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10. 21. 05:57

2020 10 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소 평화를 베푸시고(루카 7,50 참조), 제자들에게는 평화의 인사를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루카 10,5 참조). 무엇보다도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께서 ‘세상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그분의 평화는 많은 재산으로 말미암은 안락한 생활이나 전쟁의 승리로 누리게 되는 일시적인 평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어 그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세례란 본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모든 관계 가운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누리기 위한 다짐은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누군가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 다시는 안 만나겠어.’가 아닙니다. 그보다 ‘그도 아프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아픔은 늘 산처럼 크고, 상대는 그냥 편하게 살면서 욕심만 부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 거절에 돌아온 아들의 대답은 문자 한 통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를 찾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충격적인 이 문자 메시지에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 회사는 부도 처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아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아들의 상처, 아버지의 상처. 누가 더 클까요? 각자의 처지에서 가장 큰 상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아프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렇게 서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아픔만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힘있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평화의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습과 다르게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가족의 분열이 일어나게 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모습과 분리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마음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그도 아프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분리되는 곳에서 아픔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순간의 아픔에서 벗어나서 커다란 기쁨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됩니다.
추억이란 인간의 진정한 재산이다. 기억 속에서 인간은 가장 부유하면서도 또 가장 빈곤하다(알렉산더 스미스).


사랑하면?

어떤 꼬마 아이가 옷가게 들어왔습니다. 자기 엄마가 생일이어서 옷을 선물하고 싶다면서 자신이 지금껏 모았던 돈을 들고 온 것입니다. 가게 주인은 아이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가지고 온 돈보다 훨씬 비싼 옷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신체 사이즈가 어떻게 되니?”

그러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 엄마는 완벽해요. 우리 엄마는 너무나 예뻐요.”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보통 사이즈보다 약간 작은,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입는 옷을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는 자신이 사 간 옷을 다시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울상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해요.

“엄마가 너무 작대요. 이 가게에서 제일 큰 것으로 바꿔오래요.”

아이에게 엄마는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불이 붙으면 불을 붙게 함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화요일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화요일 복음에서는 ‘깨어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에 깨어있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시중을 드실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은 내가 뜻을 따라주는 대상으로부터 내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펭귄은 사막에서 살 수 없습니다. 창조하신 분의 뜻에 따를 때야만 먹이가 풍부한 남극에서 살게 됩니다.

      수요일 복음은 그런데 주님의 뜻을 따름은 곧 ‘나도 누군가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남극에 살더라도 자녀를 낳아 자녀를 키울 때야만 먹이가 풍부한 시기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두 내용의 결론으로써 ‘내가 새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분명 이전의 내가 죽을 때 흘리는 피가 있는데 그것으로 누군가가 불타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오시는 그분의 피와도 같은 성령으로 뜨거워져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으려는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는 올해도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엔 3-0으로 이기고 있다가 손흥민이 빠지자 10분 만에 3-3 동점이 되는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손흥민이 있게 만든 사람이 부친 손웅정씨임을 모두가 인정합니다. 손웅정씨는 지금도 손흥민이 월드 클래스가 안 되었다고 하며 이 하늘이 주신 기회를 하루하루 집중해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며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은 “저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입니다.

      손웅정씨도 한 때 실업 축구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축구선수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키가 작아서 몸싸움에서 밀렸고 기본기가 부족하여 공을 많이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투자를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손흥민이 다니던 학교 축구장에 매년 소금을 100포대씩 뿌렸고 축구공도 100개씩 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손흥민에게만 유독 혹독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기술과 체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훈련은 물론이요, 밥도 우유에 말아 먹게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의붓아버지라 할 정도로 혹독하게 아들을 훈련한 것입니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술을 마셨을 때 아버지는 손흥민 선수에게 제정신이냐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훈련을 아들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손웅정씨가 먼저 일어나 최대한 똑같은 훈련을 자신에게도 했습니다. 자신이 무뎌지면 아들도 무뎌질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연구하며 먼저 자신에게 임상시험을 합니다. 그리고 손흥민 선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은 반드시 습득할 수 있게 합니다.

 

손흥민 선수에게 인성을 가르치기 위해 1년에 30권 이상의 책도 읽게 하는데, 손웅정씨가 먼저 읽고 밑줄까지 친 것을 아들에게도 읽게 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손웅정씨는 진정한 축구인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진정한 축구선수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축구선수로 새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축구선수를 탄생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탄생시키지 않으면 진정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은 또한, 자신과 같은 사람을 낳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하느님이 주신 법칙입니다.

 

      손웅정씨는 아들이 번 돈 170억으로 춘천에 손흥민 축구 공원을 만든다고 합니다. 또 다른 손흥민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손웅정씨는 말합니다.

 

“170억으로 건물을 사면 너와 나는 앞으로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돈을 대한민국 축구 산업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면 그게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아버지의 설득을 단번에 받아들인 손흥민 선수의 이 피 흘림은 또 다른 자신과 같은 이들을 탄생시킬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불을 붙이고 있다면 자신에게 불이 붙은 것이 확실합니다. 내가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다면 나도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 피를 흘리지만, 그 피가 또 누군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신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부모의 피가 자녀에게 불이 됩니다. 그 불이 또 피를 흘리게 할 것입니다. 내가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누군가를 태어나게 만드는 이는 이미 태어난 것이 맞습니다.


-조재형신부-


교회의 4대 교리 중에 강생구속이 있습니다. ‘강생(Incarnation)'은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고말씀은 하느님이셨다.’입니다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대로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입니다하느님께서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교리입니다윤회를 인정하는 불교는 육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자비와 선행을 쌓으면 더 낳은 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교만과 악행을 쌓으면 더 비천한 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깨달음을 얻어서 해탈하면 윤회의 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우리의 의식에는 불교적인 윤회의 사상이 남아 있습니다힌두교는 육화를 아바타라고 이야기합니다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이다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합니다힌두교에선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인터넷 시대에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영화 아바타를 보신 분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나의 의식이 다른 생명체에 전이 되는 것입니다컴퓨터가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되듯이 의식도 에너지와 기를 통하여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합니다가상의 공간에서 나의 의지와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강생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그러나 교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그래서 세상에는 죄가 생겨났고죄의 결과는 비참한 삶과 죽음이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행사했고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 강생의 교리입니다예수님께서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포도원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일꾼에게 소작료를 주지 않았고오히려 일꾼을 죽였다고 합니다포도원 주인은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소작인들이 아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마저 죽인다고 합니다그리고 포도원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주인은 소작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포도원을 새로운 사람에게 맡긴다고 합니다이처럼 강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예언자하느님의 아들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학자들은 강생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강생을 통해서 세상을 한 차원 더 높게 만들어 주셨다고 이해했습니다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생로병사의 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해가 뜨면 지듯이꽃이 피면 지듯이달도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은 변하고변화의 끝은 허무였습니다천년도 지나간 어제 같고삶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과 같았습니다허무할 것 같은 세상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이 강생의 신비를 잘 이해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토 전서 13, 12)” 프란치스코 성인도 강생의 신비를 하느님께서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떼이야르드 샤르댕 신부는 이 강생의 신비를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고 이해했습니다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 강생의 신비를 우주 이야기(The Universe Story)’라고 이해했습니다.

 

핸드폰을 새로 마련하면 주소록과 사진과 같은 정보를 옮기고 전에 쓰던 것은 버리기 마련입니다새로운 핸드폰의 기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새로운 핸드폰을 두고 예전의 핸드폰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새로운 핸드폰을 마련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치와 삶을 말씀하십니다세상이 추구하는 명예권력재물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것을 여전히 추구한다면 이는 새로운 핸드폰을 마련하고도 헌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것들만 추구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순교자들의 희생과 죽음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삶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과는 결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그 과정이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보라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장 근본적이고 최우선적인 가치로 재설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기존의 대중 방송 매체에 1인 미디어, SNS의 가세로 지금 우리는 정보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부작용이 참 많습니다. 거대 언론사들 가운데서도 국가와 백성들에게 단 1도 도움이 않되는 허접한,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매체들도 부지기수인지라, 매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의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한 취사선택이 중요합니다.

  

때로 정제되지 않은 가짜 뉴스가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갑니다. 난무하는 ‘카더라 통신’은 선량한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교묘하게 이 나라 이 백성을 사분오열시킵니다. 그런 일에 가장 적극적인 매국노들을 소위 ‘기레기’라고 부릅니다.

  

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이들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허위사실, 왜곡보도, 선정성, 자극적인 문구, 정확성 결여, 신뢰성 부족...

  

기레기들이 주로 보이는 행태는 뻔합니다. 먹잇감이 나타나면 일단 터트리고 봅니다. 다음은 ‘아니면 말고!’입니다. 그들은 절대 발로 뛰지 않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카더라’통신을 짜집기 해서 자기들 입맛에 맛게 재편집합니다.

  

또 한 가지 기레기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있습니다. 앞 뒤를 싹뚝 잘라버리는 행태입니다.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교묘하게 편집합니다. 사실이나 진의와는 완전히 다른, 그야말로 생사람 잡는 기사를 창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읽을 때에도 정말 중요한 자세가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큰 틀 안에서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의 전후 맥락,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면서 사건이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 가운데 종종 의아한 말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도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51~53절)

  

기레기들이 당시 예수님 가까이 모여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게 웬떡이냐?’ 하며 대서특필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목을 이렇게 뽑았을 것입니다. ‘예수, 드디어 스스로 자신의 정체 폭로하다! 알고보니 사이비요 정신이상자에 폭력주의자!’ 

 

우선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밝았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은 존재 자체로 크고 환한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활짝 열린 새로운 시대, 백성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선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 기꺼이 밑으로 하강하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에 호응하는 열정과 능동적인 선택,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상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그간 섬겨왔던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대상들은 미련없이 내려놓고,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장 근본적이고 최우선적인 가치로 재설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등을 돌리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서 대판 싸우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서로를 인내하고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서로를 예수님 바라보듯 바라보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서로 더욱 일치하고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적 가치로 선택하는 결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려면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두를 하나로 만듭니다.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분열을 거쳐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슴과 가슴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원하는 것과 천상의 바람이 충돌하게 되고 마음의 분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하늘을 희망하기 때문에 고단한 과정을 감당하면서 쌓아 올립니다. 사랑은 끊이지 않는 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지리라고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셈을 가려내어 거짓평화를 무너뜨립니다. 결국, 각자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 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하더라도 영혼이 세속이라는 습기에 젖어들면 영혼의 불이 타오를 수 없습니다. 열정의 불이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 

-송영진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 성령, 심판 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나는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러 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예고하는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려고 오신 것이 아닌데도,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복음을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심판을 선택합니다.)

 

‘불’이라는 말에서 예레미야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여기서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주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한다.”로 해석되고,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른다는 말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온 마음이 불타오른다.”로 해석됩니다.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이제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커서

말씀을 전하는 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이 다시 연상됩니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7).”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람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셨습니다(마태 22,37).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향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눈앞의 세속적인 일들에 정신이 팔려서, 또는 물질적인 복만 빌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됩니다.

(불을 지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불이 타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해야 그 불이 타오릅니다.

사랑의 불은 우리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응답하고 노력할 때 타오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워서(불타오르게 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태우려면 모든 것을 다 태워야 합니다.

타다 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가기만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안타까움은 인간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말씀하신 ‘예루살렘 멸망 예고’에

특히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13장에서는 당신의 심정을 어머니의 심정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이 말씀들에서 ‘예루살렘’은 특정 도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믿음도 없고 회개도 안 하면서 멸망을 향해서 가는

모든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인간들이 구원을 받든지 멸망을 하든지 관심이 없을 것이고,

멸망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안타까워하시는 것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죄인의 회개를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그 죄인이 회개하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고 계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내가 죄를 지으면 크게 슬퍼하시고,

내가 회개하면 크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에게 무슨 손해가 생기거나 이익이 생겨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가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겪어야 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는 말씀은,

구원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당신이 계속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도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사랑이 너무 커서, 고통도 너무 큽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12,49-53: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지르시는 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 불로 채워주시도록 청하도록 하자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또한이 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동반자가 되게 한다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배운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으로 단련시킨다사랑은 그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사랑은 환해졌고 정의는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이다즉 당신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셨다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그러면 주님께서 신앙을 가지면 가족과 불화하라고 하신 것일까만일 가정을 깨뜨려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지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면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자기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를 저주하신 분이(신명 27,16) 부모를 버리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이 둘의 싸움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한상우신부-

타오르고
번져가는
단풍의 불길이다.

자연의 순리에서
너무나
뜨뜻미지근한
우리들 삶을
반성한다.

깊어져야 할
우리들
신앙이다

하느님의
뜨거운
탄생이

죄많은
우리들을
다시 비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삶을 태워서
복음이 되셨다.

꺼지지 않을
사랑이시다.

잊어버린
삶의 의미를
환하게
보여주신다.

복음이 되면
모든 것은
뜨거운
사랑이다.

복음의 불로
마음이 갈라진
우리를 뜨겁게
타오르게 하신다.

세상에 불을
지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과
거짓, 욕심
교만을
태우십니다.

타오른
그 불은
우리 마음을
향합니다.

죽어야 사는
역설의 불이다.

복음의 삶은
뜨겁게
나아가는
마음의 길이다.

타올라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이 마음이
타오르길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뜨거운 마음이
뜨거운
신앙이다.

뜨거운 신앙은
세상에 불을
지르신
예수님을
향해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던지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불은 삶에 유용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물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지르러 오셨다는 "불"은 하느님 현존이라는 영적 의미의 "불"일 겁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실 때, "연기가 타오르는 화덕과 횃불"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게 하셨고
(창세 15,17 참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 것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었지요(탈출 13,22 참조).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에도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엘리야 제단의 번제물을 삼켜 버립니다(1열왕 18,38 참조). 오순절에 성령께서도 불꽃 모양의 혀들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으셨지요(사도 2,3 참조).

이처럼 불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확연히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을 지르러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밝히십니다. 얼핏 생각하면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씀이지요. 평화가 얼마나 가치로운 성령의 열매인지 우리가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평화를 거짓 평화와 구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위선과 거래의 가면으로 위장한 거짓 평화가 아니라, 설령 고통의 늪에 빠져 질척대더라도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믿음으로 차오르는 참 평화입니다.

예수님이란 존재로 인해 거짓 평화, 위선적 야합, 겉꾸민 화평 따위가 진동과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게"(루카 2,35 참조)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열매와 여운은 사람 마음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악하고 불결하며 거짓된 이기심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제 안의 악이 건드려질 때, 어떤 경우는 뉘우치고 회개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오히려 분노하고 공격합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고, 이천 년의 세월 내내 그랬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서로 갈라져 ... 맞설 것이다."(루카 12,52)

분열과 함께 대립과 분쟁이 시작됩니다. 이는 영성생활 안에 존재하는 영적 투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집중하여 물들어 가면 하느님 아닌 것,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닌 힘에 대해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분위기, 하느님의 심성이 아닌 것을 점점 못견디게 되기도 하지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복음 환호송)

그렇다고 매번 정색하고 치받으며 싸움을 걸지는 않지만, 영혼은 압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힘이 지위를 이용해 교묘히 억압하거나 달콤하게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지요. 분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둠의 손을 잡거나 대충 영합하지 않고 부단히 선을 향하니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해로운 쓰레기"라는 격한 표현까지 사용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적 삶의 진수를 보여 줍니다. 사도가 에페소의 형제들을 위해 기원하는 축복의 내용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롱하고 풍요로운지 말씀을 반복해 읽는 것만으로 마음 한가득 뿌듯한 행복이 차오를 정도입니다.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게 하시고 ...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에페 3,17)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에페 3,19)

영성생활을 하는 이에게 이보다 더 큰 축원이 또 있을까요!!! 굳은 믿음으로 단련된 내면, 그리스도의 거처, 사랑에 기인하는 존재적 삶, 그리고 하느님의 충만함.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영적 삶의 본질이고 목적이며 진수이고 최고봉의 절정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충만하고 복된 삶까지의 여정 안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 중 하나가 "분열"입니다. 그저 헤집고 갈라놓고 대적시키려는 분열을 위한 분열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단호하고 추상같은 분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적당주의적 평화는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놓으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것과 아닌 것을 식별하는 사랑의 존재가 되길 바라십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이런 과정이 피곤하고 불편하고 힘겨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평화의 수면 위를 살살 오가는 정도로는 진정한 평화의 끝자락에조차 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타오르는 이 사랑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영적 삶에 들어선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르시는 불로 지펴진 이들이지요. 우리는 성령께 의지해 믿음의 결단을 이어가며,  사랑의 원리를 사는, 그리스도의 거처입니다. 하느님의 충만함을 희구하는 사랑의 길에 들어선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하며, 진정한 평화를 쟁취하려는 용기로, 중단 없이 꿋꿋이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극복치 못한 두려움은 어떻게?   

-김찬선신부-


제게는 일생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두려움인데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관계를 중시하는 감성적 성향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저의 내향적인 성향과 합쳐져 사람들과 관계를
많이 맺지는 않지만 한번 맺은 관계는 깊이 또 깨지지 않게
오래 유지하는 쪽으로 마음 쓰게 하고 관계파탄을 두려워하게 하는 겁니다.

물론 이런 두려움이 제게만 있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얼마간 있는 거겠지만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다른 성향의 사람들에 비해 저는 일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을 더 싫어하고 더 두려워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잘 벌이고,
일을 많이 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면서까지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진정 제게 일이란 하느님의 뜻이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식별하느냐 하면
모두를 위한 일이고 그래서 모두가 공감할 때, 다시 말해서 다수의 다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저는 식별을 하곤 합니다.

이에 비해 저와 반대 성향의 사람은 일의 옳고 그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리판단事理判斷을 중시하고 잘하며,
그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는 관계가 어떻게 될지 따지거나
관계에 따라 말을 가리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이렇게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말을 함에 있어 감정이 실리지도 않기
때문인데 다만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에
대해서도 감성형의 사람보다 많이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편이지요.

사실 제가 모진 말을 못하는 이유는 관계가 깨지는 두려움보다도
저의 말에 그가 아파할 것을 생각하면 제가 더 아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그것도 가까운 사람 사이에 분열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제게 관계가 깨지는 것, 분열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분열은 애덕이 부족하여 관계가 깨지는 죄스런 분열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반하는 관계적 평화 그러니까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거짓 평화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과감히 관계를 깨는 의로운 분열이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저에게 네 인간적 성향 차원에서는
두려워 결코 하지 못하는 관계의 분열을 하느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신앙 차원에서는 분열을 피하지 말고 할 말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성향으로 안 되는 것을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인간적으로 성향상 안 되는 것이면 신앙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 사랑으로 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지요.

오늘 주님께서 분열을 주러 왔다고 하기 전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두려움이 없지만
사랑 중에서 성령의 사랑이 불타오르면 인간적인 두려움을 불사르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 분열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고 하시는데
진정 그 불이 제 안에서 타오르기를 저도 바라고 비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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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어 그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세례란 본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모든 관계 가운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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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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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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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예수님이 지르러 오셨다는 "불"은 하느님 현존이라는 영적 의미의 "불"일 겁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실 때, "연기가 타오르는 화덕과 횃불"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게 하셨고(창세 15,17 참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 것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었지요(탈출 13,22 참조).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에도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엘리야 제단의 번제물을 삼켜 버립니다(1열왕 18,38 참조). 오순절에 성령께서도 불꽃 모양의 혀들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으셨지요(사도 2,3 참조).

이처럼 불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확연히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을 지르러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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