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교재

라베르나 제 6과 성녀 글라라의 생애

Margaret K 2019. 1. 13. 23:49

제 6과 

성녀 글라라의 생애


시작기도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는 성녀 글라라여, 당신은 가난하게 구유에 누우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관상하고 흠숭하였나이다. 그럼으로써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놀라운 사랑의 은총으로 그분과 하나 되는 탁월한 길을 보여주셨나이다. 주님의 정배이시며 사부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이신 성녀 글라라여, 저희도 당신을 본받아 기도와 사랑으로 주님의 비추는 빛이 되게 하시고 그분과 영원히 결합되는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커다란 성 프란치스코의 가족 안에서 프란치스코 옆에 있었던 한 여인, 더욱 철저한 방법으로 자기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빛나는 성덕의 여인인 글라라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글라라 성녀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외적인 가난을 실현했으며, 무엇보다도 내적으로 영적인 가난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또한 성녀 글라라는 프란치스칸 영성적 보화를 간직한 여자 수도회의 창설자이며 그 영성은 1회뿐만 아니라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도 너무나 필요한 영성이기에 성녀 글라라에 대하여 보다 깊이 공부해 보고자 한다. 본 과에서는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살펴보고 다음 과에서 성녀 글라라의 영성을 깊이 있게 살펴보기로 한다. 


1. 성녀 글라라의 어린 시절

글라라는 1194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때어났다. 아버지 파바로네는 기사였으며 글라라의 친척들도 모두 기사 계급에 속했다. 어머니 오르톨라나의 가정교육은 글라라에게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랑을 길러주었다. 오르톨라나가 가까운 성 루피노 성당에서 순산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인이여, 겁내지 말라. 그대는 온 세상에 빛이 될 아이를 낳게 되리라."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아기를 낳았으므로 이름을 글라라로 지었다. 


글라라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가득히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를 통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신앙의 기초를 배웠고, 성령을 통하여 내적으로 불타고 길들여졌으며 가장 순수한 은총으로 채워졌다. 글라라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쳤으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음식을 절제하곤 하였다. 글라라는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생활을 하려고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였으며, 남모르게 고행을 하고 밤에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였으니 그것은 희생과 자기 포기의 생애가 시작되는 여정이었다. 글라라의 부모는 글라라를 같은 가문의 사람과 결혼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하기 위하여 아름답고 순결하게 정결을 지키려는 글라라의 결심을 움직일수는 없었다.


1210년 사순절에 글라라는 루피노 성당에서 설교하는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단순하게 회개를 설교했고 부음에 관해 소박하게 설교했다. 프란치스코는 단순하게 회개를 설교했고 복음에 관해 소박하게 설교했다. 글라라는 겸손과 고행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프란치스코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란치스코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의 복음적 가난의 삶은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데 필요한 의견을 들었으며 두 사람은 이미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였다. 프란치스코는 글라라에게 세상의 영예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리스도의 정배됨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글라라의 영혼은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권고에 의지하였고 착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뜻한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2. 세속을 떠나 수녀원으로


1212년 3월 성지주일이 가까이 다가왔을 무렵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좌 성 루피노 성당에서 강론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불처럼 뜨거웠고 그의 목소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지극히 순결하고 고귀한 영혼이 오늘 밤 주님께 자신을 바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글라라가 프란치스코의 인도로 겸손과 정결과 보속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 출가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서 글라라가 기도하는 동안 신자들은 줄을 이어 귀도 주교가 축성한 성지를 받고 있었다. 귀도 주교는 스스로 글라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빨마 가지를 주었다. 글라라의 마음을 알고 있는 주교는 아시시의 영광이 될 글라라를 축복해 준 것이다. 그날 밤 글라라는 자기 방에서 기도한 후 정든 방을 몰래 빠져 나와 포르치운꿀라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갔다. 프란치스코와 필립보돠 베르나르도가 글라라를 맞이하였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와 형제들 앞에서 가난. 정결. 순명으로 십자가의 주님만을 따르고자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성 바오로의 베네딕도회 수녀원으로 재려가서 임시로 그곳에 있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안 가족들은 글라라가 아시시의 미치광이 프란치스코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글라라의 숙부 모날드는 격노하여 집안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그녀가 숨은 곳을 찾아가 글라라를 끌어내려 하였다. 힘이 부친 글라라는 재디보를 잡고 별안간 머리에 쓴 검은 수건을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칼이 잘렸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글라라의 결심을 번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고 돌아가 버렸다. 


3. 가난한 자매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동생 아네스도 글라라처럼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나와 글라라가 머물고 있던 성 안젤로의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갔다. 하느님께서는 글라라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동생을 보내주신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매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천상적 기쁨으로 즐거워했다. 글라라는 사랑하는 동생과 함께라면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네스의 가출을 알았을 때 집안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숙부 모날드는 열 두명의 무장한 기사들과 함꺼 수도원으로 몰려가 아네스에게 순순히 따라 오라고 외치고 글라라에게는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아네스는 글라라에게 매달리며 도와달라고 애원하였다. 기사들이 달려들어 아네스를 강제로 끌고 가려하였다. 글라라는 끓어앉아 열심히 주님께 기도했다. 글라라의 기도가 하느님께 올라가는 동안 아네스는 상처를 입고 저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별안간 그녀의 연약한 몸이 천 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워져서 열 두 명의 기사들이 힘을 합해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화가 난 모날드는 아녜스를 때리려 하였으나 별안간 손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글라라는 기적인 일어난 것을 알고 모날드에게 달려가 아녜스를 데리고 왔다. 두 자매는 감사와 기쁨에 넘쳐 제대 앞에 끓어앉아 주님께 감사드렸다. 프란치스코는 아네스의 착복식을 거행하고 더욱 뜨거운 정열로써 두 자매에게 가난과 사랑의 율법에 대하여 가르쳤다.


4. 성 글라라 수도회의 창립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소명에 알맞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였다. 그곳이 아시시 성 밖에 있는 곳, 바로 가난의 성지라 불리게 된 성 다미아노 성당이다.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가난의 삶과 기도, 단순함과 소박함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그들이 즐거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출가하여 42년 동안 글라라는 성 다미아노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글라라의 덕행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이들의 삶에 감동되어 부귀영화나 명예나 재산을 모두 내버리고 글라라를 본받으려고 찾아왔다. 처음으로 그녀의 동료가 된 자매는 포르치운쿨라에서 글라라의 착복식을 지켜보았던 빠치피카였다. 글라라와 아녜스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그녀를 맞이했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가 과히 어렵지 않다. 빠치피카에 이어 벤베누타와 필립바가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젊음을 바쳤다. 이들은 고행으로 단련하며 기도에 여념이 없었다. 수녀원 경내에는 꽃의 향기로 가득하였으며 고귀한 가난 가운에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가난은 우리를 하늘 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면서도 덕행에 뛰어나게 합니다."(글라라 회칙 8장) 성 다미아노 수녀들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총보다 더 귀중한 재산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 후 일루미나타, 벤베누타, 크리스티아나, 루치아, 베네데타, 베아드리체가 입회하였으며, 성녀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이 자매들과 함께 복음적 가난과 사랑을 실천하는 관상 봉쇄 생활을 시작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거드는 짝이며 성 교회의 심장으로써 그 연약한 자체를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는 프란치스칸 관상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라라와 자매들은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거룩한 순명을 약속했고 그 약속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이 작은 공동체를 돌보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거룩한 복음'의 완덕에 이르도록 생활 양식을 주었다. 글라라 성녀는 이 생활 양식에 자매들이 종속되기보다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였다. 회개한지 3년이 지나자 글라라는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명령으로 자매들의 지도를 맡기는 하였으나, 더욱 무가치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남을 섬기려는 마음이 더하였다. 이제 글라라는 자매들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고 병자의 자상한 간호인이 되어 글자 그대로 종들의 종이 되었다. 성녀는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요 성인의 정신을 누구보다 뛰어나게 이어받아 관상 생활 안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을 백배로 풍요롭게 만드신 모든 프란치스칸들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빛나는 생애로 교회를 밝힌 프란치스코의 수제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작은 형제들은 이들의 거룩한 삶이 잘 지켜지도록 애긍으로 이들을 먹여주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글라라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주님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 맡겼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고, 세상과 모든 이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며, 끊임없는 기도와 보속과 희생의 숨은 생활을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 


5. 성녀 글라라의 성덕

성녀 글라라는 참다운 겸손인 마음의 가난으로 그리스도를 따랐다. 성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유하기 원했을 뿐 그 어떤 것의 소유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실상 가장 값진 진주인 천상에 대한 소망은 헨세적 물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는 소유할 수 없다고 여겼다. 교회 역사 안에 여성으로서는 제일 먼저 회칙을 쓰셨던 성녀 글라라는 회칙 6장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재산이나 토지 혹은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거나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성녀와 함께 살았던 자매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의 친절, 온유함, 동정심은 천상적이었으며 의복과 잠자리는 매우 초라했고, 음식은 극도로 절재하였다.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가난의 특전'에 관한 것이다. 성녀 글라라가 수도 생활을 시작한지 3년재 되던 해인 1215년 11월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수도원들은 기존의 수도 회칙(예: 베네딕토회, 시토회, 아우구스티노회)을 받아들여야 했기에 성 다미아노의 수도공동체는 베네딕토 회칙을 받아들였다. 글라라는 이 회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사부님의 가르침에 대한 가난의 정신을 더욱 철저히 살기 위해 1216년 교회의 역사 안에 유일무이하고 유례가 없는 '가난의 특전'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께 요구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유없이 오로지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며 살고자 했던 글라라의 선택이었고, 프란치스칸 은사에 대한 글라라의 강렬한 의지이며 교회 권위에 의한 허락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참된 내적 자유와 풍요로움을 얻기 위하여 외적인 모든 것을 포기한 가난의 정신을 소유하기까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있었으며, 겸손이 그 받침대가 되었기에 이것을 실행할 용기와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 위에 가난의 견고한 보루에 둘러싸인 수도원 안에서 온갖 덕행의 꽃들이 풍요롭게 피어날 수 있었다. 성녀는 자매들에게 수도원이 하느님께서 눈여겨 보실만한 장소가 되려면 가난 안에서 풍요로워야 한다고 가르쳤고, 가난의 엄격한 조망대 안에서 그 집이 늘 힘을 얻을 때에만 그 안전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가르치곤 했다. 


성녀 글라라는 많은 고행과 극기를 행했다. 돼지 털옷을 구해서 입고는 뾰죽하고 빳빳한 털이 살갗에 직접 닿도록 했다. 어떤 때는 말총을 꼬아서 짠 거친 고행대를 울퉁불퉁한 끝들로 엮어 몸에 두르곤 했다. 건강할 때 대 사순절과 마르띠노 사순절이 오면 빵과 물로 단식하였다. 성녀는 세 사순절 기간 중에는 매주 월, 수, 금요일에는 절대로 입에 음식을 대지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이러한 엄격함이 글라라에게 병을 가져오고 기력도 떨어뜨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28년간의 병상에서 지내야 하는 원인이 되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와 아시시 주교가 글라라에게 삼일간의 단식에 대하여 금지령을 내리면서 50g의 빵을 거르는 날이 없도록 지시하였다. 


성 다미아노 자매들의 생활은 굶주리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의지 하였다. 어느 날 주방 책임을 맡은 세실리아 자매는 수도원에 남은 한 개의 빵을 들고 글라라에게 갔다. 빵는 한 개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글라라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 한 개의 빵을 두 쪽으로 나누어 한쪽은 수도원 일을 보는 형제들에게 주고 남은 한쪽은 자매들에게 주라고 하였다. 세실리아 자매는 깜짝 놀라서 겸손한 태도로 원장에게 말하였다. "원장 수녀님, 이 반쪽의 빵을 50명에게 나누어주려면 주님께 기적을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예요." 글라라는 곧 성당에 들어가 그리스도께 기도하였다. 글라라가 천상적인 평화와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드리는 동안 세실리아 동정녀가 들고 있던 빵이 자매들이 보는 가운데 한없이 불어났다. 그리하여 50명의 자매들에게 보통 때보다 오히려 많은 빵을 나누어주게 되었다.


6. 성녀 글라라의 죽음과 시성

성녀는 40년이라는 세월에 걸처 극단적인 가난의 길을 달렸으며 42년간의 수도 생활 중 28년이란 세월을 병상에서 보냈다. 이제 글라라에게 임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글라라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글라라 자매들에게나 글라라 공동체에 재산소유를 강요할 수 없다."라는 가난 특권에 대해 최종적이며 무제한적인 인준을 받지 못한 일이었다. 1252년 9월 자매들의 보호자인 라이날도 추기경이 성 다미아노 성당을 방문했을 때 글라라는 교황성하로부터 가난의 특전에 대한 초종적인 인가를 받을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간청했다.


이듬해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친히 병상에 있는 글라라를 방문하였다. 글라라는 교황 축복과 사죄경을 염해 주도록 간청했고 가난 특전에 대한 최종 인가를 요청했다. 성녀의 운명 이틀전의 일이다. 교황은 칙사를 통해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이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따라 생활하는 가난 특전에 대한 최종 인가를 해 주었다. 극도의 가난한 삶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글라라는 1253년 8월 11일, 세상에서의 마지막 찬가를 부르면서 하느님께로 올라갔으며 성녀의 손에는 교황이 인가해 준 글라라회의 회칙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글라라 성녀 서거 2년 후인 1255년에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하여 성녀 글라라는 곧 바로 시성되었으며, 성녀의 삶이 배어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과 유해가 모셔져 있는 아시시 성 글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58년 교황 비오 12세는 글라라 성녀의 빛나는 성덕을 기려 텔레비전의 주보 성녀로 발표하였다.


성녀의 삶은 자신을 창조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와도 같이 사랑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오롯한 응답이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기쁨 가운데 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한 성녀의 삶은 그녀의 이름처럼 오늘날 감각적 사랑과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가는 이 세상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살펴본 우리는 성녀의 영성을 따라 세상에 살면서도 어머니다운 형제애를 나눠야 하고, 영적 가난을 성취해 낸 성녀 글라라처럼 우리도 기도와 관상을 통하여 그것이 우리 삶의 내면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나눔을 위한 주제

1.  글라라 성녀에게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2.  글라라 성녀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느낀 감동은 무엇인가?

3. 글라라 성녀의 삶에서 재속 프란치스칸인 우리가 닮아야 할 점은 무엇인가?


과제물

1.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연도별로 정리해 온다.

2. 요한 복음 1~12장을 읽고 묵상을 적어 온다.

3. 성녀 글라라가 쓴 회칙을 읽고 느낀 내용과 묵상을 적어온다.


마침기도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기 시작할 때부터 가르쳐주신 것과 같이 자매들은 거룩한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의 길을 따르며 또한 값지고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항상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자매들은 우리 공로로써가 아니라 온전히 자비 자체이시고 선물을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써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나 언제나 좋은 영성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여러분이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랑을 행동을 통해 외적으로 드러내십시오. 이렇게 자매들은 이 표양으로 자극을 받아 하느님 사랑과 서로간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자라게 될 것입니다.

글라라의 유언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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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라

 영적 가난을 성취해 낸 성녀 글라라


어린시절의 신앙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이 있었기에 18세의 어린나이에 자신을 봉헌할 수 있었고

무사가문의 영향으로 강직한 의지와 통찰력으로 성 프란치스코보다 더 가난에 삶을 항구하며 완덕의 삶을 살아가셔서

프란치스코 성인보다 더 프란치스칸 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셨다.


- 극심힌 변화시기의 사회에서 어린시절을 보냄

- 독실한 어머님의 신앙생활 안에 교육을 받아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랑으로 십자가 앞에서의 기도와 자기 포기의 생활과 애긍의 생활이 생활화 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 무사가문의 영향으로 강직한 의지와 통찰력이 있다. 


1194년 탄생, 성 프란치스코와 12살 차이

1212년 성지주일 18살에 뽀르치운 꿀라에서 삭발례.

 출가하여 42년 동안 글라라는 성 다미아노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일생은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참다운 겸손인 마음의 가난의 삶을 따르는데 항구하셨고

가난 특전에 대한 이해가 끝까지 철저한 가난의 삶을 고집하고 돌아가시 2일 전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으로 부터 회칙을 받고 기쁨으로 회칙을 손에 쥐고 눈을 감으셨다. 

가난의 삶 만이 참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온전한 믿음이 있기에 가난에 대한 항구한 삶을 죽을 때까지 추구한 삶을 사셨던 것이다. 

글라라 성녀 서고 2년 후인 1255년에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하여 성녀 글라라는 곧 바로 시성되었으며

유해가 모셔져 있는 아시시 성 글라라 대성당

1958년 교황 비오 12세는 글라라 성녀의 빛나는 성덕을 기려 텔레비전의 주보 성녀로 발표하였다.




성녀 글라가 P 702

글라라 ‘빛’

-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 사이의 장녀

- 121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생활

 가난과 기도의 삶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

기적들

 -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성녀 클라라는 부축이 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병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과 수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성광을 들고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겁을 먹고 도망함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

-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를 치유했다

-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중병으로 누워있던 성녀 클라라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가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선종 2년 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