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17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10. 16. 05:21

2020 10 17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2,8-12)


“Everyone who speaks a word

against the Son of Man will be forgiven,
but the one who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호자(‘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십니다(14,16 참조). 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였는데, 이 말은 본디 법정 용어입니다. 죄를 문책하는 검사와 맞서 죄인 옆에서 그를 대변하는 변호사를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어 우리가 세상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단 지상의 법정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우리가 서 있을 때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지 않도록,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대변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그러니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을 모독한다면 우리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대에 홀로 남아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꼴을 자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가 들고 있는 잔을 보더니 어떤 형제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커피잔이 너무 작네요.”

사실 제가 들고 있었던 잔은 그렇게 작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잔이 컸습니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이 커피를 마시기에는 분명 잔이 컸습니다. 하지만 일반 머그잔보다는 분명히 작은 잔이었지요. 그래서 이 형제님께서는 이 잔을 작다고 말했고,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 저는 이 잔이 너무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크다 작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적입니다. 비교 대상이 없다면 크다고도 또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분, 열등감이 너무 크다는 분을 생각해봅니다.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비교하는 의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하고 판단하는 의식에서만 ‘크다’와 ‘작다’, ‘좋다’와 ‘나쁘다’ 등이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 자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우리는 성령을 모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부정하게 되니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더 따르게 되고, 부족한 자신을 따르다 보니 늘 불안해하며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모든 활동을 인정하는 믿음,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좋다 나쁘다는 식의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면 모든 것이 충분히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가져다주신 이렇게 주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는 사람은 절대로 걱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도 함께하시며 우리가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더는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는 어리석음도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최고의 것을 주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비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 감사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행복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신원은 단 한순간에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끝까지 걸었을 때에 비로소 밝혀지는 무엇이다(조셉 도레 대주교).


수준 낮은 빠다킹신부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하신 말씀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수필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책만 읽을 것으로 생각하셨나 봅니다.

솔직히 제 수준은 한참 떨어집니다. 그래서 어려운 책 읽는 것을 힘들어하고, 어려운 글을 쓰지도 못합니다. 수준 높은 고전을 아예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고전만을 주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어떤 글이든 상관없이 제 마음을 움직일 한두 가지만 있어도 훌륭한 책이라고 말하는 저입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방송 프로의 제목처럼 저 역시 이름 하나를 붙인다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물론 사람을 혼란으로 이끄는 책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좋은 책, 나쁜 책으로 가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책 읽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수준을 남들에게 따르라고 명령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자기 수준에 맞춰서 즐거운 것을 행하는 것이 훨씬 서로가 행복하지 않을까요?

세상에서 세상을 거슬러, 교회에서 교회를 거슬러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핵심구절은 이것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슬러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더 모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게 되고 또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면 분명 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은 분명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이 그분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려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신다면, 성령님은 그 진리를 세상을 거슬러 선포하게 만드는 일종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충동이 일어남에도 세상의 박해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 교육에 관해 어쩌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외치고 있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한국 교육에 있다고 말하는 ‘김누리 교수’입니다. 그가 비록 너무 독일의 교육문화와 우리 교육문화를 대비하는 것에 지나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들은 분명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일대 교육의 혁명을 시작해야 할 시기라고 대부분 사람이 공감하게 합니다.

      그는 먼저 우리나라를 찾았던 ‘프랑코 베라르디’라고 하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우리나라에 대해 꼬집은 사회적 문제점을 그 시발점으로 잡습니다. 그는 짧은 우리나라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프게 우리나라의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한국이 세계 자살률 1위이고, 특별히 청년들과 노인들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데 대해 그 원인을 4가지로 들었습니다.

 

1. 끝없는 경쟁, 2. 극단적 개인주의, 3. 일상의 사막화, 4.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

      1. 한국은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죽기까지 서로 비교하며 끝없이 경쟁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고통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어쩌면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쟁보다 행복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2. 극단적 개인주의도 경쟁주의 문화의 산물입니다. 경쟁하다 보면 개인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나만, 내 가족만,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극단적 개인주의는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함께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개인적으로 보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돈 있으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 일상의 사막화도 경쟁 때문에 발생합니다.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끝없는 경쟁에 함께 뛰어들어 바쁘고, 아버지는 직장의 경쟁 속에서 밤늦게야 집에 들어옵니다.

 

      4.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주의가 아니라면 ‘빨리빨리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급해서 모든 것이 편리해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급한 것 때문에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빨리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은 경쟁교육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김누리 교수는 시험이 없는 독일 교육, 누구나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잘 먹히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는 종사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 있는 말들입니다. 교육에서 경쟁이 사라지면 학원이나 사교육이 사라질 테고 그러면 많은 실업자가 생기게 되며 그런 교육을 통해 이득을 보던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경쟁’을 빼고, ‘연대와 협동,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이웃과 환경,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탄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교육, 정치교육, 생태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은 감출수록 더 큰 문제를 유발하고, 정치는 알지 못하면 유치한 지역감정 등으로 비화할 수 있으며, 생태교육은 하지 않으면 공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저는 여기에다 현실적인 ‘경제교육’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태인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주식을 가지고 실제로 투자하며 경제관념을 익힙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세상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 교육에도 경제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과 가족도 입지 못하는 비싼 옷을 사제에게 선물했는데, 그 사제는 훨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것을 받는 것이 마치 신자들이 쓰고 남아도는 돈으로 사 준 것처럼 여겨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연봉 2억이 넘는 사람보다 실제로 제가 한 달에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더 많다는 것에 놀란 일이 있습니다.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저속하다고 여겨 경제교육을 받지 않으면 마치 성에 관해서 그런 것처럼 속으로 썩어 들어갑니다.

 

      어제 제가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청소년 파트에서 주관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유튜브 채널 ‘어안채’에 초대되어 녹화하고 왔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더욱 교회를 멀리하게 된 청소년들에게 다시 교회에 돌아올 수 있도록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에게 해 줄 말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먼저 회개하여 청소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말 잘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때는 성령께서 함께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거지처럼 동냥하는 수도회를 만들겠다고 하니 당시 세속에 찌들었던 교회가 허락해 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눈엣가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끌어 오르는 그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했다면 프란치스코는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배움을 멈추기 위해 귀를 막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무시이고 모독입니다. 그러나 이미 확신하고 끓어올라 말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해 입에 재갈을 채운다면 그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모르면서 짓는 죄는 큽니다. 그러나 알고도 박해가 두려워 말을 못 한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거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수준의 죄가 됩니다.

      물론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를 뛰쳐나가며 비판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뛰쳐나가서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비판은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진리를 무시하며 성령의 충동에만 치중하는 균형 잡히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먼저 존중한다면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모독하지 않으려면 ‘교회 안에서’ 쇄신되어야 할 것들을 박해를 각오하고 ‘외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교회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력하고 집약된 힘으로 쇄신되며 오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지 맙시다. 그리고 성령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신성모독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사면초가(四面楚歌),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마치 권투를 하는데 양손을 뒤로 묶인 체 시합에 나가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저항 할 수 있는 수단도 없고도와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이 사나운 이리 때 가운데 놓여있는 상황입니다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께서도 그런 일을 겪으셨습니다믿었던 제자들은 도망가고 말았습니다사랑했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권력을 가졌던 빌라도헤로데가야파바이사리파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무죄하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이런 상황을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버지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고난의 순간에고통의 시간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도 그랬습니다십자가의 길에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기운을 차리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있었습니다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치유되었던 하혈하던 여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던 자캐오의 아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꽁꽁 얼어있는 강에 숨구멍이 있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안식년 중에 노숙자들을 위해서 무료 밥집을 운영했던 사제가 있었습니다안식년을 마치면서 새로운 임지로 갈 수 있었지만 교구에 청해서 새로운 임지를 무료 밥집으로 정했습니다매일 찾아오던 노숙자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시몬주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칠레의 산호세 광산에서 구조작업이 있었습니다지하 600미터 깊이의 지하 갱도에서 69일간 갇혀있던 33명의 광부들이 구조되었습니다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어두운 지하에서 구조된 광부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칠레의 정부와 국민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구조되는 광부들을 환영하고 기뻐하였습니다구조된 광부의 말이 제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 ‘우리는 33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그래서 우리는 34명이 함께 있었습니다또 다른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굶주림을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은 어두운 갱도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69일은 마치 하룻밤과도 같을 수 있었습니다광부들은 어두운 지하에서 구조 될 때도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저는 나중에 올라가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지하에서 69일을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어떻게 답변할까무엇으로 답변할까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칠레의 광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드리며주님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님 이름 뒤에 붙는 수식어들이 어마무시, 후덜덜합니다. ‘요한 사도의 제자’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 ‘영예롭고 당당했던 초세기 교회 대표 순교자’ ‘잘 나가던 안티오키아 교회 2대 주교’...

  

이냐시오 주교님의 순교는 추억의 명화 ‘쿼바디스’나 ‘벤허’ 같은 영화에 등장하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최후 장면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8~9만명 수용할 수 있는 리버풀 안필드 스타디움이나 맨유 올드 트래퍼드 스타디움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이 당시 순교의 현장이었습니다.

  

콜로세움 안에는 이미 순교자들의 대학살을 직관하기 위한 수많은 군중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벌어질 순교자 처형 장면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메인 이벤트인 순교자 학살극이 벌어지기 전, 경기 장 내에는 검투사들의 목숨 건 격투가 한창이었습니다. 격투에 패배한 검투사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기장 안은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하면 드디어 순교자들이 경기장 한 가운데로 끌려나왔습니다. 이어서 육중한 철문이 하나 열리면 잔뜩 굶주린 사자떼가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허기진 사자들은 순교자들에게 달려들어 닥치는대로 물어뜯으며 포식을 즐겼습니다. 그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체포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참으로 잔인하고 혹독했지만, 이냐시오 주교님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된 주교님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과정에서 수인이라기 보다는 영웅이요 개선장군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압송되어가는 당신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냐시오 주교님은 오히려 그들을 따뜻이 위로했고 격려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파이팅하자고 외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님께서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그 고통스런 여정 중에도 머릿속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양떼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일곱 통의 편지 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갈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죽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지상적인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위한 불은 내 안에 더 없습니다.”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반영억신부-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8-12: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8-9절)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복음이란 것은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한 것은 아니다. 만일, 복음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총도 입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거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야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이 사회에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2)

-한상우신부-

가을이
더 깊이
펼쳐진다.

펼쳐지는
가을 속에서
우리 모습을
보게된다.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성령이시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들이다.

살면 살수록
우리 힘이
아님을
알게된다.

성령이 계시기에
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된다.

성령께서는
가야할 길을
가게 하신다.

소통의 열매를
맺게하신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말과 말
사이를
채워준다.

감당해야 할
우리의
십자가이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이야기한다.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시는
성령이시다.

우리가
해야할 말이
하느님께로
이끄는
성령의 말씀이길
기도한다.

말씀과 말씀을
뜨거운 불처럼
이어주는
성령이시다.

하늘의 일을
하늘의 때를
성령께서
알려주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도록 이끄십니다.

"너희는 ... 끌려갈 때 ...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당신이 떠나신 후, 뒤에 남아 예수님의 분부를 이어가야 할 제자들, 우리들에게 보증을 남기시는 겁니다.

증언(간증)의 기회는 강제로 끌려가서 맞이할 수도 있고, 아직 믿지 않는 이들에게 기꺼이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얻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전할 때 신중함과 정확성, 치우치지 않는 진실이 요구되기에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미리 준비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있으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당신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그대로 펼치기만 하면 되지요.

그런데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완고히 침묵하면서 버티는 이는 성령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은 문자와 규범이라는 안전지대 안에 갇힌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생생히 살아 움직이시는 성령과 호흡을 맞추어 새로움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허용할 때, 우리의 증언은 곧 성령의 증언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여러 각도로 보여주며 교회와 연결합니다.

"아버지께서 ...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페 1,17-18)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영, 곧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신다고 밝힙니다.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부르심과 희망과 영광을 알게 해 주시려는 것이지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3)


성령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룹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강한 능력과 활동으로"
(에페 1,19) 활동하시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시고, 그 신비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하시지요.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시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복음 환호송)


성령과 우리가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신학 지식과 영적 깨달음뿐 아니라 그분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석구석, 시시각각이 모두 다 증언거리가 됩니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고 수난하시며 죽으십니다. 부활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지요.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이 곧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증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성령은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 그리스도의 벗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거대하고 화려하고 강해 보이는 현세의 세속적 가치들 틈에서 작고 약하고 낮은 주님의 모습을 놓치지 않도록 영혼에 불꽃을 일으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각자에게 주어진 고되고 험한 길을 성령께 의지해 묵묵히 걷고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 의지해 성 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더, 더, 더 깊숙이 잠기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다음 걸음과 다음 방향과 다음의 고백을 알려 주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아갑시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기도한다면 이렇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375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