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프란치스코 처럼 제 15장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Margaret K 2019. 3. 16. 02:14


프란치스코 처럼 


제 15장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성 프란치스코의 마리아께 대한 사랑은 아래 인사로써 시작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신 인사


거룩한 부인이요 여왕이시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동정녀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간택하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협조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은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


천주의 궁전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장막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집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의복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여종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그리고 거룩한 모든 덕행들이여,

당신들도 기뻐하소서.

성령께서 당신의 은총과 비추심으로

당신들을 믿는 이의 마음에 부어 주시어

당신들로 인해 불충한 이가 하느님께 충실한 자 되게 하리이다.


프란치스칸과  마리아에 대한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위엄은 다른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다. 마리아의 역할 때문에 그분은 영예와 칭송을 받을 가치가 있다. 마리아는 구원의 중요한 사건 안에 자리하신다. 마리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현장에 계셨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십자가 아래에 계셨다. 마리아는 교회가 탄생할 때 성령이 오시는 그곳에 계셨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마리아에게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하셨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였다. 


마리아의 위엄은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위엄을 반영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과 위험을 주셨다. 그것은 하느님이 자유로운 선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마리아의 응답을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에'른 대답은 프란치스칸 삶의 방법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두리가 '예'하는 대답 안에 반영되어 나타나야 한다. 


성모 마리아와 같이 우리는 '예'라고 대답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은 마리아를 인간적인 필요와 관심과 걱정과 일상적인 일이 없는 것으로 말한다. 성모님의 성상과 성화들은 성모님을 아름답고 빈틈없는 사람으로 그린다. 이러한 이미지는 성모님을 충실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은 그러한 비현실적인 이미지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겪으신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마리아는 인간 생활의 일상적인 사건을 겪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접시를 닦는 일이 없으며 집안 청소를 하지 않고 참아야 할 좌절을 겪지 않고 힘든 일에도 힘들어하지 않고 식사시간에 늦게 오지도 않는다. 그분들의 삶의 모든 일들은 그분들의 거룩함 때문에 시계와 같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러한 생각은 틀린 것이다. 예수님과 마리아는 사람이시고 그분들을 사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들의 삶을 잘못 이해하게 한다. 인간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인간임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마리아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 가운데 일부분만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 안에서 찾을수 없었던 것은 오직 죄였고,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을 분리시켜 멀어지게 하는 것은 그들 안에는 없었다. 죄 외에는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모든 기쁨과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피곤했고(요한 4,6 참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루가 2,50 참조) 그들은 가끔 믿음에 있어서 혼자였고(마태 27,46, 마르코 15,29~32 참조),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마르코 10,21~22 참조). 인간적인 슬픔은 그들 삶의 일부분이었다(루가 9,37~43 참조).


이기심과 죄는 우리의 감정을 어둡게 하지만 예수님과 마리아는 그러한 장애물이 없었다. 그들은 사물을 예민하게 느꼈고,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마리아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부모는 자녀들을 잃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마리아께서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잔인하게 죽는 것을 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활은 예상하지 못한 일어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마리아에게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마리아의 기쁨과 놀라움은 인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두려움에 쌓여 2층 다락방에 모여 있었고,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변화시킬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마리아는 새롭게 변화된 베드로의 용기를 보고 매우 놀랐음이 틀림없다. 마리아는 나약했던 사도들이 강한 믿음의 사도로 변화되어 자기 아들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보고 매우 영광스러워 했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리아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리아는 믿음과 용기와 힘에 있어서 모범적인 전형을 제시함에 있어서 예수님 다음으로 두 번째 모범이 되신다.


성서 안에서의 마리아의 모습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을 견디어 가며 신앙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인의 힘찬 모습을 보여준다. 


탄생 예고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처녀이다. 그들은 아직 함께 살지 않았으나 서로 사랑했고, 결혼생활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마리아는 그녀의 약속된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요셉을 사랑했고, 함께 살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그들의 삶 안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미래가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을 받고 곰곰히 생각했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가브리엘 천사는 두려움에 떠는 마리아게 말했다. "겁내지 마시오. 마리아! 이미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습니다. 두고 보시오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28~34)


 아브라함과 같이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믿음 안에서 마리아는 메시지를 받아들였고 가브리엘 천사에게 '예'라고 대답했다. 마리아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회상하게 한다. 


마리아 자신의 계획은 모두 무너졌다. 마리아는 요셈과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게 되어 그 사실을 요셉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척 걱정하였을 것이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천사 가브리엘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믿어 주겠는가? 마리아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모든 위험을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모든 위험한 역할을 받아들인다. 마리아의 강한 믿음이 그러한 결정의 밑받침이 되었다.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여인의 힘에 경외감을 느낀다. 우리가 해야할 힘든 부분이란 이러한 믿음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이 믿음이 위태로울 때 기꺼이 강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마리아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고 도전해 볼만한 믿음의 본보기이다. '예'라는 응답으로 마리아의 생애에 새로운 요청과 결과를 가져왔듯이 우리의 '예'라는 응답도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종교가 최우선이 아닌 사회에서 프란치스칸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사회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마리아처럼 우리는 항상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복음의 방법으로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그 믿음에 항구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복음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비록 다른 사람들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 지라도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다.


방문

천사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마리아에게 알려주었고 마리아는 해산이 가까워온 엘리사벳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마리아에게 있어서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마리아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일에 대하여 숙고해 볼 시간이 필요하였다. 다른 여인의 충고와 격려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특별한 인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응답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를 회상하게 한다(사무엘 2,1~10 참조)> 임심한 여인은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임신한 여인은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고 생명의 힘을 보여준다. 마리아가 태중에 생명을 잉태할 수 있었음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였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나자렛의 소문과는 다르게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인사는 마리아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두 여인은 독특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에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루가 1,46~49

내 혼이 주님을 기리고 내 영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반겨 신명났거니,정녕 당신 종의 미전함을 굽어보셨도다.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권능을 떨치시는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도다. 그분 이름 거룩하도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마리아에게 전달햇고, 마리아는 이 요청에 '예'라고 응답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었다. "내 영혼이 위대하신 하느님을 소리높여 찬양합니다."


마리아에 관한 성서의 내용은 로마의 인구 조사, 마굿간에서의 출산, 헤로데의 질투와 어린이들의 대학살, 이집트로의 피난 등이 있는데 이는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에 대한 결과였다.


늙은 시몬과 안나는 마리아의 아들에 대하여 놀라운 말을 전해 주었다(루가 2,25~38 참조). 예수가 12살이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성전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모는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어 그들의 걱정과 애타는 마음은 극심했고 사흘만에 예수를 찾게 되었다.


루가 2,48~50

"얘야, 우리한데 이게 무슨 짓이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예수는 "왜 찾으셨어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어요?" 하였는데,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마라아의 '예'라는 응답은 마리아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까지 나아가게 했다. 프란치스칸은 이러한 인간적인 상황을 이해한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신앙에 충실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우리가 마리아의 생활을 더 깊이 묵상할수록 우리늠 마이라와 더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다. 하느님은 강한 여인을 선택하셨다.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은 생활의 어떠한 변화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구원과 십자가형

자매인 죽음은 결코 즐거운 방문객은 아니다. 마리아는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로마인들은 버려진 사람에게 조금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고통스러움 것이고, 두렵고 떨리고 괴로운 것이며, 이는 매우 끔찍한 죽음이다. 마리아의 아들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힘 있는 그 누구도 도와 주지않았고, 제자들도 달아나 버렸다. 군중은 예수를 제거하는 것에 좋아라 날뛰었고 예수의 말을 듣기 보다 비웃고 조롱하였다.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이 동정심을 보였을 뿐이다. 마리아는 아들이 죽어갈 때 십자가 밑에 서 계셨다.


마리아의 맨처음의 '예'라는 응답은 이 순간까지를 포함한다. 여기에서 달아날 방법이 없었으며, 마리아는 아들이 죽을 때 거기에 있어야 했다. 아들의 고통을 없애줄 그 어떤 방법도 없었고 그냥 거기에 서 있어야 했다. 십자가 상에서 하는 아들의 말은 마리아의 마음을 꿰뚫었다. 이제 마리아는 아무도 없은 외로운 신세가 되었고 사랑하던 아들은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겨 드렸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하셨을까? 또 마리아는 예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그 아들을 믿었을까? 이러한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프란치스칸이여, 복음적 삶에 대한 우리의 '예'라는 응답은 우리를 어디로 데러가고 있는가? 만일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라는 응답이 어려운 상활에서도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여인의 모범적인 행동을 따를 수 있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성모님 성상처럼, 아름답지만 연악하기 짝이 없는 마리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아래에서는 도망치고 말 것이다. 거기에는 피가 흐르고 미움이 가득하며, 군중으로부터의 조롱과 비난이 있고 예수를 제거하는데서 오는 기쁨의 분노가 있다. 거기에는 두려움도 있어 믿는 사람들도 그 길에 서 있기를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제자들도 모두 도망가 버렸다. 마리아는 그곳에 서 있었다. 비통한 마음으로 절망하지 않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예'라는 응답이 마리아를 이곳까지 오게 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구원자는 아니다. 마리아는 결코 구원자 아니며 구원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님 홀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마리아의 여성스러운 모습과 사랑은 강한 믿음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리아는 이 어둠의 순간에 자신의 아들인 구원자 예수님과 같이 서 있었다. 마리아는 우리 주님의 위대하심을 아직도 노래하고 있다.


슬픔의 어머니, 피에타 상은 마리아의 예술적인 이미지를 반영한다. 우리는 자신의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침묵 중에 바라본다. 그곳에는 아무런 말이 없고 단지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마리아의 고통은 차가운 아들의 시체를 품에 안고 있을 때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극심했다. 고통의 피에타 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리아의 아픔이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져 우리도 그 아픔을 느끼게 한다. '예'라는 응답에는 이와 같은 순간도 포함된다.


프란치스칸은 쉽게 마리아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열심한 신자 중에 어떤 이들은 인간이 아닌 플라스틱 제품으로 만든 마리아만을 생각하고,일부 신자들은 마리아를 자비를 베풀어주는 사람으로만 생각한다. 성서에 나오는 마리아는 그렇지 않다. 성서는 마리아를 강하고 힘있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커다란 비극을 잘 견디어 내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매우 힘든 질문이 있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마리아를 사랑한다면 마리아의 아들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마리아를 따른다면 마리아는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따를 수 있도록 가르쳐 줄 것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마리아를 예수님과 떼어놓는 신앙이라면 의심스러운 것이다. 성서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이르시는 대로 하게."(요한 2,5)


성령 강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끝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시작이 되었다. 마리아는 믿는 이의 공동체와 함께 있다. 아들의 죽음과 부활의 날들이 그녀의 기억 속에 잠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했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부활의 실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과 하느님께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공동체가 함께 모인 방안에 마리아가 계시고 방안은 조용했다(사도 1,14 참조).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고 공동체가 필요한 것을 함께 해결했다. 유다의 배신으로 비워진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도를 뽑았다. 그리고 기다렸던 날이 다가왔다.


사도행전 2,1~4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모두 한데 모여 있는데... 그리고 불같은 혀들이 갈라지며 나타나 각자에게 내려앉았다. 그러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서 영이 일러 주는 대로 여러가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상황이 다른 곳에서도 발생하였고 마리아는 그 자리에 있었다. 마리아의 존재는 이 공동체에 격려가 되었고 힘이 되어 주었다. 공동체는 마리아의 아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한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마리아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것은 온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초기 교회 안에서 마리아의 존재와 모범, 그리고 말씀은 교회 안에 하늘나라 왕국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마리아는 다시 반복한다. "무엇이든지 그가 너에게 시키는 대로 하여라."


마리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을 낳으셨으므로 이 새로운 탄생에 함께 계신다. 성령의 힘은 마리아를 변화시켰고 이제 같은 성령께서 신앙의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세상은 변하지만 성령께서 믿는 사람들을 활기 있게 해주시는 곳에 마리아도 함께 계신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더 넒은 세상에까지 전파한다. 마리아는 성령 안에서 그러한 탄생의 모범이시고 교회의 어머니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 지금 교회가 겪고 있는 것은 그 당시에 마리아가 경험한 것이다. 밑음의 공동체는 마리아가 그랬듯이 '예'라고 말하고 결과는 똑같이 드러난다.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안에 마리아의 아들이 탄생한다. 


'마라아의 노래(Magnificat)'에서 마리아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은 낮아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며, 배고픈 사람들을 배부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은 작은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며,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자비를 베풀것이다. 이런 '마리아의 노래' 덕분에 마리아는 사회적 관심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구약의 지혜서는 지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마리아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반영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형상이다."(지혜서 7,26)


교회의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모든 역할의 기초와 원천이 되신다. 예수님과 분리되면 마리아는 단지 아름다운 여성일 뿐이다. 마리아의 역할은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고, 구원의 활동 안에서 마리아의 힘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묵주기도

묵주기도는 교회 안에서 서서히 발전되었다. 처음에는 동방교회의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신앙인들은 이 기도를 하기 위하여 구슬과 마디가 있는 끈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습관은 동방교회에서 발전되었고 서방교회로 전달되었다. 


6세기에 수도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전체 150편의 시편을 암송해야 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과 평수사들은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0편의 시편은 주님의 기도로 대체되었고 마디가 있는 끈은 기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천사의 인사인 성모송을 넣을 여지가 있었다. 수세기가 지나면서 성모송이 발전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서 완전한 성모송이 사용되었다.


1250년 토마스(Thomas of Comtimpre)는 처음으로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를 '로사리오'라고 불렀는데 이는 장미 꽃다발을 의미한다. 흰 장미는 기쁨을, 붉은 장미는 슬픔을 나타내도, 노란 장미는 예수님의 영광의 신비를 나타낸다. 1408년 헨리(Henry Egher ofKolkar)는 처음으로 15단 기도를 만들었다. 각 단은 주님의 기도와 10번의 성모송으로 되어 있다. 15세기말까지 묵주기도가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530년 첫 번째 발현하신 멕시코 과달루페의 성모님에게서는 묵주는 보이지도 않고 언급되지도 않았다. 루르드에서부터 최근에 발현하신 성모님은 묵주를 들고 계신다.


묵주기도는 우리 자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신비를 묵상하면서 성모송을 반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신비의 대부분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기도를 암송할 때 로사리오는 우리의 영혼을 고요하게 하고 구원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듣도록 도와준다. 현명한 믿음으로 사용한다면 묵주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져다 준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다. 가끔 우리는 한 단을 바친 후 신비를 묵상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는 기도 속에서 성모송을 단순히 반복할 수 있다. 되풀이하여 성모송을 암송하면 깊은 명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도 있고, 침묵 중에 하느님 앞에서 내적인 자유를 누리게 한다. 기도 속에서 암송하고 서두르지 말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15단으로 되어 있는 도미니칸 로사리오와 더불어 다른 형태의 묵주기도도 있다. 성모 칠고 묵주는 마리아의 슬픔을 기리기 위해서 17세기에 만들어졌다. 마리아에 대한 일곱 가지 여행의 로사리오는 마리아의 여행을 반영한다. 그것은 여행자에게 특별한 여행을 제공한다. 성서 로사리오는 도미니칸 로사리오에 성서 말씀을 삽입했다. 계시에 의한 브리짓타의 로사리오는 6단으로 되어 있고 1번의 주님의 기도와 3번의 성모송으로 되어 있다. 7번의 주님의 기도는 마리아의 7가지 기쁨과 슬픔을 공경한다. 63번의 성모송은 마리아의 지상생활 63년을 반영한다. 프란치스칸 칠락묵주는 이 장의 <프란치스칸 공부>에서 설명하겠다. 이외에 마리아에 대한 다른 많은 기도와 특별한 신심이 있다.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는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체스토초바의 성모 마리아는 폴란드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많은 나라와 문화와 민족은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다. 삼종기도와 성모송등의 기도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리아여 우리에게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

영화롭고 복되신 분,

우리 가운데 평범한 여인이

특별한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었나이다.


당신은 말씀 안에서 준비된 분

당신의 사랑은 주님 사랑 안에 있나이다.

당신의 믿음은 '예'라고 응답하고

에수의 어머니 되어 빛나고 있나이다.


당신의 바램은 아들 예수의 말씀 따라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주는 것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오니

마리아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들,

마음이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 모두에게

복음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말씀을 듣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사랑으로 실천하고 다른 이와 나누는 방법을 ,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셨던 대로

하느님을 믿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것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처럼 우리를 프란치스칸으로 있게 하겠나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아멘.


성모의 발현과 계시에 대한 교회의 판단기준

1. 성서에 일치하여야 하며 성서의 사상을 반영하여야 한다.

2. 건전한 그리스도론에 입각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야 한다.

3. 전례적으로 합당해야 한다.

4.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로 이끄는 부활신앙적이어야 한다.

5. 교회 일치적이어야 한다. 교회 일치에 장애릉 주지 말아야 한다.



<재속 프란치스칸 회칙>

제9조

동정 마리아는 주님의 겸손한 여종이시며, 주님의 말씀과 그 모든 부르심에 흔연히 응답한 분이시다. 그분은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흠모을 받으셨고, 프란치스코는 그분을 가족의 수호자와 변호자로 선언하셨다. 회원은 성모 마리아의 전적인 헌신을 본받고, 신뢰의 기도를 열심히 바침으로써, 성모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야 한다.


해설

프란치스칸은 여러 사고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 사람은 전통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새로운 사상과 뜻을 만들어 낼 준비를 한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믿음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더 깊은 이해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변화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속 프란치스칸 회칙에서 모든 부르심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여러 다른 프란치스칸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신앙을 배웠으며 일반적인 유대인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마니피깟에서 자유롭게 성서를 사용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였고 이해할 수 없는 위험스러운 일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봉사하고 봉사받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녀는 다른 어머니들이 갖는 염려와 걱정을 했고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마리아는 종교적으로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유를 몰랐다. 성령께 마음을 연 이후 그녀의 생활에 예기치 않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말씀을 선포했을 때 계속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새로운 사람들이 그의 생활 안으로 들어 왔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너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태 5,21~48)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했다. 마리아는 더 전통적인 내용이 예수님의 말씀과 상반되었을 경우에 에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말씀과 요청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의 삶 안에 예수님의 말씀과 요청에 열려 있어야 한다. 닫힌 마음과 정신, 믿음에 대한 잘못된 해석, 우리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의 길이 아니다. 그들이 생명과 빛을 가져다 주는지, 어둠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지 분간하기 위하여 그들을 시험해 보라. 경직되고 비난하는 태도는 프란치스칸에게 맞지 않는다. "영을 끄지 마시오, 예언을 멉신여기지 마시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을 지키시오. 온가지 악을 멀리하시오."(1데살로니나 5,19)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쉽게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두려움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게 하고 규칙은 우리를 인도해 준다. "복음의 강력한 힘에 자극받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내적 변화에 의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야 한다."(회칙 7조)


성령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복음의 살아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퍼져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다. 이 풍요로움은 합당한 이론과 성서에 대한 연구와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더불어 기도 속에서 공부하고 묵상 함으로써 배운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모든 말씀과 부르심에 열려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칸 공부>

프란치스칸 칠락 묵주기도는 프란치스칸 전통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리아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힘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1400년대에 한 젊은이가 수도회에 들어왔는데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다. 어느날 기도하고 있는 중에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암송하는 동안에 자신의 기쁨을 묵상하도록 그에게 요청했다. 그 청년은 다른 형제와 함께 마리아의 요청대로 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칠락 묵주의 시작이었고 1422년 경의 일이었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바친다.


첫 단을 바로 시작하여 1번의 주님의 기도와 10번의 성모송을 바치고 같은 방법으로 7단을 모두 바친다. 7단이 끝났을 때에 마리아의 지상생활을 기억하며 두번의 성모송을 더 바친 후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영광송을 바치며 마친다.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은 다음과 같다. 


1. 천사의 방문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심.

2.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심.

3.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심

4. 동방박사의 방문- 이방인이 예수님을 따름.

5. 성전에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찾으심 - 예수님을 찾음으로 두려움과 걱정이 끝남.

6. 죽음이 물러가고 부활하여 새 생활이 옴

7. 마이라의 승천과 대관 - 마리아의 충실과 봉사의 생활로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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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마리아께 대한 사랑은 역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천사들의 성 마리아의 성당(포르치운쿨라)은 프란치스칸들의 요람이다. 프란치스칸이었던 복자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는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하심'에 관한 이론을 완성했다. 성 라우렌시오(Lawrence of Brindisi OFM cap)는 마리아에 대한 많은 책을 펴냄으로써 마리아 박사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의 프란치스칸은 '착한 목자의 어머니'에 대한 신심을 개발하였다. 이시도로(Isidore of Seville)성인은 책과 가르침을 통하여 '착한 목자의 어머니'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유럽의 아탈리아와 다른 나라에서는 마리아에 대한 프란치스칸 성당에 많다. 1863년 안토니오(Mary Anthorny de Laveur)는 루르드에서 촛불을 들고 매일 행령하는 전례 관습을 만들어 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이었던 교황 비오 10세는 1910년 9월 8일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여왕이신 마리아에 대한 전례를 허락했다.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는 프란치스칸의 모델로서 마리아화 함께 많은 영성적인 일을 시작했다. 모든 세기의 프란치스칸과 프란치스칸 생활 방식은 마리아에 대한 많은 신심을 만들어 냈다. 프란치스칸과 마리아는 거룩한 포옹 안에서 결합되었다.


<토의 주제>

1.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당신이 마리아에 대하여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

3. 마리아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모습은 어떤 것이 있는가?

4. 당신이 마리아를 본받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어떤 모습인가? 왜?

5. 당신의 믿음 생활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무엇인가?

6. 프란치스칸 칠락 묵주기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는가?


<성서 묵상>

+루가 1, 46~56

이 장을 읽고 묵상한 후 자신의 마니피캇을 써 보시오. 당신의 삶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포함시켜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