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루가 12,1-7)
I shall show you whom to fear.
Be afraid of the one who after killing
has the power to cast into Gehenna;.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손오공이 온갖 법술을 익혀 소란을 피우자 부처님은 그를 붙잡아 “내 손바닥을 벗어나면 소원을 들어주고 그렇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 말합니다. 이에 손오공은 의기양양하게 근두운을 타고 날아 구름 위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신나게 달려 우주의 맨 끝자락이라고 여겨지는 곳에 있는 기둥에 ‘손오공 다녀가다.’라고 쓰고서는 부처님한테 돌아와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가 쓴 글씨가 부처님 손가락에 쓰여 있었습니다. 수만 리를 날았건만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게서 손오공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뛰어 보았자 그분 손바닥 안에 있고, 하느님 앞에서 숨어 보았자 그분 손바닥 안에 있을 뿐입니다. 대중가요 가운데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 연인에게 구속당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 구속이 자신에게는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속당하는 것도 답답하고 무서운 구속이 아니라, 아름답고 든든한 구속입니다.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그분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130[129],3 참조)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사랑으로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아름다운 구속’을 당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이 말씀에 따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고 위선과 불의에 당당히 맞서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호등이 바뀌었으니 보행자가 있어도 상관없이 앞으로 내달리면 될까요? 아닙니다. 보행자가 안전할 때까지 지나간 뒤에야 신호대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통법규는 자동차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율법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보다 율법이 위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사랑보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위에 올라갈 법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칙이 더 위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보지 않고 율법을 먼저 봤던 과거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 율법을 가지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맨 위에 올려놓지 않는 사람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은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시지요. 그분께서 제일 강조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과 뜻을 같이하며, 삶도 죽음도 겁내지 않은 아브라함 같은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보살핌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며, 이로써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예전에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가 큰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마데우스 포스터를 본 어떤 분이 “잘못됐는데?”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잘못된 것을 찾을 수 없어서 어떤 점이 이상한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피아노를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알고 있는 피아노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피아노 건반의 검은색과 흰색 위치가 반대였다고 하더군요. 흰 건반 재료였던 코끼리 상아의 가격이 훨씬 비싸서 지금과 정반대의 배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상아 대신 아크릴을 쓰게 되면서, 흰 건반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차르트가 쓰는 피아노는 검은색이 주를 이루어야 정상이라는 것이지요.
상상을 해보십시오.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피아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처음의 피아노가 그러했고, 당시에는 아무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것들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고정관념으로 내 사고 자체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안 믿으면 위선자가 되는가?
-전삼용신부-
지금까지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위선이란 거짓말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하는 것이 위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은 곧 드러나게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위선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자신을 가리키면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알았지?”
이 말을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신은 유학도 다녀온 학생이고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도 일류대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중국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중국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부러 유창한 중국어로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그 아주머니는 아주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에서 그 아주머니에 대한 질타는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누가 더 위선자일까요? 아주머니일까요, 아르바이트생일까요? 물론 어머니도 잘한 것은 없지만, 더 위선자는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높이려 한다는 말은 스스로 낮게 느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 즉 위선입니다.
저도 로마에서 공부할 때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키 작은 동양인으로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 카페나 식당에 가면 주문을 영어로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눈이 동그래지며 집중해서 주문을 받습니다. 영어만 해도 존중받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을 때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해 줍니다. 그 사람이 볼 때 얼마나 재수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몇 년 동안 당한 설움을 이런 것으로 갚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위선입니다. 위선은 그러니까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에 대한 낮은 평가를 높여보려고 자신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초대한다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위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이런 위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솔직하려고 노력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사람은 본성상 인정받으려 사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만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빈 화분』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꽃을 무척 사랑해서 꽃을 키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아이가 키우는 꽃들은 언제나 가장 좋은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그 나라의 임금도 꽃을 좋아했습니다. 궁궐의 정원은 온갖 희귀하고 예쁜 꽃들로 가득했습니다. 문제는 임금이 자녀가 없어 후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자신이 아끼는 꽃들을 보며 꽃을 잘 가꿀 수 있는 아이를 찾아 후계자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방을 붙여 꽃을 잘 키우는 아이들은 다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각양각색의 꽃씨들이 들어있는 항아리에서 아이들 각자에게 하나씩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 년 뒤 가장 예쁘게 꽃을 피워오는 아이에게 나라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작은 화분에 가장 비옥한 흙을 넣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화분에 넣은 꽃씨에서는 새싹이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몇 달 뒤, 아이는 꽃씨를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도 그 화분에서는 꽃이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봄이 오자 다른 아이들은 각자가 피운 꽃들을 들고 임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임금님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감히 임금에게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빈 항아리라도 들고 임금에게 가보라고 권합니다. 아이는 맨 마지막에 빈 화분을 들고 임금에게 나아갑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꽃씨들은 다 삶은 것이었느니라. 꽃을 예쁘게 피우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이 더 아름다운 것이니라.”
이렇게 그 나라는 진실한 아이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아이가 진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선을 다한 자기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진실하게 만듭니다. 열등감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면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유일한 분이 하느님임을 안다면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으면 더는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하늘의 임금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하늘 나라를 상속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빈 항아리가 오히려 큰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런 비천한 나를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나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나를 인정해주신 분을 드러내려 힘씁니다. 나는 드러낼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만이 위선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고 하십니다.
진실해지려고 진실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부터 인정받는다고 진실해지지 않습니다. 더 위선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평가는 나의 위선을 키우는 물주기에 불과합니다. 더 높은 존재에게 인정받아야만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진실해집니다.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 자유인이 되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심을 믿는 길뿐입니다. 그 방법은 그분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시며 나를 인정해주시기에, 나는 그 기쁨에 쉬지 않고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돌리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네티컷의 한인 성당은 Sacred Heart Church 이고 필라델피아 한인 성당은 Holy Angels Church입니다. 코네티컷 성당은 뉴욕에서 북쪽에 있고, 필라델피아 성당은 뉴욕에서 남쪽에 있습니다. 급한 성격에 필라델피아 성당을 가야하는데 Sacred Heart를 보고 내비게이션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차가 자꾸만 북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상해서 다시 검색하니 제가 코네티컷 성당으로 검색을 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Holy Angels로 바꾸어서 다시 남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면 되는 것을 서두르다보니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0분 만에 길을 바꾼 것입니다. 어르신들의 말이 맞습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였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독버섯이 색이 좋고, 화려해 보이듯이 사탄의 깃발은 화려하고 좋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명예, 권력, 재물’이 가득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을 향해 나가지만 그런 것들은 바닷물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작고 초라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가난, 순명, 정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향해 길을 떠난 사람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깃발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면 지금이라도 그리스도의 깃발을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신앙은 그것을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생 수녀님이 어머니께서 작년에 쓰신 글을 보내왔습니다. “오늘은 신부님이 뉴욕으로 발령을 받아 섭섭하다고 식구들이 모여 밥 먹었다. 이날은 8월 18일이다. 신부님은 8월 21일 날 출국했다. 나는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54일 기도를 바치고 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의 기도 노트를 찾았다고 합니다. 생각이 났습니다. 형님 가족, 동생 수녀님, 작은 아버지 가족, 이모님 가족이 어머니가 계셨던 요양원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모두 기억하고 계셨고,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사셨으니 이제는 천국에서 아버님과 함께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깃발을 따라왔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안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 둘도 없이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유다인들은 고단백질 섭취원으로 소나 양, 염소 고기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축들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가끔씩 기름진 고기 맛을 봐야했었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라 소나 양, 염소는 꿈도 못꾸었습니다.
차선책으로 그들은 참새구이를 즐겨 먹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몇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은근 맛있고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참새 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도 생겨났고, 시장에 가면 살아있는 참새가 매매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 사온 참새는 깃털을 뽑고, 내장을 빼낸 다음, 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불판 위에 얹어 돌려가며 구웠습니다. 가성비가 높다보니 참새는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식재료로 손꼽혔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세법 관련 고대 비문에서는 식품으로 활용되는 모든 조류들 가운데 참새가 가장 저렴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참새의 저렴함에 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복음 12장 6절)
예수님께서는 세상 둘도 없이 하찮은 존재의 대명사로 참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요, 참새보다 몇천만배 더 소중한 인간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시겠냐는 것입니다.
마무리 말씀 또한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특히 탈모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천만 탈모인들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 복음 12장 7절)
물론 예수님 말씀의 진의가 이미 사하라 사막처럼 폐허가 되어 버린 이마를 무성한 수풀처럼 복원시켜주시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각별히 여기시며 눈여겨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와 일대 백이 아니라, 일대 일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황공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며, 나와 매 순간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 속에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엔 나혼자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쌓여있고 아군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도 버려야겠습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 둘도 없이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더 이상 흔들리지도 말며, 안심하고 기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존재
-반영억신부-
무엇인지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고, 알지만 말을 않는다면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고요를 찾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감사도, 침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기도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서운함 없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루카12,7)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떤 것을 아는 체, 가지고 있는 체하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만져놓고서는 향내가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고 겉꾸민다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바를 가슴에 새기고 또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본당 생활을 하다 보면 피정이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더 교만해지고, 뻣뻣해지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됩니다. 받은 은총을 말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이지만, 야훼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잠언21,2).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만큼 삶의 모범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은총을 증거 하지 못한다면 바리사이의 위선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각자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하느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괜한 욕심과 바램 때문에 위선을 떠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큰 만큼 정의도 살아있습니다. 정의로우신 분은 불의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
-송영진신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루카 12,2-3).”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율법주의,
현세주의적 사고방식 등에서 생기는 ‘악한 영향력’을 뜻합니다.
“누룩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이고,
“위선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위선자들인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즉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라는 말씀을
앞의 1절에 이어진 말씀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위선은 하느님의
심판 때에 모두 드러날 것이고,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뒤의 3절에 이어진 말씀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알려라.”,
즉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을,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듣고 알게 될 날이 올 것이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복음 선포에 동참한 사람들은
그날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겠지만,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라의 영광에서 제외될 것이다.” 라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어두운 데에서 한 말,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일을 가리키고,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일을 가리킵니다(마태 10,27).
이 말씀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됩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혼자서만 알고 있으면 안 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전할수록
더욱더 생명력이 강해지고 기쁨이 커지는 소식이지만,
반대로 혼자서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생명력이 점점 약해지고, 기쁨도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기름이 떨어진 등잔의 등불이 꺼지듯이
생명력도 기쁨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4).”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보면 박해도 받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냉대와 배척도 당할 것입니다.
그런 일에 겁먹지 말아야 하고, 기가 꺾여도 안 됩니다.
선교활동은 ‘내가 나의 일’을 하는 활동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수님의 동료로서(벗으로서) 도와드리는 활동입니다.
박해자들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육적인 것들,
또 육신의 목숨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신앙인은 이미
육적인 것들과 육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니 박해자들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잃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
여기서 “두려워하여라.”는 “무서워하여라.”가 아니라,
“경외하여라.”, 또는 “섬겨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신앙인은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과정”
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한’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만 섬겨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가르침을
“힘들어도 신앙생활을 중단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종교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반대로, 사는 게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 라고 일방적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무엇 때문에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남이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도와주지는 않고 나무라는 말만 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이고,
힘들어 하는 그 사람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나 자신이 바로 힘들어 하는 그 당사자일 때,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될 때,
지금 겪고 있는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그저 눈앞이 캄캄하다고 느껴지기만 할 때, 그때 더욱더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아파할 때 주님께서도 함께 아파하시고, 내가 슬퍼할 때
주님께서도 함께 슬퍼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절망 속에 방치되는 것을 결코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고,
간절하게 구하고 찾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반드시 주님의 도움이 온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6-7).”
“사는 것이 무섭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신앙인은 죽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인생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전체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
저쪽 세상에서 우리가 살게 될 진짜 인생의 서막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하찮은 존재로 멸시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아주 귀한 존재로 아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1-7: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절)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겉꾸밈, 즉 위선을 말한다. 위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보상도 없으며, 구원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저주를 부른다. 위선으로 잠깐 자신을 숨길 수 있으나, 결국은 본 모습이 드러나 망신을 당한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4-5절) 하신다. 그분은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마태 10,28) 분이시다.
그분만이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인 자를 두려워하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그분은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까,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할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할 때, 즉 당신의 말씀과 뜻 그리고 당신의 일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차지할 수 있게,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율법 교사나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를 주시려고 주님께서는 단돈 두 닢에 팔리는 참새 다섯 마리조차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지 알 수 있다. 미물들까지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알고 또 올바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외면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이 재현되지나 않는지? 그분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증언하고 있는지? 이러한 여러 가지를 반성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성소이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 7)
-한상우신부-
하늘도
나무도 꽃도
사람도
소중함의
시간을
살아간다.
살아가는 것이
소중함의
재발견이다.
소중함은
소중함을
알아본다.
소중함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이다.
소중함으로
하나가 된다.
우리는.
소중함을
되찾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우리모두
소중한
자녀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존귀함을
뜨겁게 다시
체험한다.
소중한
순간이다.
소중함은
소중함으로
이어진다.
소중함의
역사이다.
복음은서로를
귀하디 귀한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하느님의
보살핌속에
너도 나도
살아간다.
보살핌속에서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를 더 귀하게
만든다.
서로를
더 귀하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모두 소중한
하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
수많은 군중이 서로 밟힐 정도로 몰려든 상황인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이들이니, 군중보다 더 직접적으로 바리사이들의 음모에 직면한 상태일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을 누룩으로 표현하시면서, 곧바로 "위선"이라고 덧붙이십니다.
누룩은 물질을 부풀게 하고 성숙시키지만, 썩게도 만들지요. 부패하면 불결해지고 오염시킵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백성을 가르치니 그 가르침은 따르되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마태 23,3 참조) 지혜의 눈을 크게 뜨고, 바리사이들이 가르치는 하느님 말씀과 그들의 위선을 분리해서 대처하라는 뜻 같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4)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 권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것은 공동체에서 배척과 소외를 당하는 형벌이었지요. 소박한 민중에게는, 율법의 열쇠를 쥐고 심판과 단죄의 권한을 행사하는 이들이나, 박해와 생사여탈권을 쥔 정치 권력자들이 두려움의 대상이기 마련인데, 예수님께서는 한낱 현세의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현세의 권한뿐 아니라 내세의 권한까지 쥐고 계신 분을 두려워하라고요. 두려움의 문제는 시선의 문제지요. 육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경외란 그분께 눈길을 두고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예수님은 이 담화를 마무리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결론 지으십니다. 두려워해야 할 분은 고작 지상에서 세력을 휘두르는 권력자가 아니라, 창조주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신데, 그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존재시니까요. 수많은 참새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귀하고 소중한 인간을 못본체 하실 리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믿는 이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11)
우리는 하느님의 의향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은 이들이지요. "한몫"이란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권리를 차지했음을 의미합니다.(에페 1,12 참조)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분 곁에서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복직관의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아직 지상 순례길을 걷고 있든 천상의 삶으로 옮겨 갔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이야말로 특은의 주인공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에페 1,14)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시어 친히 우리 영혼에 당신을 새겨넣으십니다. 우리 존재 깊숙이 각인된 성령의 날인은 우리의 신원이 되고 정체성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이름으로 불리며 얼마나 누렸든 성령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첫째 소명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사람과 사건과 사고에 대한 온갖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을 확신하게 도와주십니다. 성령과 함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딛고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이 우리 소명이니 성령께서는 반드시 이를 완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찬양하는 이는 사랑하는 이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지요. 비록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녹록치 않고 고통의 파도타기는 끝날 줄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하는 기도를 그치지 맙시다. 이 기도가 천상의 영원한 행복과 이어질 때까지 멈추지 맙시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가 되어 주시고 사랑 고백이 되어 주시며 찬양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찬양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시는 벗님을 응원합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화답송)

조심해야 할 것과 두려웧해야 할 것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조심과 두려움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어제까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너희는 불행하다."고 하시고,
오늘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르침이랄지 지침을 주시는 겁니다.
우선 바리사이를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그들의 위선을 닮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여기서 주님은 위선을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누룩이란 어디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부풀리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불행하게 만드는 이 위선이라는 누룩을 우리는 왜 허용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정말로 좋은 명품 가방을 갖고 싶지만
돈이 없어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짝퉁 가방이라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짝퉁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나만 만족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나만 만족하면 되는 거라면 짝퉁을 가져도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는 것이 하나의 문제이고,
짝퉁으로 만족하기에 진짜 좋은 명품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의 문제입니다.
위선도 정확히 똑같습니다.
위선이란 거짓 선 또는 가짜 선인데
거짓 선을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하고,
거짓 선으로 만족하여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그 지상至上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노력하지 않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 위선이 우리 안으로 누룩처럼 들어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선으로 다가오지만 실은 우리를 불행케 하기 때문에 악인
위선은 조심 정도만 하면 되는데, 조심을 넘어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고,
반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음을 주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가 싫어하는 것,
곧 악이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 곧 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
곧 악이나 십자가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왜냐면 하느님은 앞서 봤듯이 참으로 좋은 분이시고,
그분 없으면 나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도 없기에
하느님이 나를 떠나가 안 계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겠지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반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요.
죽음과 고통이고, 이런 것들을 내게 주는 사람들인데,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작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도 주시고
영원한 죽음과 고통에 떨어지게도 하시는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 고통은 이 세상 사는 동안이고 짧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것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뭡니까?
그것은 현재의 두려움과 미래의 두려움,
가까운 두려움과 먼 두려움의 차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발밑도 봐야겠지만
발밑의 땅이 꺼질까봐 멀리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루가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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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려 한다는 말은 스스로 낮게 느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 즉 위선입니다.
위선은 그러니까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에 대한 낮은 평가를 높여보려고 자신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초대한다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위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이런 위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솔직하려고 노력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사람은 본성상 인정받으려 사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직 우리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진실해집니다.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 자유인이 되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심을 믿는 길뿐입니다. 그 방법은 그분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시며 나를 인정해주시기에, 나는 그 기쁨에 쉬지 않고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돌리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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