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8. 4. 27. 18:28

2018 4 28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7-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했는데 배척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선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시며, 당신 이름으로 청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때로는 허상이거나 자기기만 또는 자신의 바람을 투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필립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예수님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런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의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져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실로 체험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얼굴이시고,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십니다.
강생의 신비인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 한계를 지닌 인성과 대조되는 초월적 신성에 대하여 다양하게 가르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들과는 달리 초월적 신성의 하느님께서 한계를 지닌 인성 안에 머무르시며 인간을 영원한 신적 생명에 초대해 주고 계시며,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절대적 기준이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한 인격과의 만남에 있다고 확신하며 가르칩니다.
한 인간의 완성이 고통과 죄,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 희망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믿는 이에게 더 이상 세상의 한계들은 영원한 희망을 가두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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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대부분 돈을 많이 벌었거나,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었을 때, 아니면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준에 맞춰서 저를 비교해봅니다.

제 통장에는 그리 많은 돈이 없습니다. 매스컴을 통해서 억대의 말이 나오면 정말로 다른 나라 말처럼 들립니다. 돈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저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일인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최고의 신부라고 말할 수 없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그렇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기준에서도 저는 실패자입니다.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제게 과분한 사랑을 주시지만 이 역시 세상 속의 큰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제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 분야에서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입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기준으로 삼는 행복은 세상 안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글과 강의를 하는 것 등등 모두가 부족하기만 하지만 그대로 이 안에서 만족을 하고 있으며, 매일 아침 어떤 좋은 사람과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 말에 큰 공감을 합니다. 솔직히 많은 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행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필립보가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청을 드립니다. 이 부탁이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는 의미로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하십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할 때 생긴다는 말씀처럼, 행복은 하느님을 뵙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기쁨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하는 가운데에서 행복이 있습니다. 이 행복을 찾는 오늘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커다란 기대와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파데르).



혼자 있을 때의 행복을 찾으세요.

어렸을 때,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집이 답답하기만 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을 떠나서 친구들과 놀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간다고 해서 특별히 놀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일을 한 것만 같고, 그래서 집에 들어올 때에는 ‘또 쓸데없는 일을 했구나.’라는 후회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부가 되어 성지에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거나 또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고 있는 일들이 재미있고 또한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밖에 나가서도 집에서 하고 있는 것들의 연장선에서 쓸데없는 일보다는 가치 있는 일을 찾게 됩니다. 지금 현재 혼자 있어도 또 여럿이서 함께 있어도 행복합니다. 어디서든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은 함께 있을 때에도 행복하다.”

혼자 있을 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끈을 놓아야 할 때

 -전삼용신부-


어느 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얼음덩어리 위에는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커다란 독수리 한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톱으로 양을 움켜쥐고는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자 독수리는 옆을 한번 쳐다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강한 날개를 한번 펴서 창공을 날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얼음은 폭포에 다다랐고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개만 푸득 거릴 뿐 날아오르지 못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성격은 매우 칼 같습니다.

유다인들이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방인들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립니다.

매몰차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먼지는 본래 인간의 육체를 만들 때 사용한 재료입니다.

하늘과 반대되는 상징이고 하늘에 하느님이 산다면 먼지를 먹으며 사는 동물은 뱀입니다.


, 먼지인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면 뱀의 운명을,

하늘에서 오는 성령의 뜻에 따라 살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처럼 이 육체를 가지고도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행위는

너희는 흙에 불과하니 뱀의 운명이 되도록 내버려 두겠다. 그러나 나의 책임은 아니다.

나에게 붙어있었다면 나와 함께 천국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이제 먼지에 불과한 너희들을 털어버리겠다.”라는 무언의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파견하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이 있다면

옷의 먼지를 털어버리며 경고하고 오라고 가르치십니다.

왠지 하느님께서도 우리들이 끝까지 먼지로 남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매몰차게 털어버리실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상대의 애정을 구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십자가가 그 자비와 정의를 동시에 드러내는 가장 완전한 상징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당신 아드님을 죽게 만드셨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를 그렇게 먼지처럼 털어버리실 수도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사랑을 알아달라고 질질 끌려 다니는 분이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참 사랑을 한 사람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애정을 갈구하며 자신에게도 보상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아쉬워서 좀처럼 돌아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엔 집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더라도 가차 없을 것입니다.

바로 떠날 수 있을 만큼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했기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삯을 바라며 인간관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났다면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 너무 늦거나 너무 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사랑에 충실한 사람만이 그 때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당나귀가 계속 절벽으로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꼬리라도 잡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잡고 있으면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후에는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꽉 잡고 있지 않았다면 미리 놓아버렸기 때문에 늘 후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놓아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 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한계까지 간 것을 자신이 알기에 후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쉽게 놓아버리거나 자신을 망칠 때까지

끝까지 잡고 있는 행위는 자신의 내면적 문제로 균형감각을 잃은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교구청에서는 매주 금요일 회의를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톨릭교회의 통계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문제는 없는지 고민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추구한 길에 문제가 있다면 대책을 연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건강검진을 하면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본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을 하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들일 수 있고, 생활 습관을 바꾸는 노력을 함께 한다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고, 생활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건강검진을 받아도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통계라는 건강검진은 교회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사생활이 줄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신앙생활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참여가 줄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영양실조를 겪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세를 받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복음화의 열차에 기름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과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성당에 오기 전에 다른 곳을 다니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에 가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기 때문입니다. 학원에 다니고, 성적이 올라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삶의 토대가 되는 신앙, 인문학, 예술적 감각은 아이들에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한국사회의 흐름처럼 교회도 급속하게 고령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많은 예산을 들여서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가족계획 정책과 아이를 키우기 어려워진 여건 때문에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국사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성소자들의 감소입니다. 사제와 수도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서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할 사제와 수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뿌리가 메말라가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점차 생기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신앙심이 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지적으로 준비된 젊은이들이 성소의 길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연구소에서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신심서적을 소개하고,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교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성장하고 문명을 일으켜 온 것은 부단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의 쇄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목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교구를 넘어선 다양한 연대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통합 할 수 있는 것은 통합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목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목의 지평을 열어야 합니다. 말씀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으로 찾아가는 사목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교님들과 사제들이 교회의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과의 우정-

-이수철신부-


어제는 한반도에 참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남북의 화해분위기가 꿈만 같습니다. 기적같은 일입니다. 당사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마치 남북이 하나가 된 축제분위기와 같았던 하루였습니다. 같은 뉴우스를 자주 반복해 봐도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문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반도의 남북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의 하루에 감사했습니다. 한민족의 위대함을 세계만방사람들에게 깊이 널리 각인시킨에 쾌거快擧의 하루였습니다평화의 집, 남북정상만찬석상에서 문대통령이 김위원장에게 했다는 다음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문대통령은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라는 북한 속담을 인용하며, “김위원장과 나는 이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길동무가 됐다”고 말했다 합니다. 길동무는 길벗처럼 도반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1953년생 문대통령과 1984년생 김위원장은 31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대통령은 김위원장을 길동무로 언급했습니다. 나이를 초월하는 길동무와의 우정관계이듯 시공을 초월한 예수님과의 우정도 그러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예수님과의 우정’으로 정했습니다.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 참 좋은 속담입니다. 더불어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가야 한다’는 인디언 속담도 생각납니다. 멀리 인생순례여정중인 우리에게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과의 우정은 필수입니다.


어제 강론쓴 후 내내 흡족치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이 좋은 복음 말씀을 충분히 표현해내지 못한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가슴 설레게 하는 복음 말씀인지요. 거의 32년전 대구가톨릭신학대학 부제반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교수 신부님께 드렸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가 예수님처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살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수준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목표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만, 문교수신부님도 제 의견에 전폭적으로 공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예수님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때 비로소 구원의 완성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필립보의 대화가 참 재미있습니다.


-예수님;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예수님;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그대로 세례받고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말씀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깊어가는 우정이었다면 이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주님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세례받았어도 주님과 남남의 관계도 있겠고, 끊임없이 깊어가는 길동무로서 주님과 우정관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영원한 길동무인 주님과 우정관계뿐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가면서 점차 비슷해져 가다 죽을 때는 모두가 똑같아 집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부많이 한 자나 적게 한 자나 똑같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남는 것은 주님과 우정관계뿐이요 인생 성패의 기준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다 같아도 같을 수 없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깊이입니다. 주님과 깊은 우정에서 샘솟는 기쁨과 평화가 행복한 노년과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이 깊어가면서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뵙기에 필립보처럼 새삼스럽게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보이는 길동무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마침 아프리카에서 오틸리엔 연합회 주관하에 양성장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수도형제가 보내 준 사진이 영원한 길동무 예수님 안에서 이뤄진 형제 길동무들 모습이 담긴 사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인종, 국가, 언어, 나이를 초월한 수도형제들간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길동무의 모범입니다. 영원한 길동무인 예수님과의 우정이 전제되었기에 이런 보이는 길동무 형제간의 우정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합니다. 이런 담대함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우정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 섭니다.”


최선을 다하고 집착없이 이렇게 두 사도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영원한 길동무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우정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두 사도는 박해에 지체없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났고, 두 사도의 선교로 생겨난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다하니 이 또한 두 사도를 통한 영원한 길동무,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길동무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어제 한반도에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에 저절로 오늘 화답송 시편으로 그 감사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98,3ㄴ-4). 아멘.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기심을 채울 수도 남에게 해가 되는 무엇인가를 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구원을 청했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합니다.“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 하려거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짚어보십시오.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랍니다. ‘인간 아무개의 이름으로 청하면’인간적인 것을 얻을 것이고,‘예수님의 이름으로’청하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껏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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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로 양육되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을 닮는 것”이다. 그분께서 다른 이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곧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어제 <복음>의 토마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뒷부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이에, 필립보가 간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보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에서 쓰인 보다라는 동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 이는 구경꾼처럼 단순히 바라본다거나 관찰하여 파헤쳐본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알았다, 곧 보고서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라는 뜻의 보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과시해 보여 달다는 의미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과시가 아니라 보는것이요, ‘아는것이 아니라 믿는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이는 아들 안에 아버지의 본질이 있고 아버지 안에 아들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들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들이 하는 행동은 모두 아버지의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호내재가 꽃피우는 것이 바로 두 분이 함께 하신 일들이며, 그것은 곧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 일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두 번씩 반복 강조하여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먼저 당신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하는 것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결국,당신이 일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주님!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지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환히 아시지만

저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조욱현신부-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 사도들은 주님께서 지니신 인간의 모습은 보았지만, 하느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며 우리처럼 나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항상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들은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 주신다.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에 관한 지식이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아버지는 아들의 기원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당신을 본 사람은 당신을 낳으신 분을 안다고 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7)고 하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청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확실하게 설명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그는 인간이 되신 아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뵌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의 눈이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 필립보는 예수님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 아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계속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초상화, 아버지의 모상,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이것은 아들이 진리와 의로움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0)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일치한다는 것은 관계로서 이룰 수 있는 하나이며 일치이다. 이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사랑 안에서 하나이시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을 우리는 성령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시며,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사도들을 꾸짖으신다. 당신이 하시는 말도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분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며,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께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하실 것이며,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더욱더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이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14) 사람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모든 것을 당신이 주시겠다고 아들은 말씀하셨다.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임금을 뜻하고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13)고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도 하느님께 참된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청하며 하느님의 가족이 되도록 하자.


-염철호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그들에게 당신의 모범에 따라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가르치십니다.(요한 13,1-15) 그러고 나서 곧바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절)라고 하시며,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파견한 이, 곧 주인이신 분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범을 우리도 삶으로 실천할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인에게 한 행동을 종들에게, 파견한 이에게 한 박해를 파견된 이들에게 할 것입니다.(15,18-25) 그럼에도 제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벗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다면, 종은 예수님의 친구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14절)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들어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은 우리를 종 취급하면서 무조건 당신을 따르라고 권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아버지를 알게 됨으로써 당신의 벗이 되라고, 당신의 명령을 잘 실천하여 생명을 향한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당신의 벗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예수님은 이 말을 하는 것이 모든 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시편 41편 10절을 인용하면서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시편 4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가 믿어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저를 일으키소서. 제가 그들에게 앙갚음하오리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유다의 배신으로 죽음을 겪게 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것을 직접 예고하심으로써, 훗날 제자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그분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벗으로서 당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파견된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이가 될 것이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가 될 것입니다.(20절)


● 말씀 따라 걷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불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 <당신의 빈자리에 서게 하소서>

  • -상지종신부-

    진리를 팽개치고
    거짓의 노예가 된 세상

    길을 잃고 끝없이 표류하는
    의미 없이 휘청거리는 세상

    생명이 움트지 못하고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신 후
    당신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절망적입니다.

    다시 당신의 빈자리에 섭니다.

    아니 당신의 빈자리에
    당신께서 저를 세우십니다.

    거짓을 파헤쳐 진리를 세우고
    어두움을 걷어내 길을 밝히며
    죽음의 사슬을 끊고 생명을 꽃피우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참담한 무기력함과
    분노의 응어리를 부수며

    뜨거운 열정으로 빛나는 희망 머금고
    당신의 빈자리에 서게 하소서.

    당신 떠난 뒷자락을 향한
    초점 없는 눈빛 거두고

    보잘것없는 이 한 몸
    당신의 빈자리에 기꺼이 서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서
    아버지를 보여 주셨듯이
    당신의 뒤를 따라
    생명을 꽃피우는 진리의 길이 되어
    아버지를 드러내게 하소서.

  •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신 후

  • 당신의 빈자리에 서 있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Ad Iesum per Mariam)

 -양승국신부-

 

수도회 입회 전 청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할 때, 언제나 들고 다니던 두툼한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자주 등장하던 성인이 한 분 계셨는데, 프랑스 북서쪽 몽포르 지방 출신 성 루도비코 신부님(1673~1716)이셨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이 분의 말씀과 영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은 레지오 마리애 창설의 주인공이자 주보성인 격이었습니다. 

 

비상한 통찰력과 탁월한 예언 능력의 소유자였던 루도비코 신부님은 당신의 저서를 통해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마리애 출현에 대해 정확히 예언하였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대에 마귀와 세속과 부패와 싸울 막강한 군단,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무쌍한 남녀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가톨릭 교회 안에서 루도비코 신부님은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과 열정으로 유명합니다. 성모님과 묵주기도는 그의 영성생활에 있어 기반이 되는 두 중심축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극진한 성모님 사랑에 대해 우려스런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소홀히 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성모신심은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에 걸친 그의 모토는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Ad Iesum per Mariam)’였습니다.

 

1700년에 사제가 된 루도비코 신부님은 도미니코 재속3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흠모했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묵주 기도의 비밀’ 등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한편 그는 성모님의 깃발과 보호 아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착한 목자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열렬히 기도했고,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동료 사제 몇명과 힘을 모아 ‘마리아 선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루도비코 신부님의 감동적이고 열정적인 설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너무 과하다, 이상하다.’는 피드백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너무나 강했던 루도비코 신부님이었기에 오해도 많이 받고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때로 큰 좌절도 맛보았으며, 그로 인해 건강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성모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을 식지 않았으며, 그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꿋꿋히 걸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설교 활동을 계속해나갔습니다.

 

루도비코 신부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완덕은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며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신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결합되어 우리를 그분께 더욱 완전하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으신 분이므로,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그분의 어머니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우리 영혼을 우리 주님께 바쳐 주님과 동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영혼을 봉헌하면 할수록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영혼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으며, 성모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도 멀어져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 14)

-한상우신부-

제일 먼저
찾아야 할 이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우리 힘만으로
살아온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인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생과
함께 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만들어가는
이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면
매순간 가장 
좋은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청할 수 있는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전하는 것이며

기도는 날마다
돌보아주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게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뜨거운 믿음으로
청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