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라베르나 제 14과 프란치스코(1회)의 간추린 역사

Margaret K 2019. 2. 17. 05:44

라베르나 


제 14과 

프란치스코(1회)의 간추린 역사 


시작기도

좋으신 하느님, 저희를 프란치스칸 영적 가족으로 불러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사부 성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을 저희의 소명으로 받아들여 교회 건설이 이바지하게 하소서. 1회의 역사 안에 오묘한 모습으로 함께 하신 주님, 우리가 사부 프란치스코의 유산을 잘 받아들여 당신의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가꿀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사부 프란치스코의 풍부한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1회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에 매력을 느낀 젊은 이들이 프란치스코와 공동 생활을 하게 되면서 1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래서 800여년의 프란치스칸 역사에 있어 초기 형제들의 모습과 세개의 가족으로 형성된 배경, 그 이후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프란치스칸 가족의 모태로서 그리고 프란치스칸 형제애로 1회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1. 성인의 생존 당시

프란치스코 주위에 형제들이 모여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곳은 리보토르토의 움막이다. 이들은 복음적 생활을 위해 애긍으로 살았고, 사회의 천대받는 이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리보또르토에서 프란치스코와 함께 하는 회개자들이 12명이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첫 번째 '생활양식'(forma vitae)을 만들었다.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1209년(또는 1210년)로마에 가서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구두로 회칙 인준을 받고 대중을 향해 회개 설교를 시작했다. 이로써 교회 역사에서 '탁발 수도회'의 모습이 움트게 되었다. 리보토르토로 돌아온 형제들은 포르치운쿨라(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로 거처를 옮기고 회개 설교를 하는 자신들을 스스로 '아씨시의 회개자들'이라 불렀다. 이들은 당시 사도적 생활이 완덕의 이상이라고 여겼던 움직임을 복음적 생활로 정착시켰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형제애와 작음이 복음의 이상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mu)라 이름 지었다.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작은형제회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형제회는 처음 10년간 급속도로 성장했다. 1221년 총회에는 무려 3000명, 1222년에는 약 500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참석했다는 놀라운 기록은 그만큼 작은형제회의 성장이 두드러졌음을 말해 준다. 1217년 형제들이 많아지자 일정한 거주없이 생활하고 있었던 수도회는 조직적인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정주 생활이 아닌 순회 생활을 하려는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형제회가 비대해지자 취하기 않으면 안되었던 어려운 문제였다. 형제회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이상과 시대의 요구 때문에 형제회가 갈등에 휩싸이는 것을 막고자 형제회의 보호자요 감사관으로 우골리노 추기영을 요청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행정적 지도자의 직책에서 사퇴하고 카타니의 베드로 를 총장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곧 사망하였고 엘리아 형제가 총장직을 계승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폰테 콜롤보에서 복음의 이상을 잘 들어내는 회칙을 작성하고 1221년 총회에 이를 제출했다. 이 회칙은 교황으로 부터 인준받지 않아 '인준 받지 않은 회칙'또는 '제1회칙'이라 불린다. 회칙에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규정도 삽입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인준을 받고자 제 1회칙에다 수도회에 필요한 규정들을 보완하여 성좌에 제출하여, 교황은 1223년 11월 29일 칙서로 회칙을 공포했다. 이 회칙을 '인준받은 회칙' 또는 제 2회칙이라 부른다.


1226년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지키기로 주님께 약속한 회칙을 보다 더 가톨릭적으로 준수하기 위해서 남기는 회고요 권고와 충고'인 유언을 작성 한 후 10월 3일 귀천했다. 1228년 우골리노 추기경이었던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했다. 


2. 프란치스코 사후 초기 형제들의 갈등

프란치스코 사후, 회칙에 대한 준수 문제로 형제회 내부 갈등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사는 것이 회칙에 충실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회칙에 대한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 유언이 회칙에 대한 해석이다"등을 주장하게 되는 부류가 있게 되었고, 가난의 이상을 지키는 데 있어 시대적 필요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였다. 이런 갈등에 휩싸이자 파도바의 안토니오와 그 외의 다른 형제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로마로 가서 그레고리오 9세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과 유언을 정식으로 해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Quo elongati"(1230년 9월 28일)라는 칙서로 답을 주었는데, 이 회칙에서 선언한 내용 중 하나는 유언은 형제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권고 사항이니 회칙 준수로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이어갈 것을 천명하였다. 또 형제들이 일상의 물질적 필요들을 제공받기 위해 "은인들의 대리자들"과 "영적인 친구들"을 가질 수 있음을 인가해 주었다. 하지만 제2회칙에 기술되어 있듯이, 형제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해 '가난의 서약에 따라 사용할 것'만을 허락받았다.


형제회의 내부 갈등 속에서 형제들의 거처는 공동체를 이루는 곳(Loca conventualia)과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 곳(Loca non conventualia)사이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이 구분은 형제들이 도시에 있는 큰 수도원에 사는가 아니면 산 속에 있는 작은 은둔소에서 사는가에 따라 생기게 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형제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기거하는 곳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프란치스칸 이상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공동체의 형제들은 학문과 설교에 힘쓰기 위해 큰 수도원에서 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교황의 해석에 따라 회칙을 준수하였으며, 이들이 통상적으로 형제회의 행적을 맡았다. 반면 영성파(Spriituales)라고 아ㅏㄹ려진 형제들은 은둔소를 선호하였고 회칙을 영적이고 더 엄격하게 지키기를 원하였다.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른 두 공동체는 이렇게 미묘한 갈등을 안고 존재했다.


1241년 성좌로부터 회칙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이 내려지는데 작은 형제회의 모든 재산은 '성좌의 권리와 재산'이라고 천명했으며 형제회의 수도원과 성당들에 완전한 면속이 부여되었다. 이후 가난의 이상은 공동체에 재산 소유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자 사부 프란치스코의 가난 이상의 실천에 대한 갈등은 더 증폭되어 결국 나중에 형제회 분리의 요소가 되었다.


3. 보나벤투라 총장과 회칙 준수파 형제들의 항거

12157년 보나벤투라가 형제회의 8대 총봉사자가 되었다. 그는 행정가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혜와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1260년 나르본 총회 기간 동안 그는 형제회의 첫 번째 회헌을 형제들에게 주었다. 보나벤투라는 총회의 요청대로 성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전기를 썼고, 1266년 파리 총회는 대전기 이전의 다른 모든 전기들을 파기할 것을 명령하였다. 대전기는 공동체 형제들과 영적인 형제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교구 성직자와 파리대학 교수직 문제등 외부로부터 수도회를 보호하였고, 형제회 내부의 계속되는 갈등으로부터 회칙을 준수하여야 함을 분명히 했다.


1279년 교회는 작은형제회에 세 번째 회칙 해석에 대한 칙서를 공포하는데 이 또한 가난의 이상을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보나벤투라 사후, 회칙을 준수하려는 형제들의 갈등이 터져 나왔다. 교황청이 형제회의 공동 소유권을 갖게 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창설자의 이상을 지키려는 열망으로 교회에 반기를 들 것을 형제회에 요청하기도 했다.


1312년 11월 20일 클레멘스 5세는 칙서를 발표하였는데 시대적 요청에 적응하는 회칙 준수라는 공동체 형제들의 사람이 성취된 것이었다. 이 칙서에서 교황은 프란치스칸 회칙에 대한 지시 사항과 조언, 가난 이상이 형제회 내에서 남용되었음을 언급하여 형제회의 긴장을 잠재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바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제 형제회는 큰 수도원들을 가지고 공부와 다른 특권들과 같은 것을 가지길 원하는 공동체(Commuintas) 형제들 그룹과 형제회가 초기의 가난과 안정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영적인 그룹(Spirituales)으로 나뉘에지게 되었다. 



4. 1517년 형제회의 분리 과정


1)콘벤뚜알 옵세르반테스(1318 ~1517년)

회칙에 대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알력은 14~15세기에 더 큰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결국 형제회는 회칙을 충실히 준수하고자 하는 부류(Observantes)와 완화되고 법적인 신분을 살려는 부류(Conventualismo)가 형성되었다. 가난 이상의 실천에 대해 회칙 준수파는 실제적인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콘벤뚜알은 법적인 소유권을 가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난 이상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형제회의 행정은 여전히 콘벤뚜알 부류가 맡고 있었고 회칙 준수파는 회칙을 지키려는 강력한 움직임을 표면화 하였다. 


2) 회칙 준수파(옵세르반테스 운동)의 프란치스칸 이상

당시 유럽은 100년 전쟁(1339 ~ 1453년)과 흑사병이 퍼져 많은 형제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 와중에서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 회칙 준수파(옵세르반테스)는 자육적인 개혁을 하였다. 이 운동은 독립적이고 분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회칙 준수'라는 공통적 이상이 있었다. 이들은 형제적 친밀감을 갖고 보다 자유롭게 관상기도와 침묵의 생활을 하였고 특히 엄격한 가난은 항상 생활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콘벤뚜알 형제들도 회칙 해석에 대한 성좌의 합법적인 권한을 포기할 수 없었고, 옵세르반테스는 이들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다. 이런 형제회내의 갈등은 형제회의 힘을 상실케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콘벤뚜알 형제들에게 프란치스칸 이상의 가치들을 되살려 주었다.


형제회가 회칙 준수 문제로 갈등 속에 있었으나 그동안 프란치스칸 교황이 여러 명이었으며 교회 내에서 많은 프란치스칸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 보나벤투라, 복자 둔스 스코투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등 이들은 중세 교회를 빛나는 성덕으로 쇄신 시켰다. 


3) 완전한 분리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콘벤뚜알과 옵세르반테스를 소집하였다."Ite vos"라는 레오 10세 교황의 칙서로서 1517년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두 개의 분리된 가족, 즉 작은형제들 또는 회칙 준수의 작은 형제들(Ordo Fratrum Minorum 또는 Ordo Fraturum Minorum Conventualium)로 갈라졌다. 그동안은 의존 관계였으나 꼰벤뚜알 형제들은 옵세르반테스가 작은 형제회를 대표하게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프란치스칸으로서 서로 다른 수도회의 총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작은형제회는 콘벤뚜알과 옵세르반테스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5 카푸친 개혁


1) 배경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분리와 옵세르반테스의 일치를 시도한 "Ite vos" 칙서 이후에도 개혁의 진통으로 수도회는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옵세르반테스 내부에서는 더욱 충실히 프란치스칸 이상으로 되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마태오 다 바쉬오(Matteo da Bascio)는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의 삶의 방식에서 수도회의 이상이 무엇인지 찾아 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회개 설교를 했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수도회가 개혁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수도회 장상들은 더 이상의 개혁을 반대하였다. 그러던 중 마태오는 체험을 통한 성 프란치스코와의 만남을 주장하면서, 그가 직접 계시한 뽀족한 모자가 달린 수도복을 만들어 입었다. 그는 더욱 복음을 열심히 전했고 한층 엄격한 프란치스칸 회칙 준수에 따라서 살기를 바랐다. 1525년 교황청으로부터는 그의 생활을 인정받았으나 형제회와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감옥에 갇히는 등 고난을 겪었지만 자신의 이상을 함께하는 형제들이 그에게 합류했다. 주로 그들은 은둔소에 살던 형제들이었으며, 대표적으로 루도비코 포솜브로네(Lodovixo Dossombrone)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칙을 온전히 지키며 은둔생활을 할 수 있는 허락을 청했다. 1526년 그들은 동냥을 할 수 있는 허락과 더불어 교구 관할권 아래 살게 되었다.


2) 새로운 프란치스칸 탄생

루도비코로 인해 개혁은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 그들은 옵세르반테스를 비해 꼰벤뚜알 관할권으로 옮겨갔으며 그들의 보호 아래 관상 생활의 우선권을 비롯하여 뽀족한 모자가 달린 은둔자의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한적한 곳 에 살았다. 그후 그들은 독자적인 장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자체적으로 회원들도 받을 수 있게 되어 1528년 클레멘스 7세는 칙서를 반포하고 루도비코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프란치스칸이 탄생하였다. 교황청과의 관계에서 카프친의 개혁을 이루어 낸 사람은 루도비코와 라파엘이었다. 1528년 은둔소에서 첫 총회가 열렸고 첫 회헌을 작성하였다. 이 첫 회헌은 작은 형제들의 회칙 준수의 단점과 부족한 점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세라핌적 사부의 생활 양식에 대한 완전한 쇄신을 추구하였다. 그들의 의지는 초기 형제들의 프란치스칸 이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어 수도회가 확장되고 선교에 대한 열성도 커져 갔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1608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카푸친 형제들이 진정한 작은 형제들이며 성 프란치스코의 아들들이라고 선언하였다. 1619년 1월 23일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교황 칙서로 자치 수도회의 지위를 얻게 되어 콘벤뚜알의 권하로부터 분리되었다. 카푸친이 시작된 첫 세기에 카푸친 수도회는 많은 형제들에게 거룩함의 학교였다. 이 시기에 특출난 인물들 중에는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교회 박사 브린시디의 성 라우렌시오.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프델리스들을 들 수 있다. 


6. 3개의 분리 이후의 역사

수도회의 분리 이후, 콘벤뚜알과 카푸친은 각각 하나의 가족으로 이어졌으며, 회칙 준수파(옵세르반테스)는 다양한 갈래를 통해 진행되었다. 회칙 준수파는 은둔소를 통해 개혁 운동들이 태동하게 되었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 있었던 은둔 수도원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개혁 운동을 펼쳤다. 여러 회칙 준수파들과 그 통합 과정을 살펴보자.


1) 개혁파(Riformati)

이 개혁파는 이태리에서 시작하였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32년 1월 16일자 "In Suprema Militantis"라는 칙서로 승인한 개혁 그룹이다. 이 형제들은 극도의 가난을 살 수 있었고 자체 원장을 둘 수 있었다. 이 개혁파의 삶의 방식은 카푸친이 시작되었던 때와 비슷하다. 개혁파 형제들은 1939년 작은형제회의 계열 안에서 옵세르반테스 총장의 권한 하에 자치권을 가진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한 대행자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상태가 공식적으로 1897년까지 계속 되었다. 이 개혁파에도 많은 성인들이 탄생하였다.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성인은 폴토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이다.


2) 맨발의 작은 형제들(Alcantarini 또는 Discalceati, Guadalupani)

이 개혁 운동은 스페인에서 있었다. 스페인의 개혁 운동은 1517년에 있었던 형제회 분리 이전에 태동되었다. 1480년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여 옵세르반테스 총장 대리구로 독립 발전하였다. 1499년 개혁 그룹의 형제들이 '거룩한 복음' 속관구를 형성하였고 1515년에는 '맨발의 작은 형제들'이라고 알려졌다. 이 개혁 그룹은 꼰벤뚜알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으로 그 핵심 인물로는 스페인의 위대한 개혁가였던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가 있다. 베드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18세기말까지 '맨발의 작은 형제들 가족'은 이태리, 브라질, 멕시코, 인도, 일본, 필리핀 들으로 퍼져나갔다. 이 가족도 많은 성인을 배출했다. 성 파르칼 바일론, 필리핀의 선교사들이자 1597년 일본 나가사끼에서 치명한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그의 동료들이 있다. 


3) 레콜레티(Recollecti 작은 형제회)

레콜레티(한적한 곳에 산다는 뜻) 가족은 프랑스에서 생겨났으며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지지해 주었다. 그는 당시의 총장에게 형제회의 개혁을 권장하는 법 규정들과 특히 클레멘스 7세의 규정을 실행에 옮기라고 명하였다. 이 개혁운동은 프랑스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1601년 레콜레티 형제들은 클레멘스 8세로부터 자치적인 대리구를 허락받았다. 이 형제들은 벨기에, 영국, 아일렌드. 헝가리. 독일. 네델란드와 캐나다로 뻗어나갔다. 이 개혁 그룹은 금욕주의적인 삶과 관상, 학문, 그리고 설교와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치적인 개혁 운동이었지만, 개혁파나 맨발의 형제들보다는 공동체성이 덜 하였다. 은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도시들의 큰 수도원에서도 살았다.


4) 작은 형제들의 결합(1897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회칙 준수의 작은형제회(옵세르반테스)가 1517년 꼰벤뚜알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카푸친 개혁이 1619년으로 완전 분리되었다. 나머지 개혁 그룹들은 개혁파, 맨발의 형제들, 그리고 레콜레티 등은 옵세르반테스 안에 속해 있었으나 자치적인 분리 독립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은 옵세르반테스 작은형제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시기였다.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적 경향들은 유럽의 모든 수도회들을 약화시켰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쇄신과 개혁의 과정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19세기에는 산업 혁명과 더불어 공산주의 같은 세속화된 철학적 경향들이 선을 보이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형제회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889년 옵세르반테스 작은형제회 총회는 3개의 개혁 그룹이 모였는데 당시 112개의 관구가 있었다. 당시 옵세르반테스 총장 루이지 파르마는 교황 레오 13세(1878~1903년)와 함께 옵세르반테스 형제들을 한 수도회 안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작업은 쉬운 것이 아니었으며, 개혁 그룹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다. 레오 13세는 1895년 5월 16일에 아씨시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총회를 소집하였다. 이 모임에서 옵세르반테스들은 일치를 원했고, 개혁파와 맨발의 작은형제들은 이에 반대하였으며, 레콜레티들은 일치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일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1897년 10월 4일 프란치스코 대축일에 레오 13세는 "Felicitate Quadam"회칙을 발표하였다. 이날로부터 '옵세르반테스'와 '개혁파'와 '맨발의 작은형제'들, '레콜레티' 가족들은 공식적으로 "Ordo Fratrum Minorum"(작은형제회)이라는 이름 하에 한 가족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1회 프란치스칸 수도가족의 변화가 종료되었다. 


이렇게 1회는 가난의 이상과 회칙을 어떻게 준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진통과 격변이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마 이들의 한결같은 이상은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영성적 투쟁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그들 삶의 모토였으며 어떻게 하면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잘 살 것인가로 늘 고뇌하였던 것이다.


갈등의 역사는 언제나 더 큰 이상을 실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사부 프란치스코에게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현재 1회는 작은형제회(OFM),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OFM conv), 카푸친 작은형제회(OFM cap)의 세 수도회로 자리하고 있다. 교황청에서도 이 세 프란치스칸 1회 수도회는 동등하며 같은 프란치스코의 제자라고 선언하였다. 이들은 같은 프란치스칸 이상을 지니는 서로 다른 수도회로서 더욱 풍요롭게 영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이 그만큼 본질적이면서 풍부한 결실을 맺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나눔을 위한 주체


1. 1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자.


2.  1회의 세 수도회에 대해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얘기해 보자.


3. 수도회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이상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과제물

1. 1회 세 수도회에 대해 알아보고 그 세부적인 차이점을 적어 온다.


2. 1회의 수도회를 방문하고 가족의 형제애를 나누고 온다


3. 갈라디아서, 에페소서를 읽고 묵상한 바를 적어 온다.


마침기도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 또한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업적들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밀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는"종은 복됩니다.

-권고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