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라베르나 제 13과 프란치스코와 회개 운동

Margaret K 2019. 2. 17. 05:43

라베르나

 제 13과 

프란치스코와 회개 운동



시작기도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


프란치스코와 회개 운동을 살펴보는 일은 프란치스코 당대에 평신도 운동과 연관이 깊다. 프란치스코 당대에 일어났던 회개운동은 평신도 운동이라 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란치스코도 평신도로서 이 회개 운동의 움직임에 민감하였으며, 당시의 이단들과 달리 교회 안에서 회개운동을 실현시켰다. 또 회개는 프란치스칸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당대의 회개 운동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역할과 운동을 살펴 현재 우리의 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프란치스코 시대의 종교적 사회적 배경


1) 교회의 개혁 운동

중세 봉건주의는 주교나 수도원장이 왕이나 제후로부터 소작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로 성직계급이 신하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어 교회에 대한 그들의 권리가 그만큼 커져갔다. 그 영향으로 성직자 중에는 충분한 교육과 자질이 없는 자가 많아졌고 독신 생활에도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년)의 개혁과 그 뒤를 이은 교황들의 개혁,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교회 조직등의 강화로 점차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은 그레고리오 9세에게 영향으로 주었고 교회가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얻게 된 자유는 교황에게로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자치권을 강화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개혁을 실행해 나갔고 평신도들은 교회의 이런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교회는 성직 매매가 부도덕한 성직자들을 반대하고 교화하는데 망설임 없이 평신도들을 동참하게 했다. 또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실현하기 위한 인노첸시오 3세 (1198~1216)의 노력으로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2) 시민과 평신도의 의식 변화

12~13세기의 영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노예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조합과 같은 자치 사회 제도를 조직하였다. 차츰 조합을 통한 상업과 공업이 부흥하면서 화폐 경제 체제로 발전되었고,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탄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도시와 도시, 귀족과 시민들 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침 부흥기를 맞게 된 사업으로 인해 사회는 새로운 중산층이 자리하게 되었다. 시민들의 자치 제도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사회에 자리나게 되었다. 봉건 사회의 의존적 수직 관계는 수평적 관계로 대치되었다. 사회의 체제가 변화하면서 교회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당시 수도승적 영성(Monastic)은 악한 세상을 탈피하여 완전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세상은 가난하였고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여 12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크리스천 삶의 비젼과 구원의 확실한 길은 수도 생활이었다. 봉건 제도가 제후의 소작지 안으로 사람들을 모아들이듯이 모나스틱 제도의 수도원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들여 크리스천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적당하고 완전한 장소였다. 당시 수도 생활과 세속 생활은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팽배해졌다. 교황에서부터 수도승, 성직자. 은수자, 마침내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초대 교회에 대한 이상이 새로운 영성의 요소가 되었다.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 그리고 공동 소유와 나눔의 생활이었다. 또한 수도원 제도(Monasticism)와 의전수도회(Canons Regular), 은수자와 순례 설교자들을 사도가 되게 했다.


순례 설교자에 의해 영감을 받은 평신도들도 사도적 생활에 대한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평신도들의 이 사도직 생활에 대한 열망과 동참은 교회 역사의 눈부신 영성적 각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직도 정립되지 못했던 노동(일)과 부, 결혼은 평신도들이 사도적 생활을 하기에는 큰 장애가 되었다. 더 큰 장애는 평신도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설교를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12세기 후반 무렵에 평신도들의 성덕은 자선 행위가 대표적이었다. 평신도들의 가장 큰 성덕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환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전체를 통해 사회는 급속히 증가한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대처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게 되었고, 진실로 복음적 이상을 재발견하게 된 평신도들의 열성적 활동은 하나의 평신도 영성으로 드러났다.


프란치스코와 회개 운동

 

1) 회개 운동의 태동

교회 안에 평신도들이 사도적 열성과 복음적 이상을 살려는 운동이 퍼져가고 있었지만 교회는 이들을 위한 어떤 조직도 준비되지 않았다. 12세기 전반부에 활동했던 정통적 순례 설교자들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사도적 삶을 원했던 것처럼 평신도들도 수도자나 성직자와 같은 생활을 하게 하거나.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인 수도회에 기사로 들어가게 했다. 이것은 그들이 세속 안에서 생활 할 수 있는 문을 닫아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그동안 체험되었던 크리스천 완덕을 향한 평신도의 독특한 영성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영성적 운동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평신도들은 자기들도 복음적 완덕으로 불림 받았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세상을 떠나는 수도승과 같은 생활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내적 영성으로 변화되어 갔다. 12세기 말의 평신도들에게 회개 생활은 이제 수도 생활이 아니라 세속 안에서 세속을 떠나 직업이나 생활을 바꾸지 않고 어떤 생활양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2) 새로운 형태의 회개 생활

11~12세기의 평신도들은 수도승의 영성과 같은 회개 생활읕 택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들만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회개 생활은 공동체 생활은 아니었지만 생활 지침을 가지고자 했으며, 기혼자들도 생활할 수 있는 삶의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수도자 수도회나 성직자 수도회와 나란히, 높은 영성적 삶을 사는 수도복을 입은 평신도로 자리하고 싶었다. 이들의 삶의 형태는 성서를 배우면서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도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이 새로운 회개 운동은 교회 당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고 점점 많은 관심과 인준을 받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회개 운동으로 '두란도와 가톨릭의 가난한 자', '베르나르도 쁘리무스'와 '롬바르디아의 가난한 자들', '후밀리아티'등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바로 교회와 화해하여 당시 이단으로 구별된 카타리파나 발도파와 달리 교회 안에서 회개 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후밀리아티 생활 양식은 교회의 인준과 파문 그리고 재인준의 과정을 거치면서 평신도 회개 운동을 정착시키는 시금석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생활 양식을 보면 단순한 옷을 입`었고 거짓 맹세를 삼갔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성서를연구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였다. 단식과 성무일도와 시간경을 바치고 병자들과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애덕 행위를 하였다. 또 적합한 장소에 모여 하느님 말씀을 들었다. 이 회칙은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며 회개 생활을 하고자 했던 초창기 재속프란치스코회의 회칙(우골리노 회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평신도의 열망


① 프란치스코의 복음 생활

프란치스코는 당시 회개 운동이 가난한 그리스도와 사도적 삶의 형태를 띠고 교회를 쇄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양식을 사도적 삶에서 찾지 않고 복음에서 찾았다. 또한 항구하고 감탄할만한 교회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지녔다. 그는 회개한 순간부터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으며, 복음은 그의 중심이었고 생명이었다. 그는 교회의 '초기 사도들의 생활양식'을 단호하게 '복음을 따르는 생활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에게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떠나 있으면서도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이며, 도시 밖에 있으면서도 도시 안에 있는 것을 의미했다.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이 목말라 하던 새로운 이상의 크리스천 복음 생활을 그들에게 제의했다. 그는 다중 언어를 사용했으며 시대의 인식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인간적이고 단순한 설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 마음을 붙잡았다. 그는 사람들의 사람이었다. 그의 대중적인 설교로 많은 무리가 그를 뒤따랐다. 프란치스코는 상업이 민감하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사회에 복음의 가치를 뿌렸다. 우리의 형제가 되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그의 겸손하면서도 형제적인 호소는 그동안 일상 생활과 종교 생활 사이의 유대를 새롭게 열었다.


② 프란치스코와 평신도 회개 운동

프란치스코는 당대의 사람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형제애와 평등, 가장 순수한 복음적 가치들이 만나는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자치구들은 내란과 경재으로 분열되어 갔고 프란치스코는 이들에게 잘못을 용서해주는 정신과 부드러움, 형제애 정신을 살아있게 하고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덕을 제시해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평신도 신분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곳에 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또한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수도승과 성직자들을 대표하는 교계와 민중들과의 생긴 틈을 메우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12세기 말에 교회 안에 널리 퍼졌던 종교적 열망은 회개 영성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이단과 저항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신심 운동을 교회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독창적이었으며 예언자였다. 복음적 사명을 인식하고 복음을 철저하게 살았다.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필요를 잘 알았으며 그들을 교회 안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는 시대의 징표를 분별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참된 평신도의 정신을 확인해 준 카리스마를 지니고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회개 운동의 순수한 의미는 복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프란치스코의 회개에 대한 설교는 사람들에게 바로 기쁨과 행복으로 연결되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사람들 안에 회개의 실천을 하도록 숨을 불어 넣었고, 회개라는 이미지가 지니고 있었던 부정적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었다. 회개는 진정한 행복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으며, 회개의 기쁨은 바로 복된 소식이라는 복음의 뜻을 되찾아 주었다. 프란치스코에게 참된 회개와 영적 기쁨은 사랑의 이중주였다. 당시 이 기쁜 소식을 들은 평신도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쁨과 행복으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과 인간의 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신앙과 희망을 외칠 수 있고, 마음을 성공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살려는 희망으로 가득찼고, 프란치스코의 회개 삶과 설교를 통해 주님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제시한 생활 양식은 사람들의 깊은 속마음을 바꾸게 하였다. 그들이 일으킨 회개 정신과 이 정신에 힘입어 일어난 회개 운동은 대중들과 젊은이들에게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따르려는 이들은 기혼자나 독신자, 평신도라는 신분과 관계없이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집에서 회개 생활을 시작했다. 참으로 복음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포함 해야 했다.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은 유일한 대회칙이며 영감을 주는 대헌장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닫고 그 성소에 따라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 회개의 삶이라고 여겼다.


평신도들은 자신의 생활 형태를 바꾸지 않고도 회개 생활을 통해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갔다. 평신도들을 통한 회개 운동은 급속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교회 안에 이렇게 수도자와 성직 계급 외에 또 다른 부류가 형성되어 갔다. 교회는 이들을 받아들여야 했고 법적인 수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회개자들의 회'가 태어났다. 



4) 회개자들의 회(회개 운동의 법적이고 영적인 형태)


1221년 프란치스칸들이 회개 설교를 시작한지 12년, 회개자들은 이미 사회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교회는 커져가는 회개자들의 움직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평신도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고도 수도자가 된다." 는 특권 형태의 가능성이 부여되었을 때 그들에게 법적인 형태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회는 알게 되었다. 회개자들은 "단순한 신자나 평신도로 여기지 않고 교회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보속하고자 하며, 인준 받은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었다." 1221년 회개자들의 크리스천 완덕을 위해 교회는 법적인 인준을 하였다. 이것이 우골리노 회칙이다.


그 후 1289년 프란치스코의 회개 운동을 따르는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회칙인 니콜라오 4세 회칙이 그들의 생활 양식이 되었다. 그들은 단순한 평신도나 일반 신자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재속 수도자들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재속 수도자는 평신도 신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이들은 교황의 인준받은 회칙에 따라 종교적 서원을 발했던 것이다. 교화청은 회개자들의 회가 수도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지방 주교의 관할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을 수도자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유일한 회가 되게 하였다.(ORder라는 단어는 당시 다른 신심 단체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12세기에 시작된 회개운동은 이렇게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유산 안에 열매를 맺었고 완성되었다. 


지금까지 프란치스코 당대의 회개 운동을 살펴보았다. 당시 사회는 커다란 격변기였고 평신도들은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크리스천 완덕은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몫이 아니라 평신도 자신들의 몫이 포함된다는 깨달음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당시 봉건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종교적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정착시켰으며 쇄신해 나갔다. 이것은 가난하신 그리스도와 사도적 삶의 형태를 띠었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의 사도적 삶을 복음적 삶으로 단호하게 물꼬를 튼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과 설교로 세속을 떠나지 않고도 복음적 완덕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며, 회개 생활의 기쁨과 행복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게 되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와 회개 운동이다. 교회는 마침내 새로운 부류의 경건함을 받아들여 법적인 회칙을 인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프란치스코와 회개 운동을 살펴본 우리는 교회와 사회의 움직임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으로 실천되어야 하는지 읽어야 하겠다. 그리고 평신도 영성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이 현재의 회칙을 통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 숙고해야 하겠다. 우리는 교회의 비전을 보아야 하고 틈새을 메워야 하며, 끊임없는 회개 생활을 통해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



나눔을 위한 주제


1. 현재 교회의 가장 큰 비전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실천해야 하는가?


2. 평신도의 정체성과 영성이 회칙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3. 현재 회개 생활의 기쁨과 행복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는가?


4. 현대 교회의 흐름을 얘기해 보자


5. 현대 사회의 다양하고 빠른 변화는 무엇이며 어떤 대안을 가져야 하는가?



과제물

1. 평신도 영성에 대해 묵상하고 정리해 온다


2.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를 읽고 묵상한 바를 적어 온다.


3. 공의회 문헌 평신도 교령을 읽고 느낀 점을 적어 온다



마침기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 친히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오, 얼마나 복되고 축복받은 사람들인가!

- 신자들에게 보내신 둘째 편지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