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 처럼 제 16장 거룩한 재속성

Margaret K 2019. 3. 16. 02:15

프란치스코 처럼 


제 16장 

거룩한 재속성




재속 프란치스칸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께 경배드리고, 일하고, 쉬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수도자가 아니지만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소명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기쁨과 슬픔과 어려움 등 세상의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재속 프란치스칸은 기쁨을 찾는다. 프란치스칸 삶의 신비는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이를 헤쳐 나가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 행위들이 프란치스칸 삶의 방향과는 다르고, 복음과는 반대되는 일들이 많아 프란치스칸은 세상 안에서 도전을 받는다.


1.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매 순간 어떤 결정을 할 때 무신론적인 경향이 많이 있다.


일반인은 물론 신자들조차도 어떤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개인적인 선호나 편리함이 우선되고 복음은 종종 무시된다. 현대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는 '이상', 또는 개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보다 오로지 '나'에게 초점을 맞추어, 나에게 이로우면 올바르고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 때 하느님과 복음은 아주 쉽게 잊혀진다.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무신론과 자기 중심적 결정을 결코 따르지 않는다.


2.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보다는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에게 쉽게 편승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과 가까이 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힘이 있는 단체에 속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세상 속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므로 힘이 있는 단체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도 없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또 쉽게 잊혀진다. 그러나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비복음적인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프란치스칸 삶의 태도는 사람들을 편협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고 소외된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3.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보장된 미래와 안정적인 상태를 갈망한다.


보장된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어떤 이들은 소위 '일 중독'에 빠져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양의 일을 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기다림'이란 마치 피해야 할 질병으로 여겨진다. 일을 서둘러서 많이 한다고 하여 가족이나 친구와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복음적 삶을 사는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프란치스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적 살을 사는 것이므로 이에 맞게 적절히 일을 하면 된다. 인생이란 서둘러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관계를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므로 프란치스칸 삶을 여유 있게 관조하고 음미해야 한다.


4.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세력에 뜻을 같이 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대해, 강대국은 약소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난한 제3세계는 부자나라, 힘 있는 나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세상 어디선가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곳은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역겨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어야 할 자원의 분배도 전혀 복음적이지 않으므로 프란치스칸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와 자원이 골고루 나누어지도록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가난하고 힘 없는 자를 무시하는 권력에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


5. 우리는 이민자들로 인해 우리 생활이 위협당하고 안락한 삶고 직장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이들의 문화와 생활풍습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기 불편하고 심지어는 참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이민자들이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프란치스칸 역시 이러한 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 이웃에서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은 이민자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6. 많은 사람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을 표현화시키지 않은 뿐이지 마음에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다른 문화와 사람들에 대해 이질감과 위협을 느끼므로 잘 어울리지 못하고 다른 문화와 사람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은 타인종과 타문화를 포용하는 자세를 기르고 인종에 대한 편견을 근절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7. 성차별주의는 보편적으로 만연되어 있다.

남아 선호사상으로 인한 성차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태도는 강하게 오랜 기간동안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 사회 안에는 '성'을 모독하고 훼손하는 말고 행동이 만연해 있어 많은 이들은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보다는 서로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이다. 프란치스칸은 성차멸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장 다루어야 한다.


우리의 이웃은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자, 동성연애자, 선한 자, 악한자등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요구이지만 프란치스칸은 이를 잘 인식하고 세상 안에서 복음적 생활태도를 가져야 한다.


8. 많은 나라들이 무기생산에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


어떤이는 방어용으로 무기 생산이 불가피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라서 지지한다고 한다. 이렇듯이 무기 생산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면서 타당한 이유들을 찾지만 이것이 가져다 주는 것은 죽음 뿐이다. 프란치스칸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돈을 잘 쓸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이러한 지출을 유심히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파괴적인 투자보다는 생산적인 투자에 힘을 쏟아야 한다. 프란치스칸이 이러한 문제들을 회피한다면 복음적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9.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예를 들면 정신병자, 알코올 중독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범죄한 이들이 프란치스칸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다.


정부는 그들이 힘 없는 자들이란 이유로 그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그들을 위해 쓰여져야 할 예산을 교묘한 방법으로 삭감하고 다른 공공자금으로 쓴다. 이와같이 궁지에 빠지 자들을 돕는 것보다 회사나 사업체를 장려하고 보조하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프란치스칸은 세상에서 소외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투신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여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능력이 요구되지만 우호적인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노력해야 한다.


10. 가톨릭 신자들은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늘 직면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교회로 지칭된다. 성령은 교회를 통해 자유롭게 활동하고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므로 우리는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다수결로 문제를 처리하는 민주적인 교회가 아닐뿐더러 신자들의 요청을 무시하는 권위주의적 교회도 아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성직자를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로 이루어져 있으나, 율법만을 강조하지 않는 용서의 교회이다.


프란치스칸은 교회의 가르침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이지만 이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인 성체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를 읽음으로써 늘 깨어있게 되고 성서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진리의 증거자가 되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성체를 모심으로써 영혼을 살찌운다. 프란치스칸은 복음에 충실한 사람을 살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데 복음의 핵심은 사랑과 봉사이다.


우리는 사랑을 쉽게 말하고 함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여준 사랑은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아무런 울타리도 없는 사랑이다. 사랑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 핍박을 받고 슬퍼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사랑은 폭력 앞에서 흔들임이 없고, 실패와 배신과 거절에도 멈추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이 이루지 못하는 사랑을 하느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


11. 정의를 실천함은 복음을 따라 살려는 프란치스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해 주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대학살과 핵폭발이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나고 있고 가출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잃고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춘과 노예 같은 생활로 빠져든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한가로이 집에서 청소를 하는 동안, 도시의 다른 곳에서는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미사드릴 장소가 없어 어려워하고 있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교회를 폐쇄하고 통합하는데 온갖 힘을 다 쓰고 있는 경우가 있고 , 또 어떤 사람은 짐을 잃고 방황하는데 한쪽에서는 집값이 올라 재산을 모으는 데만 관심을 쏟는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이 존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재속성은 세상 안에서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도록 한다. 프란치스칸은 구세주도 아니고 세상에서 벗어나 고고하게 사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의 소명은 개인이나 형제회가 정의를 실현하도록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노력하며 불의가 존재하지 못하도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모든 것이 바뀐다. 복음에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려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그 여자는 생명을 얻게 된다(요한 7,53~8,11 참조 ) 니코데모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이 진리를 알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고 (요한 3,1~17참조) , 세관장이던 자케오는 예수님이 그 집에 머무르심으로 새 삶을 찾게 된다(루가 19,1~10 참조). 율법학자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시지만 마음이 굳어버린 그들의 불행을 보시고 탄식하신다(루가 11,45~46 참조).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시자 사회에서 추방되었던 그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된다(마태오 8,1~4 참조). 예수님께서 죄수로서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빌라도는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운다(요한 19,8~11참조). 예수님께서 손이 오르라들었던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비정함과 완고함,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마르코 3,1~6 참조).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던 청중에게 이사야서를 읽어 주었을 때 그들은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루가 4,16~21 참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욕망을 아시고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겨야 함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진정 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마르코 10,35~45 참조). 소경이 눈을 뜨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고 (요한 9 참조), 죽음의 순간에 참회한 죄수는 낙원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린 죄 많은 여인을 비난하였던 시몬은 예수님으로 부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지 배우게 된다(루가 7,36~50참조).


예수님께서 독선적인 율법 해석을 하는 율법학자들을 질타하신다(마태오 23,13~33 참조). 예수께서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심으로써 그 과부는 사회 안에서 새로운 삶과 신분을 찾는다(루가 7,11~16 참조). 제자들은 참 신앙인라면 가져야 할 무조건적인 선함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갖게 딘다(마태오 5ㅡ43!48 참조). 세상에서의 예수님이 거룩한 삶은 분명했다. 어떠한 경우도 복음 전파에 있어서 재회되지 않았다.


정의는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 의지하고 어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지 완고하거나 거칠게 대하거나 거리를 두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작장에서 갈등과 괴로움을 겪지만 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해를 주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충분한 대화와 포용력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성숙한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족 상호간이나 부부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아픔을 주기 위해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애정 깊은 대화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부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자녀에게 축복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사랑하는 것을 봄으로써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와 융통성이 없는 규율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아무런 지침과 제약이 없는 것 또한 자녀를 망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와같이 원칙과 규율을 적용할 때 융통성과 공정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규율은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복음에 바탕을 두고 심사숙고해서 정해야 한다. 우리 삶 구석구석과 생활의 어떤 것도 복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복음을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성서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갈라디아 5, 6)라는 말씀은 정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다. 우리는 매일 이 말씀을 실천하도록 정의로 불리움을 받았다. 


우리가 복음을 생활화하기 위해 우리는 이웃에게 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고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어야 하며, 또한 굶주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친구나 배우자의 부정적인 일을 마음에 품고 '절대 용서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거나 이런 것을 이용하여 가족과 멀어지도록 이간질하면 안된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쉽고 편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적극적인 참여를 뜻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랑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프란치스칸은 이런 정신적인 노력과 긴장으로 더욱 성숙되도록 배워야 한다. 마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구경꾼들처럼 박수치고 고함지르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경기를 이끌어가는 선수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은 이웃이 새 삶으로 다시 태어날 때 아주 작은 성취에도 서로 기쁨을 나누고 축하해야 한다. 이렇게 프란치스칸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하느님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찬미를 받아야 하고 우리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잔치상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조차 프란치스칸은 너무 종교적이고 지나치게 열심이라고 지적할 때 우리는 실망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다. 많은 문제들이 쉽게 풀리지 않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지속적인 노력을 요하는 어려운 문제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다가가면 성령께서는 좋은 해결방안을 알려주시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도록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문제의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시도록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해 의견이 다른 분들과 일반적인 상식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나누다 보면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은 통찰력을 얻게 된다. 대화에 임할 때 우리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는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어떤 방안이 모색될 때까지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하며 고요히 성령의 현존 안에 머물며 대화에 임해야 한다.


영적 권고 27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가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조심할 것들

세상에는 '성공 비결'에 대한 책과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나치게 자신의 발전과 성공만을 강조한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이기주의를 자아낼 위험이 있어 분별력이 필요하다. 자아 개발의 목적이 이웃과 하느님께 봉사를 넓혀가기 위함이므로 이웃과 단절된 자아개발은 복음적 생활을 하는 프란치스칸에게는 옳은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제공되는 도구가 도움이 되도록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지만 옹색한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해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 하나가 그 지체들입니다"(1고린 12,27)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지체이므로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이기적으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복음은 자신이 받은 것을 공동체와 함께 나누라고 명한다. 만약 이웃과 함께 길을 간다면 서로 관심을 갖고 나누어야 한다.


이상은 현실이 아니다. 어떤 그룹이 자주 완고하고 비판적이어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문제에 절대적인 답이 있다고 주장하면 주의 깊게 살펴야 난다. 왜냐하면 그런 해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을 살기 위해 항상 문제를 사려 깊게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게서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그 성령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우리 생활 깊이에까지 관여하신다. 성령으로 무장된 우리는 충실하게 그의 표지가 되어 확고한 믿음으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어려운 문제가 많아도 이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잠언 10,12~14, 17~19

미움은 싸움을 일으키고,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준다.

슬기로운 이의 입술에는 지혜가 어리고.

지각없는 자의 등에는 몽둥이가 어울린다.

지혜로운 이들은 예지를 간직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곧바로 몰락을 불러온다.


교훈을 지키는 이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고,

훈계를 저버리는 자는 남을 방황으로 이끈다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졌고,

험담을 내밷는 자는 우둔한 자이다.

말이 많은 데에 허물이 없지 않고,

제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깊은 사람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14조

선의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을 더욱 형제적이고 복음적인 것으로 건설하도록 불리운 회원은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 더 완전한 인간이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크리스천의 봉사 정신으로 자신의 책임을 힘껏 완수해야 한다. 


해설

교회에 봉사하려는 사람은 이 회칙을 읽어야 한다. 회칙 14조는 우리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세상에 나가서 시대의 징표를 읽기를 기대한다. 이 회칙 안에는 우리가 형제적이고 복음적인 세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대담성까지 포함되어 있다. 


출발점은 가족적 기능과 형제적 기능이 있다. 그것은 기혼자들의 프란치스칸 생활, 독신자들의 프란치스칸적 생활과 관계가 있다. 복음 생활을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들고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힘들 미칠 수 있다. 그래서 겨자씨가 자라나 커다란 관목 숲을 이루는 것이다.


14조를 실현하기 이해서는 성실함이 그 열쇠이다. 우리는 우리의 여정에 성실해햐 하고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이상 속에서 항상 기민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그 이상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매일 당면하는 문제들을 대해야 한다.


1 보다 형제적인 세상, 보다 복음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복음적인 이상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느닌 나라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묵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 원수가 잡초를 뿌려 놓고 간 밀밭, 겨자씨,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 진주를 찾은 상인, 밭에 뭍힌 보물, 바다에 던져진 그물 등. 


1) 왕국에는 복음의 밭 속에 뿌리를 내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2) 왕국에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이 있다.

3) 왕국에는 신앙이 굳은 사람들이 있다.

4) 왕국의 집은 시작에는 작지만 점점 커진다.

5) 왕국에는 보물과 진주들이 있다.

6) 왕국 사람들은 보물과 진주를 갖기 위하여 있는 것을 다 판다.

7) 왕국 사람들은 효소처럼, 안에서부터 세상에 스며들어간다.

8) 왕국 사람들은 그물로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을 잡는다.

9) 왕국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릴 줄 안다.

10) 왕국 사람들은 착한 생활 쪽에도, 나쁜 생활 쪽에도 있다.


2. 프란치스칸은 자신이 복음적 생각에 풍성해져야 복음을 실행할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면, 우리 자신의 삶과 세상에 복음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힘은 우리가 복음에 충실하고 복음을 생활화할 때 일어난다.


3. 복음을 살면 예수님이 메시지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이것이 복음화이다. 복음적 생활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매력이 있다. 우리는 복음적 생활을 해야할 이유를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진리를 알아듣고 우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앙을 갖게 된다. 


4.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선의의 사람들과 같이 한다. 우리의 초점은 복음의 이상에 있다. 우리는 훌륭한 계획에 협력한다. 모르는 결에 우리는 서로를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나간 '외톨이 방랑자들'이 아니다.


5.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효과를 보게 된다. 우리의 능력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왕국 건립 활동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일을 하다보면, 이일 저일을 할 수 있게 된다. 


6. 이것이 예수님과 성령을 통하여 창조된 하느님의 왕국이다.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성령께 응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다 '형제적이고 복음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기도는 증요한 요소이다(회칙 14 참조)


7. 왕국 건설의 길은 많다. 때로는 측은지심이, 때로는 복음 선포가 왕국을 세운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사람들을 사랑으로 만나는 것,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 성서 공부와 복음 나눔도 건전한 가정 분위기도 왕국을 세운다. 본당 일을 돕거나, 교회의 활동에 봉사하는 것 등. 보다 큰 능력, 친구들의 감화 등 모두가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길이 된다. 


복음 확장을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느 목록을 써보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다.


로마서 8,27~28

마음을 꿰뚤어보시는 하느님은 영이 뜻하시는 바를 아십니다. 영이 하느님께 맞갖게 성도들을 위해 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거니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하느님의 뜻대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프란치스칸 공부>

타우 십자가

에제키엘 예언서에 나오는 타우는 성서적 의미로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이고 타우로 표시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너는 저 성읍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미에 타우표를 해 놓아라"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성읍을 돌아다니며 쳐죽여라, 아까워하지도 말고 가엾이 여기지도 말아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에제키엘 9ㅡ4!6) 5세기경 회개자들은 타우 표시를 지녔다.


또 다른 연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지어 타우 표시를 지니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셨던 프란치스코 성인도 타우에 대해 잘 이해하고는 그 때부터 타우로 서명하기도 했고 십자군들도 신앙을 위해 전쟁에 참전하면서 방패에 타우 표시를 사용했다.


프란치스칸은 우리 생활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뜻으로 타우를 사용한다.  한국 국가 규정 19조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독창적인 표지로 타루를 착용한다." 고 되어 있다. 타우 십자가는 1883년 회칙에 의해 의무적으로 착용했던 스카풀라나 새끼줄이 아니고,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성 프란치스코의 기념 메달도 아니다. 그렇다고 타우 십자가를 수도자들의 개량된 제복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은 타루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징으로 여겼다. 


한국에서 타우 십자가는 재속 프란치스칸임을 나타내는 표지이므로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타우 십자가를 목에 건다. 타우는 구원의 상징이며 선택되고 구원된 하느님이 사람이라는 표이다. 성인은 사랑으토 타우 십자가를 끌어안았고 성인에게 타우는 아주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프란치스칸은 자신이 예수님께 봉헌된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믿고, 생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우의 착용은 복음의 삶을 살겠다는 약속의 표지인 것이다.


<토론 주제>

1. 당신이 이해하는 '재속에서의 거룩한 삶'을 설명해 보시오

2. 당신은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3. 우리는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그 중 어떤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왜?

4. 개인적으로 당신은 가진 것을 어떻게 이웃과 나누는가?

5. 재속 프란치스칸 삶에서의 정의의 역할은 무엇인가?

6. 당신은 일상 생활 안에서 이웃과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가?

7. 당신에게는 타우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 묵상>

+미가 4,1~4

이 교과 과정에 대해 당신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이 교과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이것을 정의와 어떻게 관련을 짓는가?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 지침을 얻는가? 사람들이 제각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