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10. 11. 20:15

2019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 게 와 있는 것이다
(루가 11,15-26)

  

If it is by the finger of God 
that I drive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마귀를 쫓아내시는 주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며,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다가 사람들에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은 이제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까지 전락시키고 맙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한쪽은 하느님의 능력을 보고 놀라워하지만, 다른 쪽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사주를 받았다고 수군거립니다.주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하는 영적 자세는 신앙의 확고함이나 철저함보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하느님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은 마음으로는 하느님도 이웃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힘센 사람에 대한 비유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사탄의 사주를 받는 분이 아니라 더 힘센 분, 곧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분이며,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그 표지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고는 결정적으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 실현되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앞에 둔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십니다.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살 수 있고 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완성을 희망하며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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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있었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친구가 제게 책을 빌려 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책을 돌려주었는데 글쎄 그 친구가 책에 낙서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에게 항의했습니다. 책을 빌려 갔으면 깨끗하게 보고 갖다 줘야지 왜 낙서를 해놓았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이 친구를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남자가 쫀쫀하게 낙서 하나 가지고 화를 내니? 친구라면 이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는 것 아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냥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는데 괜히 쫀쫀하게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부끄럽고 마치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미안하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했습니다. 잘못한 것은 이 친구인데 왜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싶었습니다. 며칠 뒤에 친구가 또 책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책을 빌려줬을까요? 아니면 빌려주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문득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분명히 잘못한 것은 나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나를 지켜주지 않냐고, 왜 나를 잘 되게 해주지 않냐고,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냐고….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작은 잘못에도 깊이 뉘우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쯤이면 괜찮지 뭐.’라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편에서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벙어리 마귀는 다른 마귀들보다 훨씬 기가 세고 고집불통으로 알려져서 그 누구도 꾸짖고 쫓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거뜬히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여기서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이 아주 엉뚱한 말을 뱉습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주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마귀의 전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깁니다. 자신의 잣대로 주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행하신 기적을 보고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오히려 적으로 대합니다. 

주님께서는 사탄보다 더 힘센 분이기에, 사탄은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지니신 주님을 떠나서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 혼자 남으면 사탄은 자기보다 더 악한 영을 데리고 그 집을 차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언제나 주님과 함께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장애물이 길입니다(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불확실성을 피하지 마세요.

사건이 벌어질 때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확실성이 있어야 기회를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으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유례없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만약 편안하게 느끼는 것만을 고수한다면, 그리고 늘 해오던 일만 하려고 한다면 사실상 과거에만 사는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매일 쓰고 있는 새벽 묵상 글도 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이후에 무슨 일로 연결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니 글 쓰는 것이 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변화가 멈추면 구원도 멈춘다

-전삼요신부-


대학시절 한 후배가 선배에게 성격을 바꾸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선배는 가끔 만날 때마다 이런 저런 조언과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후배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선배는 과감한 전략을 시도했는데 1년 동안 후배와 매일 밥을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붙어 다닌 끝에 후배는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변화는 가능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말 한두 마디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힘은 끈질긴 관심과 사랑뿐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10년이면 사람도 변합니다. 변하고 싶다면 나를 변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누군가와 끈질기게 함께 머무는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참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임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가 임했다면 분명 내가 변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니 유다인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블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도 같은 편끼리는 싸우지 않는다고 하시며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힘은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빛이기 때문에 어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 나라가 마귀를 쫓아내는 힘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원한 마귀가 있습니다. 바로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는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망을 자아냅니다. 마귀는 이 자아를 통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내가 돈과 육체의 욕망과 교만한 마음과 싸우고 있어야만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메쥬고리예에 ‘체나콜로’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알코올과 마약중독자들이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머무는 곳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수호천사가 정해진다고 합니다. 수호천사는 그 곳에 먼저 들어온 선배 중에 정해집니다. 수호천사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 다시 술, 담배, 마약을 하지 않는지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며 감시를 합니다. 처음에는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수호천사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몇 달, 몇 년이 지난 다음에는 자신이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힘이 수호천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도 우리 안에서 이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 생각과 감정과 욕구까지도 감시하며 잘못되었으면 고치라고 충고합니다. 이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수호천사를 품느냐, 외면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정해집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 나라를 모시고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가 멈추면 구원도 멈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죄를 물리치는 힘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시고집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사람이 없으니집이 깨끗할 것 같은데 어쩌다 가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책상에도바닥에도 먼지가 내려앉았습니다화장실도 깨끗한 것 같은데 냄새가 납니다물을 수시로 내려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집은 사람이 없으면 깨끗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 쌓이기 때문입니다가끔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 주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고빈집의 냄새가 납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몸은 근육이 굳어버립니다장기도 운동이 부족하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그러기에 적당히 운동을 해 주어야 합니다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걷거나몸을 움직여야 합니다대중교통 수단이 발전하고주문하면 물건이 집 앞으로 오는 시대입니다그러기에 우리는 몸을 돌볼 기회가 적어집니다노동은 가족을 돌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노동은 나의 몸을 살리는 숭고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우리는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물질자본기술디지털 문화는 어느덧 우리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그러나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영적인 갈망이 커지고 있습니다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피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푸른 하늘가을 단풍흘러가는 시냇물지저귀는 새의 노래를 보지 못하고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근심의 먼지가시기의 먼지가욕망의 먼지가 수북이 쌓이기 마련입니다그러기에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나는 어디에 있는지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눈에 보이는 우리의 배는 12척이고적의 배는 수백 척입니다당연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습니다장군의 뛰어난 전략을 믿었고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려는 부하들의 용기를 믿었습니다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습니다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셨고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셨고제자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未得先愁失(미득선수실當歡已作飛(당환이작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얻기도 전에 먼저 잃을 것을 근심하고기쁜 일을 만나서도 슬픈 마음 일어나네.”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몸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이것은 뉴턴의 물리학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마치 빛이 상황에 따라서 파동과 입자로 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내가 걱정근심두려움초조와 불안으로 가득하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하지만 내가 사랑희망믿음온유함과 친절로 가득하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비록 건강하지 못해도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와 희망의 문으로 들어옵니다불행은 절망과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화려한 식탁이라고 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비싼 침대라고 해서 편안한 잠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소박한 밥상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한 가정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비싼 침대가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불평과 불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느 곳에 있어도 주님과 함께하기 어렵습니다감사하는 마음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바라는 이에게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


마귀를 물리치는 길

 -반영억신부-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고자질쟁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루카4,6. 2고린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16,23), 악인을 조종(에페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1,9-11)할뿐 아니라 유혹(2코린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4,5-7)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좆아 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지만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악한 영은 더 큰 악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의 대립을 놓고 심판관을 자처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번 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가슴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지 내 뜻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12장 28절에는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가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 하십시오”(에페6,1)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묵시12,11)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길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를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되돌아오는 악령

-송영진신부-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이라는 말씀은,
“악령이(마귀가) 사람에게서 쫓겨나면”이라는 뜻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해방과 구원에 직결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는 일은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도 쫓아내신 것 같습니다(루카 8,32).
그래서 쫓겨난 마귀는 인간 세상을 떠나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물 없는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나 사막을 뜻합니다.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라는 마귀의 말은, 마귀라는 것들은 쫓겨나더라도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계속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 아마도 “지옥으로 가라.” 라고
명령하셨을 텐데, 그런데 지옥은 마귀들의 감옥이고,
마귀들도 두려워하는 곳, 또 마귀들도 가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에는 복종했더라도,
지옥으로 가라는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고
광야나 사막으로 달아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는
말씀은, ‘그 집이’ 비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즉 마귀 들렸다가 치유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마귀의 공격에 대해서 무방비상태로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귀 들리는 일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당하는 일’이고, 그래서 그 일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덕분에 마귀를 쫓아내고 치유된 다음에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고 무방비상태로 지내는 것은
그 자신이 잘못하는 일입니다.
마귀에 대해서 무방비상태인 것은, 적극적으로 마귀를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자기 안으로 마귀가 들어오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귀가 되돌아온 것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도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마귀에게 또다시 사로잡힌 사람의 경우에는
왜 처음보다 끝이 더 나빠지는 것일까?
이 말씀은 아마도 그런 법칙이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고,
경험에서 나온 말씀일 것입니다.

무방비상태로 있으면 처음보다 끝이 더 나빠진다는 예수님 말씀은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엄청나게 많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기도 하고, 반역죄를 짓기도 하는 등,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를 탈출한 첫 세대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 사람들만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하느님께 충실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은 곧바로 우상숭배에 빠졌고(판관 2,11),
부모 세대보다 더 나쁜 세대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만심에 빠져서 무방비상태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깨끗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깨끗함’은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습니다.
세례성사는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일을 소홀히 하고, 믿음을 실천하지 않다가
세례 받기 전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지는 일이 실제로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세례 받기 전보다 더 신앙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보다
냉담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이 훨씬 더 어렵고 성과도 적습니다.)

나중에 냉담자가 되려고 세례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죽을 때까지 충실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진심으로 다짐하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중간에 중단합니다.
마음이 세속으로 완전히 기울어져서 신앙 자체를 버리는 경우를 보면,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때보다 더 심하게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있고,
그래서 그 경우는 처음보다 끝이 더 나빠진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누구든지 용서받지만,
‘용서 받은 깨끗한 상태’는, 고해성사 한 번 보았다고 해서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날마다 끊임없이 깨끗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고해성사 본 뒤에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더 큰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또는 성령께서 안 지켜 주셔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수호천사가 안 도와주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자격증

-이종훈신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설교를 반기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고마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왜 그랬을까아마 예수님이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어느 라삐의 제자도 아니었고그분의 집안은 그저 평범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주술도 없이 단 번에 마귀들을 쫓아내셨다아니 그들이 먼저 그분을 알아보고 도망쳤을 것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분은 하느님이셨으니 그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고통이고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라삐의 족보나 계보도 없고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으셨다그분은 그냥 그분하느님의 아들이셨다마귀들이 그분을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은 그분이 지닌 하느님의 사랑이었다참 사랑 안에는 유혹도 혼란도 없다그를 위해 이미 목숨을 내놓았으니 유혹받고 혼란스러울 마음도 없다그것이 바로 그분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구세주라는 자격증이다.

 

하느님의 길참된 길을 찾아가는 데에는 식별이 필요하다뜨거움이 곧 거룩함이 될 수는 없다냉철한 이성은 때로 열정에 찬물을 붓기도 한다그러나 자신을 다 비운 마음 안에는 식별도 과도한 열정도 없다그럼에도 한 가지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다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사셨고 또 돌아가셨다그리고 그 덕에 우리 모두는 살았다.

 

구속자이신 주 예수님주님은 하늘에서 오셨으니 땅의 법과 제도에 잘 맞지 않으셨습니다맞는 듯 안 맞는 듯해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지만자신이 가진 그 틀을 벗어던지면 모든 게 다 잘 맞았을 겁니다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유별나게 살지 않지만 그렇다고 땅의 틀에 꼭 맞게 살지도 않습니다당분간 벗어날 수 없는 이 틀에서 감히 하늘의 법을 품고 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어머니께 청하면 제 발걸음이 휘둘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아멘.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11,15-26: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그 가운데는 그분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리고는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난다그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냐 아니면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그분의 답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답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면”(20여기서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한다그러면 팔은 누구를 말하는가아드님이시다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손가락은 한 몸이다그러므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일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행위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분이시다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분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면인간 본성이 그분 안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인간 본성이 사탄의 힘을 꺾고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니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끌고 다니며 자기 우리에 가두었다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자 사탄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전리품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매여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자들을 구원하시어 진리 안에서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이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23사탄은 예수님 편이 아니고그분을 반대한다예수님께서 모으신 것을 흩어 버리려 하는 사탄이 예수님을 도와 자기를 무너트릴 수 있겠는가어리석은 자들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더러운 영이 우리 안에 살았다다른 신을 섬기고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았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 우리를 받아 주셨고우리 마음의 집은 모든 죄가 깨끗이 치워졌다그 안에는 성사들이라는 가구로 채워졌다이제 그 집은 어떤 집이 되어야 하느냐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하느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면 또다시 더러운 영이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처음보다 더 나빠진다.”(26어떻게 할까?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 26)

-한상우신부-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우리의 정화는 
시작됩니다.

주님이 없는
비움과 정화는
또 다른 자기만족과
또 다른 교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우게 하시는 분도
채우게 하시는 분도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점점 깊어지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으로
예수님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의지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의 주체는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정화또한
정화시키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믿음은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크기는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채움의
크기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믿음을 다시 세우는
정화의 날 되십시오.

-오상선부-


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힘을 운운하고, 독서는 파멸이 들이닥칠 주님의 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
말을 못해 고통받던 한 형제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모함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표징을 요구하며 그분을 시험하려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분통이 터질 일인데 예수님은 차분하고 당당히 그들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려 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상을 지으실 때 손가락으로 작품들을 만드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시편 8,4 참조). 말 못하는 이에게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도 악의 사슬에 묶여 있던 창조 때의 본성을 되찾아 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 덕분이지요.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루카 11,24).
어떤 사람에게 들렸던 더러운 영이 자의로 나가거나 또다른 마귀와 야합해서 움직이면 그는 쉬이 되돌아 올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루카 11,26)을 데리고 다시 그 사람에게 들어가면 일곱이라는 완전한 숫자가 말하듯, 그야말로 끝장에 이르도록 그를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지요.

하지만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손가락의 힘으로 밀려났다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더러운 영은 다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 오거나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지요.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예수님의 모든 구마와 치유는 이 명령을 깔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재창조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물 없는 곳"(루카 11,24).
그런데 더러운 영은 왜 하필 물 없는 곳을 찾을까요? 척박하고 황량한 사막,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물 없는 곳"은 더러운 영이 살기 딱 좋은 악의 서식지인가 봅니다. "물"은 모든 것을 삼키는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 죽음을 건너감으로써 얻는 생명, 창조, 풍요를 또한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물 위에는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감돌고 계십니다(창세 1,2 참조).

더러운 영은 물 없는 곳, 즉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시지 않는 영혼을 새 은신처로 삼고자 노리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하면 그는 제가 나온 먼젓번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건강을 되찾은 그 영혼이 생명과 빛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성령의 기운 아래 머물러 있지 않는한 다시 더러운 영의 먹이가 되어버릴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구마와 마귀들의 자의적 움직임은 확연히 다른 결과로 이어집니다.

제1독서는 요엘 예언자가 전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요엘 1,15).

요엘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메뚜기 떼의 급습으로 자연이 극심하게 파괴되고 황폐해집니다. "하느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질"(요엘 1,13) 지경이니 일반 백성의 굶주림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런데 예언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지독한 파멸이 들이닥칠 주님의 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몰아치는 예언의 목소리는, 그러나 위협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 주님께 부르짖어라"(요엘 1,14).
하느님의 명을 받은 자연의 공격은 물론 종말이라는 궁극적 심판을 앞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식으로 표현되는 회개,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통회(요엘 2,13 참조)입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다시 돌아와 주님의 영 아래 살고 싶으니 받아들여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지요. 온갖 위험과 파괴에서 구해주고 회복시켜 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 당신 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날, 종말의 심판은 죽음과 더불어 정화와 새 생명을 안고 올 새 창조입니다. 구약 말기의 예언자들이 전하였으나 아직 완결되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예수님께서 들어올려지심으로써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났으니 모든 이가 주님께로 이끌려올 것"(복음 환호송)이라는 사실이지요. 이는 모든 이의 구원을 가리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 현존과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상태이기에 그 안에 어둠의 영들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의 세력도 존재하지요. 예수님의 치유, 그리고 우리의 정화와 회개의 노력은 어둠의 세력이 다시는 우리 영혼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든든한 방어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맞이할 주님의 날, 심판, 종말은 우리에게 "처음보다 더 나빠질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들어올려지심으로써 그 값을 모두 지불하셨으니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3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