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5월 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8. 4. 30. 18:34

2018년 5월 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
요한 
14,27-31)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it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or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회 현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 가정과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계속됩니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지요. 나의 아픈 상처나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서, 나의 명예나 자존심을 지키려고 마음의 문을 쉽게 열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타인에 의해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닫힌 문을 열게 하고, 평화를 가득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하느님이나 이웃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자신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내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을 실천하려는 나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나이지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19).
이런 경향을 극복해야만 하지요. 우리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면, 자기 안에 있는 모순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온갖 욕심과 질투로 얼룩진 분열은 치유되고, 이웃과 친교를 나누게 되지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가 생각납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성당에서는 평일미사에 참석하면 은총표를 나눠줍니다. 미사 참석으로 받은 은총표를 날짜가 적혀 있는 포도송이 그림에 하나씩 붙입니다. 포도송이에 빈칸이 하나도 없이 가득 채우면 커다란 상을 준다고 신부님께서 약속을 하셨거든요. 저를 비롯해서 성당친구들은 평일미사를 빠짐없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새벽미사였는데도 그 은총표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졸음을 이겨내고 힘들게 일어나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포도송이가 채워질수록 기쁨이 커졌고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늦잠을 잔 것입니다. 어머니께 깨워달라고 했지만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날 은총표를 받을 수가 없어서 하나의 빈 포도송이가 생겼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물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성당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지 않았고, 갖은 이유를 대면서 미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하게 되면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매일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매일하던 운동을 한두 번 빠지게 되면 그렇게 즐거웠던 운동이 오히려 귀찮고 힘들어지는 일이 되고 맙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신앙 안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 있는지 모른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지만 열심 하지 않으신 분들은 왜 그러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 시간에 다른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 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단 일회적으로 또 가끔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주님의 평화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의 평화와 구별되는 세상의 평화는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별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는데도 뜻밖의 행운을 통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평화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평화는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주님 안에 머물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더 이익이 아닐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함을 가져다줍니다. 어떤 분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요즘 저는 너무나 행복해요. 그래서 혹시라도 이 행복이 사라질까봐 겁이 나요.”

주님의 평화는 이러한 평화가 아닙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또 겁을 내는 일도 없게 하는 가장 큰 평화입니다. 이렇게 큰 평화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안에 꾸준히 머무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절망하지 마라! 종종 열쇠 꾸러미의 마지막 열쇠가 자물쇠를 연다(필립 체스터필드).



고마운 삶

전에 자전거 여행을 하다가 느낀 것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더운 여름날 힘들게 언덕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올라갔습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고 저는 잠시 쉴 곳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 근처에 커다란 나무가 있더군요. 저는 그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서 물을 마시면서 쉬었습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 아래는 너무나도 시원했고 저의 피곤함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무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를 심은 그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나무를 누가 심었을까요?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은 미래에 이 자리에서 쉴 저를 생각했을까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보기에 좋아서 심었을 지도 모르고, 나무 한 그루가 우연히 남아서 이 자리에 심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미래의 저는 큰 혜택을 받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이렇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했던 행동 하나가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살 수 없는 세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서 살아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삶입니다.  

환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

 -전삼용신부-


러시아 붉은 혁명이 일어나 직후 소련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숨을 건 모험일 만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적은 무리가 비밀리에 모여 조심스럽게 미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몇 십 명의 교인들이 지하에 숨어서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손에 기관총을 든 소련군인 몇 명이 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왔습니다.

 

“꼼짝하지 마라. 이 자리에서 너희를 즉결 처분하겠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이제라도 예수를 배반할 사람은 즉시 나오라.”

 

그러자 벌벌 떨던 몇 사람이 일어나 걸어 나왔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의 등을 떠밀며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라. 만일 여기에서 어물거리면 너희도 죽여 버리겠다.”라고 소리치자

그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더 살고 싶은 놈은 어서 나오라는 군인들의 소리에도 대다수의 교인들은 창백해진 채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은 지하의 문을 닫고 쇠고랑을 채운 후

모두 총을 내던지고 교인들을 얼싸안고 외쳤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혹여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가짜 교인이 있을까봐

일부러 총을 들고 행패를 부린 것입니다.

많이 놀라셨죠? 용서하십시오.

이제 그들은 모두 도망쳤고 들킬 염려가 없으니 어서 미사를 드립시다.”

 

고통은 단련하고 구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 또한 이 시련 속에서 단련되고 정화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또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시련 속에서

더욱 완전해 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시련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군중을 설득하여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바오로는 두 번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이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바오로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갔지만 바오로는 다시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도시로 다시 들어갑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가 중요합니다.

그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바오로의 이 말이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닥쳐오면 주님을 믿는데 왜 고통을 받아야하느냐고 원망을 쏟아냅니다.

 

주님을 믿으면 수난을 당해야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은 그리스도만으로 끝난다고 여깁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이 세상의 안녕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야 바오로처럼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믿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바오로가 한 말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이 세상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와도 금방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를 다녀서 환난을 당한다고 믿고는 복을 주는 다른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환난을 많이 겪어야 한다고 말했고 자신도 얼마나 큰 환난을 당했는지 직접 쓰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상처가 유일하게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됩니다.

 

환난을 각오하고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 싸우다 우리 몸에 상처를 지닐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를 지녀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부부들의 대화와 기도를 도와주는 모임인 엠이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팀 부부들과 준비모임을 하게 됩니다. 모임의 장소는 부부들의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교우들의 집을 구경할 기회가 있습니다. 지난번 모임을 가졌던 가정은 참 아늑하고, 신앙인의 가정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떠신지요? 제가 본 그 가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먼저 현관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 가정은 언제나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방으로 들어오면서 성수가 있었고, 가정을 위한 기도가 액자로 걸려 있었습니다. 방에는 진열장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예쁜 성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인 큰 딸을 위해 안수 기도를 청하였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따님의 건강과 지혜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사를 가서 성당도 옮겼을 때 엄마가 친구들이 없어서 걱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의 대답이 엄마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친구 만나려고 성당가요?” 아름다운 가정이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평화도 중요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으며, 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이루어 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봉사자 가정의 식탁에서 보았던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글입니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 끝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 하였다.

첫 사랑이었다.”

 

5월의 첫날입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푹 빠지면 어떨는지요?


 참 평화의 선물

  -기도, 공동체, 복음선포-

-이수철신부-


오늘부터 계절의 여왕이라는 성모성월 5월 첫 날입니다. 주님 주시는 신록의 아름다움이, 신록의 평화가, 신록의 기쁨이 우리 마음을, 우리 눈을 깨끗이 씻어주는 느낌입니다. 온 인류가 갈망하는 참평화입니다. 평화를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란 역설적 상황중에서도 궁극으로 지향할 바 평화입니다. 우리는 방금 미사 입당성가에서 평화를 주십사 온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날 어여삐 여기소서/참생명을 주시는 주

 나 주님을 믿사오며/주님께 나아가리

 평화 평화/평화를 주옵소서

 영원한 참평화를/우리에게 주옵소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시고자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에 초대에 주셨습니다. 공동체에 주시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평화와 더불어,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제가 미사경문중 참 좋아하는 대목은 주님의 기도후 ‘평화예식’의 다음 대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이어지는 하느님의 어린양 셋째 부분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참으로 미사가 얼마나 좋은 하느님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사를 통해 공동체는 물론 개인에게 참 좋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바로 위 평화예식 중 말씀은 오늘 복음 서두에서 인용됐음을 알게 됩니다. 저 역시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 중 가장 많이 써드리는 공동번역을 이용한 오늘 복음 구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 걱정중에 참으로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에 주는 평화와는 다른,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좋은 평화입니다.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평화입니다. 불화와 시련, 병고의 어려움 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참평화입니다. 20여년 동안 수도원과 연대連帶하면서 고통중에도 내적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어느 자매의 메시지 내용입니다.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항상 감사하며 삽니다. 하루하루 묵묵히 기도하며 주어진 일하며 삽니다. 실망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침묵은 평화의 시작입니다. 깊은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평화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제가 피정강의시 늘 강조하는 것도 평화와 기쁨, 희망의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평화와 기쁨과 희망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만이 평화와 기쁨, 희망의 원천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 희망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새벽에 잠시 인터넷 뉴스 점검중 <문 대통령-트럼프 75분 통화 뒤 ‘북미 판문점 회담’ 눈앞에> 제하의 기사에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4·27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5월 북-미 정상회담 장소 또한 판문점으로 굳어져가고 있다합니다. 


이보다 남북한에 희소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트럼프를 설득한 문대통령의 진정성이 참 놀랍습니다. 부활시기 한반도에 주신 참 반갑고 감사한 주님의 선물입니다. 댓글 하나도 소개합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는 문재인 보유국입니다! 아싸!!!”


어제 저녁 뉴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전 얼마전 강론에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셋이 함께 노벨평화상 공동시상을 언급했습니다만,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문대통령은 30일 수석보좌관회의 도중에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부터 '노벨평화상을 받으시라'는 축전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즉시 대답했다 합니다. 다음 문대통령의 재치있는 그러나 진정성 담긴 겸손한 답변이 감동을 줍니다.


 "노벨상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으셔야 하고, 우린 평화만 가져오면 됩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답변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하는 느낌입니다. 마지막까지 모두 기도로써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저는 공동체와 평화에 대해, 복음선포와 평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얼마전 조카의 도자기 작품전시회에서 조카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것입니다. 조카 혼자의 전시회가 아니라 두 동료작가와 더불어 셋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혼자보다 함께 하니 너무 좋아요. 조화의 아름다움, 조화의 풍요로움, 조화의 평화입니다. 혼자같으면 조화가 없잖아요.”


공존의 평화, 조화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혼자의 믿음이 약하듯 혼자만의 평화도 약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더불어의 공동체에 평화와 기쁨을 선물하셨습니다. 공동체의 공존과 조화에 뿌리 내렸을 때 항구한 평화입니다. 주님 중심의 공동체는 흡사 마르지 않는 ‘평화의 샘’ 같습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사도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역경의 상황중에도 좌절할 줄 모르는 참 평화로운 공존의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에 전념하는 공동체에 주신 평화의 선물 덕분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가는 곳 마다, 제자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위로했다 합니다. 주님의 평화로 가득한 사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복음 선포 활동에 항구할 수 있음도 공동체의 평화에 뿌리를 두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두 사도는 자기들을 파견했던 안티오키아 교회공동체에 돌아와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했다 합니다. 항구한 평화에 공동체에 뿌리내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참평화와 기쁨과 희망을 선물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 역시 주님의 평화 하나뿐입니다. 아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이영근신부-


오늘날 우리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지난 4,27 판문점 선언은 평화의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우선 전쟁을 종식하고 물리적인 평화의 시작을 알립니다. 앞으로는 차차 비핵화를 넘어서, “평화가 큰 물결이 되고 주된 주제로 다루어지게 될 전망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구세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남기고만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함은 혹 당신께서는 이미 주셨는데 우리가 아직 그 평화를 받지 않은 것일까?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를 흔들어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남의 것을 가지고자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사랑과 신뢰의 유대,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빼앗겨서도, 빼앗길 수도 없는 상속재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이 평화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으며,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집니다. 그러기에, 이 평화는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인 어제 복음에서 제시된 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신 보호자이신 성령(요한 14,26)에 의해 보장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며, 평화를 이루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평화를 이루는 길은 타인을 죽여서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이요, 타인의 것을 차지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지는 것이요, 타인을 누르고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지는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이요, 부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성 베네딕도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가라(머리말 27)

 

하오니,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노동자의 성 요셉: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

-조욱현신부-

 

목수로 일한 요셉 성인은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해마다 51일을 노동자의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복음: 마태 13,54-58: 저 시림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회당에는 악의에 찬 믿지 않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의 교만은 주님께서 완전하게 가르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릴 때,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왕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지혜를 받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그것을 청하여 그것을 받았다.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면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신다.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지혜와 기적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들먹이며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생겨나게 할 어떤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샘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몹시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했다. 그들은 그분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하고 만다. 우리는 이웃을 보고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무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며 상대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며 이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아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 예언자들의 고향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들의 혈연관계로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 7,52)라는 말씀대로 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항상 예언자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58) 믿음이 없어 자격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는 권능이 힘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에 대한 놀라움이 커져 갔는데 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보여주는 광경이 아니라 기적의 소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기적이 소용이 없을 때는 행하지 않으셨다. 단지 몇 번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저자가 기적을 일으켰더라면, 우리도 믿었을 텐데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업과 가족관계를 가지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전혀 틀리는 경우가 많다. 고향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지고지순한 불멸의 사랑

 -양승국신부-

 

근로자의 날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축일입니다. 짧게나마 산업의 역군으로 일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땀흘려 일하고 난 후의 뿌듯한 성취감이 참 좋았습니다. 동고동락하던 직장 동료들과의 끈끈한 정도 잊지 못합니다. 부족한 내 두 손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뭔가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데서 오는 기쁨도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빡빡했던 근무 시간, 강도 높은 근무 조건으로 힘겨워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상습 피로, 수면부족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출근하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마치 큰 시스템 속의 부속품이 된 느낌도 잊지 못합니다. 좀 더 충실하고 모범적인 직원으로 살지 못한 송구함도 큽니다 

 

이땅의 많은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노사(勞使) 양측의 부단한 대화와 경청, 상호 이해와 배려를 위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근로자들,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요셉 성인도 하루하루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으로 성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에게 매일 주어지는 일들을 진지하고도 과묵하게 해나갔습니다. 

 

특히 요셉 성인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목재를 손질하면서도 자신의 인생 여정, 신앙여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찾아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을 기도화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안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 성인은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충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의인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이후 마리아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당혹해하는 부모에게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굿간 탄생, 이집트로의 피신, 소년 예수님의 돌출 발언,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마리아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고행 길이었습니다. 때로 고독하고, 때로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그만 주저앉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리아 옆에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요셉 성인이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생활'을 해나가던 요셉 성인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것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도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마리아를 향한 강한 부성애와 보호본능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통속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인 사랑, 헌신적인 신적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염철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이 산란해지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6,33) 이와 달리 세상이 주는 평화에 집착하는 사람은 당장에 주어지는 고난을 피하고자 합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마음이 산란해질 만한 일, 겁을 낼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일, 예수님의 일을 하고 있음에도 하느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로 올라갔다가 다시 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더디 지켜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 예수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 안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시어 함께 머물고 계심을 기뻐하며, 그분이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임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고 명하신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종종 마음이 산란해지기도 하고 불안에 떨기도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고대하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희망 자체가 이미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표징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리라고 확신합니다.


● 말씀 따라 걷기
*내가 상상하고 누리고 싶어 하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노동자 성 요셉.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아닌가? (마태 13, 55)

-한상우신부-

생명에 감사하는
성모성월의 
첫날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노동을 위로하는
근로자의 날입니다.

노동자 성 요셉의
삶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뜨거운 겸손을 
정직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정직한 노동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임을 믿습니다.

노동은 분명
하느님의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숭고한 생명의 삶으로
변하게하십니다.

사람과 노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노동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질서는
노동으로 드러나며
노동은 서로의 생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소중한 이 오늘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많은 근로자들의
생명의 축제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순수한 봉헌이
노동임을 믿습니다.

성 요셉이시여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거룩한 노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6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