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10. 25. 06:21

2020 10 26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루가 13,10-17)

 

“Woman, you are set free of your infirmity.”
He laid his hands on her,
and she at once stood up straight

and glorified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될까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탈출 20,11ㄱ). 그런데 피곤을 모르시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휴식을 취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를 알려면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 넘치는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고 누군가에게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창조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인간에게 풍요로운 환경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렛날, 그분께서는 그 인간을 드디어 만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분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온전히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안식일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율법은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허리 굽은 여인은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는데도 도저히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사정을 헤아리셔서 그 여인에게 손을 얹으시어 낫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손길로 병마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분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회당장은 굳이 안식일에 치료를 해야 하냐며 분개합니다. 그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요즘 아이들에게 도시락 싸 들고 학교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준다면 어떨까요? 버스 안에서 반찬으로 싸 간 김칫국물이 흘러서 냄새가 진동하고, 교과서가 빨간 김칫국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이야기해준다면 “설마?”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계란 반찬을 아이들에게 뺏기기 싫어서 보이지 않도록 밥 밑에 깔아 놓았던 일, 겨울이 되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일…. 요즘 급식을 먹는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풍경일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말도 안 돼요. 도저히 못 믿겠어요.”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만 해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지 못 할 일이지만 거짓이 아닌 진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심을 하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일도 믿기 힘든 것이 많은데,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만 이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를 사탄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시어 여자의 인생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병에서 풀려났음을 선언하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져다주시는 해방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어지는 논쟁에서 회당장은 안식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안식’이라는 말을 영적으로가 아니라 문자적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도 짐승을 풀어 먹이를 먹인다면, 사람을 죄와 질병에서 풀어 주는 일도 마땅히 할 수가 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시는 일에서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 경배받으시는 것을 시샘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사랑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품으며 사는 사람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들이 기쁨을 간직한 것처럼 큰 기쁨의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뿌릴 때 나에게도 몇 방울 묻는다(벤자민 디즈레일리).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힘의 원천이다
기도할 시간을 가져라 그로써 영혼이 위로받는다
웃음을 지어라 그것이 영혼에게 들려주는 음악이다
여가를 내서 놀아라 그것은 젊어지는 비결이다
사랑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이다
독서할 시간을 마련해라 그것은 지혜의 원천이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대화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기쁨의 원천이다
일에 몰두하라 그것은 성공의 전주곡이다
선행을 하라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양재오 신부의 책,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된다’에 나오는 작자 미상의 금언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간단하고 명확하게 제시하기에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은총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열여덟 해를 앓는 허리가 굽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라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병의 영”에서 풀려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병의 영에서 풀려나게 하시는 방법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거룩한 영’만이 병의 영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세속-육신-마귀의 압제에서 인간을 해방해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하느님 나라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목격한 회당장은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병을 고치는 행위는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라며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안식일은 분명 사탄의 압제에서 인간을 풀어주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오용하여 자기 영광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 주님은 그 선물을 거두십니다. 만약 청년이 된 자녀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는데 계속 과속과 신호 위반을 하며 사고를 낸다면 자녀를 위해 그 차를 우선 빼앗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의 선물을 올바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안식일에 사탄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빼앗깁니다. 혹시 우리도 은총을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으면서 계속 은총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은총을 주시는 분의 목적에 의해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은총 주인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그 은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게 됩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보시면 앞으로 은총을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신 은총도 빼앗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안식일의 은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려 했기 때문에 그 주인이 참 은총으로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많은 은총을 받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의 목적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이 ‘규칙적인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 때는 이미 주어진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그 은총들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지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때도 이것, 저것 다른 것만을 주님께 청한다면 이는 자기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지금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주님 영광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분께서 알아서 합당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미사 때 이것저것 청하는 것보다 먼저 받은 은총에 감사합시다. 이것이 다른 은총도 받을 방법입니다. 성당이 성황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책에 제가 볼 때는 유일하게 현명한 판단을 내린 사건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의회를 찾아와 집이 비좁아 죽겠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단칸방에 사는데 잠깐 들른 친척들이 아예 눌러앉겠다고 그 집에 짐을 푼 것입니다. 의회는 그러면 소를 한 마리 집에 들여놓으라고 합니다. 분명 의회가 현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믿은 그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날 방도 좁은데 소 때문에 더 좁아졌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닭을 몇 마리 들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그다음 날 또 하소연하였더니 닭을 쫓는 개 한 마리를 들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의회는 개를 빼면 닭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은 닭을 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용해졌습니다. 다음은 소를 빼라고 했습니다. 소똥 냄새로부터 해방되고 큰 공간이 생기자 그 사람은 크게 고마워했습니다. 그렇게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이런 똑같은 일이 전례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이 사람은 더 큰 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면 그 가진 것을 더 많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례는 이것을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특별히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들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 시대를 살면서 넷플렉스를 애용하고 있습니다제가 무심코 보는 영상물인데 넷플렉스는 정보를 모으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제게 메일을 보내줍니다예전에 보던 것을 다시 추천하기도 하고제가 좋아할 만한 영상물을 알려주기도 합니다인공지능은 넷플렉스를 이용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작은 것일지라도 자료를 모으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빅벨리 솔라는 쓰레기통을 만드는 회사입니다단순히 쓰레기통만 파는 것이 아니라 모든 쓰레기통에 센서를 달았다고 합니다센서가 달린 쓰레기통은 쓰레기의 양을 중앙의 서버로 보내줍니다이렇게 모인 정보는 시의 환경미화 담당 부서로 보내집니다그러면 쓰레기를 수거할 쓰레기통의 정보를 알게 되고 쓰레기를 수거하게 됩니다이런 방식으로 쓰레기를 수거하면 정해진 날에 쓰레기를 수거하던 방식보다 70%의 비용이 절감된다고 합니다어느덧 우리는 이렇게 모든 자료와 정보가 연결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여러분야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그중에서도 힘든 곳은 항공업계와 여행업계입니다입국을 제한하는 나라가 있고여행계획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저도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가 취소되었습니다멕시코 청년 캠프도 취소되었습니다독일의 음악회도 취소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14억 명 정도가 해외여행을 하였다고 합니다하지만 2020년은 11억 명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사업이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여행은 취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억 명이 여행을 가지 않았으니 여행업계와 항공업계의 어려움을 쉽게 예상 할 수 있습니다그런 가운데 한국의 한 여행사에서 제주도 상공을 경유하는 여행상품을 출시했다고 합니다비행기 안에서 치맥 파티를 하고게임도하고한국영화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제주도에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항공권은 1년 동안 사용가능하게 판매했다고 합니다제주도에 내리지 않는 제주도 여행상품이 매진될 정도로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코로나19는 분명 위기입니다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있는 퀸즈의 한인성당은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라디오 주파수를 이용해서 주차장에서 미사참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주일미사를 영상으로 제작해서 본당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리고 있습니다주일학교도한국학교도 모두 영상을 통해서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주임신부님은 매일 사목단상을 카톡을 통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많은 교우들이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비대면의 시대를 살면서 교회도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교회도 있습니다박해시대에 한국의 교우들은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교우촌은 박해받는 교우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사제들은 교우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교우촌이 발각되면 또 다른 교우촌을 찾아갔다고 합니다비대면 시대의 교우촌은 인터넷을 통한 신앙공간입니다본당의 홈페이지교구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찾으면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슬픔과 고통이라는 손님을 잘 맞이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입니다욥은 재산을 잃어버리고사랑하는 가족들도 잃어버리고건강까지도 상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 해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주님께서 주신 것이니주님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감사드린다고 합니다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설계자가 있음을 믿으며설계자는 충분히 자비하다는 것을 믿으면 슬픔 속에서도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주고치유해 주셨습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여인의 병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사랑희망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그러나 불평과 불만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갑니다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옵니다사랑과 희망믿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그것이 오늘 보여 주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율법보다 한 인간의 회복과 구원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18년까지는 아니지만 18일 정도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상태로 지내본 적이 있습니다. 새삼 허리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허리가 한 인간의 근본이요 삶의 중심이더군요. 

 

허리가 부실해지니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까지 가는데만 10분 이상 소요가 되었습니다. 세수하거나 샤워하는 일이 그렇게 힘겨웠습니다. 

 

양말 한짝 신는 데도 안간힘을 다 써야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기도도 건강할 때 열심히 해야된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습니다.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졌고, 하루 하루가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신 여인은 1년 2년이 아니라, 18년 세월 동안 그런 생활을 계속해왔습니다. 제대로 된 한의원이나 정형외과도 없던 시절, 치유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1도 지닐 수 없었던 여인이 겪었던 고초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동병상린이라고 비슷한 체험을 해보니 여인의 슬픔과 상처, 눈물과 한숨의 세월이 이해가 되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삶 전체가 고통 덩어리였던 여인이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회당에 앉아있었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충만하셨던 예수님께서 먼저 그녀를 발견하십니다. 따뜻한 음성으로 그녀를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복음 13장 12절)

  

갑작스레 다가온 꿈같은 현실에 크게 감격한 여인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회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 역시 크게 기뻐하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나 삐딱한 사람, 남 잘되는 것 못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당장이라는 사람이 볼멘 목소리로 외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복음 13장 14절)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회당장도 안식일에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가축을 외양간에서 끌어내어 사료도 주고 물도 먹이곤 하였습니다. 그외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몰래 몰래 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중성과 위선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그를 크게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복음 13장 15~16절)

 

율법보다 한 인간의 회복과 구원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 구리고 구린 안식일 규정보다 한 인간의 해방과 자유에 더 큰 방점을 찍으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하시며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주님!

꺾인 제 영혼에 당신 손을 얹으소서.

악행을 멈추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소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소서. 아멘.

사람이 희망이다 

-반영억신부-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필요 없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요즘 정치권이 하는 행태는 정말 절망스럽습니다. 왜 그리 뻔뻔스러운지요. 처지가 바뀌면 소신도 바뀌나 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 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낙태 청원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법이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하려 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넘습니다.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제 속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3,10-13).”

 

1)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과 장애를 고쳐 주십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을 안 믿어서 청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날이 안식일이어서 청하지 못한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 여자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고, 병과 장애를 고쳐 주신

뒤에도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지시하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비는 ‘그냥’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2) 병과 장애에서 해방된 그 여자가 즉시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일’로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믿음은 당연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예수님께서 여자를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9,14).”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바리사이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1.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죄인이다.

2. 죄인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

3. 따라서 눈먼 사람의 눈을 고쳐 준 일은 진짜로 고쳐 준 일이 아니라 ‘사기’다.

예수님 덕분에 눈을 고친 당사자의 증언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2.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다.

3.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보다 위에 계신 분’이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3,10-17: 안식일의 치유로 인한 논쟁

예수께서는 18년 동안이나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여인을 치유하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2-13절) 굽은 것은 그 여인의 영혼이었다. 그 영혼은 땅을 향해 굽어 있어서 하늘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영혼은 다시 숨을 쉬게 되었고,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 여인처럼 땅을 향해 등이 굽어 있었다. 시편에 “그들이 제 걸음마다 그물을 쳐 놓아 제 영혼이 꺾였습니다.”(57,7)라고 울부짖고 있다.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땅으로 굽게 했다. 사람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것들에 몰두하여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콜로 3,1 참조) 이 등이 굽은 여인을 치유하셨는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


그런데 부당하게도 사람들은 특히 회당장은 여인을 치유하신 주님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야말로 땅을 향해 등이 굽은 자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세우신 뜻(탈출 20,8-11 참조)을 알지 못하고, 땅에 묶인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왔다. 문자적으로나 물질로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안식일의 근본적인 의미는 깨닫지 못했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의 표상이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멈추는 날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회당장은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말을 들으시고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15절) 그런데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니 짐승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냐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안식일에 그 여인을 고쳐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치유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같이 칭송받는 것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여 분노하고 질투에 눈이 먼 것이다. 그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다른 구실을 대고 있다. 거짓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정확히 집어내셨다. 위선자라는 말은 그들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사악한 주장을 펴던 자들이 망신을 당하고,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져 부서진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그러진 그릇들을 펴시는데, 그들은 슬기로운 옹기장이에 맞섰고 의사에게 대들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만다. 주님은 그들의 오만한 입을 틀어막으셨다. 반면에 기적의 은총을 나누어 받은 군중은 크게 기뻐하였다. 진정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서 사람을 위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하겠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 12)

-한상우신부-

아픈 사람을
살리는데
특정한 요일이
필요한가.

때로는
안식일의
원칙과 형식보다

서로 돕는
치유가
더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치유를 원하신다.

치유가
안식이다.

사람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다.

안식일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혼자만의
거룩함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모두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안식일은
병든 우리
마음을 먼저
치유하는
날이다.

사랑과 규정
판단과 연민
사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안식일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알고 실천하는
날이다.

소중한 삶의
한가운데에
안식일의 주인이
계신다.

사랑의 실천이
빠져버린 종교는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안식일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사랑보다
도움보다
더 우위에 있는
규정은 있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안식인인가.

안식일에
갇혀있는 우리를
풀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안식일은
사랑이다.

자아에 갇혀있는
안식일이 아니라
치유와 해방
존중과 나눔
용서와 화해의
안식일이다.
안식일의
존재이유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이며 함정이다.

사랑의 잔치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살게하는
생명의 잔치
치유의 안식일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루카 13,1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열여덟 해나 허리가 굽은 채 병마에 시달린 여인을 보십니다. 고통스런 몸으로 안식일 규정을 지키기 위해 회당까지 온 그 여인이 예수님 눈에 곧바로 뜨인 것이지요. 세속인의 눈은 호사스럽게 겉꾸민 모습에 끌리기 쉽지만, 예수님 시선은 이처럼 고통 중에 있는 하느님 자녀에게 먼저 가닿습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안식일에 치유 기적을 일으키면 고발하려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벼르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십니다. 열여덟 해나 아팠는데 하루이틀쯤 더 기다린다고 무슨 큰일 나겠냐고 생각하는 적대자들 틈에서 예수님은 하루라도 빨리, 아니 한시가 급하게 그녀를 "사탄"의 억압에서 구해주고 싶으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3,13)

치유가 일어난 찰나,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해진 몸에 대한 확인이나 이웃과 나누는 기쁨보다 하느님을 먼저 찾습니다. 자동적으로, 그야말로 무조건반사처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비록 그처럼 고통스런 육신에 오래 갇혀 살았지만, 평소에 얼마나 진실되게 하느님 안에서 감사와 의탁의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분개하는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놓으십니다. "안식일일지라도"라고 하셨지만 마음속으로는 "안식일이니까 더욱"이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오늘 쉼과 회복, 해방과 자유의 날인 안식일의 의미를 더욱 충만하게 체험한 것이지요. 안식일이 이윤을 추구하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을 경외하고 섬기는 날이니만큼, 하느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드리는 자체가 안식일을 더 충만히 의미있게 보내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에페소 신자들에게 "자녀다움"을 권유합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5,1)

자녀된 이들이 아버지를 본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사랑과 자비의 모습을 닮아가도록 초대받은 것이지요. 우리는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보고 그분을 닮아가려 애씁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닮아 점점 사랑의 존재로 무르익어가는 삶. 이것이 우리의 꿈이지요.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에페 5,4)

조금만 의식해도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지요. 말의 내용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일이나 업무에 대한 말을 제외하고, 불평, 험담, 원망, 후회, 질책 등의 부정적 언사가 감사, 찬양, 축복, 격려, 위로 등의 말보다 많을 수도 있습니다.   

"감사의 말만" 하라는 사도의 권고는 입으로 발설되는 소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영혼의 본류에서부터 감사가 새어져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립서비스처럼 입으로만 던지는 감사의 말은 반복될수록 공허하지만, 마음 안에서 우러나는 감사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를 하느님의 마음 가까이로 데려갑니다. 진정한 감사가 몸과 마음, 영혼에 진하게 배인 사람은 은총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치유의 순간에 하느님을 찬양한 오늘 복음 속 여인처럼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하루 우리가 하는 말에 감사와 찬양, 격려와 위로, 축복을 담아봅시다. 이처럼 진실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말들이 상대방에게 회복과 해방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일 매순간 안식일의 의미를 충만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답니다.

'답게' 사는 삶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509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