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8년 4월 24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8. 4. 23. 18:31

2018 4 24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2-30)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르나바와 사울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며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행적을 둘러싸고 유다인들의 갑론을박이 심해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답답한 마음에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라면 그분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기대어 권력에 빠져 있는 자신들의 임금에 대항해서 다윗 왕조의 옛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말씀으로, 메시아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 수난하고 부활할 것임을 예고하셨음에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메시아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구원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기에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그분을 따라나서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양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지키시며,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며,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를 빌미로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몰아가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당신을 끝까지 따른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약속대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에게 선포되었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성령의 빛을 받아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유다인들처럼 내게 필요한 능력과 권력을 지닌 메시아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나이가 더 많지만, 이 부부는 반대로 자매님이 형제님보다 15살이 더 많았습니다. 이 자매님은 재혼한 것인데, 상처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지금의 남편의 나이 차이는 10살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딸과 남편이 부부 같아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부부는 늘 손을 꼭 잡고 다니면서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과시하듯 다녔습니다.

이 둘이 결혼하기까지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매님도 이 반대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지요. 매일같이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 둘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끼리 사귀여야지. 이게 원칙이야.”

이 말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젊은 남자 친구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 같고,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사람의 앞길을 막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요. 이런 마음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자매님께 형제님은 이렇게 말해주더랍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젊은 사람끼리 사귀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귀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말에 둘은 결혼을 할 수가 있었고, 지금도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사람들에게 표시하면서 다닌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사랑이 가장 큰 원칙인데, 왜 다른 것이 원칙이라고 말하면서 사는 것일까요? 주님을 따르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직접 당신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만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보지 않고 다른 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라면서 예수님께 따지듯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삶의 가장 크고 중요한 원칙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는 기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보여 지는 기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역시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변함없이 중요한 단 하나는 바로 사람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다(파비안 직스투스 쾨르너).



불안에서 벗어나기

알랭 드 보통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 잠깐 멈춰 서서 그 사실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시련의 파도를 넘다 보면 아름다운 구름, 꽃 한 송이처럼 일상의 사소함을 생각하게 된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굴레 속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불안이라는 것보다는 만족과 작은 기쁨 안에서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구원의 원리: 그분을 내 안에 살게 하면 내가 그분안에 살게 된다

 -전삼용신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찾는 가톨릭 성지는 멕시코의 과달루페라고 합니다.

스페인은 멕시코 정복 당시 원주민들을 많이도 학살하였습니다.

멕시코시티 대성당 앞마당에는 그 성당을 짓도록 일을 시키고 나서 그들을 살해하여 매장한

원주민들의 유골이 아직도 묻혀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스페인과 함께 들어온 종교, 즉 가톨릭을 믿으려 했겠습니까?

10년이 지나도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시고 나서는

10년 동안 700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 당신 발현할 당시의 모습을 새겨 넣어 주셨습니다.

그 망토에 그려진 성모님의 모습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닙니다.

그 색감을 내는 물감의 재료도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적외선으로 아무리 찾아보아도 스케치를 하거나 붓질을 한 증거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감으로 그렸다면 그렇게 선명한 색채를 500년이나 유지할 수 없고,

또한 선인장 섬유로 만든 망토도 15년이면 썩어버리지만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건재합니다.

또한 그림에도 수많은 원주민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고 그 여인이 자신들이 믿어오던 ‘달의 여신’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같은 그림이 태양을 등지고 달을 밟고 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

즉 성모님으로 보입니다.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엠(IBM)회사에 근무했던 호세 아스테 돈스만 박사는

1979년 원래의 성화를 고화질 영상으로 스캐닝 해 냈고,

그 디지털 영성에서 잡티를 제거하자 성모님의 양쪽 눈에 많은 사람들의 형상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홍채와 동공에서 최소 13명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안 디에고가 성모님께서 따 주신 장미를 망토에 싸고 와서

주교님 앞에서 펼쳐 보여줄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진 얼굴이 바로 후안 디에고의 얼굴입니다.

후안 디에고는 자신이 본 성모님을 증거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모님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성모님이

그의 망토 안으로 들어와 새겨진 것입니다.

 

우리도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집이 되어주는 그 사람에게 절대 해를 입히시거나

다른 이들이 해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들이 해를 입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며 그분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도 후안 디에고의 가슴 안에 당신이 들어가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당신을 받아주시는 후안 디에고를 당신 눈에 넣으신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인 디에고를

어찌 당신 눈처럼 지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는 구원의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간은 예루살렘의 성전 봉헌 축제일이였습니다.

(제가 틀리지 않다면)

이 축제는 마카베오 가문이 그리스인들의 예식으로 황폐화된 성전을 재건하여

제단을 다시 쌓고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성전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 성전은 바로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마련하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성전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라고 자신들의 불신을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말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분 핑계로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양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도 그래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십니다.

당신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목자의 힘 안에 놓이게 되어 안전하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위대하시어

당신을 받아들인 이들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노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신이 구원받을 배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분을 먼저 받아들여야 그분 보호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성전에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동시에

하느님의 성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리고라는 동네엔 정탐꾼 여호수아(예수와 이름이 같음)와 동료를 숨겨준

라합이라는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해준 덕에 이스라엘이 예리고를 칠 때 라합과 그의 일가족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라합이 약속대로 창문 밖으로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붉은 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흘려야 하는 나의 ‘피’의 상징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그를 또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받아들여 주셨기에 당신 아들을 잉태한 성모님을

또한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주시고

헤로데가 죽이려 할 때도 피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시기에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성모님을 지켜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바쳐진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만 하느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저는 사제서품을 받고 27년간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횟수를 계산하면 만 번 정도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미사통상문의 내용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피정에서 미사통상문에 나타난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미사통상문은 교회의 신앙과 전통이 집약된 기도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사 중에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미사를 봉헌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은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중동에서 일하던 신자들은 미사를 봉헌하고 싶어서 신부님들을 찾았다고 합니다. 멀리 유럽에 있는 신부님을 초대해서 미사를 드리고는 모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고인이 되신 최인호 씨도 투병 중에 본당 신부님께 성체가 고픕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하고, 교우들이 미사의 은혜를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강의 중에 신부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미사가 참된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이 성사가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에 참석하는 교우들이 서로 시기하고, 비방하고, 가난한 이를 차별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미사에 참례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의 삶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얻은 은총이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의 선순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 그리고 그분의 표징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께서 거룩한 분이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분은 권위가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때,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나누고 연대한다면 분명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주 예수님

-늘 보고 듣고 배웁시다-

-이수철신부-


어제 저녁식사시 피델리스 수사의 영명축일 축하식이 있었고 식사후에는 몇 형제들이 얼마전 종부성사를 줬던 정빈첸시오 형제의 영안실에 연도를 바치러 외출했습니다. 내일 아침 6시 장례미사에 참석할 수 없기에 부득이 밤에 연도차 방문한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적으로 교차되는 현실입니다. 새삼 평소 깨어 주님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살아감이 유비무환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방문했던 어느 부부에게 고백성사후 ‘말씀처방전’과 더불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시를 출력하여 드리고 보속으로 낭독하도록 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시의 마지막 연은 믿는 이들 누구나 좌우명처럼 삼아도 좋은 연입니다. 이렇게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이 답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아 보고 듣고 배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결정적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보고 배웁니다.”

제가 피정지도나 면담성사시 늘 강조하는 말마디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입니다. 백번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기도도,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보고 배우니 부모나 스승의 모범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고 배울 스승없다 한탄할 것도 없습니다. 스승은 시공을 초월하여 찾으면 언제든 발견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아오스팅 성인과 보나벤투라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면서 예수님을 닮기위해 노력하신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니 우리는 늘 함께 계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아 직접 배우면 됩니다.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교회 역사상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직접 파스카의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아 배웠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고백한 임종어도 감동입니다.


“아아! 하느님!---당신을 사랑합니다!---하느님!---나는---당신을---사랑합니다!!---”


성녀의 얼굴은 성한 때처럼 백합같았으며, 그 눈은 온갖 희망을 넘어서 지복을 표시하듯 빛나고, 줄곧 하늘을 지켜보고 있었다 합니다. 흡사 순교직전 빛나던 성 스테파노의 얼굴을 연상케 합니다. 두분 다 예수님을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이요 도반으로 삼아 사셨던 성인이셨습니다. 


사도행전의 바르나바 역시 똑같습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읽을 때마다 고무적이고 기분이 좋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된 바르나바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11,23-24).


흡사 스테파노를 연상케 하는 바르나바의 모습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아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바르나바는 예수님께 배우고 수많은 사람은 바르나바에게 보고 배워 주님께 인도됩니다. 이제 주님께 인도된 이들도 직접적으로 주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인도되어 이 거룩한 주님의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직접 주 예수님께 배웁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0,27-28)


주님 향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이 우선입니다. 사랑할 때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고 아무도 그들을 주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사랑-앎-따름-영원한 생명-영원히 멸망치 않음-아무도 주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함’이 하나로 직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주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대한 확고한 보장 말씀입니다. 이어 우리의 구원 확실성을 못박듯이 다시 강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29-30)


도대체 이런 예수님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은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스승 예수님께 선물로 주신 귀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에 역시 아버지의 손에서 아무도 우리를 뺏앗아 갈 수 없다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 에수님 사이에서 영원히 두분의 보호와 인도하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예수님의 장엄한 선언적 고백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 역시 우리의 영원한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신 당신과 일치를 이루어 주십니다. 영육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일거에 해결되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반영억신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하고 유다인을 향해 하셔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쟁이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먼저 믿어라. 그리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진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보려는 고집이 문제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순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자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됩니다. 완고한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일러 주더냐?"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따랐구나!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무도 그들을(양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들려옵니다. 제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흘러 다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 들려도 듣지를 못하는 것은 우리의 귀가 멀어진 까닭입니다. 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주님의 목소리인가? 대체,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때 벌어진 논쟁을 들려줍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는 표현은 그들 유다인들의 마음이 춥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주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하고 예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게 합니다. 또한 깨달아 알아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달은 바를 믿음으로 따르게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주님의 양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는,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 목소리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입니다.

여기서, 듣다라는 말의 뜻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더 깊이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을 말함이요, 내면적인 것이고,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또한 알다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옆에 혹은 근처에 있다는 표현합니다. 옆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깊은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진정한 관계야말로 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옵니다.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그렇습니다. ‘당신의 손은 당신의 권능입니다. 당신의 손에서 아무도 그분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아무도 양들을 빼앗아갈 수 없음을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서 밝히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멘.


주님!

오늘도 당신은 제 온 몸에

당신 손 떼를 묻히시느라 여념이 없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제 손을 꽉 붙드시고,

놓치지 않으시려 손깍지를 꼭 끼고 계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껴주시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동행하시며 어깨동무를 하시고

생명의 빵을 건네시며

저를 살려 먹이십니다.

제게 당신 생명,

당신 사랑의 지문이 새겨진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오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조욱현신부-


성전 봉헌 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 봉헌을 기념하는 축제를 말하는데 마카베오가 안티오쿠스에 의해 황폐해졌는데 그 군대를 쳐 이겼고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이 날을 기렸다. 이 축제가 시작되면 모든 사람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던 것이다. 이 축제는 온 백성이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였다.

 

유다인들은 그분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24)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자극하여 빌미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이나 행적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라고 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 우리가 참으로 양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다. 이렇게 아시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들도 그분을 따라간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이 생명이심을 보여 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그분의 몸에 참여할 때, 그분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라고 하셨으며, 이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아드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분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분으로 낳으심과 동시에 아들은 당신과 동등한 분으로 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하신것이다. 이것이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바로 가장 영예로운 차원, 즉 하느님으로서 하나라는 말씀이다. 이 하나라는 표현은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나와 아버지는두 위격이기 때문에 ‘~이다라는 동사는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을 사용하셨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의견과 사랑과 호의에서 일치하듯이, 의견의 일치, 판단의 동일성, 사랑 깊은 관계 자체를 나타낸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노력하자.


염철호신부-


빛의 축제라고도 잘 알려진 하누카, 곧 성전 봉헌 축제는 마카베오 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축제는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에게서 독립을 쟁취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2마카 10,1-8) 요한복음 10장 22절에서 이야기하듯이 하누카 축제는 겨울, 특히 성탄절을 전후해서 열리는데, 아홉 개의 촛대 가지(하누카 메노라) 중 가운데 가지를 제외한 여덟 개의 가지에 하나하나 불을 밝히며 팔일 동안 지냅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카베오가 성전을 탈환하고 성전 정화를 한 뒤 성전 등잔에 불을 밝히려 했으나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름은 하루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으로 무려 팔일 동안 기적적으로 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를 기념하여 아홉 개 가지로 된 촛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누카 축제를 지내는 동안 예수님은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께, 자신들의 속을 그만 태우고 정말 메시아라면 확실히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단언하십니다.
유다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 모독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집어 던져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나인 분이시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진정 신성 모독,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정화 축일에 유다인들은 오히려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곧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 말씀 따라 걷기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양승국신부-

 

지난 4월 13일 저희 살레시오회 관구관 대성당에서는 두 형제의 사제서품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영성체후 기도 끝에 진행된 간단한 축하의 자리에서 제게 한 마디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오랜 세월의 양성 기간 끝에 거룩한 사제로 거듭난 두 형제의 얼굴을 바라보니, 참으로 기쁘고 가슴벅찼습니다. 동시에 다양한 느낌과 감정들이 제 머릿속에서 교차되었습니다

  

고마움, 행복감, 대견스러움, 기대감, 등등. 그러나 반대로 이제 사목자로서 세상의 거친 들판 앞에서게 될 형제들을 생각하니, 걱정, 우려, 미안함, 연민의 정도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새 사제를 향한 저희 말투가 자신도 모르게 날이 서 있었습니다.

  

“부디 사제 서품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품이 승진하는 것, 벼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꼭 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회로 치면 이제 여러분은 사원 가운데서도 신입사원, 신입사원 가운데서도 수습사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제와 수도자로서 반드시 갖춰야될 가장 기본적인 덕인 겸손의 덕을 늘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겸손이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있을 자리는 높은 자리, 고상한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낮은 밑바닥이요, 세상의 끝이라는 것도 잊지마십시오.

  

이제 사제가 되었으니, 그간 지긋지긋하게 해온 청소나 빨래, 설거지와는 작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파릇파릇한 수습사원이니만큼, 더 자주 운동장에 나가고, 더 자주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과 동고동락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뒷짐지고 운동장 밖에서 어슬렁거리지 마시고, 지금보다 더 깊숙히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제일 열심히 뛰시기 바랍니다.

  

수련 시기 때, 우리 모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씀들을 회상해보시기지 바랍니다.

  

‘바도이오 파초이오!’(Vado Io, Faccio Io) 힘든 사목지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가겠다고 외치기 바랍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제일 먼저 손을 들기 바랍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인 베드로 1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겸손의 덕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베드로 1서 5장 5절~6절)

  

베드로 사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살던 시절, 자신에게 있어 늘 부족했던 겸손의 덕이 늘 가슴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세번에 걸친 수제자 배반 사건 이후, 철저하게도 무너져 내린 이후, 눈가가 짓물 정도로 피눈물을 흘린 이후, 그는 비로서 참된 겸손의 덕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그토록 처절한 체험, 절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외치시니, 그 가르침이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 30)

-한상우신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게 됩니다.

생명의 여정 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허물어지면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무의미한 복음이 
됩니다.

소중한 복음은
진실된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진실한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본질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
봉헌의 핵심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을 빼앗아 가거나
방해할 수 없습니다.

끝내 이루어질
구원의 기쁨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을 충실히
보여주신 예수님이 바로
길이요 진리이며 우리의
생명임을 믿습니다.

소중한 건
믿음입니다.

믿음의 깨달음이
삶의 기쁨으로
활짝 피어오르길
기도드립니다.

충만한 아버지 
하느님 사랑은
하나되는 일치의
기쁨으로 우리모두를
끌어안습니다.

일치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기쁜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헤아리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1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