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베르나
제 16과
재속프란치스칸 성인 성녀들
시작기도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권고 6 참조) 좋으신 주님, 우리가 성인 성녀들의 삶을 이야기만 하는 헛된 신안 생활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성덕에 이르게 하소서.
재속프란치스코회에는 800여년의 역사 안에서 교회를 풍요롭게 한 많은 성인 성녀들이 나왔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약 80여명의 성인 성녀들이 있는데 우리의 특징대로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신분과 직업별로 분류해보고 그중 몇 분들의 삶을 살펴 완덕의 거울로 삼고자 한다. 성인 성녀들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시대적 소명 안에서 살아내 분들이다. 우리 모두는 완덕으로 불림을 받앗고 성덕은 윌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이야기만 하면서 여오강과 영예를 받기 원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성인들의 삶을 본받아 성덕에 이르도록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1. 다양한 모습의 선배들
1) 왕가. 귀족 출신
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231년 축일 11월 17일)
②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1336년)
③ 삐아첸자의 성 곤라도(1351년)
④ 복자 가롤로(1364년)
⑤ 프랑스의 국왕 성 루도비코 9세(1270년 축일 8월 25일)
⑥ 마르시아노의 복녀 안젤리나(1435년 축일 7월 13일)
2) 사제
① 영국의 성 이본(1303년)
② 복자 바르톨로(1300년)
③ 아르스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1859년 축일 8월 4일)
3) 순교자
① 복자 야고버(1286년)
②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동료 순교자들(1597년 축일 2월 6일)
③ 영국의 성 토마스 모어(1535년 축일 6월 22일)
④라이몬드 룰로(1315년 축일 6월 30일)
⑤ 일본과 중국의 순교자들
4)통회자
① 코르토나의 성녀 말가릿다91297년 축일 5월 16일)
5) 동정녀
① 비떼르보의 로사(1251년 축일 9월 4일)
② 마리스코티의 히야친타(1640년 축일 1월 30일)
③ 파르데스의 성녀 마리아 안나(1645년 축일 5월 28일)
④ 오상의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 동정(1791년 축일 10월 6일)
6)제조업
① 시에나의 복자 베드로(1289년)
② 피엔자의 복자 로벨로스(1280년)
7)부부
① 포기본지의 복자 루케치오(1260년 축일 4월 28일)
② 성 엘제아리오와 복녀 델피아(1323, 1358년 축일 9월 26일)
8) 수도회 창설자
① 스웨덴의 성녀 바르짓따(1373년)
② 발루아의 성녀 요안나(1505년)
③ 안젤라 메리치(1540년 축일 1월 27일)
9) 양성가, 교수
①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1309년 축일 1월 4일)
② 복자 콘타르도 페리니(1902년 축일 10월 20일)
이외에도 비오 10세 등과 최근에 성인이 된 중국의 17명의 재속3회원등이 우리의 선배들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복음적 생활로 교회를 쇄신하고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 중 몇 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아름다운 선배들
1) 최최의 회원인 복자 루케치오(4월 28일)
루케치오 모레스티니(1181~1260년)는 결혼한 사람으로 이태리 포기본지의 상인이었다. 그는 원래 야심 많은 사업가이자 정치적 수완을 지닌 사람이었다. 악덕 상인이자 모리배였으며 교활한 방법으로 부와 명예를 추구하여 사회적인 지위도 얻게 되었다. 그러다 그의 권모술수에 의해 파산한 사람이 "신의 저주를 받아라, 이 살인자야"하는 절규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번민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고 부와 명예는 그를 짓누르는 고통으로 변했다.
번민하던 루케치오는 1212년 프란치스코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려고 다미아노 성당으로 가서 광장에서 성인의 설교를 듣고 회심을 하게 된다. 회개의 증거를 보이라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듣고는 즉시 많은 부동산과 재물을 가난한 사람, 자기가 빼앗았던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병원과 가난한 자를 찾아다니며 봉사하고 자선을 베풀며 나그네를 친절히 접대하였다. 남편의 갑작스런 행위에 놀라 정신 이상자라고까지 했던 아내 보나돈나도 '가난한 사람을 위한 빵이 다 떨어진 빈 가마에 향기로운 새 빵이 가득한 기적'을 보고는 회심을 하게 된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3회의 첫 회칙인 우골리노 회칙에 의한 법적인 첫 회원이 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따라 진정으로 프란치스코를 따라 살다가 이들 부부는 며칠 간격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고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2) 헝가리의 엘리사벳 성녀(11월 17일, 여자 회원의 주보)
엘리사벳은 헝가리의 투린겐에서 1207년 7월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안드레아 왕은 네 아들을 낳은 뒤에 기다리던 딸을 낳았으므로 매우 기뻐했다.
태어난 지 며칠 후에 아기는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신심 깊은 어머니 젤뚜르다의 영향으로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이 어려서부터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엘리사벳이 네 살 되던 해에 투린지아의 에르만노 왕은 엘리사벳을 자기 아들 루도비코의 아내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엘리사벳을자기 아들과 함께 교육시키기를 원했다. 엘리사벳의 부모가 이에 동의하자 엘리사벳은 부모와 이별하고 투리지아로 떠났다. 엘리사벳은 투린지아에서 자주 어머니를 생각하고 보고 싶어 했으며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기도했고 그 기도는 정신적인 양식이 되었다.
환자를 보살피고 불치 병자들을 위해 몸소 봉사한 엘리사벳은 성장하면서 사람들의 총애를 받았다. 엘리사벳이 너무 자주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푼다고 생각한 왕비 소피아는 그녀를 헝가리로 보내고 싶어했지만 루도비코가 엘리사벳을 보호해 주었고 왕비도 엘리사벳의 두터운 신앙심에 차츰 감동을 받았다.
결혼할 시기가 다가오자 장래의 시어머니 소피아는 엘리사벳에게 "결혼 성소가 아니라 수도 성소가 있는 것 같다.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고 했다 . 그러나 엘리사벳은 "저에게는 수도성소가 없고, 하느님은 제가 결혼하기를 원하십니다."고 말했다.
1221년 루도비코는 20세, 엘리사벳은 14세가 되어 결혼을 했다. 루도비코는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신자였고 성실했다. 엘리사벳은 결혼한 다음에도 가난한 사람과 나병환자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직접 병자들 방문했고 나병환자의 상처도 치료해 주었다. 어느 날 병이 심한 나환자 한 사람을 자기 침대에서 쉬게 하였는데,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 침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워 계신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엘리사벳은 감옥에 갇힌 이도 도와주었다. 빚을 지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대신 빛을 갚아 주고 자유를 주었다.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에미나크에 와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을 때 엘리사벳은 이 작은 형제들에게 수도원을 지어 주었고 자신도 3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입고 있던 옷 대신에 상복을 입고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했다. 프란치스코는 엘리사벳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우골리노 추기경과 의논한 후 자기의 외투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이것을 가장 귀중히 여겨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1227년 가을 독일의 프레드릭 2세는 회교도에게 점령된 주님의 거룩한 무덤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을 모집하였고 루도비코도 이 십자군에 참가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고 아내와 네 살 된 에르만노, 세살 먹은 소피아, 그리고 갓 태어난 젤뚜르다를 두고 이태리 남쪽으로 떠났다. 십자군이 브린디시에 도착했을 때 유행병이 돌아 구도비코는 병자성사를 받고 사망하고 말았다.
루도비코가 십자군 원정을 나간 후 엘리사벳에게는 곧 어려움이 닥쳐왔다. 악한 사람들이 엘리사벳과 그녀의 아들을 궁궐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받아주지 말라는 법을 공포했다. 그렇지만 어떤 여관 주인이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몰아낸 다음 그들을 거기 들어가게 해 주었다. 밤 12시쯤 엘리사벳은 가까이 있는 프란치스코회의 성당 종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 며칠 동안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투린지아로 돌아온 십자군들이 루도비코의 시신을 가지고와 장사지냈다. 십자군들은 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바로잡아 주고는 구도비코의 장남에게 투리지아의 영유권을 상속케 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마음을 끄는 것은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이었다. 3회원으로서 프란치스코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글라라회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지도신부는 그렇게 하지말고 받은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치라고 했다.
1231년 예수께서는 그녀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친히 알려 주셨다. 그래서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한 다음 왕자들을 방문하고 3회원들 외에는 아무도 자기 방에 들어오게 하지 말라고 시종들에게 이른 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자기를 위해서는 수도복만을 남겨두었다.
11월 18일 24세 때 마지막으로 고해 성사를 받고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다. 1235년에 엘리사벳은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으며 프란치스코 3회 여자 회원들의 수호 성녀로 공포되었다.
3) 프랑스의 국왕 루도비코 성인(8월 25일, 남자 회원의 주보)
루도비코는 1215년 4월 25일 파리 근방의 뽀와시에 있는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 불랑쉬는 그를 지상 왕국만이 아니라, 천상 왕국을 위해서 더욱 교육시켜야 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가 신앙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했다. 이는 그가 불행할 때 인내로이 참을 수 있었고, 행복할 때 겸손할 수 있었으니 이런 점은 거룩한 왕의 특징이었다.
그는 겨우 12세였을 때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가 왕국의 실제적인 통치를 위임 받았다. 루도비코는 왕이었으나 크리스천 교육을 성실하게 받았다. 그의 스승 가운데는 여러 명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있었고, 후에 젊은 왕 자신도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였다.
루도비코는 심한 질병의 와중에서도 수년 동안 그 자신의 이름으로 왕국을 통치했고, 만일 그가 회복된다면 이교도들의 손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성지로 향하는 십자군을 일으키겠노라고 맹세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사라센에세거 다미에타의 요새를 탈환했으나. 군대가 전염병에 사기가 꺾이자 포로가 되었다.
그가 거룩한 평온함 가운데 여러 달 동안 이교도들의 죄수로서 고통을 겪은 후에 석방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부정해야 하는 서약이 덧붙여졌다. 거룩한 왕은 "그러한 신성모독의 말은 결코 나의 입에 올리지 않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루도비코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는 "좋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육신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나의 영혼은 죽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의 확고 부동한 용기에 감탄하여 그들은 마침내 별다른 조건없이 그를 석방시켰다. 크리스천에게 우호적인 다른 많은 협정이 이루어지자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동안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왕국을 통치하면서 루도비코는 경건한 신심이 모든 면에서 얼머나 유익한 것인가를 입증했다. 그는 뛰어난 방식으로 나라와 백성의 복지를 향싱시켰다. 크리스천으로서 그의 생애는 매우 모범적이어서 그에게서 3회의 모델이자 주보성인으로서 선택될 만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생애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상황 하에서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가 세례 때 받은 결벽성을 대죄로 인해 잃어버린 일이 결코 없었다고 전한다. 그 자신은 세례의 은총으로 그러한 상태를 간직했으나 비밀리에 보내는 편지에서 스스로를 '뽀와시의 구도비코'로 서명하기를 즐겼는데, 그것은 세례 받았던 본당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루도비코는 하인들이나 신하들이 욕지거리나 잘못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에게서 불친절하거나 짜증스런 말을 전혀들을 수 없었다. 그는 궁정에서 모든 불필요한 화려함과 사치를 피하고자 했으므로 그가 친히 먹여주고 보살펴주던 수백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외복들은 소박했고 항상 겉옷 아래에 3회의 표지를 착욕하고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 그는 공적으로 3회의 수도복을 입었다.
관능을 억제하기 위해 그는 이례적인 엄격함으로 교회의 모든 단식일을 엄수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을 금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열한 명의 자녀들에게 지극히 정성스런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스스로 날마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이 배운 학과들에 대해 시험을 치르게 하며, 크리스천 자선 활동을 실천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시관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이 가시관을 보존하기 위해 파리에 훌륭한 성당을 세웠다.
성지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한다는 심각한 불평들이 그의 귀에까지 들리자 1270년 제 2차 십자군 원정을 나갔다. 그러나 도중에 부상병들을 문병하다가 걸린 역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는 거룩한 기쁨의 탄성 속에 8월 25일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드렸다. 루도비코는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40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8월 4일)
1859년 8월 4일 선종한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프랑스 아르스에서 교구 신부로 살면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매우 성스럽고 희생적으로 많은 선행을 하며 보기 드문 사도적 삶을 살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3회원으로서 뚜렷한 명에를 심어주었다
그는 리용에서 멀지 않은 다르딜리에서 소박하고 경건한 양친으로부터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순결한 마음은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열렬함으로 가득하였고,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재능은 매우 빈약하였으나 성실함과 경건함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여 마침애 1815년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사제가 된지 3년 후 주교는 비안네 신부를 리용 교구의 작은 마을인 아르스에 보좌신부로 보냈다. 이 본당은 그 당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 있었다. 그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덕행의 실천이 드물었다. 전례 참여와 영성체는 의례 무시되었고 젊은이들은 오락과 매주 일요일마다 벌어지는 댄스파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우울한 심정 가운데에서도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의무를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종일 성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빗나간 양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이 열렬한 기도는 곧 응답을 받아 비안네 신부가 하는 일에 필요한 은혜들이 지속적으로 베풀어졌다. 비안네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면서 보여준 전심전력에 사람들은 놀라워하였다. 그는 본당 신자들에게 매우 자주 설교하였다. 특히 선악에 관해 가르쳤다. 선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였다. 또한 신부의 철저한 금욕 생활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비안네 신부의 사랑과 그의 온유한 설교는 곧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였다. 신부는 그들을 기도에 초대하였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성사를 지도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위대한 열의를 보여주었고 놀라움 정도의 사랑과 자선을 실천하면서 피곤해 할 줄 몰랐다. 몇 년 안 되어 본당은 완전히 변모하였다. 얼마 안 되는 반대의 목소리는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그들의 세속적 유혹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상 끌지 못했다. 아르스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성스러운 생활과 축복받은 성공의 명성은 급속히 퍼져나갔다. 외부 사람들이 양심을 바로 잡기 위해, 필요한 모든 형태의 충고와 위로를 얻기 위해 점점 많이 몰려 들었다.
1828년부터 무리를 이루어 순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의 숫자는 적어도 연간 2만명에 달하였다. 주목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개정하였고, 많은 병든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치유에 대해 겸손한 비안네 신부는 그의 본당에서 공경하는 성녀 필로미나의 중재로 돌렸다.
하느님의 종에 대한 요구는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비안네 신부는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을 고백소에서 보냈다. 게다가 매일 성당에서 교리에 관한 강론을 하였고, 매일 저녁 묵주기도를 인도하였다. 그는 초인적은 노력으로 엄격한 금욕을 실천하였다. 거의 끊임없이 단식하고, 널빤지에서 잠을 잤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문자 그대로 착한 목자로서 자신의 힘을 다 써가며 74세가 될 때까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일하였다.
완전히 기력을 다 써버리고 난 비안에 신부는 1859년 5월의 마지막 날 쓰러져 8월 4일 아무런 고통 없이 주님 안에서 평화롭게 운명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요한 마리아 비안제 신부를 시복하였고,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시성하여 영혼을 돌보는 모든 사제들의 수호자로 정하였다.
5) 코르도나의 성녀 말가릿다(5월 16일)
프란치스코회 막달레나인 말가릿다는 투스카니 지방의 코르토나 근처 라비아노에서 1247년에 태어났다. 일곱살에 경건한 어머니를 여의고 무관심한 아버지에 의해 방치되었는데, 아버지는 얼아 안가 재혼하였다. 몰인정한 계모가 몹시 학대하였기 때문에 말가릿다는 열 여덟살에 집을 떠나 유랑민들 틈에서 연명하였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에게 올가미가 되어버렸다.
9년 동안 말가릿다의 삶은 죄악과 추문의 생활이었다. 동거하던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갑자기 개가 애처롭게 울며 달려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개를 따라 급히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독거하던 남자가 피에 젖은 처참한 시신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적들이 살해 해버린 것이다. 소름끼치는 광경 앞에서 말가릿다는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정신을 잃고 공포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지금 그의 혼은 어디에 있을까?" 그때 그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죄악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길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속죄의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목에 밧줄을 걸고서 성당 문 앞에 무릎을 끓은 채 자신의 죄를 통회하였다. 사람들은 말가릿다의 보속를 받아들였으나 그녀의 계모는 더욱 혹독하게 대했다. 이러한 천대는 잔혹하게도 말가릿다를 악의 길로 되돌아가도록 유혹하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은총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성스러운 은총에 인도되어 그녀는 코르도나에 자주 가서 한 프란치스칸 사제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 고백사제의 영적 지도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누추하고 작은 헛간에 은거하면서 회개와 눈물과 기도 속에서 힘든 노동으로 근근히 연명하였다.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3회의 회원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모든 사람들에 듸해 통회자로 인식되었다. 회개 생활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나자 극도로 지치게 되었고, 이욱고 3회원이 되려는 소망이 이루어져 1277년에 3회에 입회하였다. 그녀의 열정은 더욱 켜져 그 때부터 실행한 고행이 얼마나 혹됙한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밤낮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울었고 때때로 흐느낌으로 목소리가 잠기어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사탄은 모든 간교와 올가미로 말가릿다를 다시 타락에 빠뜨리려 했으나 기도와 금욕으로 번번히 사탄을 쫓아버렸다. 그녀는 마침내 끊임업시 투쟁후에 모든 세속적 성향을 극복하였다. 하느님은 그녀의 죄가 완저히 용서받았음을 확인시켜 주셨고 당신의 특별한 사랑의 증거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은총은 명상의 재능과 마음속 깊은 비밀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아주 먼 곳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왔는데 그 때마다 그녀는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쓰라린 죄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의 권고와 기도는 그들을 회개로 이끄는 매체가 되었고 많은 영혼들이 그녀의 기도로 연옥으로부터 구출되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녀의 생존시에도 그녀를 통해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병든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죽은 소년이 살아나고 그녀가 다가가자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악령들이 몸서리를 치며 떠나갔다.
마침내 23년간의 혹독한 고행으로 50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은 이 위대한 통회자를 1297년 2월 22일 축복의 나라로 부르셨다.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이름을 딴 코르도나의 프란치스코회 성당 안의 소중한 성골함에 보존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썩지 않고 있으며 자주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있다. 교황 베네딕도 13세는 1728년에 매우 장엄한 의식으로 그녀를 시성하였다.
6) 성 토마스 모어(6월 22일)
성 토마스 모어는 사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진실하게 따랐던 3회원이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그는 자녀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도록 양육하는데 마음을 썼다. 그의 저서인 '유토피아'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이상의 왕국을 저술하여 교회와 국가를 좀먹는 악에 대해 멋진 풍자를 가하였다.
영국의 헬리 8세는 토마스를 왕실 법전에 배속하였고, 그 후에는 대법원장이 되었다.토마스 모어는 정치인으로서도 평소의 신앙생활을 꾸준히 지켜 나갔다. 매주 금요일을 자기 성찰의 날로 삼았고 자선에는 끝이 없었다. 토마스는 미사에서 사제의 시중을 들 때 특별한 기쁨을 느꼈고, 매일 성체를 영하였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투로 "많은 일로 날마다 여러가지 혼란 속에 있는 평신도가 매일 성체를 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대답하였다. "꾸준한 성체성사의 필요성에 매우 좋은 이유들을 들 수 있다. 만일 내가 혼란 중에 있다면, 성체성사는 마음을 가라앉히게 할 것이다. 하느님을 화나게 할 일이 날마다 생긴다면, 날마다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전투에 대비해서 자신을 새롭게 무장시키겠다. 그리고 만일 부담스러운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나에게 특별한 신중함과 능력이 필요하다면, 나는 구세주께 가까이 가서 자문과 빛을 구하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의 최후가 다가왔다. 타락한 열정으로 눈이 먼 헨리 왕은 아내와 이혼하고, 궁정에서 시중들던 여인인 엔 볼린과 결혼하였다. 교회가 당연히 이 간통 행위를 비난하자, 왕은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 자신을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로 세웠다. 누구든 그의 행위에 반대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내렸다. 왕에게 처음으로 반대한 자가 그의 충성스런 대법원장인 토마스 모어였다. 그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거기서 '신앙을 위해 바쳐진 죽음 앞에는 두려움이 없다.'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의 아내가 목숨을 연장하라고 설득했을 때 토마스는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적어도 20년이요."라고 대답하였다. "참으로!"라고 토마스 모어가 말했다. "당신이 몇천년이라고 말했다면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20년을 구하기 위하여 영원함을 잃어버리는 모험을 한다면 그는 불쌍한 상인임에 틀림없소." 그리고서 1535년 7월 6일 참수되었다. 교황 레오 13세가 이 위대한 3회원을 시복하였고, 교황 비오 11세가 1935년 5월 19일 시성하였다.
7) 성녀 안젤라 메리치(1월 27일)
안젤라 메리치는 이탈리아 북부 가르다 호숫가에 자리잡은 디센자노에서 1470년에 태어났다. 어린아이였을 때도 하느님께 열렬한 사랑을 하였고 겸손과 순결한 마음을 가져 고향 마을에서 작은 성녀로 존경받았다.
13살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 3회에 들어갔다. 곧이어 순결서약을 하였고, 모든 소유물을 포기하고 적선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이와 함께 대단한 고행을 실천하며, 맨땅에서 잠자고 빵과 물은 끊임없이 줄이며 살았다. 때때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성체만 영하며 며칠씩 지내곤 하였다.
23살이 된 안젤라는 어느 날 은둔처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얼마 전에 죽은 친구의 환상을 보았다. 그 친구는 안젤라가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대 공헌할 수도회의 창설자가 될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무한한 선행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예언하였다. 이것은 안젤라에게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동료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안젤라는 젊은 여인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어린이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주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집밖으로 나왔다. 때때로 그녀가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중죄인이 있었으나, 그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설교하고 권고하며 격려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안젤라의 성녀다운 행동과 가장 어려운 신학 문제도 답할 수 있는 심오한 지식은, 높고 낮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자신은 그러한 명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1516년 고향인 디센자노를 떠나 브레씨아로 갔는데, 거기에서 어느 경건한 마음을 가진 부유한 상인이 집을 한 채 주어 그곳에서 1524년까지 하느님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 때 안젤라는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성지 순례를 하고 싶은 열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열정적인 신앙심으로 예루살렘과 갈바리아산, 다른 성지들을 방문하였다. 사도들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전대사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녀는 로마를 경우해서 돌아왔다. 그녀의 고결함을 잘 알지 못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녀가 로마에 머물기를 바랬으나, 하느님이 그녀에게 운명지어주신 영감을 깨닫고서는 그녀가 브레씨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안젤라는 1531년까지 수도회 창설을 할 수 없었으나. 1535년 11월 25일 그녀의 신심단체는 그들의 일을 돕는 '성 우술라의 수도회'로 설립되었다. '두술린'으로도 알려진 이 회는 급속히 전파되어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젊은 여성들의 크리스천 교육을 위한 학교로 큰 성공을 누리고 있다.
안젤라가 70살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녀가 죽는 날과 시간을 알려 주셨다. 그녀는 열렬한 마음으로 마지막 영성체를 하였고, 곧이어 탈혼에 들어갔다.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동안, 그녀에게 예언된 바로 그 시간에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영혼이 떠나갔다. 3회의 관례대로 입관되었는데, 성지 순례 때 사용한 순례자의 지팡이를 한쪽 손에 쥐고 있었다. 유해는 브레씨아에 있는 성 아프라 성당 한 쪽에 뉘어졌다.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그녀를 시복하였고, 1807년 3월 24일 교황 비오 7세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다.
8) 마르크의 성녀 요안나(5월 31일)
농부의 딸인 아르크의 요안나(프랑스명, 쟌 다크)는 1412년 1월 6일 로랭의 뮤즈강 왼편 돔레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양을 치면서, 하느님과 가깝고 끊임없는 일치의 삶을 살기를 열망하였다.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데 보냈고, 명상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요안나가 3회원이라는 문서적인 증거는 없을지라도, 3회원처럼 살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녀의 동새대인들은 실제로 그녀를 3회원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3회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에는 많은 의문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샤를르 7세가 1422년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했을 때, 소위 100년 전쟁이라고 불리워지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을 계속되고 있었으며, 새로운 왕은 단지 르와르의 남쪽에서만 인정받았고, 북쪽에서는 아직 어린애였던 영국의 헨리 6세가 군주로 인정 받았다.`428년 영국은 오를레앙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 때 겨우 16살인 요안나는 냐란으로 찢기어진 조국을 진정시키고 영국의 손아귀에서 나라를 구해내라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1429년 2월에 집을 따났다. 3월에는 의심하던 샤를르 7세에게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명의 진실성을 확신시켰고, 4월에는 작은 군대의 오를레앙에 들어갔다. 5월에는 맹렬한 돌파공격으로 그 선두에 서서 도시를 구해냈다. 그 후로 그녀는 '오를레앙의 수녀' 또는 '라쀠셀'이라고 불리웠다.
그 후 요안나는 르와르, 오쎄레, 트로아이에로부터 영국군을 밀어내고, 샤를르 7세를 레임으로 인도하였는데 그 곳에서 왕위를 수여받게 했다. 그런데 왕이 무위로 끝난 파리 공격 후 전쟁을 계속하기를 망설이자 요안나는 1430년 3월에 왕궁을 떠났다. 두 달 뒤 그녀는 부르군다인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영국에 팔렸다. 교회법정에서 그녀는 이단자이며 마술을 부렸다는 유죄로 판명돼 군대에 넘겨졌고 1431년 5월 31일 화형되었다.
1456년 샤를르 8세의 명령으로 다시 열린 재판은 요안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1909년 시복, 1920년에 시성되고 2년 후에는 프랑스의 수호성녀로 선포되었다.
9) 루까 성녀 지따(4월 27일)
그녀는 1218년 몬테 사그라티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때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기사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친은 가난하였으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언니는 나중에 수녀가 되었고 외삼촌인 그라지아노도 거룩한 은수자였다. 증명할만한 서류는 없지만, 기사를 맡은 하녀들의 모범이며 특별한 보호자인 루까의 성녀 지따가 프란치스코 3회원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루까는 루스카니에 있는데, 이곳에서 3회가 설립되고 널리 전파된 후로, 13세기의 이 성스러운 여종은 참으로 자연스럽게 3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12살 때 지따는 집에서 8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루까로 가서, 번창하고 있던 모직과 비단의 방직 사업을 하고 있는 파티넬리 집안의 하녀로 들어갔다. 운명하기까지 48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한 그녀의 일과는 그녀의 수도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지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성실하지 않은 하녀는 경건하지 않다. 게으른 경건함은 경건한 척 하는 것이다." 그녀는 매우 열심히 기도하면서 회개 생활을 하였다. 밤마다 기도하기 위해 일어났고, 날마다 근처의 성 프레디아노 성당의 첫 미사에 참석하였다. 자신의 몫인 좋은 음식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아주 낡은 옷만을 입었고, 겨울에도 신발을 신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지따는 그녀의 생활방식을 경멸하고 그녀를 계속해서 모욕하는 동료 하녀들을 견디어 내야만 했다. 그녀가 모든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지만 그녀의 주인 역시 편견을 가지고 보통의 하인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 모든 시련을 불평하지 않고 견디어 냄으로써 평화스러운 마음과 기질을 잃지 않았다. 끈질긴 인내로 점차 모든 방해를 극복하였고, 마침내 하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가족의 친구이며 충고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녀의 주인과 여주인은 지따에게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보물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를 가정부들의 총 책임자로 선정하고 어린아이들의 간호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처음 인내해야 했던 것보다 얼마 동안은 더욱 더 그녀를 곤혼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매우 성실하게 의무를 이행한 까닭에 집안의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잘 지내게 되었다.
루까 지역은 1231년에서 1234녀까지 성무를 금지 당했기 때문에, 지따는 성체를 영하기 위해 피산 지방까지 걸어 다녀오곤 하였다. 당시에 이것은 위험한 여행이었는데, 도중에 신비하게도 어떤 낯설은 사람들이 길동무가 되어주곤 하여 그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생애 후반에는 많은 가사를 덜게 되어 마음께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죄수들을 방문하며 도와주었다.
기도에 몰입되어 두 눈은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은 가슴에 십자 모양으로 얹은 채 60세의 나이로 1278년 4월 27일 사망하였다. 그때 찬란한 별 하나가 그녀의 다락방 위에서 빛났다. 4세기 동안 성녀로 공경 받은 후에,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1696년 이 공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축일은 4월 27일이다.
오늘은 이렇게 아름다운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과연 선배들은 교회 안에 우뚝 선 프란치스칸들이었다. 세속에 살면서 뚜렷하게 프란치스칸 정신으로 살아 각자의 모습으로 성화된 선배들의 삶은 우리를 자극하고 안내한다. 이 세상의 나그네 삶은 영원한 삶과 비교할 수 없으며, 프란치스칸 정신은 우리를 성덕으로 이끈다. 우리에게 보배로 주어진 이 선물을 부끄럽지 않은 후배로서 살아 천국에서 기쁨으로 만나도록 하자.
나눔을 위한 주제
1. 성인 성녀들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감동을 얘기해 보자
2. 나에에 어떤 덕성이 필요하며,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가?
3. 선배 성인 성녀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가? 그 이유는 ?
과제물
1. 재속프란치스칸 성인 성녀들의 이름과 축일, 간단한 생애를 써 온다
2. 디모태오 1,2서, 디도서, 필레몬서를 읽고 묵상한 바를 적어 온다.
3.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를 써 온다
마침기도
형제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 권고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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