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7장 나는 믿는다.

Margaret K 2019. 2. 18. 03:02

프란치스코처럼 

제7장 

나는 믿는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다보면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싶어하고 믿는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또 평화와 기쁨으로 안내해 주는 어떤 길을 찾고자 한다. 이런 점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삶이 무료해지고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된다. 


프란치스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 말씀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발휘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 우리는 복음 말씀을 따르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의 삶의 방식을 믿으며 우리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다.


1고린 3,16~17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도 그 사람을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신앙의 규범들이 많이 있지만 근본적인 신앙 규범은 실상 간단한 몇 가지이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분의 현존은 생명을 가져온다. 이 두 표징인 빛과 생명이 우리 신앙의 길을 제시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느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요한 6,29) "아들을 보고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요한 6,40)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진 우리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이 은총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로마 5,1~2)


예수님은 주춧돌이시므로 우리는 그분 위에 신앙의 건물을 짓는다. 그분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고 그분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바로 그분이시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 영광을 보았다. 아버지께로부터 오시어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 외아드님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사랑합니다.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고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시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로 1,8!() '그분은 우리의 행실을 보아서가 아니라 당신 계획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고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지금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출현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없애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불멸을 빛내셨습니다."(2디모데오 1,9~10)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성부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요한 12, 49~50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입니다.


요한 14,6~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었고 또 그분을 뵈었습니다. 


요한 8,28~29, 31~3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인자를 높이 들어올리게 될 때 그제야 내가 그이라는 것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주신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항상 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성서는 예수님과 '아빠' 사이의 친밀함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즉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삼위일체이신 세 분은 우리에게 투자하셨다. 그들의 사랑은 변함 없이 충실하시고, 우리에 대한 그분들의 사랑에 제한을 둘 수 없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들의 본질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슬퍼하신다. 하느님이 슬퍼서 우리를 벌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은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창조적인 방법을 찾으신다.


예수님은 성부를 드러내신 뿐 아니라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이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다.


요한 14, 15~17

그대들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 청하였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영원히 함께 계실 다른 협조자를 그대들에게 붙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대들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대들과 함께 머물고 그대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지만, 누가 만일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않고 있다면 그는 그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대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근본이다. 그분들은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생명과 빛의 원천이시다. 예수님이 세상에 빛이신 것과 같이 그분은 우리를 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부르셨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자리잡은 도시는 숨겨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어, 그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오 5,14~16)


이 믿음을 가장 잘 압축하여 묘사한 문장은 성찬기도 3양식일 것이다. "당신은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만물을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나이다." 성찬 기도들은 모두 성령이 생명과 변형(변화)의 원천임을 인정하고 있다.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소서"(성찬기도 2양식). "아버지,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소서."(성찬기도 4양식)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상위일체의 하느님께 기반을 두고 쌓아 올리지만 다른 결정적인 사실도 믿게 된다. 하느님은 사람이시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지 않으면 활동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임을 프란치스칸은 알아야 한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오신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죄가 강생의 목적을 바꾸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머무시려는 원의를 바꿀 수는 없었다. 죄 때문에 몇 가지 일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타락한 백성이므로 구원이 필요하다. 세상의 현실을 살펴보면 인간은 완전한 것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삶의 선택을 우선시 해야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길로 나아가기 일쑤다. 우리의 파괴적인 행실에서 우리의 나약함이 잘 드러난다. 인간이기 때문에 따라오는 이런 약점들- 아담과 이브에 대한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드러난 약점들-로부터 구제 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 사실은 성서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현존과 가르치심으로 우리가 잘못 선택한 죄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다. 그분은 성부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생명의 길을 구해 주신다. 그분은 성부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을 제시하신다.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의 삶을 바꾸려면 그분의 계명을 자유로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법 집행은 오직 행동에만 가능할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원하신다. 그분의 계명은 마음 깊이 심어져야 하고, 마음속 깊은 확신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셨고 우리는 이것을 굳게 믿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대한 크나 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요한 1,5~7

우리가 듣고 알리는 소식이란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도 어둔 곳을 거닐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이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빛 속을 거닐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또한 그분의 아드님 예수의 피가 우리를 온갖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에페소 2ㅡ19~22

이제 여러분은 나그네나 뜨내기가 아니라 성도들과 같은 시민들이자 하느님 가족이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잇돌로 하여 세워진 건물입니다. 그분 안에서 이 건물은 그 모둥이돌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며 자라서 주님의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 하느님의 신령한 거처가 됩니다.


주춧돌이신 예수님께 속해있다면 우리는 집을 잘 지을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고,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능을 다 가지고 있다. 아무도 외딴 섬처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다. 우리는 각자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면서 살고 있고 이 재능으로 다 함께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낟.


우리가 철공소의 일꾼이라면 철공소의 일을 해낼 수 있고, 우리가 전업주부라면 최선을 다하는 주부가 된다. 우리가 부모라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고, 우리가 사제나 수도자라면 충실한 수도자가 된다. 우리가 학생이라면 배우는데 최선을 다하고, 아이라면 친구, 부모와 건전한 관계를 가지도록 노력한다. 우리의 각자의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더 많은 공동체의 요구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존재와 소유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상호의존 관계에서는 아무도 도움과 격려 없이 버려두지 않는다. 


이런 기본적인 진리들은 우리 믿음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하느님께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사도신경의 각 조목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여러가지 모습을 각각 드러내 주고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 믿음의 행심이요 총체이다.


부활

우리 신앙이 밑바탕에는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다만 한 사람의 착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느님이 그분을 죽음에서 끌어 올렸을 때 끝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시작이 되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예수님은 게속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 삶의 원천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그분의 말씀을 새로운 안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의 신념과 용기는 점점 강해졌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사도들의 체험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드러내시는 획기적인 새로운 방식이 되었다. 이로인해 하느님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부활 신앙은 절대적인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이 책 '프란치스코처럼'은 교리서가 아니기에 신앙의 진리를 세세히 열거하지 않겠다. 그러나 강조할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신앙의 두 가지 기초가 놓여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빠'를 드러내셨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 바오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에페소 2,4~10

자비가 넘치는 하느님이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범행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당신 은총이 얼마나 풍요한지를 다가오는 세대에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행업으로 이룬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미리 마련하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프란치스코 성인도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고 그에 응답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몸과 마음과 생명을 모두 다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기를,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기를, 아무것도 그분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기를"(인준받지 못한 회칙 23장 8,10)


신앙의 이해를 위한 신학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연구요, 성서와 성전에 관한 연구이다. 이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북돋아 준다. 신학자들은 우리를 스스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길로 인도해준다. 그들과의 대화는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며 또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하느님이 보여주신 진리에 빠져들도록 이끌어 주는 신앙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이고, 또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진리가 완전히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인간의 한계 때문에 시대에 올바른 신앙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성서의 말씀,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 현세에서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새로운 경이에 접하게 된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가지 길에서 묶여 있는 매듭을 계속 풀어 나가야 한다. 과학과 예술, 문화와 예술, 문화와 교육은 각각 부분적인 진리들을 제공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부분적인 진리를 전체의 진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한 하느님(한 본성)에 세 위격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명백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위격'의 의미와 '본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진리를 설명하려는 이 단어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더 큰 진리이신 하느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 우리가 거룩하고 공번된 가톨릭 교회를 믿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교회'에 대한 의미와 이해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더 연구해야 하고 개발해야 한다.


여러 세계를 통해서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근본적인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이해하는 방법은 당연히 변하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계속해서 신학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이런 학문적인 연구는 전통적인 이해와 연결되어 양쪽을 모두 풍요롭게 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런 발전은 두려워할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와 하느님의 계시 속에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상기해 보면 "살인하지 말아.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리라" 고 옛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내는 사람은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형제더러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며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은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오 5,21~22) 예수님으 '살인'이라는 의미를 더 폭넓게 하셨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신앙공동체 안에서임을 알 수 있다. 한 속담이 이를 잘 표현해준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넓어진 마음은 결코 옛날 것으로 돌아가지 않은다." 새로운 해석은 질리에 새 맛을 첨가하는 셈이다. 



진리의 삶


진리는 강하고 

힘이 있고 끈질기다네.

행여 진리가 힘에 질까 두려워할 필요은 없네.

진리는 서로를 내놓으며 우리를 눈뜨게 한다네.

하느님의 신비에 더 깊이 뛰어들게 하고

생명과 빛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네.


탐구를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지혜를 들여다 보세.

우리는 경이로운 백성

하느님이 택하신 방식을 이어받아

순간 순간마다 하느님 닮은 모습 드러내세나.

우리의 응답은 감사와 찬미,

진리 추구를 기뻐하실 하느님이시네.

우리의 시도를 받아 안으시는 하느님이시네.

진리는 우리를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네.


신비와 탐구 인식하려는

제한된 능력의 동반자들,

죽음의 선물을 통해

속박의 끈이 모두 풀어져

새 생명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대고 뵈올 때까지

이렇게만 말하려 하네.

믿습니다. 주님.


두려움 - 의심

신앙이 자라는데는 여러가지 단계가 있다. 그 한 단계가 의심이다. 사람들은 의심할 때 신앙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 준다. 우리가 신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신앙을 알게 되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가 청소년이었을 때 이해했던 것은 노인이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은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고, 이는 새로운 안목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초대이다. 


의심을 품게 되면 두려워지기도 한다. 중대한 위기, 비극적인 사건 또 기대에 어긋난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하느님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한다. 신앙생활이 밑바닥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불확실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 우리 생활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의심은 신앙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심의 어두운 마음은 신앙의 믿 받침이 되게 하고, 이것이 항상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신앙의 성장에 건전한 역할을 해 준다.


하느님은 신비스러운 분이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작은 지식은 충분하지 않다. 사도 토마스 그의 동료들을 믿기 어려웠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심했고 징표를 요구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났을 때 예수님은 토마에게 징표를 보여 주셨고 토마는 믿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요한 20,29) 토마의 의심은 오히려 우리에게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토마에게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을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신앙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갈 때 우리를 위해 똑같이 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정의란 점에서는 부족할 수 있으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욱 신앙을 깊게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알았다면 천국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하느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다. 신앙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생기는 두려움은 있을 수 있다. 어느 때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많은 답을 얻고 우리가 피하고 싶은 문제를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서 당연히 따라오는 불안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느님께 맡기는 것, 즉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두려움은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 한다. 의심과 두려움은 회개의 요구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의심으로 인한 두려움이 너무 강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이 중단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


로마서 8,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현재도 미래도, 권세도 높이도 깊이도,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나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열려진 문

의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신뢰한다는 것을.


두려움과 의심은 서로 친한 벗.

앎과 신뢰를 찾아다니네.


이해와 포기의 새로운 장소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 삶으로 

날 데러다 주네

아, 감사하리라. 하느님의 선물. 

좌절하는 것보다는 찬양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싱기넘치게.

"거룩한 분, 진실한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묵시록 3,7)


<재속 프란치스칸 회칙>

제6조 

회원은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교회의 산 지체가 되었으며, 서약함으로써 교회와 더욱 친밀히 결합하게 되었으므로,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의 사명에 대한 증인과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고, 또 그분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도록 불리운 회원은, 사도적 결실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신뢰와 개방적인 대화로써 교황 성하와 주교들과 사제들과 전적인 친교 안에서 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해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썼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그냥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쥐고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미래는 최종적 미래를 분석해야 할 정보가 아니고 만나게 될 인격체이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예수님과의 친교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효과 있게 교회를 재건하고 교회 임무 수행에 열성을 다한다. 공부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 이를 위해선 예수님과 내적 관계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며, 성서에서 드러난 성서적 계시를 포용해야 한다. 이는 믿는 공동체와 호흡을 맞추기 위한 내적인 태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독주자'의 영화각본이 아니고 공동체 생활이기 때문이다.


'신뢰와 개방적인 대화로써' 단순한 말이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 흔히 사람은 자기가 믿은 것을 고수하려고 하기에 개방과 신뢰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반성해보면 개방하고 믿기보다는, 굳어있고 고집스러운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재건을 원한다면 그에 대한 토론을 막지 않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이미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런 어려운 문제를 다시 토론하는 개방성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면 그 문제점을 재검토해야 한다. 토론의 위험 요소가 있다고 해서 토론하기를 거절하거나 문을 닫는다면 제대로 하기가 어렵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모범에 영감을 받아 우리도 교회의 권위와 일치를 이루며 살지만, 교회가 복음정신에 따라 살아가는데 방해되는 문제점은 기꺼이 지적할 것이다. 우리는 무력감을 드러내거나 더 나은 확실성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사랑의 정신으로 교회가 복음적 공동체가 되는데 방해되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대응한다. 우리가 해야할 이 임무는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와 개방적인 대화'를 조성하고 받아들인다면 많은 좋은 것을 성취시킬 수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 들어가기를 거절한다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힘을 합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실천해 나가는 그런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이다. 프란치스코 회원은 특성상 그러한 삶을 살기로 서약하며 서약을 어기지 않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회칙 제 6조는 하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의 사명에 대한 증인과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발하는 어떤 것이든 이 직무를 수행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분리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걸쳐 살고 있으므로 우리의 삶을 통해 교회와 세상을 서로 만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 두 가지를 다 실천해야 하는 능력과 임무를 갖는다.


서약

세상 사람을 위해

복음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프란치스코가 마음 깊이 원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더 당당하게 걸어갔을까?

더 열심히 공부했을까?

더 힘차게 살았을까?

사랑이 비어있는 죽어가는 세상으로

파견된 회칙에 감동을 받았을까?


회칙에 서약하면서 

거저주신 선물은 무엇일까?

나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나의 서약의 선물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것인지

생각하리라, 깨달으리라.

매일을 찬양으로 시작하고,

감사로 마치는

복음적 생활의 나날을 위해.


나를 바치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당신의 아들 예수님.

그 안에 머무시는 성령이시여,

아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가!

유일하신 하느님.

사랑의 성삼위를 선포하는 것이!


<프란치스칸 공부>


그레치오 - 성탄 구유

1223년 성탄절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친한 동료인 요한에게 도움을 청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레치오 사람들에게 베들레헴의 장면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그는 요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지시했다.


성탄 전야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단순하고 가난하게 구유를 꾸몄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미사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제로 봉사했고, 기쁘게 예수님의 성탄 복음을 노래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축제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랐다. 미사 중에 한 사람이 환상을 보았는데 생명이 없는 한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구유에 가서 아기를 깨우는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아기를 팔에 안았을 때 그 사람은 아기가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 이 환상은 현실을 반영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새로운 감각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성탄시기에 구유를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나 조각이 아무리 아름답지 않고 마구간이 비천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하느님이 기꺼이 가난과 소박함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쁘게 했고 그의 마음을 더욱 열정적으로 불타오르게 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가난으로 '가난 부인'에 더 충실하려는 그의 원의가 증가되었다(1첼라노 84~87)


<토의 주제>

1. 당신이 우리 신앙의 기본 조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목록을 작성하시오.

2.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3. 우리의 신앙생활에 신학과 신학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4. 왜 우리의 신앙생활과 신앙성장에 에수님이 중심이 되는가?

5. 왜 개방과 대화가 우리 서로의 인간관계 -신앙공동체 안에서, 또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한가?

6. 어떻게 매일의 생활에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가?

7. 어떻게 우리 프란치스칸이 복음적인 백성으로 교회를 건설하는가?


<성서 묵상>

+창세기 9,12~15

당신의 계약의 약속을 어떻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교회)과의 관계와 연관시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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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다.

프란치스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 말씀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발휘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 우리는 복음 말씀을 따르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의 삶의 방식을 믿으며 우리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다.

주춧돌이신 예수님께 속해있다면 우리는 집을 잘 지을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고,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능을 다 가지고 있다. 아무도 외딴 섬처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다. 우리는 각자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면서 살고 있고 이 재능으로 다 함께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

신앙이 자라는데는 여러가지 단계가 있다. 그 한 단계가 의심이다. 사람들은 의심할 때 신앙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 준다. 우리가 신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신앙을 알게 되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가 청소년이었을 때 이해했던 것은 노인이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은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고, 이는 새로운 안목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초대이다. 

재속 프란치스칸은 예수님과의 친교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효과 있게 교회를 재건하고 교회 임무 수행에 열성을 다한다. 공부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 이를 위해선 예수님과 내적 관계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며, 성서에서 드러난 성서적 계시를 포용해야 한다. 이는 믿는 공동체와 호흡을 맞추기 위한 내적인 태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독주자'의 영화각본이 아니고 공동체 생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힘을 합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실천해 나가는 그런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이다. 프란치스코 회원은 특성상 그러한 삶을 살기로 서약하며 서약을 어기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