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0. 14. 19:00

2019년 10월 15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그녀는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며 살았다. 데레사 수녀는 수도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으나 주님께 매달리며 곤경을 이겨 나갔다.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그녀는 15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데레사 수녀를 시성하였고,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루가 11,37-41)

 

 “Oh you Pharisees!
Although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 and the dish,
inside you are filled with plunder and evil.
You fools!
Did not the maker of the outside also make the inside?

 

Denunciation of the Pharisees and Scholars of the Law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감사드리지 않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셔서 정결례에 대하여 논쟁하시는 내용입니다. 논쟁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 때문이 아니라 정결례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짐승뿐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불결한 것은 사람이 접촉하는 것도, 음식으로 먹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했던 것은, 혹시라도 식사 전에 불결한 것과 접촉하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십니다. 손뿐 아니라 잔과 접시를 아무리 닦아도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은 생활 전체를 거룩하게 지킨다는 명목으로 정결례를 중요시하고 규정들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규정의 외적 준수에만 치우쳐 율법의 본디 의미와 하느님의 뜻을 망각하는 것과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정결례는 자선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규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규정을 만들고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과 배려가 하느님 보시기에 더 중요한 것이며, 또 그런 노력을 통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정결한 인간, 의로운 인간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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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학창시절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함께 식사했습니다. 웃고 즐기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친구가 일어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스페인에는 이런 말이 있어. 죽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아이 한 명을 낳고, 책 한 권을 쓰고,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이래. 이것을 해낸 인생은 잘 산 거래. 이번에 우리 친구 신부가 책을 냈어. 우리 중 아무도 하지 못한 것을 한 친구에게 축하해주자.”

이 말을 듣고 저는 곧바로 말했지요.

“나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 그러면 죽어도 잘 살 수 없는 건가?”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스페인에서 하는 말은 꼭 이 세 가지를 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는 신앙인에게는 창조의 하느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따라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적인 일은 하느님을 따라 사랑이 가득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보다는 세속적인 모습을 쫓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연연하면서 뒤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잘 살고 싶다고 우리는 늘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과거 속에 갇혀 있는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할 사랑에 집중하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에 깜짝 놀라지요. 의인이요 예언자라는 평판을 듣는 분께서 전통적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모세의 명령으로 몸의 불결함을 닦으라는 말만 있었지요. 그들은 모세의 명령이 마치 하느님의 명령인 것인 양 생각하면서 확대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더러움을 단순히 겉만 씻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일러 주셨습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며,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자선입니다. 이 자선이 바로 하느님을 따라서 행하는 창조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을 가장 잘 사는 길입니다. 이 자선을 통해 우리는 더욱더 깨끗해질 것이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사소한 일에 감동하고, 별것 아닌 일이 고맙다. 그 일이 사실은 별것이라는 걸 알아가기 때문이다(김신회).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전 세계 36억 명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 평균 4시간 이상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는 중독을 넘어서 그냥 생활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포노 사피엔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상식의 교체가 필요합니다. 유해성만 따질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떠올려야 합니다. 즉, ‘무조건 안 돼’가 아니라 ‘또 다른 방향은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일부러 안 할 필요는 없지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삶의 길이는 무척 길어졌습니다. 예전에는 은퇴 후 얼마 못 가서 주님 곁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시대에 맞게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따라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고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절대 끝이란 없습니다.                   

욕심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

-전삼용신부-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국, 항공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나 되는 사업체를 소유한 대부호이자 경제계의 실력자였습니다. 한때는 에바 가드너 등 할리우드의 배우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십수 년 전부터 결벽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일체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균 상태의 유리관 속에 들어가 십년이나 생활할 정도였습니다.

      1977년, 그는 2조 4천억 원의 거액의 유산을 남기고 사망했습니다.

      휴즈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Nothing. Nothing.”

      이 말은 솔로몬 왕이 남긴 말과 같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왜 사람은 겉을 그토록 깨끗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아마도 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청결에 주의를 기울이는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식당 앞에는 항상 손을 씻는 세면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관습적으로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꼭 씻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답지 않게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십니다. 이에 그분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을 청결하지 않은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사람은 왜 깨끗해야 할까요? 행려자가 버스에 타면 사람들은 코를 막고 그 사람 주위에서 피합니다. 더러움은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더 불편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함은 대인관계를 위한 기본예의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적당히 닦으면 됩니다. 그것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배려하는 입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나친 결벽 강박증을 지닌 사람은 어떨까요? 샤워를 하면 1시간씩 합니다. 더러운 접시로는 음식을 먹으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누로만 닦아야합니다. 손을 10분 이상 닦습니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타인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청결함입니다.

      의사들에 의하면 청결 강박증은 ‘불안장애의 하나’라고 합니다.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먼저 해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류 역사상 유명한 건축물들은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졌습니다. 만리장성은 황제의 정치적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흩어짐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쌓기 시작한 탑입니다. 내 주변에 누군가가 모여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모아 놔야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 때문입니다.

      영화 ‘숨바꼭질’에서는 청결강박증 질환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가 지나치게 몸을 깨끗이 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 양자로 들어간 집의 재산을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 형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 감옥에 가게 만든 일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죄를 짓게 만들었고 그 사실이 밝혀질까 불안해하며 살아야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그 속마음을 들킬까봐 지나치게 손을 열심히 닦았던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눌 줄 모르는 마음이 지나치게 자신을 더럽게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닦는 것입니다. 깨끗해지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만족하고 행복해야합니다. 욕심이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하나는 류시화 님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입니다. 저자는 인류의 지혜가 담긴 책을 번역하여 나누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영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보다는 영적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 명예, 성공과는 다른 삶이 있으며 그것이 인류의 지혜와 문화의 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행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으면 앞을 보고 달리기보다는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도록 해 줍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나와 인류는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 묻게 합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푸른 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푸른 별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함께 하는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최재봉 님의 ‘Phono Sapience’입니다. 제목도 생소한 책입니다. 저자는 스마트 폰이 가져온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산업을 이야기합니다. ‘플랫폼, 빅데이터, 팬덤이라는 말을 합니다. 기업이 물건을 만들고, 광고를 통해서 물건을 판매하는 시대에서 소비자가 검색을 통해서 물건을 선택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마차가 자동차에 자리를 양보했듯이, 기존의 질서와 기존의 산업은 새로운 디지털 문화와 새로운 4차 산업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3D 프린터, 드론, 플랫폼, 빅데이터는 거스를 수 없는 새로운 문명의 흐름이라고 합니다. 스마트 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스마트 폰으로 은행 업무를 보고, 스마트 폰으로 구매하고, 스마트 폰으로 예매하고, 스마트 폰으로 소통하고, 스마트 폰으로 길을 찾는 세대라고 합니다. 저자는 새로운 시대는 위기이면서 기회라고 말합니다. 물러설 수 없다면 새로운 시대에 합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당시 가장 앞선 문명을 선도했던 로마의 공동체에 새로운 가치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정치, 철학, 사상,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 공동체에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구원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로마의 힘과 권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바오로 사도가 전했던 복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로마는 당시 세계의 기준이었습니다. 로마가 법이었고, 로마가 길이었고, 로마가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로마라는 법을 채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로마가 만든 길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교회의 조직과 교회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문명이 법과 길을 만들어 갈 겁니다. 그것을 거스르기도 힘들고, 외면하기도 힘들 겁니다. 법이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채우는 건 정신과 영성이어야 합니다. 플랫폼과 빅데이터가 새로운 시대의 길이라면 그 길의 종착점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산업, 경제, 재물이라는 잔은 믿음, 희망, 사랑을 채울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날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 저를 뿌루퉁한 표정의 우울한 성녀(聖女)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양승국신부-

 

아빌라의 데레사, 혹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515~1582)께서 오늘 우리 후배 수도자들과 신앙인들, 그리고 교회에 남긴 가장 큰 업적과 유산을 꼽으라 한다면, 그녀의 ‘개혁과 쇄신을 향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레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교회와 자신이 몸담고 있던 가르멜 수녀회를 사랑했습니다. 교회와 수도공동체에 대한 불타는 사랑은 자연스레 식별과 쇄신 작업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데레사는 그녀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가르멜 수녀회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깊은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동시에 냉철하고 균형잡힌 비판과 식별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녀는 자주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내가 몸담과 있는 이 가르멜 공동체를 바라보시고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상과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은 오늘 우리 가르멜 수녀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가르멜 수도생활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작업이었습니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즉각적인 회심,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전환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즉시 곪아터진 환부에 가차없이 메스를 찔렀습니다.

 

 결과는? 반대파 세력들의 저항이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타성과 게으름, 세속화에 푹 빠져버린 수도자들에게 있어 한번 맛들인 세상의 맛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쉬운 개혁과 쇄신 작업,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하느님께서는 큰 협조자로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이라는 걸출한 가르멜 사제를 보내주셨습니다.

 

 더 가난한 수도자, 더 겸손한 수도자,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데레사의 노력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란 결실을 맺었습니다.

 

 성인성녀들께서 당신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가르침의 결론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삶과 조건이 곧 성화(聖化)에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이 시대 살아있는 성인성녀가 되고자 한다면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삶과 조건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 복음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 성찰의 결론을 오늘 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충실하게 적용하는 것!’

 

 데레사의 생애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결코 순탄지 않았던 개혁 작업이었습니다. 개혁과 쇄신의 길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도전의 연속의 길이었으며, 고통과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혹독하고 비열한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침묵, 철저한 고독 속에 더없는 기쁨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데레사는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충만하고 행복하게 엮어갔습니다. 데레사는 메마르고 삭막한 삶 속에도 기쁨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데레사는 계속되는 박해와 탄압 앞에서도 봄꽃처럼 화사하고 빛나는 얼굴 표정을 잃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자주 이런 지향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 저를 뿌루퉁한 표정의 우울한 성녀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개혁과 쇄신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치다보니 생애 자체가 고통이요 십자가의 길이었던 데레사는 오늘 고통받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을 건네십니다.

 

 “고통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왕도(王道)이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앞서 가며 준비하신 길입니다.”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반영억신부-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행함으로써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여기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일’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복잡했던 정결 예식을 뜻합니다(마르 7,3-4).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정결 예식을 위한 물을 드렸을 텐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깨끗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정결 예식을 무시하셨을 것입니다.
“겉과 속을(몸과 마음을) 모두 깨끗하게 씻어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몸만 깨끗이 씻는다고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 겉만 깨끗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은 ‘위선’입니다.
반대로, 속은 깨끗한데 겉은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런 경우는 실제로는 없을 것 같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그것은 ‘예의’가 없는 것이고, ‘정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예의’와 ‘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사실상 속이(마음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신앙인은 정성을 다해서 겉과 속을 모두 똑같이
깨끗이 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겉과 속이 모두 중요합니다.
속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겉도 중요합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씀과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겉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일은 ‘범죄’이고,
진짜로 거룩한 사람은 결코 하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돈’은 교회 타락의 시작이었고, 중심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돈 문제’가 투명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다면,
그의 ‘거룩하게 보이는 모습’은 ‘위선’이고 가짜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속에 담긴 것’이라는 말은,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을 가리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에서
‘자선’은 ‘사랑 실천’을 뜻하는 말인데,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놓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 때문에 속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으니,
속을 깨끗하게 하려면 속에 들어 있는 쓰레기들을 모두 내놓아야 합니다.
(그냥 버리는 것은 의미가 없고, 사랑 실천에 사용해야 합니다.)
겉을 아무리 깨끗하게 닦아도 속이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 그릇은 쓰레기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고해성사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로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그 재물을 여전히 소유하면서, 즉 계속해서 부유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회개한다고 고해성사를 보면, 그것을 회개로 인정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또 고해성사를 보려면,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모두 내놓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물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회개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고해성사를 보면 성사모독죄를 짓게 될 뿐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보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리고 재물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그것도 죄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정당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벌었고, 남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내 돈으로 내가 좀 편안하게 사는 것이 무슨 죄냐?”
라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5,46).

자선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랑 실천은 신앙생활의 완성이라는 뜻이기도 하고(로마 13,10),
깨끗해지고 싶다면, 즉 구원받고 싶다면 사랑 실천을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고,
그런 생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 실천을 하면서도 계속 부유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 경우에 ‘착한 부자’ 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이 질문의 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4-25).”
이 말씀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부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것만 신경 쓴다면,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법칙은 아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그 일부터 한다면, 부유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못하거나 뒤로 미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부유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와 개혁

-이종훈신부-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음이며,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과 친해짐이다. 친해지려면 마음을 열어야 하고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면 줄수록 둘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진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내어주셨으니 그분은 더 이상 드러내 보여주실 속내는 없을 것 같다. 공은 나에게로 넘어와 있다.

 

친밀감은 함께 지낸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아름다운 기도문을 많이 읽었다고 예수님과 친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아름다운 글을 읽은 것에 불과하다. 나의 속내를 주님께 말씀드림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 시간은 오직 주님과 나뿐이어서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는데 말이다.

 

나도 싫은 나를 심판자인 그분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고 선포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게 그렇게 믿기 어려운가보다. 그런데 그보다는 나를 바꾸기 싫어하는 마음이 교묘하게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세상은 겉모양만 보지만 하느님은 속내까지 보신다. 하느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고 그분과 친한 게 아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빌라 데레사 성인은 기도의 큰 스승이지만 그분은 수도회 개혁이라는 거칠고 큰일을 하셨다. 기도와 개혁은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좋은 조합은 없고 거의 하나이다. 예수님과 친하고 사랑하면 그분처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 내주면 완전해질 것이다, 예수님처럼.

 

예수님, 기도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 마음을 열어 보임이 어렵습니다. 제가 들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믿지 못하고 주님처럼 살면 정말 행복할까 하고 의심하기 때문일 겁니다. 저를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고 마음을 열게 도와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당신을 봉헌하셨던 그 신뢰심을 저에게도 나눠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예수님과 바리사이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시면서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을 닦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 깨끗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겉이 깨끗하려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순결해야 하는데, 이 내용물은 바로 자선과 자비와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거기 모인 이들이 좀 더 고결한 사람들로 만드시려고 그 순간을 이용하신다. 바리사이가 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고 한다.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즉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고 하셨다.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고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고도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 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바로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행하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 41)

-한상우신부-

아래로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가을들판의
벼이삭을 봅니다.

기도로 힘을
얻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느님께
충실했던
아빌라 데레사의
삶입니다.

감춰진 신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안 풀리는 삶도
찢어지는 이
마음도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선택의
절제된 여정입니다.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
신앙의 참된
여정입니다.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깊고 깊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씻는
회개입니다.

회개없이는
깨끗해지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일치를 체험합니다.

기도는 열매를 맺고
회개는 고개를
숙이는 정화가 됩니다.

우리 영혼의
방향은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로
나아갔던
아빌라 데레사
성녀처럼
오늘도 그분께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날 되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대립되는 개념의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특히 복음은 오늘부터 사흘간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이 이어질 것이라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게 흘러갈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을 이행하지 않고 식탁에 앉으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혹시라도 부정한 사람, 사물과 닿아 부정하게, 불결하게 되었다면 손을 씻는 의례를 통해 정결함을 회복한 뒤 음식을 먹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니까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이처럼 예수님께서 돌려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정면으로 대응하십니다. 겉과 속. 외부로 드러나는 "겉"과 내면에 자리한 "속"은 모든 피조물, 특히 사고하고 욕망할 줄 알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양대 기본 구조입니다. 우리 모두는 타인과 세상에 보여지는 부분과, 자신만 아는 감추어진 부분을 모두 지니고 있지요.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카 11,40)
바리사이들이 간과하고 또 우리도 때때로 잊는 진실이겠지요.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께는 우리의 겉이나 속이나 매한가지로 환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를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시편 139,1.13.15)라고 고백하지요.

주님께는 겉과 속이 하나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겉과 속이 구분도 경계도 없이 하나로 펼쳐져 있으니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겉꾸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까 머물러 봅니다. 거룩한 척, 정결한 척, 의로운 척, 선한 척, 지혜로운 척 애쓰는 그들과 우리에게 그분께서 이렇게 한 마디 던지시지 않을까요. "됐다! 치아라(치워라)! 용 쓰지 마라!"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듬뿍 담긴 일갈이지요. 오늘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 분노 서린 질책이라기보다 그런 안타까움과 애닲음으로 다가옵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것과 세상 악의 것이 여러 단어로 표현을 바꾸어 등장합니다. "진리 : 불경 불의", "하느님 찬양과 감사 : 허망하고 우둔하고 어두운 마음", "지혜 : 바보", "불멸 : 썩어 없어질", "진리 : 거짓", "창조주 : 피조물."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로마 1,225).
사도 바오로는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는 하느님의 본성, 즉 영원한 힘과 신성"(로마 1,20 참조)을 얕은 꾀와 욕망과 탐욕으로 덮어버린 불의한 사람들의 행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을 하느님 삼아 자기들 편한 대로 편집하고 조작해 섬기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표출되는 행동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이 아닐 때 우리는 위선이라 부릅니다. 위선은 대개 자기 영광과 명예욕,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요. 규정과 의례를 준수하는 외적 행위 역시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내면의 발로일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행위만 보면 사람은 그 속까지 알아차리지 못해도 하느님은 아시지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들 속이 "탐욕과 사악"(루카 11,39)으로 가득하다는 걸 모르지 않으시지만, 탐욕과 사악도 하느님의 선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겁니다.

그들처럼 우리 내면도 온갖 욕망과 죄스런 생각과 불안정하게 출렁이는 감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 주변을 맴돌다 시시각각 영혼을 찔러보는 어둠의 실체를 칼로 베어내듯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듯 모른 척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인간 실존을 부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도 멀어지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바리사이들처럼 자기 내면에는 눈을 딱 감은 채, 한껏 거룩하고 의로운 척, 타인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겉만 공들여 가꾸는 신앙이어서도 곤란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분열과 각극이 커질수록 '자아'가 하느님과 제 자리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자기 영광의 우상을 좇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니까요.

그러니 먼저 인정합시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탐욕과 사악"이라 부르신 온갖 악의 충동이 끼어듭니다. 불교에서 오욕(식욕, 물욕, 수면욕, 명예욕, 색욕) 칠정(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이라 했던가요. 우리 내면이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만큼 온전히 깨끗하지도,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고 거룩하지도 않다는 걸 겸손히 받아들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불순하고 불결한 실체가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길이 있으니, 바로 자선이라고 예수님께서 귀뜸해 주시네요. 자선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착한 행위지요. 선하게 보이기만 하는 위선이 아니라, 진실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눔과 희사가 자기 영광과 명예욕과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진정한 자선이 되겠지요. 혹 그런 지향이 부차적으로 스며들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누군가의 유익을 위한 직접적 선행이 자선입니다.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건 그것이 자선으로 표출될 때는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느님의 이름과 사랑을 일깨우기에,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렇게 표현된 자선은 언젠가는 결국 자선을 행한 이의 내면의 동기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은총의 역습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바리사이들에게 내놓으신 예수님의 처방전은 자선입니다. 겉과 속이 통하는 선행, 자선으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극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처방전에는 승화의 은총이 숨어 있습니다. 속에 든 것으로 자선을 베풀 때 그 불결함, 부정함도 하느님의 일로 승화되어 존재를 정화하는 은총으로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니 "괜한 데 용 쓰지 마라!" 아멘.

히솝의 채로  
-김찬선신부-


예수님을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가 예수께서 정결례를 거행치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라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신랄하게 바리사이를 비판하십니다.
겉 정결례보다 속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너무도 지당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 어떻게 속 정결례를 행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자선을 하면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는 뜻인가요?

사실 우리에게는 그런 식의 생각이 없지 않지요.
예를 들어 엄청 사기쳐 먹고 수재 의연금 조금 내고 퉁치거나
내가 죄를 지었으니 대신 선행으로 보속을 하고 깨끗해지려는.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 성혈로 우리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우리 죄가 씻어진다는 말입니까?
더 심하게 얘기하면 주님의 피가 없어도 우리 죄가 씻어진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은 물론 당신의 피로 우리 죄가 씻어지지만
주님의 피로 죄를 씻으려는 의지 정도는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 피의 세례로 우리 안의 탐욕을 비우고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며,
사랑으로 채워진 결과로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지요.

노인 요양원에 가면 목욕 봉사자들이 어르신들을 씻어드리려 해도
씻지 않으려 함으로 애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도 이처럼 
주님의 피가 우리 죄 씻어주시는 것을 마다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히솝의 채로서 내 죄를 깨끗이 씻어주십사고 
청해야 하고 청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클라라는 성녀 아네스 축일 찬가를 인용하여 이것을 이렇게 발전시킵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지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아네스 편지 1,8)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주님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정결해야 하는데
그 정결해지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만질 때 그리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역설이랄까 초월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어야 하고 죄인은 주님을 감히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물론 죄가 없어야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에
사랑을 할 때 죄는 씻어진다는 것이고 죄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다윗 얘기로 돌아가면 죄 때문에 하느님 눈을 피해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와 달리 다윗은 죄가 탄로나자 배 째라는 듯 뻔뻔하게
오히려 그 죄를 가지고 주님께 가서는 그 죄를 씻어달라고 합니다.

이런 뻔뻔스런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뻔뻔스런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믿지 않습니까?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부모는 나를 사랑하실 거고 용서하실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용서까지 봐야 합니다.

씻지 않고 향수로 그 썩은 내를 감추려 하거나
더럽고 냄새 난다고 숨어버리지 않고
그 썩은 속내까지 드러내며 씻어달라고 할 때
주님은 히솝의 채로 씻어주시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니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