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마태 22, 34-40)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어느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 이야기가 뉴스로 나왔습니다. 이 할머니는 날마다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며 연명하였는데, 그 겨울 추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뒤, 시청 직원들이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침대 밑에서 150만 달러나 되는 큰돈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돈을 두고도 할머니는 먹지도 못하고 기름도 아끼다가 배고픔과 추위로 숨을 거둔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할머니의 삶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 같았으면 적당히 맛있는 것도 먹고, 잠도 따뜻하게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할머니와 제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신문 기사가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부가 죽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침대 밑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5,000개나 남아 있었다.”, “신부가 죽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침대 밑에서 한 일 없이 버린 시간이 20년이나 남아 있었다.”, “신부가 죽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침대 밑에서 아껴 둔 웃음이 만 리터나 남아 있었다.”
어쩌면 평소에 감사함을 표현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위하여 시간을 내어 주지도 않고, 괜히 사람들 앞에서 얼굴만 찌푸리며 사랑할 기회들을 놓치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 할머니는 아직 돈을 쓰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하며 아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사랑하기를 자꾸 미루며 오늘 하루를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편견없는 진실된 사랑
-키엣 대주교-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율법의 핵심은 바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 지혜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나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무한한 사랑이신 주님은 모든 진리와 선, 아름다움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분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인류의 본분이기도 합니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것은 두번째 계명이지만 첫째 계명과 하나의 계명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어떤 편견도 없는 것이 진실입니다. 편견과 배제의 사랑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편견없이 마음을 주고 받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세요.
요한 사도가 말했습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형제들과 나약하고 작은 어린 아이들 사이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날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길’을 열어 주셨고 생명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랑은 삶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곧 사랑과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지키느라 정작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삽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살아가다보니 사랑을 잊고 삽니다. 너무 큰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바로 내 옆에 있는 작은 사람들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저 메마른 삶, 마치 뼈만 가지고 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뼈와 살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고, 이웃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교회의 율법을 따르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된 사랑이 넘치는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랑이 있는 그 곳이 바로 다음 세상인 천국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1. 주 너의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2. 잠시 내 주변의 형제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다가가 보십시오.
3. 이웃과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실처하여 보십시오.

믿음보다 강한 사랑
-임상만신부-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고생하며 마음을 움츠리고 살다 보니 계절의 작은 변화를 살피는 재미도 눈치가 보이지만, 그래도 가을은 속절없이 아름답게 깊어만 간다. 이제 올해 남은 두 달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최소한 할 것은 하면서 은총 속에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합의된 안전 위주의 일상에만 매달려 살다 보니 이제 믿음 생활은 고사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말도 매우 어색하게 들리는 듯싶어서 더욱 그렇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인간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중요한 것 248개, 비교적 덜 중요한 것 365개 등 613개의 율법을 규정해 놓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기들이 정해놓은 율법의 중요도에 대한 기준이 너무 모호해서 때때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하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다툼이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계명,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계명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라고 대답하시면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놓치고 있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수백 가지의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그 사랑이 모든 율법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신다.
사실 율법 교사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가 정당하고 옳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질문을 했던 것이다.(루카 11,29)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올바른 신앙생활을 구하고자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예수님께 확인받고 싶어서 ‘자기 사랑’이 넘친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 18장)에도 나오는 교만한 유다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자, 신자로서의 행함은 없이 드러냄만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 교사의 이중성을 심하게 꾸짖으시며, 우선 자기 위주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려야만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율법과 믿음으로 공고히 산다 하여도 자기를 내려놓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랑은 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율법 교사들처럼 자신의 믿음이 종교화되어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살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을 항상 실천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강하더라도 그 위에 사랑이 더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에 떨어져 더욱 완고해지고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사랑이다
-김창선-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빛’을 선물로 주시려고 우릴 부르십니다. ‘진리 안에 사랑’으로 자유를 누리게 해주십니다. 사랑의 문화를 가꾸기 위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소명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은 ‘자비의 얼굴’이십니다(탈출 22,26). 주님께서는 이방인, 과부나 고아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십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테살로니카 교회의 모습을 전합니다(제2독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형제애를 나누는 삶이 그리스 지역교회(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신자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세기 초 이스라엘의 종교단체였던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율법의 준수를 지상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가 주님과 부활 논쟁 끝에 말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파가 한데 모였습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대표로 주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유다 율법(모세 오경, 토라)에 기록된 계명에 밝은 율법 학자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요? 바리사이파는 토라에 613개의 계명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가운데 행하라는 명령은 우리 몸의 뼈와 장기의 수(248)와 같고,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은 한해의 날 수(365)와 같답니다. 어느 누가 이들 계명의 법정신과 상대적 중요성을 알고 기억하겠습니까?
율법 교사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신명 6,5)입니다. 둘째 계명인 ‘이웃사랑’(레위 19,18)도 이와 같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마태 22,40) 하시며 정설을 펴십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양한 인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십계명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공동체 생활의 근본 규칙입니다.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 보듯이 신앙의 조상들은 그룹 중심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모른 채 충실한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회의 성사와 기도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친교 속에 한 분이신 것처럼 기도와 성사로 친교를 이루는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보답하라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이웃사랑은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9)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마태 5,17)입니다. 사랑의 손길이 이웃에 따뜻이 전해질 때 사랑은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루카 10,29 이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생 여정에서 주님께서 만나게 해주시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웃사랑의 기준은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많은 사람이 참된 자신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존심의 결여나 열등의식, 자기학대나 비하와 증오도 문제이지만,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매사에 자기 것만 챙기는 탐욕과 일등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에 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묵상집 「사랑」을 읽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예의 바른 행동이고, 이웃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상에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이웃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희생이며,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사랑은 영원하기에 인내하는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성덕의 길로 나아가는 여정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2 코린 6,16)입니다. 기도와 성사로 사랑의 계단을 오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입니다.

황금률
-김상우신부-

사랑, 이해부터
김경욱신부-
흔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 과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같은 병을 앓거나 같은 입장이 되어보면 그 처지를 알게 되어 이해가 빠르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해는 남편이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내가 남편의 입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직장의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 며느리와 시부모의 관계 에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이 되어 주면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선포 하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느님 을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분명 사랑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뼈 빠지게 사랑하지도 않지만 사랑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문턱이 닳도록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 필요가 사라지면 주님을 찾아 나서지 않는 핑계가 백 개는 나올 것입니다. 날씨 탓, 건강 탓, 전염병 탓, 보기 싫은 사람 탓 등으로 주님을 찾고 기도하지 않 는 이유가 이렇게 많습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이방인을 내치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합니다. 이유는 자신들도 종살이의 서러움을 받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내 도움이 필 요한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는 엄청나게 정성을 쏟고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경우를 봅니다.
코로나19로 이웃 간의 소통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제주도에는 많은 사람이 휴가를 가고 있습니다. 부모를 찾아보지 않고서 도 말입니다. 십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돌보지 않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봉사도하고 여러 신심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정작 가족은 외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분명 말할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자기를 낳아 준 부모부터 자기 몸같이 돌본다면 외롭고 쓸쓸히 고독사하는 노인이 이 사회에 이렇게 많지는 않겠지요.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굳건한 신앙을 가지길 청했습 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내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서 모두 영 생에 나아갑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 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 니다.”(1코린 13,7)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라
-오요안신부-
나를 사랑하는 방법」, 「혼자서도 별인 너 에게」,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서점에 가면 많이 보이는 책 이름입니다. 이러한 책 이름들이 말해주듯이, 자기 자신 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마음을 다하 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 하라”(마태22,37) 하십니다. 한 젊은이의 핸드 폰 메인 화면에‘남을 위해 사는 착한 사람 말고, 나를 위해 사는 좋은 사람 되기를’이라 는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 의 말씀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하느님 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이 부족한 것을 바라보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과 채워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부족하고 못난 사람으로 여기는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 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절절히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자신을 잘 바라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이웃이 자신의 부족함을 참아 주고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웃을 불편하게만 여기던 시선에서 벗어나, 그 이웃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 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자기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하느님께 무엇을 받고 살아왔는지, 하느 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돌아보고,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더욱 많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 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고 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느낄 때 이웃을 더 많이 돌보고, 더 자주 안부를 묻고, 따뜻한 말을 더 건네고 특히 친절을 다하십시 오. 친절은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살 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 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한 멋진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원재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하느님을 사 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거침없이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그분의 백성들인 우리들이 언제나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가야 하는 살아계신 하느님 의 뜻이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큰 계명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 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들은 우리는 어떻게 이 계명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모든 생각과 생활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춰지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 로 자주 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얼마만큼 보고 싶어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한가지입니다. “하늘 만큼 땅 만큼 사랑하고 하루 종일 당신 생각 뿐이었다.”는 대답입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토라지고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의 내용에서도 “마음 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느 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 6,4-7)라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를 가르칩니다.
마치 현철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에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이 없어라.”라는 가사처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하느 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 다. 이는 두 계명이 별개의 계명이나 서로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하나인 계명이요 같은 사랑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구속행위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그렇게 예정하신 하느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가 요한1서의 내용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20-21)
또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 이다.”(요한 15,1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 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 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 바라는 행복과 기 쁨, 평화와 즐거움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 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일류는 ‘예측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보다 예측이 빗나갔다고 판명되었을 경우, 재빨리 그 상황을 보고하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이류는 서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을 늘어놓습니다. 신뢰하기 힘들어집니다.
삼류는 틀린 자기 의견을 계속해서 고집하면서, 결과적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실패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신뢰만큼은 잃지 않게 됩니다. 이 신뢰로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류, 삼류의 삶을 삽니다.
자신의 실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일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 주님께서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하셨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중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부르니까 특별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인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합리적인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해한 질문을 하나 들고 나타납니다. 즉,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 613개 모두가 빠지지 않고 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단지 예수님을 이기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이 이기고 지는 수단이 아닌, 사랑 그 자체를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숨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틀렸음을 인정하고서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류가 아닌, 이류, 삼류의 모습을 보입니다. 서툰 변명을 늘어놓으면 자신들은 맞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가득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갑곶성지의 ‘천국의 문’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안치 예식을 제가 직접 진행합니다. 그런데 예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유가족들을 만나서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저희 봉안당으로 20년 전 주님 곁으로 가신 남편을 모시기 위해 오신 어느 자매님과 인상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20년 전 병으로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남편만 바라보면서 살았었기에 당시에 너무 큰 충격이었고, 마치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커다란 대못이 박힌 것만 같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동안 정말로 힘들었겠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아픔이 오히려 저를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힘이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죽음이 큰 상처로 다가왔지만, 살아가면서 사랑했던 기억들을 통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사랑의 위대함을 더욱더 분명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해고한다
-전삼용신부-
사랑은 모든 율법의 목적지입니다.
사랑하면 그러니 모든 율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지식이 결국은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지식의 목적은 행복이고 영원한 삶인데, 사랑을 위한 지식이 아닌 것들은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게 만들어 지식의 허세라는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겸손과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배워서는 안 됩니다. 교만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마치 히틀러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경쟁하여 남을 이기는 목적이 된다면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은 그 배운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은 분명 경쟁이 아니라 공생입니다. 나를 죽게 하여 타인을 살리는 삶입니다. 이 방향이 틀어지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는 해고 대행 회사의 베테랑 직원인 ‘라이언 빙햄’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전국의 사람들을 만나 회사 대신 해고통보를 해주는 일을 하며 1년 365일 중 322일을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런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아메리칸 에어라인(AA)에서 천만 마일리지를 모아 7번째이자 최연소로 플래티넘 카드를 발급받고 기장에게 인사받는 것입니다.
그는 해고통보를 하는 일과 별개로 강의도 하는데, 그의 강의 주제는 ‘당신의 배낭에는 무엇이 있습니까?’입니다. 배낭에 넣는 물건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부담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의 장점을 피력합니다. 라이언은 결혼도 안 하며 어떠한 관계에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출장을 가서 바에 들른 어느 날, 자신처럼 출장을 다니는 아름다운 여인 ‘알렉스’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의 출장 일정을 맞춰보고 일치할 때마다 만납니다. 그러나 그냥 가벼운 관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언의 회사에 ‘나탈리’라는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패기 넘치는 신입인 그녀는 회사에 출장비용을 감축시키기 위해 비디오 회의를 건의합니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멀쩡히 다니던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직접 출장을 가서 면대면으로 전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화면으로 해고를 한다는 것은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마일리지를 거의 다 모아가는데 플래티넘 카드를 못 받을까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라이언에게 그럼 나탈리를 데리고 출장을 가서, 직접 만나서 해고하는 일의 장점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라이언은 혹이 달리는 게 너무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떠납니다. 나탈리는 선배인 라이언이 하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직접 해 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화를 내고 자살을 하겠다는 등의 다양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탈리는 감성적이고 어쩌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탈리는 자살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를 건성으로 만나며 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해고의 달인인 선배 라이언에게 자기만 아는 아이 같다고 한바탕 퍼붓습니다.
라이언은 나탈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가끔 만나던 알렉스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자기가 해고하기 직전의 마음으로 만났듯, 그녀도 라이언을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라이언은 관계의 짐을 지려고 하다 알렉스에게 차이는 마음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때 천만 마일리지에 도달해 기장으로부터 플래티넘 카드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쁘지 않으냐고, 집이 어디냐고 묻는 기장의 말에 라이언은 “여기입니다!”(up to the air)라고 말합니다. 평생 자신이 쫓았던 목적을 달성했어도 한 명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당한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중누각을 지으며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별거 아니었던 한 사람과의 헤어짐이 자신의 감정에 이렇게 큰 울림을 준다면, 가족과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얼마나 큰 행복을 줄까? 그는 마음을 바꾸어 그동안 해왔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강의를 때려치웁니다. 그리고 해고 통지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그런 회사를 떠나버린 나탈리를 위해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도록 정성껏 추천서를 써줍니다. 또 돈이 없어서 신혼여행의 꿈은 꿀 수도 없는 자신의 매형이 될 사람과 누이를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섭니다.
해고 통지를 하던 삶에서 고용하는 삶으로의 전환. 이제 라이언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입니다. 땅으로 조금씩 내려오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5년 이상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어쩌면 끊임없이 사람을 해고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관계가 전부입니다. 늦더라도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 진리를 모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지식을 머리에 넣습니다. 그것은 공중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왠지 공허하고 하늘에 붕 떠 있어 정착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가지 맙시다. 주님은 플래티넘 카드를 들고 왔다고 칭찬해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들고 간 관계를 칭찬해주십니다.

-조재형신부-
애잔한 음색의 가수 심수봉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의 만찬에 함께 했었습니다. 어느덧 4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장충동에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경제성장과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무고한 사람을 가두고 간첩으로 조작하면서 장기집권을 하였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게도 10월 26일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만든 노래가 ‘사랑밖에 난 몰라’입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이 아무것도 이제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
시간을 되돌려 2000년 전 갈릴래아를 생각합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삶이었지만 감사와 기쁨의 삶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은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사랑밖에 모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가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해서 쓰러진 사람이 있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가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분들의 불편을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면 그곳에서부터 하느님나라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헐벗음이 있는 것은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의료의 수준이 낮아서도 압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입을 것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서로의 접근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넉넉하게 채우고도 많은 것들이 남을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오억 명을 먹이고도 넘치도록 남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영근신부-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 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입장과 기본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가장 큰 계명
-송영진신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곧 신앙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절대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또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계명의 근본정신’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 번째, 두 번째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명’은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계명의 근본정신’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인데,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너희를 사랑하시니
너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아버지와 아드님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일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뜻입니다.)
1) “나는 지금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마음이 자꾸 다른 곳을 향하거나,
쓸데없는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거나,
두 마음을 품거나, 마음이 불순한 것들로 오염되어 있지는 않은가?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의 예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여기서 말씀의 숨을 막아버린다는 말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심각하게 방해한다는 것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걱정거리들 쪽으로 쏠려 있거나 유혹들 때문에 흐려져 있으면,
여러 갈래로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5.19.21-24)”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머리로는(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가는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내 의지대로 통제가 안 되고, 이성과 마음이 충돌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비참한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해법으로 ‘믿음과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이 말에는,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느님(예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성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상태를, 또는 걱정들과 유혹들을
믿음과 기도로 극복할 수 있고, 그러면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어서 기도를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기도를 하란 말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가 안 된다면,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마귀가 끈질기게 방해하겠지만, 그 방해를 이기려면,
또 그 마귀를 물리치려면 우리 쪽에서도 더욱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마르 9,29).>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가 있고,
그런 일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한다.” 같은 무정한 말만 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2) “나는 지금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죽을 것처럼 힘든 사람은 “힘들어 죽겠다.” 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덜 힘들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체력이 약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고,
사랑이 부족한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모든 인간의 삶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증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복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당신 계시의 새로운 면과 독창적인 면을 종합해주고 계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악의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라고 예수님을 떠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면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첫째 계명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는 것으로 품었던 의심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의심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신명기 표현을 들어 확언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그리고는 봉인을 하듯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하셨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거나 바꾸지 않으시고 오히려 강조하고 활력을 불어넣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 자신의 생활,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예수님의 대답의 의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재확인보다도 그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레위 19,18을 상기시키며 이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체계를 확인하면서도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두 계명 간의 보충적인 것에 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며, 인간 창조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창세 1,31). 둘째로, 강생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상’이 더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이제 신화(神化: Deificatio)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닮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바로 형제들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라고 역설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절) 는 말씀은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두 계명으로 모든 계시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합의 의무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더욱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현방법이었다. 1독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박애주의적’ 정신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부닥쳐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하시기”(탈출 22,26) 때문이다.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 만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 중심주의적’인 ‘박애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 형제들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이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7.39절).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가치관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물이나,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에 우리는 진정 이 두 계명을 ‘종합’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는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한상우신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는
사랑의 길이다.
하느님 사랑이
마음을 살리고
목숨을 살리고
정신을 살린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한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 받고
사랑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며
사랑의 기쁜
관계이다.
계명의
본질또한
하느님 사랑에
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삶의 방향성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율법에서
자유롭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참된
계명이다.
사랑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다.
생명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하다.
영원한
사랑의 기쁨은
오직 하느님
사랑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사랑은 나눌 때
가장 풍요롭다.
가장 기쁜
나눔의 주일이다.
마음을 나누고
목숨을 나누고
정신을 나누는
기쁜 복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모든 존재의 본질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함'은 그분 피조물이며 자녀인 모든 이의 첫째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이로서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지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율법 학자는 가장 큰 계명 하나만 물었는데 예수님은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각각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 자체를 증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랑을 하나로 엮어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눈에 보이는 증거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연민하고 존중하는 이, 이웃에게 헌신하고 자비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는 참 어렵습니다. 또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이가 타인을 억압하거나 착취하고 무관심하거나 증오하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그리스도교 교리나 신학을 몰라도 절대자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그렇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를 억눌러서도 안 된다."(탈출 22,20-21)
이방인, 고아, 과부는 하느님밖에 기댈 존재가 없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부족 중심 사회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울타리나 뒷받침이 되어 줄 언덕이 없는, 참으로 가련한 처지로 떨어진 이들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당부하십니다. 이집트 노예살이라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상기시키시며 그들이 이 규정을 마음에 새기길 바라십니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6)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분 계명을 준수하면 참 좋겠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을 상황까지 미리 염두에 두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어기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면 당신이 가만히 계시지 않겠다.'고 단호히 덧붙이시지요. 힘 없는 그들 대신 내가 나서겠다는 이 말씀은 자비이신 그분의 존재적 속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는 엄포라기보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당위적 표현으로 들립니다. 그분은 가련한 이의 부르짖음을 존재적으로 간과하실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앙이 어떻게 전승되는지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1테살 1,7)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님의 인격과 가르침을 직접, 또는 계시로 접한 사람들입니다. 테살로니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는 사도들을 주님의 대리자로 여기고 그들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배운 바를 충실히 지켜 그들 자신이 다른 신생 교회 공동체의 "본보기"가 되지요.
이 신앙의 연쇄적 흐름을 관상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그리 특출할 것 없는 이들을 통해 이웃에게 건네지고, 이를 전하는 이들의 인격과 가르침에 실려 전염됩니다. 사랑은, 자비는 바로 이렇게 전달되고 또 전달되면서, 거쳐간 이들을 또 다른 그리스도로 변모시키는 신비입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이 계명에로 초대된 우리는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닙니다. 주님 향한 우리의 뜨겁고 열렬한 사랑은 먼저 주님 곁에 머무르는 기도를 통해,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웃들에게 내미는 사랑의 손길을 통해 표현되지요.
그리고 비록 숨은 선행이라도 이를 감지하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본받는 사람"이 됨으로써 이 사랑의 릴레이는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들 또한 다른 이의 본보기가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신앙과 희망이 역사를 이어 아직까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굳이 드러나게 본보기가 되려 하지 않아도 이 계명이 우리를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게 만듭니다. 부족한 선행이나마 우리의 뒷자락을 보고 누군가에게 '본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언젠가 그 역시 또다른 "본보기"가 될 것이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웃을 겸손히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함께 사랑이 되어 봅시다!

선택적 사랑의 나는 아닌지?
-김찬선신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얼마나 사랑을 얘기해야 사랑 얘기가 그칠 것인가?
이만큼 얘기했으면 이제 그쳐도 좋지 않을까?
지금까지 하도 사랑 얘기를 많이 하여 이런 생각도 들지만
얘기를 하든, 안 하든, 그 얘기에 마음이 설레던 젊을 때든
이제는 더 이상 사랑 얘기를 멈춘 지금이든
우리에게는 역시 그리고 여전히 사랑이 중요합니다.
며칠 전 정동에 강의하러 가기 위해 안양천길을 걷다가
흔히 보게 되는 반려견과 산책하는 분을 또 보았습니다.
반려자를 동반하지 않고 반려견을 동반하는 모습,
아기를 태워야 할 유모차에 반려견을 태우고 가는 모습,
이런 모습에 '쯧쯧' 혀를 차거나 안타까워하기도 하다가
이분들이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반려견만 사랑하는 분들이 아니라
반려견까지 사랑하는, 어쩌면 저보다 더 진정한 프란치스칸일 거라고
생각을 고쳐먹기도 하는데 며칠 전에는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똥은 더럽다고 피하는데 반려견의 똥은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이 개똥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면 개를 저렇게 사랑할까 하고 생각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인간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고 인간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은 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제일 원하는 것도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불행이고,
그래서 사람이 없으면 반려견이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사랑하고 싶은 사람 곧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겠지요.
우리는 선택적 사랑을 하는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끌리는 사람, 호감이 가는 사람, 고마운 사람 등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을 하지 모두를 사랑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끌리는 사람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나 고마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다 나 중심이기에 엄밀히 얘기해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지요.
사랑은 나 중심이 아니라 너 또는 그 중심이잖아요?
복음 다른 곳에서 너에게 잘해준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잖습니까?
모두를 사랑할 때 상대에 따라 좌우되는 사랑이 아니라
나의 주도적인 사랑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 모두에 원수까지
포함시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모두를 사랑할 때 모든 것이신 하느님도 사랑하는 것이고,
뒤집어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이웃사랑과 관련하여 “둘째도 이와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랑이 제일 중요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마태 22,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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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분명 경쟁이 아니라 공생입니다. 나를 죽게 하여 타인을 살리는 삶입니다. 이 방향이 틀어지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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