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2-46)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다고 선언하시며, 남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로 단죄하십니다. 율법은 종교 제도를 유지하려고 십일조를 바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지나친 열심 때문에 향료 식물까지 포함시켜서 규정만 무겁게 만들어 놓고 정작 율법의 근본정신인 의로움이나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정신에 소홀하였기에 단죄를 받습니다.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부르짖으며, 신앙 행위의 의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은 옳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정한 이익을 거부하고, 정직하게 생활하며, 약한 이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더 원하시고, 기뻐하십니다.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신앙에 열정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단죄하신 것은, 그들의 신앙 실천이 너무 표면적이고, 드러난 모습과 행동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이런 저주에 가까운 예수님의 꾸짖음을 듣고 있노라면, 당시 종교와 사회에 대한 불의와 잘못된 점을 매섭게 질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나,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이 받는 꾸중에 통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감정 이면에, 나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이를 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바리사이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꾸짖음을 지금 나에 대한 꾸짖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거울 삼아 우리의 모습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내가 얼마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데요. 소매치기만 몇 번 했을 뿐인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럽니까? 세상에 저 말고도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까? 물론 이 사람의 말대로 그는 다른 법을 잘 지켰습니다. 폭력을 써서 누구를 다치게 한 적도 없었고, 남의 여자를 강제적으로 탐내는 성범죄를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또 ‘말’로 사기를 쳐서 피해를 준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두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는 분명히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명 한 가지만 어긴 것이라면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은 어떨까요? 하느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라고 시작되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 모습을 따르기가 힘들기에 다른 유대인들은 큰 존경과 사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만 모든 율법을 잘 지키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해주셨지요. 그만큼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임무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한테 이득이 될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율법을 어기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율법을 어겨서 하느님으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말하지만, 계속해서 남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 이 자리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외면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율법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는 내 모습을 꿈꿉니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변화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매일 늦잠을 자는 사람이 “오늘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날 거야.”라고 선언한다고 곧바로 이루어질까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작심삼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간단한 변화부터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1) 지금 하는 것을 그만두십시오.
지금 안 좋은 상황으로 밀어 넣는 습관들을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2)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행동을 하십시오.
오래된 습관들을 새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할게요’가 아니라 ‘지금 할게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동으로 만들어지기에 나는 내가 하는 일로써 존재합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누구나 불효자다
-전삼용신부-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는 더워서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잤습니다. 장막 안으로 들어온 함이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는 밖에 있던 두 형제, 셈과 야펫에게 알렸습니다. 셈과 야펫은 함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겉옷으로 아버지의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노아가 잠에서 깨어 이 사실을 알고 함은 저주하고 셈과 야펫은 축복해 주었습니다.
왜 함은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불효입니다. 아버지가 벌거벗고 자는 것은 물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자녀는 수도 없이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을 잊었으니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의로움은 자신이 받을 것을 알고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100억을 빚져 갚을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빚을 지지 않은 척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채권자 앞에서 채무자가 빚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 앞에서 자기 힘으로 컸다고 말한다면 부모가 장하다고 칭찬해 주실까요? 자녀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약하디 약한 존재로 태어나고 성장하지만 그 받은 사랑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혼자 컸다고 말하면 그것이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빚을 진 것을 알면 채무자의 자세를 취하겠지만 채권자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채권자는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부모 앞에서도 채권자의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들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부모님은 시골집에 살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아는 의로운 사람이라면 자신보다는 부모의 영광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란 대목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공경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누구도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십일조는 잘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무관심하다고 꾸짖으십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의롭지도 못하고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보스톤 해변가에서 한 노인이 매일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비싼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준다고 그 노인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어뢰로 배가 격침되어 그와 그의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탔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부족으로 바다 위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매기 한 마리가 구명정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으로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갈매기는 희한하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그때 갈매기를 먹지 않았다면 탈진하여 구조되기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갈매기 한 마리가 없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과 친구들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라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대도 채권자의 자세로 산다면 그것이 의롭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그분 앞에서 불효자가 되는 길입니다. 항상 주님의 기도에서 내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조재형신부-
서울에 살 때입니다. 한강의 유람선도 거의 타보지 않았습니다. 남산 타워도 올라갈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언제든지 갈 수 있어서 굳이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유람선도, 남산 타워도 서울 사람보다는 타지에서 온 사람과 외국에서 온 사람이 더 많이 간다고 합니다. 일부러 시간 내서 왔기에 서울의 관광지를 보러 가는 겁니다. 뉴욕에 와서 ‘센트럴 파크’엘 다녀왔습니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왔기 때문에 방문한 거 같습니다. 한국도 공원과 산책로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가 하늘공원, 노을공원을 변한 걸 보았습니다. 가을의 하늘공원의 억새는 정말 장관입니다. 차량과 소음으로 답답했던 청계천 고가도로는 시원한 물이 흐르는 산책로가 되었습니다. 명동에 있으면서 자주 걸었습니다. 발전과 성장보다 시민의 건강과 여가를 위한 아름다운 선택이었습니다.
뉴욕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의 고층 건물과 브로드웨이의 공연도 있겠지만 센트럴 파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욕 시민이 가장 좋아하고, 자주 가는 곳도 센트럴 파크라고 합니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이렇게 비싸고, 좋은 땅에 빌딩을 세우자는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원을 설계하던 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땅에 건물을 세우면 당장 이익이 오겠지만 먼 훗날 이 땅만큼의 병원을 지어야 할 겁니다.” 뉴욕시는 설계자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센트럴 파크는 뉴욕 시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공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전 11시에 도착해서 오후 4시까지 공원을 걸었습니다. 거리 연주자의 공연도 보았고, 새들의 노래도 들었고,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탁 트인 호수가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가야 할 길과 신앙인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는 오늘 성서 말씀을 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신자들은 권위는 있으나 권위적이지 않은 사제를 존경합니다. 사제의 권위는 섬기는 삶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가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꾸준히 선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알찬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래야합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절망과 근심 중인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어서 빨리 이 야만과 비인간의 시대, 미성숙과 부끄러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청산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양승국신부-
바리사이란 말은‘~으로부터 분리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는 스스로를 향해‘악과 죄, 더러움으로부터 분리된 거룩한 사람’이란 강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라사이라고 해서 모두 다 사악한 위선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식탁에 초대했습니다. 또 다른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곤경에서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니코데모 같은 바리사이는 늦은 밤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와 참 진리를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들이 본질보다는 비본질, 핵심보다는 세칙에 지나치게 연연한 나머지 철저한 형식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거룩함을 외쳤지만 자신은 가장 거룩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손씻는 예식에는 목숨을 걸었지만 가난한 이웃들의 궁핍함은 외면했습니다.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례, 제사와 십일조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이웃 사랑의 실천에는 뒷전이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자리를 보전하는데는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그에 걸맞는 지도자로서의 품격이나 품위를 갖추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을 향한 질책은 정말이지 매섭고 날카롭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예수님께서는 세말이 오면 몇 가지 특별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거짓 메시아,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입니다. 그럴듯한 말로, 갖은 권모술수로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겠지만, 즉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니, 그들을 조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어찌 그리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 딱딱 드러맞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나라가 큰 곤경에 처하거나 기로에 설때도 비슷한 현상이 드러났습니다. 나라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기회주의자들은 즉시 감추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와 속마음을 드러났습니다.
나라잃은 서러움에 대성통곡을 터트리며 가슴을 찢던 사람들, 갖은 고초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런 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사람들, 고향산천과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변절과 배신에 앞장섰던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죽든살든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일제의 충견(忠犬)이자 앞잡이, 민족의 배신자가 되어 호의호식했지만, 굴종적이고 구차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 한 가지! 이리떼 같은 그들은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신분을 세탁해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새로운 시대가 열렸지만, 그 처세술 능한 매국노들로 인해, 결국 친일 청산은 흐지부지·유야무야되어버렸고, 그들의 후예들은 후안무치하게도 아직도 당당히 정계에서, 학계에서, 종교계에서 저 난리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몇달 간에 걸쳐 비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을 정상화하기 위한 기초 작업 과정에서 우리는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나라 요소요소에 자리잡은 악의 세력의 뿌리가 깊은지? 구조적인 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얻은 소득이 있습니다.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혼란한 틈을 타서 거짓 지도자들은 스스로의 속내를 커밍아웃했습니다. 그들은 한 인간 존재가 추악하고 천박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습니다.
일생일대 가장 혹독하고 처절한 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우리 시대 학자요 지성인으로서, 끝까지 성숙한 인간 존재로서의 품위와 품격을 보여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간의 노고와 아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 조만간 보시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한없는 구림의 끝판왕’이신 분들, 마치 하이에나떼를 연상시키는 분들,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너무나 천박해, 범국민적 스트레스 지수를 엄청나게 끌어올리고 계신분들, 늦었지만 자신의 얼굴도 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거짓과 사악함과 위선의 길, 곧 죽음의 길에서 하루빨리 돌아서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틈만 나면 ‘국민 국민!’ 하시는데, 진실을 좀 알아차리면 좋겠습니다. 자신들 존재 자체로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국민들, 특히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소명을 받았지만,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 언젠가 반드시 자신들이 국민들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한 합당한 댓가를 치러야 할것입니다.
주님께서 혼란 속에 있는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들을 굽어보시고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서 빨리 이 야만과 비인간의 시대, 미성숙과 부끄러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청산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꾸중을 감당하라
-반영억신부-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종훈신부-
겉에서 속으로
성찬례, 미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절정이고 중심이다. 예식으로서가 아니라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그 의미를 넘어 그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너무 특별해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떠나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간과 공간, 특히 그분의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사건의 현장으로 이동한다.
사제가 제일 먼저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신다. 그가 높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가 먹고 마셨으니 교우들도 먹고 마신다. 그가 주님의 계명대로 사랑하니 교우들도 서로 사랑한다. 그가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니 교우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 이상과 많이 다르다. 사제도 이기적인 인간이고 죄인이다. 하늘의 품성을 지닌 사람이신 예수님을 따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교우들에게 모범이 돼야하니 겉으로라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속이 부대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위선이라고 고발하지 않는다. 속이 깨끗하지 않으니 겉이라도 잘 닦으면 속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세례가 아니가 그분의 계명을 지킴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수도서원과 사제수품이 아니라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정도의 친밀감이 그들을 예수님의 벗이 된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고 심하게 나무라셨다(루카 11,44).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은 썩은 시체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런 줄 모르고 그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따르려고 하는 위험을 고발하셨다. 수도자 성직자라고 월등하게 선하지 않고, 그렇다고 사악하지도 않다. 그저 평범한 죄인이다. 하느님이 그들을 돌보시는 것은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려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만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 영원히 살게 하신다.
예수님, 주님만이 대사제이십니다. 여기서 사제라고 불리는 이들이 주님의 모습을 지금 여기에서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 신성한 일을 죄인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먹이시고 용서하시며 이렇게 매 번 큰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겉으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행들이 속에도 생기를 불어넣어 주리라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실망하거나 체념하지 말고 꾸준히 선행을 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절)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 동안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사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자.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 46)
-한상우신부-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반성하게됩니다.
바리사이같은
제모습을 모른 채
살았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올바른 삶입니다.
행복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온전한
회개입니다.
바리사이적인
참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착각과 참견사이에
겸손함이 있습니다.
겸손은 교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거짓 없는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서툴어도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름값 하는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신앙인이길
더 원하십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걸어가십니다.

-오상선신부-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계속됩니다.

찔리는 사람
-김찬선신부-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시는 말씀을 하시자 그 말을 들은
율법 교사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 교사가 얘기하자 주님께서는 율법 교사도 나무라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이런 나무람을 들은 율법 교사를 보면서 저에게서
이런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국으로 가만히나 있지!‘
요즘 사람들이 '국으로 가만히 있지'라는 표현을 쓰는지 모르지만
나서지 않고 잠자코 있으면 중간이나 가거나 넘어갈 것을
괜히 나서가지고는 모난 돌 정 맞는 격으로 같이 얻어맞을 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쓰지요.
사실 우리는 국으로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국으로'라는 말의 국어사전을 보면
'자기가 생긴 그대로. 또는 자기 주제에 맞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과 비슷한 말로 주제 파악을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입니다.
오늘 로마서에서 심판을 받을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남을 심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심판하거나,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처럼 모욕을 들어야 할 사람인데
안 들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모욕치 말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국으로 가만히 있지 않고 율법 교사가 나선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리사이에게 한 말이 자기에게도 해당된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이 율법 교사는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이고,
찔리는 사람이며 그래서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제겐 생각됩니다.
왜냐면 이 율법 교사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이 율법 교사처럼 주님의 나무람을 들어야 하고 불행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많은 사람들이 같이 얘기를 듣고도
그것은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찔리지 않지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계속 찔러대시는데도 안 찔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가 양성을 맡고 있을 때 개인의 지적사항은 개인을 불러서 하지만
공동의 지적사항이 있을 때는 전체에게 하는데 참으로 묘한 것은
잘못을 덜 하는 사람은 지적을 받고는 잘못 했다고 하며 고치는데
더 많이 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덜 하는 사람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고
반대로 잘못을 더 하는 사람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냐 하면
잘못을 덜 하는 사람은 찔리니까 아파서 고치고 그래서 향상이 되지만
더 많이 하는 사람은 찌르는데도 안 찔리고,안 아프기에 고치지 않고,
그래서 백날 가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계속 그 모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불행하고,누가 행복한 것입니까?
안 찔리고,그래서 안 아픈 사람이 행복한 겁니까?
찌를 때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 하는 사람이 불행한 겁니까?
당장은 안 찔리는 사람이 행복한 것 같지만
종당엔 그런 사람이 불행하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에 찔리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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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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