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베르나
제 17과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역사
시작기도
기묘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의 천주교를 섭리하신 하느님! 한국 프란치스칸 역사도 평신도로 시작하게 해주신 하느님! 이 땅에 프란치스칸 정신의 실천으로 사회와 교회의 빛이 되게 하셨으니 감사드리나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시대의 빛을 비추는 사람들로서 프란치스칸 이상을 실현하여 복음의 완덕에 다다르게 하소서.
이미 우리는 세계 재속프란치스칸 역사와 프란치스칸 수도 가족의 역사를 공부했다. 오늘은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로 한다.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는 70년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함께 해온 재속프란치스코회는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프란치스칸 카리스마가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고 결심해야 할 것이다.
1. 첫 조선 재속 3회원
한국의 첫 재속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재속 3회에 입회한 장 면(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00여년전 조선시대에 이미 일본에서 우리나라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했다. 1597년 2월 6일 도요또미히데요시의 박해로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을 때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이었다. 그 중 17명의 프란치스코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1627년에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
1)초기
①프란치스코회 한국 진출 이전의 한국 재속프란치스칸
한국의 첫 재속프란치스칸은 장면(요한)과 장 발(루도비코) 두 형제이다. 장 면이 뉴욕에서 대학에 다닐 때 프란치스코회가 사목하던 성 요한 성당에 다니다가 3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 매료되어 1921년 3회에 입회하였다
그후 1922년 9월 24일 장 면은 성 요한 성당에서 구드러(ofm cap) 신부 주례로 프란치스코를 수도명으로 서약했다.
또한 장 면(요한)의 동생 잘 발(루도비코)은 형의 영향으로 3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12월 30일 가브리엘을 수도명으로 서약하였다. 두 형제는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79위 한국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한 후 귀국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아직 한국에 진출하기 전의 일이었다.
② 첫 입회식과 서울 형제회 탄생
1937년 9월 프란치스코 수도회 선교사 2명이 우리나라에 진출하였다. 그 때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오기선 신부와 이광재 신부는 프란치스코회의 도 요한 신부 주례로 3회에 입회했다. 그후 오신부는 3회원 확보에 나섰고 이미 미국에서 3회원으로 서약을 한 장 면, 장 발 형제와 함께 형제회 결성을 추진하여 28명이 혜화동 성당에서 1937년 12월 25일 착의식(지금의 입회식)이 거행되었다. 이것이 한국의 성 방지거 3회(당시 명칭)의 첫 입회식이다. 이 첫 착의식은 일제 치하에서 억압당하던 교회에 신선함을 주었고, 움츠렸던 신앙에 불을 붙여 개인의 성화와 교회 공동체의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목포에 사는 김익진(프란치스코)은 1937년 11월 19일 혜화동 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3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단독회원 생활을 시작했다.
오기선 신부가 서약한 다음 해 20명이 첫 서약을 하였다. 1939년 1월 3일 성 프란치스코를 주보로 형제회 명칭을 '서울 형제회'라 하였으니 이로써 한국의 첫 형제회가 탄생하였다. 집회 장소는 혜화동 성당이고 초대 지도신부로 오기선 신부, 초대 회장으로 장 면이 선임되었다. 이날 노기남(바오로)종현성당 보좌신부를 비롯하여 우재봉(요셉)등 서울의 중견 지성인 수십명이 입회하여 한국 프란치스코 3회는 더욱 희망적인 공동체로 발전해갔다.
오기선 신부는 3회에 대한 지도방법과 3회원에 대한 규정을 알아보기 위해 대전 목동 수도원을 자주 방문하고 도 요한 신부와 의논하곤 하였다. 도 요한(OFM). 신부는 한국 프란치스코 3회의 기초를 다지신 분이다. 대전 지역에서는 3회의 회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미혼 여성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프란치스칸 수녀회를 조직하기 위해 도 요한 신부의 특별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교리교사를 하면서 공동체 형성을 열망하고 있었다.
2) 시련기(1941~1953년)
①박해
프란치스코회의 대전 목동 수도원 개원으로 교우들이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차츰 더 알게되자 성인의 영성은 대전과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대전 지역은 정식 형제회가 창설되지 않았으나 대전 목동 수도원의 보이지 않는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열심한 회원들이 수도원 사제들의 지도를 받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대전 본당을 위한 봉사 활동, 특히 교리 교사를 역임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사부님의 뜻을 실천했다. 이때 전국에는 약 400명의 회원이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탄압으로 평양, 광주, 춘천에서 사목하던 외국인 성직자가 체포, 구금되고 대전 목동에 있던 프란치스코회 성직자, 수도자들이 일본군에게 연행되었다. 대전에 있는 3회 회원과 수도 공동체 지망자들은 프란치스코회 신부와 수사들이 감금되어 있는 결찰서로 찾아가 위로하며 음식을 전했다. 그러자 형제회는 영적 지도자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다 1942년 2월 15일에 오기선 신부까지 신의주 본당으로 가게 되어 형제회원들을 뿔뿔이 흩어져 집회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② 노기남 교구장 착좌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서 원 라리보 주교는 한국인 주교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교황 사절로 오기선 신부를 밀사로 보냈다. 이는 결실을 거두어 1942년 1월 18일 오후 3시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신부가 경성 교구장과 평양, 춘천 교구장으로 교구장 착좌식을 했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착좌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이 예식은 장 면(요한)을 비롯하여 혜화동 본당을 중심으로 한 3회원들이 주관했다.
③'평화와 행복' 회보와 수도 공동체의 좌절
오기선 신부가 신의주 본당으로 부임되어 서울의 회원들을 직접적으로 지도하기가 힘들자 오기선 신부는 '평화와 행복'화보를 통한 지도에 주력했다. 한편 대전의 수도 공동체를 지망하는 교리 교사 3회원들은 수도자에 버금가는 열심한 생활을 했다. 도 요한 신부가 본국으로 떠난 후 지도를 맏은 고 베드로 신부는 이 공동체를 수녀회로 키우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구금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④ 오기선 신부 대전 본당 부임과 8-15 광복
오기선 신부가 1944년 대전 본당으로 부임되자 3회는 희망에 넘쳤다. 광복을 맞은 후 그동안 구금된 성직자들이 모두 풀려나 3년 만에 그리던 대전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수도원 건물과 많은 기물이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어서 신부들은 수도원 정비부터 시작하고 곧 대전의 3회원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장 면은 노기남 주교의 권유로 1946년 정계에 나섰으며, 노기남 주교를 도와 교회의 모든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 당시의 회원들은 이 나라의 지식인으로서 국민의 선각자였으며, 교회에서는 충실한 종으로 성직자를 존경하며 복음적 삶에 정진한 신앙이이었다.
⑤ 광복 후의 형제회와 6-25 동란
1946년부터 서울 형제회는 조종국(마르코)이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입회 과정은 간단하여 찰고만 하면 입회가 허락되었으니 회원이 급증하였다. 회원이 증가하자 월레회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 오기성 신부가 대전에서 올라오는 시기에 맞춰 모임과 미사를 하였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 동란으로 나라는 완전히 수라장이 되었다. 북한 교회에 대한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피살당했다. 6-25 동란으로 3회원 이광재(디모테오)신부가 1950년 10월 8일 원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하고 명망있는 회원들이 납북되었다. 전쟁의 상처로 사회 질서가 회복되지 못했고, 회원들 간에도 연락이 두절되어 지도신부와 임원들이 없는 상태에서 1960년까지 형제회의 집회는 거의 중단되었다.
3) 회복기(1953~1972)
① 시련의 딛고 다시 시작하며
9.28 수복으로 공산군이 물러가자 교우들은 다시 성당에 모여 어지러워진 성당을 재건하였다. 1945년에 파견된 배 쥐스탱 신부에 이어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계속 입국했고 3회원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1950~60년대에 조직된 형제회는 대부분 충남지역이었다. 대전 목동 수도원은 이들 형제회의 조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에 새로 입국한 공 안드레아 신부는 그 당시 대전의 오기선 신부와 함께 적극적으로 3회를 도왔다. 공 신부는 1959년 대전 목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을 받고 대전과 전라도 지역 3회원들을 위해 애썼으며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단독 회원들을 모아 형제회를 결성하는데 주력했다.
1958년 12월 10일 대흥동 형제회가 서울 형제회에 이어 두 번째 형제회로 조직되었다. 대흥동 형제회는 이미 1930년대 말부터 한국프란치스코3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역할을 이행해 왔다. 이어 당진군 합덕 신리에서도 형제회 조직의 움직임이 있었다. 부산에서도 형제회 창설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국에 형제회가 많아지자 공 안드레아 신부는 제1차 전국 대회를 준비했다.
② 첫 전국 대회와 그 영향
한국 진출 25주년을 맞이하여 첫 전국 대회가 1962년 9월 대전 목동 수도원 강당에서 열렸다. 전국적인 규모로는 처음 열리는 이 대회의 주제는 '평화와 선'이었으며, 전국 형제회 상황이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오기선 신부의 입회 25주년과 동시에 3회의 한국진출 25주년 기념식을 같이 가져 뜻깊은 자리를 이루었다. 이 전국적 모임은 서울 형제회와 여러 형제회의 탄생에 활기를 주었다. 교육과 수양을 위한 잡지 '발자취'를 창간하고 3회원을 표시하는 휘장도 만들었다. 1967년에는 대방동 형제회가 안토니오 성인을 주보로 하고 오기선 신부를 지도 신부로 창립 총회를 가졌다.
③ 한국연합회 발족과 초대 연합회
1963년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제2차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 때 한국연합회가 발족되었으며, 초대 지도 신부로 공 안드레아 OFM 신부, 초대 회장으로는 장 면(요한)이 선임되었다. 이어 초대 연합회 주관의 전국대회가 이듬해인 1964년 9월 대전에서 실시되었다. 제2대 전국 지도신부로 최근성(베드로) OFM 신부가 임명되었다. 1965년 안선호(베다) OFM 신부는 제3대 지도 신부가 되어 형제회 피정 지도와 운영에 힘썼다. 1965년 9월 제4차 전국대회가 열렸고 '3회원의 사도직'이란 주제를 내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쇄신과 평신도에 대한 자각이 높아진 데에 따른 3회원의 사도직 역할을 연구했다.
1966년 6월 4일에 초대 회장이었던 장 면이 67세로 선종했다. 이 아뽈리나리스 총장대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소 프란치스칸으로 항구하게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간 그에게 1회 수도자만이 쓰는 수도복 모자(Capuce)를 하사하였다. 연합회는 그 후 6년간 공백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1958년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국내에 진출(1958, 10,6)하여 3회를 조직하고 지도하기 시작했다. 1959년 대구시 범어동 본당을 중심으로 3회가 창설되었으며 대구 일원에서 많은 신자들이 형제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4) 재건기(1972~1978년)
① 연합회의 재기 -제2대 한국연합회(1972.8~ 1975.8)
초대 연합회가 공백 상태에 머무르게 되자 서울 형제회가 지방 형제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 신부는 3회 전국 지도신부로 재임명 받자 연합회 재건을 위해 전국대회를 개최시키고, 이순석(바오로)을 회장으로 하는 제2대 연합회를 발족했다. 1972년 연합회는 제6차 전국대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변화에 맞게 단독 회원제와 수도명을 폐지하였고, '성 프란치스코 재속 제3회'를 '성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로 변경하고 1972년 9월부터 연합회 월보를 발행하였다. 또한 입회식에서 성의와 띠를 착용하던 것을 뱃지로 바꾸었다. 그러나 서약자들이 수도복을 입는 규정은 계속 이어졌다.
제7차 전국대회는 1973년 대전에서 총회와 함께 처음으로 수련장을 위한 교육으로 실시되었다. 이 대회는 1965년 서울에서 2번 실시된 이래 다시 대전에서 개최한 전국대회였다. 당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3회부지도신부는 지 로꼬 신부였다. 당시 꼰벤뚜알에서 지도를 맡고 있던 형제들과 작은 형제회에서 지도를 맡고 있던 형제들이 서로 왕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3회원들과 함께 한 전국대회는 참으로 의미가 있었다.
② 월보 '평화의 사도'와 간행물
형제회는 내실을 다져가고 있었다. 연합회는 서울 형제회 월보를 '평화의 사도'로 개명하고 발행해 나갔다. 월보는 여러 번 휴간되었으나 그래도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출판사업은 제1차 전국대회 후 '발자취'를 준비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3회원을 위한 교재가 없어 교육의 부족을 메꾸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 1963년부터 나온 '발자취'였다. 이 수양지는 계간지로서 전국의 회원들에게 보급되었다.
대구 꼰벤뚜알 수도원에서 가진 제9차 전국대회에서 이순석(바오로)을 회장으로 하는 제3대 연합회가 출범하였다. 3대 연합회는 2대 연합회의 기반 위에 더욱 성실한 연합회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교육의 향상을 위해 힘썼다. 1978년까지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단위형제회의 지도자들을 위한 강습회에 심혈을 기울였다. 많은 형제회가 이 시기에 조직되었고, 교육자료와 월보 발행 등이 추진되며 지구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서울 형제회의 분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많은 형제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지역 형제회의 유대를 위해 지구협의회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최정오(마리노)신부가 3회 지도신부로 부임하였고 사부님 서거 170주년 기념식과 잔국대회가 전주에서 열렸다
5) 성장기(1978년부터)
① 제4대 연합회(1978.8~1981.10)
1978년은 국내외적으로 3회에 큰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변천하는 새 시대에 부응하며 개정된 회칙이 인가를 받고, 그 명칭도 종전의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에서 '재속프란치스코회'로 변경되었다. 4대 연합회는 김옥윤(요한)을 회장으로 하고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노력했다. 당시 전국 지도 신부는 이종한(요한) 신부였다. 연합회는 주로 교육에 주안점을 두어 지도자 연수회와 수련장 연수회가 개최되었고, 청녀 프란치스칸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젊은이의 모임을 개최하여 활기를 불어넣었다.
② 제5대 연합회(1981,10~ 1984.9)
제5대 연합회는 다시 김옥윤(요한)회장이 이끌어갔다. 1982년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탄생한 지 800년이 되는 해로 몇 해 전부터 사부 탄생 8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추진한 출판사업과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형제회의 후계자 양성을 위해 지도자 연수회, 수련장 연수회를 계속해서 개최하였다
전국 형제회는 당시까지 주로 작은형제회 영적 지도를 받고 있었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적 지도를 받는 형제들과 잦은 왕래는 없었다. 1983년 김옥윤 회장은 이 형제들과 서로의 발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협의했다. 5대 연합회 회장 기옥윤(요한)이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또한 1980년 8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영적보조를 받는 부산과 대구의 형제회들이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재속 형제회 한국연합회'를 만들어 소속 형제회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③ 제6대 연합회(1984.9~1987.10)
제6대 연합회는 박상대(마태오)를 회장으로 출발했다. 연합회는 새로운 정신과 각오로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를 확고한 바탕 위에 이룰 것을 다짐했다. 1985년 5월 한국 연합회 전국 지도신부로 김창재 OFM 신부가 임명되었다. 연합회는 형제회 시찰을 강화하고 지도자 연수회와 젊은이 모임을 연례 행사로 실시하였으며 장년모임과 수련장 학교, 전국 입회. 서약식 등 형제회 활성화와 양성에 주력하였다.
1986년 2월 14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지도하는 부산 대연동에 있는 꼰벤뚜알 재속형제회 연합회에서 꼰벤뚜알 김인규(토비아)지도 신부, 김소남(알렉산델)회장과 작은형제회가 지도하는 한국연합회의 김창재(다미아노)지도신부, 박상배(마태오)회장이 한 자리을 마련해 일치를 위한 대하를 했다. 1987년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면해 전국 대회가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④ 제7대 연합회 (1987. 10~ 1990. 10)
1987년 10월 3~4일 제 15차 전국총회가 개최되어 박상배(마태오)회장이 유임되었다. 1988년 1월 전국 평의회에서 수도복 폐지를 결정하였는데 이는 국제 지도신부인 칼 세이퍼 신부의 권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1988년 2월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역사서 '평화의 사도'를 발간하였다. 1988년 10월 제10대 지도신부 류이규(프란치스코)신부가 부임했다.
⑤제8대 연합회(1990.11~ 1993.11)
1990년 11월 제16차 전국총회에서 제8대 평의회가 출범하였다(회장 김종학), 1991년 2월 제11대 지도신부 유영진(루가)신부가 부임했다. 1991년 9월 국제평의회 회장 엠마누엘라 눈치오 총영적보조자 칼 쉐이퍼 신부가 방한하여 국가형제회 사목방문을 실시하였다. 1992년 1월 전국 연례회의에서 새 회헌이 발효됨에 따라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국 연합회는 '한국 국가형제회'로 지구 협의회는 '지구형제회'로 , 지도신부는 '영적보조자'로 부르게 되었다. 1992년 10월 과거 포켓판의 지침서를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로 혁신 발행했다.
⑥ 제9대 국가 형제회(1993.11~1996.11)
1993년 11월 20~21일 제 17차 국가형제회 정기총회에서 제9대 국가평의회(회창 박상배)가 시작되었다. 1995년 4월 영남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으며, 그해 6~7월에 양성교제 1,2권이 출판되었다.
⑦ 제19대 국가형제회(1996.11~ 1999.11.)
1996년 11월 제18차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김수업(토마스아퀴나스)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97년 2월 제12대 국가영적보조자 최병철 (아오스딩)신부가 취임하였고, 1999년 1월 15~17일 국가연례회의 및 회칙 반포 2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가졌다.
⑧ 제11대 국가형제회(1999.11~2003.1)
1999년 11월 제19차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제11대 국가평의회(회장 김수업 유임)가 구성되었다. 2001년 2월 국가영적보조자 김창제(다미아노) OFM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김인규(토비아)신부도 국가형제회 영적보조자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2001년 3월 국가형제회 홈페이지(www.ofskorea.org)를 개설하였다. 회헌의 개정에 따라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를 2001년 9월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이름으로 개정 발행했다.
⑨ 제12대 국가형제회 (2003.1~ 현재)
2003년 1월, 제20차 국가형제회 총회에서 제12대 국가 평의회(회장 한영숙)가 구성되었다. 2003년 5월 국가규정을 국제평의회로부터 인준받아 6월 29일 회칙반포 25주년 및 국가규정 인준 기념 행사를 가졌다. 또한 그해 10월 재단법인 '재속프란치스코회'를 설립 인가 받았고, 양성교제 '아씨시'와 폰테 콜롬보'를 발간하였다. 2001년 1월 '평화의 사도'를 혁신하여 잡지형태로 출간하였다.
오늘은 재속프란치스코회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는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천 안에서 끊임없이 쇄신작업과 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와 더불어 재속프란치스칸으로서 더욱 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며, 교회를 더욱 풍요롭게 하여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나가야겠다.
나눔을 위한 주제
1.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칸 역사를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나누어보자.
2. 초창기 형제들처럼 우리가 교회와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3.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칸 역사를 통해 좀더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과제물
1.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 역사 연표를 적어온다.
2.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유다서를 읽고 묵상한 바를 적어온다.
3. 형제회의 별도관리자를 방문하거나 형제회 초창기 회원들을 찾아 형제회 역사를 듣고 적어 온다
마침기도
주님,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온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매사에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생각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힘과 영육의 감각을 다른 데에 허비하지 않고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침으로써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풀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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