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 10장 누가 맡을까?

Margaret K 2019. 2. 18. 03:04

프란치스코처럼

 제 10장 

누가 맡을까?


생활 속에서 권위란 대단히 중요하다. 가끔 그것은 갈등의 요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권위에 대해 반항하는 인간이 있을 수 있으며, 그 권위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을 가질 수도 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질문을 하였을 때 이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분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시오,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 주지요."(마르코 11, 27~28)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똑 같은 문제에 부딪쳤다. 베드로와 요한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이 같은 질문을 하면서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따졌다. '무슨 권한으로 또는 누구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소?'"(사도 4,7) 그들의 대답은 회당을 울리는 역사적인 메아리였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다. "하느님의 말씀 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안에서도 권력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세속의 권력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권위는 많은 질문을 받는다. 권위에 대한 비판은 진실을 밝혀주기도 하지만 어떤 비판은 또 다른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파괴적인 것이거나 단지 개인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을 잘 분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복음적인 방법에 따른 권위를 존중하며, 그 권위가 잘못 사용될 때 비판해야 한다. 어려움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때 복음을 아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교회 - 복음적인 권위

성서의 권위는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물질이 아닌 인간의 근원으로서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권위는 존경을 받고 순명을 요구한다. 성령을 거스르는 권위에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 성령을 무시하는 권위는 분명히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성령의 능럭으로 발한다는 사람을 확실히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누가 성령의 이름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자기 자신 스스로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영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신심 깊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일어나는 질문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에게 권위를 주었다. 예수님은 진리를 정확히 전파하도록 성령의 인도를 약속하셨다.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는 하느님이시다. 교사들의 역할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도록 다른 이를 돕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말로 인도되기보다는 하느님과 그 말씀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 모호한 점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인 해석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버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10)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은 성서의 꾸준한 공부와 탐구를 격려한다. "공의회는 성서를 연구하는 자녀들에게 기력을 날로 쇄신하여 교회의 뜻대로 전력을 다해서 착수한 일을 계속 하도록 격려하는 바이다."(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23) 이 말씀은 신학의 분야로도 계속된다. "신학은 성전과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영구적인 기초로 삼고 거기에서 강한 힘을 얻어 항상 젊어지며 신앙의 빛을 받아 그리스도 현의에 포함된 모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영감을 받았으므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 연구는 마치 신학의 영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24)


공의회의 문헌은 신학자들에게 진리의 추구를 격려한다. 그들의 권위는 공부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교황과 주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권위의 사용은 복음의 정통적인 이해와 일치해야 한다. 교회에서 '사목자'들의 현존은 복음적인 삶의 안내를 제공한다. 이런 책임 있는 사목자 없이는 우리가 쉽게 이단에 빠지고 말 것이다. 사목자의 직무는 복음적 생활과 해석에 확실히 건강한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권위에 대해 또 하나 고려해 볼 점은 교회의 교도권은 다른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때로 가르침은 교의적인 법령으로, 때로는 회칙으로, 때로는 주교회의의 편지로, 때로는 교황이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혼자서 가르치기도 한다. 다른 경우에는 주교들이 연대하여 가르치기도 하고, 지역 주교들이 신비체의 지체로서 홀로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주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것과 사회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실천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광범위한 가르침의 방법에 있어서 매순간마다 교황과 주교들의 전적인 동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 그들은 단지 그 방향에 대해 이끌어줄 뿐이다.


프란치스칸은 교회의 권위에 대해 순종하며 존경하는 태도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칸은 성서에 대해 특별히 공경한다. 성령께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몇 가지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예수께로 향한다.

2) 베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인 면을 증진한다

3) 다른 사람에게 봉사한다.

4) 삶의 멍에를 제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한다.

5) 성령께서는 다른 사람을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사랑으로 양육한다.

6)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들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볼 수 있게 한다.

7)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기와 항구함을 주고,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첫째가는 것인지 올바로 깨닫게 한다.


성령께서 하는 일이 아닐 경우에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이 있다.

 

1) 어떤 '영감'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을 분리시키거나 사랑의 사람에서 이탈시킨다면 이는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2) 일반적으로 '영감'이라고 하는 것이 자유를 주기보다 법 규정만을 찾는다면 이는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요약

1. 계시의 진리에 대한 참된 권위자는 하느님뿐이시다.

2.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로부터 받은 바를 나누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느님 계시의 권위 있는 원천이시다.

3.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권한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4.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성령을 통해 교회에 주어진 권위에 참여한다.

5. 주교들과 함께 교황은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6. 교황은 보편적인 교회의 오류가 없는 믿을 교리를 선포한다. 이러한 선언은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포함한다.

7. 예수께서는 교회에 무류성을 주었다. 살아있는 교도권의 지도를 받는 하느님의 백성은 진리에 뿌리박은 확고한 초자연적인 신앙의 분별력을 갖는다.

8. 신학자와 성서학자들은 그들의 성서 공부와 연구로 권위를 갖는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폭넓은 참된 계시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떤 개인적인 비전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진리는 약하지도 않고 쉽게 망가지지도 않는다. 반대로 진리는 견고하고 확고하며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잃어버리거나 진리를 훼손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아주 많은 이들이 굳은 신앙의 신비를 굳게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진리에 대한 논쟁을 압도할 만큼 중분히 강한 분이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인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고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소심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느님쎄 주신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매번 어떤 사람이 진리에 관한 새로운 생각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른 시간에서 본 차이에 대한 토론과 신중한 반응은 보통 어떤 내용을 명확하게 해 준다. 마지막 수단으로 침묵은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대화, 즉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고 중요한 방법이다. 


신앙 공동체는 끝없는 토론으로 진리가 훼손되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분별력을 대화로 해결한다.어려운 점은 누가 신앙공동체를 위해 말하는지 분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권위는 권위주의자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은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도와 존경의 마음으로 토론에 귀기울이고, 이를 나눌 마음이 있다면 진리를 잘 분별해 낼 수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성부께서는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분이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민주주의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가 선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신앙공동체이 음성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훌륭한 신학연구는 한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폭넓은 점을 제시한다. 


교회는 무류권을 사용한 선언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 2000동안의 교회 역사에서 무류권으로 선언된 교리는 몇 개밖에 되지 않는다. 무류권은 교회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데 비해 공의회의 교령과 교도권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된다.


교회는 신학자들에게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관대하게 허락했다. 때때로 이 토론은 수백 년을 두고 이어오기도 했다.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나 '성모 승천'과 같은 교리가 무류권으로 선포되기까지는 1900년이나 걸렸다. 이 동안에 많은 신학자들이 이교리의 신앙과 기본 등을 설명하는 이론을 개발해 왔다.


성령께서는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신다. 우리는 무엇을 확증하거나 또는 신앙의 이상한 설명을 거부하는 데에 바쁘다. 진리는 흔들림이 없어 어떤 논쟁에도 승리한다. 우리는 이런 점이 진행 중에 있을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런점은 새로운 통찰력과 이해를 돕는다. 대화는 우리의 옛 사고를 신선한 새 사고로 초대하며, 신앙의 깊은 이해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프란치스칸과 충실성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우리에게 충실성에 대한 살아있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 충실성은 신앙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교황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자신들이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운동이 교회 한 가운데서 현존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매우 새롭고 다른 생활양식을 요청했기에 교회가 그들의 요청을 처음 거절했을 때에도 자신들의 요청을 버리지 않았다. 교회 당국자들이 불가능한 생활 양식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들은 '가난부 인'의 길을 따르기를 주장했다. 성녀 클라라는 전 생애을 그녀가 작성한 회칙에 언급하고 있는 가난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그들의 충실성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두드리는 성령께 문을 연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변화를 일으킨 새로운 정신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들의 글은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있고 하느님의 길이 얼마나 폭넓은지 깨닫게 해 준다. 그들의 삶은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발표한 교령에서 영향을 받았고, 회칙 작성의 각 단계에서 교회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회칙의 말마디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마음으로부터 나왔지 교황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황은 회칙을 인준하거나 거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마음에 있었다. 교회의 많은 운동들이 같은 방법으로 시작한다. 각 개인은 셩령의 영감을 받아 신자들의 필요에 새로운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형제회에 보낸 편지 35~36

그러므로 나의 모든 형제들에게 훈계하며 그리스도안에서 격려합니다. 어다서든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면, 할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거나 혹 불경스럽게 흩어져 있으면 주워 모아서 보관하여 '그 말씀을 하신'(1열왈 2,4) 주님을 말씀 안에서 공경하십시오.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자기생활의 집임을 느꼈다. 그에게 교회는 길잡이였으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았고 성서를 발견했다. 그는 교회에서 앞으로 어떤 생활양식을 가져야 할 지를 찾았으며 인간의 나약함을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현존하신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현존과 부르심은 프란치스코에게 구체적인 삶의 활동에서 기본적인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하느님의 보호에 대해 경탄했고 기쁨으로 충만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삶 안에서 항상 함께 하셧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복음적인 교회를 통해서였다. 순종(경청)과 찬미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데에 대한 응답이다. 성녀 클라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녀 클라라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네 번째 편지 9~13

진심으로 그리스도께 결합하여 이 거룩한 정혼을 하게 된 사람은 진정 복됩니다.

천상의 복된 모든 군대들이 끊임없이 그 님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있습니다.

님의 사람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님의 어지심은 우리의 만족입니다.

님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우고

님에 대한 생각은 부드럽게 빛나고,

님의 향기는 죽은 이들을 살리며,

님을 영화롭게 직접 뵙는 것이 천상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에게 행복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신앙이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응답 또한 변화한다. 여기에는 신앙의 이상에 대한 어떤 움직임이 있다. 이것은 들음에 대한 훌륭한 능력을 요구하는데 일상의 삶을 통해 나타나고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한다.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생각해보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창세기 12,1~2) 신앙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 칠십오세였다."(창세기 12,4)


여기서는 늙은 아브라함이 지녔던 신앙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때 아무 질문도 할 수 없다. 똑같은 것이 아브라함의 삶의 후반부에 나타난다. 그는 그의 아들을 희생 재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들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가 들은대로 움직였다.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 왜 그러느냐?'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기 22,7) 아브라함은 신앙에 찬 답을 했다. "얘야! 번재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기 22,8)


마찬가지로 신앙은 주님의 특별한 말씀이 없다 해도 강력한 실천을 요구한다.신앙은 논리적인 법칙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치 아린아이가 사랑하는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갖는 신아와 은 것이다. 이것은 돈을 들여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 결과도 갖지 못한 채 하혈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갖는 생각과도 같을 것이다. "그부인이 예수 소문을 들은 바 있어, 군중 속에 끼여들었다가 뒤에서 그분 옷을 만졌다. 속으로 '옷만 만져도 구원받겠지' 했던 것이다."(마르코 5,27~29)


프란치스칸은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사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누가 더 낫거나 못한 사람이 아니라 전심으로 예수를 따르도록 불리운 사람들이다. 이것은 주님쎄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시든지 따라야 함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응답해야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회개의 때이며 우리는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인도하실 때, 우리는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를 관상기도의 친밀함에로 초대하신다면 우리는 관상의 길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 넓게 펼쳐져 있고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는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에게 성부의 길을 나타내 주시는 예수님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는 성령의 활동을 믿는다


신앙은 참으로 놀랍게 하느님의 백성들의 이런 마음 속에서 성장한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응답과 함께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분리되어 개인주의에 빠지게 되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진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통해 주어진다. 신앙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은 타락하기 쉽다. 두려움이나 어떤 상쳐, 협소함, 부정적인 면들은 신앙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인도하기 쉽다. 개인적인 시간은 진리를 잘못 받아들일 수 있으며, 무한히 넓은 하느님의 계시를 너무 좁게 한정시켜 버린다. 


에페소3,14~19

그래서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는 그분께 빕니다. 넘치는 당신 영광 가운데 성영의 능력을 통해 여러분을 속사람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기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머물게 하시기를,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기초를 두어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 신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고 사람의 어리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뵈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체워지게 되기를 말입니다. 


세 동료 51~52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온 힘을 기울여 완벽하게 실천한 성서의 설교에서 따온, 짧고 단순한 말들로 되어 있는 자기가 쓴 회칙을 인준해 줄 것을 청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교황님의 허락을 받고 나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땅에 무릎을 꿇고 교황님께 순종과 존경을 겸손하고 정성되게 약속했다. 교황님의 명령에 따라 다른 형제들도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순종과 존경을 서약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6조 

회원은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교회의 산 지체가 되었으며, 서약함으로써 교회와 더욱 친밀히 결합하게 되었으므로,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의 사명에 대한 증인과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고, 또 그분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도록 불리운 회원은, 사도적 결실을 품부하게 하기 위하여 신뢰와 개방적인 대화로써 교황 성하와 주교들과 사제들과 전적인 친교 안에서 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해설

교회 내의 다양한 은사의 분배는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성령의 활동이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있다. 권위의 은사, 선포의 은사, 치유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성서 해석의 은사, 양육의 은사, 직장에서의 성화의 은사,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은사,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은사, 관상생활의 은사, 슬픔에 빠지 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돕는 봉사의 은사, 모든 종류의 중독자들을 돕는 은사, 조직적인 구상으로 복음을 증진하려는 은사, 등등, 교회 안의 이러한 은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신앙공동체의 노력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봉사를 위해 우리의 개별적인 은사를 바친다. 권위로부터 경청하는 것까지의 모든 은총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다. 복음을 위한 은사의 나눔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 우리가 이런 목적을 잃어버리거나 이 은사를 개인적으로만 쌓아놓는다면 우리는 복음적인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은 받은 은사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그 은사를 하느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도록 불림받았다. 만약 우리가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면 우리는 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역사를 통해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 교회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회는 성직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세상의 시각과는 다른 대안을 제공한다. 


에페소 4,25~32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화는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시오. 화를 낸 채 하루 해가 저물지 않도록 하고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시오. 도둑질하던 사람은 도둑질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좋은 것을 힘써 마련하여 없는 이들에게 베풀도록 하시오. 입에서 나쁜 말이라고는 나오지 않게 하고, 좋은 말은 필요할 때 건설적으로 하되 듣는 이들에게 호감을 주도록 하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바로 그분 안에서 속량의 날을 위해 날인되었습니다. 온갖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과 모독을 모든 악의와 함께 없애시오. 서로 친절하고 자비롭게 대하며,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시오.


에페소 5,1~2

그러므로 사랑스러운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은 사람들이 되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올리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런 사랑 안에서 살아가시오.


사도 바오로는 교회 건설에 대한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개인적인 성장과 공동체의 봉사는 함께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형제, 자매 중에 어느 누구도 일의 만족을 찾지 말라고 가르쳤다. 프란치스칸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 결코 자기만족을 찾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기만족이 들어온다면 형제적 공동체는 새로운 생활로 변화해가야 할 것이다


회칙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의 사명에 대한 증인과 도구가 되어야 한다."(회칙 6조 전반) 그것은 바로 "사도적 결실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신뢰와 개방적인 대화로써 교황 성하와 주교들과 사제들과 전적인 친교 안에서"(회칙  6조 후반)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신다.


세 동료 58

형제들이 말로 평화를 전할 때에는 형제들이 마음에 한층 더 그러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여러분들로 해서 분노하지 않고 또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생기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그들을 여러분의 온화한 모습으로 평화와 자비와 화목으로 이끌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낫게 하고,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평화의 마음은 창조적인 마음을 만들며, 또 창조력은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하며 나아가 교회 재건에 이바지하게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깜빡 놀라게 하는 선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봉사직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국외자들, 잊혀진 사람들, 무시당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일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일은 마치 겨자씨에서 시작된 큰 나무로 사람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마르코 4,30~32 참조) 우리 자신이 큰 나무가 되는 것이다.


돌보는 일

아무도 나를 배려해 주지 않을 때,

아무도 나의 고통에 관심 갖지 않을 때,

아무도 나와 함께 기뻐하지 않을 때,

내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

한 명의 프란치스칸이 내게 다가와

단순히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내가소중해졌습니다.

그가 나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 공부>


성 프란치스코와 굽비오의 늑대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21장에서는 프란치스코와 굽비오의 늑대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이야기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굽비오라는 도시는 루포(늑대)라는 강도에 의해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루포를 회개시켰다. 라베르나에는 루포가 회개와 기도로 오랜 시간을 가졌다고 츠측할 만한 장소가 남아있다. 루포의 잉야기는 굽비오를 위협했던 늑대 이야기의 형태로 변화되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옛날에 큰 늑대가 굽비오라는 마을을 벌벌 떨게 했다. 늑대는 배가 고플 때는 동물들 뿐 아니라 사람들까지 죽이곤 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늑대를 죽이거나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곤 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늑대로 인한 공포 때문에 마을 바깥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마을에 갇혀 사는 감옥의 수인처럼 되어갔다. 


성 프란치스코가 굽비오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 늑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란치스코는 밖으로 나가 늑대 '형제'를 만나기로 마음먹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를 따라 나셨으나 프란치스코가 앞으로 나아갈 때 벽에 붙어 서 있었고 프란치스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가봐 두려워했다. 


프란치스코를 본 늑대는 좋은 먹이감이라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늑대를 향해 십자가를 그었다. 그러자 늑대는 조용히 앉아 입을 가까이 대며, 어쩔 줄 몰라했다. 프란치스코는 말했다. '늑대 형제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이리로 오시오. 나와 어떤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마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늑대는 프란치스코에게 다가와 그의 발 앞에 조용히 앉았다. 프란치스코는 늑대에게 범죄의 부당함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고 치유의 방법을 제공했다. 만약 늑대가 사람과 동물을 해치는 짓을 그만둔다면, 마을사람들이 그가 사는 동안  음식을 제공해주기로 약속했다. 늑대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고, 마을 사람과 늑대 사이의 계약을 확증하기 위해 늑대를 마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약간의 공포와 놀라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프란치스코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회개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이 세상의 늑대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실 것이고, 다음 세상에서도 지옥불로부터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과 늑대사이의 계약은 양쪽이 함께 체결하였다. 늑대는 2년을 더 살았고, 늑대가 죽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친절과 선함을 기억하면서 늑대를 보러왔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잉야기는 어떻게 신앙이 두려움을 극복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이 윌의 예상을 넘어 움직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려운 상황과 혼돈스러운 폭력도 예수님 안에서 신앙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토론 주제>

1.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권위의 역할은 무엇인가?

2. 프란치스칸에게 있어 교회에 대한 충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3. 신앙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4.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정신 안에서 매일의 삶을 통해 어떻게 교회(하느님의 백성)를 재건하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5. 굽비오의 늑대 이야기는 우리 신앙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6. 교회에서 사목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특별한 선물은 무엇인가?

7.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첫째이고 근본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성서 묵상>

+로마서 10,11~17

로마서를 읽고 느낀 바를 묘사하시오. 이 성서의 내용을 어떻게 '교회의 재건'이라는 프란치스칸 이상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


~~~~~~~~~~~~~~~~~~~~~~~~~~~~~

누가 맡을까?

프란치스칸은 교회의 권위에 대해 순종하며 존경하는 태도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칸은 성서에 대해 특별히 공경한다

 침묵은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대화, 즉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고 중요한 방법이다. 

-신앙 공동체는 끝없는 토론으로 진리가 훼손되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분별력을 대화로 해결한다.어려운 점은 누가 신앙공동체를 위해 말하는지 분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권위는 권위주의자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은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도와 존경의 마음으로 토론에 귀기울이고, 이를 나눌 마음이 있다면 진리를 잘 분별해 낼 수 있다

진리는 민주주의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가 선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신앙공동체의 음성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우리에게 충실성에 대한 살아있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 충실성은 신앙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교황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자신들이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운동이 교회 한 가운데서 현존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 당국자들이 불가능한 생활 양식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들은 '가난부 인'의 길을 따르기를 주장했다. 성녀 클라라는 전 생애을 그녀가 작성한 회칙에 언급하고 있는 가난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그들의 충실성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두드리는 성령께 문을 연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변화를 일으킨 새로운 정신을 가져왔던 것이다. 

 회칙의 말마디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마음으로부터 나왔지 교황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다.

프란치스칸은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누가 더 낫거나 못한 사람이 아니라 전심으로 예수를 따르도록 불리운 사람들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시든지 따라야 함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응답해야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회개의 때이며 우리는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분리되어 개인주의에 빠지게 되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진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통해 주어진다. 신앙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은 타락하기 쉽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온 힘을 기울여 완벽하게 실천한 성서의 설교에서 따온, 짧고 단순한 말들로 되어 있는 자기가 쓴 회칙을 인준해 줄 것을 청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고, 또 그분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도록 불리운 회원은, 사도적 결실을 품부하게 하기 위하여 신뢰와 개방적인 대화로써 교황 성하와 주교들과 사제들과 전적인 친교 안에서 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형제, 자매 중에 어느 누구도 일의 만족을 찾지 말라고 가르쳤다. 프란치스칸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 결코 자기만족을 찾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기만족이 들어온다면 형제적 공동체는 새로운 생활로 변화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봉사직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국외자들, 잊혀진 사람들, 무시당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도 나를 배려해 주지 않을 때,

아무도 나의 고통에 관심 갖지 않을 때,

아무도 나와 함께 기뻐하지 않을 때,

내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

한 명의 프란치스칸이 내게 다가와

단순히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내가 소중해졌습니다. 

그가 나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