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 12장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Margaret K 2019. 2. 18. 03:05

프란치스코처럼 


제 12장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신명기 10,12~18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의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네가 잘 되도록 오늘 내가 너에게 명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의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셔서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따.그러므로 너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덜미를 뻣뻣하게 하지 마라.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신중의 신이시고 주님 중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해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빵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루가 9,57~62

일행이 길을 갈 때,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오." 한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따르시오"하셨는데, 그가 "주님, 먼저 제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 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이렇게 말씀하였다. "죽은 이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고 그대는 가서 하느님 나라를 알리시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따르겠습니다! 다만 먼저 집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손에 잴기를 잡고 뒤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루가 14, 16~2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초대했습니다.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차려 놓았으니 오시오'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보러 나가야 겠소, 부디 양해해 주시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들어 아내를 얻었소, 그러니 갈 수 없소'하였습니다. 종이 돌아와서 그대로 알리자 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습니다. '어서 고을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이와 불구자와 맹인과 절름발이들을 데레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있습니다.'하자 주인이 다시 일렀습니다. '한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서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나는 말하거니와, 초대받았던 사람들 가운데서는 누구도 내 잔치에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성서 이야기에는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는데 있어서 단호하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반응에 대해서도 단호하시다. 하느님 보시기에 서약이란 작은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다는 것은 하나의 특전이다. 우리가 거절한다면, 우리는 잔치상에 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친교를 방해하는 인간적 생각과 집착 때문에 갈길을 잃는다. 아무것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결혼도 돈을 모아 보겠다는 욕망도, 심지어 죽음이라도 우리의 응담을 방해할 수는 없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양식을 따르라는 부르심이 사소한 것일 수는 없다. 우선적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다른 여느 모임과는 다르다. 이 회의 생활양식은 한 사람의 어른에게 죽을 때까지 복음에 헌신하며 살 것을 요구한다. 이 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여기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여느 클럽에 가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생활양식이며 우리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봉헌 

주위를 두루 다니며 나무를 심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좋은 땅을 골라 그 땅에 묘목을 심으면서 기뻐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왜 나무를 심으세요? 이 나무들이 크기 전에 할아버지는 돌아 가실텐데요." 이 말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앞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심었어,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선물을 즐겼지, 이제 나도 아름다움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어, 이건 내가 만나 보지 못할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야."


프란치스칸으로서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봉헌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다 금방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태도나 전망은 후대에 전해 내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아이들과 배우자와 그리고 친구들과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산다. 우리가 지금 공들이는 것이 자라는 것을 못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씨앗을 심는다. 이해의 씨앗, 용서의 씨앗, 나눔의 씨앗, 공감의 씨앗, 사랑의, 기쁨의, 희망의, 그리고 생명을 주는 씨앗을 많이 심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생활 양식을 살기로 자신을 봉헌했다. 우리는 받은 것이 많은 만큼 남들에게 물려 줘야 한다.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마태 10,8) "주시오 받을 것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한 되를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도로 되어 주실 것입니다."(루가 6,38)


봉헌이란 단어의 한가지 정의는 이러하다.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 혹은 서약 -의무가 지워지는 상태." 이 정의에 의하면 오늘 한 선택은 미래의 의무를 낳는다. 미래란 것은 한번에 하루씩 온다. 그 서약의 실천 '방법'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생활방식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실천의 한 덕목인 '성실'이란 우리 생활에 핵심 단어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서약에 성실하도록 부르신다. 이 서약에는 생활의 어느 부분도 면제되지 않는다. 하느님과의 내적인 생활, 자신의 일상 생활, 타인들과의 생활 - 이 모두가 우리 프란치스칸 서약에 포함되는 것이다. 


생활 - 이야기

우리에게는 각자 지금가지 살아온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시점까지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 어떤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를 변하게 하였는가? 자체에 우리는 보다 풍요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불리웠다는 것은 예수님과 더 친밀해지고 예수님께 응답하고픈 뜨러운 갈망까지도 포함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무시하지 못할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단순성과 삶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또 아시시의 클라라의 삶은 우리의 문화가 물질 축적에 치우쳤음을 다시 평가해보도록 한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가난이 특전을 얻고자 노력한 그녀의 감각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르치는 바와는 완전 반대이다. 우리가 감명을 받는 것은 프란치스코나 클라라의 생애에는 뭔가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는 것을 모두 따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기쁨과 평화를 얻는 과녁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 전신을 생활에 옮겨야 할 도전을 받는다. 근무일이건 쉬는 날이건 우리의 서약은 프란치스칸 정신을 생활에 옮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든 병자이든, 우리가 집안 일을 하든, 자유롭든 우리는 그 환경에서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심어야 한다.


우리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생활양식을 따라 살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고 우리의 생활을 선택해야 한다. 여러가지 사건과 거기에 따른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세상 속의 악을 보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고르를 세우기도 하고, 사람들이 의심스럽고 정직하지 않다고 비평하기도 하고, 이웃 사람이 새 차를 사는 걸 보고 질투가 나서 무리해서라도 같은 차를 사기도 한다.


온 사방을 둘러보면 증권과 재산, 사치와 편안한 생활이면 좋다. 우리는 최고를 가져야만 한다. 생활의 의미는 새 '물건'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돈을 더 많이 벌면, 가진 것이 더 많으면, 특권층의 생활을 하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면, 그러면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고 본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면, 나는 복음의 좁은 길을 택한 것이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것은 성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성공을 이룩했다면 이제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다. 이제는 무얼 할 것인가?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회칙을 통해서 이렇게 제안해 준다. 다른 길을 고려해보라고, 이 좁은 길은 예수님과 관계 위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메시지이며 아직도 잘 실천되고 있는 메시지이다. 


큰 자리나 높은 지위를 찾지 말고,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길을 찾아 보라. 만약 내가 공장을 하나 갖고 있다면, 나의 종업원들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들은 나를 도와 적당한 이윤을 남기는 좋은 제품을 생산해낸다. 주말을 맞이할 때 그들은 일의 만족감과 기쁨의 모습을 표현하고, 나는 사업을 꾸려가면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낀다. 공평함이 실행되고 그것은 내가 만든 제품에도 반영이 된다. 


나는 총결산이나 나의 경력에 대하여 관심을 줄이고 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전에 나는 돈을 열심히 벌어왔으나 돈보다 나의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완전한 관계는 못되지만 완전한 관계를 향하여 노력하고 있다. 봉사의 길로써 나의 발전을 평가하고자 한 이래로 나이 삶은 새로운 방향이 세워졌고 삶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졌다.


나는 독신녀이다. 나는 종신 서약을 할 확신이 안 선다. 나에게 있어서 경력은 중요하다. 관계는 성공의 사디리를 오르는 지렛대이다. 나는 데이트를 했으나 지속되지는 않는다. 약간의 매력만 있으면 사회생활은 적당한 궤도에서 지킬 수가 있다.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직업이란 것이 나에게 어디까지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독신남이다. 나는 자유롭게 시간을 투자하여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나는 자기 발전에만 몰두하고 있다. 스포츠 클럽에서의 운동과 조깅으로 몸도 탄탄하다. 데이트도 하려면 문제 없다. 나의 외적인 매력과 '위풍 있는' 자세는 여자들을 끌고도 남는다. 서로를 잠깐 알게 될 뿐 관계는 금방 끝나고 만다. 그렇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준 사람은 없다. 인생이 무엇인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오면 지금까지 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 공허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육체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의미를 알게된다. 육체는 귀중한 선물이다. 쾌락을 위하여 쓸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보다 분명해진다. 나의 존엄성은 귀중한 것이며, 내 힘은 남을 돕기 위한 원천이다. 생의 의미가 영속적인 관계로 초점이 모이게 된다. 내가 자주 느끼던 외로움은 전세계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체워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나의 인생관을 바꿔 놓았다.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을 택하고 나면 우리는 인생을 복음의 시각에서 해석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나고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예수의 긍정적인 자세로 다룬다.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시는 성령께 의지한다.


우리는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열린 마음과 정신으로 탐색한다. 우리는 악을 알 수 있고, 탐닉의 힘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문제를 무시하지 않고 문제와 싸운다. 변화하고자 애쓴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그들이 변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뿐이다.


재앙은 우리에게도 역시 재앙이다. 그러나 재앙들이 인생의 종말은 아니다. 일이 어려울 때 우리는 함께 헤쳐나가며 우리는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지만 피하지도 않는다. 고통은 우리에게정을 가르친다. 우리는 고통을 겪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알아보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 그 안에서 공동체를 치유하면서 오시는 에수님이 치유의 손길을 알아보낟. 우리는 세계가 너무나 좁고 너무나 작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가족의요구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우리가 바른 길 위에 있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곳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봉사가 필요함을 아는 곳이다. 이곳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포옹해 주는 곳이고, 우리가 남에게 상처 주었을 때 용서받는 곳이다. 이곳은 우리가 함께 기도하여 지혜를 얻는 곳이다.


떠나지 말고

복음을 다 따라 살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 짧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충실하려 할 뿐이다. 서약을 대신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성실이다.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을 따르기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 서약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일단 선택을 했으면 뒤돌아보지 말아햐 한다. 허우적대는 회원들, 미지근한 회원들과 함께 있으면서 성실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완전한 사람들이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다 사랑스럽게 받아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긴장감이나 분열은 우리가 날카롭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서약한 사람들이 우리 앞에 있다. 그들이 형제회를 해산시키려 하지만 허락할 수 없다. 형제회가 다시 쇄신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그 해결을 위해서 또 형제회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을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한 몫을 해야한다.


회칙을 모르는데 대해선 변명이 안 통한다. 서약을 하기 전에 회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회칙의 숨은 뜻을 계속 캐내야 하기에 회칙을 공부하는데는 끝이 없다.


성 프란치스코가 쓴 회칙 끝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청합니다. 형제들은 우리 구령을 위하여 이 생활 안에 적혀 있는 모든 것들의 내용과 의미를 배우고 또한 자주 이것들을 상기하도록 하십시오..... 형제들은 이것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잘 보관하고 보존하십시오."(1회칙 24장)


어떤 신부와 비누 장사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비누 장사가 한탄을 했다. '그 숱한 세월을 보냈어도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보시오. 그 동안 종교가 뭘 했소? 수천년 전부터 종교가 있었어도 세상은 나아지지 않으니 하는 말이오, 종교란 별 신통할 게 없는 거군요." 신부는 잠자코 걸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골목길에서 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더럽기 그지 없었다. 신부가 말했다. "비누가 생긴지 수백년이 되었어도 , 저것 보세요. 저 아이가 저렇게 더러우니, 그렇게 비누가 많은데도 저 아이는 아직도 더럽잖아요. 이 세상에 비누란 별 소용이 없는 거군요." 비누 장사가 대답했다. "아니 비누를 쓰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나요?" "바로 그거예요"하고 신부가 대답했다. 


양성 프로그램과 서적, 표본 등 자료들이 많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성소는 잘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소는 프란치스칸 정신과 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곳은 회헌을 외우는 곳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회헌에 살을 붙이려는 곳이다.  이곳은 회칙을 풀이하며 토론하는 곳이 아니다. 회칙을 사는 곳이다. 모든 회의들, 모임들, 공부, 사회 활동 등 모두가 우리가 약속한 것을 실행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도로 ㄱ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기 위해서 복음서가 제공하는 양자 택일의 실제적인 이미지를 사람들과 이 세상에 제공하여야 한다. 


예와 아니오.

마태오 5,37

말을 할 때면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시오 거기서 더 보태는 것은 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간단한 지시인 것 같다. 이 구절은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의 끝 부분에 나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맹세란 절대로 하지말고 말은 정직하고 직접적으로 하라는 말씀이셨다.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정신 안에서 복음을 따르겟다고 '예'한 것이다. 그런데 그 '예'의 결과는 간단하지가 않다. 이런 서약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평화로 이끄는 결과를 갖고 온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면서 우리의 자세가 바뀐다. 


한 테러리스토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법정에 나왔다. 그는 유죄를 선고 받았다. 어두운 범죄의 성격과 희생자들의 고통에 사람들은 사형을 시키라고 외쳐댄다. 어느 사람인들 인간의 마음을 조금만 가졌다 해도 그 탄원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재속 프란치스칸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생명이란 죄인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두 본당이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그러자 두 본당 사이에 예리한 분열이 일어났다.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생겼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그 중요성의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감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따라 교회를 떠날 수는 없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예'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외국인이 동네에 이사왔는데 그들이 사는 방식이 아주 낮설었다. 그런데 그 외국인 가족에게 모욕을 준 사건, 폭력을 쓴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외면해 버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무서워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 회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이 장애자들을 위한 시설을 지으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그 필요성을 이해하지만 그것이 우리 동네에 들어서는 것은 결사 반대한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예'라고 한 사람이다. 한 회사가 수백 명의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그 기업체는 최악의 오염물질을 방출한다. 사람들은 건강과 위험 때문에 분노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그 회사에 달려 있다. 이때에도 회원은 정의에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삶이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결론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제 경우는 더  복잡하다. 거기에 대하여 생각하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자체도 재속 프란치스칸의 '예'으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의 결정은 복음과 일치해야 한다. 이 복잡한 상황엥 복음을 심는다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발한 '예'는 모든 생활 계층에서 다 해당되는 것이다.


'예'하는 것이 어렵다면 '아니오'하는 것 역시 어렵다. 재속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에 부정적인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따르기 위해서는 거부해야 할 것들이 있다. 재뮬의 축적이 행복의 지름길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아니오'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생산된 모든 제품들을 소유하고 싶어하며 그것이 행복한 길이라는 사고에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잘산다는 관습적인 사고에도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을 때 남들과 나누어야할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태도다. 우리가 '물질 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재능까지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방해하는 정책이나 이념에는 '아니오'해야 한다. 가난하다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은 우리 프란치스칸 사전에는 없다. 우리와 수준이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는 것은 우리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우리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지만 이 사회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더 돌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들은 사회의 변두리에서 봉사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버린 사람들을 돌보았다. 어떻게 봉사할까하는 그 방법은 건전한 대화와 맑은 정신으로 할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 이방인들,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벌하는 것에 반대하고 '아니오'해야 한다. 


우리는 오며 가며 친절을 배푼다. 황홀한 저녁 노을을 보며 경이로움에 가득차 발길을 멈추는가 하면 남의 고통 앞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지구를 지켜야 한다면서도 오염시키고 기쁘면 좋아서 춤춘다. 어린 아기를 안고는 창조의 신비 앞에 놀라워하고 부당한 박해와 가혹 앞에선 분노을 느낀다. 갑자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 앞에는 함께 마음 아파한다. 실직자들을 모아 새로운 살길을 찾아 주기도 한다. 


요한 15, 14~16

내가 명하는 것을 행하면 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어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이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대들을 뽑았습니다. 그대들이 떠나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도록, 또 내 이름으로 그대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모두 그분이 주시도록, 내가 그대들을 내세웠습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11조 

성부를 신뢰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을 관심 있게 또 좋게 보셨지만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서는 가난하고 겸손한 생활을 택하셨다.

이와 같이 회원은 물질적 요구를 줄임으로써 현세의 재물로부터 벗어나고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며, 복음에 따라 자신은 하느님 자녀들을 위해 받은 재물의 관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원은 '행복 선언'의 정신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순례자나 나그네'와 같이, 소유욕과 지배욕 및 그러한 모든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해설

하느님께 신뢰하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께 신뢰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동정심을 믿기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믿지 못한다. 하느님은 정말오실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하느님은 거기 계실까? 하느님은 정말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신뢰란 것은 무엇인가? 포기와 신뢰의 관계는? '행복 선언'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런 질문들은 되풀이된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한가지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이 질문들로 인해 일어난 여러가지 요소를 생각해 볼 뿐이다.


1. 우리가 말하는 '변화의 길'이란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많은 것이 신속함을 중시한다. 페스트 푸드, E-Mail(전자 우편), 고속 컴퓨터 등등,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길언 느리고 꾸준하다. 신뢰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놓아주어야 한다. 놓아주는 것은 해결은 아니나 그것은 신뢰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이 있으면 신뢰를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물질에 의존해 있으면 하느님을 신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있는 것을 '하찮은 것'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놓는다는 작업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 안에 굽은 것은 곧게 펴고, 얼어붙은 것을 녹이는 일이다. 우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지만 내어놓다 보면, 신뢰심은 커진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셔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성령께 보다 쉽게 양보하게 된다. 우리는 그 길이 아무리 느리더라도 그 과정을 믿고 또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신뢰하게 된다. '꾸준히 하십시오'하는 말이 최상의 충고이다. 성실함이 또다시 강조된다. 


2. '통치'라는 힘은 우리의 문화 속에 만연하다. 그것은 강박 관념이나 병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실제로 모든 일에 있어서 일들이기를 원한다. 주변의 국가가 우리보다 나아지면 우리는 국가적 불행을 만날 수도 있다. 세계에서 우리가 강국으로 나타나면, 다른 나라들을 우리의 의지대로 하려는 억지가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질병이나 고통이 오면 자제력을 잃는다.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해 떠나버리고 차츰 나이가 들게 되면 고통을 감추고 죽음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힘없이 주저앉고 만다. 죽음은 하나의 분명한 표징으로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인 우리의 힘은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이기는 것, 소비하는 것, 소유하는 것, 발전하는 것, 항상 새것을 갖는 것 등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 환경에서는 욕심이 미덕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 운명을 우리가 장악하고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칸의 사고는 다르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여러가지 한계들을 인정한다. 힘이란 봉사하기 위한 것이지 통치하고 장악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잘 보이기 위하여 꾸며대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권력과 소유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피하기 이해 노력한다. 소비와 벌어들이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나눔과 자원으 책임감 있게 쓰는 것보다 덜 중요한 것이다.


3. '참 행복'의 정신이 우리의 정신이 된다면, 우리는 현대사회가 갖는 많은 이상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보다 하느님을 믿으려는 말은 머리를 땅에 대고 곤두박질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보라는 것과 정반대이다. '물질'보다는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을 믿으라는 것도 사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너무나 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것은 오랜 기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성급하게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우리가 왜 변화하려고 애쓰는가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오랜 시간을 노력해야 한다. 포기하라는 요구에 직면하면 차라리 평하게 살자는 유혹을 받게 된다. 변화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으려는 영적인 귀머거리를 피해야 한다. 이 변화의 길을 계속 가기 위하여 요구되는 부드러운 훈련을 알아채야 한다. 프란치스칸은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의 정신에 양보해야 한다. 우리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계속 이 길을 갈 것이다.


자매인 죽음 

자매인 죽음이여,

너 친절하게도

참으로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네.


애착과 욕심, 안달을 하던

내 삶의 전부를 내려 놓으라

네 앞에 서면 빛을 잃고 마는 것을.


죽음아, 어느 날 내게 다가오면

주님 앞에 드릴 것은 오직 하나

말씀 따라 일생동안 님을 그리며

성장하며, 변화된 나 자신이니


자매인 죽음이여,

오늘 여기에

살아있는 모습으로 서게 해다오.


<프란치스칸 공부>

성 루도비코 9세 프랑스 왕 (1215~1270)

-재속 프란치스코회 주보 성인

 루도비코는 12살에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의 어머니인 불랑쉬가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선생 중에 프란치스칸이 몇 명이 있었기에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배웠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지 몇 년이 안되어 그는 심하게 병에 걸렸었는데 만일 낮게 되면, 십자군을 인도하여 성지를 사라센들로부터 탈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그는 맹세를 실천했다. 그는 다미에따 요새를 빼앗았으나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혔다. 


몇 달 동안의 포로생활이 지난 후,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을 포기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죽음의 협박을 받으며 그는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당신은 나의 육체를 죽일 수 있어도, 나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사라센들은 그의 용기를 존경하게 되었고 아무 조건 없이 석방해 주었다. 그는 성지에 갔다가 1254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도비코  왕은 백성들의 생활을 많이 향상시켰다. 그는 11명의 자녀들의 모범적인 아버지였고 친구였다. 그는 저속하고 나쁜 대화는 용납하지 않았다. 정의는 그의 통치 표어였다. 그는 왕의 옷차림에 대해선 관심을 쓰지 않았다.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식탁의 손님이었으며, 그는 충실한 재속 프란치스칸이었다.


성지에서 크리스천들이 많은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에 또다시 십자군을 동원하였다. 도중에 병에 걸린 군인들을 방문하다가 병에 걸려서 숨을 거두었으며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207~1231)

재속 프란치스코회 주보 성녀

엘리사벳은 헝가리 왕인 안드레아 2세의 딸이었는데, 독일 튜린지아와 해쎄의 백작인 루도비코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그녀를 도왔다. 남편의 허락으로 그녀는 아이제나하에 큰 병원을 세웠다. 그녀의 남편 루도비코는 십자군 원정 중에 죽었다.


친척들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재산을 탕진할 것을 우려해 그녀를 네 자녀들과 함께 성밖으로 내쫓았다. 그녀는 어린 아이만 넷이 있는 가난한 과부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 시련을 하나의 기회로 보고 성 가정이 견뎠던 그 버림받음을 체험했다. 그녀는 생계를 위하여 물레질을 하여 아마포를 짰다. 그 수입의 얼마는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여왕으로 다시 추대되었고 프레데릭 2세가 그녀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체험하고 가난과 고독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잘 컸고 교육도 잘 받았다. 아직 아이들이 다 성장하지 않았을 때에 그녀는 조용하게 수도생활을 하며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에게 그가 앓고 있는 병은 치유될 것이며 자신의 마지막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예언하였다.


엘리자벳은 1231년 11월 19일 24세로 일생을 마쳤다. 교황 레오 13세는 그녀를 모든 여성 복지기관의 주보로 선언하였다. 1931년 비오 9세는 엘리사벳에 관하여 다음과 같을 글을 썼다. "나이가 들자, 엘리사벳은 자신의 재산을 자기 임으로 사용할 수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이 설립한 병원에서 손수 나환자를 간호하고 병을 치료해 주었다. 또 고아와 과부를 찾아다녔으며, 위로의 천사처럼 저 높은 웅장한 성체에서 마을 아랫녘으로 내려와 가난하고 슬픔에 잠겨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로하곤 했다.'


<토론 주제>

1. 서약의 의미에 관하여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2.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서약은 왜 종신 봉헌인가?

3. '성실함'은 왜 재속 프란치스코회 생활양식에 그토록 중요한가?

4. 형제적 공동체는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에 대한 충실성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5.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온 이후로 당신의 생활에서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당신의 '예''와 '아니오'는 어떻게 변했는가?

6. 신뢰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포기와 신뢰는 서로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7. 회칙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성서 묵상>

+로마서 8, 12~17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영에 자유롭게 순종하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려고 하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신이 유산으로 받은 선물을 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