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8일 금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 선포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곧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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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루가 10,1-9)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Saint Lu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다들 떠나고 루카만 함께 있다며 마르코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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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는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아름다우면서도 신학적인 복음서를 저술한 루카 복음사가는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 출신 의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그 바쁜 공생활 가운데에서도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공들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루카 복음사가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 선교였습니다. 자신도 이방인이었던 그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저술함으로써,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당시 세상의 중심이자 끝이라고 여긴 로마에까지 전달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루카 복음서도 공관 복음서로서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선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조금 다른 방향을 취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셨다고 전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면서 여러 가르침, 특히 그 복음서의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을 들려주신 것으로 전합니다.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을 듣습니다. 선교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긴박하기만 합니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청하면서, 파견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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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이상해서 “너 무슨 일이 있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는 갑자기 울먹이면서 “명연아! 나 지금 너무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왜 힘든지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가 생각나서 전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평상시와 달리 하찮은 이야기를 계속했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외로워서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전의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분에게 코칭을 하는데, 본 내용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상당히 힘들었던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의 모습이 떠올려지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은 지금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의 관심사가 아니면 잘 듣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는 외로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는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서는 사랑이 더욱더 필요한 요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늘 다가서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서고 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해서 고을과 고장으로 보내십니다. 주님께서 어느 고장에 오셨다는 소식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모릅니다. 빵의 기적을 보면 장정만 해도 사천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올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외로워 힘들어하는 이를 위해 보내셨던 것입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사랑을 위해 파견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찾아올 힘이 없는 이들을 위해 다가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너무나 적어서 주님께서 “일꾼이 적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심리학자 빅터 고어츨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저명인사 400명의 성장 과정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일까요? 운이 좋다? 능력이 많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통적인 하나는 이것입니다.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끈기를 보였다는 것.”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우리가 아닐까요? 끈기없음이 마치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끈기없음을 통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이름이 들어간 것을 남겨라
-전삼용신부-
영화 ‘나를 찾아줘’(2014)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가 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한 가장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책이 많이 팔린 덕분으로 미국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지쳐갑니다. 자꾸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하는 말과 행동에 지쳐가는 것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남편을 통해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특별히 결혼기념일엔 숨바꼭질 놀이까지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합니다. 이에 남편은 지쳐갑니다. 그리고 바람까지 핍니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여자 주인공은 남편이 자신을 살인한 것처럼 꾸미고 또 사라집니다. 자신을 찾아달라는 쪽지만을 남기고. 경찰들은 그녀의 남편을 의심하고 남편은 결국 내키지 않지만 TV에까지 출연하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연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내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이전처럼 계속 자신을 기억하고 찾아달라고 요구합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참으로 무섭게 영화가 끝납니다.
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자존감이 낮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지쳐갑니다.
반면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을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업적을 통해서 확인하려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고 그 업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내 이름이 기억되고 싶다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 하지 말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할 업적을 만들어야합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라는 이름이 길이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루카가 복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루카란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영원한 분을 알게 하는 복음이 사라질 리는 없습니다.
우리도 성 루카처럼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그 이름이 들어간 업적을 남겨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들어간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하느님께 의미 있어야 그 의미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업적을 하느님 앞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면 다 허망한 것입니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장 앙리 파브르가 10권의 곤충기를 완성했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파브르는 정식교사도 아닌 임시 교사로 일하며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파브르는 30년간 몸담은 교육계를 떠나 인생의 말년을 곤충기를 쓰는데 바쳤습니다. 그 곤충기는 그의 대작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어보진 못했을지라도 그 곤충기 덕분에 파브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곤충기를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곤충기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업적을 남길만한 존재라는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스톱에 ‘449통’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도 1점을 내지 못했을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띠와 십자리는 5개씩 모여야 1점이고 피는 10개가 모여야 1점입니다. 띠와 십자리가 4개씩이고 피가 9개인 것이 449통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아무리 졸라봐야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업적은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교회가 존속하는 한 예수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됩니다. 우리는 분명 주님 앞에 무언가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할 능력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성 루카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음서까지 쓸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설립 25주년 되는 한인 공동체의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공동체는 3개 민족이 함께 성당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공동체, 슬로베니안 공동체, 미국 공동체였습니다. 주교님은 영어로 미사 집전하시고, 신자들은 한국어로 응답하는 미사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어린이 합창단이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1절은 한국어, 2절은 슬로베니아어로, 3절은 영어로 불렀습니다. 같은 노래인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큰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한국인이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슬로베니아인이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래를 3개 국어로 듣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드라마 형식으로 전해주는 것이 복음서입니다. 예수님 드라마의 핵심은 ‘복음선포, 수난, 부활, 승천, 재림’입니다. 이런 드라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신앙을 갖기 힘들었을 겁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 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카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 성모님의 신앙, 성모님의 삶을 루카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지셨고, 성모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마리아의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나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닮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 자캐오의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루카가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도 다 좋지만, 오늘은 ‘엠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년 부활이 지나면 본당에서 ‘엠마오’ 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순과 부활을 준비하면서 힘들었을 본당 식구를 위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입니다.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성가 ‘엠마우스’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주여, 천년도 당신 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좋기도 좋을시고’와 같은 성가를 만드신 원선오 신부님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신부님의 삶은 ‘엠마오’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일본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아프리카 케냐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더 어렵고 힘든 수단으로 갔습니다. 30대에는 일본에, 40대에는 한국에, 50대의 나이에는 아프리카에서 지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신부님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엠마오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4시간 운전을 하고 설립 25주년 축하 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앞으로는 6시간 넘게 운전할 기회도 많을 거라 합니다. 제가 가는 곳이 ‘엠마오’라고 생각하며 기쁘게 다니려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엠마오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엠마오인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엠마오인가?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자비의 책, 루카 복음!
-양승국신부-
요즘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가’ ‘역사학자’들께서 지닌 소명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하고 균형잡힌 시선,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아닐까요?
역사가들은 각자 나름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고유한 관점(觀點)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관(史觀) 혹은 역사의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최근 기승을 부리며 우리 선량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관이 있습니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일본인들보다 더 일제를 더 찬양합니다. 일본강점기 시절을 그리워하고 두둔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를 미화하고 찬양합니다. 일제를 통해 조선이 성장했다고 억지를 부릅니다. 그릇된 사관이 초래한 불행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루카복음사가 역시 당대 걸출한 역사가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희랍어에 능통한 이민족 출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복음서 역시 유다 역사나 지리에 낯설었던 이방계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루카복음사가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이스라엘이 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루카복음 24장 13절) 또한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등장하면 항상 희랍어로 소개해줍니다.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루카복음7장 34절)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한 루카복음사가입니다. 그럼 이제 루카복음사가의 사관(史觀)을 조금 살펴볼까요?
루카복음사가가 이방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은 보다 보편적입니다. 참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연하고 개방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역사관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루카복음사가는 당시 유다인들의 시각에서 절대로 구원의 대상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태생적 죄인들, 이방인들, 세리들, 창녀들, 양치는 사람들, 고리대금업자들, 개똥 수거인들 ㅋㅋㅋ 까지도 모두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방황하던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얼마나 각별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여인들의 복음서’라고까지 칭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쳐죽일 놈’ ‘민족의 배신자’로 생각하며 침까지 뱉던 세리들, 죄인의 대명사들이었던 이방인들, 악령들린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친히 그들과 눈을 맞추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을 상세히 우리에게 전해주신 루카복음사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루카복음사가를 본받아 부족하고 나약한 이웃을 매몰찬 시선이 아니라 따뜻하고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냉혹한 관찰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더없이 자상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위로자 예수님으로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복음, 구절 구절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복음, 힘들때 마다 손에 들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루카 복음서를 좀 더 자주 읽고 묵상해야겠습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파견하시는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에 보면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왠지 제 생각에 제자들을 보내는 거면 뭔가 많이 챙겨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은데, 주님은 다른 모습과 말씀으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예전에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외방 선교회에 있는 신학생이 공소 체험을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부님이 되었는데요. 그분과 이야기할 때도 제 마음 안에 그런 마음이 약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제가 그분에게 “나중에 선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려면 후원회도 조직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을 많이 알아야겠네요.” 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뭔가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그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 때는 마음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 느낌이 있었는데요.
마음 한켠에 그러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빈손으로 보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낯선 곳에 가는 것이면 이방인이 되는 것일 텐데, 힘도 있고 돈도 좀 있고 능력도 있어야, 도움도 되고 일도 해 나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가난한 이들이 제자들을 ‘예수님’을 전하는 이들이 아니라 돈으로 보게 되는 위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렵고 힘들지만 제자들을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모습으로,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는 모습으로 파견하신게 아닐까... 합니다.
1800년대 초에 중국에서 활동하셨던 뱅상 레브 신부님도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조금은 쉽게 사람들을 신자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기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셨던 모습이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빈손으로 파견된 느낌입니다. 무언가를 할 만한 힘이나 능력,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듯한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런 마음이어서 오늘 복음이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요즘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을 하는 것인데, 그마저도 매우 보잘 것 없는 느낌입니다. 발음도 그렇고, 내용도 생각하는 대로 옮기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글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오늘 미사가 끝나고 수녀님이 강론 원고를 달라고 하십니다. 좋은 내용이라 기억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 이야기를 잘 전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나의 가난함 가운데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한 눈 팔지 마라
-반영억신부-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되고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4).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엉뚱한 것에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다.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15,9-10). 결국 내 삶의 양식은 내 생각, 의지, 내가 지닌 것들을 내려놓는 양의 방식이지 무엇인가를 잡아먹으려는 이리떼는 아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상사는 상사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한 눈 팔지 말고 하느님으로 부터 파견된 일꾼으로서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일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길에서 만나는 친구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를 진리와 선으로 이끌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교활동
-송영진신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의 뜻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라는 지시입니다.
선교활동은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활동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데,
예수님께서는 왜 ‘일꾼’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자녀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꾼’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는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기도이고,
그래서 선교활동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만일에 일꾼은 되지 않겠다고, 자녀로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남들이 구원을 받든지 멸망을 당하든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4).”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양들 같은 제자들을 보면서
분명히 그들을 염려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임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겨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왜 그런 지시를 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빈손’은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지만
영적으로는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겨서 가지고 가는 풍요로운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을 영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빈손이지만 영적으로는 풍요로운 손’을,
이리 떼를 순한 양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페소서 6장을 보면, ‘하느님의 무기’의 목록이 나옵니다.
진리의 띠, 의로움의 갑옷,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하느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빈손’을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춘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돈 걱정이나 하면서 간다면,
자기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많은 활동비를 가지고 간다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 선교활동은 백퍼센트 실패입니다.
“어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가? 모든 사람을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돈 걱정이 없으면 더 많이 기도할 수 있고, 더 열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돈이 많으면 선교활동이 안 된다는 것은
오랫동안 선교본당 사제로 살면서 얻은 경험 법칙입니다.
못하는지 안 하는지... 하여간에 그렇게 됩니다.
아마도 가지고 있는 돈이 많으면 ‘하느님의 무기’의 힘이 약해지고,
그러면 세속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도 약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이 많은 경우에는 돈의 힘으로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는데,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면 같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떻든 선교활동은 돈의 힘이 아니라 복음의 힘으로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아는 사람을 만나도 모르는 체 하여라.” 라는 뜻은 아니고,
“세속의 인연에 연연하지 마라.”,
또는 “세속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활동비를 안 주시니,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서,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고,
‘예수님의 지시’를 거스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자들이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을 제자로 뽑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선교활동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참 평화’를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 평화를 나누어 주려면 우선 먼저 자기 안에
기쁨과 평화가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돈 걱정’이나 하고 있으면,
아니면 돈을 잔뜩 가지고 간다면,
그 사람 안에는 기쁨도 평화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라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참 기쁨과 참 평화는 돈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만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평화를 받을 사람”이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한다고 해도 그것은 제자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뜻이고, 또 그런 일이 생겨도 제자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평화를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부님과 사제
-이종훈신부-
어렸을 때 사제관에 들어가면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구수한 커피와 파이프 담배 냄새, 외제비스킷과 초콜릿이 있었다.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외국서적도 많았다. 어린 나의 눈에는 신세계였다. 신부님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어쩌면 어렸을 때 그 경험으로 내 안에 신부님은 높고 특별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사제가 받은 직무는 하나부터 열까지 봉사이다. 종처럼 요구하는 대로 응해야 한다. 그것은 사제직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지니셨던 모든 능력은 봉사와 섬김을 위한 것들이었고, 그럴 때에만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무권한은 언제어디서나 유효하다. 성사의 효력은 그의 성덕과 무관하다는 뜻인데(사효성事效性 ex opere operato), 여기에는 양들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사효력이 집전자의 성덕에 따른다면 합당하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합당한 그는 아마 몇 년 안에 과로사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몸소 가시려는 고장에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는데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 같다고 하셨다(루카 10,3). 그들은 지극히 약한 자로서 강한 자들 한 가운데로 보내졌다. 지금도 주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보내신다. 주님만 믿으면 모든 위험을 피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파견된 양들을 이리들에게 공격당해 상처입고 잡혀 먹히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사제들이 방어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고 처음부터 주어지지도 않은 신부님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 같다. 그들도 똑같은 죄인들이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들을 계속 부르시고 파견하신다. 반대와 비난 그리고 폭력에 상처 입어도 이리떼 속으로 당신의 양들을 보내신다. 그들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야 한다(마태 10,16). 세상 권력자들이나 관리자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유혹이 매일 들어도 매번 피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다, 주님도 그러셨으니까. 사제들은 그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되살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단 한 가지 기쁨은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고 있음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아주 조금씩 부르심의 뜻을 알아갑니다. 그 작은 깨달음 속에서 은연중에 바라고 무의식 안에 숨어 있던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구들이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주님의 길은 여전히 반갑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넘어 부당함을 알면서도 끝까지 주님 뒤를 따르게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죽음의 고통을 받는 아드님을 위로해주셨듯이 주님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우물쭈물할 때 더 깊은 신뢰와 희망을 보여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0,1-9: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카 복음사가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 되는데 이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둘 사이에 주님 현존 위해)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할 바를 말씀해 주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고 하신 것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접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나 자신의 봉사가 이 공동체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뒷짐 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느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 9)
-한상우신부-
단풍처럼
온 삶으로 번지는
복음의 기쁨입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의
낯선 것들이 실상
제마음에 존재하는
익숙한 것들임을
깨닫게됩니다.
친근하고
따뜻하게
만나게하는
루카 복음 사가의
축일입니다.
사람의 길이
예수님을 통해
따뜻히 다가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그려줍니다.
사랑안에서
극과 극은
통합을 이룹니다.
아픈 우리의
삶이 각별한
사랑의 삶이
됩니다.
알맞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열매는 다시
맺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바로 오늘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안에는
길을 잃은 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시간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복음의 시간으로
바뀌게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우리 마음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마음또한
복음으로 물들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에서는 복음 선포자가 가야할 길이 보입니다. 사실 독서와 복음 모두에 매우 본질적인 지침들이 담겨 있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없지만, 그중 오늘 제게 다가오신 말씀들 위주로 나누고자 합니다.
"청하여라"(루카 10,2).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로 파견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함께 가는 둘 사이의 팀웍도 좋아야 할 것입니다만, 무엇보다 각자 하느님과 갖는 관계성이 선교의 질은 물론 공동체의 분위기를 좌우할 것입니다.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루카 10,5).
복음 선포자는 평화의 전파자입니다. 그런데 먼저 그 자신이 평화여야 하지요. 그는 스스로 포기한 잉여분의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 신발 따위로 신경이 곤두서거나 불안하거나 강팍해지거나 인색해지지 않습니다. 더우기 길에서 사람들과 긴 인사를 나누며 인맥을 쌓고 뒷배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의탁해 가다보면 필요한 순간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니 인간적으로 보루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6).
빌어준 평화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튕겨 나올 수 있지만, 평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평화는 고스란히 복음 선포자에게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그 평화를 받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도 되겠네요. 그러니 복음 선포자가 먼저 평화의 존재여야 할 것입니다. 평화를 빌어주기 마땅한 이, 평화를 받아 머무르기 마땅한 이여야 합니다.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복음 선포의 길에서 마주칠 일은 그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할 이들은 물론 복음 선포자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섭리가 다이나믹하게 휘돌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받아 먹는 음식이 구미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도 맛깔져서 은총이라 여기는 것도 있겠지만 쓰디쓴 도전과 실패처럼 뱉어내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파견받아 나선 여정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분이 차려 주신 상 위의 모든 일이 복음 선포자를 성장시킬 양분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가까이? 분명 "가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가까이"일까요? 꼭 세상 종말이라는 공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 "가까이"의 거리는 사람마다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겉보기에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택한 것 같은데 정작 지옥에 사는 듯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기댈 곳 없고 가진 것조차 빈약해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선점해 누리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복음 선포자가 하느님 나라와 어떤 거리를 유지하고 있느냐 또한 관건이 됩니다. 본인 입으로 선포하는 "가까이"를 누리며 충만하다면 정말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래서 그러기를 바라고 또 그러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화답송) 계십니다.
제1독서의 서간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고독이 뚝뚝 묻어납니다. 이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는 걸 보면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진정 신뢰했던 것 같네요.
"데마스는 ... 나를 버리고 가고..."(2티모 4,10).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2티모 4,11).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16).
지금 사도 바오로의 처지는 버림받아 가난하고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 벌거벗고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과 비움은 인간적으로 참 비참하고 서글플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을 향해 비상하는 엄청난 도약대가 되어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티모 4,17).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쟁취할 수 있다면 버림받음조차, 가난조차, 고독과 외로움조차 은총입니다. 선물입니다. 당신께 더 가까이, 더 깊게 끌어당기시고자 마련하신 환경이고, 또 "차려 주신 음식"이기에 그렇습니다.
10월 전교의 달입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본성상 선교의 주체입니다. 직접 선교든 간접 선교든, 말로든 글로든 행동으로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지요.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는 이, 평화의 전파자, 만족하는 이, 하느님 나라와 가까운 이, 그리고 하느님께만 의탁하기 위해 가난과 고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이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수 있냐며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주신 선물이 의외로 꽤 많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2티모 4,17)고 먼저 우리를 은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믿고 나아갑시다.

자유와 해방을 주는 복음선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7652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18일 수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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