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20장 노래하는 음유시인

Margaret K 2019. 4. 12. 18:53

프란치스코처럼 


제20장 

노래하는 음유시인



프란치스코의 삶이 언제나 단순하고 쉬운 것은아니었다. 그의 생애의 몇몇 사건들은 프란치스코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의 하나는 라베르나 산에 관한 것이다. 이 가난한 작은 사람은 '산'의 기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1213년 5월 8일 몬테 펠크로가 성에서는 젊은 백작의 작위에 경의를 표하는 연회가 열렸다. 당시에 영향력 있는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었고, 그 중에 카센티노에 있는 치우시의 올란도 백작도 있었다. 올라도는 연회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젊은 수도자의 모습이 올란도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잔꽃송이 2부 성프란치스코의 오상에 대한 고찰 참조).


연회가 끝나자 마자 그는 신속히 프란치스코를 찾아나섰고, 재력과 권력이 있던 올라도는 투스카니에 있는 산을 프란치스코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라베르나'라고 불리던 그곳은 조용히 기도하고 참회할 수 있는 좋은 장소라고 생각되어 프란치스코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도 그 제의에 감명을 받고 젊은 형제들에게 산을 둘러보도록 하였다. 프란치스코도 산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형제들도 좋다는 긍정적인 소식에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라베르나'산이 그의 것이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그 산을 겨울에는 혹독하게 춥고 여름에는 더운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소나기 구름으로 덮였으나 고립되어 있는 점이 프란치스코의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프란치스코에게 단식과 기도, 참회의 장소가 되었다. 나의 짧은 체험으로도 라베르나 산은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산은 신비로웠고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만하였다. 나는 이 산의 울퉁불퉁한 바위들과 땅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들을 좋아했다. 나는 프란치스코가 이산에 매료되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기에 조용히 혼자 있기를 원하던 프란치스코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산을 갖게 되었다. 이 산은 기도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아무런 거부감을 느낄 수가 없었고,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몇 년 후인 1224년 8월 프란치스코는 다시 고독을 만끽할 수 있는 라베르나 산에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기도와 단식으로 지냈다. 성 미카엘 축일이 다가오면서 예수께서 체험하신 그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드렸다. 그 사랑의 선물로써 우리를 위하여 사랑으로 참으신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은 주님의 다섯 상처와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선물이 아름다웠던 만큼 그의 몸은 매우 쇠약해졌다. 이미 위장 장애가 생겼고 빛을 보면 눈이 아팠다. 그는 올란도 백작이 제공한 나귀를 타고 라베르나 산을 떠났다. 레오 형제가 그와 동행하였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2년 후 죽을 것이기에 다시는 이 산을 볼 수 없음을 알고 이 산에게 다정한 작별을 고하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만지고 동행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하였다. 통증 때문에 걸음을 자주 멈추기도 했고, 일주일이나 그 이상을 쉬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24년 12월에서 다음해 3월 사이에 프란치스코는 움브리아 마을과 외관지방을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설교하였다. 그가 아시시에 도착한 것은 1225년 말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내내 아팠다. 햇밫을 보면 눈이 더욱 아팠고 위장 장애는 날로 심해졌다. 육체적인 문제와 더불어 영적인 문제도 생겼다. 동료 형제들이 서로 언쟁을 하고 있던 것이다. 회칙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자기와 가까이 지내는 형제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또 다른 형제들을 엄하게 다루어야만 했고,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많은 형제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고, 형제회 초기의 이상은 이젠 옛 추억이 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는 봉사와 겸손의 모범을 주기 위해 시기적으로는 좋지 않았지만 다시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산 다미아노 근처에 작은 초막을 하나 지어드렸다. 초막은 햇빛이 들지 않도록 했다. 프란치스코는 계속해서 눈이 아파 잠을 설쳤으며 겨우 잠이 들려고 하면 들쥐들이 그의 몸을 타고 이리 저리 넘어 다녀 잘 수가 없었다. 쥐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더구나 몇몇 형제들의 행동 때문에 그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에게 믿음이 있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영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평화와 기쁨을 간직했으며 완전한 어둠 속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생각해냈다. 그런가 하면 통증이 너무 심한 괴로운 밤에는 그는 하느님께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1225년 겨울에 주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상급으로 보물이 주어진다면, 잠시 당하는 이 고통을 기쁘게 참지 않겠느냐?"(2첼라노 213)


주님의 이 말씀에 기쁨이 넘친 프란치스코는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형제들을 청했다. 육신적인 눈은 보이지 않아 어두웠지만 그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있었고 다시 한번 음유시인이 되었다. 창조된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태양의 노래'의 첫 구절이 그의 가슴에서 솟구쳐 흘러나왔다.


1226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의 말을 듣고 눈에 대한 전문 치료를 위해 리에띠로 갔다. 의사는 턱뼈와 눈썹사이의 정맥에 뜨거운 뜨거운 인두로 뜸을 뜨도록 권하였다. 의사가 인두로 지지는 동안 하느님의 자비로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고, 다른 치료도 마찬가지였다.


치료 후에 프란치스코는 그가 좋아하던 외딴 곳, 폰데 콜롬보를 향해 그의 일행은 시에나로 갔으나 오래 있지는 못했다. 총장 엘리아 형제는 프란치스코의 건강이 악화되어 아시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란치스코는 피를 토하고 기력이 쇠진해졌다. 여행 중에 배와 팔 다리가 부어 올랐다. 힘든 여행끝에 겨우 아시시에 돌아왔고, 구이도 주교가 그의 집으로 프란치스코를 맞아 들였다. 


그것에 머무는 동안 동료 형제들이 그를 돌보았다. 그의 신체는 허약해졌고 병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의 정신은 한층 더 또렷해졌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꼈고 찬미드림으로써 이에 응답하였다. 눈이 멀어 신체적으로 고통받고 때로는 영적으로 위축되었지만 이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욥에게 하셨듯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 대답이 필요치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심을 알기만 하면 되었다.


<태양의 노래 해설>


찬미가 제1부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고, 전체이시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경건하게 그분께로 나아갈 뿐이다. 프란치스코가 노래할 때 그의 가슴 속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의 몸의 어떤 통증도 이 순간만은 큰 기쁨이 되어버렸다. "지극히 높으시고---호롤로 당신만이 찬양받으소서---"


매일 절망과 어두움에 살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가 변화된 초기의 일은 이미 옛 추억이 되었다. 그가 나환자들과 함께 지낼 때 하느님께서는 역겨운 것을 달콤한 것으로 바꿔주신 것을 기억한다. 바로 주님께서 프란치스코를 그들 사이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제 삶의 막바지에서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인도하신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전 존재로 찬양 노래를 부른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형님인 태양은 높은 분이시다. 형님인 태양이 세상에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합당한 칭호가 아닌가 싶다. 우리 눈이 태양 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빛도 역시 볼 수 없다. 하느님은 그를 믿는 이에게 얼마나 경이로운 일을 하시는가? 하느님이 역사하신다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열정을 꺽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이처럼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고 그 외 모든 일은 이 현존에 뒤따른 것이다. 그를 따라다니는 여러가지 문제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것으로 여기셔서 세밀히 돌보아 주셨으므로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에게 매일 아침 당신의 현존을 상기시켜 형님인 태양에게 감사드리며, 창조주의 모습을 보게 했다. 형님인 태양의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는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이다. 매일 저녁 석양이 질 때마다, 형님인 태양이 달과 별 자매를 통해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빛을 계속 우리를 통해 비추고 계신다.


매일 매일의 바쁜 생활에서 우리는 별들의 존재를 얼마나 쉽게 망각해 버리는지 어쩌다 짬이 나서 하늘을 보게 되면 '어머, 저 별들을 좀 봐, 별이 있었나? 하고 생소하게 외친다.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온갖 경이로운 것들을 얼마나 쉽게 잊는가'하고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피조물에 대한 존재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체스터톤은 프란치스코의 전기에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태양빛(예수님)을 반영하는 달로 보았다고 전한다. 그는 자신이 빛의 원천이 아님을 항상 깨달았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빛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아드님)을 바추하는 달이다. 우리 또한 그렇다.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바람은 성령과 쉽게 연결된다. 바람은 어디나 가고 싶은대로 간다. 사람은 바람이 어디서 오는 줄 모르나 바람은 불어올 뿐이다. 여름의 산들바람은 우리를 식혀준다. 폭풍과 같이 사납고 파괴적인 것도 있다. 바람 형제는 우리 삶을 여러가지로 만져준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생명을 주므로 보호해야 한다. 해로운 공기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프란치스칸은 공기 형제를 존경한다. 공기 없이는 우리 모두 살지 못한다. 우리는 숨을 쉬고 있는 경이로움을 너무 쉽게 잊는다. 우리 몸은 놀랍게도 자동적으로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고 신체 내부 기관에 영양 공급을 한다. 신체의 이런 놀라운 운송 체계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공기와 날씨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것 없이는 식물도 자라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의 많은 부분이 시들 것이다. 생명을 가진 평범한 것에 찬미드린다. 프란치스코는 바람 형제를 이렇게 찬양하고 있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사이를 거닐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경이로운 것들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삶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된다. 일생의 모든 모습들이 이 찬미가 안에 모여진 듯하다. '피조물의 찬가'는 모두 담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물과 불은 친구가 된다. 


얼마나 강렬한 모습을 불러냈던가. 아무것도 부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창조의 놀라움은 우리에게 도움만을 준다. 불과 물은 쉽사리 파괴적으로 될 수 있으나. 프란치스코의 노래에서는 형제요 자매가 된다. 그들이 파괴적으로 되더라도 프란치스코는 그 안에서 좋은 것을 보리라는 예감을 갖는다. 모든 것은 태도에 달려 있다. 생의 이 시점에서 그의 생각에는 좋은 것들만 스쳐갔다. 시원한 물과 세례수는 성심의 모습으로 하나가 된다. 불 형제는 밤을 비추고 온기를 제공한다. 불 형제는 찬미의 춤을 추며 주님 앞에 타오른다. 장님을 면한 승리의 노래를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노래한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불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피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면, 상상도 못할 만큼 광대한 우주 안에 한없이 작은 우리를 본다. 사람들이 우주를 개발하고 우주 여행을 할 때마다 우주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내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을 밝히는 것을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프란치스코가 대지를 자매라 칭한 것은 놀랄 만하다.

                                 

프란치스코는 포도밭과 포도넝쿨, 밀밭, 산과 동굴에서 본 경관들을 기억한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이 땅이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을 기억한다. 꽃과 풀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한 대지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는지 그 경이로움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프란치스칸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런 모든 이미지를 통해 파악하게 한다. 우리가 어머니인 대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가 하는 것이다. 대지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대지가 식물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성서와 교회의 상사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성장시킨다. 


다시 한번 찬미가가 울려 퍼지고 이 기도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져 간다. 모든 피조물들이 형님이고, 누님이요, 어머니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반영하며 각 구절의 의미가 더욱 더 넓게 반영되고 있다. 어머니요 자매인 대지에 대한 노래를 들어보자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형제들에게 창조에 대한 찬미와 축복, 감사와 섬김의 노래로써 화답했다.


어두운 오막살이집에서도 프란치스코는 빛과 노래로 충만하였다. 찬미가는 신선한 새로운 의미로 가득하나. 이 구절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지와 피조물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면 어느 정도 인간애를 잃게 된다. 대지나 그 자연을 남용하는 것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요, 우리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인 대지를 소유하려함은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는가를 망각하는 것이다.


찬미가들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새롭게 다지는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축복, 감사와 봉헌의 외침이다. 찬미가는 모든 사물과 하느님, 또한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경이로운 신비를 탐색하게 하는 기도이고 가르침이며 자극이다.


찬미가 제2부

찬미가는 여기에서 잠시 중단된다.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프란치스코는 때를 기다렸다. 다른 구절들을 새로운 국면에 처하면서 나왔다.

아시시의 주교와 시장은 모두 세력가였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뒤죽박죽이 된 아시시는 혼란스러웠다. 오폴르툴로 디 베르나도는 시장이었고 구이도는 주교였다. 그들 사이의 다툼은 여러가지 양상을 드러냈다. 시장은 그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추방하였고 주교는 시장을 파문시켰다. 시민들은 피했고, 주교와 시장은 계속해서 부딪쳤다. 시장은 사업가들에게 주교와의 거래를 중지시켰고,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난폭해지기 시작하여 시민들은 폭발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얘기를 듣고 몹시 슬퍼했다. 구이도 주교는 언제나 프란치스코를 옹호했다. 시장은 프란치스코가 새 삶을 시작했을 초기에 그를 도운 사람이었다. 시장의 딸은 산 다미아노에 있는 클라라회에 입회하였다. 아무튼 감히 이 충돌에 끼어들어 화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이 두 사람이 계속해서 재앙의 길을 가도록 버려 둘 수 없었다. 그는 찬미가에 몇 노래들을 추가하였다. 그는 동료 형제 한 명을 시장에게 보내어 프란치스코의 입장을 봐서라도 주교관으로 가도록 하였고 또 다른 형제를 주교관으로 보냈다. 시장과 주교가 서로 만났을 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찬미가의 새 구절을 노래 하도록 하였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군중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긴장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시장은 울고 있었으며 주교는 늙어 허리가 굽은 채 조용히 서있었다. 이윽고 용서의 노래와 함께 그들은 평화로이 서로 포옹했다. 주교와 시장은 프란치스코의 이 노래를 이해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노래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는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염려는 분명한 효과를 나타냈다. 단순한 이 사건이 우리에게 찬미가의 구절들이 얼마나 필요했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반목하고 있으면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하고 용서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용서의 길을 찾자. 지금 당장 화해와 치유의 길을 찾아 나서자. 


찬미가 제3부

1226년 여름이 다 되어, 프란치스코는 죽음의 자매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찬미가의 마지막 구절이 주교관에서 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하였다.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가길 원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교관에서 포르치운쿨라로 옮기는 도중에 프란치스코는 잠시 멈추도록 요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사랑하는 아시시를 열정적으로 축복하였고, 다시 포르치운쿨라에로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이곳은 그가 새 생활을 시작했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종착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복음적 삶에 대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유언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 당신에는 보다 많은 작별을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종이라 불렸던 로마에 사는 친구 야고바 부인에게 수의를 만들 잿빛 천을 가져오도록 부탁했고, 그가 로마에서 그녀를 방문했을 때 만들어 주었던 달고 맛있는 특별한 음식을 청하였다.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주님의 영감으로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을 안 야고바 부인이 도착하였다. 그녀는 그 잿빛 천과 달고 맛있는 음식을 가져왔으며 이를 보고 프란치스코는 매우 기뻐했다. 이런 프란치스코를 보고 야고바는 울었고, 그것은 또 하나의 아픈 이별이었으며, 그녀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페루지아 전기 101참조).


1226년 10월 초에 프란치스코는 매우 쇠약해졌다. 죽음의 자매가 목전에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동료 형제들에게 했던 한마디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들의 일을 가르쳐 주시길.---'.


역사가들의 논쟁이 있지만 그가 아시시로 돌아온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노래'마지막 소절이 첨가 되었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더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마지막 구절은 그가 섬기던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이제 그곳에는 적막이 깃들었고 노래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던 사람이 하느님께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동물들까지도 그들을 잘 이해하던 친구를 잃는 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프란치스코가 맞이한 죽음은 1226년 10월 3일이었다. 찬미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는데 모범이었던 프란치스코가 드리는 낭랑한 노래였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꼇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18조 

이 밖에도 회원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표지를 지닌" 다른 피조물, 곧 생물과 무생물에게까지 존경심을 표헌하고 남용하려는 유혹을 극복하며, 프란치스코께서 지녔던 보편적 형제애의 정신을 지니도록 힘써야 한다.


해설 

'태양의 노래'를 보면 회칙의 이 부분이 절묘하게 잘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하느님 창조 사업과 연관되어 성장한다면 이에 대한 존경은 필수적이다. 우리가 피조물에 대한 찬가를 부르면서 땅이나 그 자원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피조물에 대해 어머니. 형님, 주님의 칭호를 붙일 때 우리의 태도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회칙의 이 부분은 단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피조물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것은 모든 피조물, 특히 모기와 같은 피조물에 대해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창조주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창조의 하느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창조 사업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느꼈을 뿐이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파괴해서는 안되고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피조물에 대한 존경은 매우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백합과 새들에 애한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듣는다. 이 말씀은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포근하게 사랑으로 돌보시는 지를 알게 해 주고, 또한 하느님께서 이미 피조물을 돌보고 계심을 말해준다.


" 저 까마귀들을 살펴보시오. 씨를 뿌리지도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골방도 곳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먹려 주십니다.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시오. 수고하지도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습니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이 이처럼 입히시거든 그대들이여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루가 12,24,27,28)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지만 특히 인간을 돌보신다. "저 새들보다 그대들이 얼마나 더 귀합니까?"(루가 12,24) 우리가 창조된 세상을 돌보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착한 목자의 정신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높이 받들고 피조물을 통해서 '가장 높으신 분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관심을 가지면 창조 사업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역할을 계속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돈버는 자원으로만 여긴다면 논리적으로 착취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피조물을 사용하고, 은행에 돈을 쌓아 놓으려고만 든다면 자원을 아끼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프란치스코가 원했던 태도는 아니다. 


'태양의 노래'는 창조 사업에 대해 혈연관계로 얘기하므로 자연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런 태도는 쓰레기 매립이 어머니인 대지를 쓰레기로 덮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고, 물질을 재활용하여 자원이 쉽게 고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식품도 더욱 알뜰히 사용하여 낭비를 막아야 한다. 푸른 초원을 만들어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 자연 서식지로 가꾸어야 한다. 경이로운 창조의 결핍은 인간의 능력을 반감시킨다. 쓰레기 투기를 방지하는 것은 단순히 청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단 하나의 지구를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쏟는 정력의 두 배를 자원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향으로 확대시키고 지구를 소중히 여기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우리는 서약으로 청지기의 소명을 택했다. 이제 그렇게 살자.


<프란치스칸 공부>

권고의 찬미가(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부인들을 위해)


가난한 자매들이여,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매들이여.

여러 지방과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자매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순종에 충실하여 죽을 수 있도록, 진리에 언제나 충실하십시오. 

내적 생활이 더 큰 가치를 지니니, 외적 생활을 하려 하지 마십시오.                                                                           

큰 사랑으로 부탁하오니,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조심스레 관리하십시오.

병고에 시달리는 자매들과 이들을 돌보느라 애쓰는 자매들은 똑같이 평온한 가운데 인내를 가지십시오.

여러분 하나 하나는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하늘 나라에서 워례관을 받으리니,

여러분의 수고의 대가가 높으리이다.


클라라와 그녀의 동료들의 글에는 절박감이 있다. '들으십시오'라는 말은 의사소통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에 귀 기울여야 하고 성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며, 이웃들의 말과 이 시대의 징표를 들어야 한다. 경청하는 것은 우리의 복음적 삶에 매우 중요하다. 


'내적 생활이 더 큰 가치를 지니니' 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현명한 말이다. 우리는 성령의 길을 선택하며 우리는 성령의 역사함에 의존한다. 성령의 인도로 다른 유혹 때문에 우리 삶의 주된 근원을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 병자를 보살피고 질병에 대처하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다. 평화로이 참아내자


<토론 주제>

1. 프란치스코가 여러 번 가난에 대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베르나의 선물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2.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의 핵심은 무엇인가?

3. 프란치스코가 그토록 고통 중에 잇었음에도 '태양의 노래'를 쓰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4. 당신에게 '태양의 노래'중에 특히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5. 당신의 삶에 누님인 죽음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느낄 것인가? 일상 생활에서 누님인 죽음과 친숙하고 평화로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6.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것에 대해 어떤 의미믈 부여하는가?

7. <프란치스칸 공부>'권고의 찬미가'에서 느낀 점은? 어떤 구절이 당신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성서묵상>

+시편 49,8~16

이 성서 구절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의 특성은?하느님을 묘사하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해석하는가? 시편의 구절들이 어떻게 희망을 주는가?




치우시의 올란도 백작

. '라베르나'라고 불리던 그곳은 조용히 기도하고 참회할 수 있는 좋은 장소라고 생각되어 프란치스코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도 산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형제들도 좋다는 긍정적인 소식에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라베르나'산이 그의 것이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기에 조용히 혼자 있기를 원하던 프란치스코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1224 12월에서 다음해 3월 사이에 프란치스코는 움브리아 마을과 외관지방을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설교하였다. 그가 아시시에 도착한 것은 1225년 말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내내 아팠다. 햇밫을 보면 눈이 더욱 아팠고 위장 장애는 날로 심해졌다. 육체적인 문제와 더불어 영적인 문제도 생겼다. 동료 형제들이 서로 언쟁을 하고 있던 것이다. 회칙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형제들이 산 다미아노 근처에 작은 초막을 하나 지어드렸다. 초막은 햇빛이 들지 않도록 했다. 프란치스코는 계속해서 눈이 아파 잠을 설쳤으며 겨우 잠이 들려고 하면 들쥐들이 그의 몸을 타고 이리 저리 넘어 다녀 잘 수가 없었다. 쥐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더구나 몇몇 형제들의 행동 때문에 그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평화와 기쁨을 간직했으며 완전한 어둠 속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생각해냈다. 그런가 하면 통증이 너무 심한 괴로운 밤에는 그는 하느님께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1225년 겨울에 주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상급으로 보물이 주어진다면, 잠시 당하는 이 고통을 기쁘게 참지 않겠느냐?"(2첼라노 213)

주님의 이 말씀에 기쁨이 넘친 프란치스코는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형제들을 청했다. 육신적인 눈은 보이지 않아 어두웠지만 그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있었고 다시 한번 음유시인이 되었다. 창조된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태양의 노래'의 첫 구절이 그의 가슴에서 솟구쳐 흘러나왔다.


그의 신체는 허약해졌고 병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의 정신은 한층 더 또렷해졌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꼈고 찬미드림으로써 이에 응답하였다. 눈이 멀어 신체적으로 고통받고 때로는 영적으로 위축되었지만 이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욥에게 하셨듯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 대답이 필요치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심을 알기만 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