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5일 수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또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일했으며(1베드 5,13),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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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20)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며, 그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한다고 전한다(제1독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전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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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믿음에는 확증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 믿음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 사람은 없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의 기쁨과 효과를 자신들이 먼저 체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내면의 나약한 인간성을 받아들이면서 회심과 쇄신을 통하여 외적으로도 놀라운 표징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는 표징들이 따를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알려 주십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굳은 믿음을 갖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참된 신앙인들은 이런 표징들을 일으킵니다. 죄와 악행에 빠진 이들을 회개시키고, 악한 영들을 물리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언어를 씁니다. 진실하고 선한 의지를 갖고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이의 손길은 어떠한 해악도 입지 않고, 오히려 악을 이기는 선의 능력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이런 표징들을 보이려면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를 대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적대자 악마에게 대항할 것을 당부합니다. 비록 그들이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악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기에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영광을 선사하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나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베드로 사도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마르코는, 바로 이런 신앙의 빛 속에 살았기에, 복음서를 쓰면서 참된 회개와 복음의 기쁨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말뿐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조재형신부-
지난 성소주일을 준비할 때입니다. 다른 것들은 계획을 세우고, 공문을 보내고, 회의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날씨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성소주일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행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장소가 야외인데 실내로 바꾸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행사가 야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행히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정대로 성소주일 행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일기예보의 정확성이 높아졌습니다. 일기예보는 이제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의 삶과 가까워 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길안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저는 공간 지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도를 보기도 어려웠고, 제대로 길을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처음 가는 길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단순히 길 안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속 방지 카메라의 위치도 알려 줍니다. 길에 과속 방지턱이 있는 것도 알려줍니다. 막히는 길이 있으면 더 빠른 길로 안내를 해 줍니다. 요즘은 택시 운전을 하시는 분들도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것을 봅니다. 앞으로 과학이 더 발전하면 자율 주행차가 등장할 것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꼬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이 새로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하신 산상 설교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징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여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하였고, 그 믿음이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였고, 그 믿음이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 죽음,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단식기도 후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들 역시 ‘죄, 죽음, 악’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 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복음선포의 삶
-복음 선포의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
-이수철신부-
오늘 복음 바로 앞구절(마르16,14)에서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열한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 부활하신 주님은 즉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고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과거에 연연하실 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의 새출발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 영역이 아니라 복음선포 대상자들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바로 믿음은 은총이자 동시에 개인의 결단임을 깨닫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선포하는 일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복음선포의 내용입니다. 바로 우리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절망에서도 희망을, 죽음에서도 생명을, 어둠에서도 빛을 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기위해 끊임없이 떠나는 내적여정의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떠남의 기쁨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참 아름다운 계절, 부활의 봄입니다. 죽은 듯 보였던 나무마다 새롭게 솟아난 신록의 나뭇잎들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바로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연초록 신록입니다. 신록의 기쁨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파스카의 기쁨을 살라고 신록의 아름다운 가득한 자연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노목이 되도 신록의 잎들로 가득하듯 나이에 관계없이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은 신록의 영혼으로 빛납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의 삶 자체가 참 좋은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복음 선포의 자리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입니다. 각자 몸담고 있는 그 고유의 제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자 바로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비상한 복음 선포가 아닌 각자의 일상에서 충실히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파스카의 삶을 통해 만나는 이웃들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복음선포적 삶에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예수님 또한 겸손하고 온유하셨습니다. 진정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은 겸손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모든 걱정은 주님께 내맡기는 겸손입니다. 하느님 역시 겸손한 이들을 친히 돌보십니다. 그러니 겸손한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입니다.
겸손과 더불어 깨어 있는 삶이 복음 선포의 삶에 필수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호심탐탐 우리를 노리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영적전쟁에 최고의 무기가 겸손과 깨어있음입니다. 사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겸손할 때 깨어 있고 깨어 있을 때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어야 복음선포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다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은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지 않을 때 소리없이 침투하는 온갖 유혹들이요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내적 삶입니다. 깨어 있음이 바로 믿음입니다. 깨어있는 믿음이 우리를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합니다. 제 삶이 두 모토도 이와 일치합니다. 집무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둥글게 살자’와 ‘늘 깨어 있어라’는 모토입니다. 전자의 ‘둥글게 살자’의 모토가 상징하는 바 겸손한 삶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십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계신 ‘초월의 주님’이시지만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내재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 자리에서 늘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의 복음선포 자리에도 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파스카의 삶에 충실하고 항구하게 하시고, 복음선포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반영억신부-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복음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화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구체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용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재촉합니다. 저 너머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가십시오. 복음화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단어는 우리의 삶과 표양과 말로 복음화를 실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핵심어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accostati)”, “가까이함”(vicinanza) △“상황에서 시작해라(parti dalla situazione)”는 구체성(concreta)입니다. 이들은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길을 걸어 가셨고, 항상 사람들 가까이 계셨고, 항상 구체적인 상황, 구체성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화는 이 세가지 태도로만 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세가지 태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재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가 바로 마르코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서 선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 참수 당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 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님의 유언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명이 아닌 다른 것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말씀선포’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사명이요 의무임을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에,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참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손수 함께 하시고 확증해주십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고 있는가?
하여 함께 일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복음만’으로, ‘말씀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정녕, 복음을 믿고 말씀을 따르는 일,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복음의 빛, 복음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오늘 저희가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에 깊이 동참하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 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힘을 주시는 당신 안에서
못하는 일이 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저희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이다.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한 마르코(+ 74년경)는 바르나바의 사촌이며,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이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제1차 전교여행을 함께 하였지만, 밤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가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라고 할 정도로 베드로의 사랑 받는 제자였다.
마르코는 60-70년에 복음서를 집필하였고, 그것은 주로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쓰여졌다. 지금은 베니스의 수호자이며, 베니스의 마르코 대성당에 유해가 안장되어있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를 표시할 때 사자로 표현하는 것은 복음의 시작이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이 나타나는데 그 소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사자후 같다고 하여 사자로 표시하고 있다.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신앙은 신경을 통하여 교육된다. 신경은 최대한 요약된 형태로 외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믿어야 할 바를 간략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성숙해지고, 겸손과 사랑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표징은 영적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욱 큰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 다음에게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 15)
-한상우신부-
마르코 복음을
다시 펼쳐 읽습니다.
복음은 살아있는
진실된 만남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통해
몰랐던 예수님이 어느새
사랑하는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을 품지 않고서는
결코 쓰여질 수 없는
복음의 진실된 기록입니다.
마르코 복음 안에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구원의 걸음걸음을
기쁘게 내딛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삶이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처럼 하느님을
만나기위한 여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코의 여행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받아들임의
여행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회개 없이
깨어날 수는
없습니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행간의 삶을 만나는
은총의 축일이 되길
기도 드립니다.
강과 호수를 건너고
굽이굽이 산을 넘었을
마르코의 열정을 다시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먼 길을 돈 만큼
더 깊이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가장 먼저 쓰여졌고
가장 짧고 간결하기에
그 의미는 깊고 깊습니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가
말하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좌절과 희망 사이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가장 먼저
선포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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