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처럼
제 23장
프란치스칸 이야기
개인적인 묵상
삶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처럼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은 주위의 사람들이나 사건, 개인적인 응답을 통해 복음적 생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작용하시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신비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다. 하느님의 그 많은 신비를 어찌 다 글로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성서는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볼 수 있게 한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꼭 이루어야 할 우리의 몫이다. 사랑의 상호 관계 안에는 신비한 사랑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우리 프란치스칸 생활의 공동 구성 요소이다. 그들의 내적 생활을 모두 다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삶은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이 장은 우리 프란치스칸 여정에 관한 나의 묵상이다. 더불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묵상도 같이 들어보자
시작하는 말
프란치스코는 회개한 후 삶의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되었다. 일시적인 감정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소명에 대한 행위가 계속되었고, 그의 마음은 항상 충만함으로 흘러넘쳤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었으나 봉사하고자 하는 열정은 약해지지 않았으며, 고독에 대한 갈망도 커져만 갔다.
클라라는 여성이었지만 자진하여 가난에 뛰어들 만큼 강한 의지를 지녔다. 가난을 살고자 하는 열망은 집을 떠나기 전에 프란치스코와 몰래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프란치스코를 완전히 신뢰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가족 중 남자들은 매우 분노하였고, 그녀는 가난을 살아갈 의지를 분명히 했다. 교황과 주교도 자신의 이상을 유지하려는 '가난의 특전'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가난을 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 둘의 예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사도는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경험이 프란치스칸 영성을 추구하는데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나에게 주어진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부터 갖도록 하자. 그리고 그 안에 실재하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키우도록 하자. 걸림돌이 되는 점을 벗어버리고 이 선을 꽃피우자.
들어가는 말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그를 나환자들 가운데로 이끄셨음을 믿었다. 나환자들이 있는 곳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프란치스칸 특성은 어떤 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이다. 또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고 싶어했다. '태양의 노래'는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잘 나타나 있는 노래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이 일을 한다. "그분은 신령한 권능으로 생명과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습니다. 영광과 능력으로 우리를 부르신 당신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2베드로 1,3)
이러한 겸손의 자세는 기본적인 것이며 겸손과 진리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항상 돌보아 주시는 분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있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선물을 거저 주셨으니 하느님은 찬미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오."(1고린토 10,31) 믿음은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알게 한다.
신앙의 눈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사용할 자유가 내게 있음을 깨닫게 한다.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그 선물을 사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가 이것을 완전하게 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복음적 행로를 따라 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우리를 참여시키고 계신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동반자로서 복음적 생활을 완성해 나간다. 어느 정도 일이 성취되고 나면 바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회개생활에 다른 사람들이 동참하여 동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개인적 환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써 설명해야 한다. 개인적 환시를 다른 사람과 말로써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쉬운 길을 택하였다. 그는 그의 생활양식의 설명을 복음에서 찾았다. 그의 첫 회칙은 복음의 문구를 단순히 연결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는 회칙의 조직적인 면에서는 벗어난 것이었으나 영적인 면에서는 프란치스코를 움직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복음 말씀은 그들로 하여금 세밀하게 듣게 했으며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프란치스코가 "완전해지려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터이니. 그렇게 하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마태오 19,21)라는 말씀을 읽었을 때 갈 길이 분명해진 것 같다. 그는 재물의 소유보다 하느님 나라의 이익을 위해 가난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돌보신다는 것을 믿었다. 가난은 재물이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것이었다. "회원은 곤란과 박해 중에도,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회칙 제 10조)
다음 말씀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더 많은 통찰력을 갖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시오.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져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을 지니지 마시오."(루가 9,3) 이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실천해야 함을 알았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여행하는 데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음도 믿는 것이다. 가난 실천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 선언하는 것이었다. "회원은 물질적 욕구를 줄임으로써 현세의 재물로부터 벗어나고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며, 복음에 따라 자신은 하느님 자녀들을 위해 받은 재물의 관리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원은 '행복 선언'의 정신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순례자나 나그네'와 같이, 소유욕과 지배욕 및 그러한 모든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회칙 제11조)
세 번째 말씀은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루가 9,23) 그들에게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재속프라치스코의 회칙은 우리의 응답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이 회개는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회칙 제7조)
튼튼한 건물은 튼튼한 토대에 달려 있다. 만약 토대가 약하면 건물 전체가 위험하다.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우리의 삶은 예수라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으며, 우리는 예수를 믿고 의지한다. 복음을 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그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로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며, 우리가 성령을 통해 도달하는 진리이며, 삶의 충만함을 주려고 온 생명이시다."(회칙 제4조)
예수님과 성령 안에서 확신을 갖고 사는 가난은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준다. 그 가난은 더욱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사회에서 초연한 마음을 갖게 한다.
좋은 음식과 집과 의복, 친구들과 여러 봉사 단체들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고마운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할 때는 프란치스칸의 길을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치를 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소유물'에서 해방된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누게 될 것이고 참 평화를 맛 볼 것이다.
나눔은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간 존엄섬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소유할 뿐더러 남에게 무관심하다면 단순하게 말해서 프란치스칸 정신이 아니다. "---그리하면 자유롭게 하느님과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회칙 제 12조)
광고를 통해 구입한 많은 물건들 중에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많이 있다. 좋은 물건을 사고 재물을 쌓아 놓기 위해서 더 높게 승진을 해야 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쌓아놓은 재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다른 재물이 필요하고 더 안전한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마치 욕망이 굴레에 씌워진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재물을 모으는 것에만 집착하게 된다. 재물을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지만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처참하게 절망하고 말 것이다. 또한 이웃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이다.
수많은 현금이 당신은 보호하고 달콤하게 유혹하지만 인간 관계가 단절되면 금방 고독하게 되고 만다. 또 돈에만 의지하여 욕망만을 위해 살게 된다면 혼란스럽게 될 것이며 점점 짐이 될 것이다. 이런 재물 숭배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계명을 잘 들어,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면 내가 너희 땅에 제때에 비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어,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해 주겠다. 너희는 마음의 유혹을 받아, 길을 벗어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경배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신명기 11,13~14,16)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가난은 그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오히려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께만 의지하여 가난해지기를 원했다. 하느님 안에 의탁함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생활 기반이었다. 그들이 보인 이 모범은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한 쌍의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복음에 "땅에 보물을 쌓지 마시오.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이 뜷고 들어와 훔쳐갑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시오. 좀도 벌레도 갉아먹지 않고 도둑이 뜷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않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입니다."(마태오 6,19~21)라고 하신 말씀은 꼭이뤄질 것이다.
가난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같지 않아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은 참으로 묘한 분이시다. 내가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난을 사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만약 프란치스칸이 환상을 가지고 프란치스코를 따라 일생을 헌신하고자 한다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그뿐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그분을 통해 지금 이미 화해를 받아 놓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1)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상한 질문이 아니겠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가난이 또 하나의 프란치스칸 소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놀라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보면 질문하기를 좋아하여 "하늘을 왜 푸르지? 잎사귀들은 왜 나무에서 떨어지지? 꽃향기는 어떻게 나는거야? 개는 왜 꼬리를 흔드는거야? 나는 어떻게 태어났지? 별들은 밤마다 불을 켜는거야?" 하고 묻는다. 이처럼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보면 마냥 놀라워한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그들의 생애에서 이런 어린이다운 놀라움을 키워나갔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안에서 형제와 자매을 보았으며, 클라라는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안에서 하느님을 묵상하였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선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놀라움이 자랐다. 그들은 피조물 안에서 살아 계신 성령의 움직임을 보고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도 그 사람을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고린토 3,16~17)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때 눈과 귀가 열려 삶을 새롭게 보게 한다. 그것은 삶이 고통스러울 때도 그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하고, 결코 혼자가 아님을 체험하게 한다.
이 경이로움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내 안에 새로운 역동성을 드러낸다. 나를 과거에 머물지 않게 하고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서 봉사하게 하며,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도록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물위에 당신의 거처를 세우시는 분
구름을 당신 수레로 삼으시고
바람 날개 타고 다니시는 분
바람을 당신 사자로,
타오르는 불을 당신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
주님의 영광은 영원할지며
주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으로 기뻐하실지어다.
땅을 굽어보시니 뒤흔들리고
산들을 건드리시니 연기 내뿜는도다.
상상력은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시편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경이로움을 노래한다. 아기서는 시로 된 연가이다. 창조 이야기도 거대한 천지창조의 경이로움을 그리고 있다.
성서가 예술과 시와 소설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성서는 이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성서의 놀라움을 깨닫고 있었으며, 이를 세상에 끊임없이 선포하고자 하였다. 성서는 그가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성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매스 미디어에서는 신이 없다고 떠들어대고 사람들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신다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칸은 이런 풍조를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활동하심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천국을 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삶에 이르는 오솔길 같은 것이다. 믿음은 삶을 희망차게 하며 확신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게 한다.
나오는 말
프란치스코는 생애 중반기에 주로 여행을 하였다. 순교자가 되고 싶은 열망에 모로코로 가고자 했지만 병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십자군과 술탄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중동으로 갔다. '인준받지 않은 회칙'이라 불리는 첫 회칙을 썼다가 그 원본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다시 써야 했다. 어떤 이는 이 회칙이 지나치게 엄격하여 고의로 그것을 분실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프란치스코는 회칙을 다시 쓰기 위해 조용하고 공기 좋은 은둔소를 찾았다. 그리고 회칙을 다시 써서 교황의 인준을 받고자 로마로 갔다. 형제회가 커지면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이상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원하였다(페루지아 전기 113 참조)
아시시에서 있었던 돗자리 총회에는 기적처럼 5,000명이 넘는 형제들이 모였다. 그들은 들판에 오두막집을 짓고 돗자리로 지붕을 덮어 야영을 하였다. 모두가 어떻게 저 많은 군중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을까 걱정하였지만 프란치스코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잠재워 주고 먹여줄 것을 믿게 하려고 애썼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먹일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음식은 형제들이 충분히 먹을 만큼 넉넉하였다. 그것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프란치스코에 대한 또 다른 업적이 되었다. 그는 형제들이 믿음을 충실히 갖도록 격려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되기를 권고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성모님을 사랑하고 따르도록 요구하였다(잔꽃송이 18 참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더 나중에 씌여진 '인준받은 회칙'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형제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될 것을 권한다. "그리고 신뢰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서로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참조 1 데살 22,7)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정성되이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2회칙 6,8~9)
형제회의 성장은 프란치스코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형제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갔지만 성장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학문에 대한 요구가 있게 되자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프란치스코 자신도 이 요구에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못하였다. 이 중간시기는 프란치스코에게 여러운 시기였으며, 변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코의 믿음 뿐이었다. 그는 죽음의 원인이 되는 병을 앓으면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쁘게 살았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그의 행동을 결정하였고,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그는 의심 없이 복음서의 말씀을 실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님 나 여기에서
생명이시요, 기쁨의 샘이신 주님께서는
"나는 너의 오직 하나 뿐인 하느님이다."라고
내게 속삭이십니다.
나의 말과 글과 일들
내가 무엇을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오니
그 선물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쓰일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것인 이 선물을
주님의 뜻에 맞갖게 쓰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사용하게 하소서.
걱정도 방해도 없이
당신과 함께 했던 라베르나에서의 기도
산봉우리와 낮은 계곡
풀 덮힌 평야와 은둔의 동굴
이 모두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나의 주님
이제로부터 영원히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형제회 안에서 여러 걱정거리가 있었지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피조물에 대한 존경심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작은 벌레일지라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레오 형제에게 수도원 문지기에서 도둑으로 몰려 내쫓김을 당할 때에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는다면 이것은 완전한 기쁨이라고 말하였다(잔꽃송이 8장 참조). 프란치스코는 누구에게나 존경과 정중함으로 대했으며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다. 그런데 왜 믿음이 깊은 사람에게 고통을 겪게 하시며, 착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가? 하느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가? 과연 생활에서 믿음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
프란치스코는 이런 의문에 부딧쳤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의 실재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부딪치는 아픔, 고통, 무지, 좌절 앞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과 신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유지해야 하며, 믿는 이들 가운데 성령은 충만하게 채워질 것이다.
집회서 2,1~6
아들아,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말아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할 수 있도록
그분께 매달려, 떨러지지 말아라.
네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으들이고
사정이 바뀌어 비천하게 될지라도 인내심을 가져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되기 때문이다.
질병과 가난 중에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맺는 말
생의 마지막 시기에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노래로'주님을 찬미했다. 또 아시시의 시장과 주교와의 불화를 중재하여 화해하게 하였으며, 임종이 가까와 지자 유언을 말하고 야고바 부인이 마련한 음식을 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를 축복했으며, 포르치운쿨라에서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마치 태어날 때처럼 죽을 때에도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실지어다"(욥기 1,21)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였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으며,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위대한 소명을 하느님의 뜻대로 완수하였다.
프란치스칸은 기꺼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항상 용서하고 화해하며 프란치스칸 가난을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생활화하도록 이끄신다. 프란치스칸은 이처럼 회칙과 복음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주소서.
미움 때문에 갈라지는 이 세상에서
사랑 안에 믿음 주소서.
축적하느라 허리가 휜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께 의지하여
물질로부터 해방되도록 믿음 주소서.
이사해 오는 이웃 안에서
환대할 수 있는 믿음 주소서.
싸우는 가정을 통해서
평화를 찾는 믿음 주소서.
고통 안에 타는 가슴에도
하느님의 굳셈을 신뢰하는 믿음 주소서.
몸이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만 희망을 찾는 믿음 주소서.
오직 주일만 챙기는 신자들에게
매일을 복음적 삶이 되도록 믿음 주소서
봉헌의 삶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봉헌을 통한 믿음 주소서.
프란치스코여 당신은 길을 아오니
복음적 삶과 사랑의 길,
그 길을 걷게 하소서.
내가 지쳐 쉬고 싶을 때에도
클라라여, 나에게 경이로움을 가르쳐 주소서.
꿈에서 깨어 관상할 수 있도록
즐거움에도
평화 중에도
역경에서도
굳셈을 주소서. 이끌어주소서.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칙>
제15조
회원은 정의를 촉진하도록 자신의 개인 생활로써 증거하고,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활기에 찬 창의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특히 사회 생활의 각 분야에서 구체적이고 자신의 신앙에 걸맞는 선택을 해야 한다.
해설
'정의'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공정함, 공평함, 평등함, 공정한 마음, 공평한 손, 공정한 경쟁, 법, 정당한 도덕성 등의 뜻이 있다.
정의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몫을 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다음 사항이 전부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1.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의 분배
2.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 존엄성이 지켜지는 것
3. 억압에서 해방될 권리
4. 선택의 자유를 방해 없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
5. 신앙의 자유
6. 인간적이고 영적인 성숙의 추구
이러한 권리를 주장한다 해도 가끔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를 인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다른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두발로 디디고 서서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냉장고와 세탁기, T.V와 오디오, 수퍼마켓과 자동차, 매장에 걸려있는 옷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는가? 인간은 욕망에 이끌려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단 한번도 사지 못하는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정의는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나는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하느님께 흠숭을 드려야 함은 하느님께 갚아 드릴 것이 있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흠숭을 받아 마땅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흠숭을 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나와 친밀해지고자 하신다. 하느님과 통교를 하려면 항상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 일부분의 시간을 하느님과 함께 보내는 것이다.
정의는 독재나 군사 정권의 조직을 거부한다. 사회주의나 군주 제도 역시 인간을 위한 복지제도가 빈약하다. 정의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프란치스칸은 더 많은 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부딧치고 있다. 돈은 가끔 권력을 가져다 주며 자기를 과시하게 한다. 이는 인간을 정의롭지 못하게 만든다.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문제를 복음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복잡하고 다변화된 사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의견에 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정의를 홍보하는 선구자로서 사회 안의 정의롭지 못한 사실들을 수집하여 복음적 분석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복음적 가치를 강하게 믿고 사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며 진취적인 기상이다. " 우리는 서약으로 이를 행할 것을 이미 선택하였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이 세상에 더 부유한 삶을 가져오기 위하여 다시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사고도 변화될 수도 있다.
필립비 4,4~8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친절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에나 기도와 간구로써 감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참되고 고상하며 의롭고 순결하며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덕성스럽고 칭송받을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마음에 간직하시오.
언제나 정의의 길을 찾아라. 그러면 당신은 자선을 베풀 곳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더 단순화시켜서 다른 사람이 사람다운 품위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라. 복음말씀과 일치하는 사상이나 문제들을 홍보하는 단체를 지원하여라. 최악의 대결상태에서도 상대방 적수를 존경하여라. 당신의 프란치스칸적 전통을 보여주도록 하여라!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50~52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불쌍한 우리로 하여금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주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에 불타,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지존하신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프란치스칸 공부>
사랑에 빠진 사람들
세상에 하나뿐인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이 둘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삶의 초점이고,
복음이 그들 여정의 길잡이입니다.
충실성이 그들을 깊은 일치에로 이끌어,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봉사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사랑하는 사람의 모델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초점이고,
복음이 우리 여정의 길잡이입니다.
충실성은 우리를 깊은 일치에로 이끌어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봉사를 찾았습니다.
사랑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복음은 우리를 자꾸만 사랑으로 부릅니다.
사랑은 서로 통교 안에서 일치하며
영원을 위하여 순간을 잡으며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모입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들에게 가난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빨리 움직이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은 민첩함을 선물로 가져왔고
그들이 신뢰하는 하느님께 곧바로 응답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흡수되어
말씀이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가난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하느님이 부르심에 빨리 움직이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은 민첩함을 선물로 가져왔고,
우리가 신뢰하는 하느님께 곧 바로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흡수되었고
우리가 신뢰하는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봉사할 이웃에게 나아갑니다.
<토론 주제>
1.프란치스코의 생애에서 가난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2. 당신은 어떻게 가난의 정신에 살고 있는가?
3. '충실함'이 왜 프란치스칸에게 중요한 것인가? 왜 '충실함'으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4. 이 양성기간 동안 복음에 대해서 배운 바가 무엇인가?
5.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을 읽으시오. 특히 회칙 2장을 주의 깊게 보시오. 회칙 어느 부분이 당신에게 가장 어려웠는가?
<성서 묵상>
+ 마티오 13,18~23
이 복음 말씀이 당신 자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에 평소 응답하였던 것을 반영하는가? 이 장의 설명이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 이것이 당신 삶의 한 부분에 작은 씨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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