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18장 평범한 성서인물들 그리고 우리

Margaret K 2019. 4. 12. 18:51

프란치스코처럼 


제18장 

평범한 성서인물들 그리고 우리



성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수 백년이 흐르는 동안 비범한 이야기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실제의 이야기로 믿기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같이 생각될 수도 있다.


전설과 이야기들은 비범한 규모로 성장 발전해 왔지만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온갖 인간적인 고난과 기쁨을 겪은 사람들이다. 모세에서 마카베오에 이르기까지 요셉에서 유딧까지, 에스델에서 에제키엘까지, 이들 모두는 구원의 역사를 향해 걸어갔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1. 하느님은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 계시를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적 여행길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시해 준다. 아브라함은 고향 땽 우르에서 대가족과 재산을 누리며 만족하게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늙은 나이에 이른 그는 가족과 함께 계속 안정된 생활을 누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심으로써, 늙은 아브라함은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것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사태를 맞이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창제 12,2) 가라고 명했다. 어디라고 방향도 일러주시지 않은 채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낯익은 고향을 버리고 이름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2. 훌륭한 영성은 비록 방향이 막연할 때라도 하느님을 믿고 나아간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다. 식솔을 거느리고 가진 것을 모아 우르를 떠났다. 장차 나아갈 방향은 하느님께서 손수 일러주실 것으로 기대하면서 그는 단순히 길을 나섰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밝혀 주시리라 믿고 의지하였다.


3.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설 때 우리의 시야는 넓어진다. 우리는 세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여행하는 동안 많은 이방인들과 접촉하였다. 그를 환대해 준 이들도 있었고 불친절한 이들도 있었다. 아브라함은 평화로이 살기 위하여 이방인들과 협상을 벌여야 할 때가 많았다. 그가 만약 우르에 그대로 살고 있었더라면 이런 일들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4. 거룩한 사람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두려움에 맞서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 이집트 왕은 아름다운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아내더러 자기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도록 일러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집트 왕이 사라를 차지하려고 자기를 죽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도의 거짓말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집트 왕에게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어 사라의 정체를 알게끔 하셨다. 결국 이집트 왕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벌책을 가함이 없이 아내를 돌려주었다.


5. 믿음으로 향한 우리의 여행길에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하느님께서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고 부부는 늙어 가고 있었다. 사라는 그즈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께서 둘 사이에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사라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아브르함은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하느님의 사자가 말하기를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이루지 못하실 일이 없다고 했다. 그 후, 한 해가 가지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을 보았다.


6. 하느님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삶을 택해 주신다. 


태어난 아들 이사악은 늙은 부모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제 그 전과는 사뭇 다른 요구를 하셨는데, 이는 그 전의 약속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 제물고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막힌 일을 당한 아브라함은 틀림없 이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이사악이 희생 제물로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 하느님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이루실 수 있단 말인가? 제단을 향하여 가던 중 이사악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것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게끔 배려해 주셨다. 하느님은 단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기막힌 시험이었다. 


7. 곤경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하느님께 시한부 행동 따위를 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두려움보다는 신뢰를 원하신다.


평범한 사람 아브라함은 삶의 시련에 평범한 인간으로서 응답하였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의 모든 인간적 판단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요구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아브라함은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당하고서도 줄곧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 다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가 죽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불신으로 흔들리기는커녕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수도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로마 4,19~21)


유딧은 한 평범한 여인이었다. 남편 므나쎄가 일사병으로 죽은 후 유딧은 과부로 살고 있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믿음이 깊은 여인이었다. 때는 아시리아군의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가 도성을 포위하고는 물줄기를 점령하여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목마르고 지친 끝에 항복해 오도록 지연 작전을 펴고 있었다. 포위된 지 34일이 지나자 이스라엘 진영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자 원로들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닷새만 더 버티어보고, 만약 닷세 안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면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노예가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 훌륭한 사람들은 훌륭한 조언을 해준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 안내 받기를 두려워 한다.

원로들의 이 같은 결정을 전해들은 유딧은 대경실색하였다                                                                          . 그리하여 원로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와 자리를 같이 한 다음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유딧은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기에 원로들은 그녀의 말에 귀기울였다. 유딧은 원로들에게 하느님께 닷새 안에 이래달라 저래달라 요구한 사실에 자기는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주 우리 하느님의 뜻을 담보로 잡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협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고, 인간과 달리 부추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에게서 구원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우리를 도와 주십사고 그분께 간청합시다. 당신 마음에 드시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유딧 8,11~17 참조)


9. 하느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해나갈 수 있다.

유딧의 조언에 대한 원로들의 반응은 성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우찌아가 유딧에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한 말은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이니, 그대의 말을 반박할 자 아무도 없소... 그대는 신심깊은 여인이니 이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저수 동굴들이 가득 차게 비를 내려 주셔서, 우리가 더 이상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오."(유딧 8, 28,31)

 유딧은 기도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유딧은 적군이 포위망을 풀어 버리도록 필요한 조처를 단행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 유딧은 임무를 완수했고 도성은 구원되었다.


10.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맛설 수 있게 해준다.

유딧이 보여준 용기와 위엄은 우리를 매혹한다. 그처럼 두려움 없는 용기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우리네 생각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용감하게 자기나라 백성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 평범한 여인이요 과부였던 유딧의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1. 자신에게 정직하라. 죄와 실책을 인정하고 이를 이겨내도록 하라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와 다윗 왕의 불륜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또 다른 안목을 제시해 주고 있다. 다윗은 정상에 오른 권력으로 인하여 비뚤어진 생각을 품었다. 자기는 법 위에 올라앉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신은 우리야를 전투가 심한 곳으로 내보내어 죽게 한 후에 우리야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꾸짓었다. 나단은 다윗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양도 소도 많았고, 한 가난뱅이에겐 새끼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는데, 새끼 양은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찾아오자 주인은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가난한 집 새끼 양을 잡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몹시 분개해 마지않았다.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나단은 한 순간 잠자코 있다가 다윗 왕에게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2 사무엘 12,7)


12. 성서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은 오늘 우리의 생활에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귀기울여 듣고 삶을 바꾸어라

'다양한 생활환경'에 따라 충실히 살아나감으로써 우리는 복음말씀을 생활화 할 수 있는 갖가지 기회를 맞이한다. 결혼한 부부들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생활환경을 대하게 되며,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들의 생활환경도 다르고, 신품 받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겪는 어려움 또한 서로 다르다. 빈민촌에서의 봉사활동과 시내 한복판에서의 봉사활동이 같을 수 없다. 


13. 복음말씀에 어긋나는 사사로운 의견으로 예수님께 맞서지 않도록 조심하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 가셨다. 거기에는 십팔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바로 병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회당장은 분개하여, 병 고쳐주는 일은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 당당히 맞서 일어나셨다


14. 완전무결할 사람인양 행동하는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예수께서는 그런 식으로 뻐기는 태도를 통렬히 꾸짖으신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위선자들! 당신네 누구나 안실일에도 소나 나귀는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가서 물을 먹이지 않소? 이 부인은 아브라함의 딸인데, 보다시피 사탄이 무려 십 팔년 동안이나 묶어 놓았소,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속박에서 풀려나지 말았어야 한단 말이요?" (루가 13,10~17)


15. 신앙에 대하여 언제나 새로이 배울 수 있는 마음과 정신의 자세를 취하라. 우리가 평생을 배워도 못 다 배울 만큼 하느님의 신비는 무궁무진한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신앙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자라면서 배움을 멈추어 버릴 때가 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의 제한된 지식은 믿음의 여정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믿음이란 우주 젠체의 신비보다 더욱 신비로운 것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이 신비 속으로 몰립해 들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배움의 문을 닫아 버린다는 것은 신앙과 영적 성장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루가복음 11,37~52를 읽어보자, 예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는지에 대하여 짐작이 갈 것이다.


16.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주저말고 예수님께 청하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요구에 세세히 귀를 기울이신다. 야이로가 와서 어린딸이 다 죽게 되었으니 집에 와서 낫게 해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당장 그를 따라 나서셨다. 집에 도착하시자 소녀는 즉시 일어났고 병이 나았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부모더러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리고 하셨다(마르코 5,41~43)


17. 아버지 하느님께 보이신 예수님의 충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에수님과 복음말씀에 충실히 따르도록 하기 위한 모범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빠(Abba)라 부르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밀접하신 분이시다. 그러한 긴밀감은 예수님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이 소중한 유대관계이다. 만약 아버지 하느님과 떨어져 버린다면 예수님으로서는 핵심적인 그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삶의 순간 순간마다 아버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셨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도 마지막 응답은 성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죽음의 위협도 예수님을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할 수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충실하셨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제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17,7~8)


18. 배움은 단순히 개인적 성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배움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함께 갖다 준다

제자들은 종종 예수님의 가르침을 즉석에서 금방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예수님은 꾸준히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세월이 지난 후에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에 따라 기록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한 번은 예수께서 배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사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헌것을 꺼내 주는 집주인과 비슷합니다."(마태오 13,52) 배움이란 평생동안 꾸준히 계속되는 것이다.


19.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루가복음(6,27~36)에서 말씀하신 그러한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움, 저주, 비판 등의 사슬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독특한 존재이다. 우리는 재산을 가지면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어떤 업적을 이루면 명성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남들도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녔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우리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면서 오로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세상을 환하게 제일 잘 보려면 신체의 꼭대기 머리위로 올라서야 할 것이다. 그렇게 호언장답하는 머리통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면 참으로 막강한 힘이 필요할 것이다. 복음말씀은 이 같은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깨달음을 얘기해 주신다. 


루가 6,27 이하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은 축복하여 헐뜯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오. 빰을 때리는 사람에게는 다른편 뺨마저 내밀고,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마시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한테서는 되찾으려 하지 마시오.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똑같이 사람들에게 해 주시고.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죄인도 사랑해 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잘해주는 사람한테만 잘해준다면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죄인도 그만큼은 합니다.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죄인도 고스란히 되받을 성싶으면 자기네끼리 꾸어줍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잘해주며 아무것도 바라지말고 꾸어주시오. 그러면 받을 상이 클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안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꺼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


20.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고,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둘다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가혹한 죽음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게서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슬픔에 잠길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군중이 모여들어 혼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먹여 주고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리고 나서 군중을 보내신 후 따로 시간을 가지셨다(마태오 14,13~23) 예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혜아려 이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다. 


21. 게으름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가는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선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이 피로로 탈진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도록 하시오"하고 이르셨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마르코 6, 31) 군중은 제자들의 휴식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군중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그들을 먹인 연후에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셨다. 아마도 제자들은 그와 같은 신체적 노동으로 대가로 건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진 능력으로 우리는 복음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서를 깨닫게 하신다. 하느님으로 부여받은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복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과, 복음말씀이 우리에게 하라고 권고하는 일이 언제나 같은 것일 수는 없다. 복음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강력한 동기유발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복음말씀이 요구하는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부족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성서에는 부족한 제자들에 관한 실제적 경험담이 많이 실려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부족함 속에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시어 전과 다른 사람으로 우리를 탈바꿈시킨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능력을 내려 주신다.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며 더러운 영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마르코 6,7) '예수께서 그들을 깨우쳐주며 성서를 알아듣게 하셨다." (루가 24,45) "그대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사도행전 1,8) "내 하인들과 하녀들에게도 그 날들에 내 영을 쏟으리니 그들 역시 예언을 하리라."(사도행전 2,18) "그러자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소, 그러나 내가 가진 이것을 주겠소,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사도행전 3,6).


요약

성서는 믿음으로 향한 길 안에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대로 따르라! 성서말씀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 프란치스코의 성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찾는 평화를 내려 주시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다리고 계신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시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으시오."(요한 14,1) '나는 평화를 남겨두고 갑니다. 내 평화를 줍니다.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또한 겁먹지 않도록 하시오."(요한 14,27)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그대들 안에 있고 그대들의 기쁨이 가득 차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15,11)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7)


우리는 모두 함께 복음말씀의 부르심을 완성해야 한다. 성서의 인물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사업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이기를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물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우리는 확신을 갖고 믿어야 하겠다.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여행지침

1. 하느님은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 계시를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 훌륭한 영성은 비록 방향이 막연할 때라도 하느님을 믿고 나아간다

3.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설 때 우리에겐 시야가 넓어진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은 만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4. 거룩한 사람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두려움에 맞서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5. 믿음으로 향한 우리의 여행길에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

6. 하느님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삶을 택해 주신다.

7. 곤경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하느님께 시한부 행동 따위를 정해 놓으려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두려움보다는 신뢰를 원하신다.

8. 훌륭한 사람들은 훌륭한 조언은 해준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 안내 받기를 두려워 마라.

9. 하느님을 신뢰함으로써 어려운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

10.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현실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게 해 준다. 

11. 자기 자신에제 정직하라. 죄와 실책을 인정하고 이를 이겨내도록 하라!

12. 성서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은 오늘 우리의 생활에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귀기울여 들으시고 삶을 바꾸어 보라!

13. 복음 말씀에 어긋나는 사사로운 의견으로 예수님게 맞서지 않도록 조심하라.

14. 완전무결한 사람인양 행동하는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뻐기는 태도를 통렬히 꾸짖으신다.

15. 신앙에 대하여 언제나 새로이 배울 수 있는 마음과 정신의 자세를 취하라. 우리가 평생을 배워도 못 다 배울 만큼 하느님의 신비는 무궁무진한 것이다.

16.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주저말고 예수님께 청하라.

17. 아버지 하느님께 보이신 예수님의 충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복음말씀을 충실히 따르도록 하기 위한, 충실성에 대한 모범이다. 

18. 배움은 단순히 개인적 성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배움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함께 가져다 준다.

19. 우리가 자유롭게 위해서는 예수님이 루가 복음(6ㅡ27~ 36)에서 말씀하신 그러한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움, 저주, 비판, 등등의 사슬에 묶어 있을 수밖에 없다.

20.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둘 다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21. 게으름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가는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선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22.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진 능력으로 우리는 복음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서를 깨닫게 하신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복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으로 충만한 말씀은

일상적인 삶의 테두리를 뒤엎는

우리 힘에 벅찬 요구를 하십니다. 


하느님께 바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영으로 충만한 성서 말씀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온갖 가능성으로 넘쳐흐르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해져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렵니다.

당신을 믿는 믿음 하나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10조

회원은 성부께 당신의 의지를 의탁하신 예수님의 구원자적 순종을 본받아, 다양한 생활 환경에서 각자의 처지에 따르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회원은 곤란과 박해 중에도,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간ㄴ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소들 따라야 한다. 


해설

순종이란 현대 사회에서 인기 있는 화제가 아니다. 우리는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개인주의와 자유를 좋아한다. 순종이 품격 있는 미덕이라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상관이거나 부하이거나 각자의 위치에 따라 순종의 개념도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순종은 사랑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사랑의 대상에게 기쁨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도 더 한층 강렬해진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 자신에게는 신경을 덜 쓰는 대신 '남'에게 더욱 몰두하게 만든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더욱 집중적으로 귀를 기울이다. 사랑은 온 세상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가난한 사람들의 회침을 들을 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이웃사람의 외침을 들을 때, 창조의 놀라운 광경을 접할 대, 축하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응답한다. 귀를 기울이고 이에 응답하는 것은 순종의 핵심이다.


순종은 귀기울여 듣는다. 왜냐하면 관심을 갖고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순종은 귀기울여 듣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성서에 파고 든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귀기울여 들음으로써 우리는 맞갖은 응답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과 뜻을 이행해 주는 것은 순종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구약성서는 불충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께순종할 것을 촉구한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대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온 세상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왕국이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탈출기 19,3~5)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낮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사무엘 상 15,22)


프란치스코 성인은 애정 어린 순종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부르심에 순종으로 시작된 그의 응답은 그로 하여금 점점 하느님의 말씀에 깊이 빠져들게 했다. 그리하여 복음말씀에 대한 순종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활태도가 되었다.


프란치스코회 화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충실히 따르며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명심한다. 순종은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이다. 이는 상식을 알지 못하는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신뢰하는 경험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순종이다.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를 키워 나감으로써 성령의 방식을 더욱 잘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순종을 위한 근본자세이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끔 이끌어 주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인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지만 혼자서는 길을 잃기 일쑤이다.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신앙공동체와 함께라면 우리는 안심하고 나아갈 수 있다. 성령을 향하여 나아가는 훌륭한 신앙공동체가 갈 길의 방향을 잡아줄 때 우리는 탄탄한 신뢰감을 갖고 따라가게 된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과 같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이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리고 수그러드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느 하느님을 알게 되고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의 손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고집이 세고 감정이 격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세를 취하도록 당부하심을 엿볼 수 있다.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그대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허리띠를 띠고 원하는 데로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나 늙으면 두 손을 내밀 것이요, 다른 이가 허리띠를 메어 주고는 그대가 원하지 않는 데로 데려갈 것입니다."(요한 21,18)


순종과 맞서 싸우게 되면 우리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사랑은 우리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믿고 그분께 수그러들게끔 해준다. 우리 사랑의 대상이신 그분에게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귀를 기울인다. 사랑의 대상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기에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세상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처한 생활환경에 충실 할 것이다. 회피라는 말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우리가 사는 그곳에 있다. 이는 우리가 복음말씀을 이행하는 곳이다. "당신의 생활환경'에 대한 당신의 응답은 바로 그 상황 속에서 당신이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결정 지워준다.


우리는 언제나 프란치스코회 회원이다. 우리는 언제나 복음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우리의 성소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정성껏 하시오.... 기도에 전념하시오, 감사하고 기도하며 깨어 있으시오."(골로사이 3,23;4,2)


복음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복음 전부를 받아들이고자 할 때 우리에겐 외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사람들은 복음에 입각한 우리의 생활방식을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가 권력이나 특권, 혹은 재물과 맞서 도전하게 되면 우리는 인기를 잃게 된다. 우리는 여러모로 박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면 넉넉합니다.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들 하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겁내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마태오 10,2, 24~25. 28).


이토록 듣기에 쓰디쓴 말씀을 들려 주셨던 그분을 붙잡아 죽이고자 여러 사람들이 갖가지로 노렸던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따라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수께서 받으셨던 대우를 받는다면 이는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박해는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나타난다. 우리는 무시당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우리를 우직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웃도 있다. 성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가족들도 있다. 복음말씀을 따르는 우리의 여정을 후원하지 않는 남편들이나 아내들도 있다. 아이들 또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며 의아해 할 것이며, 이 모두는 고통을 초래한다.


마태오 11, 16~19

이 세대를 무엇에다 비길까? 장터에 앉아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소리 지르며 노는 아이들과 같구려, '우리가 피리를 불러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더라. 우리가 곡을 하여 주어도 너희는 가슴치지 않더라.'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들 하더니,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까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벗이로구나'라고들 하는구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이 그 행한 일들로 드러났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언제나 항상 충실하고저

함께 모이는 우리 프란치스칸

둘이나 셋이 모이는 순간순간에

예수님 우리와 함께 계시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모욕과 멸시를 받을지라도

결코 외면당하지 않을 수있는

우리는 프란치스칸,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사람들,

에수님 당신이 계시옵고 

성령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옵니다. 아멘.



<프란치스칸 공부>

기도하는 사람,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프란치스코 성인도 예수님처럼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하여 고독을 찾았다. 그는 여기저기에 있는 동굴을 찾아 은수 생활을 하곤했다. 라베르나는 그가 신비적 환상을 체험했던 특별한 곳이다. 그는 결코 일 때문에 기도하는 마음과 신심생활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형제들에게 당부하곤 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점점 더 침묵 속으로 흘러들었으며, 그의 기도는 찬미와 감사로 충만하였다. 그의 기도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이라는 향기로 넘쳐 났다. 그 누구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심을 대신할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 안에,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심에 그는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넘쳐나는 기도는 그가 숨쉬는 공기였다.

클라라 또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임하고 계심을 느끼게끔 해주는 존재였다. 예수님과의 친밀감은 그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클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프라라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 12~13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체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에 두고,

그대의 전 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


잔꽃송이 15장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언젠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황홀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당시 아시시 사람들의 눈에는 성인이 살고 있던 작은 마을 포르치운콜라에 불이난 것 같았다. 그래서 달려왔던 그들은 그 불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에게서 발하여 하느님께 향한 크나큰 사랑의 천상적 상징임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그처럼 밝게 활활 타게 하소서.


<토론 주제>

1. 아브라함과 유딧의 삶에 대하여 묵상해 볼 때에 당신은 그들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는가?

2. 영적 여행길에서 안내를 찾는 일은 어떤 이유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가?

3. 듣기를 거부하거나 생활태도를 바꾸려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4. 예수님의 어떤 점이 가장 당신의 마음에 드는가? 왜?

5.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말씀을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방식을 통하여 생활화 할 수 있게끔 해주는가?

6. 왜 순종은 프란치스코 회원에게 중요한 품성인가?

7.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10조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써 보시오.


<성서 묵상>

+ 요한 묵시록 3,1~8

위의 성서 구절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키워주는가? '문을 열고 닫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가? 위의 성서구절은 어떻게 당신의 삶에 와 닿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