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8장 하느님과 우리의 세상

Margaret K 2019. 2. 18. 03:02

프란치스코처럼

 제8장 

하느님과 우리의 세상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은 서로 상반된다.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고 폭력, 이혼, 마약, 테러, 따돌림 등이 매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폭력을 어디서 나오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경제적인 압박에서 나오고, 미움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싹트기도 한다. 폭력은 질투심에서 나오고, 얽눌린 분노에서 나오며 편견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폭력을 쓰기도 한다. 인간의 폭력은 파멸과 죽음을 가져오고, 측은한 마음을 죽인다.


이사야 1,16~18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을 저지르기를 그만두고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 받은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여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폭력에는 공포가 따른다. 강간과 학대의 공포, 무기의 공포, 재산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공포, 정부와 폭력 조직의 공포, 이웃의 공포, 압제적인 제도의 공포, 기아의 공포, 비참해질 앞날에 대한 공포, 외로움의 공포, 배척받는 공포, 늙어가는 공포 등이 있다.


이번에는 반대로 공포가 지나쳐 보복적 폭력으로 변한다. 압박을 당하는 자들이 폭력을 가하게 된다. 안전성이란 없고 안전을 위한 길은 보다 많은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폭력은 우리 안에 있는 인간성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죽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과는 정반대이다.


마태오 23,23~24

불행하도다. 당신네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 박하와 시라와 소희향은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저버리는구려, 그런 것들도 저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이런 것들도 실천해야지요. 눈먼 길잡이들! 모기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려.


더 고약한 것은 그러한 일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강력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폭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폭력행사를 정당화시킨다. 우리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는데 무언으로 동의하고 폭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 한 어린이의 학대에는 분노하면서 전쟁에서의 대량 학살은 지지한다. 폭력은 전세계적으로 생명 경시를 가져온다.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폭력은 특히 더 심하다. 사람들은 자유로움을 잃었다.


마태오 15,18~20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무릇 악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 따위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돈만 벌려고 하며,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일해야 하고 점점 더 빠른 결과를 요구한다. 삶을 가속화시키는 것들이 광고판을 메우고 있다. 사색하는 순간은 드물다. 상승하는 속도가 우리의 삶을 조정할 뿐이다.


물건을 많이만 사면 행복이 따라 온다고들 말한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면 체면이 서고, 비싼 집을 새로 장만하면 성공했다는 표가 된다. 놀랄 만큼 아름다우면 인기가 붙고 신나는 일이 생긴다.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가족들과 함게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재산과 명성을 얻기 위해 권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꿈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한 비열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른다 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배를 주리든 말든 관심이 없다. 


집회서 27,1~3

많은 이들이 돈 때문에 죄를 짓고 부를 찾는 자는 눈을 돌린다. 말뚝이 돌멩이 사이에 단단히 박히듯 죄악은 팔고 사는 가운데 쐐기를 박으리라. 사람이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굳건히 서있지 않으면 그의 집안은 순식간에 무너지리라.


루가 12,15

온갖 탐욕을 경계하고 조심하시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사람이 재물로 생명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1고린토 13,1

또 내 모든 재산을 희사하고 몸마저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내게는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요즘에는 어디가 아프면 그 통증을 가시게 하기 위해서 약을 꼭 먹어야 한다고 선전한다. 아주 심각한 질병조차 그 증세를 진정시키는 약으로 해결하라고 한다. 의료의 손길은 가난한 사람들이 바라기에는 불가능하고 부자들에게는 돈을 버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굶어 죽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끊고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급급하며, 가출한 십대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들을 격리시켜 가두어 둔다. 사회에의 복귀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법죄자들을 몇 명이라도 구해 보려고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창고 같은 집안에 가두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루가 6, 37~38

심판하지 마시오.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단죄하지 마시오.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시오. 용서받을 것입니다. 주시오. 받을 것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한 되를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도로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만연해 있는 사고방식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 만족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용납하지 마라. 명단에서는 언제나 일등 자리를 지켜라, 봉사하는 일, 남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일,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려라.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아무도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아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할 수 있으면 해라. 그것이 도덕적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은 집어쳐라. 그것이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 그런 걸 생각해라. 이러한 생각이 무성해지면 반목과 죽음이 사회생활의 일부가 된다. 


마태오 16,24~26

그 때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벌어들인들 목숨을 해치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목숨의 값으로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글을 써놓은 사람이 있다. "솔직한 비판은 특히 친척이나 친구, 지인, 혹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온다해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장황하게 문제점들을 얘기했는지 모르겠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위에 말한 태도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게 나 자신일 수도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잘 아신다. 우리가 서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겱코 지나쳐 버리지 않으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슬퍼하심이 오히려 우리의 희망이다. 그 슬픔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의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너의 부상은 심하다."(예레미야 30.12)


호세아 11,8~9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이스라엘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소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브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집회서 2,11

주님께서는 동정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니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여러가지 하느님의 모습

이 세상의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 세상에 대하여 많은 이미지를 이미 굳혀 놓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완전하고 우리를 잘못 이끌기도 한다. 


하느님은 재판관이시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마치 우리를 한 줄로 세우기 위하여 쓰이는 막대기 같은 존재로 푸대접 받으셨다. 하느님은 율법을 만들어 놓으시고 머나먼 곳에 계시면서 우리를 별로 돌보시지 않는 분으로 대우받아 오셨다. 하느님은 시간이 있기 전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자리에 우리를 맞추어 넣으시기 위하여 애쓰시는 조종자로 불려왔다. 하느님의 존재는 아무 느낌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이런 저런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빈약한 이미지가 신앙의 측면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큰 손실을 가져왔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의 문 앞에 서서, 하느님을 어떠한 모습으로 모시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하느님을 어떠한 분이신가?우리가 죄를 지으면 잡으려고 노리고 계신 그런 분이신가? 그렇다면, 이런 하느님의 이미지는 어디서 나왔을까? 하느님은 아가서에서 아주 다른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아가 2,10~13,16

내 연인은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와주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 그이는 백합꽃 사이에서 양을 치고 있네.


지금까지 우리가 하느님을 재판관으로 생각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아가서에서처럼 '애인'이신분을 모셔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손수 찾아 나서시는 분이다. 이 모습이 바로 주께서 선포하신 에수님의 모습니다. 


2) 하느님은 이런 분이신가? 아주 먼데서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관여하시는 멀리 계신 하느님이신가? 이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그 모형 속에 우리를 맞추기 위하여 지배하고 강요하는 분이신가? 성서에서 하느님은 백성들과 계약을 맺기를 바라시고 말씀하신다.


호세아 2,18~20,23

그 날에는 - 주님이 말씀하신다. -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나는 그 여자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을 치워버리리니 그 이름이 다시는 불리지 않으리라.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하여 들 짐승과 하늘의 새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것들과 계약을 맺고 활과 칼과 전쟁을 이 땅에서 없애 버려 그들이 편안히 자리에 누울 수 있게 하리라. 그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리라.


구약성서에는 무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가질지 모르는 우리를 위해 많은 말씀을 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실패와 죄에 대하여 무심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결코 그것들을 지나치지 않으신다. 반대로 하느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종종 분노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화를 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면,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에게 크게 화를 내게 된다. 하느님이 행사하시는 것은 재한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다.


애가 3,22~24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 배반을 바로잡아 주리라. 저희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당신께서야말로 주 저희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분명 언덕에서 나오는 것은 거짓이요. 산 위에는 소란뿐입니다. 분명 이스라엘의 구원은 주 저희 하느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젊은 시절부터 수치가 저희 조상들의 노고를, 그들의 양떼와 소떼와 아들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수치 가운데 드러눕고 부끄러움이 우리를 덮게 하자. 우리 젊은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주 우리 하느님께 죄를 지은 탓이다. 주 우리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탓이다.


3) 하느님은 나를 정말로 보살피지 않으신다. 나 같은 건 하느님이 신경 쓰실만한 존재가 못된다. 하느님은 더 중요한 일이 너무 많으시다.


루가 12,27~28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시오. 수고하지도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거니와,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습니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이 이처럼 입히시거든 그대들이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


우리는 종종 과소 평가로 자신의 가치를 감소시킨다. 그러나 하느님은 편애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하는 방법만을 아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부드럽고 강한 사랑으로 행동하신다. 우리를 하느님에게로 가까이 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신다.


요한 15,15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루가 11,11~13

어느 아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대신 주겠습니까?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 그대들이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대,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까?

프란치스칸 앞에는 그들이 모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하여 선택할 일이 놓여 있다. 하느님을 어떻게 그릴까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서 생활하게 된다. 우리가 모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생활은 기쁨에 넘칠 수도 있고 겁에 질릴 수도 있다.


아프라함 허쉘은 이런 글을 썼다. "권력은 쓸모 있을 수도 있고 겁을 줄 수도 있다. 권력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마치 가난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독특한 수공예품을 보면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우리의 일은 종종 이익을 바라고 하기 때문에 비참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이익이 되는 돈벌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은 파괴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인간 존재는 물질적 부를 이루기 위하여 쓰이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간의 정신은 위축되고 말살되기까지 한다. 


프란치스칸은 존경심과 책임감을 지니는 태도를 이 세상에 전해야 한다. 프란치스칸적인 권력과 명성과 재산에 대한 중요한 사상은 다음과 같다.


 1) 프란치스칸은 권력이 사람을 지배하고 제압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함께 협동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제는 일을 하는데 효율적이기는 하나, 흔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비인간적으로 힘을 행사한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효율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좋은 관계맺음을 요구한다. 권력은 사람들의 생활을 고양시키는데 쓰여져야지,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만을 위하여 쓰여져서는 안된다. 


요한 13,13~15

그대들은 나를 '선생님'이나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옳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그대들의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대로 그대들도 행하도록 나는 본을 보였습니다.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고 보냄받은이가 보낸 이보다 높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그대들은 복됩니다.


2)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결핍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가난으로 인하여 결핍의 환경에서 살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고 사는데 재산을 비축하는 것은 죄악이다.


가난이란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난은 나에게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실질적인 것이고 물질을 나누는데서 그 의미를 찾는다. 만약 화재가 났을 때 쌓아놓은 물질은 불을 빨리 끄지 못하게 방해 역할이나 할 뿐이다. 물질의 힘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물질을 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들을 하느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물질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묵시록 4,11

우리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영광과 존경과 권능을 받아 누리시어 마땅하옵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은 주님의 뜻으로 생겨나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은 피조물의 경이로움을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우리는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것을 피해야 한다. 물질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느님의 백성에게 품위를 주는 방법으로 서로 나눠야 되는 것이다.


3) 우리가 생계를 위하여 종사하는 직업은 고역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 일은 고역이다. 많은 사람들은 탈출할 수없는 경제망에 걸려 있다.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과 어린이에 대한 노동 착취는 계속 외쳐대야만 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많은 회사들은 이윤을 위하여 최저 임금만을 지불할 뿐 사람을의 사정은 아예 돌보지 않는다.


프란치스칸에 있어서 일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창조적으로 쓰는 것이다. 많은 직장은 이 믿음을 지지해주지만 그렇지 않는 회사도 많다. 우리의 사명은 일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적당한 이윤은 죄가 아니지만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완전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관심은 있어야 한다. 노사간의 협력이 잘 이루어져야 하고 정당한 임금과 그 임금에 대한 정직한 노동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권위를 질식시키지 않는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 


프란치스칸은 직장에서 친절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협력할 방안들을 찾는다. 프란치스칸은 일자리의 안전을 위한 정부정책을 지지해야 하고 임금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개선해야할 점들이 있으므로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정직하게 일하도록 격려한다.


유언 20 ~21

그리고 나는 손수 일하였고 또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들도 올바른 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일을 배워야 하고 일의 보수를 받을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법을 보여 주며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서 일을 배울 것입니다. 


권력과 가난과 일에 대한 여러가지 마음가짐은 그냥 생겨난 것들이 아니다. 프란치스칸 생활은 좋은 생각을 지지하기 위한 길을 찾는다. 복음적 성숙은 우리가 사람들의 행동이나 태도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한다. 정직하게 힘을 합하면 미숙한 힘은 개척해 나가리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의 힘에 신뢰심을 갖는다.

 

이사야 64,8

주님, 너무 진노하지 마소서. 저희 죄악을 언제까지나 기억하지는 말아주소서. 제발 굽어보소서. 저희 모두는 당신 백성이옵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맞서기 위하여 힘을 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형제회가 공동체와 함께 해야할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면 혼자 하는 일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것은 제안이 아니다. 이따금씩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우리는 혼자임을 느낀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복음의 이상과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함을 깨닫는다. 오늘날의 세계 문제들은 너무나 커서 혼자서 그 실마리를 풀기는 어렵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한다. 할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실패 중에서도 가장 큰 실패인 것이다.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성서적 접근 방법을 알면 알수록, 부정해야할 것은 부정해야 한다. 하느님의 통치는 아직도 건설 도중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힘과 계시로 앞장선 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한 비평을 하면, 우리는 문제들을 복음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서약으로써 그러한 행동에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잘 알게 될수록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그 일'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빚진 일을 내가 마땅히 하는 것일 따름이다.


갈라디아서 6,9~10 

선을 행하기에 싫증내지 맙시다. 지금 맥은 놓지 말아야 제때에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 특히 믿음으로 한 집안이 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풉시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

제11조

성부를 신뢰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을 관심있게 또 좋게 보셨지만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서는 가난하고 겸손한 생활을 택하셨다. 이와 같이 회원은 물질적 욕구를 줄임으로써 현세의 재물로부터 벗어나고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며, 복음에 따라 자신은 하느님 자녀들을 위해 받은 재물의 관리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원은 '행복 선언'의 정신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순례자나 나그네'와 같이, 소유욕과 지배욕 및 그러한 모든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해설

'가난'이란 주제는 권력가들의 회합에서 열띤 제목이 아니다. 가난이 개인의 재산이나 은행 저축 또는 권력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인기는 더욱 없어질 것이다. 증권가나 동네 상점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투자를 보호하려고 할 것이다. 


교육 기관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종종 직업 교육을 시키지만 인간 존엄성이나 정직함, 나눔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시간적 배려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좋은 가치에 대해 배운다고 하지만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강요하고 있는가를 논할 뿐이다. 많은 기본적인 가치는 그들이 성공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여 아예 다루지도 않는다. 이렇게 교육이 커가는 다음 세대에게 건전하고 크리스천다운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 윤리적인 문제를 거론하면 역습을 당한다. 생활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려고 하면 시장의 치열한 경쟁성에 물러나 버린다. 돈만 들어가는 복지예산은 없애는 것은 사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다. 구조조정에서 월급액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첫 번째 명단에 오른다. 기구를 축소하는 것이 통화의 흐름에 대한 문제를 푸는데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해결책인 것 같다. 이 제도로 야기된 비참함은 이루 측량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시장의 변화에 대비하기란 역부족이다. 기술을 늘린다던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려해도 거절을 당한다. 노동량의 손실, 기술자들의 투입 부족 등이 경제난을 초래한다.


단순히 시장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칸에게도 소유와 권력에 대한 욕구와 그 성향은 작은 유혹이 아니다. 독창적인 개인으로서, 아주 강한 사람들을 이겨내면서 사업을 해나가려면 맞서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는 경쟁의 풍토에서 함께 살고 대화와 양보로 협력한다. 이것은 마음 약한 사람의 세계가 아니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들이 당면한 문제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의 지구는 자그마한 행성이기에 한 나라에 영향을 주게 되면 다른 나라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야 한다. 프란치스칸 기업가들은 사업에 적용되는 복음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한다. 여성의 차별도 없어져야 하고 프란치스칸 노동자들은 그들의 기술을 연마하여 창의적인 일에 기여해야 한다. 노동자의 일은 기술 문제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정도 고려해야 한다. 프란치스칸에게 생계를 위한 일과 개인적인 만족감은 중요한 것이다. 생산품은 소비자의 생명에 유익해야 하고, 프란치스칸은 그들의 생산해내는 물건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면 그런 직업은 피해야 한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우리 사회에 공통된 문제들을 다룬다. 우리는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세상은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해서 더욱 더 개선되어야 한다. 이 회칙의 핵심은 소유와 권력의 욕구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과 정부, 가정과 사업, 일과 고용 정책의 여러 문제들을 그 기본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루가 12,15

온갖 탐욕을 경계하고 조심하시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사람이 재물로 생명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가 1,29~31

그러니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찾지도 염려하지도 마시오. 그런 것은 모두 세상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들이 필요함을 알고 계십니다. 먼저 그분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그런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꿈을 찾아서

별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이 지어내신 별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들이 살게 된 별입니다.

서로 나눠 쓰라고 선물로 주신 별입니다.

품위와 존경과 존중을 갖추며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해

자원을 다 함께 쓰는 세상을 위해 

봉헌된 별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너무나 커서

꿈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 그리고 빠른 정보들.

바라고 갖고 싶은 것이 하도 많아서

남을 돌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프란치스칸은 일부러 힘을 들여

우리가 못 보는 곳을 찾습니다.

그들 위에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갑니다.

복음에 충실하여

모든 이에게 인간적 품위를 찾아주려 함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당신이 함께 하소서.

이 모든 일들을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당신뿐!

도우소서, 하느님! 도와주소서.


<프랄치스칸 공부>

G.K.체스터톤은 하느님께 신뢰함에 대하여 프란치스코의 생각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했다. 프란치스코가 사랑하는 아시시를 바라보았을 때 길이 두 개 있었다. 이 도시는 커다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망대들이 우뚝 우뚝 서 있어서 아시시 시민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아무도 사시시의 성벽을 파괴할 수 없었다. 


젊은 날 프란치스코는 그 성벽 안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성벽이 커지면 커질수록 안도감이 커졌고 어떤 적도 그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안전은 바위와 몰탈로 만든 거대한 성벽에서 왔다. 아시시 시민들에게 그 성벽은 안전을 위한 이시시 시민들의 노력의 상징이었다. 누구든지 그 성벽을 보면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바뀌었다.'그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고 복음이 그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 하느님이 그의 성벽이 되어 주었다. 체스터톤은 프란치스코가 그의 도시와 그 도시의 새 성벽을 보는 새로운 길을 계속 설명한다. 


그가 이제 그 성벽을 바라볼 때 그는 거꾸로 선 것이다. 그런 자세로 보니 그 벽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 성벽이 우주 공간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늘 공간으로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그 벽이 크면 클수록 그 벽은 더 위태로운 것 같이 보였다. 말하자면 보다 큰 힘이 있어야 그 벽이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란치스코에게 안전한 힘은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 사랑의 힘이었다. 전에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거꾸로 보니까. 완전히 무력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를 여전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빛 속에서 아시시를 보았다. 그것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시각이었다.


그 큰 성벽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프란치스코의 전 생애의 밑받침이었다. 가난은 그가 거꾸로 물구나무섰을 때 본 실제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컷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전에는 그 성벽의 힘을 믿었지만, 이젠 하느님 때문에 기쁨이 넘쳤다. 그분이 다 지켜주시니까. 경이로운 기쁨과 가난이 나란히 하느님께의 완전한 소속감을 안겨 주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 


루가 12,22~24. 33~34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거니와,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이 양식보다,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합니다. 까마귀를 살펴보시오. 씨를 뿌리지도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골방도 곳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먹여 주십니다. 저 새들보다 그대들이 얼마나 더 귀합니까?'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푸시오. 그대들 자신을 위해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시오. 거기는 도둑이 다가오지도 않고 좀도 쏠지 않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입니다.


<토의 주제>

1. 사회에서 가장 파괴적인 자세는 무엇인가?

2. 오늘날 우리 시회에서나 나 자신의 개인 생활에서 권력과 소유와 명성의 적절한 쓰임과 부적절한 쓰임에 대한 생각들을 열거하시오.

3. 일상 생활에서 가난의 역할은 무엇인가?

4. 프란치스코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가? 설명해 보시오.

5.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시장의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당신이 고용인이 아니라면 집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6. 당신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하여 묘사하시오.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는가? 나의 하느님의 모습은 바뀌어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어떻게?

7. 우리가 재속 프란치스코 형제회 회원으서 이 장에서 논한 문제점을 다루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성서 묵상>

+신명기 6,1~9

이 구절과 이 장의 문제들을 연관지어 보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권력과 가난과 명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 사랑의 계명을 하느님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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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우리의 세상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을 저지르기를 그만두고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 받은 이를 보살펴라

심판하지 마시오.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단죄하지 마시오.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시오. 용서받을 것입니다. 주시오. 받을 것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한 되를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도로 되어 주실 것입니다.(루가 6, 37~38)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서 생활하게 된다. 우리가 모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생활은 기쁨에 넘칠 수도 있고 겁에 질릴 수도 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효율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좋은 관계맺음을 요구한다. 

가난이란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난은 나에게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실질적인 것이고 물질을 나누는데서 그 의미를 찾는다. 

프란치스칸은 피조물의 경이로움을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우리는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것을 피해야 한다. 물질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느님의 백성에게 품위를 주는 방법으로 서로 나눠야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칸에 있어서 일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창조적으로 쓰는 것이다. 

- 적당한 이윤은 죄가 아니지만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완전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관심은 있어야 한다. 노사간의 협력이 잘 이루어져야 하고 정당한 임금과 그 임금에 대한 정직한 노동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권위를 질식시키지 않는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손수 일하였고 또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들도 올바른 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일을 배워야 하고 일의 보수를 받을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 주며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서 일을 배울 것입니다.(유언 20 ~21)

성부를 신뢰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을 관심있게 또 좋게 보셨지만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서는 가난하고 겸손한 생활을 택하셨다. 이와 같이 회원은 물질적 욕구를 줄임으로써 현세의 재물로부터 벗어나고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며, 복음에 따라 자신은 하느님 자녀들을 위해 받은 재물의 관리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원은 '행복 선언'의 정신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순례자나 나그네'와 같이, 소유욕과 지배욕 및 그러한 모든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제11조)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야 한다. 프란치스칸 기업가들은 사업에 적용되는 복음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한다 ~생산품은 소비자의 생명에 유익해야 하고, 프란치스칸은 그들의 생산해내는 물건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면 그런 직업은 피해야 한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우리 사회에 공통된 문제들을 다룬다. 우리는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세상은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해서 더욱 더 개선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칸은 일부러 힘을 들여

우리가 못 보는 곳을 찾습니다.

그들 위에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갑니다.

복음에 충실하여

모든 이에게 인간적 품위를 찾아주려 함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당신이 함께 하소서.

이 모든 일들을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당신뿐!

도우소서, 하느님! 도와주소서.

-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