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2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가 11,27-28)
“Blessed is the womb that carried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He replied, “Rather,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ser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 주시고 시온에 머무르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를 행복하다고 하는 여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의 짧은 복음은 군중 속에 있던 한 여자의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시는 일에 탄복한 여자는 예수님을 실제로 낳으시고 기르신 성모님을 찬양합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낳고 기른 인간적인 인연보다 더 높은 행복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진정 행복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고 성모님께서 당신을 찾아오셨을 때나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부인하시거나 깎아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성모님을 올바로 보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것은 단순히 구세주를 낳으신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명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가브리엘 천사의 주님 탄생 예고를 들으셨을 때부터 당신을 ‘여종’으로 자처하셨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순명하신 것에 성모님의 진정한 위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계실 때도 아드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신 분이시기에, 성모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로 정의되는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십니다.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성모님을 따라 그 말씀에 의지하고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행복의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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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부부가 주유소에 자동차 기름을 넣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주유소 사장은 부인인 힐러리 여사의 옛 남자 친구였습니다. 주유를 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 클린턴이 의기양양하게 “만약 당신이 나 대신 저 남자와 결혼했으면 주유소 사장의 부인이 되었겠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힐러리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뇨, 아마 저 남자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걸요”
우리의 착각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상대방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문제가 없고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황금률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이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운데에서는 나의 행복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상점에 들어갔습니다. 물건을 고른 뒤에 계산대에 놓고서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주인이 말합니다.
“이거 내 거야. 안 팔아.”
팔지 않은 상태에서는 분명히 가게 주인 것이지요. 그래서 팔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누가 다시 이 가게를 다시 찾겠습니까? 결국은 누가 손해겠습니까? 손님은 다른 가게를 찾아가면 그만이니, 가게 주인만 손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 속의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했고 키웠기 때문에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의 관점으로 낳고 기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가치에 더 집중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순간의 만족과 행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가치를 따라야 합니다. 그 가치는 겸손하게 나를 내려놓고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계속하면 그 분야에서 성장하는 나 자신을 분명히 만날 수 있습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연주 연습을 하는 연주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아직도 실력이 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공부가 늡니다. 운동을 많이 하면 운동이 늘지요. 요리를 많이 하면 요리가 늡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하면 할수록 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결과이고 이제까지 그 결과가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걱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걱정도 많이 하면 늘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늘어야 할 것과 줄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걱정을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줄이도록 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감정은 줄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늘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되는 행복이 있고 갖는 행복이 있다.
-전삼용신부-
류현진 선수가 뛰고 있는 LA 다저스는 7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습니다. 포스트 시즌은 한 해 동안에 성적이 좋은 팀들만 나와서 최고를 가리는 경기입니다. 그러나 다저스는 7년 동안 한 번도 트로피는 들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또 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투수 클레이튼 커쇼입니다. 미국 최고의 투수이고 많은 명성을 얻는 선수이지만 가을야구에서만은 혹독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두 방의 홈런을 연속으로 맞으며 팀 전체가 희망을 버려야 했습니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와는 달리 투수의 역할이 정말 큰 것 같습니다. 그만큼 지면 투수의 부담도 큽니다. 돈도 많고 인기도 많은 커쇼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참하고 끔찍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진 것을 잃고 쌓은 것이 허물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비참하고 끔찍해야할까요? 그런 상황에서도 의연하려면 가지고 쌓는 행복보다는 되는 행복에 집중해야합니다. 훌륭한 투수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되는 행복과 갖는 행복입니다. 되는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애인이 되는 행복과 같습니다. 그러나 애인을 갖는 행복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애인을 더 갖고 싶어서 애인이 있어도 다른 애인을 또 찾습니다. 그렇게 되면 참된 배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갖는 행복은 되는 행복을 잃게 하고 되는 행복은 갖는 행복을 잃게 합니다. 되는 행복을 추구하면 가난해지고 갖는 행복을 추구하면 외로워집니다.
그런데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되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갖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주위의 사람을 잃습니다. 물론 돈과 명예가 있는 사람들 주위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과 명예가 좋아 붙어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세속적인 행복을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자신도 어머니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아들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들로 두더라도 그런 마음으로는 행복할 수 없음을 일러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이웃의 형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갖는 행복보다 되는 행복이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같은 아들을 ‘가지려 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폐륜아들은 보험금을 타내려고 부모를 다치게 하고 죽게도 합니다. 만약 안 들키고 보험금을 타내면 행복할까요? 돈을 위해 부모를 죽인 자식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더라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돈은 육체만을 행복하게 하고 영혼은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되는 행복으로 행복 하고 싶은 것은 영혼이고 갖는 행복으로 행복 하고 싶은 것은 육체입니다. 내가 무엇을 행복하게 하려는 지에 따라 모기가 되기도 하고 예수가 되기도 합니다. 갖는 행복을 추구하면 지옥에 가고 되는 행복을 추구하면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을 누릴 것인지, 그 행복을 버리고 고아로 살며 갖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거지가 되어도 임금의 행복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갖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가난하면 가난해서 불행하고 부자가 되면 그것을 잃을까봐 불안해합니다. 절대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추구합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뿐입니다.

-조재형신부-
어쩌다 뉴욕의 경찰서엘 다녀왔습니다. 2년 동안 신문사 마당에 주차된 차가 있었습니다. 번호판도 없고, 주인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차를 견인하는 회사는 차를 옮길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견인 비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폐차를 가져가는 회사도 난색을 보였습니다. 번호판이 없는 차를 가져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경찰은 사유지로 가서는 견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견인차를 불러서 길가에 내놓으면 그때는 견인하겠다고 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분의 주차된 차가 경찰서를 가게 하였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은 있었을 겁니다. 2년이 지나면서 신문사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행히 원만히 해결되었고, 미국 사회의 한 면을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문화재를 약탈했던 나라입니다. 36년간 식민통치로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시키려 했고, 강제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위안부로 젊은 여성을 끌고 갔던 나라입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점유권으로나 분명 우리의 땅인데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나라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까운 이웃을 잠재적인 위험 국가로 여기며, 수출을 규제하는 나라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나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타인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일그러진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시인이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한걸음에 달려와 어머니에게 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잘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상을 못 탄 친구들 마음은 어떨까?’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음 날 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너희들 기분은 어떠니?’ 친구들은 좋다고도 하였지만, 별로라고 하기도 하고, 그냥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그때부터 혼자 잘하는 것보다 함께 잘하는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모두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한 마디는 소년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만 잘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위해 투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마카베오서는 순교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합당한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일곱 아들의 어머니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이익을 따라가는 사람은 현세에서는 잘사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욕망과 이익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현실의 삶에서는 힘들고 고난을 받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참으로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리라 예언합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성모님에게 있어 아들 예수님은 언제나 연구 대상이었고, 성찰과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생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 얼마나 가슴이 설레고 기쁘셨겠습니까? 구세주 하느님께서 당신 태중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 당신 온 몸으로 단말마의 고통을 느끼며 아기 예수님을 분만하셨다는 것, 당신께서 직접 예수님에게 젖을 물렸다는 것, 몇년 간에 걸쳐 기저귀를 갈아주고 품에 안아주었다는 것, 얼마나 보람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성모님께서는 큰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한 여인이 군중 가운데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복음 11장 27절)
이런 여인의 발언 앞에 성모님께서도 가슴이 뿌듯했을 것입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래! 저 사람이 내 아들이야! 열달 동안 내 뱃속에 있었지! 그리고 나를 통해 세상에 나왔지. 저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라구!’
그런데 예수님의 발언이 전혀 뜻밖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복음 11장 28절)
성모님 입장에서는 꽤나 서운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성모님이었다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것입니다. 속으로 엄청 욕했을 것입니다.
‘야! 너, 예수! 정말 너무한 것 아냐?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그동안 헛수고 했구먼. 그래 이제 네가 많이 컸단 말이지? 아무리 메시아라도 사람이 되야지?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되!’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발언 앞에 그저 침묵하십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즉시 마음을 고쳐먹고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지금 제 아들 예수가 하는 말씀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제 믿음이 깊지 않아서 그렇겠죠? 제가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해하지 못하지만 제가 좀 더 비우고, 좀 더 내려서고, 좀 더 노력하다보면, 오늘 하신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날이 있겠지요? 그날이 오기까지 좀 더 인내하고 좀더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평생토록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오늘 비록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실 그날 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했습니다.
결국 성모님에게 있어 아들 예수님은 언제나 연구대상이었고, 성찰과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시로 보여주셨던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성모님께서는 기도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성모님의 신앙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온 세상 신앙인들의 모델이요 이정표가 되신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강제 징용에 끌려가 갖은 죽을 고비를 넘기셨던 ‘일본제철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 과정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고맙게도 양심있고 의식있는 일본인들이 이 소송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더군요.
각고의 노력 끝에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의 소유자들인 피해자 할아버지들을 만나 설득하고, 그들과 함께 소송을 준비했습니다. 최종적인 타깃은 일본 정부요 일본 법원이었지만, 우선 한국 정부와 한국 법원을 대상으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간에 걸친 준비 작업 끝에 할아버지들과 일본 은인들이 한국 관할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건 한 가지 발생했습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일본 제철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제출한 손해 배상 청구 건에 대해 근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비정상이 정상화된 어느 시점, 드디어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8년 10월 30일, 해방 후 73년만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법적 손해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신일철주금 대법원 판결문)
최종적으로 일본제철은 피해자 할아버지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기 엄청난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낀 피해자 할아버지들께서는 한분 한분 돌아가셨습니다.
고마운 일본인들은 최종적인 승소 판결이 내리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소송을 함께 준비한 할아버지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며, 당신들의 일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이신 이춘식 할아버지(95세)를 바라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강제 징용 피해자들을 잘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인들 가운데도 이런 분이 계시는데,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이며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계신 국내 유수 대학교 교수라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정말이지 기가 차지도 않고 코가 차지도 않습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일본으로 건너가 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강제동원은 과장을 넘어 날조된 '신화'에 불과합니다.”(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징병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한국인 구분 없이 임금은 공평하게 지급됐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임금이 더 높았습니다. 전쟁 기간 한국 노무자들은 쉽고 편한 삶을 살았습니다."(이우연, 2019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 UN 인권이사회 발언)
대체 이 분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맞습니까? 이런 분들이 버젓이 대한민국 땅에서 ‘이승만 연구소’며 ‘낙성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 용인될 수 있는 일입니까?
이런 분들이 대한민국 청년들의 로망인 국내 유수 대학교의 교수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허락 가능한 일인가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이 이런 정신나간 매국노들의 가르침을 고분고분 듣고 있다는 것, 이게 참고 있어야 할 일인가요?
틈만 나면 성명서를 발표하고 틈만 나면 가차없이 촛불을 드는 국내 유수 대학교 대학생들이 이런 사람들을 지도 교수로 모시고 있으면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것,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 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말하면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을 하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행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 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저 12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요. 나예요’ 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겁니다.”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병실에서 밝고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호사가 그 비결을 여쭤봤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건 매일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오.” 간호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할아버지는 가족도 친지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매일 오는 사람이 있지.” “그 방문객은 언제 오시나요?”“매일 열두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오시지.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방긋이 웃으면서 한 말씀하고 바로 돌아가셔.”“뭐라고 하시는데요?”“간단해. ‘여보게, 날세. 나, 예수네” 라고 하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과 행복
-이종훈신부-
예수님은 행복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산에서 군중에게 “행복하여라(마태 5,3-12).”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을 테고, 만일 그랬다면 그분은 거짓말쟁이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도 또 행복하지도 않은데 마치 그런 것처럼 군중을 가르쳤으니 말이다. 그분은 하느님이라서 그분에게는 거짓이나 위선은 없다. 그분의 삶은 곧 그분의 마음이다.
행복은 성과나 성공이 아니라 내적인 상태이다. 세속적인 시각으로 예수님이 행복하셨다고 평가하기 정말 어렵다.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고, 계획했던 일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게다가 누명을 쓰고 치욕스럽게 사형을 당하셨다. 그분은 그 길을 피해갈 수 있었고 다른 방식으로 계획했던 일을 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도 우직하게 그 길을 가셨다. 융통성이 없거나 고지식해서가 아니라 다른 길은 없고 그 길이 제일 좋은 길, 참된 행복의 길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고(루카 11,28),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자매 그리고 어머니가 된다(루카 8,21).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세례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하느님은 행복의 근원이시고 그분의 말씀 안에 행복해지는 길이 있다.
돈, 명예, 권력, 성공, 쾌락 그리고 어쩌면 가족과 건강까지도 행복의 절대적 조건이 되지 못함을 다 안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갖고 유지하려고 자주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그런 것들은 사는 데 필요하거나 사는 동안 잠시 주어지거나 따라붙는 것들로 때가 되면 사라진다. 장볼 때 그 물건에 성의 없이 붙여 놓은 사은품 같은 것들이다. 품질에 자신 있으면 그런 것 없이 소비자에게 당당하게 제 값을 요구했을 것이다. 행복과 하느님 말씀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더하거나 뺄 것이 없고 화려한 포장이 필요 없다. 이미 한 사람과 목숨까지 내놓으며 그분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언한다.
예수님,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그것이 의무라서가 아니라 거기에 행복해지는 길이 있고 주님말씀을 떠올리지 않으면 제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분부대로 행복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인생길의 따뜻한 안내자이시니 오늘도 주님 계명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라고 감격에 찬 말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성장하였을 때, 의례히 받을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찬사라고 하겠다. 이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대한 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라고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에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을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뵈올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 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였다(참조: 마르 3,35).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한상우신부-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함께 해야 할
행복이며
건강하게 성장할
행복입니다.
행복은
말씀과 실행에
달려있습니다.
말씀으로
채워져야 할
행복이며
실행으로 깊어질
우리의 행복입니다.
말씀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임을
깨닫게됩니다.
말씀과 실행이
모든 관계의
피와 살이 됩니다.
혈육의 정보다
더 영원한 것이
말씀의 정(情)입니다.
말씀의 모태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아주는
실행의 삶 되십시오.
머물러야 할
말씀이며
어울려야 할
공동체의 진실된
실행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는 새 희망이 가득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방금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고, 베엘제불 운운하며 수근거리는 군중에게 당신의 뜻을 차분히 피력하셨지요. 이 가르침을 듣던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칭송합니다. 이런 칭찬은 언급된 당사자에게도, 그 어머니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됩니다. 자녀의 훌륭한 됨됨이와 능력이 그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자랑과 보람이 되는지 아이를 낳아 기른 여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이 대답은 결코 그 여인을 무안하게 만드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과 위로와 희망을 주시고자 하신 말씀이지요. 그 행간에는 "피와 살과 젖을 내어준 어머니도 행복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할 여러분도 그에 못지 않게 행복합니다"라는 따뜻한 속말이 숨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을 낳아 기른 성모님을 폄훼하시려는 걸까요?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에게 행복하다고 외쳤듯이(루카 1,45 참조),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킨 최고의 모범 신앙인이시니까요. 성모님의 행복이 육적인 모자 관계에도 있음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분이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지켜낸 행복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크다는 걸 짚으시는 겁니다.
아울러 말씀을 들어서 품고(잉태하고) 지키는(출산하고 양육하는) 모든 이가 행복하다는 취지의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당시 예수님 곁에 모여 말씀을 듣는 이들과, 수 세기를 지나 지금 말씀 앞에 머물러 귀를 기울이는 우리 모두의 행복을 선포하신 것이지요.
어쩌면 영 안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행복한 어머니"이기도 할 겁니다. 말씀을 들어서 품고(잉태하고) 지키니(출산하고 양육하고 나누니) 말입니다. 해산에 죽음과 같은 고통과 두려움이 따르듯, 우리 존재 안에서 육화되고 소화된 말씀을 세상에 내놓는 데에는 지난한 아픔과 통증이 따르지요.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지만, 모두 복된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생명을 낳는 일은 결국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선포됩니다.
"내가 사방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려고 거기에 자리를 잡으리라"(요엘 4,12).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해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주님 친히 보내신 이방 민족들이 제 폭력성과 탐욕을 주체 못하고 주님의 의도 이상으로 예루살렘을 도륙하고 유린한 데 대한 심판입니다.
"그들의 악이 크다"(요엘 4,13).
하느님의 말씀과 그 뜻을 수행할 때 누구도 제 욕심에 치달아 그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그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이 되어버리고, 순종의 향기가 아닌, 부패한 자기 영광의 악취가 풍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요엘 4,16).
이처럼 두려운 징벌의 때에 주님의 백성은 피난처요 요새이신 주님께 몸을 숨기고 그분께 의지해 생명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다시는 당신 백성의 잘못 때문에 피난처와 요새를 허물어 잔인한 이방 민족의 칼에 백성을 내어주지 않으시고, 새로운 대속의 희생 제사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요엘 4,18).
"새 포도주"는 다가올 하느님 백성을 기쁨으로 취하게 하는 성령을, "젖"은 그들의 영을 더욱 기름지고 풍요롭게 살찌울 말씀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제사로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종말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해 나누는 행복은 이 지상에서 시작해 마지막 날 주님을 맞이하는 순간을 거쳐 영원한 생명으로이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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