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 19장 함께 가는 복음적 생활

Margaret K 2019. 4. 12. 18:52

프란치스코처럼 


제 19장

 함께 가는 복음적 생활



불가능한 꿈

몇 년 전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1.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매일 충분한 사랑을 경험할 것

2. 하루 중에 반드시 휴식을 취하여 취미 할동 시간을 가질 것.

3. 아무리 작은 성취감이라도 매일 찾아서 느낄 것

4. 자기 단련을 잘 하여 일할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이 지나면 일이 끊나지 않더라도 그만 둘 것,


이와 같은 충고들은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중요하다. 선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도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잊어버린다. 그들도 기력이 떨어질 수 있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불행과 고통이 자신의 신앙을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또한 질병과 병약함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칸도 인간이다. 우리의 삶이 변화함에 따라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려는 우리의 방식도 달라져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나, 또는 공동체 전체로써 우리는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인생과 성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우리가 이 시대에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13세기 당시의 통찰력으로 성인의 시대를 살았듯이, 우리는 21세기의 통찰력으로 우리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들이 요즘 현대인들에게 다가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시대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도 없고 나변환자가 흔한 것도 아니다. 요즘은 컴퓨터와 펜티엄  칩, 우지 탐험 프로젝트, 의료시술의 발전, 폭력, 그리고 빈부간의 격차 등이 관심사이다.


현시대는 권위주의가 약해지는 반면 개인주의화 되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타인이나 인간존재보다 위대한 그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잃고 있다. 오늘날엔 온갖 종류의 상담, 치유 모임들이 있다. 또한 오늘날에는 기존의 교회체제나 사회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신앙심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이들도 있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대로 쓰고 낭비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지구의 남용을 막고 우리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동양으로부터 명상법과 다른 능력들을 배움과 동시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던 크리스천의 뿌리를 잃어비리기도 한다. 또한 각종 성격심리 이론과 심리검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려 하고,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동안 사람들은 각각 자기 할 일만 하려 든다. 사람들은 교황의 발표문을 자신의 생활방식에 맞을 때까지 이리저리 분석하고 비판한다.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자신의 영향력을 다시 되찾으려하고,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성소는 많아지는 반면 수도 성소와 사제 성소는 점점 즐어들고 있다. 안락사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는 반면, 보속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에이즈는 점점 더 확산되어가고 있고,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사회의 배척은 점점 더해 가고 있다. 성서 근본주의자들이 이들을 단죄하려만 들기 때문에 대화란 불가능하다. 과거 전통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별로 효과가 없다. 그러나 성실과 정직함은 아직도 그 영향력이 크다.


이제 모든 것을 '재정립'할 때가 왔다. 우리는 구시대적인 프란치스칸 정신을 현세에 끼워 맞출 수도 있지만,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어 현대적 삶에 맞게 바꾸어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전통을 소중히 여기어 현대인들이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무산시키는 일이다.


20세기 말 레바논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마틴 젠코 신부가 어느 회의에서 '모세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그 자손의 하느님이다"라고 응답하시며 하느님은 모세가 세상에 있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는 이제로부터의 하느님이다. 나는 너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너와 함께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젠코 신부는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의 과거는 여러분 자신을 형성하는데 중요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또는 한 공동체로서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 될지를 한정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를 볼 것

오늘날 필요한 여러 덕망 중에 '희망'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서로 상반되는 이치와 가치관에 둘러싸여 있고, 특히 복음적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서로 갈등상태에 있을 때가 많다. 우리가 악과 분열에 늘 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칸은 세상의 가치관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도 당시의 사회 속에 악한 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절망하거나 좌절해버리며 단순히 그 사태를 한탄하는데 그치고, 최후의 심판날을 예언하는 이들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고 '희망의 예언자들'이 되었다. 그들의 인생은 절망보다는 경이로움으로 충만했다. 자만심보다는 믿음으로 가득찼고, 그들 주위에는 사랑이 흘러 넘쳤다.복음이 그들을 이끄는 안내서였고 묵상이 깨달음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인간적이었기에 고통과 절망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가 그들의 꿈과 이상을 강제로 바꾸려는 것을 보아야 했고, 그들을 따르던 이들 가운데 새속적인 이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예지가 모든 프란치스칸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그들을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5) 어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 어둠이 빛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어둠이 자신의 모습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복음은 항상 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의지대로 따르기를 상기시켰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요한 6, 39) 세속적 의무들이 그들의 결심을 시험할 때마다 복음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한 말은 영이며 생명입니다."(요한 6,63) 프란치스칸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인다. 프란치스코는 성서의 말씀에 늘 감명을 받았다. 교회의 권위자들에게는 복음이 요하는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나, 프란치스코에게는 복음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프란치스코는 겸허한 마음으로 복음에 충실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희망과 자신감을 주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시오. 나를 믿는 이는 마시시오. 성서가 말한 대로 '생명수의 강이 그의 배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아서 영이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7~39)


프란치스칸은 성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성서는 단순히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침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에서 요구하는 것에 헌신적이어야 한다. 복음에 대한 헌신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평범한 한 단체가 될 뿐이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서약을 통해 세례의 서약을 더욱 확고히 한다. 그것은 하루도 예외 없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먼저 유대인부터 그 다음 그리스인까지 모든 믿는 이에게 구원이 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로마서 1,16) "그들은 율법교사로 자처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감히 고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율법을 율법답게 선용한다면 좋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1 디모테오 1,17~8),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은 찬양 받으소서. 그분은 큰 자비로 우리를 새로 나게 하시어, 죽은 이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은 갖게 하시고 또한 사라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으며 시들지 않는 상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1베드로 1,3~4)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음 그대로를 전하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죄악투성이인지 알기 때문에 신성한 체 하고 잘난 체 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힘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이 세상에 성령의 희망을 알리려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어둠보다 더 위대한 힘에 의지한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력보다 더 위대한 힘에 의지한다. 우리 각자 안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에 의지한다. 궁극적으로 사랑만이 프란치스칸의 삶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용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힘든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 하느님께 의지하여 인생의 모든 과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는 죽음을 인위적으로 서두르지는 않지만, 죽음의 때가 오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을 준비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든 부부간의 불화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사람들의 성에 관한 선호도를 바꿀 수도 없다.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줄만큼 현명하지 못하고, 무고한 이들이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환시를 볻다고 할 때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의 행동과 무관심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나약함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하느님을 믿는다. 너무 늙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엇던 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비웃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직 믿음뿐이었다. 그 어떤 속세의 해석도 그들의 경우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와 똑같은 의문이 지금도 계속떠오른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과연 있는가?"


프란치스칸은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한다. 우리의 불가능할 것만 같은 꿈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힘을 믿는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이사야 61.1~3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정의의 참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 부르도록 하셨다.


복음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프란치스칸 회칙에 새 의미를 부여한다. '복음의 강력한 힘에 자극받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내적 변화에 의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야 한다. 복음은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회칙 제7조) 오늘날 복음을 따르려는 것은 혁신적인 일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의 뿌리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깊이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복음의 흙 위에 심어서 성령의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혁신적인 내면의 변화는 매일 일어난다. 프란치스칸은 그런 변화를 이야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예지력을 추구해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결코 완전히 보답할 수 없으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우리가 현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기초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처럼 현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똑똑함을 내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깨닫기 위해 탐색을 한다. 그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동등하게 공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른 똑똑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지혜를 얻기 위해 정보를 찾아 나서는 것이며, 더욱 효과적인 전교활동을 위해 이같은 정보를 통해 현시대를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기 위해 묵상을 한다.


집회서 2,1~3

아들아,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말아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할 수 있도록

그분께 매달려 떨어지지 말아라.


프란치스칸은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지을수록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필요함을 알고 있다. 중독증에 깊이 빠진 사람일수록, 결코 포기하지 않는 현명한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물질적인 탐욕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심하게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인한 사랑이 필요하며, 불행이 닥쳤을 때 깊은 사랑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랑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이며 희망을 주는 길이다.


재난의 연속인 이 세상에 우리가 바로 사랑의 불길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기술문명이 하느님을 대체하는 이 세상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개개인의 믿음을 되살리려 하고, 삶의 힘든 과제들로부터 누구나 도피하려고만 하는 이 세상에 우리는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려고 한다.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사이비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 이가 많은 이 세상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인자하신 하느님을 따르고자 한다.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이 세상에 우리는 올바른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려 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비판하는 이 세상에 우리는 더 나은 삶으로 이끌기 위해 비판한다.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자 한다. 프란치스칸은 '죽음의 문화'가 아닌 '생명을 위한 삶의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에수님과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인간보다 위대한 그 힘은 우리의 추진력이 된다. 우리 스스로는 힘이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힘이 있으면 모든 것은 다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하느님이 미리 마련하셨습니다."(에펫 2,10)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에페소 ,320!21)


이를테면 프란치스칸은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지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오해들이 가정생활을 파탄으로 이끌 수 있고, 젊은이들이 또래들로부터 조롱을 받을까 두려워 흔히 올바른 가치관을 던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배우자가 병들면 이전과 다른 삶의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처럼 프란치스칸은 일상의 수많은 상황들이 우리를 한계에 부딪히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한다.


단위형제회는 서로를 지지해 주고 도와주어여 한다. 오랜 시간 투병하는 이의 배우자나 가족은 감옥살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이 될 수 있으므로 단위형제회에서 그런 상황을 알게 되면 서로서로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공동체 가족은 충분히 서로를 도울만한 능력이 있다. 문제는 각자의 힘든 상황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은 서로가 무엇이 필요한지 저절로 알 수 있는 그런 투시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흔히 혼자일 때가 많다. 성공에 도달하는 길은 매우 작은 발걸음 하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한다. 형제회에서 서로 돕고 지지 해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함께 갈 수 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을 열어 보일 때만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사랑으로 충만한 형제회가 어려운 회원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서로 도와주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자신의 문제를 터놓고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이로움

현 세상을 이해함과 동시에 우리는 성서에 나와있는 하느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 나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잡지에서 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모든 것은 다 질서정연하게 보였고, 땅과 바다가 지구라는 행성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하느님께서도 지구를 이처럼 바라보시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구가 이처럼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기를 바라실 것이다.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말이다. 


그 잡지에는 지구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들을 확대시켜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전쟁과 결혼예식 장면, 오염된 환경과 숲 속의 맑은 시냇물의 모습, 죽음과 출생의 장면들, 기쁨과 슾픔의 장면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 하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지구를 남용하기도 하고 존중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우리는 생명을 중시하며 살기도 하고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느님의 이 아름다운 지구는 인간에 의해 사용되거나 남용되기도 하고, 아끼거나 존중되기도 한다.


프란치스칸은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한 행동과 태도를 선택한다. 우리는 사람과 피조물을 존중하고,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봉사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보복대신 용서를, 단죄대신 이해하기를 선택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을 선택할 때, 때로는 어려움에 봉착하여 막막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혼자 분투하지 않고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성서에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이 지구와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시는지 잘 적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 귀를 기울이고 언제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채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예레미아 9ㅡ23~24

자랑하려는 이는 이런 일을, 곧 나를 이해하고 알아모시는 일을 자랑하여라. 나는 과연 자애를 실천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주님으로서 이런 일들을 기꺼워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 그날이 오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내가 몸의 할례만 받은 자들을 모두 징벌하리라.


지혜서 8, 5~9

살아가면서 많은 재산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모든 것을 이루는 지혜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는가?

예지가 능력이 있다면 

만물을 지어 낸 장인인 지혜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것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정의를 사랑하는가?

지혜의 노고에 덕이 따른다

정녕 지혜는 절제와 예지를,

정의와 용기를 가리쳐 준다.

사람이 사는데에 지혜보다 유익한 것이 없다.

누가 폭넓은 경험을 원하는가?

지혜는 과거를 알고 미래를 예측하며

명언을 지어내고 수수께끼를 풀 줄 알며

징표와 기적을

시간과 시대의 변천을 안다.

그래서 나는 지혜를 맞아들여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지혜가 나에게 좋은 조언자가 되고

근심하고 슬퍼할 때에는 격려가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저자들은 지혜와 성령을 같은 것으로 표현한다. 성령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땅 끝까지 찾아가며, 창의적인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성찬 기도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오"(감사기도 2양식) "그리스도 예수께 속하는 이는 육을 그 정욕과 사욕과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박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영을 따라 걸읍시다."(갈라디아 5,24~25) "번저 그분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그런 것도 다 곁들려 박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은 내일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날이 그 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마태오 6,33~34)


성서의 각 구절에는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방법이 담겨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총괄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행복 선언'의 선물을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예수께서 군중을 보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는데, 제자들이 다가오자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복되도다. 슬퍼한 사람들! 위로를 받으리니,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 땅을 상속받으리니, 복되도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배부르게 되리니,"(마태오 5,1~6) 이어서 우리를 세상의 빛고 소금이 되라고 부르신다.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싱거워지면 무엇으로 짜게 되겠습니까? 아무데도 쓸모 없으므로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힙니다. ' "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자리잡은 도시는 숨겨질 수 없습니다. 등불을 켜서는 됫박 밑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습니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비칩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어, 그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오 5,13~16) 우리는 복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하느님께 찬미를 돌린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좋은지 어쭈어 보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각각의 직업에 대해 답변을 하셨다. "군중이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요한은 대답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시오.' 세리들도 세례 받으러 와서 '선생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고 묻자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하고 일렀다. 군인들도 '저희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니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시오' 하였다."(루가 3,10~14) 


성서는 지혜로운 삶을 가르쳐준다. 성서와 함께 기도하고 그 의미를 공부하며, 서로서로 깨달은 바를 나누어라. 성서와 함께 하지 않는 프란치스칸은 밥을 잊어버리고 먹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들이 굶주리게 되듯이, 성서와 함께 하지 않는 프란치스칸도 굶주리게 될 것이며 자신의 성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성서는 회칙에 나와 있는 대로 흔히 '혁신적인 전향'으로 이끈다.


복음의 정수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나 당신이 맞이하는 이들, 당신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는 하느님의 자녀 되는 권능을 주셨다."(요한 1,12)"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요 육은 마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한 말은 영이며 생염입니다."(요한 6.63)


사람들

낯익은 이름들이 있다. - 니코데모, 마리아, 막달레나. 필립보, 빌라도, 베드로, 사울, 마르타, 라자로, 토마스, 시몬, 자케오, 나타나엘.


그 사람들의 얼굴과 모습이 우리 마음에 선하다. 


어떤 이들은 이름을 모른다. -사마리아의 여인,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남자, 38년간 앓아온 병자, 길가에 있는 나병환자들, 12년간 하혈병에 걸린 여인, 포기하지 않은 시로 페니키아의 여인, 단순히 '바리사이'로 알려진 사람들, 회당장과 세리들.


복음 속에는 갖가지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

그들이 어떻게 되어 내면의 변화가 왔는지

성서에 모두 적혀있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들에게 변화를 주어

만남의 기억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중 몇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다녔고

또 몇 사람은 그분이 돌아가실 때 도와드렸고,

몇 사람은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그분을 전하러 다녔다.

어떤 이들은 그분에게 음식을 드렸고,

어떤 이들은 자신을 치유해준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또 어떤이는 그분이 설교를 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어떤 이는 그분이 묻힐 무덤을 드렸다.

어떤 이는 그분의 발치에서 눈물을 흘린 반면

어떤이들은 치유의 기적을 보며 감탄을 했다.

어떤 이는 안식일에도 자신의 침구와 깔개를 직접 개었고

어떤 이들은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고 배신을 하였으며

어떤 이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부인하려 들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드렸다.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 속에 흐르는 것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응답을 한 것,

그것이 사랑이었든 증오였든,

감사였든 거부였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이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복음에 응답을 해야 한다.

그것이 프란치스칸의 혈통이다. 


우리 각자가 바로 교회이며

매일 우리 자신을 통해서

복음 말씀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19조

회원은 평화의 전달자로서 평화를 끊임없이 건설해야 함을 기억하여, 누구든지 신적 요소가 있으며 사랑과 용서로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음을 신뢰하고, 대화를 통해서 일치와 형제적 화합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회원은 완전한 기쁨의 선포자이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매인 죽음의 참 뜻을 알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 회원은 성부와의 결정적 만남을 평온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해설

매일 폭력이 행해지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프란치스칸은 평화의 길을 선택한다. 이것은 끝없는 과제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평화로움을 깨뜨리는 마음과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누군가가 비꼬는 말을 하면 버럭화를 내고, 예상치 않게 전화를 받아 미리세운 계획이 흐트러지면 기분이 나빠진다. 누군가가 약속을 했다가 어기면 화가 나고, 취미활동을 하려고 계획했던 날 하필 허리가 아프면 속이 상한다. 내가 한 개인으로 이와 같은 경험들을 하는데, 세상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사람들은 거부를 당할 때 과격하게 대응한다. 해고당한 직원이 고용주를 총으로 쏘고, 자신의 배우자를 칼로 찔러 죽이며, 아이들을 납치하여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토크 쇼에서는 서로 싸우는 장면들을 조장하여 매스컴을 통해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려 하고 , 인종차별 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집 앞에다, 또는 마음 속에다 십자가를 불로 태운다. 테러리스트들은 종교라는 명목 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술과 마약은 중독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람들은 무기를 쓰거나 침묵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 들고,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비난부터 하려 든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에게 많은 돈을 줌으로써 성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도 한다.


프란치스칸은 이 모든 것 가운데 평화를 지키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우리는 화합과 조화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는 하느님을 찾는 씨앗이 있다고 믿으며,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약으로 이 길을 선택했고, 비록 힘든 일이긴 하지만 우리의 할 일이라 믿는다.


평화를 전하는 것은 기쁨을 전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 어둠의 요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기쁨에 대해 단순히 떠든다고 해서 저절로 기쁨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대신 우리는 주변에서 보이는 문제부터 다루어보자.


우리는 삶의 새로운 길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 바로 우리 믿음의 바탕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다. 그것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근원인 것이다. 우리가 어둠에 대항할 때 기쁨의 빛이 드러날 기회가 열리게 된다.


우리가 함께 늘 변함 없이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기쁨과 희망을 불러올 수 있다. 우리에겐 각자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희망을 찾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공간을 창조하려 한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과 성령께 의존하므로, 그 어떤 좌절과 절망도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성내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사랑은 참을성이 있으며, 친절하고, 언제든 용서하려 하며, 희망적이며 인내할 줄 안다. 사랑은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선 즐거워하지 않으나, 진리를 보고 기뻐하며 좋아한다. 또한 사랑은 불평하지 않는다(1고린도 13,4~7 참조)


마지막으로,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란 두렵지 않은 방문객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아빠(Abba)이신 하느님을 만나려고 노력할 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의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



<프란치스칸 공부>


프란치스코의 전이(Transitus)

프란치스칸은 해마다 '전이 예식'(추도식 Transitus)이라는 의식을 거행한다. 그날은 이 세상에서의 프란치스코의 생의 마감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을 위해 창의적인 행사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대체로 이 행사는 10월 3일경에 열린다. 프란치스칸은 이 '전이 예식'날에 각자 고유의 의식을 준비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임종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228년 7월 16일에 시성되었다.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완공된 후 프란치스코의 시신은 그곳으로 이장되었다. 첼라노는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2 첼라노 217

그는 누구에게나 소름끼치는 일이고 저주스럽기만한 일인 죽음 그것을 찬미하도록 하였고,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자기 안에 죽음이 머물도록 초대하였다. "나의 자매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그는 의사에게 말하였다. "의사 형제여, 생명의 관문인 죽음이 임박하면 용기를 내어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시오." 그리고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면 엊그제 여러분이 본 대로 나를 알몸으로 땅바닥에 눕히시오. 그리고 내가 죽거든 1 마일 가량을 천천히 걷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그 자리에 그냥 눕혀 두시오."이리하여 그 시각이 찾아왔고, 그리스도의 온갖 신비가 그에게서 성취되었으며, 그는 하느님께로 행복하게 날아갔다.


<토의 주제>

1. 당신은 자신의 신체, 심리 그리고 영혼을 어떻게 보살피는가?

2. '현시대를 대표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시오. 프란치스칸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3. 당신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4. 성서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느낀 이미지를 표현하시오.

5. 프란치스칸에게 성서가 왜 중요한가?

6. 당신 개인의 삶에서 '혁신적 전향'은 무엇인지 설명하시오.

7. 프란치스칸 삶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8.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쁨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그렇게 함에 있어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나누시오.


<성서 묵상>

+마태오 5,1~16

'참 행복'의 아름다운 내용은 그리스도인을 표현하는 하나의 말씀이다. 성서의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어떤 자질을 엿볼 수 있는가? 우리가 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