게 구한 또 다른 방송국의 모닝쇼 ‘데이 브레이크’는 시청률 최저로 곧 폐지될 위험에 처해있었습니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그런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혼자 아무리 열정을 발휘해도 시청률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이 와중에 베키는 고집불통인 남자 앵커를 해고해버립니다.
시청률이 올라가지 않으면 프로그램이 폐기될 상황입니다. 베키는 계약서를 빌미로 전설의 앵커 마이크를 영입합니다. 하지만 완전 고집불통인 마이크는 진지한 진행을 하려고만 하고 여성 앵커와는 끝없는 경쟁을 하여 진행을 불편하게 합니다. 잘나가던 앵커에서 퇴물이 되어버린 마이크는 거의 술중독자입니다. 베키는 마이크의 집까지 따라가 보초를 서다가 그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마이크는 큰 건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크가 생방송으로 양배추 절임을 방송하겠다고 말합니다. 모두 놀랍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아침 8시에 내가 진짜 뉴스란 걸 보여줄 거야!”라고 말하며 중계차를 몰고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마이크는 그동안 도지사의 공금 횡령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고, 검찰이 도지사를 체포하는 영상을 중계하면서 데이 브레이크의 시청률은 고공행진을 하게 됩니다.
마이크는 크게 감동한 베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그거 아나? 나 사실 창피했었어. 이제 이런 프로나 진행한다는 게.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 그게 나였어.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리 자존심 센 마이크지만 베키의 열정에 보답하고 싶었고 이전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능력을 인정받은 베키가 가장 인기 있는 프로인 ‘투데이 쇼’에 스카우트됩니다. 베키도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마이크 때문에 베키를 빼앗겼다고 비난합니다. 마이크는 요리 생방송 준비를 시키고 직접 프리타타 요리를 시작합니다. 고상한 뉴스 진행자만을 고집했던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자 베키는 투데이 쇼 면접을 집어치우고 데이 브레이크로 달려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래서인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마이크도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줄 열정적인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런 마음이시지 않을까요? 당신을 믿고 인정하고 전해 줄 누군가만 있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아버지를 전해주고 싶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펭귄이 살 곳은 추운 남극입니다. 사막에서는 굶어 죽습니다. 자신을 창조해주신 분이 어디 살라고 창조해주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주님의 뜻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새끼가 부화할 때 남극은 먹이가 풍부하게 맞춰져 있습니다. 아기를 낳았을 때 어머니 젖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그 사람을 통해 당신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이웃에게 항상 좋은 것만을 주려고 합시다. 그러면 좋은 것들로 내가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984년 성인품에 오른 103위 순교 성인의 ‘초상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야기만으로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성인들의 초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인들 중에는 가족이 많았습니다. 부부, 부자, 자매, 남매, 시아버지와 며느리도 있었습니다. 멀리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들의 초상화도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낯선 땅 조선으로 와서 선교하였고,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얻는 부귀, 영화, 권세보다는 천상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되시면 103위 성인의 초상화를 검색하시면 좋겠습니다. 124위 복자들의 초상화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숫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고, 신앙을 증거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과거에 있었던 분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서 전구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집에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영정사진이 있습니다. 장례미사에 강론을 하였던 동창신부는 부모님의 영정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영정사진은 헌팅캡을 쓰시고 만면에 환환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인생을 멋지게 살다가 천상병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이 세상 소풍 잘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모습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소유하기 보다는 존재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신앙과 자유를 자식들에게 물려 주셨습니다. 어머님의 영정사진은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재속회의 복장을 입으시고 밝게 웃는 모습입니다. 인자한 모습이지만 흔들리지 않는 강한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님이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가족들을 돌보셨습니다. 연탄 장사, 쌀가게도 하셨습니다. 구청에 도시락을 팔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도시락, 큰 형은 반찬, 작은 형은 국, 저는 수저통을 들고 구청으로 갔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어머니는 인자하면서 강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군대에서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군종병으로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용산 육군본부로 3일간 회의를 가신다고 했습니다. 제게는 성당 청소하고 부대에서 근무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아직 군 생활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에 혼자 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말은 하였지만 회의 기간 중에 성당에 있고 싶었습니다. 성당이 군 내무반보다는 편했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깊어갈 즈음에 신부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회의가 취소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돌아오셨습니다. 신부님의 말을 거역했던 저는 엄하게 야단맞았습니다. 그 뒤로는 신부님의 말씀을 잘 들었고,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품으로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순간에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교성인들에게 지복직관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였고, 늘 기도하였고, 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크 더 청구하신다
-이영근신부-
어제, 우리는 종말에 관한 비유 중에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있음”에 대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부분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뒷부분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곧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를 요구됩니다.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충실함이 주인을 섬기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청지기에게는 바로 맡겨진 이들을 충실하게 돌보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슬기로움’이 요청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움’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루카 12,42)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곧 주님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주님!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에 따라 처리하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반영억신부-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집행과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그에 맡겨진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입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가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주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12,40).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혹 많이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송영진신부-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는 말씀으로만,
또 사람들을 위협하고 겁주는 말씀으로만 보기가 쉬운데,
하느님은 사람들을 심판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에(요한 3,17), 그리고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12,20),
종말과 재림의 날은 ‘징벌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입니다(루카 21,28).
<심판의 목적은 인류의 처벌과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아흔 아홉 가지를 잘하고 한 가지를 잘못했다면,
그 하나 때문에 처벌과 멸망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흔 아홉 가지를 잘못하고 한 가지만 잘했다면,
그 하나 덕분에 처벌과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실천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 일 덕분에 처벌과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한 가지이든지 아흔 아홉 가지이든지 간에
연옥에 가서 보속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희망이 있는 곳이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 나라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곳입니다.>
종말과 재림의 날이 ‘구원의 날’인데도, 그날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받게 될 처벌을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것은,
회개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처벌이 아니라,
회개해서 받게 될 구원을 더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처벌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않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2-9).”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빼앗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갖기를 희망하면서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마치 도둑에게 빼앗기듯이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 라는 말에는, 인간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그날을 미리 계산하거나 예상하지도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설마 지금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때가 지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는 충실한 신앙생활과 회개를 뜻합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를 해야 하는 때는 ‘지금’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2-44).”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큰 상’을 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37절에 있는,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회개를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한 가족으로서 함께 살면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마태 19,28; 1코린 6,2).
그것은 마치 종이나 집사가
주인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더 큰 책임이 요구된다.” 라는
뜻이고, 넓은 뜻으로는 “은총을 받았다면 받은 사람답게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신앙인에게는 더 엄격한 심판이 적용된다면, 차라리 신앙인이
안 되었다가 덜 엄격한 심판을 받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유에서는 주인이 집사에게 임무를 맡기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우리가 주님께 간청해서 은총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 애원할 때의 신앙생활과 은총을 얻은 뒤의 신앙생활이 다르면 안 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39-48: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어제의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41절) 물었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의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된다면, 그런 종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이라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 12,4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이르시자 베드로가 여쭙니다. 그는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궁금한 듯합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루카 12,42)
주인은 집사에게 종들을 맡기고 많은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 권한들은 집사의 안위와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들과, 종들을 통해 가꾸어질 집안 전체를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전형은 바로 하느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은 권위로 호령하거나 힘을 휘두르며 윗자리에 군림하시지 않고 스스로 이 땅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의 모든 피조물의 필요와 고통을 헤아리며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려면,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면 될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4)
주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세상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집사로 먼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주인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지혜를 다해 수고하는 집사는 자기 영광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주인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합니다. 이처럼 충실하고 슬기롭게 주님의 집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맡기실 "모든 재산"이란 바로 그분이 맡기시는 신비이고, 또 모든 영혼들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받은 직무와, 이 은총의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시어 ...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에페 3,8-9)
사도가 받은 직무는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선택을 받고 "계시를 통하여 신비를 알게 되었다"(에페 3,3)고 고백합니다. 사도가 지닌 지식과 충실함, 열정을 쓰시려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그에게 이처럼 엄청난 신비를 허용하신 것입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사도 바오로가 "은총의 직무"(에페 3,2)를 받은 이유입니다. 구원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베풀어지도록, 온 세상 모든 이가 "공동 상속자", "한 몸의 지체", "공동 수혜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큰 그림 덕분이지요.
처음에는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신비가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에페 3,5)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종들과 자녀들을 돌보고 공동체를 가꾸도록 먼저 선택받은 이들이지요. 그들의 충성과 투신을 통해 복음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우문현답이하고 할까요? 베드로의 질문을 예수님께서 이런 답으로 맺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는 일은 비단 제도적 직무에 매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지 않았음을 포괄적으로 말씀하시는 듯하지요.
모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해 하느님 은총의 공동 상속자, 지체, 공동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에페 3,10)는 우리 모두를 포용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건 우리 모두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스스로 주님께 많이 받았다고 느끼십니까? 그럼 주님께서 많이 요구하실 것이니 더, 더, 더 주인 뜻에 따라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랑하도록 애씁시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뭔가 더 많은 걸 각별하게 맡기신 것 같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더 청구하실 것이니 맡겨주신 영혼들을 힘껏 돌보고 나누고 섬깁시다.
우리에게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완전한 모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듯, 우리도 맡기신 모든 이를 돌보고 사랑하고 가꾸다 보면 그분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분께서 흡족히 여기실 은총의 관리자로 발돋움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코로나 이후 비대면 시대를 어떻게?
-김찬선신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인과 종의 비유 얘기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빗대어 하느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건데 오늘 저의 묵상 나눔은
오늘 주제와는 조금 벗어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급격히 변화하는 우리 시대에 이런 얘기,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얘기가 어떻게 통할 수 있을지 성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이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고,
우리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 관심도 많고 염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 성찰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이 사실 코로나만이 아니고,
A.I, 곧 인공 지능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변화도 함께 봐야 합니다.
사실 코로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고통과 함께 큰 충격을 줬기에
이 변화에 실감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인공 지능으로 인한 변화는 변화는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편리함을 주는 것, 이로움을 주는 것으로 다가오기에 이로 인한
변화에 별 경각심도 없고,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용해도 될까요?
어쨌거나 코로나와 인공 지능으로 인한 변화의 공통점은 언택트입니다.
언택트란 우리말로 하면 비대면이지요.
언택트란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사람이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작동이 되는 것까지 의미하는 말인데
인공 지능을 이용한 기술들이 이것을 가능케 하고,
코로나로 인해 이 기술들이 더 유용하게 쓰이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공 지능과 로봇을 이용한 원격 치료,
비대면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고, 위험한 곳에는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 대신 투입돼 불을 끈다든지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고,
강의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앞으론 문제없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근자에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 집에 T.V가 있는데 미사를 드리는 중에 그리고 제가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리가 나오니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 소리의 갑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그것이 인공 지능 지니가
제 말을 알아듣고 대구한 것임을 알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저의 형제가 '지니야'하고 부르면서 'T.V 켜!'하면 키고,
'무엇에 대해 알아봐 줘'하면 알아보고 답을 해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형제는 그 지니를 막 부려먹는데
저는 미안해서 아직 그 지니를 부려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와 저의 형제가 이렇게 다르고,
더 후대의 사람들은 더 달라져 비 인격적인 대면이 인격적인 대면을
대신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거리낌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반려견이 반려자를 대신하는 요즘 풍조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더 미래에는 반려견도 필요없이 '지니야, 나 좀 위로해줘!'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앞으로는 비대면으로 강의도 할 수 있게 됨을 봤는데
이론 강의는 비대면으로 가능하겠지만 양성을 비대면으로 할 수 있을까요?
인간 관계를 맺는 법을 비대면으로 어떻게 양성하고,
대면하지 않고 어떻게 인간 관계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비대면으로 살고, 관계를 살지 못하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며,
오늘 비유에서 얘기하는 주인과 종의 충성스러운 관계를,
지니를 종처럼 부려먹을 줄만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격적으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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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행세를 하려던 이는 도리어 쫓겨나고, 주인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고 종으로서의 위치에 충실한 이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맡게 됩니다.
양이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듯이 그저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무나.’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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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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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이 살 곳은 추운 남극입니다. 사막에서는 굶어 죽습니다. 자신을 창조해주신 분이 어디 살라고 창조해주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주님의 뜻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새끼가 부화할 때 남극은 먹이가 풍부하게 맞춰져 있습니다. 아기를 낳았을 때 어머니 젖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그 사람을 통해 당신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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