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처럼
제 6장
프란치스칸과 성서
성서 연구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성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준다. 성서에 나오는 가르침이 자동적으로 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혹시 내가 잘못 알아듣고 잘못 행동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하고, 복음 말씀을 따라가기에 너무 벅차서 겁나기도 한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복음적 생활을 피하려는 경향이 많다.
학습 1
프란치스칸은 성서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 우리는 설명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프란치스칸은 성서에서 요구하는 것을 따른다. 우리는 이것을 프란치스코와 같은 정신으로 한다. 즉 듣고 뜻을 찾고, 도움을 청하고, 실천한다. 이 방식은 프란치스코 성인 이래로 변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언제나 성서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서말씀을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초창기 회개는 미사 중에 일어났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 미사였다. 그날 복음에는 아래의 말씀이 포함되었다.
마태오 10,7~11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시오. 병든 이는 고쳐 주고 죽은 이는 일으키며 나병환자는 깨끗이 하고 귀신을 쫓아내시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 일꾼은 양식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어느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누가 마땅한 사람인지 살펴보고,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무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말씀에 감동하였다. 그래서 미사가 끝난 후 사제에게 그 말씀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청하였고 설명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즉시 신반을 벗고 지팡이를 던지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1챌 22)라고 말하며 이 복음 말씀을 따르는데 전념했다고 첼라노가 전해주고 있다.
학습 2.
프란치스칸은 만일 그 말씀의 숨은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해에 따라 행동도 바꾼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과 행실의 결과와 신앙공동체가 결국 그 잘잘못을 밝혀준다. 우리 인생 여정에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프란치스코 성인은 알고 있었다.
학습 3
프란치스칸은 마음과 머리로 성서를 대한다. 성서공부는 성서와 성서인물들에 대한 '느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서말씀을 들을 때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느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서 말씀을 항상 마음으로 들었다. 그는 성서학자는 아니었으나 성서말씀을 아주 잘 기억하여 그의 일부분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성서말씀이 그의 설교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성서말씀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첼라노가 말한 것처럼 "이 복된 사람이 지식을 배우면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높은 데서 내려오는 하느님에 관한 지혜를 파악하였고 영원한 빛을 받아서 성서에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다."(2첼 102) 그는 겸손하게 하느님 말씀에 다가갔고 경외로 가득찬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들었다.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지적 연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프란치스칸은 머리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경청한다. 그들은 성서에 대한 '느낌'을 익힌다. 하느님에 의해 드러난 이 사랑의 말씀은 경이스러운 것이다. 성서(특히 강생에 대한 말씀)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감동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느끼신 고통에 동참한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니라는 곳을 가서 '내가 저기 물러가서 기도하는 동안 그대들은 여기 앉아 있으시오." 하시고는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을 데려가서 근심하고 번민하며 말씀하셨다.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 그대들은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시오."그러고는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하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그리고 제자들에게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한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습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 영은 간절히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고 제가 그것을 마실 수밖에 없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런 다음 와서 보시니 그들은 또 자고 있었다. 눈이 무겁게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려 두고 다시 가서 거듭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 기도하셨다. 이윽고 제자들에게 돌아와 말씀하셨다. "아지도 자고 쉬어야겠습니까? 자, 때가 되었습니다. 인자가 죄인들 손에 넘어갑니다. 일어나 갑시다. 보시오.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습니다."(마태오 26, 36~46)
우리는 말뿐만 아니라 눈물을 흘리면서 그 고통에 동참한다. 세레자 요한이 처형당했을 때 느낀 예수님의 슬픔에 우리도 동참한다(마태오 14,12 참조). 예수님은 세레자 요한을 생각하시며 홀로 슬퍼하신다. 조용한 곳을 찾으시는 그 슬픔에 우리 가슴이 물클해진다. 예수님이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려는데 군중들이 방해할 때의 심정을 느꺼본다. 슬픔이 가득하심에도 다른 사람을 돌보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감탄한다. 드디어 예수님이 혼자 기도하실 수 있게 될 때 우리도 같이 기뻐한다(마태오 14,12~23 참조)
학습 4
프란치스칸은 성서 인물들의 배역을 맡음으로 성서에서 새로운 뜻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그 사람이 되어 같이 느껴 보면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눈앞에 계실 때 그 사람들도 달라졌고 우리도 달라진다. 성서가 구체적으로 나의 것이 되어 버린다.
복음성서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드러내 보인다. 여러분이 성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 안에 들어가 보라. 길가에 서서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는 맹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보라(마르코 10,46~52 참조)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하혈병에 걸린 여인이 되어 보라(마르코 5,25~34 참조).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할 때의 마리아 막달레나가 되어 보라(요한 20,24~29 참조). 세 번째 부인한 후 안뜰너머로 예수님의 시선을 받을 때의 베드로 사도가 되어 보라.(루가 22,60~62 참조).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그 어머니가 되어 보라(루가 2, 48~ 52 참조). 모든 이에게 버림받았을 때의 예수님이 되어 보라(마태오 26,55~56 참조). 결혼피로연이 위태로워졌을 때의 가나의 신혼부부가 되어보라(요한 2,1~11 참조).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에 위협을 느꼈던 바리사이가 되어 보라(마태오 23,13~34 참조), 높은 자리다툼을 한 사도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 보라(마르코 10,35~40 참조). 예루살렘 성읍에 대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라(마태오 23,37 참조).
학습 5
우리는 자기 개인생활 이야기들과 성서 이야기를 비교함으로써 성서를 생활화 할 수 있다. 내가 내 자신을 그 이야기 속에 놓고 볼 때, 내가 성서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서를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다. 어떤 형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고통 중에 성서말씀을 듣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2첼라노 105
성서를 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성서에서 우리 주 하느님을 찾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묵상을 하고 마음에 되새겨 보기에 충분할 만큼 이미 성서의 많은 부분을 나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아들이여, 나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불쌍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때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인상적이다. 내가 그 맹인의 역을 맡을 때, 내 얼굴에 흙칠을 한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나는 예수님이 왜 나를 창피스런 처지에 빠지도록 했을까 의심해 보기도 한다. 불평도 해본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가 씻어라!'라는 말씀뿐이다. 나의 왜곡된 생각의 진흙을 씻어버릴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것에 대해 새로운 안목 가지게 된다.얼굴에 묻은 진흙'의 경험은 내가 회개하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맹인과는 다르게, 나는 씻기를 미루거나 그 진흙을 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나의 내적 태도들과 생각들을 너무 많이 드러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만이 자유와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된다.
학습 6
프란치스칸은 성서공부를 계속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우리는 현대의 성서공부를 이용하도록 노력하며,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성서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성서를 경청하는 다른 방법은 자기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비교해 보는 방법이다. 나 자신을 반영해 주는 한 이야기는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예언자 노릇을 하라는 불리움을 피하여 배를 타고 도망가려고 표를 샀다. 하느님은 폭풍으로 막았고, 물고기를 통해 그를 도로 데리고 오셨다. 그제서야 요나는 행동을 바꿨지만 그래도 마음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고 다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그는 그 결과에 대해 화내고 있었다.
하느님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실 때 나는 이를 무시한다. 내 마음이 너무 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더 열심히 하든지, 바쁘게 지내든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복음말씀의 요구를 피하려고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다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큰 고기 배속에서의 시간). 그러다 보면 진리가 명백해져 나는 용서하기로 마음을 정하지만 그래도 주저하게 된다. 내 행동은 바뀌나 마음이 아주 바꿔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마치 요나한테 하신 것처럼 나를 계속 부추기신다. 이런 비교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교해 보는 것이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수가 많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용서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개념은 성서적 삶을 사는 그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관구 봉사자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는 여러 번 죄를 범한 한 형제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10~11
그 형제가 자비를 구하지 않았어도 그대는 그가 자비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에도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여 그를 주님께 이끌도록 하시고 이런 죄지은 형제를 항상 불쌍히 여기십시오.
구약성서에 대한 묵상 글을 읽으면서 한가지 새로운 해석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라는 단어, 이쉬(ISH)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창세기에 있는 이 '어떤 사람'에겐 이름이 없다(창세기 37, 15 참조).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찾고 있지만 허탕을 치고 있었다. 그는 이 사람(ISH 어떤 사람)을 만나 자기 형제들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은 여기서 떠났단다. '도단으로 가자'하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단에서 그들을 찾아냈다(창세기 37,17). 이 평범한 사람이 거기에 없었다면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혹시 못 만났을지도 모르고, 유대인들의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어떤 사람'은 일생에 오직 한 가지 큰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요셉에게 이 말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전달자가 될지 전혀 모른다. 이런 일은 보통 때에 일어난다. 우리는 한순간에 하느님의 전달자가 될 수도 있다.
학습 7
프란치스칸은 복음말씀을 오늘의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방법으로 적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건전한 것도 성스러운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묵상, 공동체적 상호보저, 전체적 또는 개인적 결정을 통해 우리 프란치스칸의 영향을 이 세상에 바르게 미치게 한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세계관과 성서를 보는 눈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 시대,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보일 때에 살았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아직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때였고 여러가지가 달랐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13세기 지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말이 중요하지만 그 시대라는 제한된 여건에서 나왔던 말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프란치스코의 성서에 대한 사랑을 이 시대에 꽃피우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던 전망을 열어 주었다. 지구는 작아졌지만 우주는 더 확장되었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지 13세기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성서적 삶을 현 세상에 맞춘다. 프란치스찬은 프란치스코 성인한테 배우지만 현 시대의 징표들을 알아서 적용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맹목적으로 모방해서는 안된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마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이 할 일을 가르쳐 주시기를 빕니다."(2첼 214)
많은 현대인들의 부정적인 사고와 도피성향은 하나의 비극이다. 희망의 필요성이 역력하다. 우리의 현 사회는 여러가지로 부유하면서도 희망의 소지는 별로 없다. 마약과 술, 다른 중독성 물질의 다량섭취는 희망 없는 사회임을 드러내 준다. 현실에서의 도피를 위한 수단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광신주의 종교 집단들은 죽음과 자살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도피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셈이다.
프란치스칸은 이 현실을 직시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비난하려는게 아니라 희망을 주고자 함이며, 우리의 임무 또한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의 희망이요, 복음 말씀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확신을 둔 우리의 희망을 그들과 함께 나눈다. 우리는 복음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에 기여하게 된다.
학습 8
성서는 성령으로 활기찬 예수님의 공생활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더 큰 세상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이 강력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기여하려면 복음적 가치를 잘 반영하는 그런 공동체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동체 형성에 열심히 일한다. 성서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되도록 부르신다(요한 14,29 참조)
사람들은 나쁜 일에 대해 쉽게 의기소침해 하고 한탄한다. 프란치스칸은 현실을 인정하되, 이런 현실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프란치스칸은 예수님과 복음말씀이 가져다주는 희망과 의미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관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프란치스칸은 개별적인 봉사활동을 할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으로나 사회적인 면에서 필요로 하는 것도 있다. 프란치스칸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해 구조적인 변화를 도모한다.
이런 직관은 프란치스칸이 복음말씀을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생활에 적용하고 또 알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고, 우리 공동의 비전이 사회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가 평화, 정의 , 가정생활, 기도정신, 용서 그리고 비폭력 분쟁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사회와 교회에 기여하게 된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결코 복음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들은 바를 경탄할 만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부지런히 이행하고자 신경을 집중하였다."(1첼라노 22)
'독선주의자'는 프란치스칸적 삶의 모범이 아니다. 우리는 격리되어 원하는 대로 자기 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른 프란치스코 성인과 성녀 클라라의 생활 양식을 살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키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모임이 한 달에 한번씩 드물게 있으면 더 어렵다. 그래서 회칙은 이에 대한 문을 열고 있다. "회원 상호간의 친교를 촉진하기 위해 형제회의 정기적인 집회와 빈번한 만남을 가지며, 다른 프란치스칸 그룹, 특히 청년 그룹과의 만남도 마련해야 한다."(회칙 제 24조)
복음말씀에 따른 생활에 정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각 단위형제회는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힘들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복음말씀이 이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진정한 프란치스칸이 되려면 우리는 이를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 복음말씀에도 나와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태오 16,24)
학습 9
동정심과 사랑은 복음적 삶의 덕성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는 데서 사랑을 발견했다. 예수님의 '아빠'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프란치스코 성인을 감동시켰다. 수난에 대한 성서 기록들은 눈물 흘리게 했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사랑하기를 원했고, 예수님이 느끼셨던 그 고통을 자기도 느끼고 싶어했다.
십자가를 일부러 만들 필요은 없다.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우리 자신을 희생할 기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완전한 수도 공동체도 없고, 완전한 프란치스칸도 없다. 우리 모두가 부족하다. 그러나 성령의 힘을 받아 서로 돕고 이 세상에 영향을 줄 방법들을 찾아낼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가진 하나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성을 다한다. 복음적 삶이 이것을 요구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수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수난을 참아 내셨다. 예수님은 이 수난으로부터 도망가시지 않았고, 힘들게 이를 받아들이셨다. '아빠'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그는 수난과 그에 따른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런 사랑에 감동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동정심을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동정심에 찬 생활방식을 받아들였다. 그가 오상과 병고에 시달리고있을 때도 그가 사랑한 나병환자들을 다시 보살피기를 원했다. "내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의 주님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보나벤투라 대전기)
예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복음적 삶에 상응한 행동이다. 우리는 고통을 찾아 나서지 않으며,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기 학대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이 행동을 요구하면 그 대가에 관계없이 실행한다. 동정심은 프란치스칸에게는 제2의 천성이다. 아무것도 우리가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 동정심만 발휘할 뿐이다. 우리는 악덕한 행위와는 싸우지만 잘못하는 사람들을 우리 마음에서 내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동정심에 찬 행동을 하도록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 원의를 일으키시는 분도 실천케 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필립비 2,13)
묵상
성서는 프란치스칸의 생활을 위한 자료집이다. 우리는 성서를 연구해야 하고 거기서 예수님의 인격을 발견해야 한다. 즉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적,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의 가치, 인정 많은 굳셈, 사랑의 순종을 우리가 받아 안아야 한다.
성령의 현존 없이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영을 보내주셨고 힘을 주시기에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다.
2데살로니카 3,3~5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굳세게 하고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가 명한 바를 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행하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이끌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인내로 기다리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마태오 7,24~`25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비가 내려 큰물이 닥치고 바람이 불어 들이쳤으나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칙>
제13조
성부께서 수많은 형제들의 맏이이신 성자의 모습을 각 사람 안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회원도 모든 사람은 주님의 선물이자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겸손하고 인간답게 받아들일 것이다. 회원은 형제애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며, 또 함께 하도록 할것입다. 그리고 회원은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피조물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생활 여건을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설
프란치스칸은 예수님과 일치되어 살기로 서약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일치하게 된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작은 요구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 예수님이 바라보신 것처럼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분이 이해하신대로 삶을 이해하기로 했다. 복음적 삶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일치란 친밀함을 뜻한다. 즉 다른 사람의 내면을 다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요구하며, 따분함에 대한 인내심을 요구하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독선적인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의미하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같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의기소침한 사람을 격려하거나 같이 의기소침할 마음의 자세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당신을 욕할 때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에 대한 존경심으로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흔히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의해 상처를 받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다른 사람'이 악하거나 바보거나 역겹거나 범죄적일 수 있다. 프란치스칸은 화나고 좌절감이 생길 때 동정심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골치가 아프거나 무료할 때도 사라질 수 있고, 오해와 성가신 행동에 부딧칠 때에도 없어져 버릴 수 있다.
용서를 바라고 있는데 비난을 받을 때, 다른 사람들한테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여러운 일이다. 힘과 격려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의기소침과 심약함을 발견했을 때도 그렇다. 존경심과 환영을 바랐는데 모욕과 거절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프란치스칸은 동정심을 항상 유지하려는 노력을 저버리지 않는다. 복음적 동정심은 노력해야 유지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때때로 꽤 많이 긴장되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보다 예수님께 더 기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러 형제 자매들의 첫째이신 예수님께서 극복하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대해 고마워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일치와 동정심은 내적 열매들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내적 불빛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불빛이 된다. 공동체가 상호협조와 나눔으로 우리의 불빛을 계속 타게 하고 있다. 우리는 같이 노력하며, 같이 성취한다. 우리는 서로의 약점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 좋은 점과 사랑을 같이 나누어 받는다. 각 형제회는 우리의 갈 길을 밝혀주고 우리와 동반하는 사람들에게도 빛을 제공한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모든 일의 핵심이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잘 묘사하였다.
1고린토 9,19~23
실상 나는 모든 이로부터 자유로운 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모든 이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을 얻기 위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나 자신은 율법 아래 있는 몸이 아니지만 율법 아래있는 이를 얻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이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율법 없이 사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법 안에 있는 몸이지만, 율법이 없는 이를 얻기 위해 율법이 없는 이에게는 율법이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를 얻기 위해 약한 이에게는 약한 몸이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하고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내가 그 복음에 동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프란치스칸 공부>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의 이야기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그는 복음적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부르심에 의문이 생겼다. 계속 기도하고 묵상에 전념할 것인가? 혹은 기회가 생기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가? 이 두 가지가 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의 회개 때부터 이 두가지를 때에 따라 다 실천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가 신뢰하던 두 사람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그는 맛세오 형제에게 클라라 성녀에게 가서 그의 조언을 받아 오라고 부탁했고, 실베스텔 형제에게 가서 그의 조언을 들르려고 했다. 그래서 맛세오 형제는 두 성스러운 사람에게 갔다. 클라라는 아시시에 있었고 실베스텔 형제는 수바시오 산에 있었다. 두 사람 다 얼마동안 기도했고, 두 사람 다 곧 하느님의 응답을 받았다. 실베르텔 형제는 맛세오 형제에게 즉시 갔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지금의 신분으로 부르신 것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잔꽃송이 16장)
맛세오 형제가 클라라 성녀의 대답을 들어보니 실베스텔 형제의 말고 일치했다. 기뻐서 돌아온 맛세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무어라고 명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뜻은 사부님이 이 세상에 나가 널리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사부님을 뽐으신 것은 사부님 한 사람만을 위한것이 아니라, 동시에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잔꽃송이 16장)
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저 없이 즉시 설교하려 나섰다. 의문이 사라지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즉시 설교 여정에 나섰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의문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흔히 우리는 의문점을 혼자서 해결할 수 없어서 우리를 인도해 줄 조언자를 찾게되고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가 혼자서 걷지 멀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적 삶의 여정에서 함께 걸어가는 영신적 동반자를 첮는다. 이것을 '영적 지도'라고 한다. 이런 나눔을 잘 묘사하는 문구가 있다. "길에서 만난 두 순례자가 있다. 그들은 어디에 가장 좋은 음식과 잠자리가 있는가를 서로 알려준다." 좋은 영신적 동반자는 복음적 여정에서 상대편을 돕기 위해 좋은 의견들을 잘 듣고 나눈다. 그렇지만 결정은 구도자 각자 개인의 목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실베스텔 형제와 클라라 성녀를 믿는다. 그들이 기도하면서 묵상한 것을 알려 주었을 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묵상과 설교, 기도와 행동을 결합시켰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행사들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지혜로운 말에,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배운다. 다른 때는 복음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종교예절과 신앙심에 찬 사람들의 건전한 예절참례 행동에서 우리는 배울 수가 있다. 우리 주위 어디서나 우리는 지도를 받을 수 있다. 개인적인 지도가 필요할 때 우리는 자격 있는 신뢰할만한 친구에게 가서 우리의 삶을 나누며 지도를 받는다.
요한 12,49~50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토론 주제>
1. 이 과목이 어떻게 성서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는가?
2. 어떤 학습이 가장 도움이 되는가? 그 이유는?
3.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4. 우리의 프란치스칸 삶에서 동정심의 역할이 무엇인가?
5. 각 형제회가 우리의 복음적 삶의 여정에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가?
6. 영적 지도의 역할이 무엇인가? 좋은 영신지도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보라.
7. 지난 몇 달 동안 프란치스코 성인과 프란치스칸 삶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가?
<성서 묵상>
+갈라디아 1,11~24
갈라디아서의 이 구절에서 나오는 '그 방식'을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습득했는가를 설명하라. 프란치스코 성인이 '회개하고' 주님의 길을 습득한 그런 방식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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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과 성서
- 성서 연구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성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준다.
- 프란치스칸은 성서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 우리는 설명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프란치스칸은 성서에서 요구하는 것을 따른다. 우리는 이것을 프란치스코와 같은 정신으로 한다. 즉 듣고 뜻을 찾고, 도움을 청하고, 실천한다. 이 방식은 프란치스코 성인 이래로 변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언제나 성서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서말씀을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프란치스칸은 만일 그 말씀의 숨은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해에 따라 행동도 바꾼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과 행실의 결과와 신앙공동체가 결국 그 잘잘못을 밝혀준다. 우리 인생 여정에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프란치스코 성인은 알고 있었다.
.- 프란치스코 성인과 성서말씀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첼라노가 말한 것처럼 "이 복된 사람이 지식을 배우면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높은 데서 내려오는 하느님에 관한 지혜를 파악하였고 영원한 빛을 받아서 성서에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다."(2첼 102) 그는 겸손하게 하느님 말씀에 다가갔고 경외로 가득찬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들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서를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다. 어떤 형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고통 중에 성서말씀을 듣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서를 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성서에서 우리 주 하느님을 찾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묵상을 하고 마음에 되새겨 보기에 충분할 만큼 이미 성서의 많은 부분을 나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아들이여, 나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불쌍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13세기 지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말이 중요하지만 그 시대라는 제한된 여건에서 나왔던 말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프란치스코의 성서에 대한 사랑을 이 시대에 꽃피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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