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가12,54-59)
You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why do you not know how to interpret the present ti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사제 피정 때 40년 넘게 사제 생활을 한 신부님이 피정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피정 중에, 살아오면서 감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노트에 썼답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이삼일 동안 쓴 이름이 500개도 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사제로 지낼 수 있도록 이렇게나 많은 분이 애써 주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이 해 준 것만큼 감사의 보답을 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분은 고맙다는 표현도 전해 드리지 못한 채 하느님께 돌려보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은 그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은인들에게 직접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주위의 이웃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겠노라 다짐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을까요?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는 얼마나 많을까요? 감사해야 할 은인들에게 일일이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미안한 사람들에게 죄송함을 다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남은 인생을 보답의 삶, 속죄의 삶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땀방울을 기꺼이 흘리며 우리의 은인들, 우리에게 피해를 받은 이들에게 보답과 속죄를 할 때, 우리 삶은 위선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 두 다짐 중에서 어떤 다짐이 목표에 달성할 가능성이 클까요? 두 번째 사람의 다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도에는 목표 의도와 실행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표 의도에는 단순히 바라는 결과 상태만 들어 있고, 실행 의도에는 상황과 행동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른 행동을 구체화하는 실행 의도가 있을 때, 목표에 달성할 가능성에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목표 의도만을 세우고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금연하겠다. 절주하겠다. 운동하겠다. 살을 빼겠다. 등등의 목표 의도만 내세우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정말로 나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상황과 행동이 들어있는 실행 의도를 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도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하늘 나라에 가겠다는 목표는 있는데, 그 실행 의도는 있을까요? 그냥 막연하게 하늘 나라에 가겠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를 내리십니다. 재판정으로 가는 길에 합의를 보아 소송을 피하지 않으면 결국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거기서 끝내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지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 한 일을 재판관이신 그리스도의 판결을 결정합니다. 우리에게 빚이 있다면, 그 빚이 많든 적든, 재판관은 우리를 우리의 주인인 채권자에게 맡길 것이고, 우리는 그 빚을 모두 갚기 전에는 풀려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빚이 많든 적든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이 탕감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탕감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기 빚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이 빚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 빚을 미리 갚아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빚을 미리 갚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실행 의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목표 의도에서만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실행 의도가 더 해지고 더 해질 때, 우리의 목표 의도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쁜 위로’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정신신경학과 애덤 캐플렌 박사가 소개한 우울증 환자에게 건네서는 안 될 여섯 가지 말이 있습니다.
“힘내.”, “네가 감정을 잘 다스려야지.”, “가족을 생각해.”, “네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네 심정 알아.”, “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어.”
어떻습니까? 솔직히 이 글을 보고서 뜨끔했습니다. 저 역시 평소에 종종 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이지만, 아무 위로나 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쁜 위로가 좋은 위로,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따를 법칙을 갖고 싶다면 예외를 인정할 수 없을 때까지 실험하고 연구하라
-전삼용신부-
지금까지 예수님은 새로 태어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동물을 낳고 있다면 나는 동물이고 내가 인간을 낳고 있다면 인간이며 내가 하느님의 자녀를 낳고 있다면 나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좀처럼 하느님 자녀를 낳으려 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찌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절제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상 음식을 먹을 때는 ‘오늘은 예외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법칙이 아닙니다. 개에게서 개가 태어나고 사람에게서 사람이 태어납니다. 이것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으니 법칙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낳지 못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것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나무라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게만 예외가 존재할 것이라는 교만 때문입니다.
도박에서 패가망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딸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이 착각이 반복되면 망하게 됩니다. 도박하는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면 도박장이 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도박하면 잃게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도박해서 부자 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무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내림 받은 무속인의 말을 들었는데, 나중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신들이 자신이 필요 없게 되면 반드시 해를 가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신내림 무당의 비참하고 예견된 말년입니다. 무당들도 이것을 알지만 당장 지금의 이익을 위해 신을 우선 이용합니다. 그러며 자신에게만 마지막 예외이기를 기도합니다.
진화론도 그렇습니다. 진화론은 항상 ‘예외’라는 가정하에서 출발합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오는 예는 없습니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고 가정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퇴화는 가능하지만, 진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예외를 남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자연이나 타인에게는 다 적용되더라도 특별한 자신에게만은 예외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과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그 법칙을 자신에게 적용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한 남자 신도가 육체적 쾌락에 빠져있었습니다. 출장을 자주 다녀야 했는데 갈 때마다 술집에 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에서 죄가 주위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출장을 갈 때마다 가정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술집에 다녀올 때면 예외 없이 집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아내가 이상하게 자신을 대했습니다. 그런데 술집에 다녀오지 않고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안이 평안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며 살피다 보니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주위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나의 죄와 나의 거룩함이 이웃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는 예외일 거야!’, 혹은 ‘매번 그럴 리가 있나?’라며 자신에게만 예외규정을 두려 합니다. 진리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의 자연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 말씀은 나를 고소한 자가 재판관에게 나를 끌고 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으로 나아가면서도 심판에 대해 준비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연옥에 갈 것이 확실하면서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특별하니 자신에게는 그런 법칙이 예외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고소하러 가는 사람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화해를 청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화해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합니다.
진리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나만은 예외이고, 이번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못 믿겠으면 자신에게 적용해서 실험을 꼭 해 보십시오. 법칙은 수 없는 실험을 반복하여 예외가 나오지 않을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실험도 해 보지 않고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진화론은 실험으로 단 한 번도 증명된 적이 없는 것을 하나의 법칙처럼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낸 오류입니다. 우리는 그런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삶에서 분명히 실험하며 적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실험하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죄가 아닌 이상 정말 맞는지 안 맞는지 꼭 실험을 해 봅시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 예외일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려면 실험하고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일을 하는 시간과 방법에도 사람의 성향과 성격이 드러납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중학생 때입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엘 가는데 버스는 늘 붐볐습니다. 체격이 작은 편인 저는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뒤로 밀려가면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걸어갔습니다.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가방이 조금 무거운 것이 불편했지만 버스 안에서 힘든 것보다는 좋았습니다. 고등학교도 같은 방법으로 걸어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납니다. 대신에 저녁에는 10시 전에 자는 편입니다. 장점과 단점이 있겠지만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제게는 좋습니다. 집중이 잘 되고, 기도하는 시간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루다 보면 잘 때까지 기도를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재택근무도 많고, 일의 특성상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간보다는 본인의 성격에 맞는 방식이 중요할 것입니다.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저는 교육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업무는 강사를 섭외하는 일이었습니다. 첫해에는 강사를 섭외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임박해서 강사를 섭외했기 때문입니다. 다음해부터는 2년 전에 강사를 섭외했습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2년 전에 섭외를 하니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여행을 갈 때도 2주 전에는 미리 짐을 다 정리하는 편입니다. 어떨 때는 필요한 물건을 다시 꺼내기도 했지만 미리 짐을 정리하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약속을 잡을 때도 1달 전에 미리 이야기를 하는 편입니다.
대부분은 제가 원하는 시간에 약속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내년에 있을 행사도 미리 장소와 시간을 정해 놓았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대부분의 일정이 취소되어서 항공권도 예약한 것을 취소했지만 항공권도 미리 예약해 놓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임박해서 약속을 정하면 당황하곤 합니다.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도 미안하고, 나름대로 일정이 있는데 갑자기 이야기하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나와는 일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이해하니 그것도 좋았습니다. 본인의 성격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합니다. 과연 그대로 됩니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대로 됩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릅니까? 여러분은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며,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일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준다면 시간의 차이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방법의 차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추구하고 획득해야 할 수많은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은 겸손과 온유의 덕입니다!
-양승국신부-
바오로 사도의 옥중 서한이 또 한번 오늘 제 나태하고 흐트러진 삶을 쿵! 하고 내리치며. 가슴치게 만듭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내 한 목숨 건사하기도 힘겨운 상황 속에서 쓴 편지라고는 밑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서한의 내용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따스합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와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에페소서를 읽다보면 아직 갈길이 먼, 연약하고 미성숙한 초세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 존재에 대한 연민의 정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늘 박수치고 치고 칭찬하고 격려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릇된 길로 빠져 들때나,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는, 제발 잘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강력한 경고도 하고 야단도 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때로 힘겨워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따뜻히 위로하고 격려하는가 하면, 우상숭배나 악습과 결별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향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마음에 또 다시 눈물로 하소연했습니다.
편지 서두를 보면 바오로 사도께서 교우들의 냉담한 마음이 움직여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염원했는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그런 표현을 접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읽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어둡고 깊은 지하 감옥에서,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느끼고 있을 무력함,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악습을 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4가지 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일치.
오늘 우리가 항상 추구하고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인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겸손의 덕에 기초해야 정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서 2장 5~8절)
겸손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장 본성적인 특성이 온유의 덕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5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9절)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추구하고 획득해야 할 수많은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은 겸손과 온유의 덕입니다. 그러나 그 덕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셀수도 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엄청난 에너지와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덕행, 그러나 살아생전 반드시 획득해야 할 덕행이 곧 겸손과 온유의 덕입니다.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시대를 알아보아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
-송영진신부-
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4-56)”
여기서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라는 말씀은,
“자연 현상을 관찰해서 날씨를 예측할 줄 알면서”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과학 지식은 많이 쌓으면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왜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힘쓰지 않느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왜 회개하지 않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태풍, 지진, 전염병 같은 자연의 힘은 두려워하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힘은 왜 두려워하지 않느냐?”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 13,1).”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3-5).”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인간들은 과학의 발전을 자랑하고, 또 그 발전에 도취되어서 마치 자기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쭐거리지만, 인간들의 과학의 발전도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만물에 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기본 요소들의 활동을 알게 해 주셨다. 또 시간의 시작과 끝과 중간, 동지 하지의
변경과 계절의 변화, 해가 바뀌는 것과 별자리, 짐승들의 본능과 야수들의 성질,
영들의 힘과 사람들의 생각, 갖가지 식물과 그 뿌리의 효험을 알게 해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감추어진 것도 드러난 것도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만든 장인인 지혜가 나를 가르친 덕분이다(지혜 7,17-22).”
(우리는 과학의 발전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과학만 내세우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 것은,
교만죄이고, 신성모독죄입니다.)
의학의 발전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가 이처럼 지극히 작은 일도 할 수 없는데,
어찌 다른 것들을 걱정하느냐?(루카 12,25-26)”
여기서 “지극히 작은 일”이라는 말은,
자기 수명을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연장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어찌 다른 것들을 걱정하느냐?”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여라.
허망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과 걱정을 버려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의술과 의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힘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육신의 수명을 늘리는 일도 못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이 말씀의 뜻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너희는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 그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너를 고소한 자” 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7-48).”
(‘나의 양심’이 나를 고소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도중에”는 “살아 있는 동안에”입니다.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또는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루카 12,46)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불행은 자기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아직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오랜 경험으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안다. 언제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지를 예측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신부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 왔다오.”(아가 2,10-12)
여기서 신부는 교회이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봄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징조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본질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도 또한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에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결국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은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루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옥리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 57)
-한상진신부-
스스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단풍의 삶이다.
애초부터
하느님을 위한
마음이 없는
우리들 모습이다.
무엇을 바라며
살고있는 지를
다시금 아프게
묻게된다.
위선으로
살아온 시간을
반성한다.
위선도
탐욕이다.
위선은
또 다른
위선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
없어서이다.
돌아서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관계의
변두리가 아닌
관계의 중심으로
돌아서야 한다.
우리 위선을
봉헌하는 것이
참된 봉헌이다.
올바른
일을 위한
시작이 바로
위선의 껍질을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하느님을 향하고
스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녀의
진짜 모습이다.
위선을 벗으면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올바르고
가능해진다.
지금 이순간이
위선의 껍질을
벗을 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어느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물으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질문 안에는 질문자의 의도와 바람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사정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면서 정작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뜻에는 눈을 감아버린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땅과 하늘의 징조"가 자연 현상처럼 외부적으로 명백히 보여지는 추이를 가리킨다면, 그에 대비되는 "이 시대"는 그런 현상들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하느님의 섭리일 겁니다. 전자는 육신의 눈에 비치는 사실이고 후자는 신앙의 눈에 보여지는 진실입니다.
그저 보여지는 현상에 기대어 제 힘만 믿으며 살아가는 이는 그 너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희로애락은 손에 쥔 권력이나 쌓이는 재산, 남 보기 그럴듯한 인맥에 쉽게 좌지우지 됩니다. 그들이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박한 이기주의와 탐욕이 옳음도 진실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르심 받은 우리의 몫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페 4,1)
부르심을 받은 이의 삶은 육에만 의존해 살아가던 때와는 사뭇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시선"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부르심 받은 이들은,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배를 채우기 위해 사실과 현상에 고정하던 시선에서, 사건과 사람,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계획을 읽고 공동선을 열망하는 시선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내적 시각과 신앙의 시선으로 만물을 바라보며 묵묵히 제 몫을 다합니다. 사도가 제시하는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평화와 일치"의 덕목들은 세속의 눈에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영혼의 눈에 아름답고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만물의 깊이 안에 현존하십니다. 현상에만 그치는 시선으로는 만물을 꿰뚫어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뵙기 어렵지요. 이 시선은 부르심을 받아 불러 주신 분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락된 선물입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복음 환호송)
하늘 나라의 신비는 세속적 수완과 처세에 기대어 사는 이들이 아닌, 철부지들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밖에는 기댈 존재가 없는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이고, 그분에게서 믿음을 거둘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작은이들이지요. 주님은 결코 이들의 시선과 바람에 실망을 안기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지요? 영혼의 시력은 어느 정도인지요? 우리 눈에는 어디까지 보이는지요? 그리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요?
오늘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과 현상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사건과 관계 속에서 그분 뜻과 계획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이 모든 것 안에 가득 차 있는 사랑을 캐내어 품은 우리 자신이 또다른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깨달은 철부지에게 "시대는" 저절로 풀이되는 열린 책입니다.

다르기에 사랑할 수 없다는 핑계
-김찬선신부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일치를 이루고 보존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인데
일치를 이루는 것은 우리말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은 바오로 사도뿐 아니라
여느 부모도 자식에게 당부하는 것이고 우리도 모두 소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제 영적인 분열에 대해서 봤지만
일치 또는 하나됨도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영적이라 함은 신적일 뿐 아니라 성령적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영적인 일치를 다른 것과 가장 쉽게 비교한다면
잇속에 따라 하나가 되는 야합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런 야합은 잇속이 갈리면 여지없이 갈라설 것이고
그래서 이런 일치는 완전하지도 않고 우리가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적개심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 대한 공동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하나로 만드는 방식, 예를 들어
일본 정치가들이 자기들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화살을 돌려 해결하기 위해
종종 우리나라를 때리는 그런 방식의 일치는 옳지 않은 것이기에
성령의 일치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지만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치는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여야 합니다.
성령의 일치는 무엇보다도 한 분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 안에만 있다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저절로 그리고 당연히 하나가 되고, 둘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늘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 바이지만
하느님을 제쳐 놓고 그저 인간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 하거나
소통의 방식과 같이 심리학적인 방식으로 하나가 되려는 것은
필요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완전하다고 생각지도 말고
그래서 그런 방식만으로 하나를 이루려 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은 오늘 서간에서도 얘기하고 있고,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지향하는 방식으로서
하느님이 만물의 아버지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요
나의 아버지시기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같은 형제가 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성령의 일치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같은 형제이긴 하지만
다양성이 없는 획일적인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에
똑같기를 요구하는 그런 일치는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개성이 너무 강해서는 안 되겠지만 개성이 없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실 개성이 강한 것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너무 강해서
자기나 자기식만 너무 고집하여 일치를 이루지 못할 때뿐입니다.
개성이 강하면 일치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그것을 깨야 합니다.
일치를 거부하는 개성이 문제지 개성이 강한 것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다른 것은 틀린게 아닐뿐 더러 일치와 사랑을 불가능케 하는게 아닙니다.
다르기에 미워하고, 같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다 핑계입니다.
남녀가 다르기에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할 때는 다름이 문제 없다가
사랑이 식은 다음 다름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 그것도 성령의 사랑은 다름으로 더욱 풍성한 일치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묵상하고 그 성령의 사랑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가12,54-59)
---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낳지 못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것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나무라십니다.
-전삼용신부-
---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0) | 2020.10.24 |
---|---|
2020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0) | 2020.10.23 |
2020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0) | 2020.10.21 |
2020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0) | 2020.10.20 |
2020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0) | 2020.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