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처럼
제 9장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함께 걸으며
영성생활에 관한 책들은 도서관에 가득 차 있으며, 거기에 쓰여진 하느님을 알게되는 방법을 다 요약할 수는 없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알맞는 방법으로 각각 독특하게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를 안팎으로 잘 아시는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도 수만 가지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막막하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는 도중에 필요한 것은 다 마련해 주신다. 다만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 길 위에 난 표지판들은 신앙의 눈이 있어야 보인다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 프란치스코의 방법에는 특색이 있다. 예수님을 따랐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함께 하면 기쁨이 있다. 여기서 다루게 될 '프란치스칸 영성'이라는 것에 대한 묵상은 거대하다. 이 영성을 다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여기서는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몇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이들 중에는 나의 경험도 있고 또 나에게 영향을 준 저자나 설교가의 것도 있다. 내가 프란치스코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데 이해를 더해 준 그분들게 감사드린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어린 시절
프란치스코나 클라라는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을 가정에서부터 시작했다. 클라라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프란치스코는 번창하는 중산층 옷감 장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수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는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어른들이 한탄할 일들이 많았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비도덕적인 일들을 따라 하기가 일쑤였고 방탕한 술잔치가 마을의 사교 생활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부도덕한 시대의 영향에서부터 보호받는 환경에서 자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런 도시 환경을 즐겼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그는 수도원 같은 환경에서 자란 착하고 잘 생긴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종종 술자리를 이끄는 리더였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 반대도 안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잠 못이루는 밤이 많았을 것이다.
클라라는 귀족 집안에서 모든 귀족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성품은 어머니인 올톨라나의 다정한 분위기와 신앙 안에서 피어났다. 아버지 파보로네는 오프레두치오의 아들이었는데, 그 집안은 무사의 집안이었다. 그래서 클라라의 집에서 들리는 소리는 칼들이 쩔렁거리는 소리와 전쟁에 관한 소리뿐이었다. 방패들이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 기도문을 바치며 자란 여자들은 강했고 신심은 열렬하였다.
클라라의 어머니는 시나이 산으로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클라라에게 시나이 산에 묻혀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클라라의 집안은 아시시의 내란으로 1198년 페루지아로 추방되기 전까지는 권세 있는 집안이었다. 그 당시 클라라는 대 여섯 살이었다. 그 추방은 1205년까지 계속되었으므로 클라라는 우울한 사춘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요한 평정과 겸손함으로 그녀는 이웃 사람들에게서 높은 평판을 받았다. 파보로네 집안에서 울려나오는 전쟁의 이야기, 피비린대 나는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전쟁의 비극을 맛보게 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평화롭지 않은 시대의 아들딸이었다. 권력과 명성의 싸움이 그치니 않았기에 그 시대의 사회적 고통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그들 안에서 평화와 정의를 강하게 열망하는 씨앗이 심겨졌은 것이다.
이 어린 시절은 프란치스코나 클라라에게도 성품을 형성하는 시대였다. 그 시절은 그들에게 회개와 전환을 가져올 마음을 만들어 주었다. 클라라는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통찰력 있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고, 프란치스코는 고집 세고 놀기 좋아하는, 기사가 될 야심으로 꽉 찬 젊은이로 신명나게 즐기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네 집안에서는 재산과 명성이 인생의 목표였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생활력과 어머니의 너그러움 두 가지를 다 지니고 있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도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훗날 그들의 생활 속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란치스코는 그가 기사가 될 꿈속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복음적 생활 속에 몸을 던졌으며, 클라라는 그녀의 명석한 통찰력으로 가난 부인을 통하여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일을 관철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 부인만이 줄 수 있는 경이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 둘 다 성령의 현존 안에서 사랑으로 가득 차 투쟁하였고,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전폭적인 신뢰의 경지에 도달했다.
전환의 순간
전환, 즉 회개란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 마음 속 어두운 곳을 비춘다. 그렇게 시작한 회개는 우리 안에 있는 마귀와 투쟁할 때 계속 된다.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인간의 약점들이 보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이것은 장애물이라는 것이 보인다. 하느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마귀들과 겨루면서 그들을 길들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투쟁이 일생에 한번만 일어나면 다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과 클라라의 여정을 보면 그 투쟁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변한 것은 투쟁 중에서도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내적인 투쟁이나 외적인 저항도 어쩌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이 있다.
클라라는 생애 말년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의 친구였으며 그녀가 의지하여 설 수 있는 기둥이었기에 프란치스코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건강도 말년의 프란치스코만큼 나빴다. 그들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쭉뻗은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냉대와 위협을 받으면서 시골길을 돌고 도는 길이었다. 그럴 때 그들의 힘은 예수님이었고 성령이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투쟁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이 도와준다는 인식을 갖기를 바란다. 그들은 에수님과 함께 고통을 겪으면서 예수님과 친해진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졌다. 그것은 그들의 평화로운 죽음에서 분명해진다. 투쟁과 고통, 기쁨과 일치의 한생을 보내면서 그들은 '누나'와 '언니'가 되어 있었던 '죽음'의 때를 기꺼이 맞이하였다.
길가에 있는 표지판들
1. 프란치스칸은 가정 생활과 교육이 미치는 큰 영향을 알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어릴 적의 영향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다하는 인식을 달라지게 하고 우리가 인생을 보는 시각을 결정한다. 인생을 살 가치가 있다고 보는지, 그저 투쟁의 연속으로 보는지 그 둘의 혼합으로 보는지가 어릴 적 경험에 많이 달려 있다. 어릴 적 영향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여 어떻게 느끼는가를 결정한다. 어릴 적 어른들이 학대했는지 사랑했는지가 평생동안 의미 있게 남는다.
전환은 이러한 사실들과 무관하지 않다. 전환의 과정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경험들을 의식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교하여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가르치는 대로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변한 데 대하여 썼다. 회개하기 전에는 그들을 처다보는 것조차 역겨웠으나 회개한 후에는 그들과 함께 걸어도 영혼의 달콤함을 느꼈다. 클라라는 자기를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야 할 때 괴로웠다. 그들을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분'의 부르심이 너무 커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들의 몰이해를 다 받아야 했고 강제로 그녀를 데려가려는 억지를 모두 감수해야 했다.
2. 하느님께 자신을 다 바치면 그와 더불어 가난이라는 은총이 들어온다. 예수님은 우리 생활의 방에 환한 빛으로 오신다. 그래서 개인적인 약함이나 빈곤을 감출 수가 없다. 예수님의 빛으로 삶의 조명을 받는다. 어떤 때는 아무런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느낀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나빠지는 것 같다. 계속하는 것보다 그만 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성실하게 살려면 이렇게 방황하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와 평화에로 인도하고 계신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둘 다 이러한 기분을 느꼈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 부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인이 주장하는 공부에 대한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프란치스코는 그의 형제들에게서 자신의 생각들이 흐려짐을 알았다. 클라라는 여러 해동안 형제들, 교황들, 지도자들, 그리고 친구들과 투쟁했다. 그들은 그녀의 가난특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외로울 적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기댈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만이 그들과 함께 계셨다. 힘든 시간에 예수님께 의지하여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가는 그들의 성실한 표양으로 알 수 있다.
3. 이 훌륭한 인생의 이상과 사상은 일상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전망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상과 꿈, 혹은 전망의 실천은 매일 매일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꿈속의 지혜가 일상의 삶 속으로 투입되어야 한다. 그 실현은 목욕탕에 들어 올 수도 있고, 시장에 따라 올 수도 있다. 그 실천은 컴퓨터 방에나 인터냇에 들어 올 수도 있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실현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운전 습관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때에도 있을 수 있다. 어디를 가나 꿈은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병원에서 일한다면 우리의 꿈은 거기서 실현되어야 한다. 호스피스 실에서 우리가 무능함을 느낄 때 우리는 꿈이 그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결혼식에서나 생일 잔치에서도 꿈을 표현할 길을 찾아야 한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이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우리가 그들과 함게 살 때 우리는 비로서 가난을 이해할 수 싰다. 하느님의 체험을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선물을 주셔야만 되는 일이다. 일상의 경험을 자아 발견의 기회로 삼고 분석한다는 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알콜 중독자들의 치료 모임인 단주 모임에 들었다 해고 술을 끊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와도 복음 정신에 흡수되고 복음 정신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전망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나 그 희망을 실천하는 것은 현실인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기도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다. '가난부인'은 그들이 물질에서 자유롭고, 하느님의 일에 완전히 개방적이도록 인도했다. 그들의 이상을 나누는 것은 폭력이 날치는 곳에서 함께 평화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가난 부인을 사랑하면 가난의 빛 속에서 더러워진 형제, 자매들을 만나는 것이다.
4.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한 부자가 야곱에게 물었다. "왜 사람들은 부자를 개처럼 취급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그것은 아마 개만이 먹다 남은 뼈를 나누지 않고 묻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그들의 회개 초기에 나눔의 역할을 알았다.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은 아무것에도 소유당하지 않는다. 가난은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은, 우리가 가는 이 작은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거지들에게는 나눔이란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나누었던 것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한번은 프란치스코가 한 형제에게 도둑들을 다시 찾으라는 명을 내렸다. 장상은 그 도둑들이 청하는 도움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을 매정하게가 아니라 친절하게 대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고 그 형제에게 말했다. 그 형제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 가지고 그 도둑을을 찾아서 그것들을 주고 사과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제 나쁜 짓은 그만하라고 타일렀다.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한다(잔꽃송이 26장 참조)
클라라는 수녀원 문을 개방하고 아픈 사람들이 와서 그녀에게서 치료의 손길을 받고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대는 이 거짓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눈먼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밀쳐 버리고, 당신의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십시오"(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세 번째 편지15)
지구에 있는 자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를 반영한다. 지구는 몇 명의 소수가 차지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모두가 다 같이 쓰라고 내려 주신 선물이다. 자원을 나누는 것은 프란치스칸이 해야할 사명이다. 우리의 정체는 항상 사람들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것이 관리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관리자는 자기가 받은 것을 이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늘리고 나눈다. 우리는 자원들을 지혜롭게 잘 나누는 방법들을 찾는 좋은 일을 맡은 것이다. 아무도 이 지구상에서 결핍과 비참 속에서 살아선 안된다.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도 영양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는 용서와 인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들을 모두 함께 모아 서로 다른 중에서 기뻐할 줄 아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인 재능을 나누는 것은 좋은 관리자가 되는 한 가지 길이다. 프란치스칸은 이 나눔의 정신을 발전시켜 사람을 돕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젊은이와 늙은이,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들, 호의가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우리는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야곱은 세계를 여행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한 노인이 그에게 빵을 청했다. 야곱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의 반을 잘라 주었다. 그 노인이 자기가 그걸 먹으면 야곱은 금방 배가 고파지겠다고 말했다. 야곱이 대답하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다음 식사는 언제나 신앙의 일입니다." 나눔의 기초는 하느님을 믿는 마음, 신앙의 행위이다.
5.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우정의 가치를 알았다. 그들이 직접 만나기는 어려웠으나 프란치스코가 회개의 길을 들어선 후 몇 년간의 클라라에게는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시기였다. 프란치스코에게도 역시 클라라의 깊은 마음을 아는 시기였다. 마을에서는 한 사람도 프란치스코의 생활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그의 영향이 퍼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클라라의 가정에서도 그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클라라는 그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복음의 메시지에 매혹되었다.
클라라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 지나갔다. 그녀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었다. 집안에서는 좋은 귀족과 결혼시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미친 것 같은 생활을 하는' 프란치스코를 알게 되었다. 아시시 작은 마을에서 파다하게 수군대는 것이 그에 대한 얘기였으니까. 그녀는 그의 집 옆에 있는 대성당에서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보나라는 친구가 클라라를 프란치스코와 비밀리에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 만남은 거의 일녀 동안 계속되었고 클라라가 원하는 것이 프란치스코가 원하는 것이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 단순하고, 가난하게! 가족은 그 만남을 알지 못했으나 그 만남은 클라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211년 (혹은 1212년) 3월 27일, 성지 주일에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성 루피노 성당 미사에 참례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집을 빠져나와 새 생활을 위하여 포르치운쿨라로 향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를 기쁘게 맞이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녀의 머리를 잘랐다. 예수님를 따른다는 최종적인 상징이었다. 두 친구가 이 여정 길에 함께 하였으니 가난 부인과 복음이었다. 이것이 우리 프란치스칸 가족 안에서의 특별한 우정의 시작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완전히 혼자 외롭게 하느님께로 가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께 다가갈 때 고독이라는 의미도 물론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길을 가는데 친구란 필요한 존재이므로 고독과 우정은 둘다 필요하다고 보겠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에게서 잘 볼 수 있듯이 그들이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에는 기도가 친구가 되었다. 클라라는 기도로써 예수님과 강한 관계를 맺었다. 그녀와 예수님의 친밀함은 분명하고도 강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기도 속에 있었고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들의 글을 보면 그들은 하느님 중심의 기도 속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아갈 길을 설명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여정에서도 훌륭한 모범을 보여 준다.
성령의 힘으로 얻은 분명한 통찰력으로써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내적인 악마와 공포를 물리쳤다. 어두움도 그들이 택한 길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예수님의 빛이 언제나 구름 사이로 그들의 길을 비춰 주었다.
그들의 우정은 여러가지 한계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깊은 사랑이 불타오르는 우정이었다. 그들의 성숙한 사람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한 분, 예수님 뿐이었다.
우리는 동행자
우리가 프란치스칸이 되고자 할 때 이 생활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순례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면서 가는 길손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체험을 나누고, 고독의 체험을 공포의 체험을 나눈다. 우리는 축제의 기쁨을 나누고, 복음 생활의 장단에 맞춰 다 함께 춤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것을 배운다. 어떤 때에 우리가 약해지만 도움을 받고, 또 다음에 우리가 강해지면 도움을 준다. 복음 생활의 실천은 끝이 없다.
길을 찾아서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 찬 세상에서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과 함께
나. 깨끗한 마음으로 가난의 길, 복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가는 이 길에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외로움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또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서로 동무되어 함께 갑니다.
이해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주님의 도우심만을 청하며
그들의 마음을 돌리고저
다시는 쓰러지지 않도록 굳건하게
저주보다는 칭찬하도록
당신께만 향하게 하고 싶습니다.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마음을 닫거나, 열어놓은 모든 이에게
정의가 정의를 옷입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나, 세상에 꿈을 하나 심겠습니다.
권력과 재산과 지배욕에서
봉사와 가난과 사랑을 가꾸는
그런 꿈을 심겠습니다.
필립 1,9~11
이제 내가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더욱 넘쳐서 지식과 섬세한 감정으로 옳은 것을 분간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날을 위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13조
성부께서 수 많은 형제들의 맏이이신 성자의 모습을 각 사람 안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회원도 모든 사람을 주님의 선물이자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겸손하고 인간답게 받아들일 것이다. 회원은 형제애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며, 또 함께 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회원은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피조물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생활 여건을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설
공동체 생활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에 들어 있는 것 같다. " 첫째는 이렇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인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렇습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달리 없습니다."(마르 1,29~31)
건전한 공동체의 사람들이라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명심할 것이다.
1)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생명과 희망과 구원의 원천이시니까.
2)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니까?
3) 타인을 사랑한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의 더 넓으 계시이까.
하느님,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맺어진 관계에 얽힌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하느님과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은 큰 차이가 벌어진다. 재판관이신 하느님과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는 우리 안에서 반응이 달라진다.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과 아주 먼데 계신 하느님과는 얘기가 달라진다. 하느님의 이미지가 철저히 남성이라면, 자비로우시고 동정적이고 여성적인 이미지는 빠진다. 하느님이 우리가 가진 이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가 갖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 함을 깨닫는다.
성찰의 시간, 나 자신의 껍질을 벗고 본래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알게 된다.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동기에 대해서도 어떤 때는 이해하기 힘들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마음이 안드는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고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성품은 나의 장점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더 발전되어야 한다. 나'자신'을 사랑해서 변화시킬 정도가 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자기 긍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쏟게 된다. 건전한 자기 사랑은 공동체 일원에게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이 커가면 커갈수록 남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사랑은 다르다, 남을 비판하기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비판이 진실된 것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그 사람이 정말로 문제아라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한다. 복음의 정신으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저 무기력한 사람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 아니다. 그가 변화되고 인간 관계가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깊은 우정은 아니어도 적어도 이웃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부당한 행동에 흔들리지 말고 이웃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형제회 공동체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주는 기분 좋은 사람들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이 없고, 기여하는 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그럽고 재미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 중독자라서 여유시간이나 명상은 견디기 힘들어하기도 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공사이다. 우리가 프란치스칸이 라면 이 공사에 우리 자신이 기여해야 한다.
공동체 생활은 서로가 도와야 한다. 부정적인 태도는 멀리하고, 긍정적인 생각은 수용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 회칙에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이 인간 존엄을 지니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사심이 없는 나눔에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들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줄뿐이다. 클라라 성녀는 이렇게 썼다.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세번째 편지 21~23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품위를 지닌 믿는 이는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늘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넓은 하늘도 모든 피조물도 그들의 창조주를 담을 수 없으나, 오직 믿는 이의 영혼만이 그분의 집이 되고 그분의 거처가 되며, 이것은 믿지 않는 이들은 지니지 못하는 오직 사랑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로 진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는 또한 그를 사랑하고, 우리가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프란치스칸 공부>
클라라만큼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이해한 사람은 없다. 첼라노의 토마스나 성 보나벤투라가 프란치스코와 그의 정신에 대하여 무시 못할 훌륭한 책들을 썼다. 그러나 클라라는 성 다미아노 수녀원에 떨어져 살면서도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반사하는 거울 같았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마음 속 이상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그것을 그녀의 생활에서 표현했다.
둘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들의 성소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를 서로 서로 배웠다. '하느님'이 그들의 대화 주제였다.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클라라 자신에게 그렇게도 중요했던 사람이었기에 슬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성녀는 자신이 쓴 회칙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부당한 여종이고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 후의 세월을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그녀는 삶과 말로서 현실화했다.
1193 또는 1194. 아버지 파보로네 오프레두치오와 어머니 올톨라나 사이에서 아시시에 태어남, 카타리나와 베아트리체
두 자매가 있었으며, 아시시의 성 루피노 대성당 옆에 살았다.
1198 아시시에서 귀족에 대항하는 내란이 일어나, 귀족이었던 클라라의 가족은 페루지아로 피난했다.
1205 아시시에 돌아왔다.
1211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비밀리에 종종 만났다.
1211 또는 1212 3월 27일 성지 주일에 클라라는 집을 나와 프란치스코에게 갔다. 카타리나가 곧 언니를 뒤따라
아녜스란 새 이름을 받았다. 이 때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위하여 간단한 생활 양식을 써주었다.
1215 클라라와 아녜스는 입회한 다른 자매들과 함께 성 다미아노에서 살았고 클라라는 원장이 되었다.
1216 클라라는 '가난의 특전'을 인노첸시오 3세께 처음으로 청원했다.
1218 클라라 수녀원이 폴리뇨, 페루지아, 플로렌스, 시에나, 루까에 세워졌다.
1224 클라라는 병이 심해져서 이때부터 줄곧 고생했다.
1226 프란치스코가 선종하여 슬픔에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생애에 있어 큰 잃음이었다.
1238 프라하의 클라라 수녀원도 가난의 특전을 받았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셋째 편지를 썼다.
1250 클라라의 병이 더 심해졌으나 가난의 특전을 위해서 계속 투쟁했다. 육체적으로는 쇠약했으나, '가난부인'에게 바친
프란치스코 성인의 봉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호했다.
1252 클라라가 쓴 회칙이 라이날도 추기경에 의하여 구두로 인준되었다.
1253 8월 9일 마침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하여 클라라 회칙과 가난 특전이 인준되었다.
8월 11일 클라라가 선종했다. 자매들이 그녀의 선종에 대해 쓰면서 그녀를 '샛별의 거울'이라고 호칭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 이상의 반영이었다.
<토론 주제>
1.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가정이 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2. 두 사람의 어떤 품성이 가장 인상적인가?
3. 당신이 가정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말하라
4.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어떻게 실현하는가?
5.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가난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6. 프란치스칸 여정에서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를 살리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7. 클라라 성녀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당신의 경험에서 무엇이 그녀의 삶과 연상되는가?
<성서 묵상>
+1 고린 12,4~11,27
공동체 생활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지체에서 당신이 하는 역할은?
~~~~~~~~~~~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함께 걸으며
- 하느님은 각자에게 알맞는 방법으로 각각 독특하게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를 안팎으로 잘 아시는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도 수만 가지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막막하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는 도중에 필요한 것은 다 마련해 주신다. 다만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 길 위에 난 표지판들은 신앙의 눈이 있어야 보인다는 것이다.
- 전환, 즉 회개란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 마음 속 어두운 곳을 비춘다. 그렇게 시작한 회개는 우리 안에 있는 마귀와 투쟁할 때 계속 된다.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인간의 약점들이 보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이것은 장애물이라는 것이 보인다. 하느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마귀들과 겨루면서 그들을 길들이는 것을 배우게 된다.
- 프란치스코과 클라라의 여정을 보면 그 투쟁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변한 것은 투쟁 중에서도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내적인 투쟁이나 외적인 저항도 어쩌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이 있다.
- 하느님께 자신을 다 바치면 그와 더불어 가난이라는 은총이 들어온다.
- 클라라는 여러 해동안 형제들, 교황들, 지도자들, 그리고 친구들과 투쟁했다. 그들은 그녀의 가난특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외로울 적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기댈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만이 그들과 함께 계셨다. 힘든 시간에 예수님께 의지하여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가는 그들의 성실한 표양으로 알 수 있다.
-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이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우리가 그들과 함ㄲ[살 때 우리는 비로서 가난을 이해할 수 있다.
-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와도 복음 정신에 흡수되고 복음 정신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전망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나 그 희망을 실천하는 것은 현실인 것이다.
-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그들의 회개 초기에 나눔의 역할을 알았다.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은 아무것에도 소유당하지 않는다. 가난은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은, 우리가 가는 이 작은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 우리는 사람들을 모두 함께 모아 서로 다른 중에서 기뻐할 줄 아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인 재능을 나누는 것은 좋은 관리자가 되는 한 가지 길이다. 프란치스칸은 이 나눔의 정신을 발전시켜 사람을 돕는 길을 찾아야 한다.
- 길을 찾아서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 찬 세상에서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과 함께
나. 깨끗한 마음으로 가난의 길, 복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가는 이 길에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외로움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또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서로 동무되어 함께 갑니다.
- 나'자신'을 사랑해서 변화시킬 정도가 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자기 긍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쏟게 된다. 건전한 자기 사랑은 공동체 일원에게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이 커가면 커갈수록 남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자유로워진다.
-공동체 생활은 서로가 도와야 한다. 부정적인 태도는 멀리하고, 긍정적인 생각은 수용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 회칙에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이 인간 존엄을 지니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양성 교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란치스코처럼 제11장 나에게 말하라 (0) | 2019.02.18 |
---|---|
프란치스코처럼 제 10장 누가 맡을까? (0) | 2019.02.18 |
프란치스코처럼 제8장 하느님과 우리의 세상 (0) | 2019.02.18 |
프란치스코처럼 제7장 나는 믿는다. (0) | 2019.02.18 |
프란치스코처럼 제 6장 프란치스칸과 성서 (0) | 2019.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