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고 처럼 제21장 노동-창조적 행위

Margaret K 2019. 4. 12. 18:53

프란치스코처럼

제21장 

노동-창조적 행위


교황 바로오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22항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기 1,28)라는 말씀은 성서 첫 장에 있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 만물이 다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음과 이것을 현명하게 이용하며 더 큰 이익을 위하여 노동으로 완성할 사명이 인간에게 맡겨졌음을 알 수 있다. 땅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과 발전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누구든지 필요한 것을 땅에서 찾을 권리가 있다. ---중략--- 사유권과 상거래의 자유까지도 어떠한 권리든지 모두 다 이 원칙에 양보해야 한다. 이런 권리들이 상위의 원칙 실현을 촉진시켜야 할 것이지 방해하여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런 권리들의 본 목적을 되찾아 주는 일이야말로 중대하고도 긴급한 사회적 의무라 하겠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의 형제들에게 동냥을 나가기에 앞서, 직접 노동을 하도록 가르쳤다. 동냥은 이차적인 것이었으며 노동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게으름을 복음적 삶의 원수이며 영적 성장의 장애물로 여겼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노동이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형제들에게 권고하였다. 노동은 복음적 여정의 전체가 아니라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에 관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의 내용은 우리의 경제상황의 몇 가지 요구들을 나타낸다. 이것을 적용하고 삶의 현장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프란치스칸의 과제이다.


몇 가지 일반적인 정보(1995년 미국의 경우)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산업국가 노동자의 절반 가량이 물건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21세기에 선진국 노동자의 제조업 종사자는 1/6또는 1/8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미국 노동자의 2/3 이상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지식은 새로운 생산품인 것이다. 이 사실은 사업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 1991년, 기업들은 산업, 광산, 농업, 건축 장비들에 사용된 총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컴퓨터와 통신분야에 사용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통신 사업에 막대한 비용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소위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를 거부함은 헛된 일이며, 그것은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 1987년, 1000만대의 팩시밀리가 추가되었으며 전자 우편(E-메일)주소는 2600만개로 증가하였다. 오늘날 그 숫자는 과히 천문학적이며 새로운 통신망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 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당 노동자로 전락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이 선택 가능한 유일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노동인구의 절반 이하만이 종래의 직업을 가질 것이며 전일 노동자는 소수가 될 것이다. 단기 고용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 될 것이다. 평생 직장이라는 오래된 생각은 이미 끝났다. 새로운 노동관습이 직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이 될 것이다.


- 최근, 정보의 공급은 매 오년마다 두 배나 증가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난 5천년간 생산한 정보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지난 30년 동안 생산했다.


- 소규모 사업체들이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농장은 살아 남기 위해 규모을 더욱 확장시킬 것이다. 소규모 사업체와 농민들은 그들의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정보화 시대의 산물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비록 소규모 사업체들이 대기업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정보화 시대의 요구를 피할 수는 없다.


- 노동시장이 위축되지만 않는다면 비숙련 노동자들은 여전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들에 대한 임금은 한 가족이 생활하기에 불충분할 지도 모른다. 노동시장의 이러한 부분이 정보화 시대에 검토되어야 한다. 정당한 임금을 어떻게 결정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대화하고 심각하게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정보화 시대의 맹공격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협한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프란치스칸 사상을 다루려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다루어야 한다. 어떠한 것도 노동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그대로 남아있을 수 없다. 변화가 인류의 정신을 압도할 지경에까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프란치스칸으로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개별 사업가들은 앞에서 말한 몆 가지 정보들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여러분에게 제공된 정보를 유지하라는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장에서 제공된 자료들을 갱신하기를 계속해야 한다. 집에 가지고 가면 벌써 고물이 되어버리는 컴퓨터처럼, 여기에서 사용된 데이터들은 인쇄되어지기 전에 최근의 자료로 교체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현실에 주의를 계을리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의 복음적 가치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살아가려면 복음적 가치 또한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 시대의 고용문화를 다루는 책들을 저술했다. 그들이 내놓은 몇 가지의 공통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피고용인들은 빠르게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업무의 최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적인 갱신이 필요하다. 그 변화의 빠르기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며 우리는 그러한 현실과 직면해야 한다.


- 오늘날에는 직업의 안전성이란 거의 없다. 업무 기대에 대한 불확실성 뿐만이 아니라 업무분담에 대한 모호성이 개인에게 좌절과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한다.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가장 잘 처리하는 사람만이 고용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학습하기를 멈춘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훈련과 학습은 오늘날의 노동사회에서 생활의 일부분이다.


-피고용인과 관리자에게 부과되는 요구들은 줄어들지 않는다. 더 적은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생존을 위하여 당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자신을 잘 관리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낙담과 분노, 좌절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 오늘날과 같은 경쟁사회의 빠른 발전 속에서, 가능한 한 창조적이 되어야 한다. 사업을 새로 개발하고 변화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오늘날의 시장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 노동의 세계에서 변화에 대한 요구는 끝이 없다. 그것에 대한 불평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새로운 마음가짐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다음의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인류로 남아 세상과 관련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업의 성공 이면에 드러난 일부 요소는 가족관계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보다 많은 노동시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을 단축시킨다. 더 많은 것을 사고자 하는 부단한 욕구는 더 많은 노동 시간을 요구한다. 변화에 대한 요구는 변화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것은 마치 죽어야 끝날 수 있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보인다. 이와동시에 우리의 삶은 통교와 사랑의 부족으로 활폐화되어 질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칸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의 소용돌이를 바꿀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기류를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이 새로운 문화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인간으로 성숙하도록 어떻게 그들을 준비시킬 것인가? 이 문화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현실과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태도와 인식

비록 우리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의 태도와 사고는 변화시킬 수 있다. 마음과 정신의 내면세계는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우리가 삶을 보는 방식, 노동상황에서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결정권이 있다.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지혜로운 복음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사용하자!


1. 노동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 아니다. 노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청지기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과 그의 백성들을 돌보신다. 노동은 인류에게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하여 개인의 기술을 사용하고 지구의 자원을 활용하고 개선한다. 우리는 창조적 재능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제공할 새로운 제품을 만들 방법을 찾는다. 또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가정을 이루는 터전을 마련한다. 노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노동을 통하여 제품을 완성하는데 참여할 기회를 갖는다. 개인적인 노동을 통하여 어떤것을 완성했다는 성취감을 얻는다.


우리가 거대한 생산이라는 수레바퀴에서 하나의 부품에 불과할 때, 이러한 만족은 줄어든다. 우리가 오직 무언가를 더 확장하려고만 할 때, 만족감을 놓치게 된다. 다양한 노동 욕구가 지나치게 전문화되고 격리된다면 우리의 성취감은 줄어들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제품을 설계하고 개발하기 위해 협동하여 일한다면 모든 팀의 구성원들이 주인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구성원과의 조화는 노동력을 향상시키며 더욱 성실한 노동자를 갖게 될 것이다. 사업에는 건전한 상호의존이 필요하다. 생산과정의 모든 부분의 요구사항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환경이 노동시장의 모든 요소를 더 큰 만족으로 이끈다.


2. 창조성은 우리가 노동 현장으로 가져와야 할 선물이다. 가능한 상상력은 꿈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돕는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는 방법이나 정원에서 화초를 더욱 잘 자라게 하는 새로운 방법과 같이 인간의 창조성은 하느님의 창조성을 반영한다. 프란치스칸에게 있어 상상력은 창조적 노동의 중요한 요소이다.


3.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일반적 노동의 한 형태이다. 시간을 절약해 주는 연장들은 정비와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정비와 관리 방법을 배운다. 우리의 내적인 태도를 노동 상황에 적용하면, 기계를 정비하는 것은 기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보화된 기계들을 제공하고 정비와 관리를 하는 것이 노동자들을 돕는 일이 된다. 프란치스칸은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며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먼저 존중하며 기계를 정비해야 한다


4. 우리의 관심은 실업자들에게로 넓혀가야 한다. 우리의 과업은 그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을 학습시키며, 가능한 일을 탐색하게 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자기 신뢰와 자기 관리를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격언은 말한다. "물고기를 주어라. 그러면 그날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그러면 다시는 배고프지 않으리라."


5. 프란치스칸은 합당한 노동에 정당한 임금을 제공하는 풍토를 발전시켜 나간다. 프란치스칸은 노동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보수는 사람들이 최소한 품위 있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도는 되어야 한다. 노동자들과 경영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놓고 정직하게 마주앉아 적정한 보상의 방법을 찾도록 해야 한다.


6. 과중한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시킨다. 피곤, 육체적 탈진, 정신적 피로는 지나친 노동의 결과이다. 이것은 인간 관계와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삶의 다른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활력이 떨어지게 만들고, 마침내 피곤하고 분노하고 실망한 사람들이 가득찬 사회를 만들어낼 뿐이다. 프란치스칸은 현대 경제 제도의 이런 모순들을 바로잡도록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노사 양측에 건전한 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반영될 때, 노동 현장은 사람들의 창의력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장소가 될 것이다.


7. 가치가 종종 과도한 이윤 추구에 묻혀버리고 만다. 이윤은 악이 아니다. 사업주는 투자에 대하여 정당한 이윤을 얻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이윤 추구는 용납될 수 없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가 밑바닥으로 떨어져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프란치스칸이 파산 선고에까지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삶에 활력을 주고, 우리의 고결함을 유지시켜 주는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업의 문제에 창조적인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다.


우리의 역할은 물질을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육화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생활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을 우리의 삶 안에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모든 피조물 안에 거처하신다. 우리는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존중을 받아 마땅하며(1고린 3,16~17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머물고 계신다.


프란치스칸은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지 않은 천사들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분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작품인 피조물을 너무 쉽게 떼어 놓는다. 창조된 이 세상은 현명하고 소중하게 보존해야 할 선물이다. 다만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청지기일 따름이다.


8. 프란치스칸의 기업윤리는 예수님의 복음과 일치하여야 한다. 사람이 생산된 제품보다 더 중요하고, 자비가 경쟁보다 더 중요하며, 창의력이 장부정리보다 더 중요하다. 따라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이윤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9. 이 사회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두 간격이 있고, 세계적으로는 경제적인 남북현상이라는 두 가지 경제 체제가 있다. 이 지구상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한다.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정의의 문제에 대해 적절한 이해력과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단순한 자선은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활발하게 관심을 갖고 그 격차를 줄이는 데 참여해야 한다.


10. 우리는 가계의 수입 지출을 맞추기 위해 더 빨리, 더 늦게까지 일하며, 더 많은 직업을 갖고 있다. 시장은 욕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생필품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축적해 놓은 물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충분히 갖지 못해 두려워하거나 너무 많아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돈으로 무엇을 사는지 말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가치관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칸은 자기 돈을 사용할 때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복음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11. 수세기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들은 물질적 자원을 서로 나누어왔다. 성서에서 보면 하느님은 백성들에게 만나를 제공하였는데(탈출기 16,13 참조) 너무 많이 거두어 남은 것은 썩어버렸다. 비축은 성공하지 못했다(탈출기 16, 20~21 참조). "네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 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롭기 때문이다."(찰출기 22,25~26 )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백성들을 먹이신다(마태 19, 23~24 참조).


시대를 통하여 가톨릭은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아왔다. 고아원은 물질적 도움에 의지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바오로가 초대 교회에서 헌금을 모집한 이래, 돈과 음식의 수집이 교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1고린 16,1 참조). 이러한 예는 프란치스칸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공한다.


12.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 받은 사람은 그것을 자신이 사용하든가 누구에게 주든가는 그 사람의 자유이다. 그럴 수 없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고 부담일 뿐이다. 우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을 때 쓸데 없이 주지도 않지만 받는 이에게 기쁨을 주고자 한다. 선물을 할 때는 답례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프란치스칸은 조건 없이 자유롭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 각 개인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그 선물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질적인 것들도 혼란스럽지 않게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13. 프란치스코회 형제회 안에서 회원들은 공동기금에 기부를 한다. 창의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기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지원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이가 실직당했을 때 그를 도울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봉사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의 정신으로 우리의 기금을 함께 나누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새 제품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사용한다면 공동기금은 프란치스칸 사도직의 재정적인 필요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14. 프란치스칸은 예술적인 재능을 사회와 함께 나누도록 격려한다. 우리는 시, 도자기, 연극, 옷감, 음악 등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세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창조된 세상과 우리의 교감은 상상력의 자극제가 된다. 우리가 인류의 정신세계와의 관련성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한 예로 음악은 다른 이들을 감동시키는 내적인 리듬을 표현한다. 이처럼 프란치스칸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낼 때에 사회의 훌륭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15.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그 모든 것을 당신 슬기로 이루시어 세상이 당신의 조물들로 가득하나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께 바라나이다. 그들에게 제 때에 먹이를 주시기를, 당신께서 그들에게 주시면 그들은 모아들이고 당신 손을 벌리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베불리나이다.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면 그들은 소스라치고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편 104, 2427~30)


16.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노동이 사회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가정에서도 가족들의 노동은 활력과 창의력을 요구한다. 프란치스칸에게 있어 이러한 노동은 인생에서 우선 순위를 갖는다. 그 대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반응과 사랑하는 자녀들의 성장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이 일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은 노동이 의미하는 바의 중요한 부분이다.


17. 노동과 창의적인 재능은 우리가 바라는 좋은 것을 언제나 성취하지는 못한다. 때때로 좋은 일을 하고자 할 때에도 실패를 한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니 말입니다."(로마 7,15)


프란치스칸은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상황 때문에 실수하기도 쉽고 옆으로 비껴가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복음은 우리에게 진실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부른다. "선하신 하느님이 그대를 회개로 이끌고자 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의 풍부한 호의와 인내와 관용을 얕보는 것입니까?"(로마 2,4) 내적 회개는 평생동안 계속된다. 때때로 근본적인 회개가 있게 될 것이고 이러한 개인적 변화가 다른 이들에게는 선물이 된다.


노동은 우리의 재능으로 창조에 동참하는 행위이며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의 노동은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감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우리가 젊었을때는 매우 창조적이며, 충만한 에너지로 새로운 일을 시도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하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노동은 개인적인 능력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긍정적으로 그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하느님은 창조사업을 계속하시며 과정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봉사를 위한 새로운 생각과 산물을 만들어내는 데 우리의 재능이 사용될 때 하느님은 기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창조사업의 청지기로서 하느님과 함께 일할 특권을 받았다. 노동은 이 땅을 돌보며 이 땅의 사람들을 부양하도록 도와주며, 사람들이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살아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경제제도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어떤 경제체제와도 대항한다.


노동은 우리의 신분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을 드러내는 방법일 뿐이다. 우리의 가치는 노동에 달려있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체가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삶을 뜻하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니다. 하느님과 창조 앞에 당당히 서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창조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육체, 마음, 정신, 영혼의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노동이 기도의 정신에 방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떠나시오, 파리 형제, 당신은 당신의 형제들의 노력을 좀먹고 하느님의 역사에 나태하고 있으니 말이오, 당신은 무력하고 게으른 수벌과 같소. 아무것도 모으지 아니하고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일벌들의 수고와 소득을 소비하고 있으니 말이오."(완덕의 거울 24).


여가

휴식은 우리에게 노동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일에 빠져있을 때, 인간성의 중요한 어떤 것을 잃게 되며, 우리와 가까운 가족과 멀어지기도 한다. 누구든지 일에 맹목적으로 빠질 수도 있으며, 모든 시간을 일로 채울 수도 있다. 또한 진지한 생각을 피하기 위한 탈출구로서 사용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자녀나 배우자 또한 친구들의 사랑을 물건처럼 사려고 한다. 이러한 거짓된 관계는 관계를 해친다.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는 재산이 많다고 해서 깊어지지 않는다. 공동체 생활은 우리가 회비를 많이 낸다고 해서 꽃피우는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을 일로 혹사시키는 것은 가족에게 다가가는 것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녀들은 사랑하는 부모가 함께 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신용카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처럼, 여가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꽃 피우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의 정신을 받아들여 일로부터 안식을 취해야 한다.


일 

예수님, 저는 일 속에서 

쉽게 제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립니다. 

일은 저의 은행통장을 부풀려 줄뿐만 아니라.

저를 가치 있게 합니다.

저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저는 일에 의존합니다. 


내가 연약하게 될 때, 

병으로 일자리에서 쫓겨날 때,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을 때,

저는 절망하여 나의 존재와 가치를 의심합니다.


내가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당신의 사랑이 약속되었음을 알게 하소서.

당신 사랑 때문에 나의 존귀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내가 행하는 바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때문에 내가 진정 소중함을.


예수님 그러나 그것은 어렵기에

당신의 사랑을 말해 주소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나를 친구라고 하셨으니,

잊지 마시고 당신과 함께

편안한 쉼에 들게 하소서.


아멘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16조

회원은 노동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고, 창조와 구원 업적 및 인류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해설

재능의 다양함은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부분이다. 목수는 가구를 짤 도면을 갖고 합판 앞에 선다. 그 도면은 단순히 종이며 목수 마음 안에는 나온 꿈이 그려져 있다. 노동은 도면 위에 그려진 계획을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가구를 짬으로써 현실로 옮겨간다. 목수의 솜씨로 인해 나무는 서서히 그 모양을 바꾼다 서랍과 옆면들이 모아지고 문들과 벽면이 합쳐진다. 목수의 재주를 통해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옻을 칠하고, 도장을 하여 목수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가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이가 조립직에 근무한다. 그 직무는 매일 반복되어 싫증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장는 새 제품을 만드는 팀의 일원으로 일의 상호 관계성은 그에게 만족을 가져다준다. 팀의 각 멤버는 자신의 노고를 알고 있으며 그 노고에 대하여 평가를 받는다. 노동 환경은 우리의 내적 동기에 변화를 준다. 노동은 하느님의 계속적인 창조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엄마는 하루 온 종일을 어린 자녀들과 함께 보낸다. 엄마는 그 자녀들을 사랑하고 가끔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보고 창조의 신비에 대해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론 집안 일이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때때로 멈마는 자녀들과 즐거워하기도 하고 자녀들에게 얽매인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부모로써 겪는 모든 결과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녀 남편이 일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남편은 직장 때문에 자주 자리에 없다. 어떤 때는 자녀 양육이 힘들고 실망스러워 직업을 갖고 싶은 유혹이 스며들 때도 있다. 청소년들과의 교류는 항상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 일은 상당한 내적 사랑과 의무를 요구한다.


거리를 배회하거나, 이력서들을 제출하는 것, 직업 소개소를 드나드는 것이 실업자들의 일과이다. 감원이나 기술 부족 혹은 복합적인 면이 실업의 이유일지 모른다. 나와 있는 직종들이 개인적인 기술에 맞지 않거나 임금이 실업자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때론 저임금이나 흥미 없는 직종들이 제시된 직종의 전부일 수 있다. 이런 길을 계속해 가는 것은 강도 높은 인격을 필요로 한다. 직업을 찾은 것은 어렵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절망감이 십게 찾아든다. 


노동과 실업상태를 구별하는 예는 복합적이다. 프란치스칸은 두개의 상황들이 꼭 같을 수 없음을 안다. 회칙은 노동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우리 대부분은 직업을 갖고 있는 한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이 선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노동은 우리의 재능과 직업을 합친 선물이다. 우리는 변화하는 작업장 안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재주를 다듬고 계발한다. 우리는 작업장의 필요에 맞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계발해야 하며, 우리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도 해야할 일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세상 안에서 행해지는 지속적인 창조를 함께 한다. 우리는 지구의 자원들을 개발하고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좋은 청지기들이 된다. 우리의 상상력은 사람들에게 봉사할 새로운 제품들을 창조해 낸다. 우리는 오래된 물건들을 재사용할 방법들을 찾으며 또 이미 사용한 물건들을 처리하는 방법들을 찾는다. 프란치스칸도 모든 사람들과 같이 노동과 근로자들을 존중하는 내적 태도들을 계속하여 계발해 나아간다.


유언 20~30

나는 손수 일하였고 또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들도 올바른 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일을 배워야 하고, 일의 보수를 받을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며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서 일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의 보수를 받지 못할 때에는 집집마다 동냥하면서 주님의 식탁으로 달려갑시다." '주님이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인사를 주님이 나에게 계시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일을 하도록 권고한다. 우리의 손으로 노동을 하는 것이 땅을 만지거나 또는 컴퓨터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을 사용한다. 우리가 어떻게 일해야 좋을지 모를 때 프란치스코는 배우도록 권고하신다. 그러한 충고는 현대의 근로 현장에 아주 적합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일이 없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 사회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도움을 제공한다. 개인 기관들도 일이 없을 때 그러한 도움을 찾는다. 우리는 도움을 주는 이들을 조용히 축복해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께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노동의 영향력


노동은 우리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지만.

노동은 고역이기도 합니다.

노동은 창조적일 수도 있지만,

노동은 한없이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만,

노동은 우리를 고무시킬 수도 있습니다.

노동은 봉사일 수도 있지만,

노동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은 노동이 진정 존중되어야 함을

창조와 구원의 한 부분임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기쁜 일임을

새로운 확신으로 받아들입니다.


<프란치스칸 공부>

십자가의 길

프란치스칸에게 십자가의 길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분명한 사렁의 표지임을 안다. 예수께서는 고통과 죽음 가운데서도 성부께 충실하셨다. 프란치스코는 그러한 사랑을 자신의 삶의 모델로 보았다. 십자가의 길은 프란치스칸의 전통적인 기도이다. 이 기도는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생겨났다. 십자가의 길 '처'수는 일곱에서 서른 일곱까지 다양하였다. 포르토 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1751년 선종)는 자신의 설교 여행 중에 이 기도를 보급하였다. 1731년부터 1751년 사이에 그는 570종의 십자가의 길을 유럽의 여러 지방에 보급했다.


현제 우리의 14처는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고통받는 구세주께 큰 사랑으로 응답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구세주와의 친교를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예수의 사랑과 육체적인 고통 모두을 체험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수난에 대한 그의 봉헌은 십자가의 길을 포함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십자가의길의 없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의 핵심인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프란치스코의 삶 안에서 소중한 것이었다.


십자가의 길에는 15처를 추가할 합당한 이유가 있으며, 곧 '부활'이다. 이 15처의 기도는 예수의 수난, 죽음과 부활이란 파스카의 신비에 이르게 한다. 프란치스칸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난하신 예수께 드리는 찬미의 다른 방법으로써 봉헌한다. 이는 예수의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복음에 대하여 충실하려는 우리의 희망을 알게 한다. 


<토의 주제>

1. 오늘날의 직업을 살펴볼 때 프란치스칸이 일을 찾는데 어떠한 기술들이 가장 필요한가?

2. 정보 시대가 당신의 삶에 주는 영향은 무엇인가?

3. 노동이 우리를 비인간화시키지 않도록 무엇을 할 수 있는가?

4.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건강한 프란치스칸 삶의 일부가 되는지를 설명하여 보라

5. 이 장에서 '공동기금'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배웠는가?

6. 프란치스코는 노동에 대하여 어떻게 느꼈는가? 노동에 관하여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조언을 하겠는가?

7. 우리의 삶 안에서 여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성서묵상>

+탈출기 20,8~11

위의 성서 내용이 여가의 필요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권장하는가? '안식일'이 어떻게 평등을 불러일으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