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 14장 일흔 번짹 일곱 번

Margaret K 2019. 3. 16. 02:13

프란치스코 처럼


제 14장 

일흔 번짹 일곱 번


갈등은 어디에 숨어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일상사의 한 부분이다. 갈등은 때로는 국가 간에 존재하고, 그룹간에 또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곳에는 희생자를 남긴다. 희생은 죽음이 될 수 있고 비난, 억압일 수도 있다. 갈등은 분노와 미움을 동반한 분열과 쓴맛을 남기게 된다. 갈등은 우리 사이에 잘 알려진 악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아주 비효과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길을 걷도록 불림을 받았다. 이것은 복음에서 명백히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은 용서의 필요성에 대하여 명백히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용서를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용서는 복음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마태오, 14~15)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말하거니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오"(마태오 18,22)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칠 때에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 "우리에게 빛진 사람을 모두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가 11,4)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은 확신 있는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덧붙여 말씀하신다. "그리고 기도하려고 서 있을 때 누구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거든 그를 용서하시오. 그래야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마르코 11,25) 계속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시며 말씀하신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다가 형제가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화해한 다음에 와서 바치시오."(마태오 5,23~24) 복음 말씀은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용서는 생활의 일부분이고 복음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의 기본이다. 


생활 속의 예

갈등을 야기하는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알코올 중독에서 겨우 벗어난 한 신자가 본당 사제가 가끔 맥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했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 상상해 보자. 그는 본당 신부가 술이 취했다는 말을 퍼뜨린다. "나는 신부가 술에 취해 맥주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말은 퍼져 나간다. 사람들은 이 말을 전한 사람이 술취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게 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여전히 믿게 된다. 사제와 이 사람은 이것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과 감정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남편들은 자주 직장에 늦게까지 머무르며 일을 한다. 그의 아내에게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한 일이다. 아내는 남편이 그렇게 많은 일을 가졌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아내는 남편이 좀 모자란다고 의심한다. 그녀의 의심은 소리치며 싸움을 하기까지 이르고 남편의 그녀의 비난을 인전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그가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해결해햐 할 일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떤 부부는 밖에서 보면 아주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실질적인 대화가 없다. 그들은 서로 마음을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감을 느낀다. 가끔,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원망과 분노가 오랫동안 존재하고 이 분노는 애꿏은 아이들에게 폭발한다.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은 6개월 이상 회합에 나오지 않았다. 평의회는 어떠한 대화나 노력도 하지 않고, 그가 계속하여 결석한다면 형제회로부터 제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 회원은 평의회의 위협을 받고 분노하게 되고 화가 난 상태에서 평의회에 분노가 담긴 편지를 써 보낸다. 평의회는 다시 분노가 담긴 답장을 보내게 되어 결국 그 회원은 형제회의 생활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며 형제회를 떠나게 된다. 어떻게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소리치고 싸우는 모습은 불길한 침묵으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살얼음판 걷듯 조심스러워 한다. 두 적대자는 서로를 피한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내리기 위한 비열한 방법을 찾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지만 감추어진 복수의 방법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모임은 논쟁에 불을 붙이는 무서운 시간이 되어버린다. 나중에는 이 논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교육하는데 있어서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한 사람은 지나치게 관대하여 자녀들이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하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나치게 엄격하여 자녀들이 정해진 규율을 반드시 지키도록 해서, 지키지 못하면 그들에게 벌을 준다. 이러한 문제는 배우자 사이에 끝이 없는 논쟁을 야기한다.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에 성적, 감정적 학대 또는 저속한 욕설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이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 어린이는 죄의식을 느끼고 수줍어하게 되며 더러움을 느낀다. 어른이 되었을 때 과거에 발생했던 무서운 일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분노와 쓴 감정이 남아 있게 되고 어떠한 어른이든 믿기가 힘들어진다. 미움의 감정은 자라게 되고 쓴 감정은 계속하여 남아 있게 되어 이러한 감정의 침해는 이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이러한 내적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어느 한 가족 모두는 서로를 사랑하고 열심히 일했다.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자신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에 대하여 긍지를 느꼈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돕는 많은 위원회에서 봉사했다. 그들은 신앙과 행동에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녀 중의 하나가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가족 구성원들은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 하느님은 왜 그들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원망과 함께 신앙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연 어떻게 해야 그들이 하느님을 용서할 수 있을까?


데레사는 항상 자신은 낙오자로 생각해 왔다.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데레사는 그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늘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비하시켰다. 그녀가 물론 잘못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비난을 받아야 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을 비난하였고 자신을 미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곳으로 이사했을 경우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고 자신에 대한 미움과 억압은 여전하였다. 데레사가 어떻게 그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본당 신자들이 새로 부임한 사제 때문에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한 쪽은 그들의 신앙과 활동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과 전망을 갖게 하는 새로운 분위기를 좋아했다. 다른 한편은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을 부정하는 좁은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끔 사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무엇은 허용되고 무엇은 허용되지 않는 지에 대한 말의 난타전으로 이어졌다. 신자들은 화가 난 채 서로를 비난했다. 신앙이 약해지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또는 과정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도록 한참 시간이 지났어도 서로를 비난했다. 본당은 갈라지고 깨어져 사람들은 서로 말을 안하게 되고 중재를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용서를 가져올 수 있을까?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 재속 프란치스칸도 갈등이 존재하는 곳에 있게 된다. 우리가 용서의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쓴맛과 미움과 분노와 비난 속에 매어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의 친교에 마음의 문을 여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생각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일회성 용서보다 본질적인 용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는 용서를 이한 준비된 마음과 자세를 계발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며 원수들조차 이러한 믿음을 근거로 신중히 대하게 된다. 인간은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용서의 폭을 넓혀주고 우리 자신이 문제임을 알게 하며, 자신 안에서 남을 성가시게 하는 요소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게 한다. 


우리는 갈등에 대한 마음 자세를 바꾸도록 자극 받도 있으며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이다. 우리는 상처와 원망과 분노와 갈등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삶의 태도로 그러한 감정을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의 불에 휘발유를 쏟아 붓는 것보다는 분노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칸도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의 생활방법은 갈등과 상처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가 계속 변화되어가기를 요청하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은 갈등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지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익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이점에 대하여 이러한 말씀으로 가르치고 계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옵니다."(루가 23,24)


우리 삶을 자세히 살펴보라.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쉽게 무관심한지, 우리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얼마나 쉽게 멀리하려 하는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무시하는지, 우리에게 상처를 가져 다 주는 사람들과 얼마나 쉽게 싸우려 드는지, 잘못이 드러났을 때 본성적으로 얼마나 쉽게 우리를 변호하려 하는지, 변화하기 위해서는 포기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두가자가 다 요구된다. 우리는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버리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둠이 가져오는 것들을 버리고 삶에 새로운 빛을 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용서할 뿐만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이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가 어떠하든,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나서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자비를 구했는데도 그 자비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절대로 없도록 할 때, 나는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하느님의 종이며 그대의 종인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알고 있겠습니다. 그 후에도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여 그를 주님께 이끌도록 하시고 이런 죄지은 형제를 항상 불쌍히 여기십시오."(어느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9,11) 용서의 과정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1. 용서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움을 청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라.

2.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도 갈등을 일으키는데 일부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당신에게 분노의 열기를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하라. 회피하거나 부정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여라.

3. 당신의 마음 안에 원한과 분노와 미움이 있음을 인정하라. 만일 그것을 당신의 마음 안에 느낀다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밝은 빛 가운데로 가지고 나와 살펴보라. 정직한 마음은 우리가 분노와 원한과 미움을 간직하고는 평화롭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실질적인 프란치스칸이 되어 당신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라.

4. 우리는 자신의 평화를 찾을 뿐만 아니라 원수들의 평화도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기를 바라신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아 하는 일이다.

5. 우리가 갈등을 일으킬 때 자기 반성을 함으로써 우리가 해야할 일을 알게 된다. 우리 안에서 문제를 만들어 낸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6. 우리가 회해의 길에 들어서고 분노를 멀리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기도해야 한다. 가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하는 늪지대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7. 화해는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화해는 상대방이 우리와 똑같이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만나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용서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며 화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편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부담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태오 5,44~46,48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그분은 약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습니까?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 하늘에 게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전체 적으로 성장하는데 장애물이 된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 생활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에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면 '악수하고 화해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혼란과 잘못은 내면으로 숨어버리기만 한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치유보다는 좌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용서의 다른 차원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용서하는 그 용서를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칼 메니거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정신 병원에 입원한 97%의 환자는 하느님이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모두 정신병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에 무관심하게 된다.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교만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옛날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지 못함에서 오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우리의 삶에서 지워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용서는 내가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과 일치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갈등의 요소는 남아잇을지도 모르지만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는 원한과 분노와 미움에서 오는 고통과 부탇스러움없이 그러한 문제들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려는 시도를 회치하든가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갈등은 풀리지 않으 ㄴ채로 우리의 삶에 스며들 것이며 가장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해 버릴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떠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그는 간음죄로 잡힌 여인을 죄에서 떠나게 해주셨고 베드로가 충동적인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갈등과 싸움에서 매번 승리해야 한다고 느끼는 부담에서 해방시키시고, 용서와 자유의 길을 제시하신다.


상처의 발생

다음은 가난한 수녀원에서 일어나 이야기이다. 어떤 수녀의 노모가 돌아가셔서 수녀원의 원장 수녀는 어머니를 잃은 수녀를 방문하여 슬픔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원장 수녀를 비롯한 몇몇 수녀는 먼 길을 자동차로 달리기 시작했든데 오래된 차라 고장이 나고 말았다. 어머니를 잃은 수녀는 그들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나서 늦었다는 애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슬픔에 잠겨있는 수녀에게 더 마음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수녀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수녀들이 늦게 온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처의 근본 원인은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때로 우리는 다시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용서할 수 있는 근원을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잘못을 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이런 과정을 받아들이고 견디어 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지나쳐도,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라. 사랑은 미움보다 강하다. 사랑에 머물로 있어라.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다른 이들과의 친교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배반과 배신으로 인한 상처은 너무 많은 고통을 가져오며 다시는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게 한다. 그러한 결정은 우리를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오히려 다시 상처를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것이 현명한 일이다.


자기도 모르는 결정이 상처와 고통을 가져왔을 때 하느님을 비난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요구에 맞도록 일을 정리하여 모든 일이 잘 되게 만들어 주시기를 기대하지 말아라. 당신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 가라.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고통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용서가 가져오는 선물

- 용서는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고통과 부담스러움에서 해방시켜 주고 평화를 가져다 준다

- 용서는 평화로운 정신을 가져다 준다.

- 용서는 우리 안에서 긴장을 완화시켜 원한과 분노의 감정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건강한 기회를 제공한다.

- 용서는 우리가 힘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도와준다. 분노와 원한은 우리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다.

- 용서는 우리가 내적인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긍정적이며 창조적이 될 수 있다.

- 용서는 평화의 도구가 되는 더 큰 자유를 가져다 준다.

- 용서는 우리가 인생과 인간에 대한 건전한 견해와 관점을 가지게 한다.


현명한 선택을 하라

갈등능 사람은 죽인다.

때로운 매서운 말로, 때로는 침묵으로,

갈등은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는다.

갈등은 사람들을 미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용서하지 못함은 사랑의 능력을 파괴한다.

그것은 사랑의 힘을 꺾어 버린다.

그것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그것은 우리에게 슬픔과 괴로움을 남긴가.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도 슬픔을 가져온다.

그것은 단결심을 파괴한다.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갈등의 결과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단지 놀랄 뿐이다. 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지.....

분명히 우리는 다시 그런 바보가 될 수는 없다.

아니면, 바보가 되고 싶단 말인가?


2고린토 1,3~4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 아버지 하느님은 찬양받으소서. 그분은 자비로운 아버지시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으로서 온갖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위로로 온갖 환난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17조

'회개하는 형제 자매'로서 회원은 자기 성소 때문에 복음의 강력한 힘에 자극받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내적 변화에 의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야 한다. 복음은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이 회개는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 이 자기 쇄신 과정에서 화해성사는 성부의 자비심의 특별한 표지이고 은총의 샘이다.


설명

프란치스칸은 복음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 특권의식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나다. 우리의 마음 자세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세리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특권의식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 장의 주제는 우리 자신에게 화해와 회개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근본적인 내적 회개의 계속적인 경험을 한다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회칙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각과 행동에 일치시키기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그리스도로 채워진 상태가 아님을 보게 된다. 만일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복음에 충실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뒤에서 다른 사람을 헐띁고 험담한다면, 이러한 행동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거짓을 말하고 정직하지 않다면, 또는 우리의 잘못을 감추기 위하여 진실을 저버리고 우리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예수님이 복음에 일치하는 길을 찾도록 회개하여야 한다. 우리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천재가 아니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회개가 필요한 죄인임을 알게 되고 고해성사를 보고 난 뒤에 회개를 삶에서 보여야 하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성사의 특별한 점은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는 방법을 보고 놀란다. 성사는 우리의 죄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더큰 회개와 매일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예수니미께서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하더라도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큰 회개의 삶을 살도록 요청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용서를 받는다면 우리는 또한 남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3~35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동료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용서받은 종에 대한 하느님이 태도를 나타낸다. 복음은 완곡하게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곤경에 빠질 것이다.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마태오 18,35)


화해의 성사는 개인의 성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성사이다. 우리의 죄가 많지만 매일 회개를 위하여 노력한다면 공동체는 그 이익을 얻는다. 화가 났던 사람들이 사과를 받고, 사람들을 거부하던 자세가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화되며, 남의 명예를 헐뜯고 상처 내는 말이 사랑 안에서 감싸주고 도와주는 말로 바뀐다. 그렇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예수님과의 이러한 만남은 전체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행위가 된다. 개인적인 변화가 무엇이든 간에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루가 22,32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이야기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태도를 볼 수 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베드로의 배반보다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힘있게 말하지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그대는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발생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가 회개했을 때 다른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초대하신다. "시몬, 시몬, 보시오, 사탄이 그대들을 밀알처럼 키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돌아오거든 형제들을 굳세게 하시오"(루가 22,31~32) 이 말씀이 주는 희망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 자매들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초대하신다. 이 성사는 항상 공동체에 의미를 주고 있다. 


우리가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 특권의식에서 벗어날 때 모든 사람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고 복음을 알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데 실패했음을 깨달을 때 사랑을 표헌할 보다 나은 방법을 배우게 되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를 느낄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화해의 성사는 인간 생활에 중심이 된다. 실패와 반성과 회개의 마음으로 "하느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고백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자기 쇄신 과정에서 화해성사는 성부의 자비심의 특별한 표지이고 은총의 샘이다."(회칙 7조)


<프란치스칸 공부>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 부인'을 사랑했다. 하느님에 대한 성 프란치스코의 믿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힘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평안함을 느꼈고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안락함을 느꼈다. 그는 일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안락함을 느꼈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많은 힘을 얻었다. 소박함으로 그들은 더 쉽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사람들과 사치스런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고 판단하지 못하도록 형제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들을 합당한 책임으로 부르시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므로 형제들은 이 사람들을 형제 자매로 대해야 한다. 복음은 '역 특권주의' 즉 가난한 사람이 성인 범주에 들어가고 부자가 죄인 범주에 들어가는 '역 특권주의' 를 참지 않느낟.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모든 사람은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고 마음을 협소하게 만드는 지나친 부유함을 피하여야 한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은 각자의 단순한 생활로 이웃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프란치스칸은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하며 풍부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 동료 58

형제들이 말로 평화를 전할 때에는 형제들의 마음에 한층 더 그러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여러분들로 해서 분노하지 않고 또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생기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그들을 여러분의 온화한 모습으로 평화와 자비와 화목으로 이끌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낮게 하고,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눈에 악마의 자녀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연 사람이다. 이것이 말하기는 쉽지만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을 잘 하는지 알고 있고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거나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얻으려고만 하고 주려고 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각도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가들의 말을 믿기가 힘들다는 것을 안다. 종종 우리가 특정 부류의 사람의 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했을 때, 인종 차별주의자 또는 성차별주의자들의 태도를 보이게 될 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풍요로움을 모든 이에게 펼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며 위험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불림을 받았다. 프란치스칸의 삶은 사랑할 수 있는데까지 사랑하라고 불림받은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파괴하는 쪽으로 기우는 듯이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종교를 사람을 죽이는 구실로 사용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정의와 친절과 사랑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익과 성공만을 바라고 있다. 경쟁은 협력과 협동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몸에 대한 존경심 대신 육체적인 방종을 일삼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폭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희생이 매점 매석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는 세상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요약하면, 재속 프란치스칸은 세상과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대체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의 사랑 안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지금은 '너의 빛을 비추어라'가 적용되는 때이다.


<토론 주제>

1. 당신은 생활에서 어떤 갈등을 겪고 잇으며 그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2. 이 장에서 제시된 갈등의 시나리오 중에서 하나 이상을 선택하여 거기에 대한 당신의 답을 제시해 보시오.

3. 갈등과 상처를 처리하고 치유하는 프란치스칸의 마음과 태도에 대하여 설명해 보시오.

4. 용서에 대하여 프란치스코가 가졌던 생각은 무엇인지 설명해 보시오.

5. 화해의 성사의 가치는 무엇인가?

6. 용서의 몇 가지 중요한 결과들은 무엇인가?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성서 묵상>

+루가 7,29~35

이러한 예들이 당신 자신의 삶의 상황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대할 수 있는가? 이 장은 우리에게 그러한 갈등 상황을 처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떠한 점을 가르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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