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Margaret K 2020. 10. 17. 06:15

2020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이민족의 사도인 바오로는 자신의 직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전교는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향기가 난다는 것은 외적인 매력을 지닌 것과는 다릅니다. 외모가 아무리 출중하여도, 많은 지식을 갖추었어도, 온갖 능력을 소유하여도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향기는 그 사람의 됨됨이에서 피어오릅니다. 또 향기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령 장미꽃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향기를 내뿜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 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막중한 임무를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다소 확고하지 않아도 복음 선포의 임무를 그들이 잘 해내리라고 그분께서는 믿으셨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하심으로써 그들이 당신의 향기를 피워 내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향수의 인위적인 향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좇아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전교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다

-임상만신부-


몇 년 전 그림 그리기를 결심하고 소묘를 수개월 넘게 하다가 처음으로 붓을 들고 이젤과 대면했다. 그러나 막상 캔버스를 대하고 보니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해서 한참을 고민하고 또 실수해서 캔버스를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미동도 못 하고 있을 때, “그림을 잘 그리는 비결은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지 말고 우선 무조건 캔버스에 붓을 들이대고 아무거나 그려보는 겁니다. 겁내지 말고 일단 붓질을 시작하시면 그림이 나옵니다”라며 미술 선생님이 그리기를 부추기는 바람에 마침내 그리기를 시작할 수 있었고, 그 후로는 좀 더 편안하게 몇 작품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전교 주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고 전교할 것을 명령하셨다. 전교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덕행이 아니라 신자라면 절대적으로 행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름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전교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전교를 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어떻게 전교할 것인지 그리고 전교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등에 대한 두려움들 때문에 아예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본당에서 봉사도 잘하고 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전교만큼은 자신이 없어 수십 년 동안 단 한 명도 전교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교도 그림 그리기와 마찬가지로 결과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 대신에 ‘하면 된다’ 그리고 ‘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일단 시작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시동만 걸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다 알아서 좋은 열매로 보답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전교는 신자들의 의무이며 대신할 수 없는 책임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전례를 위해 모이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전교하기 위하여 교회 밖으로 흩어지는 본질적 모습이 우선 되어야 한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사도 바오로께서도 신자들이 행해야 할 전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전교 주일을 맞아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가라 그리고 전교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사명을 받은 우리에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는 말로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무장하여 산다 해도 전교라는 실천적 행위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우선 실천해야 한다. 일생 동안 단 한 사람에게 전교한 것 빼놓고는 어떤 선행도 행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의 사람으로 선택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자로 삼아라

-김혜윤수녀-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가끔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동급생 청소년들의 이야기였는데 여자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남자아이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둘 사이에 느닷없이 짝사랑이 시작되었고, 여자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남자아이의 성적을 걱정하며 자기의 참고서와 똑같은 것을 선물로 사 주었습니다. 남자아이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을, 선물로 준 여주인공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며 조금씩 읽어가며 이해하려 합니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었는지... 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결말이 기억 안 날 수가 있지...? 하면서도, 아 공부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깨달음이 워낙 커서 다른 건(결말조차도) 기억이 안 나는가보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심각한 저의 건망증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하느님을 억지로 주입시키고 교리 조목들을 강제로 외우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교가 아닙니다. 곁에서 지켜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동적인 사랑이어서 이 기쁜 소식을 자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 복음서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마무리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대미(大尾)로서 다시 갈릴래아에서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이고 가르침의 대부분을 설파하신 곳이며 이제 당신의 지상생활을 마무리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시몬 체허비즈 ‘그리스도의 부활’(1758)

■ 제자가 되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날 장소로 갈릴래아를 언급하십니다.(마태 28,10) 그래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돌아가 예수님을 만나는데(16절)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17절)합니다. 유다인들에게 ‘경배하다’라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경외 때문에 그 앞에서 정말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경배 행위 중에도 제자들 “더러는 의심하였다”(28,17)고 합니다. ‘의심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동사는 ‘디스타조’로서 ‘마음이 갈라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게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 단어는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졌을 때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열한명의 제자들 중 “더러는 의심하였다.”는 표현은 제자들의 불완전함과 결함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해 흔들리고 망설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그대로 놓아두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도덕적 소양이나 교양, 신앙의 깊이와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고상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사랑, 구원의지로 완성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의 결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당신의 현존과 구원의 여정을 교회를 통해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사명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형을 중심에 두고 ‘가다’, ‘세례를 주다’, ‘지키도록 가르치다’라는 내용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분사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부연(敷衍)합니다. 즉 가서, 세례를 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행위는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 따른 부차적 행위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르치고 윤리적인 행동강령들을 제시하며 인류의 공동선을 이룩하는 위대한 과업들을 수행해 오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선교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진정한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리를 배우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할 사안은 우리가 과연 그분의 제자들인가에 대한 정직한 성찰인 것입니다. 제자로 삼을 대상은 “모든 민족들”입니다. 제자의 특권은 그 어떤 차별이나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이며, 이는 보편교회인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를 명확히 표명합니다.

■ 보편적 구원과 그 방법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은 오늘 본문들 안에 유난히 자주 반복(복음과 제1독서, 제2독서, 화답송에까지도)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먼저 선행되어야할 조건으로, 우선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누군가가 ‘선포해야’ 하며, 선포하려면 ‘파견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로마 10,14-15) 그러면서 이 파견이 얼마나 역동적 행위인지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15절)라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복음의 선포와 이를 위한 파견은 단순한 강요나 정치적 정복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특별하고도 긴밀한 관계성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그들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지옥에 갈 불쌍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리고 소개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서 발생하는 능동적이며 아름다운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교’(傳敎)라는 말의 자구적 의미, ‘가르침을 전하다’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강요하고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 전교가 아니라, 우리가 감동하여 믿고 매료된 그 사랑의 관계를 살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전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혼란으로 너무도 낯선 절망이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더욱 명료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충만히 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시니, 이제 우리는 그 경이로운 사랑과 구원의 현실을 믿고 충만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에 말해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자, 주님의 빛 안에서 걸어가자!”(이사 2,5)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송영호신부-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으시기에 불쌍한 죄인인 우리를 예 수님의 피로 씻으시고 구원하시는지…. 주님이 계시어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라 하시니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 이 복음을 세상 끝까지 가서 삶으로 증언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외방 선교사라고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외국에 나가 있던 사람들도 본국으로 돌아오는 이 시기에, 외방 선교사들은 오대양 육대주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머물며 복음을 수호하고, 죽음의 불안도 떨쳐내며 사 랑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대교구 선교 사제들 중 두 분 또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큰 고통을 치렀지만, 귀국하지 않고 끝까지 선교지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하 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박해하는 그 어떠한 상황, 설령 죽음조차도 선교사들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 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이 너무도 크시기에 그 사랑 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특별히 1,000명이 넘는 한국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이들은 부모와 형제, 그리고 고국을 떠나 당신 말씀에 충실하였으니 이들 을 보호해 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시며, 영육간의 건강을 허락하소서.’ 


우리 서울대교구에는 25명의 교구 사제들과, 천주교 서 울국제선교회라는 외방선교회 회원들이 가장 어려운 처지 에 있는 주님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전교에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선교사들과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시고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별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이 그 별에 가 있듯이 그렇게 함께해 주십시오. 먹구름 속의 한 줄기 빛은 환희를 가져옵니다. 곤경에 처한 이 시간들 안에서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 자!”(이사 2,5)는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나기를 바 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정말 그것이 문제입니까?"

-이성주신부-


코로나19 이후 어렵게 세례성사 를 거행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참 으며 기다려준 예비 신자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한 달 뒤에 첫 고 해성사를 하였는데 내심 많이 오시길 기대했으나, 절반 조금 못 미치 는 분들이 오셨습니다. 불참 이유를 알아보니 직장 문제가 제일 컸습니 다. 교리반에 나올 때는 직장에서의 퇴근 시간이 문제가 안 되었는데, 이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전교는 ‘무엇이 문 제인가?’를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쉬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2019년 교구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다가가기 어렵고, 지속하기 어려우며, 떠나도 관심을 안 가져주는 종 교’라고 조사되었습니다. 누가 그런 문제를 만들었는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새 신자들이 직장 문제로 첫 고해를 미루는 것처럼, 어떤 문제가 지금 나의 전교를 미루고 있습니까? 혹시 생각하는 모든 것이, 또 지금 필요성을 못 느 끼기에, 회피하려는 것이 진짜 문제 가 아닙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 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기에 모든 것이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전교는 새 신자를 입교시키는 것과 쉬는 신자를 다시 데려오는 것이 모 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 하는 마음이 이웃에게 진심으로 비 추어진다면 다가가기 어렵고, 지속하기 어려우며, 관심을 안 가져주는 종교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문 제는 있더라도 공동체가 노력하면,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도 와주실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 쇼핑도 인터넷을 통한 언택트(비접촉) 거래가 활발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 최고의 쇼핑 기준은 무료반품 제도라고 합니다. 구매한 음식을 먹어 보고도 마음에 안들면 이유를 불문하고, 반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느님도 무료반품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느님은 반품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택한 우 리를 끝까지 반품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성령의 활동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쉬는 신자, 예비 신자들에게도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전교 주일, 반품하지 않으시고 끝 까지 고쳐주시고, 살려주시는 주님 께 감사드립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 다.”(마태 28,20) “야곱 집안아, 자, 주님 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원재현신부-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에 앞서 제 자들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주시고 떠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 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 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교회는 이 말씀을 따라 사도시대부터 쉬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여 왔으며,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또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유혹과 시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살아가며 지상의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살아있는 공동 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처럼 모든 신자들이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데도 예비자의 수가 감소하거나 냉담자가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경제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것에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 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신앙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차지하 고, 재물의 축적이 선행과 사랑의 행위보다 삶 안에서 우 선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지금 현 교회의 모습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간과하 지 못할 것입니다. 어둡고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시대와 현실 속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마치 정치인들이 국민의 행복보다 당리당략(당의 이익 당의 전략)을 더 우선시하 듯이, 교회도 세상과 사람들의 행복보다 교회의 이익만 을 우선시하고 있지 않은지 많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신자수를 늘리고 땅을 사서 성당을 분가시키고 크고 화려 한 성당을 짓고 여러 가지 행사로 신자들을 단합시키고 즐겁게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지켜나감으로써 진정 삶의 평화 와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 다 중요합니다. 


주님의 은총은 주님과 함께 주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 람들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 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만이 주님과 함께 함으로 써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복음 선포를 위해 언 제나 배우고 익히며 지켜나가도록 실천하는 일에 전념해 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믿지 않는 이들이나 교회를 떠난 이들에게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기쁨과 희망 을 되찾아 줄 때,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머무르심으 로써 은총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파견되어 선포하는 사람

-이재선신부-


전교 주일입니다. 선 교라고도 하고, 복음화 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 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 처럼, 예수님께서 승천 하시기 전에 당신 제자 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수행하라고 말씀하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세례 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교회의 이 선교사명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선교의 과정을 이 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하느님을 받들어 부르 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누군가로부터 하느님 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들으려면 누군가 하느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누군가 하느님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파견되어야 합니 다. 이렇게 파견된 누군가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이 선교 과정에 있어서 파견되어 선포하는 사람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복음이라도 선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100원짜리 볼펜이라도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나눠줘서 받아온 볼펜과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건네준 볼펜은, 같은 100원짜리 볼펜이지만 나에게 있어 각각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복음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아직 들어본 적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의 가치를 선포하는 사 람을 통해 가늠해 보기 마련입니다. 실제로도 예비자분들 중 많은 분들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보여준 삶의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의 신앙과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때 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직접 말로써 신앙을 권유 하거나 복음을 선포하지 않더라도, 세상 속에서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선포이며 선교 인 것입니다.


근래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신앙인들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앙에 소홀해지는 모습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좋 은 모습이든 그렇지 못한 모습이든,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모습 그 자체가 각자의 복음선 포이며, 교회의 선교사명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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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광고로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보니, 결혼정보회사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회사는 결혼 정보를 통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인연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결혼정보회사 안에는 등급표가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등급으로 매긴다는 것이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비슷한 조건의 만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등급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분명히 세상이 바라보는 기준입니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는 삶,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살아야 결혼도 가능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는 가톨릭 신부로 살기에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삽니다. 그만큼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저입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살고 있어서인지 저 역시 일정 부분 세상의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세상 기준에 맞추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저만의 고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기준에 맞춰서 사는 삶은 이제까지 충분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주관적으로 나만의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뜻에 벗어나지 않는 길이면 분명히 응원해주시고 지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모두 다른 모습을 창조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을 제자들 손에 맡기시고는, 온 세상으로 나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굴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뒤 부활하심으로써 당신께 합당한 영광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현재의 어려움만 보지 않고, 머지않아 와서 영원히 계속될 좋은 것들도 바라보도록 만드시고자, 그들에게 세상 끝 날에 대해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으로 믿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만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힘차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역경은 당신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준다(앤디 그로브).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하기.

학창 시절,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모두 운동장에 나가 조회를 한 달에 한 번은 꼭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시간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꼼짝 못 하고 오와 열을 맞춰서 그냥 서 있어야 했지요.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는 그 시간은 너무 길기만 했습니다. 실제로 여름에는 픽픽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는 4절까지 부르고, 시상식도 있어서 상 받는 사람은 호명되어 앞에 나가고, 그 뒤에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12년 동안 얼마나 많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단 하나의 말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학생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학생들은 국가가 어떻고, 교육이 어떻고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놀고 있는 내용을 들어 이야기하셨다면 귀를 쫑긋 세워서 들었을 테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냥 “네 입장을 알아, 이해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동행과 선교는 동의어

-전삼용신부-


오늘은 선교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을 지니고 있으니 그 사람은 기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보좌로 있을 때 저는 본당 신자 할머니에게 선교를 받았었습니다. 본당 보좌 신부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성당에 다니라고 선교하시던 그분의 발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예전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선교가 몸에 배어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해야 할 소명 하나만 말하라면 그것은 선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며 앞에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하시는 제자들 앞에서 왜 당신의 권한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복음선포를 인간의 힘으로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교의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선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에게까지 선교하려고 하셨던 그분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허락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저절로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얼마 전에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한 ‘이수영 회장’(83)이 화재였습니다. 이 회장은 처음에 기자로 활동하였었습니다. 1976년도에 그녀는 이탈리아로 관민 합동 경제사절단 수행 기자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카메라는 아사히 펜탁스였고, 그때 자기 옆으로 일본 관광객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옷을 여며 카메라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인이 일본 카메라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어 한국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게 해 달라고 카이스트에 재산을 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기부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부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이 회장은 기부한다고 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돈을 가지고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됩니다. 같은 서울대 법대 출신 첫사랑과 81세에 한 가정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며 이 회장은 암을 앓게 되었습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때에 신랑이 말을 했습니다.

 

“아니 왜 유증을 한다고 그러고서는 안 해?”

      이 말에 더는 머뭇거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TV에서 카이스트 총장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바로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기부는 이 회장이 한 것이고 이 회장의 돈으로 한 것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준 것은 신랑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신랑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반대했다면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 옆에서 선교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선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선교하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것이고, 선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사랑의 법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은 밥을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훨씬 큰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밥을 주어야 영원한 생명도 관심을 두게 합니다. 예수님과의 동행,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현대 사장보다 연봉이 높은 판매 영업부장이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연봉은 10억 2천 7백만 원입니다. 게다가 판매 실적에 따라 성과보수도 받습니다. 그는 17년 연속 우리나라 자동차의 판매왕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가 평생 13,001대를 팔았는데, 이분은 12,705대를 팔았습니다. 아직 50대 중반이 안 되었으니 이 기록은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특별한 판매 전략이 있느냐고 물으니 특별한 게 없다고 대답합니다. 누구나 다 쓰는 노트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본 것은 이분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렇게 충실하게 약속을 지키니 그 얼굴에 신뢰심이 발산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언변이나 상술보다 그 얼굴에서 풍기는 것 때문에 더 신뢰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 신뢰가 얼굴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뢰가 가는 삶이 모습에서 신뢰가 배어 나오게 만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믿고 차를 사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면 그렇게 일어나도록 옆에서 부추기던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신이든,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만 자신을 이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선교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죄의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외모에서 신뢰가 풍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굳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보며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 모습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는 이렇게 멀리 나가기보다는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이에 ‘동행’과 ‘선교’는 결국 같은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신학생 때입니다제의실에는 책들이 있었습니다수녀님께서 복사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마련해 놓으셨습니다지금도 기억나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큰 나무는 소년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습니다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책도 읽었습니다청년이 된 소년은 배가 필요했습니다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 주었습니다청년은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노인이 된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어릴 때 그늘이 되어 주었던 나무는 이제 노인을 위한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소년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고청년에게는 배가 되어주었고노인에게는 쉼터가 되어 주면서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내용입니다이제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셨습니다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연탄장사쌀장사밥장사를 하셨습니다강철 같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체력이 다하셔서 많이 아프셨습니다일을 하지 못하실 때는 자식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셨습니다신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께서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도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썼던 쉘 스타인벡의 작품입니다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습니다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잘 구를 수 없었습니다빠진 이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꽃을 만나고풍뎅이를 만나고구름을 만나고소나기를 만나면서 잃어버린 짝을 찾았습니다어떤 것은 너무 커서 맞지 않았고어떤 것은 너무 작아서 소용이 없었습니다드디어 짝을 찾았습니다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맞는 짝이었습니다완벽해진 동그라미는 거침없이 구를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구르기만 할 뿐 꽃도풍뎅이도구름도소나기도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같이 구르는 짝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다시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조금 불편하지만조금 늦게 구르지만 편안했습니다꽃도 보고하늘도 보고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행복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행복은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고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제의실에서 복사들이 읽는 동화이지만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신학적인 깊이와 철학적인 통찰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미주 지역에서 교회의 소식을 알리고복음의 기쁨을 전했던 가톨릭 신문이 폐간 되었습니다이제 미주 지역에는 가톨릭 평화신문만 남았습니다같이 있을 때는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었습니다서로 정보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북미주 사제회의에도 함께 참석했습니다의지할 수 있었고도움이 되었던 가톨릭 신문의 폐간 소식을 들으면서 안타까웠습니다코로나19로 팬데믹 상황이 오래가면서 경영의 어려움이 생겼다고 합니다가톨릭 신문을 사랑하시고 구독해 오셨던 독자들에게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가톨릭 평화신문도 어려움이 있습니다가장 큰 어려움은 구독자의 감소입니다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홍보를 갈 수 없는 것도 어려움입니다북미주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교회의 소식지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기존에 가톨릭 신문을 구독하셨던 분들은 가톨릭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북미주에 계신 본당 신부님들께서 유일하게 남게 된 가톨릭 평화신문을 아껴주시고사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북미주 신앙공동체를 위한 매일미사에 가톨릭 평화신문에 대한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기회가 주어지면 본당으로 홍보를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우리도 우리가 가진 신앙을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전교를 열심히 하시고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많이 배웠거나시간이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시장에서 힘들게 장사를 하시는 분도 있고대학 공부를 못 하신 분도 있고가정일도 하고직장 일하기 때문에 바쁘신 분들도 있습니다그럼에도 그분들이 전교를 많이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그것은 예수님의 전교 방법을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전교했을까요?

 

첫째예수님은 몸으로 뛰셨습니다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나셨고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만나셨고부유한 자와 가난한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셨습니다하지만 가난한자 병든 자외로운 자를 더욱 많이 만나셨습니다그리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셨고힘을 주셨고용기를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전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행동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기도 하셨고언제나 섬기는 자가 되라 하셨고자신의 십자가를 먼저 지라 하셨고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양들을 푸른 시냇가로 인도하고비가 오면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며사나운 짐승이 나타나면 지팡이를 들고 지킨다고 하셨습니다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셋째예수님은 혼자 하시지 않고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부족하고나약하지만 제자들을 신뢰하셨고제자들에게 힘을 주셨고제자들과 더불어 전교 하셨습니다하늘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은데서 시작하지만 엄청난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분이셨지만 기다려 주셨고인내해주셨고함께 하셨습니다.

 

넷째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피눈물이 나도록 기도하셨고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습니다그래서 누워 잠을 자고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기도는 바로 전교의 힘이며기도는 바로 전교의 발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습니다비록 가진 것은 없으셨지만비록 내일 어찌될지 기약은 없으셨지만 늘 당당하셨고자신감이 있으셨습니다당당한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셨고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으셨고오히려 그 불의와 권력을 야단치고호통을 치셨습니다하지만 가난하고지치고힘든 자 앞에서는 늘 자비를 베푸셨고늘 그들에게는 약하셨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짧은 글인데 제게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복음을 전하는 것자선을 베푸는 것사랑을 나누는 것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좋아하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을 좋아 했으면 좋겠습니다그러면 우리의 행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을 구독하셨던 분들께서 평화신문의 구독을 원하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peacetimes93@hotmail.com 으로 성함주소전화번호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말을 잘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 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비대면 시대를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하게 되는데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부모와 함께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네 살짜리 꼬마가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나중에 신부가 되고 싶어요!” “그래? 좋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당에서 지루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서서 떠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요!” @@


복음화를 할 것인가? 세속화를 당할 것인가?♣
-송영진신부-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고,
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선교활동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또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전문적인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그냥 혼자서 조용히 신앙생활 하면 안 되나?”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답은 “안 된다.”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말로만, 생각으로만, 마음으로만 믿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이 말씀은, “자신의 빛을 감추지 마라.” 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을(복음 선포 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구원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모든 사람들 앞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자신이 받은 빛을 혼자서 간직하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 앞을 비추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빛은 결국 꺼지고 말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받은 빛을 스스로 끄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조욱현신부-


오늘은 전교주일이다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오늘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이 선언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선교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공의회로 남을 것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 15).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는 것이며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같은 곳).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원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고 했다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원천적사랑에서 나오고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마태 28,16-20: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1,23)이시다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 19)

-한상우신부-

어울러야
아름다운
자연의 생생한
모습이다.

복음화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나눔이다.

사랑은 이와같이
나눔의 힘으로
드러난다.

서로를 아름답게
변화시킨디.

나눔이라는
복음화는
서로를 살린다.

나눌 때
생명은 더욱
아름답다.

나눔은
복음화의
본질이다.

나눔은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있다.

서로를 환하게
비추어준다.

참되게 사는
것이 복음화의
모습이다.

복음화는
신앙인의
참된
실천이다.

나눔과 사랑이
서로를 위한
구원이 된다.

복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이다.

복음화는
삶의 의미이다.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무의미한 삶이
기쁜 삶으로
바뀌게 된다.

복음화는
나눔으로
함께하는
기쁨이다.

우리를
살아나게 하는
복음화이다.

복음화
되어가는
만남이길
기도한다.

이렇듯 올바른
실천이 있는 곳에
복음이 있고

복음이 있는 곳에
서로를 살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화가 있다.

복음과
복음화 사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이 있다.

복음화는
삶으로
전교한다.

전교는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

복음을 나누는
삶의 기쁜
주일이다.

복음화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상호존중에서
시작되는
참기쁨이다.

삶을 위한
복음화이며
사랑을 위한
복음화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마태 28,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선 떠남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파견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움직여서, 주님의 잠재적 자녀가 있는 곳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가서"

교회는 움직입니다. 길 위를 걷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유연해야 합니다. 새로움과 변화를 경계하지 않고, 만나고 적응하며 포용합니다. 이런 가치를 망각한 선교는 성가신 방해물로 전락하거나 자칫 일방적인 폭력까지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의 주님"(로마 10,12)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우리가 은총을 입어 일찌기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끼리 독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 가슴에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이가 자녀로 새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파견"된 이를 통해 복음이 "선포"되고, 이 선포된 말씀을 "들은" 이가 "믿게" 됩니다. 아직 당신 날개 아래로 모여들지 않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과 애틋함이 우리에게 떠나라고 들썩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안에 절절히 흐르는 이 사랑과 그리움에 물든 이가 "가서"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주님 날개 아래로 모여드는 가슴 벅찬 축제의 날을 이야기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이사 2,3)


주님의 산은 시나이산이나 예루살렘 등의 특정 장소 개념을 넘어섭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주님의 산은 거룩한 곳, 사랑과 헌신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교회나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인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우리를 만난 이들이 말씀을 듣고 믿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를 향해 돌아서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법을 익힙니다. "주님의 산"은 길 위로 나선 교회를 통해 확장되고 성장하여 언젠가 완성의 날이 오면 천상 예루살렘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고인 물이 되지 말라고, 멈추어서 안전지대 안에 자신을 가둔 채 고착되지 말라고 흔듭니다. 목마른 사람이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미적대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는 교회가 아니라, 찾아 나서는 교회, 직접 찾아가는 교회, 길 위에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아직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한 채 삶의 굴레에 짓눌린 이들에게 하느님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 주는 일,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격려하는 일, 우리가 초대된 구원의 길은, 마음이 요구하는 선을 실천함으로써 나누시고 헌신하시고 사랑하신, 선한 주님을 닮아가는 길임을 보여주는 일이 곧 선교가 아닐까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길을 나서는 것은 사실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미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이 약속에 힘 입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코로나19 감염증 사태 때문에 물리적으로 찾아가는 행보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혼돈이 좀 더 지속된다니, 그저 손 놓고 마냥 멈추어 있을 수만도 없지요. 그래도 서로를 잇는 수단들이 다양히 존재하고 활발히 작동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서로를 기억하고 기도하며 따스한 관심과 안부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안의 한 형제임을 확인하고, 확인시켜 주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당장 먼 이국 땅까지 날아가기는 어려워도,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님의 목소리와 온도와 향기가 되어 줄 수는 있으니까요.

세상 모든 이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녀로서의 신원을 충만히 살아가길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편 네편 가름 없는,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복음이 민족에 갇혀서는 안 되기에   

-김찬선신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인 오늘

민족주의자인 제가 이 강론을 하는 것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옛날의 저는 국수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민족주의가 강해서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만 생각했고,
그만큼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지요.

그래서 다른 나라 말은 배우려고 들지 않았고, 우리 민족이 배달의 민족이며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을 싫어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 깨진 것이 필리핀에 처음 갔을 때였는데
그들은 순혈이 아니라 혼혈을 오히려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깨진 것이 제가 미국에 있을 때인데 세계의 경찰국가 노릇을 하는
것 때문에 제가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민족이 한 나라를 
이루고 사는 것을 보면서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조금 줄어들었지요.

그래도 민족주의적인 것이 여전히 강하게 있고 또 거기에서 느낀 바가
있어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북한 관계 일을 강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갈라진 우리 민족의 통일에 이바지해야겠다는 생각과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한창 어려울 때라 인도적인 지원이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북한 사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통일과 인도적인 지원도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사제로서
더 중요한 일은 북한의 복음화라는 반성과 성찰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문을 여는 차원에서 어떻게든지 제가 북한에 들어가
상주하는 길을 찾기 시작했는데, 북한은 종교인의 상주를 허용치 않기에
상주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을 종교적으로 여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자 
북한뿐 아니라 가까이는 중국, 일본, 대만,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멀리는
터어키나 중동의 여러 나라에까지 복음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제가 외국에 나갈 수 없지만 이곳에 와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교 협동조합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복음은 민족을 초월해야 하고,
복음이 한 민족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 때문인데
이것은 민족을 늘 최우선에 두던 제가 이제는 하느님과 복음을
최우선에 두는 쪽으로 가치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뿐이 아닙니다.
민족에 갇혀 있던 저의 이웃 사랑이, 아직도 부족하지만,
우리 민족을 넘어 다른 민족에게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며칠 전 저희 형제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지금 터어키 에페소에서 선교하고 있는 형제인데,
자신의 선교 성소를 정리한 글을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하고 있는 일들 중에는 시리아 난민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 난민들을 지원하는 일도 있는데 선교 위원장을 할 때
우리 선교와 직접 상관이 없는 먼 곳의 그들을 지원이라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저도 지원하는 일에 한몫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교와는 무관한 인도적인 사랑 실천으로만 보이는데
왜 이런 일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까? 진정 선교와 무관한 일일까요?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선교에 두 가지 형태가 있음을 얘기합니다.
"파견되는 형제들은 그들 가운데서 두 가지 방법으로 영적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1베드 2,13)
아랫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직접 세례를 주는 선교도 있지만 타 종교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하며 겸손하게 공존하는 것도 선교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고인현 신부(OFM)


    오늘은 연중 제 29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전교)주일입니다. 복음화'란 말과 '선교' 혹은 '전교'라는 말은 같은 의미의 말은 아니지만 교회는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주일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전교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화’ 라는 용어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널리 사용하게 된 용어입니다. 이전에는 주로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복음 선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의미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재해석하게 되었고 ‘선교’를 대신하는 교회의 공식용어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는 ‘선교’란 용어를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선교는 ‘파견’을 뜻하는 것으로 복음 선포자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민족이나 지역에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활동을 지칭하며(선교교령6항 참조), 그러한 지역을 전교(포교)지방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리고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는 초기적 선교단계와 구분하여 이미 성세성사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의 영적생활을 돌보는 활동을 사목이라 하여 세분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화는 보다 풍부하고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 행위뿐 아니라 교회의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즉 종래의 ‘선교’와 ‘사목’의 의미는 물론이고, 복음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위반되는 모든 인간적인 판단 기준, 사상의 동향 그리고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을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는 활동까지를 폭넓게 의미합니다 (현대 복음 선교 17, 18, 19항 참조).

    그러므로 복음화는 이 세상을 창조주와 구원자의 뜻에 부합하도록 변화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과 활동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자신이 먼저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 내적으로 변화되어 새사람으로 거듭난 기쁨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화는 우리 각자가 속해 있는 가정, 직장, 뜻을 같이하는 구성원 공동체 등에서 이루어집니다. 복음화는 여러 차원이 있겠지만 크게 3가지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말씀선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신앙은 말씀을 통한 복음 선포를 전제로 합니다. 교회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고, 이루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입니다.

    두번째는 삶의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 복음화 되는 것입니다. 언행이 일치된 신앙 생활은 가장 강력한 살아있는 복음 선포가 됩니다. 복음화에서 중심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며, 무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품어 안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신 그분의 사랑을 삶으로 증거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사생활입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해설하는 말씀의 선포를 복음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성사로 말미암은 내적 변화와 새 생활은 그 도착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사생활, 특히 성체성사의 생활화는 복음화의 정점을 이룹니다. 이 성체성사의 삶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삶입니다.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