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10. 13. 18:53

2019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2)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내며, 은총과 평화를 기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시면서, 그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나 예언자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순명하지 않고 도망을 가다가,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냈고, 결국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 명령대로 회개를 선포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생명을 되찾은 사람으로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위한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십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인격 자체가 사람들에게 표징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요나 예언자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보낸 것을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셔서 사흘 동안 머무신 것을 미리 보여 준 예표로 여겼습니다.이 표징 이야기의 핵심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남방의 여왕이나 니네베 시민들은 다 같이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자였던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경청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그들보다 더 탁월한 현자요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상대로 엄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는 예수님 당시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주님의 요구이며 요청입니다. 회개하여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그 자체로 이미 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1년에 썼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벌써 만 18년 전에 쓴 묵상 글입니다. 유치하기도 하고, 이런 내용을 묵상 글이라고 썼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 내용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오늘 쓰고 있는 글 역시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지난 뒤에 바라보면 유치하고 부끄럽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는 성장합니다. 유치함과 부끄러움을 극복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감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라고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역시 극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서 유치함과 부끄러움이 점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착각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나의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지금의 상태로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착각입니다. 바로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기에 갖게 되는 착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쓸모없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점점 나아질 수 있도록 만드셨고, 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이 이 세상 안에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하는 ‘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놀라운 표징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표징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혹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서만 표징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서 모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꾸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마술사 예수님만을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기적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지금을 사는 우리 안에서 그대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삶 안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을 깨닫는 것보다 큰 기적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하라. 시작할 용기 안에 천재성과 능력, 기적이 숨어 있다(괴테).



아이디어를 찾는 시간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신부님, 책을 쓰는데 보통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이제까지 9권의 책을 출판했기에, 한 권의 책이 나오는 시간이 궁금했나 봅니다. 사실 저의 책들은 이제까지 썼던 ‘새벽 묵상 글’ 중에서 책으로 내고 싶은 내용을 뽑아 다시 구성해서 출판합니다. 아주 새롭게 쓰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작가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30초 걸렸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싶지요? 이 작가는 말합니다.

“30초는 아이디어를 찾는 시간입니다.”

아이디어를 찾으면 책을 거의 다 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생각이 중요합니다. 특히 새로운 생각들, 이러한 생각들의 확장이 주님의 일에 있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없으면 표징도 없다

-전삼용신부-


큰 빚을 지고서도 게으름만 피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채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돈을 갚을 생각이 있긴 한 거요?”

      “있고말고요. 당신의 돈을 갚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가 다 쉽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채권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대체 그 세 가지가 뭐요?”

      “저... 하나는 당신이 갑자기 죽어서 돈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좋겠고, 둘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가 분실되든가 불에 타든가 했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많은 돈을 주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이 없는지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이 빚쟁이는 좋은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돈을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못 갚더라도 돈을 갚을 방안을 생각하고 노력을 하고 있다면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선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빚쟁이라도 선한 사람이라면 일자리라도 알아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하십니다. 악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변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악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핑계를 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그들의 핑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키워준 것에 대해 보답하기를 원치 않아 자신의 부모가 맞는지 증거를 대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자신의 부모가 맞는다는 증거를 대보라는 것만큼 불효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으려고만 한다면 부모가 준 사랑의 기억을 통해 부모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으려고만 한다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믿으면 내가 변해야 하니까 그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표징을 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변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입니다. 변할 마음만 있으면 표징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페루의 모체 시에서 CCTV 보안 카메라에 한 남자 아이가 가로등 불빛으로 공부하는 모습이 인터넷 여기저기 공유되었습니다.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레인에 사는 야쿱이라고 하는 한 백만장자가 우연히 이 동영상을 접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그 소년을 찾았고 그 아이가 12살 빅터 앙굴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쿱이 직접 본 앙굴로의 집은 생각보다 비참하였습니다. 처음엔 앙굴로를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생각이었지만, 허물어져가는 집을 다시 지어주고 앙굴로의 학교에는 컴퓨터를 보급해주었습니다. 앙굴로의 어머니에게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앙굴로가 평소에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해서 훌륭한 학생이자 모두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없기에 표징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굳어버린 유태인들과 비교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멀리 남방에서 온 여왕과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예로 드십니다. 변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무언가 시작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선할 수 없는 핑계를 반드시 만듭니다.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 하늘의 표징은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져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먼저 지성부터 합시다. 감천이 따라올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진주조개가 있습니다. 조개는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면서 진주를 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찾는 건 조개껍데기가 아닙니다. 조개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입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잘 모릅니다. 다만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조개는 아픔을 참아내야 할 겁니다. 매주 가톨릭 평화신문이 발행됩니다. 신문이 조개껍데기라면 신문을 채우는 글과 기사는 진주와 같습니다. 좋은 기사와 사진을 보내주시는 분이 있기에 신문이라는 껍데기는 진주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 있기에 신문이라는 껍데기는 매주 은은한 빛을 내는 진주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글을 주시는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상담을 통해서 치유되는 사연을 전해주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서평과 함께 영적인 도움을 주는 책을 소개해주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민 생활의 애환을 묵상을 통해서 전해주시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멀리 있는 분은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전화로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애정과 관심이 있기에 가톨릭 평화신문은 매주 작은 진주를 보여 드리게 됩니다.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고된 훈련과 선임병의 얼차려와 초소 근무의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연예인들의 위문 공연도 있습니다. 중대장님이 허락한 회식도 있습니다. 옆 내무반과의 족구도 있습니다. 제게 커다란 위로를 주었던 게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친구와 지인들이 보내주었던 편지였습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보내주었고, 아직 입대하지 않았던 친구가 보내주었고, 농촌 봉사활동 가서 알게 된 학생이 보내주었습니다. 성탄 때면 추기경님께서도 카드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편지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농촌 봉사활동 가서 알게 된 학생이 보내준 인사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라는 인사말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받았던 편지는 고된 군 생활에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로마의 신앙 공동체와 다른 교회의 신앙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받았을 때 기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헌신과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엄한 질책과 충고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배웠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환난도, 박해도, 칼도, 두려움도, 권세도, 천신도, 세상의 그 무엇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참된 행복, 참된 기쁨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표징은 놀라운 업적, 전쟁에서의 승리, 엄청난 재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이면 족하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3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얼굴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 원망과 불평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원망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회개한 사람은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으면 그것이 마음에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가 환난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시련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굳게 믿으면 의화(義化)되고 구원됩니다!

 -양승국신부-

 

오늘부터 우리는 열흘 넘게 첫번 째 독서로 로마서를 봉독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쓰신 마지막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서는 여러 바오로 서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이는 로마서가 바오로 서간들 가운데 차지하는 가치와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세 번에 걸친 고된 동방 전도 여행을 마친 바오로 사도의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치셨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휴식 겸 피정도 하면서, 전도 여행을 정리하기 위해, 코린토 시내 가이오스의 집에 석달간 머물렀습니다. AD 56~58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 로마서는 씌여졌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구술(口述)하셨고, 테르티우스가 받아 적었습니다. 완성된 편지는 켕크레애 교회의 성모회장 격인 포이베에 의해 로마 교회로 전달되었습니다.

 

 로마서 안에 포이베라는 인물을 비롯해 프리스카, 마리아, 트리포사, 페르시스, 루포스의 어머니, 올림파스 등 여성들의 등장을 통해,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당신의 복음 선포 사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포함시켰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여성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인 프리스카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애를 많이 쓴, 사랑하는 페르시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서 16장 3절, 12절)

 

 로마서의 집필 목적은 서간 안에 명확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역에는 더 이상 내가 일할 곳도 없고,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에스파냐로 갈 때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얼마 동안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나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5장 23~24절)

 

 3차에 걸친 험난한 선교 여행을 통해, 동방에서의 전교를 마무리지었다고 판단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전도 여행 중에 겪은 갖은 고초로 인해 온몸은 만신창이가 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너무나 힘겨운 여정을 걸어온 그였기에, 이제는 좀 쉴만도 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은 그칠줄 모릅니다.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스페인 포르투갈 쪽 서방 전도를 준비합니다.

 

 이렇게 동방 전교를 끝내신 바오로 사도가 서방 전교를 시작하기 전, 코린토 교회에 잠시 휴식하면서, 로마 교회 신자들을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쓰신 편지가 로마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서를 쓰실 당시 교회는 꽤나 큰 위기 상황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유다교 전통을 중시하고 고수하려는 보수파 유다교 그리스도인들과 새로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한 이민족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깊어만 가는 골을 어떻게 하면 메꿔볼까 고민하고 또 노력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 부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일치시키고 화해시킬까, 고민하면서 로마서를 쓰신 것입니다.

 

 사실 로마 교회 그리스도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직접 선교하여 신앙의 길로 이끈 직계 자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최고 목자로서 로마 교회 신자들 역시 각별히 신경쓰고 도와줘야 할 영적 자녀들로 여겼습니다. 로마 교회 신자들 신앙의 성장과 쇄신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자상한 마음이 로마서 안에는 듬뿍 담겨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로마서 1장 16~17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화(義化)와 구원은 이제 더 이상 나라나 민족, 인종이나 신분, 지위고하나 경제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굳게 믿으면 의화되고 구원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장차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면 의화되고 구원받는다는 것! 그것이 로마서 전체의 간추림입니다.


기다리시는 분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십시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세대입니다. 악한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 세대를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 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표징

-송영진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루카 11,14),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루카 11,15),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루카 11,16).
마귀는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정말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요구는 ‘믿고 싶어서’ 한 요구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 한 요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귀 우두머리가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자기 힘을 빌려 주는 것은 그 자신이 자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하시고(루카 11,17-18),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11,20).
그리고 그들을 ‘악한 세대’ 라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의 힘’이 작용한 일이라는 것이 명백한데도 믿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악한 일’, 즉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여 주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이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그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당신을 안 믿어도 당신의 부활 후에는 믿게 될 것이라는 예고인데,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회개부터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또는 표징을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 또는 예수님을 인정하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속임수’ 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속임수, 사기’ 라고 생각했습니다(마태 27,64).
(오늘날에도 ‘기적’을 ‘우연의 일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않고,
착각이나 환각일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해도 그렇습니다.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이 있지만 더욱 확신을 갖고 싶어서
표징을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표징이 없어도 흔들림 없이 믿는 사람들’보다는 믿음이 약하고
부족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즈카르야인데, 그는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을 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8).
여기서 ‘어떻게’ 라는 말은, 표징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였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고(루카 1,6).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한 말이 아니라
‘더욱 확실하게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말입니다.
(그는 자기와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천사의 말을 못 믿었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인간의 상식’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벌’을 받은 일이라기보다는
그가 요구한 ‘표징’을 얻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마리아도 즈카르야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여기서 ‘어떻게’ 라는 말은 표징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표현은 비슷한데,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네가 따로 무엇을 해야 할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했고(루카 1,35),
또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전해 주면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도 했습니다(루카 1,37).
믿음이 있지만 부족했던 즈카르야에게는 표징을 줄 필요가 있었지만,
믿음에 부족함이 없었던 마리아에게는 따로 표징을 줄 필요가 없었고,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었던 제자들이 혼인 잔치의 기적을 본 다음에야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본 다음에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의 맨 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런 말들은, “표징은 믿음의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있으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보조 수단.)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 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시켜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서 등 우리는 하고자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 29)

-한상우신부-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목마르고 혼돈스러운
이 세대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회개가 필요한
이 세대의
아픔입니다.

회개는 우리모두를
살리기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를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안에는
머뭇거림이란
없습니다.

회개라는 은총과
은총이라는 신비와
신비라는 경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회개만이
새로 태어나는
이 세대의 가장
뚜렷한 표징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우리자신의 회개를
간절히 청합니다.

우리자신의
회개만이
반목과 대립을
없애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표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이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기쁜 회개의 길을
걸어가는
감동의 세대이길
기도드립니다.

이 세대가
진정한 회개로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엽시다.


-오상선신부-


이제 평일 미사 독서에서 울려퍼지던 구약 예언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사도 바오로의 서간이 봉독됩니다. 그동안 구약의 독서들이 복음 내용의 근거를 제시했다면, 신약의 서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복음을 해석하고 신앙 고백의 근간으로 삼을 것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루카 11,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기는 하는데 진짜배기 신앙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듯합니다. 그들의 몸은 예수님 곁에 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재고 따지는 중입니다. 요즘 말로 간을 보고 있다고 할까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진짜 메시아일지, 믿어도 괜찮을지, 마음을 열어도 좋을지, 가르침을 따라야 할지 말지...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더 큰 기적, 더 확실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지금 입밖으로는 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런 질문을 던지겠지요.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예수님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육지로 뱉어진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들어 그밖에 다른 표징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야말로 수난과 죽음을 거쳐 사흘만에 부활하신 당신의 파스카를 미리 보여준 것이지만, 그 연관성을 깨닫지 못한 군중으로선 실망스럽기 짝이 없겠지요.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찾아온 남방 여왕을 들어 군중의 무지와 게으름, 안일함을 흔들어 보시지만 여전히 군중은 그저 눈에 보이는 기적만 게걸스레 군침 흘리며 기다릴 뿐입니다. 지혜도 회개도 그들의 관심 밖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32).
"여기에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계시인지요! 먼 옛날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당신을 드러내셨을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4,14)라고 하셨지요.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즉 "있는 나"이십니다.

예수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여기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땅 위 "여기에",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계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인 "있는 나"에 더해진 "여기"라는 현장성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그분은 여기에,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있습니다(계십니다).

지혜 자체이시며 백성의 마음을 아버지께 돌려 구원을 이루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두 차례나 반복하시는 안타까운 음성이 들립니다. 그 안에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탄식하셨던 하느님의 목소리가 담겼습니다.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겨레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반항하는 백성에게 날마다 팔을 벌리고 있었다"(이사 65,1-2).

사실 이제는 지혜를 들으러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현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이신 분이 "여기" 계시니까요. 또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들으러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 살아난 예언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지혜와 표징의 주인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시작 부분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명징하게 설명합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로마 1,2).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구약 성경에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이지요. 곧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며, 또한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지혜의 상징인 솔로몬도, 물고기에 먹혀 죽은 줄 알았던 요나가 사흘만에 다시 나타난 기적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안내문일 뿐입니다. 그런데 군중은 그토록 절절히 고대해온 실체 앞에서 여전히 안내문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으니 예수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실까요...

사도 바오로는 눈도 귀도 마음도 닫힌 우매한 군중 무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아듣고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로마 1,6)이 된 성도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일깨워 줍니다. 바로"사도직의 은총"(로마 1,5)입니다. 사도직의 은총은 다름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로마 1,5)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입니다.

이렇게 부르심 받은 우리는 나이와 성별과 소속과 신분에 관계 없이, 또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 없이 성령에 힘입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헌신하는 그분의 종, 그분의 사람입니다.

말씀과 함께 살아가면서 들은 바를 나누고, 나눈 바를 행하고, 행한 바를 봉헌할 때, 우리에게서 "사도직의 은총"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매는 이웃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만들, 놀랍고 은혜로운 표징이 될 것입니다.

신비가 사라진 천박한 앎을 반성하며 
-김찬선신부-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독서 로마서의 시작을 읽을 때 제게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기 전에 밤새도록 한 고백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장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이 고백이 생각났을까 생각해보니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며 하는 말이
예수는 누구이고 자신은 누구인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즉시 반성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과 나의 차이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반성입니다.

이 두 성인은 인생의 막바지까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과
뚜렷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성찰과 인식이지요.

헌데 언제부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 질문과 성찰이 제게는 사라졌습니다.
왜 사라졌을까요?

10대, 20대 때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는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존재인지 몰랐고 또 그래서 알고 싶었으며
그래서 질문을 참으로 많이도 던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그 답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도 기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그때 이후 그리고 지금은 '답을 알았으니 됐다!'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직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탐구가 끝나지 않고 계속 되고,
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어느 정도 됐다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고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치열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기쁩니다.
두 성인처럼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또 까먹을지라도.

사실 나라는 존재를 잘 알고 있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잘 알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나이고,
하느님은 더더욱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느님이 신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신비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건 나에 대해서건 신비가 사라진
천박한 앎에의 안주를 뉘우치는 오늘이고,
그래서 새삼스럽게 입으로 읊조려 봅니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이여,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장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저는 무엇입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