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Margaret K 2019. 10. 13. 18:53

2019 10 13일 연중 제28주일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루가 17,11-19)


Has none but this foreigner

returned to give thanks to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하여 나병이 치유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 열 사람 가운데, 외국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전에 나병은 하늘이 내린 징벌로 여겨졌고, 전염을 우려하여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병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소외와 고독,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징벌이라는 사회적·종교적 인식까지 더해서 나병 환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병이 그 자리에서 나았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치유해 주시려는 의도를 지닌 말씀이지만, 거기에는 나병 환자들의 믿음이 작용해야 하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였습니다.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 치유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은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열 사람이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치유는 아홉 명에게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에 머물고 말지만,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구원으로 연결됩니다.돌아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치유를 받고도 돌아와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환자들과 비슷합니다. 행복하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기에 행복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우리 생활을 감사로 시작하고 또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경탄하고 감사하는 신앙

-한민택신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삶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기적이나 치유가 아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 안으로 들어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믿음은 또한 내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임입니다. 나의 삶을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고, 내 안에 이루신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알아보고 경탄하는 것이며, 그 베푸시는 은총에 감사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먼저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합니다. 나의 삶에 들어오시어 이루어놓으신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행복합니다. 믿음의 눈은 일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며, 삶의 새로운 측면에 눈을 뜨도록 합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업적을 보고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경탄하는 군중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 역시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 그것은 거저 주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선물로 거저 주어졌음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이 감사할 수 있던 것은 그에게 일어난 치유가 오직 주님의 자비로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놀랄 수 있는,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때로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일 것입니다.

신앙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관건은 삶의 무게와 세상의 기쁨이라는 관문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감히 그분께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 높여 청했던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알고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 가까이 가기에 부당한 존재라고 여기며 군중 틈에 끼어 그저 먼발치에 머물며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지 않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눈여겨보시며 손짓하십니다.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나병 환자들과 함께 용기를 내어 외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감사하는 삶이 사랑이다

-김창선선교사-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해 모든 민족의 눈앞에 구원의 표징을 드러내십니다. 굳센 믿음이 생명을 구하고, 은총에 감사하는 삶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랑의 삶(1테살 5,16-18)을 살아갈 수 있게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성서학자와 의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세기 전에는 팔레스타인에 현대적인 한센병은 없었다고 합니다. 구약에 기록된 나병(leprosy)이란 용어는 히브리어(ara’at)를 그리스어(lepra)로 번역하는 과정에 등장합니다. 원래 의미는 발진이나 습진 같은 악성 피부병과 집에 생기는 얼룩을 두고 한 말입니다.(가톨릭 사전, concordance)

구약에 나병으로 기록된 사례는 모세의 손에 드러낸 사명의 표징, 시리아인 나아만, 우찌야 왕의 경우를 포함해 극소수(탈출 4,6; 2열왕 5,1; 2역대 26,21; 2열왕 5,27. 7,3)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조상들은 정결법(레위 13-14장)을 통해 악성 피부병 환자와 경계를 두어 신앙공동체를 거룩하고 안전하게 보호했습니다. 피부병 환자의 증세와 경과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사제의 몫입니다. 부정한 환자는 공동체에서 격리됩니다. 그가 깨끗하게 되어 정결례를 치를 때 성전에 속죄 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의무입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시대(기원전 9세기)에 강국이었던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말한 대로 요르단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어린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수행원을 거느린 그가 엘리사 앞에 겸손한 종이 되어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유일신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감사의 선물을 바칩니다.(2열왕 5,15)

엘리사가 선물을 단호히 거절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주님만을 섬기고자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 성지의 흙을 청하는 그의 신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았는데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하신 주님 말씀(루카 4,27)이 연상됩니다.

이콘 ‘10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하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2티모 2,8)라는 그의 좌우명을 선포합니다. 회개한 이후 그는 주님만을 기억하며 살았고, 복음을 위해 감옥살이하는 고통을 겪다가 순교한 사도입니다. 그는 초기 교회공동체가 시편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신 놀라운 사건, 곧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주제로 한 찬미가의 일부(2티모 2,11-13)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희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합니다.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감사할 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경계를 지나실 때 일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찾아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스승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마태 8,2; 마르 1,42; 루카 5,12)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깨끗해집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만이 치유하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은총의 중개자였습니다. 시리아인 나아만과 사마리아인의 나병 치유는 구원의 은총에 모든 민족이 초대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지중해 문화에서 ‘자비’는 대인관계에서 각자의 소임을 다하도록 동기부여를 시켜주는 은총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경계로 소외된 그들을 치유하시어 믿음을 심화시키고 공동체에 생활권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치유 받은 열 명 중 외국인 사마리아인만이 찬양하며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다른 아홉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희생제물을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본받고 있습니까? 엘리사는 감사의 선물도 거절했습니다. 나아만은 주님 외에 어떤 신에게도 제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사람을 위한 선물과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증인이 된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을 원하십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는 충만한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립니다. 인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자연이 선물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웃의 손길에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자녀의 특권을 누립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충만한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성자께서는 ‘생명의 빵’과 ‘계약의 잔’으로 성부께 ‘감사 제사’(CCC 1360)를 드립니다. 교회공동체의 삶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미사를 통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친교를 이루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이 사랑입니다.


구원받을 마음자세, 찬양과 감사!

박일 신부-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 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 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던 나병환자 열 사람은 ‘멀 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서는 율법에 따라 나병환자들에게 몸이 정결하게 되었음 을 사제들에게 가서 보여주도록 지시하십니다(레위 14,1-32 참조). 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사이가 좋지 않은 유대인들 과 사마리아 사람이 함께 다닐 정도로 연민의 마음이 일으 켜졌나 봅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덩달아 뛰어갑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즉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 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7,14-16 참조). 절망의 구텅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 라도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느 님께 대한 감사를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사람 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순박하고 고상한 인 품의 사람이 이제 믿음을 얻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말으 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은 좋은 땅을 만나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좋 은 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지고하신 하느님의 현현(顯 現)이시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에 드러납니 다. 이 모든 사실이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이 드린 감사와 경 배를 통해서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서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의 여정이 예감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아들이 아닌 외국인으로 서, 하느님께 어떠한 권리도 감히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하느님 은혜의 선물로 여기고,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감 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인 자기네들에게 하느님의 선물은 받아 마땅한 것으로 당연히 여기고 있었 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자격이나 권리가 있다고 그 렇게 믿고 있었나 봅니다. 구원을 받을 마음자세가 부족했 습니다. 그렇지만 이 외국인에게는 구원에 마음을 열어 받 아들이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즉, 감사, 찬미, 하느님 앞에 서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고, 부족하고, 가련한 존재인지 에 대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외국인에게도, 죄인에게도. 그렇지만 구원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 말, 그리고 예수님을 통 해서 완성될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 아들이는 것입니다! 


‘식언(食言)’에 익숙해진 이의 약속

-원용훈신부-

‘한번 꺼낸 말을 다시 입 속에 넣다’는 뜻의 식언(食言)은, 곧 ‘약 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옛말이라 합니다. 시작부터 그랬던 듯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그 바람 너머의 약속은 건들산(신학교 뒷산) 바람에 실어 보냈습니다. ‘제대만 하게 해 주신다면…’ 군대에서의 그 간절함 너머의 약속은 군대에 남겨두고 왔나 봅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토록 바랐던 기도 들, ‘사제가 되게만 해 주신다면…’ 나만이 알고 있는 그 기도는 어느 덧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교우들 앞에서 내뱉 었던 지키지 못한 수많은 약속들… 참 많이 잊고 삽니다. 기억을 못 하는 척, 바쁘다고 잊고, 게을러서 잊고 지냅니다. 그렇게 ‘식언’에 익숙해진 이가 또 무언가를 바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자비를 바라는 간절한 이들의 청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시어 그들의 나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 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기다리신 분의 마음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돌아오기를 바랐던, 언제나 성실하신 당신을 사람들은 쉽게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외로움 안에서 비로소 ‘염치없는 나’를 만납니다. 그분의 성실한 기다림 속에서 비 로소 ‘거짓의 내가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믿음으로 나 자신을 구원하길’ 기다려주신 까닭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먼저, 나를 믿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또 다른 바람과 청함이 아니라, 이미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총에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용기 내어 여전히 기다리시는 주님 께로 돌아갑니다. 식언(食言)에 익숙해진 이가 또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박태범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자신의 나병이 낫자 가던 길을 멈추고 예언 자 엘리사에게 되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나아만 은 이방인이지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러나 그중 유대인 아홉은 그냥 가고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되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마리 아 사람은 평소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람이지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사제관 곳곳에 걸어두고 제가 마음에 새기고 사는 중국어 성경구절이 있습니 다. 세 개의 사자성어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 쉽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살로니 카 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입니다. “응상환락(應常歡樂 언제나 기뻐하십 시오), 부단기도(不斷祈禱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사사감사(事事感謝 모든 일 에 감사하십시오)”입니다. 이 세 구절은 제가 유배살이 하는 중에 많은 힘이 되 는 보약입니다. 저는 매일 저녁 세 개씩만 감사할 거리를 찾아 적어 봅니다. 그러 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세 개의 구절 중 “사사감사”, 이것 하나만이라도 외 우도록 합시다. 암송하기 쉽습니다. 열 번만 읽으면 머리와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 다. 다 함께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사사감사, 사사감사, 사사감사 …

  감사가 감동이 되어 가슴 찡해지면 감기(感氣)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복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지수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사감사하면 사사축복(事事祝福)입니다. 많이 감사하면 많이 감사할수록 더 크게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는 더 큰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행위의 박동(搏動)은 삶의 약동(躍動, l’élan vital)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사사불평이면 사사앙화(事事殃禍)입니다. 요컨대 감사는 대박으로, 불평은 쪽박으로 접속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치유를 받고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뿐입니다. 감 사한 마음을 언행으로 표현하기가 그렇게도 힘든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 냐?”하고 물으십니다. 오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아홉에 속합니까? 아니면 하나에 속합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 바이러스의 파도는 사사감사의 파동(波動)을 타고 옵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 동안 사사감사(事事感謝)하면서 지내는 행복한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다

-정흥식신부-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나중에 돌아와 큰소리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이란 나라 밖의 사람이요,

이단자였으며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아홉 사람은 하느님의 선택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7장 18절) 하시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17장 19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낯선 사람들과 나라 밖의 사람들이 신앙의 순례를 받고 하느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릴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분명 하느님의 백성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생활로 드러낸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핑계로 ‘크리스천적 정열’을 내세우며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던 사람들,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열성을 불러일으킨다고 소리치며 십자군에 뛰어나간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어떤 지위가 주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사회적 신분이 낮다고 해서 사람들을 미워하는 ‘직업적인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주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나병 환자 아홉 사람과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할 때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잘 난 체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마치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권리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 시대에 배척을 당한 바를 그 사람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려고

온갖 방면으로 노력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신앙이 전파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과 사랑으로 대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응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최초의 응답은 글자 그대로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체성사를 통해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에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이끌어주시길 단단히 결심하도록 합시다.

 

오늘 성체성사에서 힘을 길러 나아가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줍시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교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그래서 오늘 복음도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왔다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들 앞에서 인간은 늘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병은 인류역사 안에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려준 벌이라고 일컬어진 질병이었습니다.  한국의 한하운(韓何雲시인(詩人)의 시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는 1920년에 태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나서 남긴 시()가 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나를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천형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말하는 그 병의 비극성(悲劇性)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초능력을 가진 분이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특히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셨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였고,  돌아온 한 사람만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다고만 생각하지 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이솝의 우화(寓話)들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성가를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신앙인이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풂을 받은 열 사람이지만,  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그분을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입니다오늘 복음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알아듣고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드리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우리의 삶우리의 가족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것들입니다생각해 보면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우리의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하여 우리와 가까운 분들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갓들입니다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통스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돈이 없어서계획했던 일이 실패해서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失意)에 차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기 쉽습니다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우리를 미워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보기도 합니다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은혜로운 일들을 외면하고멀리 있는 냉혹함만 보고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더 많이 갖고더 건강하고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대책도 세우고 계획도 합니다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은 자기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바삐 가야 하였습니다각자 원하던 바를 차지하고그것을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이제 나병이라는 불행을 벗어났으니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그는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 안에는 초기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던 신앙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그들은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예수님을 만나 그 절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하느님은 병과 소외와 절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그러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하느님을 찬양하며예수님에게 와 엎드려서 그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오늘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인간은 인간을 소외(疎外)시킵니다그러나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예수님은 섬기고내어주고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구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참으로 많이 발전했습니다. 어렸을 때 집의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을 때, 새로운 세상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상입니다. 어렸을 때 모 만화잡지에서 보았던 미래의 세계에 대한 예측들이 실제로 거의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안전한 시대를 살면서 번영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훨씬 더 높은 행복도를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큰 절망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유하고 안전한 곳에 살수록 자살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더 좋은 조건, 더 나은 조건 속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희망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위해 통제력, 가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통제력은 희망을 방해하는 것을 과감하게 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희망을 향해 노력할 이유를 찾게 해줍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같은 행동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이 있을 때 희망을 더욱더 쉽게 찾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통제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같은 신앙으로 하나를 이루는 주님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늘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분명히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통제력 없이 살 때 희망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에만 급급하다면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없이 혼자서 과연 희망에 찬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10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 명만이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요. 나머지 아홉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을 취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려울 때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비를 청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지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이 받은 은총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 때만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오프라 윈프리). 



감사할 이유 찾기

카네기 철강사(현 US스틸)를 세워서 강철왕이라고도 불리던 카네기가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강연하고 있는데,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거친 욕설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그 욕설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강연이 모두 끝난 뒤에, 한 기자가 너무나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험한 말을 듣고도 끝까지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오히려 웃을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니란 사실이 매우 고마웠다네.”

어떻게든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화낼 일도 짜증 낼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감사할 이유보다는 화내고 짜증 내는 이유부터 찾는 것이 아닐까요?

감사할 일을 찾아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리다

-전삼용신부-


코리는 폴란드의 한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였고,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느날 코리는 테살로니카전서 5,18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코리는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서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가 눈을 감고 나즈막하게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는 “아멘!”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 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코리와 벳시는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믿어야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작 선악과 몇 개 따먹은 것인데도 야단맞을까봐 몸을 숨겨야했습니다. 나에게서 몸을 숨기는 사람과 어떻게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자비를 믿지 않으면 타인은 지옥이 됩니다. 당신을 지옥처럼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를 계속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게 만든 대상은 바로 내 안의 ‘자아’입니다. 그것이 뱀으로 상징됩니다. 뱀은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는 결핍에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자신이 사람을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아의 불만 때문에 자아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불만과는 반대로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10명이 주님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다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외국인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을 다 고쳐주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를 이미 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만 하면 됩니다. 감사가 곧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러 나오는 사람들과 청하러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청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입니다. 감사하면 이미 받았다고 믿는 것이기에 사실 하느님께서 청하지 않는 것까지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실 때 아버지께 이렇게 청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예수님은 청할 때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미 청한 것을 받았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청한 것을 받으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청은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며 무언가 청한다면 “무자비한 분이시지만 내 청 좀 들어주세요. 만약 들어주시면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라고 인정해줄게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빵과 포도주를 당신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위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감사가 믿음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감사가 없는 청원은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감사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자비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귤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하니 어머니가 당황하며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엄마가 그런 거 받으면 주신 분께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 어?”

그러자 아이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귤을 아저씨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까주세요!”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받은 것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주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또 달라고 하는 것이니 강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합시다. 그러면 나의 부족한 부분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조재형신부-


날씨가 쌀쌀해져서 바지를 갈아입었습니다. 전에 입던 바지를 빨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지갑, 손수건, 안경 닦는 수건을 꺼냈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문득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생각났습니다. 노트북의 자료를 사무실 컴퓨터로 옮기면서 사용했던 메모리 카드입니다. 혹시 하고 빨래 바구니에 넣었던 바지를 살피니 거기에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묵주반지도 있었습니다.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세탁기에 넣기 전에 찾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일 멀리 있는 아들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제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성격이 깔끔하시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저의 입맛에 맞도록 세심하게 준비해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교우분들이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도와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30분만 걸어가면 아담한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습니다. 거위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물고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보고, 담소를 나누는 노인도 봅니다.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유명한 장군이었지만 나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아만을 기억하는 건 그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드렸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모두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을 기억하는 건 치유된 10명 때문이 아닙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병이 치유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영혼이 치유되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 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감사함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가운데 삶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오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남에게 돌리고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운함이 앞섭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또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평불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무시하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즉각 고쳐 주시지 않고“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완전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미숙한 신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면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었고 병이 나음 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고친 분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평상시 은총을 많이 받은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만이 성숙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나병을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이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간구하였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치유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갈 수 있었다는 것이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은총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육적인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병이 나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서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아서 감사드리는 것보다 내가 이제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받는 것이 더 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지요? ‘화장실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아홉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은 결코 마땅히 받아야 할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 말고 받은 은혜를 통해서 감사를 드리고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고 노래하였듯이 매일 매순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모쪼록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얼굴을 바꾸지 말고 감사함을 일깨우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남에게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겨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은 잊고 베푼 것에 대한 위안과 보상을 기대하고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 그리고 부모 형제 친척, 자녀를 통하여, 또한 이웃에게 받은 많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육체적 병이 나은 사람도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니 병이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함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구원받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감사하는 신앙생활

-조욱현신부-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다 같이 나병의 치유에 대한 기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주인공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치유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다. 하나는 시리아인이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다. 이 주인공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하고 있으며, 이는 생기가 넘치는 믿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독서: 2열왕 5,14-17: 나아만의 치유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2열왕 5,1)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는데 히브리인 하녀로부터 이스라엘에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자, 화를 내면서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고 몸이 깨끗이 나았다(14). 이 기적은 요르단 강물이 특별히 치유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의 영역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과 신비를 드러내시도록 하는 것이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야훼께 믿음이 이미 충만해져있다. 즉 자기 나라에 가서도 성역에서 야훼를 숭배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을 얼마쯤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선물도 감사를 드리는 신앙의 표시일 뿐이다(15). 그러나 예언자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믿음(신앙)을 통한 그분의 능력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또한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제멋대로 다루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신앙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자신을 맡기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우리의 지성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복음: 루카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이러한 내용을 오늘의 복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이곳에서도 다른 아홉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한 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신다. 그리고 이 기적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를 지나가실 때(11) 일어난다. 이것은 이 기적이 예수께서 수난과 영광의 자리로 가시는 데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기적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몰이해를 예고해주는 구원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병치유사화(루가 5,12-18)와 비교해볼 때, 차이점은 그들을 깨끗하게 고쳐주기 전에 사제들에게 보여라’(14)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으로 보아(14)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했다고 하는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찌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무엇이든지 당연한 것처럼 권리만을 내세우려 하는 오늘의 이 시대가 소중히 해야 할 인간적 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한 감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행위는 예의바르고 양식 있는 행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진실 된 믿음의 행위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온 것이다(15.18).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8) 하신 것은 다른 아홉 사람이 당신을 통해 자비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다. 아홉 사람은 그들이 유다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불충분하고 왜곡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분의 자비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특권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나병에서 치유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9). 이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의 행위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보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명칭 자체가 뜻하는 감사의 행위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최고도로 표현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감사의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실현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다. 실제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 뿐 아니라, 믿음의 표현인 감사의 행위도 그분의 사랑의 무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계획을 넘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관습으로 율법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하늘나라와는 먼 것이다.

 

선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태도와 겸손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에 근거하고 있는 이러한 확고하고도 무상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2티모 2,8.11.13). 우리의 믿음이 감사의 행위로 항상 표현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한상우신부-

이 시월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집니다.

하느님께
돌아갈
우리모두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자체가
자비이십니다.

자비의 빛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끝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치유는
모든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자비를 올바로
체험한 이는
자연스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깨어나는
삶으로 이끕니다.

영광의 삶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이렇듯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 돌아가
영광을 드리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감사와 찬미
기쁨과 영광이
중심이 되는 은총과
자비의 주일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구원의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던 예수님 앞에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마주오며 소리 높여 간청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라는 젊은 예언자가 자신들과 같은 나병은 물론 갖가지 질병을 치유해준다는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만이 자기들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나병이라 불리던 한센병은 현대의학에서는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모두가 무지했던 시대에는 마치 천형처럼 여겨졌지요. 환자들은 육신의 고통보다 하느님께 벌 받은 자라는 낙인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로 더 큰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마주친 장소가 사마리아도 아니고 갈릴래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이고,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기 전의 한 지점이라는 장소적 배경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어떤 마을 공동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들의 슬픈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치라서 그렇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전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모두가 피하던 그에게손을 내밀어 직접 대시며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는데(루카 5,13 참조) 오늘은 직접 치유하는 절차를 생략하시고 사제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 상태가 호전되면 사제에게 보여 치유를 확인받는 율법 규정(레위 14,2-3)을 준수하라고 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 마음에는 그들에 대한 연민이 번져 치유를 결심하신 것이니, 그 치유가 일어난다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환자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사제에게로 발길을 돌립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마르 11,24)는 가르침이 그들 안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어느새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믿고 가는 동안 치유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 놀랍고 은혜로운 체험은 환자 무리를 두 방향으로 가릅니다. 아마도 아홉 명은 서둘러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가족이 있는 마을로 바삐 뛰어갔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들에게는 온전해진 육신으로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과 소속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무엇보다 컸던 게지요.

"한 사람은 ...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되돌아 옵니다. 제도적 확인과 소속의 회복보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자동반사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유다인 입장에서 부정하다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누구보다도 철저히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시고 있는 셈이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열 명의 환자들 모두 말씀에 순종하여 육신의 질병을 치유받았습니다. 그 중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명은 그에 더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감사는 육신의 치유를 완성하고 확증하는 마침표인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여는 문입니다.

제1독서 대목는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 나아만의 나병 치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언자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와 손을 얹는 직접적 치료 행위 대신,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런 무성의해 보이는 대우가 못마땅했지만 부하들의 권유로 이에 따르지요. 그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실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말씀은 듣는 이의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만일 엘리사가 직접적인 치료 행위를 했다면 이방인 입장에서 엘리사의 능력으로 치유되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엘리사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선으로 자기 역할을 한정했기에 이처럼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집니다.

제2독서에서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복음의 능력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2티모 2,10).
하느님의 말씀은 자유롭고 한계를 모르며 경계를 넘나듭니다. 말씀은 사람이 처한 마치 천형과도 같은 어떤 극한의 상황도, 비참한 처지도, 막막한 현실도 녹여내고 건너가게 하는 힘입니다. 단,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2티모 2,13).
그분의 성실함!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이유입니다. 그분은 당신 입에서 나간 말씀, 아니 그 말씀이 미처 소리를 입기 전에 품은 마음의 연민과 결심까지도 끝까지 성실히 완성하시는 분이시지요.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그러니 그런 주님의 성실함을 믿음으로써 치유를 얻고, 감사로써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치유와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얼마간 어느 정도 치유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족 같지만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지요(요한 4,9 참조).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유다인, 사마리아인, 또 다른 이방인 할 것 없이 한 무리를 이루어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공동체에서 저마다 소외되고 밀려난 이들이 사마리아 고을도 갈릴래아 고을도 아닌 그 "사이"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지내며 함께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누가 진짜 "병든 이"일까 하는 질문이 올라옵니다. 차별과 분열, 무시와 소외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이들이 "병든 이"일지, 아니면 병들고 허물어진 육신을 끌어안고 서로 기대고 보듬으며 함께 살 길을 찾는 이들일지... 오늘은 예수님께 다가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얼굴이 새롭게 보입니다.


치유만 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7416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