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and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요한 10,1-10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할례 받지 않은 신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다고 따지는 할례 받은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환시를 야포 시에서 보았다고 이야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양들의 문이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은 목축업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친근한 ‘목자’와 ‘양 떼’라는 표현을 통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속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과 착한 목자에게 속한 적이 없어 예수님께 응답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목자에게 속한 양 떼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가 인도해 주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듣지 않아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양 떼도 있고, 양 떼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훔치고 죽이려는 이들도 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언제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유다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에 공감하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이단시하며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몰아가던 군중과 유다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위선자이자 거짓 예언자로 몰던 자들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그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이는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을 만나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음식을 먹었다며 논쟁에 휘말렸을 때,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다 민족에 국한된 율법 전통에 매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의 거룩함과 선함, 아름다움을 깨달은 모든 이에게 열린 것임을 환시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는 말씀처럼, 자기 편견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성령 세례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표징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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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이 하는 것은 간단하고 쉬워 보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말과 행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간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우리입니다. 바로 쉽게 할 수 있는 남이 있기 때문에 내가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쉬운 말과 행동을 통해 남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다보니 이 세상을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주님 없이 과연 이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평화와 기쁨의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믿고 따릅니다. 돈이 중요하고, 명예를 좇으면서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때서야 주님께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기 일쑤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양들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와 양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목자가 양들을 따라가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양들을 인도하는 것이 맞을까요? 그리고 양들이 헤매게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양들을 모아들일 수 있어야 할까요?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즉, 내 뜻대로 주님께서 해주셔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주님의 인도에 맞춰서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문으로 인도합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입니다.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는 주님의 소리만을 듣기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과연 지금 내 자신의 모습은 어떤 소리를 듣고 따르고 있을까요? 주님의 소리만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테니스 선수 조코비치는 6개월간의 부상을 딛고 정현 선수와 호주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경기를 치렀습니다. 경기 결과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정현 선수가 이겼지요. 경기 후에 조코비치에게 “부상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어떤 기자가 던지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부상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정현의 승리를 깎아내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조코비치의 인성에 사람들은 박수를 칩니다. 사실 어떤 승부에서 졌을 때에 자신이 진 이유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는 남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방의 승리에 축하만 할 뿐이었지요.
이러한 배려가 우리 삶에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전삼용신부-
한 고등학교의 축구감독인 마이크 슬러터 감독은 2002년 시즌 때 그가
‘평생 단 한 번뿐인 팀’이라고 부르던 축구 부원들을 데리고 주 우승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주전 선수들을 비롯한 16명의 선수들이
미성년자로서 음주한 사실이 적발되어 체포되었습니다.
평소 슬러터 감독은 선수들에게 술이나 담배, 마약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팀에서 제명시킬 것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에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선수들을 모두 제명시켰습니다.
슬러터 감독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결국은 책임의 문제입니다. 선수들은 규칙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단다.”
그날 팀은 63대 0으로 패했습니다.
선수들은 슬러터 감독의 결정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고 나서는 감독을 참 고마워 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러터 감독은 누가 봐도 참 좋은 수장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에서 자신의 명예가 아닌 선수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를 위하는 목소리는 어떤 때는 듣기 싫거나 거북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짜증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내가 믿을 분들인 것입니다.
반대로 달콤한 것부터 먼저 제시하는 사람들은 나를 속이거나 이용하려는
강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솝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창고에 꿀이 흘려져 있었습니다.
이 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와 핥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꿀맛이 어찌나 좋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가 그만 날개며 발이 꿀이 묻게 되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또 CS 루이스의 우화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악한 마녀가 아주 똑똑한 소년 에드먼드를 죽이려고 사용한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터키 사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탕인데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달콤함에 빠져 그것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탕 속에는 사람이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적은 양의 치명적인 독약이 들어있습니다.
터키 사탕은 달콤한 맛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무서운 독약인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 달아납니다.
우리는 목자의 목소리와 낯선 자의 목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처음엔 거칠고 나중엔 부드러운 목소리가 참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처음엔 달고 나중엔 쓴 목소리는 낯선 자의 목소리이고
우리를 파괴시키려는 도둑이며 강도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악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함과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듣기 좋은 소리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송현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쥐의 유언>이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읽어보며
우리도 참 목자가 아닌 강도들의 목소리에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결심합니다.
“내 말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 말 잘 알아듣거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가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도 있고,
쥐덫쯤이야 내 슬기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다.
쥐약의 외형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쥐약의 외형이 어떻거나 간에 쥐약은 쥐약이다. 이 바보들아.”

-조재형신부-
어제는 성소주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주셨고, 신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성소주일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새삼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지난 피정에는 원로사목자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신부님들의 경험과 연륜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전화를 받으면 ‘임 화백입니다.’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셨는지요? 라고 말을 하면 신부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신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백이 아니고요, 화려한 백수입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년을 재미있게 사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할 일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으며,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이웃 본당의 주일 새벽 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신부님께서 외할머니의 십자가 영성을 들려 주셨는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오늘은 외할머니의 영성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부님의 아버지, 할머니의 사위는 6.25 때 총살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뒷산에 숨어 있다가 잠시 마을로 왔는데 이웃 사람이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웃 사람은 자식이 잡혀갔는데 다른 사람을 신고하면 자식을 풀어 준다는 말을 들었고, 마침 할머니의 사위를 신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사위의 주머니에 묵주를 넣어 주었고, 사위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주머니에 묵주가 있는 시신을 찾아서 고향에 묻어 주었습니다.
손자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할머니는 신부님의 아버지인 사위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9월 5일이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이제 사제 서품을 받았으니 고향으로 와서 아버지의 기일 미사를 해 주세요. 신부님은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미사를 드리려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 한 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이 신부님의 아버지를 고발한 사람입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 사람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손과 신부님의 손을 마주 잡게 하시고 십자가를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그러니 지난날의 모든 잘못은 용서하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십자가의 영성은 배우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영성을 삶으로 이미 살고 계셨습니다.
주변을 보면 신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배움이 많지 않았어도 이미 삶으로 십자가의 영성을 보여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로 내려오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고난과 박해와 시련과 아픔이 있겠지만 십자가는 더하기이며 그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 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 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도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고, 같은 전통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거의 모든 일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저도 동료들과 대화를 할 때 듣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해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결정을 통해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선교는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문門이다”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이수철신부-
“나는 문이다”는 주님 말씀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입니다. 세상에 ‘나는 문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문이신 주님이 임하실 때 벽은 문이됩니다. 문이신 주님을 닮아갈 때 점차 우리의 벽은 문이 되어 갑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나는 문이다-벽이 변하여 문"으로 정했습니다.
“I AM the Gate(나는 문이다)”
역시 영어로 쓰면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I AM”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탈출3,14) 모세에서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러니 위 말씀은 “하느님은 문이시다”, 즉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문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떤 문이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10,9-10).
예수님이야 말로 구원의 문, 생명의 문, 희망의 문입니다. 문을 찾는 사람입니다. 어는 건물이나 방에 들어가도 본능적으로 찾는 것이 창문입니다. 전망 좋은 창문 하나만 만나도 구원받는 느낌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벽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사람도 똑 같습니다. 벽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창같은 마음의 문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창같은 문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점차 마음의 문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내면의 벽은 넓은 문으로 변해가는지요. 반대로 점차 문은 작아지고 벽만 넓어지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은 벽이 없는 온통 문뿐인 분이십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문, 진리의 문, 생명의 문입니다. 문이라고 다 문이 아닙니다. 거짓 문도 참 많습니다. 죽음의 문, 멸망의 문, 어둠의 문도 많습니다. 악마는 우리를 이런 죽음의 문으로 유혹합니다. 참으로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문, 자유의 문은 예수님 하나뿐입니다. 주님과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깨달아 갈수록 주님 향해 넓어지는 내적 문입니다.
사람도 벽같은 불통의 답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같은 소통의 시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문같은 사람앞에 있으면 마음도 자유로워지고 편안해 집니다. 어떻게 하면 문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끊임없는 기도가 내면의 벽을 문으로 바꿔줍니다. 기도와 더불어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의 벽은 문으로 변합니다.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죽음의 벽은 생명의 문으로, 어둠의 벽은 빛의 문으로 변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문을 드나들 때 넘치는 생명에 자유로운 삶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 이웃에 생명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꽉 막힌 벽같은 마음이 문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벽같은 마음을 문으로 바꿔주십니다. “내가 야포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기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환시중에 아마포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안에는 이 세상의 네 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다 합니다. 이어 전개되는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우리들에게도 큰 깨달음을 줍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다는 기도중에 일어난 구원의 환시입니다. 베드로의 벽같은 불통의 사고가 완전 소통의 문같은 사고로 바뀌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통해 자유로워진 베드로입니다. 새삼 이런 깨달음도 주님의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문이 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마지막 대목은 베드로와 함께 했던 이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벽이 변하며 문이 된 그들의 사고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새삼 하느님 찬양과 감사가 우리 내면의 벽을 문으로 바꿔줌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확장되는 내면의 문입니까? 혹은 벽입니까?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내면의 닫힌 문을, 닫힌 길을 열어줍니다. 벽이 변하여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이, 길이 되게 합니다. 날로 하느님 향해 넓어지는 내적 창문을 지닐 때 진정한 영적성장이요, 자유롭고 행복한 성공적 정주 관상 생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우리 내면의 벽을 당신 활짝 열린 생명의 문, 사랑의 문, 구원의 문, 희망의 문으로 바꿔주십니다.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42,3ㄱㄴ;43,3). 아멘.

경청하고 식별한 다음 행동하라
-반영억신부-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으로 가서 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행동은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식별을 거치면 근심, 걱정, 슬픔과 좌절, 실망, 불안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헛된 목소리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편,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말합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는 복음의 비유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란 이 “문”은 ‘들어오는 문’이요 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주님!
당신께서는
가슴을 열고
팔을 벌리시고 부르십니다.
거처할 집을 마련하시고
어디서든 올 수 있도록
십자로 문을 열고 손짓하십니다.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조욱현신부-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성경은 튼튼한 문처럼 이단에 대항해 길을 막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헤매지 않도록 한다. 그러기에 목자라고 하면서 성경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이며, 도둑과 같은 자이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시니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줌으로써 인도해 준다. 도둑이나 강도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는 합법적인 문을 이용하지도 않고, 턱없이 문과 교사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준다.”(3절) 여기서 문지기는 우리 주님 자신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그렇다면 ‘문’과 ‘문지기’로 표현할 수 있다. 문은 들어가는 길이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 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하다. 보통 목자들은 양들을 뒤에서 따라간다. 그러나 자신이 그들 모두를 진리로 인도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양들 앞에서 가는 것이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양들은 그를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5절)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양들의 문이시라고 하신다. 진리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중요한 통로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계명과 가르침을 따르는데 힘써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표현하셨다. 주님을 믿지 않고는, 그분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에로 나아가지 않고는,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갖는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진리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이 없다면 잘못된 신앙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8절)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라는 말을 쓰신 것은 나쁜 목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아니면 기껏해야 ‘삯꾼’들이다. 이들은 양가죽을 쓴 이리들이다. 이들은 양들을 미혹시키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믿음이나 삶속에서 복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현세적 이익을 취하려고만 한다. 그들은 속임수와 폭력으로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양들을 잡으려 한다. 이런 자는 도둑이며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로마 2,21)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들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된다. 교회를 이끌어갈 훌륭한 목자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면서 기도하자.

알아듣고 따름
-김용태신부-
한밤중 다급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수화기 저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봉성체 가방을 들고 병실로 달려갑니다. 이미 의식이 없어진 지 오래고 끊어질 듯 숨만 가쁘게 쉬고 있는 할머니의 머리맡에 서서 임종하는 이를 위한 마지막 기도를 봉헌합니다. 그러고 나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전화가 걸려옵니다. 제가 기도를 끝내고 병실 문을 나선 지 얼마 안 돼서 운명하셨답니다. ‘아, 간절하게 기다리셨구나! 그리고 알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절명의 순간을 버티고 버티며 사제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사제의 마지막 기도를 함께 봉헌한 후에 다 이루었다는 듯이 그렇게 가신 것입니다. 한평생을 신앙 안에서 오롯하게 열심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전화로 장례일정을 상의한 후 통화를 마치고 나서 문득 오늘 복음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신기하다는 생각보다는 고맙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그 주님의 목소리를 끝까지 알아듣고 따라가신 그 할머니의 모습에 뿌듯했습니다. 나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 10, 7)
-한상우신부-
문(門)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모든 것은
문에서 시작됩니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갈 수
없듯이 생명의 문은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문을 통과 해야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들여보내기 위해
친히 구원의 문이
되셨습니다.
모든 문들을
아우르는 문이
되셨습니다.
문은 열고
들어가야
문이 됩니다.
문은 문으로 이어지고
길은 길로 이어지고
발걸음은 발걸음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문은
집착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부여잡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생명의 문을
되찾는 기쁨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활짝 열려 있는
생명의 문이
되기 위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양들의 문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생명의 문은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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