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베르나
제 15과
재속프란치스코회 세계 역사
시작기도
고유한 방법으로 재속프란치스코회를 이 땅에 세우신 주님! 당신의 아들이요, 기쁨인 성 프란치스코를 부르시고 당신께 응답하게 해주셨으니 감사드리나이다. 우리는 사부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재속프란치스코회에서 사랑의 완덕을 향한 복음 생활을 실천하고 있나이다. 800년의 역사를 지닌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를 보면서 프란치스칸 영적 유산의 후손으로서 교회와 사회에서 당신을 돕고자 하오니 축복하여 주소서.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세계 역사를 알아보는 일은 귀중한 유산을 받는 것과 같다. 우리 선배들이 어떤 삶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오늘의 나를 발견하고 재속프란치스칸으로서 삶과 미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완덕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런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보고 그 안에서 완덕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1. 재속프란치스코회의 기원과 초기 형제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복음적 생활을 하는데 매력을 느끼고 많은 평신도들이 그들을 따르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전 받은 뒤, 대중을 향해 회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의 이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일으켰다. 많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감동적인 설교로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토마스첼라노는귀족이건천민이건,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영광에 힘입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이끌음으로 영원한 영신 전쟁을 치르려고 그에게 오기 시작했다."(1첼라노 37)고 전한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에게 회개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성급히 서둘거나 떠나지들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면 좋은지 알려드리겠습니다."(잔꽃송이 16; 1첼라노 59 참조)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을 모범삼아 살고자 하는 무리들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세상을 떠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도 회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재속프란치스코회의 기원이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스스로를 '이씨시의 회개자들'아라고 했듯이 우리 초창기 형제들도 '회개자들의 회', '회개의 형제 자매회' 등으로 불렸다.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회개 생활을 시작했던 초창기 형제들은 프란치스코의 지도 아래 회개 생활을 지속해 나갔다(세동료 54), 프란치스코은 이 때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로 부르는 '회개의 형제자매들에게 하신 권고'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법적인 창설 이전에 회개의 형제 자매들에게 보내진 편지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첫 회칙이며 생활 양식이라 하겠다.
2. 법적인 첫 회칙
1209년과 1220년 사이에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자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21년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회개자들에게 '회개의 생활 양식'으로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교회의 회칙 인가로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른 평신도 회개 운동이 공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칙은 프란치스코가 창설자라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고 보편적인 회칙도 아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포기본지의 복자 루케치오 부부는 법적인 첫 회칙에 의해 입회를 한 첫 번째 회원이다.
2) 회개의 형제 자매들의 모습
초기 '회개의 형제 자매들'은 당시 그리스도교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카타리파나 부당한 사제에 의해 거행되는 행위는 무효라고 주장하는 발도파의 이단과는 분명히 다른 복음적 이상을 살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위해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는데, '신자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 역시 초창기 회개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쓴 권고 형식의 편지이다.
이들은 교회에 순명하면서 회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레치오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들은 "많은 부인들이 각자 집에서 동정 서원을 발했으며 수도복을 입었다. 각자 집을 가졌지만 겸손되이 공동 생활을 영위하고 단식과 기도로 육신을 다스리곤 하였으니, 그들의 삶은 사람들이나 형제들에게 세속인이나 부모들의 삶이 아니라, 아직 젊고 단순하였을지라도 참으로 이미 오랫동안 주님을 섬겨온 수도자요 성인들의 삶으로 비쳤을 정도이다."(페전 34 참조)
1221년 회칙 이후 얼마 있다가 '회개의 형제 자매들'이라는 명칭은 '프란치스코 3회'로 바뀌게 된다. 당시 회개 생활을 하는 도미니코 3회와의 구분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검은 의복은 도미니코회의 회개자들, 회색 옷은 프란치스코회의 회개자들로 구분짓고 이름도 '프란치스코 3회'라 명명하였다. 3 이라는 숫자는 '성 프란치스코의 구조를 받은 세겹의 군대(1첼라노 37참조)'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프란치스코와 3회
1)배경
13세기 말에 회개의 형제회는 형제회의 지역 대표들이 총회를 가질 정도로 이태리와 전 유럽에서 급성장하였다. 회원들은 '일치되고 안정된 회칙'의 힐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 교황은 1289년 8월 18일 프란치스코의 회개자들만을 위하여 '산 위에서(Supra Montem)칙서로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이 회칙은 1883년 레오 13세 회칙이 나올 때까지 무려 600여년간 시행된 회칙이다.
우리에게 니콜라오 4세 회칙이 주어진 때는 1회에서 3회에 대한 책임과 지도 문제가 계속 갈등 속에 있을 때였다. 니콜라오 4세 회칙은 우골리노 회칙을 그대로 따르면서, '회개의 형제 자매회'라는 명칭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가 재속 3회의 창설자임을 분명하게 밝혀 주었다. 이로써 3회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2) 은둔자들의 공동체 -율수 3회
초창기 회원들에게서 동정과 공동체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듯이 프란치스코 3회원으로 살면서 수도 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이들은 점차 자신들의 재산을 포기하고 은둔 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323년 교황 요한 22세는 칙서 '공경하올 지극히 높으신 분'(Altissimo in divinis)으로 율수 3회를 공식적으로 인준하였다. 즉 프란치스코에게 회칙의 기원을 갖는 1회와 달리 3회 회칙에 기원을 갖는 수도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인준된 것이다. 이때부터 재속 3회와 율수 3회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속 3회원은 공적이고 자선적인 활동을 통해 좋은 모범을 보였다. 많은 3회원들이 반 수도원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세상에 살면서 사회 공동체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자비의 집'이라든가 '여행자 숙소'들의 자선사업을 설립하고 시찰자로 종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매춘부를 위한 요양소, 무료 어린이 교육 등에도 촬동을 하여 위기 속에서도 꾸준히 복음적 생활을 해나갔다. 이때의 명칭은 '프란치스코 재속3회'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는 1323년 후 계속된 율수 3회와의 혼동을 막기 위함이었다.
5. 15세기의 재속프란치스칸들
15세기는 새로운 발전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작은 형제회 내의 개혁 운동(Observantia)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28년에 재속 3회가 1회의 총봉사자와 관구 봉사자들 아래 무조건 종속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후의 교황은 재속3회를 불신하였다. 이에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은 3회원을 보호하는데 앞장서 1473년 식스토 4세가 "3회는 교회 법원의 지배를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말은 이들의 신분이 세속인과 다르다는 의미이다.
이러는 와중에서 3회에서는 13~15세기에 많은 성인 성녀들(12명)과 복자들(26명)이 배출되었다.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피아첸자의 성 콘라도, 프랑스의 국왕 루도비코 들이 있으며, 통회자 코르토나의 말가릿다. 농군이었던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포기본지의 루케치오. 성녀 비르짓다. 성녀 요안나. 폴리뇨의 안젤라. 라이몬드 룰 등이 있다. 이들의 직업은 왕족에서 농사짓는 사람, 구두제조공, 상인, 수도회 창설자, 영성가 등 그 범위가 재속3회원 답게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6. 16세기의 재속프란치스칸들
16세기에는 이태리의 문예부흥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으로 3회가 쇠퇴하기도 하였고, 반대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유럽과 아메리카의 스페인 영토에서는 3회에 대한 태도가 열광적이기도 했다. 3회원들의 의복은 그동안 입어왔던 회개복을 벗고, 옷 속에 착용하는 긴 스카플라와 띠로 대치되었다(1508년), 또한 교황 레오 10세는 1516년에 "재속 3회원은 교회 법원의 지배를 받지 않고 다른 평신도들처럼 세속 법원의 지배를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재속3회를 작은 형제들에게 예속시켰다. 당시 1회는 1517년 옵세르반테스와 꼰벤뚜알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이어서 1525년 카푸친이 개혁을 시작하여 프란치스코에 뿌리를 두는 세 개의 수도회가 자리하게 되었다.
7. 17세기의 재속프란치스칸들
17세기에 들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점차 쇠태해지고, 작은 형제들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재속프란치스코회는 다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한다. 교황들은 악과 싸우는 한 방법으로 3회원들에게 영적인 호의와 추천을 베풀었다. 이태리에서는 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3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또한 1620년에는 카푸친 수도회도 다른 1회와 마찬가지로 3회에 대해 동등한 권한이 있음을 결정하였다. 프랑스 3회원들은 이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이로써 3회는 1회의 세 가족처럼 책임과 지도를 받는 1회의 소속에 따라 세개의 3회로 나뉘게 되었다.
16~17세기의 성인 성녀들로는 유명한 수도회의 창설자들이 많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 가에타노, 성 필립보 네리, 성 가밀로, 살레시오의 성 프란치스코, 상달의 성녀 요안나. 성녀 안젤라 메리치 등이다. 또한 1597년 21월 5일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성인 17명과 복자 30명이 있다. 이 숫자는 회원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이다. 즉 회원의 수는 증가했지만 실제 성인품에 오르거나 3회 정신으로 사는 회원들은 적었다고 본다.
8. 18세기의 재속프란치스칸들
18세기 중엽부터 3회는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된다. 시련은 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1776년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는 왕권 보호주의 정책으로 3회를 폐지시켰다.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모든 수도단체와 3회를 폐지하고 재산을 국유화 시켰다(1790년). 1810년에 나폴레옹은 3회가 사회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3회를 폐지하고 집회를 금지시켰다. 이러한 시련은 19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으나 교구 성직자의 도움으로 박해를 피한 1회 수도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 때 옵세르반테스나 카푸친의 도움으로 3회는 다시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9. 19세기 재속프란치스칸들
19세기 중엽에 와서 3회는 그동안의 시련을 통한 정화, 1회 가족들의 회복, 사상가와 문학가들의 프란치스코에 대한 관심과 호감, 탁월한 3회 지도자들의 노력, 홍보 수단의 효과, 교황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다시 활기를 찾고 놀랄만한 발전을 계속하였다. 이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레오 13세 교황이다. 레오 13세 이전인 비오 9세(1846~1878년)부터 요한 23세(1958~1963년)가 모두 재속3회원이었다.
당시 사회는 르네상스와 신대륙의 발견 등으로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었으며 가톨릭 신자들도 무관심주의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 대한 동경과 재속 3회원 교황들로 인해 3회는 이런 사회의 개혁에 앞장섰다. 이에 교황 레오 13세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재속3회원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600여년간 지속해 왔던 재속3회의 회칙을 현대 생활의 요구에 부응시키고자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아들'(Misericors Dei Filius) 칙서로서 1883년 새 회칙을 공포하였다. 교황은 3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그 자체로 하나의 경건한 사회가 되기를 원했다. 회칙 개정으로 의복도 작은 스카풀라와 띠로 대치되었다. 보다 깊은 신심생활을 강조하여 ㅅ어사 생활과 기도 생활을 강조하고 출판물 사도직을 다루고 있다. 또한 재속3회에 대한 법적 권한은 1회 세 수도회와 율수3회가 맡게 되었다.
10. 변화의 물결과 바오로 6세 회칙
교황 레오 13세의 영향으로 급격히 늘어난 회원은 1930년부터 다소 쇠퇴하였다. 그 이유는 3회 이상의 격하, 1회의 관심 부족, 그리고 가톨릭 액션 단체의 등장을 들 수 있겠다. 그러자 쇄신을 위한 국제 모임들이 이어졌다. 1957년 비오 12세는 '프란치스코 재속3회'의 새 회헌을 인준한다. 이것은 회칙에서 미흡했던 복음적, 사회적인 측면이 보충된 것이다. 1957년 회헌을 통해 '프란치스코 재속3회'는 '재속프란치스코 형제회'라고 칭하게 된다. 이는 형제성을 강조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프란치스코의 이상에도 맞는다.
1962년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고 교회의 쇄신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1회의 네 수도가족은 재속3회도 현대 교회에 맞은 회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쇄신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 ~1965.12)의 교시와 권고에 따른 현대화(aggior-namento) 과정에서 '창립자의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정신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1978년 6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창립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를 회칙의 머리말로 3장 26조의 새 회칙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수도회와 같은 모습을 벗고 세상 안에서 복음을 사는 진정한 재속프란치스칸의 삶을 살게 되었다. 1957년 회헌 이후 사용되었던 명칭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는 '재속프란치스코회'로 바뀌었다. 1978년 형 회칙의 공포 이후 2000년 12월 8일 교황청의 인준을 받고 2001년 2월 6일 회헌이 공포되었다.
오늘은 이렇게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초기 회원들의 삶의 모습에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 사회에서 필요로 했던 일을 수행해 오며, 또 교회 안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속프란치스코회는 여기,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존재한다. 역사의 과정을 보면서 현재의 회칙 안에서 나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의 역사를 쓰고 있다.
나눔을 위한 주제
1. 초창기 형제들의 삶은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가?
2. 역사를 보면서 현재 우리가 시작해야 할 일들은 무엇이라고 여기지는가?
3. 재속프란치스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이야기해 보자.
과제물
1.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를 요약해 온다
2. 필립비서, 골로사이서, 데살로니카 1,2서를 읽고 묵상한 바를 적어온다
3.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를 써 온다.
마침기도
그분은 홀로 선하시고 홀로 지존하시고, 그리고 홀로 거룩하시고 세세대대 영원히 찬미 받으실만한 분이시며, 축복받으실 바로 그분은 우리의 힘이시고 능력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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