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처럼 제11장 나에게 말하라

Margaret K 2019. 2. 18. 03:04

프란치스코처럼 


제11장

 나에게 말하라


사람은 누구나 질적으로 수준 높은 의사 전달을 위해 그 방법을 배우고 있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는 정보화  시대라서 잔딜하고자 하는 정보를 대상에 관계없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정보와 의사 전달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정보는 연령을 고려하지 않고 정보매체를 통해 마구잡이로 전달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는 누가 어떠하며,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등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어서 한계를 가진 의사 전달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의사 전달이다.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의사 전달을 잘 하려면 개인적인 접촉, 눈과 눈, 마음과 마음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정보매체를 이용한 의사전달 과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의사 전달은 나를 상대방에게 알리 수 있는 능력이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이처럼 의사 소통은 나와 상대방이 서로 감정, 정보, 느낌, 상상, 공포, 약점 등 인간에 대한 중요한 것을 나누는 것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따뜻한 정을 나누는 형제회이다. 만일 공동체에 이것이 없다면 오해, 좌절, 곡해 등 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기자들은 가끔 '객관적인 보도'라는 말을 한다. 객관적인 보도를 한다는 것은 가장 어러운 의사전달 방법 중의 하나이다. 어렵다고 해서 기자들이 객관적인 보도를 중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주관적인 면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는 누구나 각자의 경험과 지각, 또는 선입견과 편견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되므로 객관적인 의사 전달이 매우 어렵다. 객관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판단이 앞서서는 안된다.


이제 한 장소에서 취재한 내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사를 보면 객관적인 의사 전달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탐구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반대하는 신자들의 무리를 볼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까닭 없이 싫어하여 새로운 신앙을 탐구하는 신자들을 즉각 교회의 가르침 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집단으로 간주한다. 이와는 반대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는 신자들의 무리도 있다. 이들은 신앙을 새롭게 하려는 무리를 격려한다.


어떤 한 교회의 신자들이 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강연회를 가졌다. 강사는 이따금 물의를 일으키지만 널리 알려진 저명 인사이다. 그 강사는 조리있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세례 받은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자신을 재발견하도록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세계 교회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긍지를 가지라고 격려했다. 질의 응답시간에 청중 중의 한 사람이 여성 사제직에 관하여 질문했다. 질문을 받은 강사는 계속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이라고 간단하게 답변했다. 이제 여기에 그날의 모임에 대해 보도한 두 가지의 기사를 소개한다. 


가사 1

이찌, 마사추세츠 : 어제 저녁, 논란의 대상인 코코 콤 신부가 이찌에 있는 성 안토니오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강연을 했다. '권능'이라는 주제로 행해진 강연에서 콤 신부는 세례 받은 신자들의 능력에 대하여 말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세례 받은 신자의 능력으로 교회를 쇄신시키라고 격려했다. 강연 내용은 신자들이 교회의 자문 없이 마음대로 처신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으며 그 강연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었다. 교회 내의 여성 사제직에 대한 토론을 금지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여성 사제에 대한 논란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상을 주었다. 강사가 비록 교황의 역할과 교계 제도에 대하여 강조했지만 실망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 모임에서는 성 안토니오 교회 건물을 다른 용도로 개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기사 2

이찌, 마사추세츠 : 몬타나 주의 몬테에 있는 포티어 신학대학의 저명한 교수 코코 콤 신부가 성 안토니오 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받는 세례의 능력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세례의 능력에 대하여 깨우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으로 교회를 발전시키라고 역설했다. 그는 평신도의 역할에 대하여 적절한 성서 구절의 인용과 전통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누었다. 청중들은 그의 강연이 계속되는 동안 권능에 대해 감동하게 되었고, 환영의 박수 갈채를 보냈다. 질의 시간에 여성 사제직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주제가 토의 되었다. 코코 신부는 개방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유익한 저녁 한 때를 보냈다.  


이 두 가지 보도 내용은 느낌이 다르다. 두 개의 기사 내용 중 어느 하나도 객관적인 것이 없다. 그렇지만 보도 내용에 대하여 의견을 같이하거나 실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알 수 있다. 기사의 시작에 '논란의 대상' 또는 '저명한 교수'라는 단어 표현은 두 기자의 편파적인 경향을 즉시 알아볼 수 있게 한다. 기자의 개인 의사인 '교회의 자문 없이', '적절한 성서 구절의 인용과 전통'이란 표현을 보더라도 두 기자의 각기 다른 편항성을 보여준다.


기사 내용이 언제나 완벽하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읽은 것은 약간 회의적이다. 내용을 보면 코코 콤 신부가 강연을 했고, 세례로 인한 평신도들의 능력에 대해 얘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의 기사 내용은 주관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탐독을 하거나 경청을 할 때에 작가나 연사의 편견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보도의 내용 전달이 인식, 신학, 철학, 편견, 욕망 등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실제 내용에서 사견을 골라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내용의 사실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판단하여 해석한 것까지 전하는데 이는 죄가 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실제의 일과 관련하여서 볼 때에 부정확한 내용이 된다. 특히 어떤 형용사를 사용하는지 유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런 단어들과 내용이 가끔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위형제회

나의 경험에 의하면 형제회의 대립과 가정의 불화는 나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인간의 대립 요인 중 한 가지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있다. 이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부모는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예상하는 것과 같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부부는 서로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도와 달라는 청을 하지도 않으면서 형제회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이처럼 인간은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대방이 자동적으로, 신비한 힘으로, 또 직권적으로 알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어떤 프란치스칸에게서 형제회가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말만 하는 자선과 동정!' 나는 이렇게 외치는 회원들에게 형제회에 무엇을 원하는지 알렸느냐는 질문을 하지만, 머뭇거리면서 하는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남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지"' "내가 어떻게 알지요?"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알아서 처리하여 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례라기 보다는 예외에 속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대하여 밝혀 내기 전에는 일을 처리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 의사 소통을 잘 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소개하면,


1. 상대방이 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

2.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3. 침묵을 하면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남을 탓해서는 안된다.

4.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의논했을 경우 그들이 즉시 그 청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해서는 안된다. 함께 협조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의사 소통에 실패했다고 남을 탓하는 것은 잘못임을 인정해야 한다.

6. 재속 프란치스칸 형제회가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 도움이 필요하면 형제회에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도움을 요청했는데 도움을 받지 못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7. 필요한 것이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는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다.

8, 남들이 나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알려 오면 즉시 응답을 해야 한다. 그들을 공동으로 도와줄 수 없으면 개별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러한 분야는 인간 관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기 때문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원이든지 아니든지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것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기에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로 다루기 어려운 일에 대하여 할 수 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 의사 소통이 곤란할 때가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의 생활은 어떠한 경우에든 대화가 망설여져서는 안된다. 


몇 가지 논쟁

의사 전달의 방법에는 말하는 어조, 몸짓, 말, 침묵, 접촉 등이 이 모두가 포함되기도 한다. 의사 전달의 한 측면은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할 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즉 내가 좋아하는 상대인지, 상대의 견해에 대해 내 생각은 어떤지, 상대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지, 상대가 말하는 용어들이 나와 같은 것인지, 상대방의 침묵이나 감수성 강한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접촉이나 상대의 몸짓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상대의 어조가 듣기 편안한지, 바빠서 집중을 제대로 못했거나 정말 경청하려고 했는지, 마음이 산란하지 않았는지 등, 여러가지 상황이 정확한 의사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나를 위협할 때와 인전할 때의 대화 내용이 같을 수는 없다. 불안할 때는 상대의 말에 위로가 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의사 소통을 잘하려면 많은 장애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 가장 좋은 상태에서만이 적절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내가 상대방이 아니기 때문에 노력에는 항상 한계가 있다.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보면, 아버지와 의사 소통이 잘 안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피에트로가 아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면 프란치스코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따르려고 하지 않아 항상 마찰이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신앙에 완전히 몰두한 피에트로는 못마땅해 했다. 부자는 여러 문제를 법정에서 재판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부자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씻겨지지 않았다. 가정과 친구들을 박차고 나온 표현을 보면 영웅같이 보인다. 아니 영웅이었다. 나는 프란치스코가 기도할 때에 자주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확신한다. 그가 나병환자와 함께 생활할 때에도 아버지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일부는 우리의 삶을 계속 지배한다. 


 프란치스코를 그 시대에 의해 해석하자면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성안에 가득한 무기와 검들, 타오르는 촛불,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훌륭한 기사가 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환시를 보았고 그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라나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가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하여 '교회를 재건하라'는 이상이 담겨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이해하는데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의사 전달을 정확하게 하고 명백하게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의 해석도 필요로 한다. 의사 소통 기술은 대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거나 기도할 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의사 소통에 있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


1. 몸짓 -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사실 몸도 같이 말한다. 치켜올린 눈썹, 팔짱낀 태도, 웃음소리, 눈물, 찌푸린 얼굴, 슬픔에 차거나 춤추는 듯한 눈, 비스듬히 누운 모습이나 곧은 자세 등 몸짓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몸은 입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우리가 들을 때는 말과 몸짓의 뜻을 들어야 하고, 몸짓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몸짓의 표현도 말을 듣듯이 해야 한다. 


2 어조- 어조는 말하는 사람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날카롭고 명확하고 강한 음성은 힘 혹은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놀란 음성은 급하게 느껴지고, 마음 내키지 않는 듯한 음성은 함께 하기 싫다는 뜻이다. 떨리는 목소리는 상처를 입었거나 아픔을 나타낸다. 조용한 음성은 남이 들어서는 안되는 일이거나 큰 목소리로 말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어조는 의사 소통에 한 몫을 차지한다. 노여움과 두려움, 불안과 확신, 사랑과 선정적인 표현 등, 이 모든 것을 말투로 나타낼 수 있다. 


3. 말의 전달 방법 - 말의 전달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다정다감한 말은 매혹적이며, 모호한 말은 대화를 애매하게 한다. 지적인 말은 말하는 사람의 교육 수준을 입증하는가 하면 감수성이 강한 말은 나름대로의 감미로움이 있다. 자극적인 말은 특별할 감정을 전하며, 위협적인 말은 힘이나 두려움을 나타낸다. 상스러운 말 역시 나름대로의 언어 표현이다.


4. 의사 전달에는 전달자의 상태나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책을 저술하면서 나는 어조나 몸짓 표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화 때와는 달리 완전히 단어에 치중하고 있다. 단어를 보다 조심스럽게 고르고 문장을 심사숙고하여 작성한다. 사람이 위중할 때 하는 말은 보통 때와는 다르고, 특히 가까운 사람이 사경에 헤매며 하는 말은 매우 중요하여 신중하게 듣는다.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하는 상황은 축구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표현이 다르거나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는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의사 전달의 어려운 쟁점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점이다. 또 상대가 내 말을 어떻게 듣든지 상대방을 조종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말을 주고 받는 사람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즉 나는 의사 전달을 정확하게 해야 하고 상대는 내 말을 경청해야 한다. 이는 솔직하고 간단하게 보인다. 그러나 삶 안에서 이는 간단하거나 항상 솔직한 것이 아니다. 빈약한 의사 전달과 정확하게 듣지 않는데에서 많은 갈등이 시작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화중의 내용을 가정과 추측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많은 요인들이 의사 전달 과정을 망쳐 버린다. 


성서 말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말씀을 진실하게 듣지 않기 때문에 곤경에 처할 때가 가끔 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실망은 성서의 여러 구절에서 명확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성서 구절의 하느님 말씀은 명확하다. 그러나 듣는 이가 그 말씀을 믿지 않으려 하고 또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신다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떼를 지어 많이 모인다. 그러나 군중들은 자기의 소유를 놓으려 하지 않기에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외면해 버린다. 어떤 때는 하느님께서 무슨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아 절망적인 상황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은 시편 81편을 통해 말씀하신다.


시편 81,9, 12~14

듣거라 내 백성아, 나 네게 증언하노라

아스라엘아, 부디 내 말을 듣거라

그러나 내 백성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려 하지 않았도다.

그래서 내가 고집센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두어

그들은 제멋대로 걸어갔도다.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사람들은 말은 잘 하나 듣기는 어려워한다. 개인적인 의견 없이 남의 말을 듣는 일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이는 성숙한 사람이다. '기도'에 있어서도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적인 대화도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대하도 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형제회 내부 생활

지금까지 의사 소통에 관한 것을 얘기했는데 이는 형제회의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조직은 공동체성만 강조하여 회원 각자의 필요를 외면하기 쉽고, 회원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만 신경 쓰고 공돋체의 중요성을 잊는다. 우리는 이를 공평하게 조절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질병으로 형제회에 참석할 수 없으면 평의회에 알려야 한다. 형제회 모임이 있는 날 가정의 일이 모임보다 우선 하면 사정을 평의회에 알려야 한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동안 형제회의 모딤에 참석할 수 없으면 평의회에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평의회와 회원간에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으면 모두가 어둠 속을 걷게 된다. 서로 친교가 없을 때 다가올 일에 대하여 추측하게 되고, 충분한 사유가 전달되지 않으면 회의에 결석한 것으로 평가되고 만다. 평의회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사유를 전달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유를 알 길이 없다. 이렇게 되면 결석에 대한 규율이 적용되고 관계 회칙의 서신을 받게 된다. 평의회로부터 서신을 받게 디면 마음이 언짢게 되고 소외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디면 서로 노력도 하지 않고 형제회에서 탈회하는 일이 생긴다. 즉 상호 의사 전달의 결핍으로 발생하지 않아될 불상사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평의회와 회원간에 발생하지 않아도 될 일을 피하려면 명백하고 지속적인 의견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한 회원이 개인적으로나 가정 형편으로 한동안 형제회의 생활에 참석할 수 없으면 평의회는 형제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마련한다. 형제적인 대화를 통하여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에 저촉 받지 않고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다. 회원은 모임의 참석은 면제받지만 서약한 대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을 계속해서 준수해야 한다. 서약은 영구적인 것이므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으이 생활 양식을 통해서 예수님께 드린 서약은 면제될 수가 없다. 


또한 형제회의 도움을 요청하면 방문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지 협조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평의회와 직접적인 의사 소통이 없으면 이루어 질 수 없다. 회원들은 이런 일을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양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책임의 일부로 알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자비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서로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1데살 2,17 참조)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정성되이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이준받은 회칙 6장 8)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

제 23조

특별한 어려움을 격고 있는 회원은 평의회에서 형제적인 대화로 자신의 문제를 토의할 수 있다. 각 형제회의 평의회는 잠정적 퇴회 또는 필요하다면 결정적 제명을 회헌에 따라 결정한다.


해설 

회칙은 회원들이 어떤 난관에 부딪쳤을 때, 형제회에 건의하여 대화할 의무가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회원에게 언제, 어디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일이 발생했을 경우 평의회는 회원이 회칙을 계속해서 준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재평가해야 한다. 평의회는 회원의 어려움을 여러 통로를 통해 알 수 있다.

1. 회원들이 자주 월례회에 빠지고 결석 사항이 평의회에 기록되면 형제적 대화가 시작된다.

2. 회원이 모임에 참석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활이 되어 평의회에 보고하여 대화가 시작된다.

3. 어떤 회원이 월례회에 계속해서 결석을 하면 그 상황을 알고 있는 다른 회원은 평의회에 보고한다.

4. 평의회와 회원이 서로 오랫동안 기다리면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만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3번과 4번의 예는 의사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예이다. 간혹 갑작스런병에 걸리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회원은 다른 회원을 통하여 자신의 상황을 평의회에 전달한다. 이때 이 회원은 평의회가 자신에 관한 모든 일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달자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어려운 문제의 해결 방법은 회칙대로 풀어나가면 된다. "특별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원은 평의회에서 형제적인 대화로 자신의 문제를 토의할 수 있다.'(회칙 제23조)


회원들은 간단한 이 해결 방법을 자주 무시해 버린다. 자신의 일이 다른 회원을 통해 평의히에 보고되었고, 이미 평의회가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상상하지 말라야 ㅎ나다. 이런 추측은 문제를 아주 어렵게 만들고 만다. 회칙은 명백하므로 회칙을 준수해야 한다.


평의회는 회원과 형제적인 대화를 하고 회헌의 규정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여 결정한다. 어려움에 처한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곧 모든 것이 정상화되므로 대단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단지 사태 전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려움이 심각할 수도 있다. 만성적 병으로 고생한다든지 신체적 이상 때문에 월례회에 참석하기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회원과 대화를 통하여 그 회원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고 형제회 생활과 현실적인 새로운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이 때 회원은 통상적으로 회칙의 일부를 잠정적이거나 영구히 면제받을 수 있다. 회원은 면제받은 회칙의 조항을 제외한 모든 회칙을 계속해서 충실히 준수해야 한다.  


회원이 회칙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기가 오거나 회원으로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평의회는 제반 사항을 대화로 토의해야 한다. 대화를 통한 결정적인 제명은 회헌에 따라 상호 바람직한 결정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 회원은 평의회에 탈퇴서를 제출하고, 제명은 회헌에 따라 결정한다. 제명이 되면 그 회원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모든 의무 조항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대화나 토의는 성령 안에서 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재속 프란치스코회로 인도했지만 다른 형태의 삶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영구적인 탈회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기도를 한다든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생각을 따르거나 되는대로 결정을 해서는 안된다. 결정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대화와 기도가 필요하며, 일반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한번 결정이 내려지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이 축복을 비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원이 수도회에 입회하거나, 또는 다른 3회에 가입하면 그들은 자동적으로 정상적인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들이 새로운 성소를 체험하여 그 성소가 확정될 동안에는 형제회의 잠정적 처분 대상자로 간주된다. 이러한 회원에 대해서 평의회는 형제회 기록부에 그 퇴회 이유를 명확히 기록해야 한다. 


평의회는 회원이 형제회에서나 공적인 물의를 일으키면 이에 대하여 대처해야만 한다. 회원이 노골적으로 공공연하게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과 생활 양식을 역행하면 평의회는 그런 회원을 즉각 제명 처분해야 한다. 제명 절차는 회헌에 의해 처리한다. 제명은 형제적인 대화를 충분히 하고 진지하고 신중한 절차를 거친 후 결정한다. 이런 경우는 다루기 어려운 사안이 되겠지만 평의회는 이러한 경우라도 책임의 소재를 벗어날 수 없다. 좋은 점은 형제회가 방황하고 흔들리는 회원들을 감싸안고 도와주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레미아 29, 11~14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므로 나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부르며 다가와 나에게 기도하면 너희기도를 들어주리라.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되리러,


<프란치스칸 공부>

아시시의 클라라와 프라하의 아녜스

클라라가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회칙과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4통의 편지, 유언, 축복, 브르쥬의 에르멘뜨루디스 자매에게 보낸 편지가 클라라가 남긴 글의 전부이다. 각각의 글은 집필 형식이 조금씩 다르다. 회칙은 법적 의무와 용어를 자유자재로 썼다. 유언은 클라라의 성품을 보여준다. 그녀의 축복은 성서의 취지에 입각한 주제이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는 문장이 윤택하며, 클라라 자신을 드러내보여주고 있다. 아녜스는 1203년 보헤미아의 오타카 왕과 헝가리의 콘스탄스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이 되던 해에 실레시아의 공작 아들 볼레슬라우스와 약혼을 했다. 볼레슬라우스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아녜스는 자유롭게 되었다. 독일의 프레드릭 2세는 아들의 배필로 그녀를 원했고 나중 자신이 홀아비가 되자 신부로 맞으려고 노력했다. 아녜스는 두 청혼을 모두 거절하였다.


1225년 작은 형제들이 프라하에 와서 선교할 때 아녜스는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작은 형제들로부터 클라라와 그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1232년 요양소를 지어 레드 스타 수도회에 맡겼다. 그녀는 또한 땅을 매입하여 성 다미아노의 클라라회(가난한 자매 수녀회)를 위하여 수녀원을 짓고 이들을 돌볼 수도자들을 위한 숙소도 지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영성적인 면에 감명받았다. 클라라가 아녜스에게 쓴 첫 편지는 아녜스가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아녜스는 클라라와 교황청에 성 다미아노의 클라라 수녀원을 프라하에 설립하겠다는 청원서를 보냈다. 그녀는 수녀원 설립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수녀들을 파견해 달라고 청했다. 1234년 봄 아녜스와 7명의 부유층의 젊은 여성들과 이탈리아에서 파견한 5명의 가난한 자매회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수녀원에 들어간 후 클라라의 생활을 추종하는 아녜스는 클라라와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아녜스는 이후 수녀원에 54년간 있었으며 1282년 3월 2일에 사망했다


클라라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19년간에 걸쳐 쓰인 것이다. 이 편지들은 클라라의 영성의 발전을 보여준다. 첫 번째 편지는 세속적인 생활과 영성적인 생활의 차이를 대조시킨 것이다. 이 편지는 아녜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두 번째 편지는 가난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의 친밀함과 성장하는 과정이 쓰여 있다. 세 번째 편지는 아녜스에게 프란치스칸의 삶이 요구하는 엄격함이 그녀의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어렵게 해서는 안된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내용이다. 네 번째 편지는 클라라가 사망에 임박하여 쓴 것으로 기쁨과 평화를 표현하고 있다.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 15~17

이 점에 있어서 주님의 계명 길을 보다 더 완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총봉사자이시며 우리의 공경하올 아버지이신 엘리아 형제의 조언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그분의 조언을 다른 이들의 조언보다 소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어떤 선물보다도 더 값진 것으로 여기십시오. 만약에 누가 그대의 완덕에 방해가 되거나, 그대의 거룩한 성소에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하거나  다른 제안을 암시하면 그를 공경은 해야 하겠지만 그의 조언은 따르지 마십시오.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네 번째 편지 33~36

자매여, 이런 관상에 빠져 있을 때 이 가련한 어머니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대를 다른 누구보다도 소중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에 대한 행복한 기억을 내 마음의 판에 굳게 새겨 놓았음을 아십시오. 또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영혼의 혀가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제 육신의 혀는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 안에서 침묵토록 하겠습니다. 오 복된 딸이여, 그대에 대하여 내가 지니고 있는 사랑을 육신의 혀는 말로 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었지만, 이 글에 반쯤은 표현이 되었습니다.


<토의 주제>

1. 훌륭한 의사 소통을 하려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2. 행사.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객관적인 보도를 할 수 있는가? 기자들이 어떻게 왜곡된 보도를 할 수 있는가?

3. 형제회의 평의회에 회원들이 의사 전달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4. 여러분은 아무런 편견 없이 주의 깊게 듣는 능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여러분의 경청하는 능력을 항상시키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5. 남의 의사 전달을 '경청'하는데 중요한 요소들은 무엇인가?

6. 클라라와 그녀의 영성생활에 대하여 려러분의 생각을 나누시오. 그녀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가난의 특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클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성서 묵상>

+갈라디아 6,1~10

바오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단도 직입적이며, 솔직하게 서로 아껴 주라고 권고했다. 이 성서의 말씀은 바람직한 의사 소통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바오로는 좋은 의사 소통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갈라디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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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말하라

개인적인 의사 전달은 나를 상대방에게 알리 수 있는 능력이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따뜻한 정을 나누는 형제회이다. 만일 공동체에 이것이 없다면 오해, 좌절, 곡해 등 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는 누구나 각자의 경험과 지각, 또는 선입견과 편견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되므로 객관적인 의사 전달이 매우 어렵다. 객관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판단이 앞서서는 안된다.

인간의 대립 요인 중 한 가지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도와 달라는 청을 하지도 않으면서 형제회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이처럼 인간은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대방이 자동적으로, 신비한 힘으로, 또 직권적으로 알 것이라고 판단한다.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의논했을 경우 그들이 즉시 그 청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해서는 안된다. 함께 협조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를 그 시대에 의해 해석하자면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성안에 가득한 무기와 검들, 타오르는 촛불,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훌륭한 기사가 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환시를 보았고 그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라나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가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하여 '교회를 재건하라'는 이상이 담겨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이해하는데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의사 전달을 정확하게 하고 명백하게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의 해석도 필요로 한다. 의사 소통 기술은 대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거나 기도할 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의사 전달의 어려운 쟁점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점이다. 또 상대가 내 말을 어떻게 듣든지 상대방을 조종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말을 주고 받는 사람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즉 나는 의사 전달을 정확하게 해야 하고 상대는 내 말을 경청해야 한다. 이는 솔직하고 간단하게 보인다. 그러나 삶 안에서 이는 간단하거나 항상 솔직한 것이 아니다. 빈약한 의사 전달과 정확하게 듣지 않는데에서 많은 갈등이 시작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화중의 내용을 가정과 추측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많은 요인들이 의사 전달 과정을 망쳐 버린다. 

마음을 비우고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이는 성숙한 사람이다.

평의회와 회원간에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으면 모두가 어둠 속을 걷게 된다. 

회원은 서약한 대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칙을 계속해서 준수해야 한다. 서약은 영구적인 것이므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양식을 통해서 예수님께 드린 서약은 면제될 수가 없다. - 

 - "자비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서로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1데살 2,17 참조)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정성되이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인준받은 회칙 6장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