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 22장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라

Margaret K 2019. 4. 12. 18:54

프란치스코처럼 

제 22장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라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당신이 활동하시던 곳을 떠나 기도하려 들어가셨다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예수께서 사막이나 산에 올라 가셨다. 예수께서 사막이나 산에 올라 가셨다.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셨다. 또한 예수께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셨고 병자를 치유하기 전에도 기도하셨다. 대축일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기도와 흠숭의 예를 비치셨고 당신의 제자들과도 함께 기도하셨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보면, 프란치스코는 동굴에 가서 기도하려고 자주 산 속으로 들어갔다. 라베르나 산은 신비로운 기도소였다. 성인은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였고 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성인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였고 찬미의 기도를 바쳤으며,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셨다. 말년에는 '태양의 노래'를 지어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고통 중에도 동굴 안에 숨어서 기도하였다. 전망이 매우 아름다운 곳에서....


클라라는 기도하는 여인이었다. 어머니 올톨라나로부터 순례기도를 배웠으며, 집 옆에 있던 대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녀는 산 다미아노 수녀원의 독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을 배웠으며, 하느님을 관상하는 기도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하느님의 사람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그녀는 자매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쳤고 실망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결단이 필요할 때는 기도로써 지혜를 얻었다. 


클라라 수녀원의 회칙에서는 공동체 기도 방법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글을 모르는 자매들과 글을 아는 자매들을 위한 것이다. 그녀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평지를 썼다.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 12~14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체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에 두고,

그대의 전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태조부터 하느님 몸소 마련해 놓으신

숨겨진 감미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로 그분의 벗들이 느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프란치스칸과 기도는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우리의 정체성은 기도하는 사람들과 연관된다. 우리는 혼자서나. 여럿이서 기도문을 바치지만, 그 기도는 바친 말마디 이상의 것이며, 찬양은 부른 노래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우리 자신의 일부로서 우리 안에 있는 내면적인 정신을 형성시켜 주며, 우리의 사람됨을 형성시킨다. 기도는 우리가 사는 매 순간 순간 현존하고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활동하는 분위기이며, 그 분위기는 성령의 지혜로 감도받는 것이다. 기도는 친교이며,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서부터 일어나는 말없는 신뢰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맞는 기도방법을 찾아야 한다. 독특한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기도와 같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시는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임을 인식하게 해 준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더욱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으며,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든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한 영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가 한 영을 받아 마셨습니다."(1고린토 12,12~13)


다양한 제안

우리는 서로가 다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 방법도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도방법을 알아두는 것은 유익하다. 완전한 목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로 향하는 당신의 여행길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염경기도

이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혼자서나 여럿이서 소리를 내어 하느님을 찬양한다. 하느님과 마음의 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말을 사용한다. 우리의 느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우리의 사랑 등을 말로써 나타낸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기도책에 있는 기도문을 사용하거나 묵주기도를 바친다. 우리가 하느님께 시편의 말씀들을 소리내어 올리면 곧 기도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라면 이 방법을 생각한다.


2. 성서적 기도 

이 책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 기도는 하느님의 살아계신 말씀이라는 토대위에서 이루어진다. 아주 오래 전에 쓰여진 말씀이지만, 그 말씀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기도 속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과거를 탐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은 말씀 자체 안에 힘이 있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야 55,11)


이 기도는 듣는 기도이다. 그래서 듣는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중요하다. 육체적으로도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 방해를 받지 않을 시간과 공간을 택하라. 그러나 어떤 소리나 배경음악을 흐르게 하는 것도 좋다.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들면 들수록 우리는 말씀을 더 잘 들을 수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우선, 우리의 마음 속부터 고요하게 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든 도움이 되는 것은 다 사용하라. 예수님께 잘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라. 바라는 바가 있으면 특별할 선물을 청하라. 기도를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아라. 시간을 갖고 고요해지도록 기다려라, 천천히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해 놓은 성서구절을 읽어라. 그 구절을 음미하라. 그 구절을 가지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라. 그 구절이 마음 안에 가득 차도록 하여라. 아는 한 단어나 한 구절이 너의 마음을 치거든 그 말씀을 잡고 그 말씀을 들어라. 그 말씀이 너의 기도를 다 차지하도록 마음을 온전히 내맡겨라.


우리의 응답은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때로는 우리의 상상력이 활발해진다. 때로는 우리의 감정이 감동을 받는다. 때로는 우리의 지성에 불이 커진다. 또 때로는 그 말씀을 그냥 조용히 다 받아들일 수도 있다. 노래하라. 춤을 추어라. 그냥 쉬어라. 무엇이든 좋은 것을 택하라. 이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삼지 말고 억지로 기도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네 자신을 비워놓아라.


성서적 기도는 생활에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내 이야기와 비슷한 성서 이야기가 생각나게 된다. 그 두 이야기가 의미를 전달해 주는가 들어 보아라. 성서 이야기와 너 개인의 이야기가 서로 만나서 너를 변화시키거나 성장하게 해 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쁘게 도와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위대한 힘이 있다. 성서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아라. 그러면 무엇인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성서를 묵주와 함께 사용해 보아라. 성서 구절을 로사리오의 신비와 연결시켜서 묵상해 보아라. 이런 식의 기도를 도와주는 소책자들이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조용히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귀기울여 들어라. 이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고 기도하는 시간이다. 말씀이 너의 생활 안에서 자유롭게 임하시도록 하여라.


3. 중심기도(centering prayer)

이 주제에 대해서도 좋은 책들이 많다. 그런 책들을 찾아서 중심기도의 느낌을 발전시키도록 하여라. 중심기도는 관상기도를 발전시키는 기틀이 된다. 그 지침을 잘 활용하라. 이 형식의 기도를 오랫동안 해보고 당신에게 맞는가를 숙고해 보아라. 이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준다. 


거룩한 단어를 하나 선정하여 네 마음의 상징으로 삼고 실생활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행위를 따르도록 하여라. 거룩한 단어란 아무거나 그저 간단한 단어면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 주님, 아빠, 아버지, 어머니, 사랑, 평화, 살롬, 등등, 성령께 너의 단어를 선택하는데 도와주시도록 청하여라. 


- 일단  단어를 정했으면, 기도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하라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고요히 있어라, 그리고는 조용히 너의 거룩한 단어를 되뇌어라. 이 단어는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행동에 순응하기로 한 네 마음의 상징인 것이다.

- 다른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 온 것을 알게 되면, 조용히 너의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잡다한 생각들을 중심기도의 당연한 부분이다.

-기도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잠깐 조용히 있어라, 그리고 조용히 '주님의 기도' 같은 기도를 드려라, 그리고 나서 기도를 끝내라.


이런 형태의 기도에는 나를 포기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하여금 우리가 하느님께 연결되도록 하여라. 우리의 행동은 단순하게 우리의 거룩한 단어에 깨어 있어야 한다. 기도 시간으로는 한 20분 정도면 적당하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이 기도를 하면 좋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중심기도의 효과는 기도하는 순간에 있기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서는 평화로움이 점점 퍼진다.


4. 관상기도

이 자연적인 형태의 기도는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어떤 저자들은 일체의 물질적인 피조물을 완전히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이것은 프란치스칸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물 속에 뛰어든다. 피조물은 자주 우리의 관상기도를 불러 일으켜 준다. 서녘의 지는 태양이나 동쪽 하늘의 뜨는 해, 그 아름다움들이 우리의 혼을 온통 빨아들이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들꽃, 큰 바다의 힘, 높은 산의 장관 등이 우리를 창조주의 경이로움으로 인도해 준다. 자라나는 것들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작은 씨앗 안에 있는 생명의 힘, 첫아기를 품에 받아 안았을 때, 이 작은 생명체의 경이로움 속에 넋을 잃고 빠져들게 된다. 한 마리 지네도 들여다 보노라면 그 경이로움이 하느님의 창조 능력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떻게 그 많은 다리들이 하나같이 질서를 맞추어 움직이는가?


그래서 경이로움이란 단어가 관상이란 단어 옆자리에 놓이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일 것 같다. 경이로움은 우리의 주의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경이로움에 주의를 모은다. 그리고는 그런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감탄하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관상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놀랐다. 우리 가운데 거처를 두신 사랑,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공유한 것을 모두 다 가르쳐주신 사랑, 그 생명의 아빠께 충실한 순명으로 죽음에까지 간 사랑, 죽음을 뚫고 새로운 생명에로 나아간 사랑.


프란치스코가 예수님께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성인은 자신 둘레에 현존하고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관상은 우리를 그러한 깨우침으로 이끌어준다. 하느님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통해서 계시며,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땅에 현존하시며, 우리가 만나는 한사람 한사람 안에 현존하신다. 


중심기도와 마찬가지로 관상기도도 우리를 하느님께만 집중하도록 이끌어 준다. 나의 경우, 빛의 이미지가 계속 계속 반복되었다. 관상은 빛의 멜로디이며, 그 빛이 나에게 하느님을 계시해 주었다. 하느님은 단 한가지 말씀만 밤족하셨따." 에스터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레스터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매번 나에게는 평화가 왔다. 이 말씀은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거나 죄를 지를 적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러한 사랑에 응답하기 위하여 내가 더 나아지도록 나를 계속해서 이끌어 준다.


네 자신의 초점을 찾아내야 한다. 관상을 하는 동안은 하느님께 열중하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 있나이다."(시편 40,8) 관상기도는 모두가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기로 순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나의 모든 관상기도를 받으시기에 중요하고도 남는 분이시다. 관상은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달 열어 생명과 창조의 부유함을 받아들이게 한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나는 편안해지고 경직되어 있던 스트레스가 적어진다.


5. 공동기도

우리는 함께 모여 기도한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마태 18.20) 이 성서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둘이나 셋이 나의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 서로간의 결속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현존감을 준다. 예수님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현존하신다.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일치되는 느낌을 받는다. 공동체 기도는 앞에서 얘기한 어떤 형태의 기도도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모이면, 종종 특별한 기도문을 가지고 한다. 성무일도 시간경, 시편들, 성서에서의 독서나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목소리를 같이하여 하느님께 올린다. 함께 모여서 침묵의 관상기도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일치감을 느끼기도 한다. 함께 모여 철야 기도도 한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가까운 사람들 기억하기도 한다. 성체성사에 함께 모여 우리의 감사한 마음을 함께 바치고 공동 기도로 흠숭의 예를 올리기도 한다. 


때로는 공동체 기도는 개인기도보다 덜 감동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공동기도에는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있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고, 하느님께 신뢰심을 보여드리고, 하느님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감동받지 않는다 해도 우리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그 목적을 두고 모이는 것이다. 


6. 중재기도

기도하는 공동체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성실한 프란치스칸 한 사람의 기도의 힘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간의 필요 사항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 중재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 사랑을 믿는 가득찬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중재 기도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하신 약속에 성실하시므로 계속된다. 우리는 믿는 마음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하느님 앞에 내놓는다.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생명을 주시리라 믿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앞길에 불을 밝혀주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더 굳세어질 것이고 부족함을 이겨 나갈 힘을 받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재기도는 신뢰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그냥 하느님 앞에 우리의 필요함을 내놓는다. 우리는 명령을 하거나 의심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좋은 일을 마련해 주실 하느님의 사람을 믿는 것이다. '먼저 그분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그런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루가 12,31)


나는 어느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중재기도의 힘을 배웠다. 내가 우멋인가 필요할 때, 또는 다른 사람들이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그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 너무 놀랐다. 나는 기도를 부탁한 사람들에게 늘 주의를 주곤했다. "정말로 그걸 원하셔요? 이 사람들이 기도하면 꼭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부탁하세요.!" 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강력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7. 치유기도

오늘날도 치유의 필요는 산재해 있다. 내적인 치유, 기억의 치유, 남용의 치유, 손실의 치유, 육신의 치유, 무의미하나 삶의 치유, 그 목록을 만들자면 끝이 없으며 요구는 많다. 다시 한번 확신과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하느님은 생명과 빛을 가져오는 여러가지 것들을 계속 주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확인시켜 주신다.


하느님은 확신 있는 신앙을 기뻐하신다. 백부장의 이야기(마태 8.5)는 예수께서 신앙이 있는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되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는가? "예수님께서 듣고 놀라워하시며 따라오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이 말하거니와, 이스라엘에서는 누구한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백부장에게 '가시오 믿는대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하셨다. 바로 그 때 그 하인은 나았다."(마태 8, 10.13)


치유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 치유의 방법은 하느님께 맡긴다. 치유는 빨리 일어날 수도 있고 ,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치유는 생명과 관련되었을 때 더 필요하지만 모든 결과를 맡겨 드리는 것이 신앙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계신다. "어느 아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대신 주겠습니까?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 그대들이 악해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대,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11,11~13)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와의 친교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친교를 더 긴밀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신다. 성령의 선물은 우리의 삶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사랑의 표지이다. 평화는 성령의 동반자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그 결과이다. 치유에 대한 성서 이야기는 치유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다음의 치유 이야기들을 살펴보라. 신앙이 있는 여인(마르 5,25~34 참조),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요한 5,10~13 참조), 예수께 간청한 나병환자(마르 1,10 ~42 참조), 청하지도 않은 베드로의 장모(마타 8,14~17 참조), 치유되기를 거절한 게라사의 미친 사람(루가 8,26~31 참조) 등은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된 사람들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요구에 대해 자유롭게 응답하신다.


8. 전례기도

상징과 전례는 중요한 것이다. 그것들은 말로써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말과 의식이 함께 짜여져서 특별한 기도 형식을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기도에 이용한다. 몸짓, 춤, 고개를 숙이는 절, 무릎 꿇음, 두팔을 벌림, 땅에 엎드림, 땅에 친구 등, 이미지와 상징들이 우리 주위에 가득하다. 전례기도는 독특한 방법으로 말과 상징물을 사용한다. 물과 불, 촛불과 향료, 빛과 어두움, 바위와 스폰지 - 수 많은 상징물들이 기도의 의미를 전달한다.


몇 가지 이러한 방법이 우리의 기도 형태에도 들어 있다. 종종 한 공동체가 모이면, 공돋기도의 전례를 취한다. 그것은 말과 상징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서약식에 있어서 우리는 성서와 촛불과 말씀에 연결된 프란치스칸 상징을 사용한다. 많은 신앙적 행사에 전례를 이용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기도의 한 형태이다.


개인기도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상징물을 이용할 수가 있다. 때로는 피정에서 바위나, 나뭇가지가 상징물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예술품이 한 상징이 되어서 한가지 특별한 체험을 상기시킬 수 있다. 전례기도는 우리의 인간성에 잘 어울리는 기도이다.


9. 화살기도

하루 종일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표적물을 사용할 수 있다. 간단하고 짧은 기도문은 우리를 예수님의 현존 안에 있게 한다. '예수기도'는 예수님이 현존하심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갈 때 이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다른 일을 시작할 때 이 기도를 할 수 있다. 이 화살 기도는 우리를 우리의 생명의 주인과 함께 살게 해준다. 이 기도문은 기도생활에 유용하고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도에 대한 다른 생각들

앞에 제시한 방법들이 기도의 방법을 총망라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다양한 방법에로 나가는 문을 열어준 셈이다. 그 문은 기도의 여러가지 형태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여 해보라고 우리를 초대할 것이다. 하느님은 종종 우리를 이 형태에서 저 형태로 이끄신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로서 몇 가지 형태로 섞어서 혼합형태를 만들어 볼 수가 있다. 각자에게 알맞는 기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라. 예수님과 친밀해 지고 그 모든 결과를 삶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기도방법을 배우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의 일상 생활이 기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누구를 용서해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할 의무가 남아 있다. 용서하지 못함은 기도 성장에 심각한 장애가 된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욕심에 몰두해 있으면, 우리 영혼이 기도에 대해 갈망하는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일상 생활에 기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기도도 하기 어려워진다. 배우자를 소홀히 한다든가, 가족을 잘 보살피지 않는다면 기도가 요구하는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어렵다고 하여 복음 말씀을 소홀히 하면,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조금밖에 열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내적인 친밀함이 없이 기도의 외적인 몸짓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은 시체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시체를 보고 참 곱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내적인 변화 없이 외모에만 관심을 둔다.


우리의 프란치스칸 생활 양식은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우리의 삶을 준비해가는 안전한 방법이다. 프란치스칸 공동체에 대한 깊은 신뢰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도와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훌륭한 지침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도의 시작은 하느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주님의기도'는 하느님을 훔승하고, 하느님이 하늘에서 찬양받고 흠숭받듯이 땅에서도 흠숭과 존경 받기를 기도한다. 첫째 초점은 하느님께 있다. 이것이 기도의 좋은 안내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6,9~10)


일단 우선권을 드렸으며, 그 다음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청하기는 쉽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빵이 필요하다. 이 상징을 더 넓히자면, 생명의 빵을 포함할 수 있다. 우리의 약함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응답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알고, 우리가 갚지 못한 하느님께 진 빛을 용서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기꺼이 용서하겠다고 말할 배짱도 생긴다. 용서는 참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용서를 이 기도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주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소서. 우리도 빚진 이들을 용서했듯이 우리 빚을 용서하소서."(마태 6,11~12)


예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그 약함을 깨달을 기회를 주신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든 유혹을 쉽게 이겨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를 유혹받는 환경에 두지 말라고 기도한다. 우리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유혹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를 다시 올바른 길로 데려다 줄 분이 필요하여 기도한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오 6,13)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기도'애 대하여 몇 가지 묵상한 것을 썼다.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글'아라는 책에 있다. "아버니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는 부분에 대한 묵상이다. 이 묵상 글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의 맛을 보여준다.


주님의 기도문 풀이

주여,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으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매사에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생각을 하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힘과 영육의 감각을 다른 데에 허비하지 않고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침으로써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이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고

다른 이들의 선을 마치 우리 것인양 즐거워하며,

불행 중에 있는 이들을 동정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음으로써

우리 몸과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헤게 하소서.


잠깐동안 이 글을 음미해 보아도 주님의 기도의 뜻이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기도가 요 구한 것이란 얼마나 큰 것인가! 기도가 발전할수록 우리의 행동도 변화한다. 편견은 수용으로 변화되고, 증오는 용서가 되고, 분노는 사랗하는 힘으로 바뀐다. 무관심은 헌신으로 바뀌고, 자기 중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된다. 경쟁은 협조로 바뀌어 간다. 즉 생활 자체가 우리의 기도는 실질적인 것이고 효과가 있구나 하는 것은 예시해 준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우러지소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8조

예수께서 성부의 참 흠숭자이셨던 것과 같이 회원도 기도와 관상이 자신의 온 존재와 활동의 원동력이 되도록 한다. 회원은 교회의 성사 생활, 특히 성 체성사에 참여하고, 교회가 제정한 형식에 따라 전례기도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재현해야 한다. 


해설

기도와 관상은 '회원들의 존재와 활동의 원동력'이다. 이것은 중요한 책임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 누구를 섬기는가를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충실한 복음적 삶을 살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이다. 예수님께로 우리가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의 복음적 생활을 활성화시킨다. 이 중에서 기도와 관상은 특별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자신의 사명이 불확실했을 때 그 길을 가리켜 준 것은 클라라와 실베스텔의 기도였다. 형제들이 가난을 거슬러 분노하였을 때, 관상의 동굴이 성인 혼자 슬퍼하고 진정시킬 기도소였다. 그리고 성인은 자신이 세운 그 수도회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완덕의 거울 81 참조).


클라라는 산 다미아노의 그녀의 독방에 병으로 누워 있을 때에도 전례에 참례하였다. 하느님은 그녀가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쳤을 때, 그녀에게 은혜를 내리셨다. 가난의 특전을 얻어내고자 평생을 분투하였을 때, 기도는 언제나 힘이 되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종종 문제거리를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표징이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작은 빵조각 속으로 들어오셨다. 프란치스코는 그 겸손과 약함을 얼마나 모방하고자 하였는지! 성인의 성체에 대한 찬양은 경이로움에 넘친 찬양이다.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6~29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 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28)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시편 61,9)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 지십시오(1베드 5,6, 야고 4,10 참조).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성체성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방법을 분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교회를 깨끗이 치우고, 제대보를 청결하게 하고, 독서자나 특별한 성체의 봉사자로 봉사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이 특별한 의식을 사랑과 존경과 기쁨으로 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당신을 윌에게 전부 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전부 드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우리 서약을 일깨워주는 한결같은 표징이며, 복음서 전체는 우리의 생활 방식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성실하도록 불러주고, 우리가 성실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성서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 말씀은 우리를 새로운 생활로 이끌어 준다. 우리는 영성체로 주님을 모시며 그분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일상 생활에서 살듯이 전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성체 성사 외에 또 다른 전례적 활동이 있다. 우리는 성체성사가 우리생활에 유일한 전례적 활동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를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는 전례적 의식은 성체성사 외에도 많이 있다. 좋은 기도 봉사는 우리를 예수님께로 다가가게 해준다. 공동 관상 기도시간은 우리를 주님께로 나가도록 길을 터 준다. 프란치스칸은 모든 전례와 의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께로 다가갈 것이다. 형제회는 기도 모임을 여러가지로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풍요로운 전례를 가진 백성이다. 이 전례로써 공동체를 예수님께로 이끄는데 이용하라. 말씀의 전례는 강력한 기도시간이 될 수 있다. 창조적이 되자!


이것은 우리 프란치스칸 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회칙이다. 약속에 충실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라. 회칙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이것은 우리 생활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예수님과 기도로 만남, 성령의 힘을 얻음, 창조주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마태오 6,7~8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수다를 떨지 마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들을 닮지 마시오. 여러분의 아버지께는 여러분이 청하기도 전에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마태오 7,21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


루가 6, 27~28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시오.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며 헐뜯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오.


<프란치스칸 공부>

클라라가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여하다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35장

크리스마스날 밤, 산 다미아노에 머물던 충실한 그리스도의 정배 성녀 클라라는 심한 중병에 걸렸으므로 다른 자매와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러 성당에 갈 수 없었다.---(중략)--- 그러나 그의 정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클라라 성녀가 이 위안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주께서는 성녀를 기적적으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운반하여 밤중 기도와 자정미사에 참여케 하셨다. 그 뿐 아니라 거기서 영성체까지 하고 미사가 끝날 때 예수께서는 다시 성녀를 병석으로 운반하였다.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성무일도가 끝나자 자매들은 성녀 클라라에게로 돌아와서 '클라라 원장님, 이 거룩한 성탄날 밤에 우리는 얼마나 깊은 영적 위안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원장님도 같이 가실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하고 말했더 성녀는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사랑하는 자매, 그리고 나의 딸들, 나는 지극히 복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엄숙하고 거룩한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와 우리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나는 우리 사부이신 성 프란치스코 성당미사 예절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리고 내 육신의 귀는 영혼의 귀처럼 그 성당에서 드리는 성무일도와 성가와 올겐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더구나 거기서 성체를 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내가 받은 은혜를 기뻐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시오."


적절하게도 클라라는 텔레비젼의 주보 성녀이다. TV는 많은 지도가 필요하다. 클라라 성녀는 도움을 줄 수가 있다.


<토론 주제>

1.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2. 프란치스칸이 복음적 생활에 충실하기 위하여 기도는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3. 당신은 어떠한 형태의 기도를 사용하는가?

4. 관상기도에 들어갈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이로움'이 어떻게 관상적 기도와 연관이 되는가?

5. 기도가 당신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6. 당신은 무엇을 기도의 가장 큰 장애로 보는가? 어떻게 그 장애를 처리하였는가?

7. 회칙 8조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하는가?


<성서묵상>

+루가 11,1~13

기도에 관한 내용에 대하여 당신의 해설을 쓰시오, 한밤중 방문에 대한 이야기의 결과를 생각해 보시오. 11~13절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에 대하여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